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와 동시에 경매가 끝났다.지훈은 몇몇 고객과 함께 나왔다. 지훈은 오늘 격식을 차린 차림을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우아함을 뽐냈다.“여러분께서 제 체면을 세워주셔서 감사합니다.”“아닙니다. 넷째 도련님께서 저희 골동품 복구해 주셔서 얼마나 감사한데요. 오늘 저희가 식사 제대로 대접하겠습니다.”“맞아요! 저 스틱스에 방 예약했어요. 도련님 얼른 차에 타세요.”“스틱스.”지훈이 막 거절하려고 했는데, 귓가에 갑자기 소혜가 전에 스틱스에 가서 기술 좀 배우라던 말이 들렸다.이 생각이 떠오르자, 지훈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 그럼 부탁드릴게요.”밤의 스틱스는 곳곳에서 사치스럽고 부패한 냄새가 풍겼는데, 지훈 등 사람들이 자리에 앉자, 총지배인이 인사를 하러 왔다.“넷째 도련님, 모델들 부를까요?”지훈은 고개를 끄덕였다.“몇 명 골라 주세요.”총지배인은 원래 예의상 물어본 것이었다. 민 씨네 집안의 명성이 자자하기에 넷째 도련님이 스틱스에서 돈을 내고 모델들이랑 어울리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그러나 지훈이 모델을 한 명도 아닌 여러 명을 불러 달라고 해 총지배인은 아주 놀랐다. 그러나 총지배인도 훈련을 받았기에 마음속으로 아무리 놀라도 얼굴에 드러내지 않았다. 총지배인이 가서 사람들을 데리고 오려고 하는데 지훈이 한마디 덧붙였다.“남자들로 불러줘요. 실적이 가장 좋은 분들로.”이번에는 지배인만 놀란 것이 아니라 동행한 늙은 아저씨들도 너무 놀랐다. 놀라 죽을 지경이었지만 조금도 드러내지 못했다.‘넷째 도련님에게 이런 취미가 있다니! 그럼, 도련님께서 우리를 도와 골동품을 복원하겠다고 약속한 게 설마 우리가 마음에 들어서?’너무 충격적인 말이어서 그중 한 아저씨는 지훈과 살짝 더 떨어져 앉았다.곧 남자 모델 두 명이 왔다.방 안에 있는 사람들과 달리 이 두 모델은 안색이 밝았다.한 명는 몇 년 연속 우승한 최고의 남자 모델이고, 다른 한 명은 신인 중에서 뛰어난 재욱이다.두 사람이 지훈의 양옆에 앉아 술을
고객의 사생활이기에 재욱은 사실대로 말하기 어려웠다. 특히 줄곧 부드럽고 예의를 지키던 지훈이 불빛 아래에 있자 조금 무서운 감이 들었다.재욱이 조심스럽게 말했다.“도련님, 소혜 씨를 아세요?”지훈은 재욱이 잘하면 말해 줄 거라는 기미를 눈치채고 불빛 아래서 걸어 나왔고 또다시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소혜 씨는 제 둘째 형 여동생입니다. 술 좀 보내려고요.”지훈의 미소는 분명히 평소와 같았지만, 다른 모델이 눈치가 빨라 일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그 모델이 숨기려고 하자마자 재욱이 말해 버렸다.“아, 소혜 씨 바로 아래 29층 2908호에 있어요. 저 방금 그곳에서 나왔어요. 도련님께서 술 보내고 싶으시면 제가 모셔다드릴 수 있어요.”지훈은 소혜가 정말 여기에 있다는 말을 듣고 목소리가 약간 차가워졌다.“그러면 부탁할게요.”그 모델은 분위기가 싸해지자, 자리를 피해버렸다.방으로 돌아오자, 아저씨들이 모여 앉아 작은 소리로 외치고 있었다.“이따가 네가 가서 도련님에게 골동품 복원에 대해 말해.”“넌 왜 안 가!”“너 배가 나보다 작으니까, 도련님이 더 좋아할 거야!”“맞아, 이 골동품은 도련님만이 복원할 수 있어. 만약 도련님을 화나게 해서 복원 안 해주겠다고 하면 어떡해!”이런 말을 하던 중 지훈이 돌아왔다. 그는 사람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죄송합니다. 제가 일이 있어서 먼저 가 봐야 할 거 같습니다.”“네?”“도련님, 어디 가세요?”지훈이 살짝 웃으며 말했다.“제 아내가 아래층에 있어서 가서 인사 좀 하려고요.”...29층.아무것도 모르는 소혜는 시운을 위해 상처를 싸매고 있었다. 소혜는 약을 들고 말했다.“나 바를 거니까 조금만 참아.”시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소혜가 약을 바르려고 하자 시운이 소혜의 어깨에 기대어 부르르 떨었다.소혜가 위로했다.“자, 자, 거품 나오는 것 봐, 곧 나을 거야.”붕대로 싸매자, 시운은 너무 아파서 눈물을 흘렸다.“누나, 미안해요. 제가 분위기를
