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시키고 나서 지훈은 소혜를 끌고 안방으로 갔다.안방에 들어가려는데 소혜가 문을 잡고 멈춰 섰다.“아, 내 방은 저긴데.”“게스트 룸 손님한테 내줘야 하니까 요 며칠은 나랑 안방에서 자자.”소혜는 뭐라고 대꾸하고 싶었는데, 안방의 배치를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반짝반짝 빛이 나는 대리석 바닥과 벽에 걸려있는 값져 보이는 그림, 그리고 부드러운 촉감의 카펫, 왕자님이 사는 궁궐 같았다.소혜는 바보처럼 웃으며 말했다.“좋아.”지훈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먼저 쉬어, 난 서재에 가서 골동품들 좀 복구할게.”소혜가 넓은 침대에 편히 누워 잠이 들려고 하는데, 핸드폰이 진동했다. 시운이 보내온 문자였다.[누나, 저 손이 너무 아파서 그러는데 와주실 수 있어요?]누워있는 것이 너무 편했던 소혜는 움직이기 싫었다. 그러나 시운이 또 문자를 보내왔다.[미안해요, 누나. 제가 너무 힘들게 했죠. 그냥 못 본 걸로 해주세요.]동정심을 자극하는 말을 보니 소혜는 힘겹게 침대에서 일어나 시운이 있는 방으로 향했다.소혜는 시운이 자신이 원래 묵고 있던 방에 있을 줄 알았는데, 들어가 보니 방에 시운이 없었다. 도우미한테 물어보고 나서야 시운이 아래층에 묵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이럴 거면 왜 날 안방에서 자라고 한 거지?’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지훈과 마주쳤다.“어머나, 깜짝이야.”지훈이 웃었다.“여보, 어디가?”“아, 시운이 손이 아프다고 해서, 보러 가려고.”“아, 그래?”지훈은 도우미를 보며 말했다.“가서 가정의를 불러와.”말을 마친 지훈은 웃으며 소혜에게 말했다.“손이 아프면 의사 선생님을 불러야지, 안 그래?”소혜는 엄지손가락을 세우고 말했다.“역시 생각하는 게 다르네!”조금 후, 가정의 민지가 왔다....아래층 방에서 시운은 다리를 안고 침대에 앉아 있었는데, 소혜가 온 것을 보고 급히 내려왔다.“누나.”말을 채 하지 못했는데 뒤에 지훈과 민지가 따라 들어왔다. 시운은 당황해하며 뒤로 물러났다.“이건...
지훈이 분명 웃고 있었지만, 소혜는 닭살이 돋았다. “아니!”지훈은 웃으며 말했다.“그래, 그럼 우리 돌아가서 쉬자.”방으로 돌아가기 전, 지훈은 고개를 돌려 민지에게 말했다.“아, 맞다. 매일 와서 약 교체해 줘. 상처가 덧나지 않게.”소혜가 지훈과 함께 나가는 뒷모습을 본 시운은 여전히 하얗게 질려 있었다.시운은 잘 알고 있었다. 지훈이 이렇게까지 해서 소혜가 자신을 불쌍해하는 것을 철저히 막기 위함이라는 것을 말이다.‘설마 전에 누나한테 옷을 가져다준 사람이 나라는 걸 눈치챘나? 근데 왜 나한테 직접 질문하지 않지? 누나한테 얘기한 거 같지도 않고. 설마 날 이 저택에서 소리 없이 없애려고?’시운은 불안한 듯 주위를 살펴보았다. 시운의 시선은 민지가 남겨 놓은 약병에 멈췄다. ‘이 약 설마 독이 든 거 아니겠지?’시운은 긴장해서 약을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안 되겠어. 민 씨 저택에 있는 동안 각별히 조심해야겠어!’...윗층 안방에서, 샤워를 마친 소혜가 손가락을 물며 욕실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 있었던 일이 너무 많아 머릿속이 복잡했다.“도련님은 먼저 왼쪽부터 씻을가, 아니면 오른쪽부터? 위부터 아니면 아래부터?”물소리를 들으며 소혜의 머릿속에는 이상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갑자기 물소리가 멈췄다. 소혜는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목을 빼고 아름다운 몸매를 감상하려고 했다.그러나 오늘 아침에는 가운을 대충 감싸고 나왔던 지훈이 잠옷으로 갈아입은 것이다. 심지어 제일 위에 단추까지 꽁꽁 잠갔다.지훈이 침대 쪽으로 다가오며 말했다.“여보, 잘자요.”지훈은 불을 끄고 소혜를 등지고 누웠다.‘뭐야? 이렇게 자는 거야?’맛을 봐버린 소혜는 이걸로 성에 차지 않아 지훈의 등 쪽으로 몸을 옮겼다.“저기, 도련님, 오늘 저녁에 시간 돼? 나 예약하고 싶은데.”“미안, 갑작스러운 예약은 받지 않아.”어두워서 표정이 보이지 않아 지훈의 목소리는 엄청 차가워 보였다. 소혜는 할 수 없이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가 투덜거렸다.
