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혜는 예전부터 사람들이 민 씨네 집안의 부자들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들었었다. 첫째 도련님은 웃음 속에 칼을 숨기고, 둘째 도련님은 두말하면 잔소리이며, 다섯째 도련님은 놀고먹으며 생활을 즐기지만, 넷째 도련님이 바로 실질적인 명문 귀공자라는 것을 말이다.그러나 이런 말을 들었을 때, 그녀는 아직 어려서 부잣집 도련님들이 얼마나 잘나가는 줄 몰랐다.진작 알았더라면 일찍부터 돈을 모았을 텐데 말이다....경성.우아한 분위기의 레스토랑에서 남자는 스테이크를 썰고 있다. 그의 맞은편에 앉은 젊은 여자는 그를 보자마자 귀하게 자란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 튼튼해 보이는 몸에 매끈한 피부, 남자를 바라보는 여자의 눈에는 하트가 나오고 있었다.잘생기고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와 예쁘고 수줍음이 많은 여자는 정말 잘 어울렸다. 이런 그림을 본 소혜는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가장 구석에 있는 식탁에 기대어 있던 소혜는 돈이 없는 자신이 그런 러브 스토리의 주인공이 될 수 없음에 화가 났다.소혜의 인간미 없는 오빠한테서 지훈이 강원 부잣집 딸의 눈에 들어 그 집에서 4,000억을 주고 지훈을 사위로 삼겠다고 했다는 것을 들은 뒤로 소혜는 위기감을 느꼈다.그래서 그녀는 세 가지 목표를 세웠다. 첫째, 지훈이 다른 집의 사위가 되기 전에 단단히 붙잡고 같이 자기!둘째, 만약 저녁잠이 아니라면 낮잠도 괜찮다.셋째, 만약 낮잠도 자지 못한다면 돈을 어디에다 썼는지는 알아내야 한다!소혜가 지훈을 주시하며 웅대한 계획을 세우고 있을 때 시야가 가로막혔다.직원이 이를 가득 드러내며 미소를 지었다.“손님, 주문 도와드릴까요?”지훈 때문에 비워진 자기 지갑을 만지며 소혜는 조심스럽게 대답했다.“야채 샐러드 하나 주세요.”“네, 7만 2천 원입니다. 결제 도와드리겠습니다.”“야채 샐러드가 7만 원이라고요?”“네, 저희 가게에서 쓰는 야채는 모두 세계 각지에서 수입해 온 수입산 야채이고, 수석 셰프께서 요리해 주시기 때문에 많이들 찾아주십니다.”소혜는
유진의 분석을 들은 지훈이 웃었다. 준수한 외모에 웃으면 여우처럼 가늘어지는 눈매가 눈에 뜨인다.“미안. 나한테 그런 사연은 없어. 그냥 단순히 돈을 좋아할 뿐이야.”“왜요?”돈을 언급하자 지훈의 눈에서 빛이 났다.“나한텐 계좌에 점차 커지는 숫자가 엄청 매혹적으로 다가와.”그의 눈은 이미 돈에 도취한 사람 같았다.“돈으로 네가 필요한 모든 물건을 바꿀 수 있고, 필요하지 않을 땐 그저 계좌에 가만히 있을 뿐이지. 이거 봐, 돈처럼 아름다운 물건이 또 있어?”유진이 그런 지훈의 모습을 보고 이해가 가지 않았다.“지훈 오빠, 오빠는 부잣집 도련님인데, 다른 사람들이 돈 너무 밝힌다고 얘기하는 게 두렵지 않으세요?”지훈은 기대에 찬 눈빛으로 대답했다.“그 말을 한 사람들은 돈을 나한테 줄 수 있을까?”“그건...?”유진은 말문이 막혔다.지훈은 손목시계를 보았다.“두 시간 다 됐네. 연장할래?”지훈의 잘생긴 얼굴을 보고 그녀는 블랙 카드를 툭 쳤다.“연장할게요!”...그 뒤로 지훈은 유진과 함께 디저트를 먹고 백화점을 돌아다니고 저녁을 먹었다.유진이 지훈을 집에 데려다주겠다고 하자 지훈은 차 문에 기대어 손목시계를 두드렸다.“미안하지만 이미 9시야. 이제부터의 시간은 나의 자유시간이라 외부에 판매하지 않아.”말을 마치자마자 그는 유진의 차 문을 닫고 자신의 차로 향했다.“저기, 지훈 오빠!”유진을 보내고 지훈은 민 씨네 저택으로 돌아왔는데, 문을 열고 들어가자, 누군가 그의 허벅지를 껴안았다.“지훈!”지훈이 고개를 숙이자 하루 종일 그를 기다린 먼지투성이가 된 소혜를 발견했다. 그녀는 이를 바득바득 갈며 지훈을 보고 있었다.“너!”지훈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무슨 일이야?”소혜는 울상을 지었다.“바지 벗어서 나한테 보여줄 수 있어?”지훈이 나가려 하자 소혜는 마구 소리쳤다.“장사를 할 땐 사람 사이의 정을 고려하지 않아도 되지만 우린 친척이잖아! 어떻게 물 한 잔을 안 주냐?”10분 후, 소혜는 거실에 앉