지훈이 문을 밀고 들어오자, 손을 잡고 있는 소혜와 시운을 보고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지금 들어가도 괜찮아? 아니면 너희 계속 얘기해. 내가 먼저 자리를 피해줄게.”소혜는 지훈이 나타난 순간부터 너무 놀라서 차렷 자세를 유지하며 말을 더듬었다.“넷째 도련님...! 여긴 어쩐 일이야?”“나 위층에서 다른 사람들이랑 일에 관해 얘기하고 있었는데, 네가 여기에 있다는 말을 듣고 왔지.”지훈은 말하면서 방에 들어왔고 웃으면서 시운에게 손을 내밀었다.“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민지훈입니다.”시운은 지훈의 이름을 듣고 소파에서 뛰어내려왔다.“넷째 도련님.”지훈은 미소를 지으며 시선은 시운에게 고정한 소혜를 잡아당기며 자리에 앉았다.“네, 얼른 앉으세요.”이어 지훈은 시운과 재욱이 현장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혜의 술잔을 빼냈다.“여보, 우리 임신 준비 중인데 술을 마시면 안 되지.”그러자 재욱과 시운이 동시에 비명을 질렀다.“여보?”“임신 준비?!”이 말을 들은 시운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만약 소혜와 지훈이 이미 결혼했다면 자신이 큰 잘못을 저지른 것이 되기에 무서웠다.방금 재욱을 잘 밀어냈다고 좋아하던 시운은 안색이 좋지 않아졌다. 그런 시운을 재욱은 통쾌하다는 듯 바라보았다.마찬가지로 말하지 못하는 소혜는 지훈에게 스틱스에 있는 것을 들킨 것만으로도 끔찍한데, 더욱 끔찍한 것은 지훈이 혼자 임신을 준비했다는 것이다.‘완전 자기 맘대로네?’소혜가 임신 준비에 관해 질문하려 하는데 지훈은 그녀를 보면서 말했다.“오늘 유진이 내 경매장에 왔던데, 여보, 유진이 어떻게 내가 거기에 있는 걸 알지?”화가 끓던 소혜는 삽시에 잠잠해졌다. 소혜는 술잔을 내려놓고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안 마실게.”소혜를 해결한 지훈은 시운을 바라보았다. “어디에서 본 적이 있는 거 같은데, 맞나요?”“저요...?”시운이 막 부인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무엇인가 떠올랐다.3년 전, 시운은 여전히 종업원이었다. 어느 날 아침, 그가 교대하
시운은 소혜가 아무것도 몰라 보이는 표정을 보고 마음이 서서히 진정되었다. ‘아니지, 만약 소혜가 알았다면 이미 날 찾아 결판을 냈겠지. 이렇게 날 관심해 줄리가 없어.’게다가 몇 년이 지나서 증거도 없고 그날 밤 소혜랑 같이 있었던 사람이 누구인지 증명할 수도 없다.시운이 잡아떼면 지훈도 어떻게 할 방법이 없을 것이다.시운은 무서워서 그 자리를 피하려고 했다.“도련님께서 오셨으니 저 먼저 일어나겠습니다.”나가려고 하는데 지훈의 목소리가 들렸다.“거기 서요.”시운은 긴장해서 더 불쌍해 보였다. 그는 소혜를 바라보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누나, 저 좀 구해줘요.”소혜는 시운이 안쓰러워 말했다.“우리 둘이 이야기하자. 쟤는 그냥 보내줘!”소혜가 시운을 감싸고 돌자, 지훈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지훈이 시운을 바라볼 때는 눈빛이 아주 차가웠지만 소혜를 바라볼 때는 옅은 우울감이 비쳤다.“여보는 내가 트집을 잡으려는 줄 알았어? 내가 당신한테는 그 정도로밖에 안 보여?”소혜는 말문이 막혔다.“어? 그럼, 왜 쟤를 못 가게 하는데?”지훈이 한숨을 내쉬었다.“나는 그저 저 붕대가 너무 허술하게 감겨 있어서 그랬지. 지금 날씨가 너무 더우니까 감염될 수 있잖아?”소혜는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그랬구나! 미안해, 널 오해했어.”소혜는 시운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럼 다시 앉아.”지훈은 차갑게 시운을 한 번 보고는 다시 인위적인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앉으시죠. 혹시 제가 소혜한테 화를 내고 있어서 가려는 건가요?”“아니, 아니, 저는.”“아니면 앉아요. 재욱, 사람 불러서 붕대 좀 다시 감아줘요.”멀뚱멀뚱 보고 있던 재욱이 일어섰다. “사람 불러오겠습니다.”소혜와 얘기를 하는 지훈을 보며 재욱은 생각했다.‘도련님, 이런 능력이 있으시면서 아까 우리한테 그렇게 많은 질문을 하셨어?’곧 의료진이 왔다.시운의 손에 감겨있던 거즈를 떼자, 지훈은 웃으며 말했다.“의사 선생님, 제 아내가 이 남자 모델에게 관심이 많아