지훈은 소혜가 스틱스의 단골손님이라고 생각해서 경험이 아주 많은 사람인 줄 알았다, 그러나 알고 보니 너무 서툴렀다.사랑을 나누게 된 날, 소혜가 아프다고 소리를 쳐서 지훈은 그녀가 경험이 전혀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소혜가 소리를 질렀다.“반품해 줘요!”아쉽지만 지훈의 세상에는 반품이라는 개념이 없다.지훈이 가볍게 말했다.“돈을 다 줬는데 당연히 바라는 대로 해 드려야죠.”...그날 밤이 지난 뒤, 지훈은 돈을 버는 것 이외에 자신이 신경을 쓰고 싶은 일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다음날, 지훈은 소혜를 위해 옷을 샀고 그녀와 대화를 나눠 보려고 했는데, 올라가는 길에 민 씨 저택에서 걸려 온 전화를 받고 할아버지가 유독하다는 소식을 들었다.지훈은 급히 자신의 핸드폰 번호를 써서 쇼핑백에 넣고 시운에게 심부름을 시켰다.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민씨 집안은 아주 시끄러워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온 뒤, 지훈은 그제야 소혜한테서 전화가 오지 않은 것을 발견했다.그러나 지훈은 아주 빨리 이 사실을 받아들였다. 원래 장사라는 것이 쌍방의 동의하에서 진행이 되는 거니까.그런데 지훈은 할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소혜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알고 보니 소혜는 둘째 형의 사촌 동생이었다.진 씨네 집안과 민 씨네 집안은 원래 사이가 좋지 않았다. 진 씨네 집안에서 민 씨네 집안이 일을 처리하는 품격이 마음에 들지 않아 종래도 연회에 참여하지 않았고, 명주가 돌아간 후부터는 더욱 거래가 없었기에 지훈은 진 씨네 집안 사람들을 잘 알지 못했다.이번 장례식에 진 씨네 집안 사람이 온 이유는 민 씨네 집안 권력을 현재 진 교수님 외손자께서 장악하고 있어서이기도 하고 진 교수님이 할아버지 장례식에는 와서 얼굴을 비춰야 한다고 해서일 것이다.소혜와 친척 사이라는 것을 알게 된 지훈은 인연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지훈은 웃으며 소혜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그때 소혜가 어떤 종업원을 보고 웃으며 말하는 것을 보았다.“너무 잘생기
이른 아침, 소혜가 단잠에 빠져있는데 팔이 갑자기 바늘에 찍힌 것처럼 아파졌다.소혜가 눈을 떠서 보니 정말 바늘에 찔려 있었다.침대 옆에서 민지가 소혜의 팔을 잡고 피를 뽑고 있었다. 민지는 소혜가 깨난 것을 보고 인사했다.“일어나셨어요? 아직 3병이 남았는데, 곧 다 뽑을 거예요.”소혜가 옆을 보자 안에는 이미 5병이 있었다. 주삿바늘이 아직 팔에 달려 있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그녀는 펄쩍 뛰었을 것이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저 피 뽑는데요?”“피를 왜 뽑냐고요!”“아, 지금 임신 준비 중이시라면서요? 도련님께서 소혜 씨 자꾸 밤샌다고 몸 안 좋을까 봐 검사해 달라고 하시던데요?”5병이나 뽑힌 피를 보며 소혜는 지훈이 어제 말했던 임신 준비가 그냥 한 얘기가 아님을 깨달았다.소혜는 애써 피하려고 했다.“아니, 지금 임신 준비하기에 너무 빨라! 먼저...!”“안 빨라.”지훈이 밖에서 들어오며 말했다.“자연 임신율은 나이가 많아짐에 따라 떨어지고 몸이 건강하지 않으면 또 떨어지지. 몸조리에 일, 이년 걸리고 임신 준비하는데 또 일, 이년 걸리지. 아이 띠 문제도 고려해야 하잖아. 그렇게 계산하면 지금부터 준비하는 게 이미 늦었는데?”지훈이 말을 마치자 민지가 마침 마지막 한 통까지 다 뽑았다.“다 뽑았어요. 저 먼저 가겠습니다.”“아, 저기, 잠시만요!”소혜가 손을 뻗어 잡으려고 하는데 지훈이 피 뽑은 자리를 꾹 눌렀다.“피 멈추게 눌러야지.”소혜는 지훈을 보며 물었다.“음, 도련님, 정말 나랑 애 가지려고? 날 닮으면 어떡해?”지훈은 소혜를 잠시 바라보더니 웃으며 대답했다.“우리 여보는 유명한 프로그래먼데, 얼마나 훌륭해?”지훈이 분명 예전처럼 다정하게 얘기하는데 소혜는 둘 사이에 벽이 세워진 듯한 느낌을 받았다.소혜가 물었다.“도련님, 설마 시운 때문에 나한테 화났어? 너 시운 싫어하지?”지훈이 대답하지 않고 물었다.“너는? 넌 시운 좋아?”“어? 나? 난 꽤 좋아하지.”‘그냥 말 잘 듣는