지훈은 소혜의 생각은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친절하게 지갑을 제자리에 돌려놓았다.“기사님보고 너 데려다주라고 말해 놓을까?”소혜가 고개를 끄덕이려 하자 지훈은 방금 떠오른 듯 안타까워했다.“맞다, 내 운전기사 휴가 내고 고향에 갔어. 미안해.”소혜는 화가 났다.‘내가 너 득의양양한 거 모를 줄 아나?’소혜는 무리수를 던졌다.“너도 봤잖아. 나 택시 탈 돈도 없고, 살 곳도 없어. 그래도 친척인데 하룻밤만 재워 줘.”그녀는 소파에 있는 쿠션을 안고 말했다. “나 소파에서 자면 돼.”지훈이 거절하기 전에, 그녀는 큰소리쳤다.“이 어두컴컴한 밤에 나 같은 소녀가 만약 어떤 변태한테 잘못 걸려서 사고라도 나면, 둘째 형님한테 뭐라고 할 건데!”지훈은 눈썹을 찌푸렸다.“나는 우리 형이 널 그렇게까지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생각하지 않아. 사실 나는 둘째 형수를 제외하고 민도윤도 형이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을걸?”“게다가.” 지훈은 소혜를 한 번 보았다.“널 집에 남겨 두면 나도 위험하다고 생각해.”소혜는 화가 나서 발을 동동 굴렀다. 그녀는 소파에 뛰어올라 소파의 높이를 빌어 지훈을 가리키며 화를 냈다.“너, 너, 나 너한테 40억 넘어 썼어! 소파 하루 빌려 쓰겠다는데 왜 그렇게 굴어! 네가 이렇게 도덕이 없는 사람인 줄 알았으면 이 돈 가지고 스틱스에 갔을 거야! 경수혁은 너처럼 이렇게 무정하지 않아!”지훈은 미소를 지었다.“미스 진, 네가 밟고 있는 이 소파 얼마짜린지 알아?”“어...?”소혜는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피부보다 부드럽고 광택이 나는 소파를 바라보았다. 비싸 보이는 소파에서는 돈 냄새가 풍겨 왔다. 지훈의 말을 들은 소혜는 소파 위에서 뛰던 동작을 멈췄다.“어, 얼마야?”“많지도 않고 적지도 않아. 마침, 네가 나한테 쓴 돈보다 세 배가 많아. 가죽을 한 번 관리하는 데만 해도 1,800만 원 넘어 드는데, 네가 남긴 발자국은.”지훈은 안타까움을 드러내며 계속해서 얘기했다.“적어도 5,400만 원은 필요해
지훈이 몸을 돌리자 소혜는 중얼중얼 혼잣말했다.“헤헤, 수혁을 찾아가 축하 파티 열어야겠어.”“20만 원이면 충분할 거야.”소혜가 열심히 돈을 세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 돈을 모두 가져가 버려 5천 원조차 남지 않았다.소혜는 너무 화가 났다.“너 왜 그래!”지훈은 웃으며 대답했다.“이자.”소혜는 이해할 수 없었다.“아니, 이렇게 적은 돈까지 탐낸다고?”지훈은 돈을 만지작거리며 아쉬워했다.“좀 적긴 해도 돈은 돈이잖아. 이거라도 만족할게.”말을 마치자, 그는 소혜에게 말할 기회조차 주지 않고 돈을 주머니에 넣고 위층으로 올라갔다.소혜는 지훈의 뒷모습을 보고 울먹이며 이를 갈았다. ‘이제 돈이 생기면 꼭 지훈을 붙잡고 잘 거야!’‘근데 언제쯤 돈이 생길 가...?’...다행히도 지훈이 너무 나쁜 사람은 아니라 소혜를 기숙사에 쫓아 보내지 않고 게스트 룸에 안배해 주었다.그녀의 강력하게 요구하에 하녀는 그녀에게 지훈과 같은 층에 있는 방을 청소해 주었다. 비록 지훈의 방은 중간에 있고 소혜의 방은 구석에 있지만, 그녀는 자신을 위로했다. ‘같은 층에서 자는데, 한 침대에서 자는 일도 멀지 않았을 거야.’샤워를 마치고 지루함을 느낀 소혜는 인스타그램을 보다가 지훈과 자신이 맞팔한 사이가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고 예전의 일이 떠올랐다.그녀가 첫 달에 지훈이 부잣집 도련님이라는 생각에 조심스러워서 바로 VIP 카드를 만든 것을 후회했다. 처음부터 입맞춤할 거라 전혀 생각하지 않았고 기껏해야 손잡는 정도라 예상했었다.그 뒤로 두 달 동안은 VIP 손님이 아니라 그저 문자로만 애정 표현을 주고받는 것이 싱겁다고 생각했다.‘지훈이 이렇게 돈만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았더라면 모기처럼 몸에 혹을 만들어 주는 건데!’‘흑흑, 지금 만나는 부잣집 아가씨는 그렇게 돈이 많은데, 자연스럽게 서로 간의 진한 교류가 있었겠지!’소혜는 생각할수록 마음이 아팠다. 불이 꺼진 복도를 보더니 갑자기 대담한 생각이 든 듯싶었다. ‘이렇게 어두운데 사람
“아니, 넷째 도련님.”“내 옷 벗기지 마! 안돼!”“옷만 벗고 바지는 안 벗으면 안 돼.”침대에서 소혜가 잠꼬대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옆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꿈속의 그녀는 그 웃음소리가 지훈의 웃음소리인 줄 알고 따라 웃기 시작했다.“넷째 도련님, 너 웃는 거 정말 예쁘네. 나는 모기라 너의 몸을 다 물어 놓을 거야, 헤헤헤.”소혜가 꿈에 푹 빠져 있을 때, 또다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그전보다 더욱 선명하고, 큰소리였다. 그 웃음소리는 소혜를 꿈속에서 끄집어냈다.소혜가 눈을 뜨자 그녀의 침대 옆에 서서 몰래 웃고 있는 두 가사도우미를 보았고, 잠시 어리둥절해 있었다. 소혜는 방금 전의 모든 것이 꿈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소혜는 알람 소리를 전혀 듣지 못했다.