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윤이 르네시떼에 도착했을 때 대문은 이미 닫혀 있었고 최수인은 뒤뜰 흔들의자에 앉아 라디오를 듣고 있었다.그러다 시윤을 보자 이내 눈을 뜨며 눈을 반짝거렸다.“윤이 씨, 오랜만이에요. 어째 점점 더 이뻐지네요? 이런 야심한 시각에 찾아온 거 설마 저랑 바람피우려는 거예요?”시윤은 수인의 앞에 앉으며 싱긋 웃었다.“그럴 배짱은 잊고요?”수인은 앞에 놓인 컵을 들어 뜨거운 물을 홀짝이며 중얼거렸다.“상상하는 게 불법은 아니잖아요.”이윽고 턱을 괴며 느긋하게 물었다.“말해요. 왜 찾아왔는데요? 물건 찾으러? 아니면 뭔가를 알아보러?”시윤은 제 가방을 꽉 쥐다가 끝내 입을 열었다.“도준 씨가 한수진을 처음 만났을 때 수인 씨가 같이 있었죠?”수인은 이내 흥미를 보이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설마 내연녀 뒷조사하는 거예요?”하지만 시윤은 웃는 대신 한층 더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그날 한수진을 도와준 게 수인 씨예요? 아니면 도준 씨예요?”“그게 뭐가 달라요?”“네.”시윤은 수인을 바라봤다.“말 안 해줘도 돼요. 거짓말만 하지 마요.”수인은 흔들의자에 다시 눕더니 부채를 흔들었다.“혹시 뭔가 알고 이래요?”“도준 씨가 뭔가 좀 이상해요. 한수진이 도준 씨한테 어떤 존재인지 알고 싶어요.”시윤은 솔직히 말했다.만약 도준이 정말 수진을 좋아한다면 그녀도 마음을 놓을 수 있을 테니.하지만 그 반대라면...“윤이 씨.”수인의 목소리는 시윤의 생각을 끊었다.“만약 답을 알면 마음을 되돌릴 거예요? 만약 아니라면 차라리 묻지 마요. 오히려 잊기 어려우니까.”주위는 순간 적막이 흘렀다.그러다 한참 뒤, 시윤은 복잡한 마음으로 끝내 입을 열었다.“그러니까 그날 한수진을 도운 게 수인 씨라는 거죠?”“네.”수인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사실을 털어놓았다.“윤이 씨도 알잖아요. 저는 예쁜 여자가 슬퍼하는 거 못 지나친다는 거. 그때 한수인이 하도 처연하게 울길래 웨이터더러 도와주라고 했어요.”답을 들은 시윤은 마음이 뒤엉켜 오히
늦은 밤.호텔 침대에 누운 시윤은 제 목을 조르던 도준이 자꾸만 떠올라 계속 몸을 뒤척였다.그때 도준의 눈은 아무런 감정이라고 찾아볼 수 없는 미친 사람 같았다.심지어 민혁이 그를 뜯어말릴 때, 분명 뭔가 알고 있는 눈치였는데 한마디 설명도 하지 않았다.그 때문에 시윤은 생각할수록 불안해졌다.시윤은 점점 피어섬에서 봤던 피비린내 나고 잔인했던 장면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그날 시윤은 링 안에서 벌어지는 경기를 본 뒤, 시윤은 한 달 내내 악몽에 시달렸었다. 특히 코를 찌르던 피비린내는 몇 번이고 몸을 씻었지만 계속 코 주위를 맴도는 것만 같았다.그건 후각과 시각적으로 오는 충격일 뿐만 아니라 세계관이 붕괴하는 느낌이었다.고작 하루를 본 그녀조차 이 정도 트라우마가 남았는데, 도준은 오죽했을까?심지어 도준은 인간 지옥이라 불리는 참혹한 현장에서 살아남아 아버지가 죽어가고, 어머니가 심장 보관 도구로 전락하는 걸 지켜봤다.그리고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던 도련님에서 하루아침에 빛도 볼 수 없는 짐승이 되어버렸다.