“어?”소혜가 아무리 섬세하지 않다고 해도 지금 일이 좀 이상하게 흘러간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손으로 태향혈을 누르며 말했다.“아니, 뭔가 이상한데?”지훈이 소혜의 손을 잡아당기며 웃으며 말했다.“소혜야, 마음에 드는 사람 말해 봐. 다 데리고 가자.”지훈은 자연스럽게 재욱을 바라보았는데, 옆에서 생각 없이 구경하던 재욱이 무서워 차렸 자세를 유지했다. ‘민 씨 저택 같은 곳에서 살아나올 수 있을지 몰라, 누가 감히 들어가겠어?’재욱은 멋쩍게 웃었다.“저 아직 모셔야 할 고객들이 계셔서 먼저 가보겠습니다.”...이렇게 지훈은 소혜를 끌고 떠났고 뒤에는 경호원에게 끌려오는 시운도 있었다.너무 이상한 장면이어서 스틱스 내부 사람들이 토론하기 시작했다.“소혜 누나 아니야? 무슨 상황이지?”“아, 너 아직 모르는구나? 소혜 누나랑 도련님께서 이미 결혼한 사이인데, 시운이 그것도 모르고 소혜 누나를 꼬시다가 들킨 거잖아!”“어? 그럼, 어디로 데려가는 거야?”“누가 알겠어! 시운이 감고 있는 붕대가 피로 물든 것 좀 봐. 가서 또 어떤 일을 당할지!”소문은 아주 빨리 퍼졌고 심지어 지훈이 시운의 다리를 부러뜨렸다는 소문까지 났다.민 씨네 집안 권력이 하늘을 찌르고 지훈이 민씨 집안 도련님이기에, 항상 부드럽고예의 바르지만 이런 일을 당하면 어떻게 화가 안 나겠는가?소혜와 교류가 있었던 남자 모델들은 다 너무 무서워 어떤 사람들은 핸드폰 번호를 바꾸고 어떤 사람들은 집까지 옮겼다.스틱스 내부가 완전히 혼란스러운 상황이 됐지만 소혜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소혜의 양옆에 지훈과 시운이 앉았다.소혜는 중간에 껴서 제대로 앉지도 못하고 서지도 못했다.시운은 마음이 너무 괴로웠다. 그는 아직 지훈이 자신을 데리고 가는 이유가 3년 전일 때문인지 알지 못했다.일단 소혜가 사실을 알게 되면 시운은 자신을 돌보는 유일한 누나를 잃게 되어 원래의 가난하고 눈치 보는 생활로 돌아가게 된다.시운은 소혜를 바라보았다. 이 3년 동안 그는 소혜
다 시키고 나서 지훈은 소혜를 끌고 안방으로 갔다.안방에 들어가려는데 소혜가 문을 잡고 멈춰 섰다.“아, 내 방은 저긴데.”“게스트 룸 손님한테 내줘야 하니까 요 며칠은 나랑 안방에서 자자.”소혜는 뭐라고 대꾸하고 싶었는데, 안방의 배치를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반짝반짝 빛이 나는 대리석 바닥과 벽에 걸려있는 값져 보이는 그림, 그리고 부드러운 촉감의 카펫, 왕자님이 사는 궁궐 같았다.소혜는 바보처럼 웃으며 말했다.“좋아.”지훈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먼저 쉬어, 난 서재에 가서 골동품들 좀 복구할게.”소혜가 넓은 침대에 편히 누워 잠이 들려고 하는데, 핸드폰이 진동했다. 시운이 보내온 문자였다.[누나, 저 손이 너무 아파서 그러는데 와주실 수 있어요?]누워있는 것이 너무 편했던 소혜는 움직이기 싫었다. 그러나 시운이 또 문자를 보내왔다.[미안해요, 누나. 제가 너무 힘들게 했죠. 그냥 못 본 걸로 해주세요.]동정심을 자극하는 말을 보니 소혜는 힘겹게 침대에서 일어나 시운이 있는 방으로 향했다.소혜는 시운이 자신이 원래 묵고 있던 방에 있을 줄 알았는데, 들어가 보니 방에 시운이 없었다. 도우미한테 물어보고 나서야 시운이 아래층에 묵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이럴 거면 왜 날 안방에서 자라고 한 거지?’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지훈과 마주쳤다.“어머나, 깜짝이야.”지훈이 웃었다.“여보, 어디가?”“아, 시운이 손이 아프다고 해서, 보러 가려고.”“아, 그래?”지훈은 도우미를 보며 말했다.“가서 가정의를 불러와.”말을 마친 지훈은 웃으며 소혜에게 말했다.“손이 아프면 의사 선생님을 불러야지, 안 그래?”소혜는 엄지손가락을 세우고 말했다.“역시 생각하는 게 다르네!”조금 후, 가정의 민지가 왔다....아래층 방에서 시운은 다리를 안고 침대에 앉아 있었는데, 소혜가 온 것을 보고 급히 내려왔다.“누나.”말을 채 하지 못했는데 뒤에 지훈과 민지가 따라 들어왔다. 시운은 당황해하며 뒤로 물러났다.“이건...