“깼어?”소혜는 부드러운 남자 목소리를 듣고 뻣뻣해진 목을 돌려 소리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지훈이 문 쪽에 서 있었다.“넷째 도련님...?”반 시간 전, 지훈이 외출하려고 ‘운전기사’를 깨우러 갔는데, 한참을 두드려도 반응이 없어 도우미를 불러 문을 열고 들어가 사고가 났는지 확인했었다. 그러나 문이 열리자마자 소혜가 한 그런 잠꼬대를 들을 줄은 꿈에도 몰랐었다.자신이 한 추잡한 잠꼬대를 모두 들었다는 것을 안 소혜는 얼굴을 들 수 없었다. 침대 옆에 있던 도우미가 여전히 몰래 웃고 있는 것을 보고, 그녀는 이 상황을 포기한 듯 그대로 다시 누워버렸다.“나 깼으니까 오늘 공연은 여기서 끝! 더 듣고 싶으면 내일 아침에 다시 오도록.”지훈은 침대에 대자로 뻗은 소혜를 보고 웃으며 도우미에게 말했다.“가서 일 봐.”도우미가 자리를 뜨자 지훈은 손목시계를 보았다.“나 8시에 나가니까 너한테 15분이라는 시간이 남아있어.”소혜는 손으로 OK를 해 보이며 시간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지훈은 바로 자리를 떠나지 않고 소혜가 입고 있던 체크무늬 긴팔 잠옷을 바라보았다.“너 꿈에서 날 본 게 맞아?”‘꿈에서 널 안 보면 어떻게 네 이름 부르겠어?’소혜는 어쩔 수 없이
유진이 차에 탄 후 소혜를 발견하자 눈살을 찌푸렸다.“누구?”지훈은 소혜의 엉망진창인 뒤통수를 보고 대답했다.“내 운전기사야. 네가 가고 싶은데 알려주면 돼.”“기사라고요?”유진은 입을 삐죽 내밀고 소혜를 살펴보았다.“기사들은 보통 다 아저씬데, 이사람은 왜 이렇게 젊어요?”소혜는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막 대답했다.“제가 방금 수염을 밀어서요. 믿기 힘드시면 한 번 만져 보세요. 저 다리털도 엄청나게 굵어요.”“푸.”그 말을 들은 유진이 웃었다.“됐어. 지훈 오빠는 너처럼 그렇게 거친 여자를 좋아하지 않을 거야. 운전해.”이렇게 소혜는 두 사람을 촬영 장소까지 모셔다드렸다.도착해서야 여기가 웨딩드레스 가게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유진은 수줍은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지훈 오빠, 저랑 웨딩사진 찍을래요?”‘뭐야! 이렇게 논다는 거지?’그러나 소혜를 놀라게 한 것은 지훈이 뜻밖에도 유진의 부탁을 거절한 것이다.“유진, 웨딩사진은 특별한 의미가 있어. 이렇게 가볍게 촬영하는 거 아니야.”유진은 조금 실망했지만, 그저 시도해 본 것이기 때문에 투덜거리며 메이크업을 받으러 갔다.소혜는 지훈을 바라보았다.“그래도 넘지 말아야 할 선은 있네?”“넘지 말아야 할 선?”“그래, 웨딩사진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으니 마음대로 찍으면 안 된다며?”“아, 그거?”지훈은 미소를 지었다.“특별한 의미가 있는 물건은 당연히 특별한 가격으로 사야지. 오늘은 그저 평범한 일상을 즐기는 가격인데, 웨딩촬영을 하면 나만 손해잖아?”‘그럴 줄 알았어!’얘기를 하던 중 유진이 메이크업 실에서 머리를 내밀었다.“야, 너.”소혜는 자신을 가리켰다.“저요?”“그래, 바로 너. 와서 가방 좀 들어줘.”“저는 운전기사라 이런 서비스는 없습니다.”“팁 줄게!”“가요, 아가씨~”...메이크업 실, 유진이 앉자마자 소혜가 물었다.“아가씨, 보통 팁을 얼마나 줘요?”유진은 이 말을 듣자마자 화가 너무 났다.“왜 너희 넷째 도련님도 이렇게 돈을 좋아
저녁에 저택으로 돌아온 소혜가 이 팔찌로 지훈과 빚을 갚으려 할 때 지훈은 그 팔찌를 몰수했다.“내 것이야.”소혜는 깜짝 놀랐다.“아니, 장난 그만 쳐!”지훈은 소혜가 오늘 아침에 서명한 계약서를 꺼내 그중의 한 부분을 가리키며 말했다.“여기 씌어 있잖아.”[근무 기간의 소득은 사장이 갖는다.]‘잠깐, 이건 내가 아침에 외출하기 전에 도우미가 준 종이 아니야? 이게 몸을 파는계약서였다니!’“하늘이시여, 살길이 없어요!”자신이 직접 누른 도장을 보고 소혜는 철저히 절망했다.유일하게 다행인 것은 운전기사의 일을 하면 먹고 자는 것이 포함이라는 사실이다. 저녁, 소혜는 밥상 옆에 앉아 이리저리 관찰하고 있었다. 그녀는 지훈이 먹는 것이라면 무조건 좋은 것일 거라는 생각에 뺏긴 팔찌 값만큼 먹어오리라 다짐했다.잠시 후, 도우미는 작은 도자기 잔 두 개를 소혜와 지훈의 앞에 놓았다.소혜는 지훈이 우아하게 그 뚜껑을 여는 것을 보고, 그녀도 따라서 열어 보았는데, 그 안에는 무슨 국물인지 알 수 없는 국물이 들어 있었다.소혜는 그제야 이 국물이 저녁 식사라는 것을 깨달았다.‘아니, 고작 이거뿐이야?’지훈이 먼저 열지 않았다면 소혜는 이것이 이쑤시개 통인 줄 알았을 것이다.소혜는 숟가락을 들기 귀찮아서 직접 그릇을 들고 반 그릇을 마셨다. 지훈이 국을 마시는 것을 본 소혜는 입맛을 다시며 물었다.“메인 요리는?”“이것이 메인 요리야.”“뭐?!”소혜는 화가 났다.“너무 짠 거 아니야? 나 하루 종일 소처럼 일했는데, 소고기 좀 줘야 하는 거 아니야?”지훈은 미소를 지었다.“이거 소 한 마리보다 더 비싸. 너 지금 이미 소 반 마리를 먹은 거야.”소혜는 그릇에 있는 국을 보고 울먹였다.“어쨌든 비벼 먹게 밥 한 그릇 줘.”소혜가 국밥을 다 먹고, 지훈도 밥을 다 먹고 나서 그는 소혜를 보며 웃었다.“내일 아침에 봐.”“아! 잠깐만!”소혜는 입을 닦고 쫓아갔다.“저기, 묻고 싶은 게 있어!”지훈은 미소를 지으며 자신이 소혜