지훈은 소혜가 시운이 그날 밤에 남자라고 착각한 줄 모르고 그저 옷을 가져다준 명분으로 알게 된 줄 알았다. 그러나 새로운 것을 그렇게 좋아하는 소혜가 시운과 3년이나 관계를 유지했고 아까 좋아한다는 말까지 들으니, 화가 좀 났다.지훈이 소혜에게 다른 빚을 더 추가로 할지 생각하던 참에 소혜가 문을 두드렸다.“도련님, 안에 있어?”문은 열리지 않았고 그저 지훈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응, 왜?”지훈의 차가운 목소리에 소혜는 둘 사이가 사랑을 나누기 전으로 돌아간 듯싶었다.소혜는 당황한 듯 말했다.“그, 도우미가 너 몸 불편하다고 하길래 보러왔어.”“나 괜찮아. 그냥 입맛이 없어서 그래. 그리고 아래층에 시운 씨가 너랑 먹으면 되니까 안 심심하잖아?”소혜가 대답했다.“그게 어떻게 같아.”말이 끝나자마자 문이 열리더니 지훈이 안에 서 있었다.“뭐가 다른데?”소혜는 마음의 준비가 안 된 상태로 지훈을 만나 말문이 막혔다.햇살이 지훈의 등에 비치면서 더 멋있어 보였다. 그러나 평소에 항상 웃고 있던 지훈이 지금은 웃고 있지 않았다.지훈이 문밖으로 걸어 나오자, 소혜는 무의식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눈 깜짝할 사이에 소혜는 벽에 붙어버렸다.“소혜야, 우리 어디가 다른데?”소혜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항상 젠틀하던 지훈이 물러나지 않고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열심히 물었다.“난 네 눈에 어떤데?”그 순간, 주위가 고요해지면서 지훈의 질문이 소혜의 심장을 쳤다.‘지훈은 어디가 다르지?’‘당연히 다르지...?’소혜가 지훈을 처음 봤을 때 심장이 막 뛰고 눈부셨었다.돈을 적게 내고도 잘생긴 남자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지만, 소혜는 전 재산을 다 써서까지 지훈과 만나고 싶어 했다.그녀는 이렇게 무엇에 집착하는 사람이 아니었다.어릴 적, 소혜는 이웃집 손자를 좋아했는데 그 애가 코를 파는 모습을 보고 짝꿍을 좋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짝꿍이 우는 모습이 너무 못생겨 옆 반에 남자애를 좋아했었다.소혜는 어릴 때부터 누
소혜는 이런 자극을 감당할 수 없어 도망가고 싶었는데 지훈이 허리를 꼭 껴안았다. 지훈은 머리를 그녀의 어깨에 기대고 속삭였다.“소혜야, 날 좋아해 줘, 응?”반박하려고 하는데 아래층에서 깨지는 소리가 나더니 곧이어 비명소리가 들려왔다.“살려주세요!”소혜가 아래층을 내려다보니 시운이 도우미들이랑 대치하고 있었다.소혜가 아래층에 대고 소리쳤다.“무슨 일이야?”시운이 고개를 들고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대답했다.“누나, 이분들 날 괴롭혀요. 저 죽을 거 같아요, 너무 무서워!”소혜는 죽는다는 말에 그 자리에 굳어 버린 지훈을 신경 쓰지 않은 채 다급히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아래층에서 시운은 긴장한 듯 주먹을 움켜쥐고 있었다.조금 전, 시운은 두 눈으로 도우미가 몰래 죽에 흰색 가루를 넣고 자신에게 건네주는 것을 보았다.‘도련님께서 날 죽이려나 보다. 얼른 여기서 벗어나야 해!’긴장한 순간에 고개를 들어 보니 소혜가 지훈과 안고 있자 더욱 화가 나고 당황했다. 어제 스틱스에서 나올 때,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었기에 시운은 스틱스에 다시 돌아갈 수 없다. 더군다나 시운이 지훈과 안 좋은 일이 있었다는 소문이 나면 다른 곳에서도 시운을 받아주지 않을 것이다. ‘이젠 더 이상 원래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고 돌아가기도 싫어! 소혜 누나가 내 유일한 구명줄이야!’그래서 소혜가 아래층으로 내려오자마자 시운은 소혜의 품에 안겨버렸다.“누나, 너무 무서워요, 저 사람들이 날 죽이려고 해요.”도우미들은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소혜를 바라보고 있었다.“음, 오해한 거 아니야? 저분들 다 엄청 착하신 분들인데, 대낮에 널 어떻게 죽여? 죽인다고 해도 저녁에 죽이겠지.”도우미들이 대답했다.“그러니까요.”시운은 울며 고개를 저었다.“진짜예요! 도련님이 절 여기에 데리고 온 것도 소리 없이 절 죽이려고 그러는 거라니까요!”“응?”소혜의 뒤를 따라 내려온 지훈이 말했다.“제가 시운 씨를 데리고 저택에서 죽인다고? 스틱스에서도 죽일 수 있거든요?”