지훈이 분명 웃고 있었지만, 소혜는 닭살이 돋았다. “아니!”지훈은 웃으며 말했다.“그래, 그럼 우리 돌아가서 쉬자.”방으로 돌아가기 전, 지훈은 고개를 돌려 민지에게 말했다.“아, 맞다. 매일 와서 약 교체해 줘. 상처가 덧나지 않게.”소혜가 지훈과 함께 나가는 뒷모습을 본 시운은 여전히 하얗게 질려 있었다.시운은 잘 알고 있었다. 지훈이 이렇게까지 해서 소혜가 자신을 불쌍해하는 것을 철저히 막기 위함이라는 것을 말이다.‘설마 전에 누나한테 옷을 가져다준 사람이 나라는 걸 눈치챘나? 근데 왜 나한테 직접 질문하지 않지? 누나한테 얘기한 거 같지도 않고. 설마 날 이 저택에서 소리 없이 없애려고?’시운은 불안한 듯 주위를 살펴보았다. 시운의 시선은 민지가 남겨 놓은 약병에 멈췄다. ‘이 약 설마 독이 든 거 아니겠지?’시운은 긴장해서 약을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안 되겠어. 민 씨 저택에 있는 동안 각별히 조심해야겠어!’...윗층 안방에서, 샤워를 마친 소혜가 손가락을 물며 욕실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 있었던 일이 너무 많아 머릿속이 복잡했다.“도련님은 먼저 왼쪽부터 씻을가, 아니면 오른쪽부터? 위부터 아니면 아래부터?”물소리를 들으며 소혜의 머릿속에는 이상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갑자기 물소리가 멈췄다. 소혜는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목을 빼고 아름다운 몸매를 감상하려고 했다.그러나 오늘 아침에는 가운을 대충 감싸고 나왔던 지훈이 잠옷으로 갈아입은 것이다. 심지어 제일 위에 단추까지 꽁꽁 잠갔다.지훈이 침대 쪽으로 다가오며 말했다.“여보, 잘자요.”지훈은 불을 끄고 소혜를 등지고 누웠다.‘뭐야? 이렇게 자는 거야?’맛을 봐버린 소혜는 이걸로 성에 차지 않아 지훈의 등 쪽으로 몸을 옮겼다.“저기, 도련님, 오늘 저녁에 시간 돼? 나 예약하고 싶은데.”“미안, 갑작스러운 예약은 받지 않아.”어두워서 표정이 보이지 않아 지훈의 목소리는 엄청 차가워 보였다. 소혜는 할 수 없이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가 투덜거렸다.
지훈은 소혜가 스틱스의 단골손님이라고 생각해서 경험이 아주 많은 사람인 줄 알았다, 그러나 알고 보니 너무 서툴렀다.사랑을 나누게 된 날, 소혜가 아프다고 소리를 쳐서 지훈은 그녀가 경험이 전혀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소혜가 소리를 질렀다.“반품해 줘요!”아쉽지만 지훈의 세상에는 반품이라는 개념이 없다.지훈이 가볍게 말했다.“돈을 다 줬는데 당연히 바라는 대로 해 드려야죠.”...그날 밤이 지난 뒤, 지훈은 돈을 버는 것 이외에 자신이 신경을 쓰고 싶은 일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다음날, 지훈은 소혜를 위해 옷을 샀고 그녀와 대화를 나눠 보려고 했는데, 올라가는 길에 민 씨 저택에서 걸려 온 전화를 받고 할아버지가 유독하다는 소식을 들었다.지훈은 급히 자신의 핸드폰 번호를 써서 쇼핑백에 넣고 시운에게 심부름을 시켰다.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민씨 집안은 아주 시끄러워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온 뒤, 지훈은 그제야 소혜한테서 전화가 오지 않은 것을 발견했다.그러나 지훈은 아주 빨리 이 사실을 받아들였다. 원래 장사라는 것이 쌍방의 동의하에서 진행이 되는 거니까.그런데 지훈은 할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소혜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알고 보니 소혜는 둘째 형의 사촌 동생이었다.진 씨네 집안과 민 씨네 집안은 원래 사이가 좋지 않았다. 진 씨네 집안에서 민 씨네 집안이 일을 처리하는 품격이 마음에 들지 않아 종래도 연회에 참여하지 않았고, 명주가 돌아간 후부터는 더욱 거래가 없었기에 지훈은 진 씨네 집안 사람들을 잘 알지 못했다.이번 장례식에 진 씨네 집안 사람이 온 이유는 민 씨네 집안 권력을 현재 진 교수님 외손자께서 장악하고 있어서이기도 하고 진 교수님이 할아버지 장례식에는 와서 얼굴을 비춰야 한다고 해서일 것이다.소혜와 친척 사이라는 것을 알게 된 지훈은 인연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지훈은 웃으며 소혜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그때 소혜가 어떤 종업원을 보고 웃으며 말하는 것을 보았다.“너무 잘생기
연말이 되자, 하윤은 사람들 다 같이 경성에서 새해를 맞이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경성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진가연과 한성운도 그러고 싶어 했다.남은 사람은 양현숙이었다.하윤은 원래 양현숙을 데리고 경성에 오려고 했는데, 양현숙이 해성시의 집을 떠나기 싫어했다. 양현숙은 집을 지켜야 한다면서 오래 집을 비우면 너무 처량한 느낌이 난다고 했다.하윤은 양현숙이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집뿐만이 아니라 이성호와의 추억이다.그래서 하윤은 그렇게 요구하지 않고 도윤을 데리고 자주 보러 갔다.이번에 하윤의 요청에 양현숙이 기분 좋게 동의하면서 31일에 같이 새해를 맞이하기로 했다.하윤은 손님 맞을 준비를 했고 곧 새해가 다가왔다. 