꿈이 너무 진짜 같고 중독된 소혜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침대 위에 무릎을 꿇고 경건하게 절을 했다.“너무 감사합니다! 더 부탁드려요!”또 늦잠을 잘 가봐 소혜는 자기 전에 문을 닫지 않았다. 지훈은 소혜의 방 앞을 지나가다가 마침 그녀가 침대에 무릎을 꿇고 중얼거리는 것을 보았다.“미스 진, 혹시 내가 모르는 종교 믿어?”또다시 이런 모습을 들킨 소혜는 창피했다. 그녀는 지훈을 등지고 자신이 너무 변태적으로 보이지 않게 하려고 입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였다.“그래, 나는 침대 신을 믿어. 침대 신은 나의 아름다운 꿈이 실현되도록 지켜줄 거야.”“아, 그래. 뭐 좀 준비해 줘?”“그럴 필요 없어, 침대 신을 성의 있게 믿으면 효과가 있어.”“좋아, 그러면 나는 너의 예배 의식을 방해하지 않을게, 먼저 아래층으로 내려갈게.”지훈이 가는 소리가 들리자, 무릎을 꿇고 있던 소혜는 몸이 풀려버렸다. ‘하마터면 또 창피한 일이 생길 뻔했네!’...오늘의 일은 여전히 유진 공주를 목적지까지 모시는 것이다. 오늘의 목적지는 놀이동산이다.유진과 지훈이 놀고 있을 때 소혜는 서 있었고, 그 둘이 아이스크림을 먹을 때 소혜는 지켜보고 있었다.둘이 바이킹을 타려고 기다리는 동안 옆에서 누가 말을 걸었다. “아가씨, 이것도 못 타요?”소혜가 고개를 돌려 보자 어떤 대학생이었다. 소혜는 자신이 심부름꾼이라는 사실을말할 수 없었기에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네.”대학생은 그 말을 듣고 웃었다.“저도요. 좀 부끄럽지만, 전 남잔데도 이런 거 못 타요.”“그게 뭐 어때서요. 억지로 타다가 다른 사람 몸에 토하는 것보다 나아요.”이 말을 들은 그 학생은 웃으며 소혜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저는 양석현이라고 합니다.”“저는 진소혜라고 합니다.”석현은 기뻐했다.“아, 이름 예쁘시네요.”소혜는 석현의 희고 깨끗한 얼굴을 보고, 고질병이 또 도졌다. “고마워요, 번호 드릴게요? 다음에 또 만나요.”소혜가 능숙하게 석현에게 번호를 주려고 하는데, 가늘고
연말이 되자, 하윤은 사람들 다 같이 경성에서 새해를 맞이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경성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진가연과 한성운도 그러고 싶어 했다.남은 사람은 양현숙이었다.하윤은 원래 양현숙을 데리고 경성에 오려고 했는데, 양현숙이 해성시의 집을 떠나기 싫어했다. 양현숙은 집을 지켜야 한다면서 오래 집을 비우면 너무 처량한 느낌이 난다고 했다.하윤은 양현숙이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집뿐만이 아니라 이성호와의 추억이다.그래서 하윤은 그렇게 요구하지 않고 도윤을 데리고 자주 보러 갔다.이번에 하윤의 요청에 양현숙이 기분 좋게 동의하면서 31일에 같이 새해를 맞이하기로 했다.하윤은 손님 맞을 준비를 했고 곧 새해가 다가왔다. 양현숙이 하윤에게 전화를 걸었고 조금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하윤에게 물었다.“하윤아, 네 오빠 귀국한다는데, 만나볼래? 싫으면 너희 방해하지 말라고 할게.”그때 병원에서 기분 나쁘게 헤어진 뒤로 만난 적이 없었다.승우는 도윤의 나이를 잘 기억하고 있어 가끔 나이에 맞는 장난감을 보내주었다.이렇게 여러 해 지나고 하윤은 전의 일을 마음에 담아주지 않았으며 오히려 너무 오랫동안 연락을 안 한 것에 대해 조금 자책했다. 양현숙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하윤은 양현숙이 중간에서 힘들까 봐 가볍게 말했다.“오빠 돌아왔으면 같이 오세요. 우리 한 가족 되게 오래 같이 못 만났잖아요?”양현숙은 기뻐서 대답했다.“알았어, 그렇게 오빠한테 전달할게.”...통화를 마친 하윤은 이 일을 도준에게 얘기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승우가 하윤의 오빠지만, 하윤이 이 이년 사이에 아무 이성과 접촉하지 않았다. 심지어 수컷 모기까지 도준은 하윤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도준은 승우를 항상 경계해 왔다.도준이 동의하지 않을까 봐 그날 저녁 도준이 돌아왔을 때, 하윤은 120%로 잘 보이려고 했다.하윤은 발꿈치를 들고 도준의 외투를 벗겨주었다.“여보 왔어요? 어땠어요? 오늘 일은 힘들지 않았어요?”도준이 하윤을 힐끔 쳐다보고 소파에 앉아