소혜는 시운이 계속 애처럼 소란을 피우자 조금 짜증이 났다. 3년 전의 사고 빼고 소혜는 시운과 아주 잘 지냈었다. 시운이 불쌍하기도 하고 조용한 사람 같아 소혜는 시운을 도와주고 싶었다.그러나 지금 소혜는 시운의 행동들이 이상해 보였다.소혜는 진중하게 말했다.“도련님은 그런 사람 아니야, 너 또 이러면 나 진짜 화내.”소혜는 성격이 좋기로 유명한 사람인데 이렇게 나오자, 시운은 더욱 당황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시운은 지훈이 자신의 목숨을 앗아갈까 봐 더욱 무서워졌다....오후에 지훈이 집을 나갔다. 소혜는 아침에 지훈에게 벽치기를 당하고 자신을 좋아하라는 장면을 떠올리면 온몸이 불편했다.이때 유진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소혜는 유진이 자신에게서 지훈의 소식을 얻으려는 줄 알았는데, 전화를 받자마자 유진의 잘난 척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족제비! 나 갈 거야, 안녕!”“어? 잠깐만, 어디 가는데?”“나 어디 가고 싶으면 어디 가는 거지! 뭔 상관이야!”유진의 화가 난 목소리에 소혜는 무슨 상황인지 알 수 없었다.“너 도련님 안 따라다니게? 내 자리 너한테 준다고 했잖아! 너 왜 도중에 포기해?”유진이 화난 목소리로 대답했다.“포기? 한, 두 마디로 설명하기 어려우니까 내 호텔로 와. 그리고 날 공항까지 데려다줘!”소혜는 다시 한번 운전기사가 되어 유진이 묵고 있는 호텔에 도착하자 유진의 방은 아주 엉망이었다. 옷이랑 신발이 마구 널브러져 있었다.“너 곧 간다며 왜 아직도 짐을 안 싼 거야?”유진은 거울을 보며 메이크업하고 있었는데 그런 소혜를 째려보았다.“다 입은 건데 왜 가져가.”소혜는 널브러져 있는 명품을 보고 눈이 동그래졌다.“너 안 가지면 내가 가진다?”유진은 그런 소혜를 깔보았다.“너 지훈 오빠랑 결혼한다면서 왜 이렇게 인색한 거야? 너 이러면 오빠가 얼마나 창피하겠어!”“아, 그렇지. 응? 결혼?”소혜가 당황해하는 모습을 본 유진은 이를 악물었다.“네가 전생에 무슨 덕을 쌓았길래 지훈 오빠가 널
“3년?”이 말을 들은 소혜는 깜짝 놀랐다.“우리 둘 3년 전에 말한 적도 없는데, 도련님이 날 어떻게 좋아한다는 거지?”“네가 나한테 물어보면 난 누구한테 물어봐?”유진은 화가 나 쿠션을 툭 던져 버렸다.“아무튼 지훈 오빠는 거짓말할 사람이 아니니까! 넌 거짓말 입에 달고 살잖아!”“쉿.”소혜는 여전히 머리가 아팠다.‘3년 전이면 내가 아직 스틱스에 매일 붙어 있을 땐데? 설마 도련님 취향이 독특해서 나처럼 막 노는 사람 좋아하나?’소혜가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는데, 유진이 짐을 다 싸고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빨리 짐 옮겨줘!”“응.”...공항에서 유진은 소혜의 손에서 트렁크를 건네받고 말했다.“간다!”유진이 가려고 하자 소혜가 팔을 잡아당겼다.“잠깐만, 너 어디가?”선글라스를 낀 유진이 잘난 척하며 고개를 들었다.“당연히 강원에 돌아가서 부잣집 딸 노릇해야지! 내가 지훈 오빠 손에 못 넣었다고 울 줄 알았냐? 웃기네 진짜!”소혜는 유진의 선글라스를 벗겨버렸다. 그러자 소혜의 눈에 들어온 것은 팅팅 부은 유진의 눈이었다. 유진은 다급히 선글라스를 뺏으며 말했다.“너 왜 그래!”“근데 너 선글라스 끼고 우는 거 이상해. 눈물이 계속 흐르잖아...?”“닥쳐!”소혜는 유진이 또 욕을 하려는 줄 알았는데, 유진은 그저 소혜를 잠시 바라보더니 피해버렸다.“넌 내가 미워하는 사람 중에 유일하게 그래도 별로 안 미운 사람이야!”소혜는 유진이 자신을 욕하는 것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 없었다. 그녀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네가 이렇게 간다고 하니까 좀 아쉽네.”유진은 경계하는 표정을 지었다.“내가 전에도 말했듯이 난 너한테 관심 없어. 너 나 좋아하지 마, 우린 안 돼!”소혜는 웃으며 대답했다.“아, 너무 그렇게 확정 짓지 마, 혹시 이제 네가 나 좋아하게 되면 어떡하려고? 가기 전에 한번 안아보자!”소혜가 다가오자, 유진은 눈물이 쏙 들어가서 소리쳤다.“변태.”유진은 트렁크를 끌고 도망가 버렸다.너무 빨
연말이 되자, 하윤은 사람들 다 같이 경성에서 새해를 맞이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경성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진가연과 한성운도 그러고 싶어 했다.남은 사람은 양현숙이었다.하윤은 원래 양현숙을 데리고 경성에 오려고 했는데, 양현숙이 해성시의 집을 떠나기 싫어했다. 양현숙은 집을 지켜야 한다면서 오래 집을 비우면 너무 처량한 느낌이 난다고 했다.하윤은 양현숙이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집뿐만이 아니라 이성호와의 추억이다.그래서 하윤은 그렇게 요구하지 않고 도윤을 데리고 자주 보러 갔다.이번에 하윤의 요청에 양현숙이 기분 좋게 동의하면서 31일에 같이 새해를 맞이하기로 했다.하윤은 손님 맞을 준비를 했고 곧 새해가 다가왔다. 양현숙이 하윤에게 전화를 걸었고 조금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하윤에게 물었다.“하윤아, 네 오빠 귀국한다는데, 만나볼래? 싫으면 너희 방해하지 말라고 할게.”그때 병원에서 기분 나쁘게 헤어진 뒤로 만난 적이 없었다.