양현숙이 하윤에게 전화를 걸었고 조금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하윤에게 물었다.“하윤아, 네 오빠 귀국한다는데, 만나볼래? 싫으면 너희 방해하지 말라고 할게.”그때 병원에서 기분 나쁘게 헤어진 뒤로 만난 적이 없었다.승우는 도윤의 나이를 잘 기억하고 있어 가끔 나이에 맞는 장난감을 보내주었다.이렇게 여러 해 지나고 하윤은 전의 일을 마음에 담아주지 않았으며 오히려 너무 오랫동안 연락을 안 한 것에 대해 조금 자책했다. 양현숙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하윤은 양현숙이 중간에서 힘들까 봐 가볍게 말했다.“오빠 돌아왔으면 같이 오세요. 우리 한 가족 되게 오래 같이 못 만났잖아요?”양현숙은 기뻐서 대답했다.“알았어, 그렇게 오빠한테 전달할게.”...통화를 마친 하윤은 이 일을 도준에게 얘기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승우가 하윤의 오빠지만, 하윤이 이 이년 사이에 아무 이성과 접촉하지 않았다. 심지어 수컷 모기까지 도준은 하윤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도준은 승우를 항상 경계해 왔다.도준이 동의하지 않을까 봐 그날 저녁 도준이 돌아왔을 때, 하윤은 120%로 잘 보이려고 했다.하윤은 발꿈치를 들고 도준의 외투를 벗겨주었다.“여보 왔어요? 어땠어요? 오늘 일은 힘들지 않았어요?”도준이 하윤을 힐끔 쳐다보고 소파에 앉아
하윤은 요즘 아들이 조금 이상한 것 같았다.도윤은 다른 애들과 달리 장난감으로 놀기 좋아하거나,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가장 많이 하는 일이 책을 보는 일이었다.가끔 하윤은 도윤이 너무 오래 앉아 있어 힘들까 봐 텔레비전 앞에 데려와서 애니메이션을 틀어줬다.그러나 하윤이 할 일을 하고 돌아오니, 도윤이 뉴스 채널을 돌려서 재밌게 보고 있었다.소파 위에 있는 작은 아들을 보고 하윤은 걱정이 앞섰다.‘설마 내가 너무 연습에 몰두해서 아들을 소홀히 했나? 그래서 아들이 상처를 받아서 저런가? 안 돼! 도윤에게 완벽한 동년을 줄 거야!’하윤은 이 일이 엄청나게 큰 일이라고 생각해서 한동안 생각하고 도윤을 데리고 나이가 비슷한 아이들과 많이 만나게 하려고 했다. 많이 만나면 도윤의 동심이 돌아오지 않을까 싶었다.하윤은 어디를 가던 도우미가 자기를 보는 것이 싫어, 그냥 아파트에 살았다. 이곳에는 아이들이 노는 놀이터가 있었고 그중에 모래로 촉감놀이 하는 곳이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하윤은 그곳에 도윤을 데리고 가기로 마음먹었다.날씨가 좋아 하윤은 도윤의 손을 잡고 그를 집 밖으로 데리고 갔다.모래가 있는 곳으로 가자, 도윤은 모래를 뿌리며 재밌다고 웃어대는 친구들을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하윤은 도윤의 표정을 보지 못하고 신나게 말했다.“도윤아, 친구들 얼마나 재밌게 놀아, 우리도 얼른 들어가서 놀자.”도윤은 눈썹이 붙을 정도로 찌푸렸지만, 하윤이 기대에 찬 모습에 하윤과 함께 놀아줘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래서 도윤은 하윤이 시키는 대로 신발을 벗고 양말을 신은 채로 하윤과 함께 모래에 들어갔다.도윤의 눈썹과 눈은 하윤을 닮았고 나머지는 도준과 똑같았다. 너무 잘생겨서 순식간에 다른 애들의 주의를 끌었다.한 아이가 도윤에게 말했다.“우리 같이 모래 파서 궁전 만들자!”그 아이가 손을 잡으려고 하자 도윤이 한 걸음 물러났다.“미안, 난 엄마랑 놀아야 해서.”하윤은 도윤이 자기랑 놀고 싶어 하는 줄 알고 마음속으로
하윤이 해성시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됐는데, 소혜에게서 전화가 왔다. 소혜는 딸 민효연이 첫돌 생일을 쇠는 김에 미뤘던 결혼식도 같이 한다고 했다.지훈이 산을 구매해서 이제 산속에서 결혼식을 한다고 했다.하윤이 깜짝 놀랐다.“결혼식 한다고?”“네!”소혜는 간식을 먹으며 말했다.하윤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소혜를 불렀다.“소혜야.”소혜가 목을 쭉 뻗었다.“네?”지훈이 욕실에서 몸을 내밀자, 빛나는 눈은 여우처럼 사람을 홀렸고 머리가 젖어 더욱 섹시해 보였다.지훈의 보조개는 아주 귀여웠다.“수건 가져다줘.”지훈의 섹시한 모습에 소혜가 다급히 말했다.“언니, 오빠한테 언제 시간 되는지 물어봐 줄래요? 그럼, 이렇게 정하고 저는 남자 만지러, 아, 아니, 수건 가져다주러 갈게요!”‘헤헿.’통화를 마친 하윤이 소혜가 보낸 웨딩사진을 보고 마음이 조금 찡했다.소혜를 보고 그런 것이 아니라 지훈을 보고 그런 느낌이 들었다.저녁 식사를 할 때, 하윤이 이 일을 도준에게 말했다.“지훈이 소혜랑 결혼식 올린대요. 다음 달에 한다는데, 당신이 언제 경성에 있는지 물어보라고 하던데.”도준이 하윤을 바라봤다.“그건 당신한테 달린 거 아닌가? 당신이 자꾸 밖으로 돌아다니니까 내가 힘을 좀 써서 당신을 잡아와야지.”“말하는 것 좀 봐요. 제가 무슨 나쁜 일을 하는 사람처럼 말하네요? 다 연습하러 가는 거지.”하윤은 젓가락을 입에 물고 일부러 아까 했던 말을 반복했다.“소혜랑 지훈이 결혼식 한대요.”도준은 물을 마시고 콧소리가 섞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응.”도준이 눈치채지 못하자, 하윤은 더 선명하게 눈치를 줬다.“아니, 쟤네는 아이가 태어난 뒤에 미뤘던 결혼식 올리는 거네요?”도준이 웃으며 말했다.“아니면? 아기를 배속에 다시 밀어 넣고 결혼식 할 수는 없잖아?”하윤은 화가 나 그릇에 담겼던 완자에 구멍을 뚫었다.“맞아요! 맞는 말이죠!”도준이 눈치가 없자, 하윤은 밥을 다 먹고 나서도 도준과 한마디도 하지 않고 텔레비전을 봤다.