하윤은 요즘 아들이 조금 이상한 것 같았다.도윤은 다른 애들과 달리 장난감으로 놀기 좋아하거나,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가장 많이 하는 일이 책을 보는 일이었다.가끔 하윤은 도윤이 너무 오래 앉아 있어 힘들까 봐 텔레비전 앞에 데려와서 애니메이션을 틀어줬다.그러나 하윤이 할 일을 하고 돌아오니, 도윤이 뉴스 채널을 돌려서 재밌게 보고 있었다.소파 위에 있는 작은 아들을 보고 하윤은 걱정이 앞섰다.‘설마 내가 너무 연습에 몰두해서 아들을 소홀히 했나? 그래서 아들이 상처를 받아서 저런가? 안 돼! 도윤에게 완벽한 동년을 줄 거야!’하윤은 이 일이 엄청나게 큰 일이라고 생각해서 한동안 생각하고 도윤을 데리고 나이가 비슷한 아이들과 많이 만나게 하려고 했다. 많이 만나면 도윤의 동심이 돌아오지 않을까 싶었다.하윤은 어디를 가던 도우미가 자기를 보는 것이 싫어, 그냥 아파트에 살았다. 이곳에는 아이들이 노는 놀이터가 있었고 그중에 모래로 촉감놀이 하는 곳이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하윤은 그곳에 도윤을 데리고 가기로 마음먹었다.날씨가 좋아 하윤은 도윤의 손을 잡고 그를 집 밖으로 데리고 갔다.모래가 있는 곳으로 가자, 도윤은 모래를 뿌리며 재밌다고 웃어대는 친구들을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하윤은 도윤의 표정을 보지 못하고 신나게 말했다.“도윤아, 친구들 얼마나 재밌게 놀아, 우리도 얼른 들어가서 놀자.”도윤은 눈썹이 붙을 정도로 찌푸렸지만, 하윤이 기대에 찬 모습에 하윤과 함께 놀아줘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래서 도윤은 하윤이 시키는 대로 신발을 벗고 양말을 신은 채로 하윤과 함께 모래에 들어갔다.도윤의 눈썹과 눈은 하윤을 닮았고 나머지는 도준과 똑같았다. 너무 잘생겨서 순식간에 다른 애들의 주의를 끌었다.한 아이가 도윤에게 말했다.“우리 같이 모래 파서 궁전 만들자!”그 아이가 손을 잡으려고 하자 도윤이 한 걸음 물러났다.“미안, 난 엄마랑 놀아야 해서.”하윤은 도윤이 자기랑 놀고 싶어 하는 줄 알고 마음속으로
하윤이 해성시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됐는데, 소혜에게서 전화가 왔다. 소혜는 딸 민효연이 첫돌 생일을 쇠는 김에 미뤘던 결혼식도 같이 한다고 했다.지훈이 산을 구매해서 이제 산속에서 결혼식을 한다고 했다.하윤이 깜짝 놀랐다.“결혼식 한다고?”“네!”소혜는 간식을 먹으며 말했다.하윤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소혜를 불렀다.“소혜야.”소혜가 목을 쭉 뻗었다.“네?”지훈이 욕실에서 몸을 내밀자, 빛나는 눈은 여우처럼 사람을 홀렸고 머리가 젖어 더욱 섹시해 보였다.지훈의 보조개는 아주 귀여웠다.“수건 가져다줘.”지훈의 섹시한 모습에 소혜가 다급히 말했다.“언니, 오빠한테 언제 시간 되는지 물어봐 줄래요? 그럼, 이렇게 정하고 저는 남자 만지러, 아, 아니, 수건 가져다주러 갈게요!”‘헤헿.’통화를 마친 하윤이 소혜가 보낸 웨딩사진을 보고 마음이 조금 찡했다.소혜를 보고 그런 것이 아니라 지훈을 보고 그런 느낌이 들었다.저녁 식사를 할 때, 하윤이 이 일을 도준에게 말했다.“지훈이 소혜랑 결혼식 올린대요. 다음 달에 한다는데, 당신이 언제 경성에 있는지 물어보라고 하던데.”도준이 하윤을 바라봤다.“그건 당신한테 달린 거 아닌가? 당신이 자꾸 밖으로 돌아다니니까 내가 힘을 좀 써서 당신을 잡아와야지.”“말하는 것 좀 봐요. 제가 무슨 나쁜 일을 하는 사람처럼 말하네요? 다 연습하러 가는 거지.”하윤은 젓가락을 입에 물고 일부러 아까 했던 말을 반복했다.“소혜랑 지훈이 결혼식 한대요.”도준은 물을 마시고 콧소리가 섞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응.”도준이 눈치채지 못하자, 하윤은 더 선명하게 눈치를 줬다.“아니, 쟤네는 아이가 태어난 뒤에 미뤘던 결혼식 올리는 거네요?”도준이 웃으며 말했다.“아니면? 아기를 배속에 다시 밀어 넣고 결혼식 할 수는 없잖아?”하윤은 화가 나 그릇에 담겼던 완자에 구멍을 뚫었다.“맞아요! 맞는 말이죠!”도준이 눈치가 없자, 하윤은 밥을 다 먹고 나서도 도준과 한마디도 하지 않고 텔레비전을 봤다.