승우는 도윤의 나이를 잘 기억하고 있어 가끔 나이에 맞는 장난감을 보내주었다.이렇게 여러 해 지나고 하윤은 전의 일을 마음에 담아주지 않았으며 오히려 너무 오랫동안 연락을 안 한 것에 대해 조금 자책했다. 양현숙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하윤은 양현숙이 중간에서 힘들까 봐 가볍게 말했다.“오빠 돌아왔으면 같이 오세요. 우리 한 가족 되게 오래 같이 못 만났잖아요?”양현숙은 기뻐서 대답했다.“알았어, 그렇게 오빠한테 전달할게.”...통화를 마친 하윤은 이 일을 도준에게 얘기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승우가 하윤의 오빠지만, 하윤이 이 이년 사이에 아무 이성과 접촉하지 않았다. 심지어 수컷 모기까지 도준은 하윤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도준은 승우를 항상 경계해 왔다.도준이 동의하지 않을까 봐 그날 저녁 도준이 돌아왔을 때, 하윤은 120%로 잘 보이려고 했다.하윤은 발꿈치를 들고 도준의 외투를 벗겨주었다.“여보 왔어요? 어땠어요? 오늘 일은 힘들지 않았어요?”도준이 하윤을 힐끔 쳐다보고 소파에 앉아
하윤은 요즘 아들이 조금 이상한 것 같았다.도윤은 다른 애들과 달리 장난감으로 놀기 좋아하거나,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가장 많이 하는 일이 책을 보는 일이었다.가끔 하윤은 도윤이 너무 오래 앉아 있어 힘들까 봐 텔레비전 앞에 데려와서 애니메이션을 틀어줬다.그러나 하윤이 할 일을 하고 돌아오니, 도윤이 뉴스 채널을 돌려서 재밌게 보고 있었다.소파 위에 있는 작은 아들을 보고 하윤은 걱정이 앞섰다.‘설마 내가 너무 연습에 몰두해서 아들을 소홀히 했나? 그래서 아들이 상처를 받아서 저런가? 안 돼! 도윤에게 완벽한 동년을 줄 거야!’하윤은 이 일이 엄청나게 큰 일이라고 생각해서 한동안 생각하고 도윤을 데리고 나이가 비슷한 아이들과 많이 만나게 하려고 했다. 많이 만나면 도윤의 동심이 돌아오지 않을까 싶었다.하윤은 어디를 가던 도우미가 자기를 보는 것이 싫어, 그냥 아파트에 살았다. 이곳에는 아이들이 노는 놀이터가 있었고 그중에 모래로 촉감놀이 하는 곳이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하윤은 그곳에 도윤을 데리고 가기로 마음먹었다.날씨가 좋아 하윤은 도윤의 손을 잡고 그를 집 밖으로 데리고 갔다.모래가 있는 곳으로 가자, 도윤은 모래를 뿌리며 재밌다고 웃어대는 친구들을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하윤은 도윤의 표정을 보지 못하고 신나게 말했다.“도윤아, 친구들 얼마나 재밌게 놀아, 우리도 얼른 들어가서 놀자.”도윤은 눈썹이 붙을 정도로 찌푸렸지만, 하윤이 기대에 찬 모습에 하윤과 함께 놀아줘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래서 도윤은 하윤이 시키는 대로 신발을 벗고 양말을 신은 채로 하윤과 함께 모래에 들어갔다.도윤의 눈썹과 눈은 하윤을 닮았고 나머지는 도준과 똑같았다. 너무 잘생겨서 순식간에 다른 애들의 주의를 끌었다.한 아이가 도윤에게 말했다.“우리 같이 모래 파서 궁전 만들자!”그 아이가 손을 잡으려고 하자 도윤이 한 걸음 물러났다.“미안, 난 엄마랑 놀아야 해서.”하윤은 도윤이 자기랑 놀고 싶어 하는 줄 알고 마음속으로
하윤이 해성시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됐는데, 소혜에게서 전화가 왔다. 소혜는 딸 민효연이 첫돌 생일을 쇠는 김에 미뤘던 결혼식도 같이 한다고 했다.지훈이 산을 구매해서 이제 산속에서 결혼식을 한다고 했다.하윤이 깜짝 놀랐다.“결혼식 한다고?”“네!”소혜는 간식을 먹으며 말했다.하윤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소혜를 불렀다.“소혜야.”소혜가 목을 쭉 뻗었다.“네?”지훈이 욕실에서 몸을 내밀자, 빛나는 눈은 여우처럼 사람을 홀렸고 머리가 젖어 더욱 섹시해 보였다.지훈의 보조개는 아주 귀여웠다.“수건 가져다줘.”지훈의 섹시한 모습에 소혜가 다급히 말했다.“언니, 오빠한테 언제 시간 되는지 물어봐 줄래요? 그럼, 이렇게 정하고 저는 남자 만지러, 아, 아니, 수건 가져다주러 갈게요!”‘헤헿.’통화를 마친 하윤이 소혜가 보낸 웨딩사진을 보고 마음이 조금 찡했다.소혜를 보고 그런 것이 아니라 지훈을 보고 그런 느낌이 들었다.저녁 식사를 할 때, 하윤이 이 일을 도준에게 말했다.“지훈이 소혜랑 결혼식 올린대요. 다음 달에 한다는데, 당신이 언제 경성에 있는지 물어보라고 하던데.”도준이 하윤을 바라봤다.“그건 당신한테 달린 거 아닌가? 당신이 자꾸 밖으로 돌아다니니까 내가 힘을 좀 써서 당신을 잡아와야지.”“말하는 것 좀 봐요. 제가 무슨 나쁜 일을 하는 사람처럼 말하네요? 다 연습하러 가는 거지.”하윤은 젓가락을 입에 물고 일부러 아까 했던 말을 반복했다.“소혜랑 지훈이 결혼식 한대요.”도준은 물을 마시고 콧소리가 섞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응.”도준이 눈치채지 못하자, 하윤은 더 선명하게 눈치를 줬다.“아니, 쟤네는 아이가 태어난 뒤에 미뤘던 결혼식 올리는 거네요?”도준이 웃으며 말했다.“아니면? 아기를 배속에 다시 밀어 넣고 결혼식 할 수는 없잖아?”하윤은 화가 나 그릇에 담겼던 완자에 구멍을 뚫었다.“맞아요! 맞는 말이죠!”도준이 눈치가 없자, 하윤은 밥을 다 먹고 나서도 도준과 한마디도 하지 않고 텔레비전을 봤다.
