은지의 말투가 너무 담담해서 마치 밥을 먹을 건지 물을 마실 건지를 물어보듯 하나도 부끄러움이 없었다.준호는 대답하지 않고 은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은지가 일어나려고 하는데 준호가 그녀의 어깨를 힘껏 누르고 얼굴을 세게 물었다.은지는 준호의 과격한 표현을 피하려고 했지만, 준호가 아직 어리고 자신에게 복수하려는 마음을 갖고 있기에 쉽게 놔주지 않을 거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거대한 소리와 함께 은지는 화장대의 가장자리에 부딪혔다. 그녀는 너무 아파서 눈을 질끈 감았다.화장대 위에 놓였던 화장품들이 와르르 쏟아졌지만 그걸 상관할 겨를이 없었다.준호가 은지의 옷을 벗기려고 하는데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사모님, 뭐가 깨진 건가요? 제가 처리할까요?”방안에서 ‘사모님’이라는 말을 들은 준호는 눈이 빨개져 은지를 대답하지 못하게 했다. 준호는 은지를 누른 상태로 허리띠를 풀었다.준호는 도우미를 당장 들여보내 곽씨 집안 전체가 이 방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알게 만들고 싶었다.은지가 대답하지 않자, 도우미는 은지가 무슨 일이라도 난 줄 알았다. 은지가 미래의 곽씨 집안 사모님이 될 사람인데, 정말 무슨 일이라도 나면 큰일이 난 것이다.“사모님?”도우미가 집사를 불러 방의 열쇠를 갖고 오려고 하던 참에 방에서 은지의 목소리가 들렸다.“괜찮아, 물건이 떨어진 거야. 너 얼른 가서 자.”짧은 한마디였지만 은지는 끊어서 말했다. 착각 일수도 있지만 도우미는 평소의 은지와 목소리도 다르고 말투도 다른 것 같았다. 원래는 담담하게 얘기했는데, 아까는 숨이 헐떡이면서 얘기했다.도우미는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어 다시 물었다.“뭐가 떨어진 건가요? 제가 수습할까요?”한참 동안 기다려서야 은지의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괜찮아.”은지가 이렇게 말하자, 도우미도 할 수 없이 돌아가려고 했다. 그래도 걱정이 돼서 이렇게 말했다.“혹시 파편 같은 거 있을 수도 있으니까 조심하세요. 내일 제가 와서 청소할게요.”그러나 이번에는 은지가 대답하지 않았다. 도
준호는 자신을 돋구는 은지를 보고 그녀를 죽이고 싶었다.법을 어기면 안 되기에 준호는 가장 원초적인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절반쯤 닫힌 커튼 뒤로 둘은 신체적인 교류를 진행했다.준호는 은지를 죽이지 않고 다른 방식으로 힘을 써서 은지를 반쯤 죽여 놓았다.준호가 간 뒤에 은지는 샤워할 힘도 없었다.해가 거의 뜰 때, 은지는 힘겹게 벽을 잡고 욕실로 들어갔다.샤워할 때, 은지는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했다.‘힘을 조절하지 않는 것도 모자라, 아무 조치도 하지 않다니.’은지가 샤워를 마치고 흐트러진 방을 청소하다가 침대 위의 흔적을 발견했다.새벽에 곽씨네 도우미들이 일을 시작했을 때, 은지는 위가 불편해서 우유 한 컵 가져오라고 했었다.어제 도우미가 은지 방에서 난 소리를 기억하고 있었기에 일찍 은지의 방에 왔다. 문이 열려 있는 것을 본 도우미는 은지를 불렀다.“사모님?”은지는 메이크업을 하고 있었는데, 도우미가 온 것을 보고 침대를 가리키며 말했다.“나 아침에 받은 우유 쏟아버렸어.”