그런 일을 겪고도 아무렇지 않다면 오히려 이상한 거다.2년 전, 두 사람이 싸운 뒤 시윤이 북쪽 별채를 청소할 때도 도준은 이성을 잃었던 적이 있다.하지만 그때의 도준은 이제 막 지옥문을 지나온 악마 같았다. 그는 민씨 가문에 피바람이 불게 만들겠다는 목적이 명확했다.때문에 그런 광기를 고스란히 내비쳤고, 사람을 죽이는 것에 거리낌이 없는 데다, 남들이 서로 죽이는 걸 지켜봤었다.그러다 나중에 도준은 점점 변해갔다.점점 인간미 있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고, 일반인 같은 다정함이 생기기까지 했다.해원에서 함께 지냈던 시절, 시윤은 저와 도준도 남들과 같이 평범한 부부가 되었다고 생각했었다.헬스장에서 휘두르던 주먹에도 살기가 담기는 대신 장난기가 담겨 있었다.‘분명 모든 게 좋은 쪽으로 발전하고 있었는데, 왜 이렇게 됐지?’...뜬눈으로 밤을 새운 시윤은 다음날 눈을 뜨자마자 눈꺼풀이 미친 드싱 뛰기 시작했다.세수할 때마저 시윤
블랙썬 직원 중 시윤이 진짜 사모님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에 그 누구도 시윤을 감히 막아서지 못했다. 그 덕에 아무 어려움 없이 도준의 방에 도착한 시윤은 대충 노크하고 문을 열었다.두꺼운 암막 커튼이 쳐져 빛 한줄기도 들지 않는 방안은 컴컴하기만 했다.이에 시윤은 아무 생각 없이 불을 켰지만 다음 순간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그도 그럴 게, 벽에는 온통 시윤의 사진뿐이었다.그녀가 소예리드 콘서트홀에서 연습하는 사진, 수아를 포함한 후배들과 쇼핑하는 사진, 밥 먹는 사진, 심지어는 숙사에서 잠을 자는 사진까지.그걸 본 순간 등골이 오싹해 시윤은 무의식적으로 뒷걸음쳤다. 그러자 더 많은 사진들이 눈에 들어왔다.귀국하여 공연하는 사진, 팬들과 함께 찍은 사진, 심지어 더 무서운 건 경성에 돌아온 뒤 호텔에서 자고 있는 사진까지 있었다.물론 어젯밤 침대에 누워 몸을 뒤척이던 사진까지 말이다.시윤은 순간 호흡이 턱 막혀왔다.‘그러니까 결국은 한순간도 도준 씨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적 없었다는 뜻이잖아.’이제는 겨우 날개를 펴고 하늘을 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그저 전보다 훨씬 큰 다른 우리에 갇힌 거나 다름없었다.순간 머리털이 곤두서며 수만 마리의 독사가 목을 감은 듯해 한 마디도 나오지 않았다.그때 시윤의 뒤를 따라오던 민혁이 시윤에게 들켰다는 걸 확인하고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죽었다.’“저기, 시윤 씨, 오해하지 마요. 도준 형이 변태인 게 아니라, 걱정돼서...”“걱정이요?”시윤은 아직도 한기가 채 가시지 않아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걱정한다는 게 나를 통제하면서 한편으로 대타를 키우는 거예요?”“아니에요, 도준 형이 한수진을 찾은 건...”“듣고 싶지 않아요.”시윤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심지어 지난 1년 동안 늘 도준의 감시 속에서 살아왔다는 걸 믿을 수 없었다.자유를 얻는 줄 알았는데, 사실 사생활도 없이 말하는 한마디 한마디, 만나는 사람이 모두 도준의 감시하에 있었다.