경성에서 하윤이 자기 전에 핸드폰을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침대에서 급히 일어나 욕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여보!”“도준 씨!”“도준 씨!!”욕실의 안개가 도준의 넓은 어깨에 흩어졌고 도준은 가운을 걸치고 나왔다. 가슴팍이 보였고 물기를 채 닦지 않아 가슴팍과 근육을 따라 아래로 흘러내렸다.도준은 하윤의 다급한 부름에 어디 부딪힌 줄 알고 급히 나왔는데, 나와보니 하윤이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파닥거리고 있었다.도준은 들고 있던 수건으로 하윤의 엉덩이를 때렸다.“왜 그래? 무슨 귀신이라도 봤어?”하윤은 침대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도준의 어깨에 놓고 핸드폰을 도준에게 들이밀었다.“빨리 봐봐요! 빨리!”하윤이 너무 날뛰어 핸드폰을 너무 가까이 대는 바람에 도준은 화면이 잘 보이지 않았다.도준은 하윤의 손목을 뒤로 잡아당겼지만 하윤이 손을 흔드는 바람에 인내심이 없어 하윤의 허리를 안고 침대에 눕혔다. 혹시라도 너무 흥분해서 침대 밑으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보기 귀찮으니까 얘기해 줘.”“고은지가 결혼한대요! 누구랑 하는지 맞혀 봐요!”도준이 물어보기도 전에 하윤은 참지 못하고 얘기했다.“곽준호! 곽도원의 아들 말이에요! 세상에, 아무런 연관이 없던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결혼하게 된 거죠?”도준은 침대에 기대며 말했다.“아무 연관이 없진 않지. 전에 곽도원이 고은지를 새 아내로 맞이한다고 술자리를 열었었어.”“네?”하윤이 깜짝 놀랐다.‘그럼, 고은지가 곽준호 새엄마? 세상에! 나보다 더 용감하네?’하윤은 참지 못하고 도준을 밀었다.“얼른 얘기해 봐요.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도준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팔을 하윤의 다리에 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하윤은 도준의 팔을 치워버렸다.“쳇, 당신도 몰라요?”하윤의 귀여운 모습에 도준이 하윤의 볼을 꼬집으며 그녀를 돌렸다.“그렇게 알고 싶으면 결혼식에 가면 되겠네.”하윤은 볼이 꼬집혀서 말을 똑바
준호는 가볍게 물었지만, 눈빛에는 긴장함이 깃들어 있었다.준호는 은지의 차가운 얼굴을 보고, 그녀의 마음도 자신처럼 뜨거운지 보아낼 수 없었다. 그리고 은지가 왜 준호를 찾지 않고 준호가 왔을 때 그에게 기회를 주는지 알지 못했다.사람은 누구나 욕심이 수도 없이 많아진다. 은지를 볼 수 없을 때는 볼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또 만나니까 가지 말라고 잡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가지 말라고 잡으면 은지 마음속에 준호가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준호의 마음은 조각조각으로 나뉘어 흩어져 버렸다.준호의 손에는 점점 힘이 들어갔고 자신의 기분을 은지가 느끼게 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난 너 속이기 싫어, 난 너 없어도 잘 살아.”준호의 손에 힘이 빠졌고 빛나던 눈도 빛을 잃었다.준호가 기분이 처져 손을 떼려고 하는데, 은지의 차가운 손이 준호의 손등을 감쌌다.“근데 네가 있으면 난 더 기분이 좋아서 매일 행복하게 살 거 같아.”실망했던 준호는 조금 희망을 얻고 말했다.“왜 말을 그렇게 늦게 해! 날 그렇게 힘들게 할 거야?”은지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아마도?”준호는 은지가 웃는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었고, 이렇게 정말 기뻐서 나오는 웃음은 더 본 적이 없었다.준호는 성큼성큼 은지에게 다가가 입맞춤했다.“고은지, 너 이번에 또 가면 너 절대 안 놔줄 거야!”“응.”비음이 섞인 은지의 목소리에 준호의 몸은 순식간에 타올랐고 준호는 은지를 품에 안았다.“더 이상 나 화나게 하면 안 된다?”“될수록 그렇게 해볼게.”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말했다.“네 성격에는 문제가 없어?”“너!”준호는 화를 내고 싶었지만 계속 품에 안고 싶었던 은지를 안고 있어 화를 낼 수 없었다.“성격 안 좋은 거 나도 알아, 차근차근 알려주면 나 다 고칠 수 있어.”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도 말은 잘 듣네.’“다 고쳐도 나 좋아해야 된다? 안 그러면 너 안 놔줄 거야!”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될