“알겠어요. 제가 시트 바꿀게요.”정리를 마치고 도우미는 그 시트를 들고 생각에 잠겼다.‘우유를 쏟았는데, 왜 이렇게 주름이 갔지?’...곽씨 집안에서 아침은 항상 8시에 먹었다. 곽도원은 은지가 떠온 죽을 받았다. 이때 준호가 밖에서 들어왔다.곽도원은 준호가 신옥영에 대해 말하려는 줄 알고 표정이 어두워졌다.그러나 준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바로 자리에 앉아 밥을 먹기 시작했다.사과는 하지 않았지만, 고개를 숙인 거나 다름이 없었다.곽도원은 아들이 준호 하나뿐이다. 신옥영의 엄격한 교육하에 자랐기에 꽤 잘 자라줘 걱정할 일은 없었다.준호가 화를 내지 않자, 곽도원도 더 이상 꾸짖지 않고 은지에게 말했다.“오늘 아침 죽 괜찮네. 준호에게도 한 그릇 떠 줘.”곽도원이 은지와 결혼하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에 준호가 은지를 너무 막 대하지 않았으면 했다. 곽도원은 이런 일들을 신경 쓸 정력이 없어 은지가 준호에게 잘 보이길 바랐다.은지는 천천히
은지가 다가가려고 하는데, 준호가 은지의 손목을 잡고 욕조 쪽으로 밀어붙였다. 은지는 준호와 욕조 사이에 껴서 꼼짝할 수 없었다. 준호는 은지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너 일부러 그런 거지?”“아니야, 너무 뜨거워서 잘 못 잡았어.”‘뜨거워서 못 쥐고 있겠으면 땅에 버려야지, 내 팔등에 쏟으면 어떡하자는 거야? 그걸 누가 믿어!’“너 진짜...! 아, 아파.”은지가 준호가 덴 곳을 잡아 준호가 비명을 지르자 그제야 손을 뗐다.“미안.”은지는 약을 상처에 발라주었다. 준호의 팔은 이미 물집이 생긴 상태였고 대면적으로 빨개져 있었다.이때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아주 가까웠고 은지의 체향이 감돌았다.염옥란은 그 당시 해원시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였는데, 은지가 염옥란과 닮았기에 아주 아름다웠다.생김새뿐만 아니라 은지가 풍기는 아우라가 사람의 이목을 끄는 힘이 있었다.지금 은지가 몸을 숙여서 준호를 위해 약을 발라주고 있는데, 준호는 마음이 녹는 것 같았다.준호는 차갑게 웃었다.“너 이렇게 병 주고 약 주면서 우리 아버지 꼬신 거야?”은지는 약을 다 바르고 고개를 들어 준호를 바라보았다.“너희 아버지 너처럼 이렇게 유치하지 않아, 병 안 줘도 돼.”남자들은 다른 사람이 자신을 유치하다고 하는 것을 가장 두려워한다. 특히 준호처럼 남자다운 남자는 더 하다.준호는 화가 나 은지를 등 뒤쪽의 거울에 눌러버렸다.“고은지, 너 언제까지 이렇게 나올 거야?”은지의 상체가 뒤로 기울며 하체가 준호와 더욱 가까워졌다. 그녀는 가볍게 웃었다.“도련님은? 네 아버지 여자도 탐내는 너는?”은지가 비웃자, 준호는 은지가 손에 들고 있던 약을 쳐버리고 강제로 하려고 했다.요란한 소리에 준호와 은지가 또 싸움이 난 줄 알고 집사는 걱정이 되어 발을 동동 굴렀다....아침에 서로 기분이 좋지 않게 식사를 마쳤고 두 사람이 화장실에서 싸웠다는 말을 들은 곽도원은 은지를 서재로 불렀다.은지가 서재에 갔을 때, 곽도원은 서류를 보고 있었는데, 고개도 들지