경성에서 하윤이 자기 전에 핸드폰을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침대에서 급히 일어나 욕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여보!”“도준 씨!”“도준 씨!!”욕실의 안개가 도준의 넓은 어깨에 흩어졌고 도준은 가운을 걸치고 나왔다. 가슴팍이 보였고 물기를 채 닦지 않아 가슴팍과 근육을 따라 아래로 흘러내렸다.도준은 하윤의 다급한 부름에 어디 부딪힌 줄 알고 급히 나왔는데, 나와보니 하윤이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파닥거리고 있었다.도준은 들고 있던 수건으로 하윤의 엉덩이를 때렸다.“왜 그래? 무슨 귀신이라도 봤어?”하윤은 침대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도준의 어깨에 놓고 핸드폰을 도준에게 들이밀었다.“빨리 봐봐요! 빨리!”하윤이 너무 날뛰어 핸드폰을 너무 가까이 대는 바람에 도준은 화면이 잘 보이지 않았다.도준은 하윤의 손목을 뒤로 잡아당겼지만 하윤이 손을 흔드는 바람에 인내심이 없어 하윤의 허리를 안고 침대에 눕혔다. 혹시라도 너무 흥분해서 침대 밑으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보기 귀찮으니까 얘기해 줘.”“고은지가 결혼한대요! 누구랑 하는지 맞혀 봐요!”도준이 물어보기도 전에 하윤은 참지 못하고 얘기했다.“곽준호! 곽도원의 아들 말이에요! 세상에, 아무런 연관이 없던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결혼하게 된 거죠?”도준은 침대에 기대며 말했다.“아무 연관이 없진 않지. 전에 곽도원이 고은지를 새 아내로 맞이한다고 술자리를 열었었어.”“네?”하윤이 깜짝 놀랐다.‘그럼, 고은지가 곽준호 새엄마? 세상에! 나보다 더 용감하네?’하윤은 참지 못하고 도준을 밀었다.“얼른 얘기해 봐요.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도준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팔을 하윤의 다리에 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하윤은 도준의 팔을 치워버렸다.“쳇, 당신도 몰라요?”하윤의 귀여운 모습에 도준이 하윤의 볼을 꼬집으며 그녀를 돌렸다.“그렇게 알고 싶으면 결혼식에 가면 되겠네.”하윤은 볼이 꼬집혀서 말을 똑바
준호는 가볍게 물었지만, 눈빛에는 긴장함이 깃들어 있었다.준호는 은지의 차가운 얼굴을 보고, 그녀의 마음도 자신처럼 뜨거운지 보아낼 수 없었다. 그리고 은지가 왜 준호를 찾지 않고 준호가 왔을 때 그에게 기회를 주는지 알지 못했다.사람은 누구나 욕심이 수도 없이 많아진다. 은지를 볼 수 없을 때는 볼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또 만나니까 가지 말라고 잡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가지 말라고 잡으면 은지 마음속에 준호가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준호의 마음은 조각조각으로 나뉘어 흩어져 버렸다.준호의 손에는 점점 힘이 들어갔고 자신의 기분을 은지가 느끼게 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난 너 속이기 싫어, 난 너 없어도 잘 살아.”준호의 손에 힘이 빠졌고 빛나던 눈도 빛을 잃었다.준호가 기분이 처져 손을 떼려고 하는데, 은지의 차가운 손이 준호의 손등을 감쌌다.“근데 네가 있으면 난 더 기분이 좋아서 매일 행복하게 살 거 같아.”실망했던 준호는 조금 희망을 얻고 말했다.“왜 말을 그렇게 늦게 해! 날 그렇게 힘들게 할 거야?”은지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아마도?”준호는 은지가 웃는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었고, 이렇게 정말 기뻐서 나오는 웃음은 더 본 적이 없었다.준호는 성큼성큼 은지에게 다가가 입맞춤했다.“고은지, 너 이번에 또 가면 너 절대 안 놔줄 거야!”“응.”비음이 섞인 은지의 목소리에 준호의 몸은 순식간에 타올랐고 준호는 은지를 품에 안았다.“더 이상 나 화나게 하면 안 된다?”“될수록 그렇게 해볼게.”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말했다.“네 성격에는 문제가 없어?”“너!”준호는 화를 내고 싶었지만 계속 품에 안고 싶었던 은지를 안고 있어 화를 낼 수 없었다.“성격 안 좋은 거 나도 알아, 차근차근 알려주면 나 다 고칠 수 있어.”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도 말은 잘 듣네.’“다 고쳐도 나 좋아해야 된다? 안 그러면 너 안 놔줄 거야!”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될