아까는 은지에게 핍박을 당해 자기도 모르게 질문이 나왔다.두 사람은 마주 보며 차에 앉아 있었고 은지가 준호를 지그시 바라보자, 준호는 그 물음을 다시 물어볼 수 없었다.그러나 준호가 물어보지 않았는데, 은지가 고개를 끄덕였다.“생각한 적 있어.”아까까지 겨울의 추위에 덜덜 떨던 준호가 은지의 대답에 봄으로 끌려온 것 같았다.준호는 자기가 잘못 들은 것인지 알지 못했지만, 기분이 좋아 다시 물었다.“뭐라고?”은지는 담담하게 바로 대답했다.“이 6개월 동안 너 생각한 적 있다고.”이 6개월 동안 은지는 준호처럼 어린 사람, 준호처럼 무모한 사람, 은지를 마음에 들어한 사람,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 중에 준호처럼 진심으로, 물을 끼얹어도 꺼지지 않는 불씨와 같은 열정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은지는 30여 년간 계속 연기를 했었다. 이성희한테서 귀염을 받으려고, 고씨 집안의 사랑을 받으려고, 곽도원의 귀염을 받으려고 말이다.은지가 수많은 자태를 뽐냈지만, 준호는 은지가 가장 악독하고 차가운 모습을 보고도 좋아한 사람이다. 그래서 준호를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생각났다.“그럼, 앞으로 생각 안 할 거야.”“너!”준호가 다급히 말했다.“왜? 아까는 내 생각 했다며?”은지는 대답하지 않고 준호를 바라보았다. 은지는 준호의 화가 차츰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준호가 부끄러워하며 말했다.“나, 나도 네 생각 했어.”이때 차의 라디오에서 로맨틱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준호는 평소에 이런 노래를 듣기 싫어했는데, 지금 들으니 아주 로맨틱했다.준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데, 은지가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가게는 저기 있어.”은지가 물어보지 않자, 준호도 은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나랑 가는 거야, 마는 거야? 물어보고 싶은데 물어볼 용기가 안 나!’마을이 너무 작아 노래 한 곡이 채 끝나지 않았는데, 목적지에 도착했다.은지가 차에서 내리자, 준호도 따라서 내렸고 은지가 계단으로 올라가자, 준호도 따라
호텔 내부의 뜨거운 공기에 준호는 재채기를 했고 곧이어 식탁 앞에 앉아 있는 은지를 발견했다.반년이 지나 은지의 머리는 좀 길었지만 조금 헝클어진 상태로 풀어 놓았다. 회색 니트를 입고 있었고 전에 비해 가벼운 느낌이었다. 준호는 뜨거운 공기 때문에 목이 말랐다. 열정 넘치는 아저씨가 준호 보고 얼른 와서 앉으라고 하면서 술을 부어주었다.“은지 남자 친구죠?”준호는 은지가 또 전처럼 새엄마라고 할까 봐 경계했다.그러나 은지는 그저 간결하게 대답했다.“아니요.”준호는 한숨 돌렸다. 그러나 곧이어 준호는 또 짜증이 났다.이제 은지가 준호의 새엄마도 아니니 정말 아무런 사이가 아니다.희현은 은지에게 귓속말했다.“저 사람은 왜 또 언니 잡으러 온 거예요? 제가 문 지킬 테니까 도망갈래요?”말을 채 하지 못했는데, 은지가 희현의 입에 음식을 넣어주었다.“왜요? 이 계획 별로예요?”“아니, 너 목소리 너무 커서 저 사람이 너 보고 있어.”과연 고개를 돌리자, 준호가 살기 가득한 눈으로 희현을 바라보고 있었다.희현은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이제 막 유명해지려고 하는데, 죽으면 안 되지.’희현이 한 말 때문인지, 은지가 준호를 불러 놓고 준호랑 말을 안 해서인지, 밥을 채 먹지 못했는데, 그는 은지가 화장실을 갔을 때 막아섰다.은지가 손을 씻고 돌아섰는데, 준호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은지는 놀라지 않았고 오히려 준호가 지금까지 버틴 것이 기적 같았다.“손 씻으려고?”준호는 잘 얘기해 보려고 했는데, 은지의 말에 또 화가 났다.“손 씻는다고? 내가 이렇게 먼 곳까지 찾아왔는데, 손 씻으러 왔겠어?”은지는 준호의 손에 묻은 양념을 가리키며 말했다.“그건 아니겠지만, 손은 씻어야 할 거 같아.”준호는 은지가 한 말에 반박할 수 없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씻었다.손을 다 씻은 준호는 은지가 자리에 돌아갔을 줄 알았는데, 고개를 들어보니 은지가 옆에 서 있었다. 거울 속의 두 사람은 연인처럼 붙어 있었다.은지가 준호를 보자,