망가진 브로치의 변두리를 보면서 곽도원의 눈에 있던 빛이 사라졌다.“중요하지 않아, 다 처벌했으니까.”곽도원의 시선이 은지의 얼굴에 머물렀을 때, 차갑던 눈빛이 사라졌다. 그는 은지의 어깨를 토닥였다.“월말에 집안 사람들을 다 모아서 결혼식을 올릴 거야. 그러니까 잘 준비해.”곽도원은 자신이 재혼한다는 소식을 막 퍼트리지 않았다. 그저 앞으로 집안 사람들이 은지를 다 알 수 있도록 가까운 사람들을 불러 식사했다.은지는 곽도원의 말에 신경 쓰지 않고 고개를 숙여 브로치의 흠집을 바라보았다.“알겠어요.”...결혼식 날짜가 잡히고 곽씨 집안 사람들은 이 결혼식 준비 때문에 바삐 돌아쳤다.준호는 팔이 덴 뒤로 은지를 찾아가지 않았고 2주 뒤 신옥영을 찾으러 가려고 문을 나서는데 도우미가 속닥이는 말을 들었다.“그거 들었어? 오늘 국장님께서 아현원에서 주무신대.”“그러게, 다음 주면, 결혼식을 하는데, 오늘 처음으로 은지 씨 쪽에 가서 주무시네. 집사님께서 은지 씨 방 다시 꾸미라고 하셨다던데.”“은지 씨 저렇게 아름다우신데, 국장님께서 앞으로 엄청나게 아끼시겠어.”말하고 있는데, 뒤에 준호가 서 있는 것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도련님...!”준호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그게 진짜야?”도우미들은 준호의 화를 돋울까 봐 사실대로 말할 수 없었다.“저희 막 말한 거예요.”준호는 도우미들의 말을 듣지 않고 정원으로 돌아가 나이가 있는 도우미 진성에게 물었다.“누가 날 찾은 적 있어?”진성은 귀가 안 좋아 큰소리로 되물었다.“네?”“누가 날 찾은 적 있냐고?”“없어요.”이 말을 들은 준호는 화가 나, 이가 간질거렸다.은지는 준호에게 도움을 청한 적도 없이 곽도원과 함께하는 것을 받아들인 것이다.‘아니지, 아버지 챙기는 게 고은지가 주요하게 할 일이지. 다음 주면 정말 우리 집안 사람이 되는 건데.’은지는 부끄러움이 전혀 없는 여자다.“네? 도련님, 뭐라고요?”진성이 또다시 묻자, 준호는 짜증이 났다.“나 아무 말도 안
어두운 거실, 일렁거리는 캔들 불빛이 한데 뒤섞여 있는 남녀를 희미하게 비추고 캔들의 아로마 향과 남녀의 밤꽃 냄새가 한데 섞여 야릇한 분위기를 이루고 있다.남자의 큰 덩치에 가려진 여자의 얼굴에는 그림자가 드리웠고 남자가 몸을 파고들 때 잇새로 나지막한 신음이 흘러나왔다.그러던 그때, 남자는 순간 멈칫했다. “처음이야?”그리고 그 나지막한 한 마디는 권하윤을 아픔 속에서 끄집어냈다. 하지만 곧이어 무한한 두려움이 아픔을 대신했다. 익숙한 듯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그녀를 끝없는 나락으로 끌어내렸다.자기를 범하고 있는 남자가 약혼한 남자친구가 아니라 그의 형이었다. 사람들마다 기피하며 두려워하는 존재, 민도준.거대한 공포가 그녀를 순간 잠식했다. 몸이 굳어진 채 알코올에 마비된 머리로 이 일의 시작을 더듬어봤다.아침에 분명 민승현과 약혼식을 올리고 지금쯤 첫날밤을 맞이해야 했는데…….분위기를 잡고 있던 그때, 민승현이 사촌 여동생의 전화를 받고 나가버렸다.심지어 그를 붙잡으려는 그녀에게 그렇게 굶주렸냐며 모욕을 하고 말이다.혼자 남은 방에서 와인 한 병을 때려 마시고 정신이 혼미해질 즈음 민승현이 다시 돌아온 기억이 난다.하지만 나가기 전과는 달리 유독 끈질기고 집요했다. 바로 소파에서 그녀를 밀쳐 눕히더니 이 행위가 시작됐다.또렷한 기억이 권하윤의 뇌를 비집고 들어왔고 점차 돌아오는 이성에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당, 당신…….”여자를 두 팔로 가두고 있던 남자가 입꼬리를 씩 올렸다. 깊은 아이홀, 날카로운 눈매, 높은 코, 그리고 그 아래에 있는 얇은 입술. 