경성에서 하윤이 자기 전에 핸드폰을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침대에서 급히 일어나 욕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여보!”“도준 씨!”“도준 씨!!”욕실의 안개가 도준의 넓은 어깨에 흩어졌고 도준은 가운을 걸치고 나왔다. 가슴팍이 보였고 물기를 채 닦지 않아 가슴팍과 근육을 따라 아래로 흘러내렸다.도준은 하윤의 다급한 부름에 어디 부딪힌 줄 알고 급히 나왔는데, 나와보니 하윤이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파닥거리고 있었다.도준은 들고 있던 수건으로 하윤의 엉덩이를 때렸다.“왜 그래? 무슨 귀신이라도 봤어?”하윤은 침대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도준의 어깨에 놓고 핸드폰을 도준에게 들이밀었다.“빨리 봐봐요! 빨리!”하윤이 너무 날뛰어 핸드폰을 너무 가까이 대는 바람에 도준은 화면이 잘 보이지 않았다.도준은 하윤의 손목을 뒤로 잡아당겼지만 하윤이 손을 흔드는 바람에 인내심이 없어 하윤의 허리를 안고 침대에 눕혔다. 혹시라도 너무 흥분해서 침대 밑으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보기 귀찮으니까 얘기해 줘.”“고은지가 결혼한대요! 누구랑 하는지 맞혀 봐요!”도준이 물어보기도 전에 하윤은 참지 못하고 얘기했다.“곽준호! 곽도원의 아들 말이에요! 세상에, 아무런 연관이 없던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결혼하게 된 거죠?”도준은 침대에 기대며 말했다.“아무 연관이 없진 않지. 전에 곽도원이 고은지를 새 아내로 맞이한다고 술자리를 열었었어.”“네?”하윤이 깜짝 놀랐다.‘그럼, 고은지가 곽준호 새엄마? 세상에! 나보다 더 용감하네?’하윤은 참지 못하고 도준을 밀었다.“얼른 얘기해 봐요.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도준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팔을 하윤의 다리에 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하윤은 도준의 팔을 치워버렸다.“쳇, 당신도 몰라요?”하윤의 귀여운 모습에 도준이 하윤의 볼을 꼬집으며 그녀를 돌렸다.“그렇게 알고 싶으면 결혼식에 가면 되겠네.”하윤은 볼이 꼬집혀서 말을 똑바
준호는 가볍게 물었지만, 눈빛에는 긴장함이 깃들어 있었다.준호는 은지의 차가운 얼굴을 보고, 그녀의 마음도 자신처럼 뜨거운지 보아낼 수 없었다. 그리고 은지가 왜 준호를 찾지 않고 준호가 왔을 때 그에게 기회를 주는지 알지 못했다.사람은 누구나 욕심이 수도 없이 많아진다. 은지를 볼 수 없을 때는 볼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또 만나니까 가지 말라고 잡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가지 말라고 잡으면 은지 마음속에 준호가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준호의 마음은 조각조각으로 나뉘어 흩어져 버렸다.준호의 손에는 점점 힘이 들어갔고 자신의 기분을 은지가 느끼게 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난 너 속이기 싫어, 난 너 없어도 잘 살아.”준호의 손에 힘이 빠졌고 빛나던 눈도 빛을 잃었다.준호가 기분이 처져 손을 떼려고 하는데, 은지의 차가운 손이 준호의 손등을 감쌌다.“근데 네가 있으면 난 더 기분이 좋아서 매일 행복하게 살 거 같아.”실망했던 준호는 조금 희망을 얻고 말했다.“왜 말을 그렇게 늦게 해! 날 그렇게 힘들게 할 거야?”은지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아마도?”준호는 은지가 웃는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었고, 이렇게 정말 기뻐서 나오는 웃음은 더 본 적이 없었다.준호는 성큼성큼 은지에게 다가가 입맞춤했다.“고은지, 너 이번에 또 가면 너 절대 안 놔줄 거야!”“응.”비음이 섞인 은지의 목소리에 준호의 몸은 순식간에 타올랐고 준호는 은지를 품에 안았다.“더 이상 나 화나게 하면 안 된다?”“될수록 그렇게 해볼게.”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말했다.“네 성격에는 문제가 없어?”“너!”준호는 화를 내고 싶었지만 계속 품에 안고 싶었던 은지를 안고 있어 화를 낼 수 없었다.“성격 안 좋은 거 나도 알아, 차근차근 알려주면 나 다 고칠 수 있어.”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도 말은 잘 듣네.’“다 고쳐도 나 좋아해야 된다? 안 그러면 너 안 놔줄 거야!”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될