‘설마 고은지?’곧이어 여자가 목도리를 벗자, 얼굴이 보였다.은지가 아니라, 전에 은지와 함께 준호를 속였던 배우 희현이었다.연말이 되자, 밖에서 일하던 자녀들이 다 무진으로 돌아왔기에 마을에 못 보던 차가 많이 세워져 있어 희현은 준호의 차를 의심하지 않고 차 주변을 돌며 통화를 했다.“여보세요? 언니, 저 도착했는데, 어디 계세요?”“호텔 쪽에 있어요? 아, 그럴 줄 알았으면 택시 타고 호텔로 갔죠.”준호는 희현의 통화를 듣고 마음이 다시 뜨거워졌다.‘언니? 고은지인가? 고은지도 여기 있나?’...무진에 호텔이 하나밖에 없었지만, 항상 손님이 별로 없었다. 연말이라 손님이 더 없어서 주인장은 일 층에 탁자를 다 붙여서 음식을 해놓았다. 아이들이 모여 있어 희현이 왔을 때 아이들이 희현에게 달려왔다.“희현 언니!”희현은 통쾌하게 용돈을 나눠줬다.“이리와, 언니 돈 많이 벌어서 너희 용돈 줄게!”아이들을 보내고 희현은 창 옆에 앉아 있는 여자에게로 다가갔다.“언니, 저 왔어요!”은지가 처음에 무진에 왔을 때는 준호를 피하려고 온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피할 필요가 없어져 사탕 가게를 책방으로 바꾸고 알바생을 찾았다. 이 책방에서 책을 보면 사탕을 먹을 수 있는 시스템으로 했다.이 반년 동안 은지는 여행을 다니면서 지냈다.며칠 전, 호텔 주인이 은지보고 무진에 와서 연말을 보내라고 했고 아이들이 은지를 보고 싶다고 해서 오기로 했다.희현은 옆 마을에서 드라마를 찍다가 같이 식사하러 왔다.식탁에는 맛있는 음식이 한 상 차려져 있었고 사람들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둘러앉았다.밖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준호만이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차가워진 도시락을 들고 화를 냈다.준호는 은지가 외롭게 연말을 보낼 줄 알고 도시락까지 싸서 왔는데, 이렇게 화목하게 모여서 보낼 줄 몰랐다.준호는 몇 시간을 운전해서 여기까지 온 자신이 참 바보 같았다.이렇게 도시락을 건네주기는 좀 그렇고, 아무 말도 안 건네고 가자니 아쉬
준호도 그동안 못 완성했던 임무를 마저 수행해야 했다.전에는 은지를 찾는 데만 집중해서 임무는 뒷전이었다. 이번에는 각 지역을 하나씩 제대로 돌아봐야 했다.돌아본 곳이 많아질수록 준호의 마음도 점차 평온해졌다.마을에 오랫동안 있으면서 자연과 마주하니 준호의 성격도 많이 누그러졌다.3개월이라는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고 준호는 남한성에 돌아가 만족스러운 결과를 냈다.팀장은 준호가 전과 달라진 모습에 칭찬했다.“이런 일 많이 하니까 좋은 점이 있네.”...그 후로 준호는 예전처럼 훈련하고 임무를 수행했다.이곳에 있으면 외계의 간섭을 덜 받기에 사람들이 준호의 집안이 현재 어떤 상황인지 개의치 않았다.그저 매일 밤 침대에 누우면 준호는 신옥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은지 씨가 정말 차가운 사람이라면 날 위해 비밀을 지켜주지 않았을 거야.’신옥영도 이 비밀을 준호가 알게 되면 많은 것을 바꾸게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은지처럼 작은 일도 따지는 사람은 무조건 알았을 것이다.준호는 전에 은지가 아무런 감정이 없는 냉혈 동물인 줄 알았는데, 지금은 잘 알 수 없었다.‘고은지 나한테 정은 있었나?’준호는 이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이 아프기도 했고 뜨겁기도 했다.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에 쉽게 들 수 없었다.‘만약 고은지가 나한테 마음이 없다면 이미 놔줬으니까 다시 가서 방해하면 안 돼. 근데 혹시 나한테 마음이 있었다면?’...눈 깜짝할 사이에 연말이 되어 길거리는 연말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준호는 신옥영이 머무는 저택으로 갔는데, 집안이 시끄러웠다.하나가 장원수를 지휘하며 집을 꾸몄고 하나는 신옥영과 함께 음식을 만들며 신옥영에게 애교를 부렸다.올해에 준호는 신옥영의 저택에서 이 부녀를 자주 봤는데, 처음에 그들을 만났을 때, 살기 가득한 눈으로 장원수를 쏘아보며 일자리며 가족 관계까지 다 물어봤었다. 나쁘지 않았다.그러나 신옥영은 재혼할 마음이 없어 보였고 준호는 신옥영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자기는 신옥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