누가 봐도 신의 완벽한 작품이다. 하지만 입술이 살짝 열리더니 그 사이로 약간 장난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왜 그래? 예비 제수씨?”호칭을 듣는 순간 권하윤의 피가 거꾸로 솟았다. 있는 힘껏 남자를 밀치고 맨발로 침대에서 도망치더니 남자를 가리키며 입술을 떨었다.“당, 당신이 왜…….”민도준은 느긋하게 일어서더니 담배 하나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깊게 들이마셨다 내
아름다운 별장 앞. 권하윤은 그 자리에서 맴돌며 앞으로 전진하지 못하고 있다. 마치 발이 바닥에 붙은 것처럼 움직여지지 않았다.그때 마침 안으로 들어가고 있던 민도준이 멈칫하더니 고개를 돌렸다. 희미한 등불이 그의 어개에 흘러내리는 순간 그가 마치 어둠 속 유일한 따스함이라는 느낌마저 들었다.“무서워?”여기까지 오는 사이 권하윤은 이미 말짱한 정신으로 돌아왔고 방금 전 목까지 뚫고 올라왔던 충동이 이미 사라졌다.권씨 가문에서는 그녀가 민승현과의 관계가 틀어지기를 원하지 않고 있다. 고리타분한 조선시대 마인드 때문인지 남편이 다른 여자를 데려와도 웃으며 맞이해야 한다나 뭐라나.게다가 민씨 가문, 권씨 가문 외에도 그녀에게 채워진 수많은 족쇄를 생각하니 권하윤은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오늘 신세 많이 졌습니다. 이만하죠.”어렵사리 꺼낸 말에 민도준은 나지막하게 웃었다. 그 웃음소리는 권하윤의 귀를 뚫고 들어와 가슴을 쿡쿡 찔렀다.거절하는 말을 듣고도 민도준은 바로 떠나지 않고 담배 하나를 꺼내 입에 물었다. 곧바로 빨간 담뱃불이 어둠 속에서 빛났다.“다들 권씨 집안 여자들이 천성적으로 남자 뒷바라지를 잘한다던데 정말 그런가 보네.”담배를 문 입이 천천히 호를 그렸다. 마치 상대방이 상처를 받는 말든 상관하지 않는다는 듯 느긋한 태도다.“설마 민승현 그 자식이 당신 앞에서 다른 여자를 안아도 콘돔을 건네줄 건가?”제대로 자극받은 권하윤은 입을 꾹 다문 채 한 치의 고민도 없이 별장으로 향했다.그 뒤에 있던 민도준은 씩 웃더니 담배를 버리고 뒤따랐다.문 앞에서 자기를 보고 놀라는 경비원을 보고 뭔 말을 할지 몰라 고민하고 있을 그때, 매캐한 담배연기와 뒤섞인 남자의 향기가 뒤에서 권하윤을 감쌌다.“문 열어.”민도준을 본 경비원은 아무 말도 없이 문을 열었다.그제야 민도준의 지위가 실감이 났다. 흐릿하게나마 민승현이 경고했던 말이 떠올랐다. 민씨 가문에서 그의 할아버지를 제외하고 가장 조심해야 할 사람이 민도준이라고 했던 말이.‘굳이
권하윤은 무의식적으로 창밖을 살폈다.밖은 어두컴컴한 데다 폭우까지 쏟아져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민승현이 날 따라올 리가 없지. 도둑이 제발 저린다더니 내가 그 꼴이네.’하지만 권하윤이 뭐라 대답하려던 찰나 옆에서 손이 불쑥 나타나 핸드폰 종료 버튼을 눌렀다.눈살을 찌푸리며 무슨 짓이냐고 묻기도 전에 민도준이 권하윤의 턱을 잡고 자기 쪽으로 돌리더니 입안에 머금고 있던 담배연기를 그녀의 입에 불어넣었다.“콜록콜록…….”그리고 권하윤의 창백하던 얼굴이 기침 때문에 발갛게 되고 나서야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이제야 볼만하군.’하지만 그때. 민승현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민승현:?][네가 감히 내 전화를 먼저 끊어? 너 어디야?][20분 줄 테니까 당장 내 앞에 나타나. 