아까는 은지에게 핍박을 당해 자기도 모르게 질문이 나왔다.두 사람은 마주 보며 차에 앉아 있었고 은지가 준호를 지그시 바라보자, 준호는 그 물음을 다시 물어볼 수 없었다.그러나 준호가 물어보지 않았는데, 은지가 고개를 끄덕였다.“생각한 적 있어.”아까까지 겨울의 추위에 덜덜 떨던 준호가 은지의 대답에 봄으로 끌려온 것 같았다.준호는 자기가 잘못 들은 것인지 알지 못했지만, 기분이 좋아 다시 물었다.“뭐라고?”은지는 담담하게 바로 대답했다.“이 6개월 동안 너 생각한 적 있다고.”이 6개월 동안 은지는 준호처럼 어린 사람, 준호처럼 무모한 사람, 은지를 마음에 들어한 사람,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 중에 준호처럼 진심으로, 물을 끼얹어도 꺼지지 않는 불씨와 같은 열정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은지는 30여 년간 계속 연기를 했었다. 이성희한테서 귀염을 받으려고, 고씨 집안의 사랑을 받으려고, 곽도원의 귀염을 받으려고 말이다.은지가 수많은 자태를 뽐냈지만, 준호는 은지가 가장 악독하고 차가운 모습을 보고도 좋아한 사람이다. 그래서 준호를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생각났다.“그럼, 앞으로 생각 안 할 거야.”“너!”준호가 다급히 말했다.“왜? 아까는 내 생각 했다며?”은지는 대답하지 않고 준호를 바라보았다. 은지는 준호의 화가 차츰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준호가 부끄러워하며 말했다.“나, 나도 네 생각 했어.”이때 차의 라디오에서 로맨틱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준호는 평소에 이런 노래를 듣기 싫어했는데, 지금 들으니 아주 로맨틱했다.준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데, 은지가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가게는 저기 있어.”은지가 물어보지 않자, 준호도 은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나랑 가는 거야, 마는 거야? 물어보고 싶은데 물어볼 용기가 안 나!’마을이 너무 작아 노래 한 곡이 채 끝나지 않았는데, 목적지에 도착했다.은지가 차에서 내리자, 준호도 따라서 내렸고 은지가 계단으로 올라가자, 준호도 따라
호텔 내부의 뜨거운 공기에 준호는 재채기를 했고 곧이어 식탁 앞에 앉아 있는 은지를 발견했다.반년이 지나 은지의 머리는 좀 길었지만 조금 헝클어진 상태로 풀어 놓았다. 회색 니트를 입고 있었고 전에 비해 가벼운 느낌이었다. 준호는 뜨거운 공기 때문에 목이 말랐다. 열정 넘치는 아저씨가 준호 보고 얼른 와서 앉으라고 하면서 술을 부어주었다.“은지 남자 친구죠?”준호는 은지가 또 전처럼 새엄마라고 할까 봐 경계했다.그러나 은지는 그저 간결하게 대답했다.“아니요.”준호는 한숨 돌렸다. 그러나 곧이어 준호는 또 짜증이 났다.이제 은지가 준호의 새엄마도 아니니 정말 아무런 사이가 아니다.희현은 은지에게 귓속말했다.“저 사람은 왜 또 언니 잡으러 온 거예요? 제가 문 지킬 테니까 도망갈래요?”말을 채 하지 못했는데, 은지가 희현의 입에 음식을 넣어주었다.“왜요? 이 계획 별로예요?”“아니, 너 목소리 너무 커서 저 사람이 너 보고 있어.”과연 고개를 돌리자, 준호가 살기 가득한 눈으로 희현을 바라보고 있었다.희현은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이제 막 유명해지려고 하는데, 죽으면 안 되지.’희현이 한 말 때문인지, 은지가 준호를 불러 놓고 준호랑 말을 안 해서인지, 밥을 채 먹지 못했는데, 그는 은지가 화장실을 갔을 때 막아섰다.은지가 손을 씻고 돌아섰는데, 준호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은지는 놀라지 않았고 오히려 준호가 지금까지 버틴 것이 기적 같았다.“손 씻으려고?”준호는 잘 얘기해 보려고 했는데, 은지의 말에 또 화가 났다.“손 씻는다고? 내가 이렇게 먼 곳까지 찾아왔는데, 손 씻으러 왔겠어?”은지는 준호의 손에 묻은 양념을 가리키며 말했다.“그건 아니겠지만, 손은 씻어야 할 거 같아.”준호는 은지가 한 말에 반박할 수 없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씻었다.손을 다 씻은 준호는 은지가 자리에 돌아갔을 줄 알았는데, 고개를 들어보니 은지가 옆에 서 있었다. 거울 속의 두 사람은 연인처럼 붙어 있었다.은지가 준호를 보자,