아까는 은지에게 핍박을 당해 자기도 모르게 질문이 나왔다.두 사람은 마주 보며 차에 앉아 있었고 은지가 준호를 지그시 바라보자, 준호는 그 물음을 다시 물어볼 수 없었다.그러나 준호가 물어보지 않았는데, 은지가 고개를 끄덕였다.“생각한 적 있어.”아까까지 겨울의 추위에 덜덜 떨던 준호가 은지의 대답에 봄으로 끌려온 것 같았다.준호는 자기가 잘못 들은 것인지 알지 못했지만, 기분이 좋아 다시 물었다.“뭐라고?”은지는 담담하게 바로 대답했다.“이 6개월 동안 너 생각한 적 있다고.”이 6개월 동안 은지는 준호처럼 어린 사람, 준호처럼 무모한 사람, 은지를 마음에 들어한 사람,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 중에 준호처럼 진심으로, 물을 끼얹어도 꺼지지 않는 불씨와 같은 열정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은지는 30여 년간 계속 연기를 했었다. 이성희한테서 귀염을 받으려고, 고씨 집안의 사랑을 받으려고, 곽도원의 귀염을 받으려고 말이다.은지가 수많은 자태를 뽐냈지만, 준호는 은지가 가장 악독하고 차가운 모습을 보고도 좋아한 사람이다. 그래서 준호를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생각났다.“그럼, 앞으로 생각 안 할 거야.”“너!”준호가 다급히 말했다.“왜? 아까는 내 생각 했다며?”은지는 대답하지 않고 준호를 바라보았다. 은지는 준호의 화가 차츰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준호가 부끄러워하며 말했다.“나, 나도 네 생각 했어.”이때 차의 라디오에서 로맨틱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준호는 평소에 이런 노래를 듣기 싫어했는데, 지금 들으니 아주 로맨틱했다.준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데, 은지가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가게는 저기 있어.”은지가 물어보지 않자, 준호도 은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나랑 가는 거야, 마는 거야? 물어보고 싶은데 물어볼 용기가 안 나!’마을이 너무 작아 노래 한 곡이 채 끝나지 않았는데, 목적지에 도착했다.은지가 차에서 내리자, 준호도 따라서 내렸고 은지가 계단으로 올라가자, 준호도 따라
호텔 내부의 뜨거운 공기에 준호는 재채기를 했고 곧이어 식탁 앞에 앉아 있는 은지를 발견했다.반년이 지나 은지의 머리는 좀 길었지만 조금 헝클어진 상태로 풀어 놓았다. 회색 니트를 입고 있었고 전에 비해 가벼운 느낌이었다. 준호는 뜨거운 공기 때문에 목이 말랐다. 열정 넘치는 아저씨가 준호 보고 얼른 와서 앉으라고 하면서 술을 부어주었다.“은지 남자 친구죠?”준호는 은지가 또 전처럼 새엄마라고 할까 봐 경계했다.그러나 은지는 그저 간결하게 대답했다.“아니요.”준호는 한숨 돌렸다. 그러나 곧이어 준호는 또 짜증이 났다.이제 은지가 준호의 새엄마도 아니니 정말 아무런 사이가 아니다.희현은 은지에게 귓속말했다.“저 사람은 왜 또 언니 잡으러 온 거예요? 제가 문 지킬 테니까 도망갈래요?”말을 채 하지 못했는데, 은지가 희현의 입에 음식을 넣어주었다.“왜요? 이 계획 별로예요?”“아니, 너 목소리 너무 커서 저 사람이 너 보고 있어.”과연 고개를 돌리자, 준호가 살기 가득한 눈으로 희현을 바라보고 있었다.희현은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이제 막 유명해지려고 하는데, 죽으면 안 되지.’희현이 한 말 때문인지, 은지가 준호를 불러 놓고 준호랑 말을 안 해서인지, 밥을 채 먹지 못했는데, 그는 은지가 화장실을 갔을 때 막아섰다.은지가 손을 씻고 돌아섰는데, 준호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은지는 놀라지 않았고 오히려 준호가 지금까지 버틴 것이 기적 같았다.“손 씻으려고?”준호는 잘 얘기해 보려고 했는데, 은지의 말에 또 화가 났다.“손 씻는다고? 내가 이렇게 먼 곳까지 찾아왔는데, 손 씻으러 왔겠어?”은지는 준호의 손에 묻은 양념을 가리키며 말했다.“그건 아니겠지만, 손은 씻어야 할 거 같아.”준호는 은지가 한 말에 반박할 수 없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씻었다.손을 다 씻은 준호는 은지가 자리에 돌아갔을 줄 알았는데, 고개를 들어보니 은지가 옆에 서 있었다. 거울 속의 두 사람은 연인처럼 붙어 있었다.은지가 준호를 보자,