안 그러면 네 집식구한테 전화해서 너 데려가라고 할 테니까!]‘민승현이 집에 도착했나? 지금껏 나한텐 관심도 없었으면서 화는 왜 낸대?’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에 권하윤은 아직도 목구멍을 자극하는 매캐한 냄새도 신경 쓸 새 없이 문 손잡이를 잡았다.하지만 문을 열려는 순간 민도준에게 잡히고 말았다.“어디 가려고?”“저 돌아가야 해요.”권하윤은 화가 났지만 마음을 한껏 가라앉히고 말했다. 적어도 지금은 민도준과 사이가 틀어져서는 안 됐기 때문이다.하지만 민도준의 시선이 집요하게 그녀를 위아래로 훑었다.“그 꼴로 가려고? 나랑 잤다는 거 티 내고 싶은 거야?”남자의 말에 고개를 숙여 봤더니 옷은 이미 쭈글쭈글해졌고 몸에는 온통 키스마크가 나있었다. 그 모습을 민승현한테 들키면 결과는 불 보듯 뻔했다.“혹시 저 가까이에 있는 백화점에 내려줄 수 있어요?”“…….”싫은 티를 팍팍 냈지만 민도준은 결국 그녀를 실은 채 백화점으로 향했다.백화점에 도착한 뒤 꿈쩍도 하지 않는 민도준을 힐끗 살핀 권하윤은 눈치껏 차에서 내렸다.하지만 바닥에 발이 닿는 순간 다리에 힘이 빠져 털썩 주저앉았다.민도준은 그런 모습을 보면서도 도와주기는커녕 차 창문을 내리며 여
윤을 보는 순간 민승현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오늘 왜 평소와 달라 보이지?’권하윤은 누가 봐도 예쁜 미인인 것은 맞았으나 언제나 영혼 없는 인형 같았다.눈빛은 늘 흐릿했고 언제나 정신이 반쯤 딴 데로 가 있는 듯한 멍한 얼굴에 생기 있는 표정 한 번 본 적 없었다.때문에 남자의 마음을 살살 녹이는 애교 많은 강민정에 비하면 통나무가 따로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눈앞에 있는 권하윤은 눈가가 촉촉했고 입술이 빨갛게 물들어 있었으며 더욱이 눈매에 야릇함이 묻어있었다.분명 목까지 올라오는 긴 니트 원피스를 입고 있었지만 그녀를 보고 있자니 욕망이 들끓어 올랐다.민승현은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 끝내 화를 참지 못하고 권하윤의 뺨을 내리쳤다.“당장 말해! 이렇게 입고 어떤 놈 만나러 갔어?”새하얀 얼굴에 빨간 손자국이 올라왔지만 권하윤은 화끈거리는 얼굴을 만지지 않았다. 아무 표정 없는 얼굴로 남자를 올려다볼 뿐.“나 같은 여자는 다 벗고 길에서 돌아다녀도 볼 사람이 없다며? 그런데 이렇게 입고 다니는 게 어때서?”“어디서 말대꾸야? 권씨 가문 가훈은 이제 지키지도 않겠다 이거야?”민승현은 다시 손을 뻗었지만 옆에 있던 강민정이 그의 팔을 끌어안았다.“오빠.”그리고 서로 눈을 마주친 순간 민승현은 뭔가 이상함을 눈치챘다.‘이거 방금 내가 침대에서 민정한테 한 말인데 권하윤이 어떻게?’“씨발. 너 나 미행했어?”권하윤은 입꼬리를 올렸다.“지금 무슨 말 하는지 모르겠네. 다 아는 일을 굳이 입 밖에 꺼내야겠어?”“너 다시 한 번 지껄여 봐!”권하윤의 눈은 강민정을 한 번 훑었다.“요즘 어머님께서 민정 씨 결혼 상대를 물색하고 있다던데. 괜찮은 집에 며느리로 들어가려면 여자의 몸가짐이 중요하지 않겠어?”강민정은 흠칫 몸을 떨더니 민승현의 팔을 잡아당겼다.“오빠, 나 무서워.”강민정의 반응에 민승현은 이성의 끈이 끊어졌다. 권하윤을 노려보는 눈빛은 당장이라도 그녀를 갈기갈기 찢을 것만 같았다.‘지금껏 이 고약한 심보를 숨기고 있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