‘설마 고은지?’곧이어 여자가 목도리를 벗자, 얼굴이 보였다.은지가 아니라, 전에 은지와 함께 준호를 속였던 배우 희현이었다.연말이 되자, 밖에서 일하던 자녀들이 다 무진으로 돌아왔기에 마을에 못 보던 차가 많이 세워져 있어 희현은 준호의 차를 의심하지 않고 차 주변을 돌며 통화를 했다.“여보세요? 언니, 저 도착했는데, 어디 계세요?”“호텔 쪽에 있어요? 아, 그럴 줄 알았으면 택시 타고 호텔로 갔죠.”준호는 희현의 통화를 듣고 마음이 다시 뜨거워졌다.‘언니? 고은지인가? 고은지도 여기 있나?’...무진에 호텔이 하나밖에 없었지만, 항상 손님이 별로 없었다. 연말이라 손님이 더 없어서 주인장은 일 층에 탁자를 다 붙여서 음식을 해놓았다. 아이들이 모여 있어 희현이 왔을 때 아이들이 희현에게 달려왔다.“희현 언니!”희현은 통쾌하게 용돈을 나눠줬다.“이리와, 언니 돈 많이 벌어서 너희 용돈 줄게!”아이들을 보내고 희현은 창 옆에 앉아 있는 여자에게로 다가갔다.“언니, 저 왔어요!”은지가 처음에 무진에 왔을 때는 준호를 피하려고 온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피할 필요가 없어져 사탕 가게를 책방으로 바꾸고 알바생을 찾았다. 이 책방에서 책을 보면 사탕을 먹을 수 있는 시스템으로 했다.이 반년 동안 은지는 여행을 다니면서 지냈다.며칠 전, 호텔 주인이 은지보고 무진에 와서 연말을 보내라고 했고 아이들이 은지를 보고 싶다고 해서 오기로 했다.희현은 옆 마을에서 드라마를 찍다가 같이 식사하러 왔다.식탁에는 맛있는 음식이 한 상 차려져 있었고 사람들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둘러앉았다.밖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준호만이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차가워진 도시락을 들고 화를 냈다.준호는 은지가 외롭게 연말을 보낼 줄 알고 도시락까지 싸서 왔는데, 이렇게 화목하게 모여서 보낼 줄 몰랐다.준호는 몇 시간을 운전해서 여기까지 온 자신이 참 바보 같았다.이렇게 도시락을 건네주기는 좀 그렇고, 아무 말도 안 건네고 가자니 아쉬
준호도 그동안 못 완성했던 임무를 마저 수행해야 했다.전에는 은지를 찾는 데만 집중해서 임무는 뒷전이었다. 이번에는 각 지역을 하나씩 제대로 돌아봐야 했다.돌아본 곳이 많아질수록 준호의 마음도 점차 평온해졌다.마을에 오랫동안 있으면서 자연과 마주하니 준호의 성격도 많이 누그러졌다.3개월이라는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고 준호는 남한성에 돌아가 만족스러운 결과를 냈다.팀장은 준호가 전과 달라진 모습에 칭찬했다.“이런 일 많이 하니까 좋은 점이 있네.”...그 후로 준호는 예전처럼 훈련하고 임무를 수행했다.이곳에 있으면 외계의 간섭을 덜 받기에 사람들이 준호의 집안이 현재 어떤 상황인지 개의치 않았다.그저 매일 밤 침대에 누우면 준호는 신옥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은지 씨가 정말 차가운 사람이라면 날 위해 비밀을 지켜주지 않았을 거야.’신옥영도 이 비밀을 준호가 알게 되면 많은 것을 바꾸게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은지처럼 작은 일도 따지는 사람은 무조건 알았을 것이다.준호는 전에 은지가 아무런 감정이 없는 냉혈 동물인 줄 알았는데, 지금은 잘 알 수 없었다.‘고은지 나한테 정은 있었나?’준호는 이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이 아프기도 했고 뜨겁기도 했다.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에 쉽게 들 수 없었다.‘만약 고은지가 나한테 마음이 없다면 이미 놔줬으니까 다시 가서 방해하면 안 돼. 근데 혹시 나한테 마음이 있었다면?’...눈 깜짝할 사이에 연말이 되어 길거리는 연말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준호는 신옥영이 머무는 저택으로 갔는데, 집안이 시끄러웠다.하나가 장원수를 지휘하며 집을 꾸몄고 하나는 신옥영과 함께 음식을 만들며 신옥영에게 애교를 부렸다.올해에 준호는 신옥영의 저택에서 이 부녀를 자주 봤는데, 처음에 그들을 만났을 때, 살기 가득한 눈으로 장원수를 쏘아보며 일자리며 가족 관계까지 다 물어봤었다. 나쁘지 않았다.그러나 신옥영은 재혼할 마음이 없어 보였고 준호는 신옥영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자기는 신옥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