‘설마 고은지?’곧이어 여자가 목도리를 벗자, 얼굴이 보였다.은지가 아니라, 전에 은지와 함께 준호를 속였던 배우 희현이었다.연말이 되자, 밖에서 일하던 자녀들이 다 무진으로 돌아왔기에 마을에 못 보던 차가 많이 세워져 있어 희현은 준호의 차를 의심하지 않고 차 주변을 돌며 통화를 했다.“여보세요? 언니, 저 도착했는데, 어디 계세요?”“호텔 쪽에 있어요? 아, 그럴 줄 알았으면 택시 타고 호텔로 갔죠.”준호는 희현의 통화를 듣고 마음이 다시 뜨거워졌다.‘언니? 고은지인가? 고은지도 여기 있나?’...무진에 호텔이 하나밖에 없었지만, 항상 손님이 별로 없었다. 연말이라 손님이 더 없어서 주인장은 일 층에 탁자를 다 붙여서 음식을 해놓았다. 아이들이 모여 있어 희현이 왔을 때 아이들이 희현에게 달려왔다.“희현 언니!”희현은 통쾌하게 용돈을 나눠줬다.“이리와, 언니 돈 많이 벌어서 너희 용돈 줄게!”아이들을 보내고 희현은 창 옆에 앉아 있는 여자에게로 다가갔다.“언니, 저 왔어요!”은지가 처음에 무진에 왔을 때는 준호를 피하려고 온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피할 필요가 없어져 사탕 가게를 책방으로 바꾸고 알바생을 찾았다. 이 책방에서 책을 보면 사탕을 먹을 수 있는 시스템으로 했다.이 반년 동안 은지는 여행을 다니면서 지냈다.며칠 전, 호텔 주인이 은지보고 무진에 와서 연말을 보내라고 했고 아이들이 은지를 보고 싶다고 해서 오기로 했다.희현은 옆 마을에서 드라마를 찍다가 같이 식사하러 왔다.식탁에는 맛있는 음식이 한 상 차려져 있었고 사람들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둘러앉았다.밖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준호만이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차가워진 도시락을 들고 화를 냈다.준호는 은지가 외롭게 연말을 보낼 줄 알고 도시락까지 싸서 왔는데, 이렇게 화목하게 모여서 보낼 줄 몰랐다.준호는 몇 시간을 운전해서 여기까지 온 자신이 참 바보 같았다.이렇게 도시락을 건네주기는 좀 그렇고, 아무 말도 안 건네고 가자니 아쉬
준호도 그동안 못 완성했던 임무를 마저 수행해야 했다.전에는 은지를 찾는 데만 집중해서 임무는 뒷전이었다. 이번에는 각 지역을 하나씩 제대로 돌아봐야 했다.돌아본 곳이 많아질수록 준호의 마음도 점차 평온해졌다.마을에 오랫동안 있으면서 자연과 마주하니 준호의 성격도 많이 누그러졌다.3개월이라는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고 준호는 남한성에 돌아가 만족스러운 결과를 냈다.팀장은 준호가 전과 달라진 모습에 칭찬했다.“이런 일 많이 하니까 좋은 점이 있네.”...그 후로 준호는 예전처럼 훈련하고 임무를 수행했다.이곳에 있으면 외계의 간섭을 덜 받기에 사람들이 준호의 집안이 현재 어떤 상황인지 개의치 않았다.그저 매일 밤 침대에 누우면 준호는 신옥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은지 씨가 정말 차가운 사람이라면 날 위해 비밀을 지켜주지 않았을 거야.’신옥영도 이 비밀을 준호가 알게 되면 많은 것을 바꾸게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은지처럼 작은 일도 따지는 사람은 무조건 알았을 것이다.준호는 전에 은지가 아무런 감정이 없는 냉혈 동물인 줄 알았는데, 지금은 잘 알 수 없었다.‘고은지 나한테 정은 있었나?’준호는 이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이 아프기도 했고 뜨겁기도 했다.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에 쉽게 들 수 없었다.‘만약 고은지가 나한테 마음이 없다면 이미 놔줬으니까 다시 가서 방해하면 안 돼. 근데 혹시 나한테 마음이 있었다면?’...눈 깜짝할 사이에 연말이 되어 길거리는 연말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준호는 신옥영이 머무는 저택으로 갔는데, 집안이 시끄러웠다.하나가 장원수를 지휘하며 집을 꾸몄고 하나는 신옥영과 함께 음식을 만들며 신옥영에게 애교를 부렸다.올해에 준호는 신옥영의 저택에서 이 부녀를 자주 봤는데, 처음에 그들을 만났을 때, 살기 가득한 눈으로 장원수를 쏘아보며 일자리며 가족 관계까지 다 물어봤었다. 나쁘지 않았다.그러나 신옥영은 재혼할 마음이 없어 보였고 준호는 신옥영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자기는 신옥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