시윤은 방 안에 있는 도준을 바라보며 충격에 아무 말도 잇지 못했다.‘도준 씨가 한수진을 찾은 게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라고?’곧바로 시윤은 수진의 귀에 걸린 이어폰을 주목했다.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탓에 수진은 한가한 듯 도준과 나석훈을 번갈아 보면서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나석훈은 도준의 대답을 들은 뒤 미간을 좁혔다.지난 반년 동안의 치료 덕에, 쉽게 최면에 들어야 하는데, 시윤이 돌아오고 난 뒤 최면에 드는 속도는 점점 늦어지고 있다.심지어 오늘은 몇 번이고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했다.나석훈은 최면에 걸리지 않은 도준을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잠깐 끊고 갈까요?”그때 도준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수진의 팔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팔, 다쳤네?”수진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지만 도준이 저를 보면서 얘기하자 이어폰을 뺐다.“민 사장님... 방금, 저한테 말한 거예요?”“붕대 풀어.”“네?”수진은 팔이 탈골되어 깁스를 한 채 목에 고정한 생태였다.그런데 깁스를 하는 과정에도 아파서 죽을 뻔했는데, 다시 풀라니?그럼 다시 병원에서 그 고통을 경험해야 할 게 뻔했다.결국 수진은 불쌍한 표정으로 애교를 부렸다.“민 사장님, 저 아파요.”“스스로 풀래? 아니면 내가 그 팔 부러뜨려 줄까?”도준은 더 이상 수진에게 오롯이 집중하고 있던 눈빛이 아니었다. 오히려 죽든 말든 신경도 안 쓴다는 싸늘함뿐이었다.이런 변화에 수진은 그대로 얼어붙었다.지난 반년 동안 매주 월요일과 수요일만 되면 수진은 항상 이곳에서 도준과 만났다.물론 도준은 심리 치료사와 오가는 대호를 들려주지 않았지만, 그녀에게 항상 집중하는 눈빛을 했기에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데 방해되지는 않았다.심지어 도준이 심리 치료사의 도움으로 이시윤을 잊고 그 사랑을 저한테 돌리고 있다고 믿었었다.그러면 제가 곧 시윤을 대체하고 도준의 여자, 심지어는 민 사모님이 될 거라고 꿈꿔 왔다.하지만 이 시각 갑자기 변한 도준의 태도에 수진은 그가 지금껏 저를 통해 보던 게 항상
처음에 도준은 시윤을 찾아가려는 생각을 꾹 누른 채, CCTV를 볼 수 있는 권한만 얻어 시윤이 리허설하는 상황만 지켜봤었다.그러다가 임우진과 웃고 떠드는 모습을 보게 된 었다. 그 순간 분노를 느꼈지만 도준은 역시나 본능을 누른 채 사람을 시켜 시윤의 숙소에 CCTV를 설치했고, 그녀가 잠자는 모습을 지켜보기 시작했다.그러다, 세 번째, 네 번째...그렇게 매일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도준의 광기는 점점 심해졌고, 눌러 참았던 충동이 마음의 병으로 자리 잡았다.점점 원하는 게 많아지면서 소예리드로 가는 횟수도 점점 잦아졌다.하지만 너무 오래 참은 탓인지 몸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소예리드만 다녀오면 기억의 공백이 생겨나기 시작한 거다. 그건 도준 본인도 자기의 행동을 통제할 수 없게 되었다는 걸 의미했다.가장 심각했던 때가 바로 6월 달이었다.그때 도준은 통제 불능의 변두리에 놓여 점점 인내심을 잃어갔다.시윤을 다시 잡아와 곁에 묶어두고 싶다는 충동이 점점 강해져 통제할 수 없어졌고, 심지어는 팔다리를 부러트리거나 멍청하게 만들어 제 침대에만 묶어두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하고 싶은 대로 하면 더 이상 애타게 어르고 달래지 않아도 되니까.하지만 시윤은 하필 연약하고 심술 궂어 조금이라도 심하게 대하면 울고, 아파도 울고, 속상해도 울어댔다. 머리가 아플 정도로.그날, 도준이 사고를 낸 것도 고의였다. 시윤을 공제하지 못하다면 저를 묶을 수밖에 없었으니까.그리고 그 사고 이후, 최수인은 심리 치료사를 데리고 도준 앞에 나타났다.‘너 많이 아파.’‘더 이상 치료하지 않으면 너 이대로 망가져.’나석훈이 훌륭한 의사라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경계심이 많은 도준을 최면할 수 없었던 그는 결국 남에게 감정을 전이하는 방법을 제안했다.그리고 그 치료 주기를 매주 월요일과 수요일로 정했고....여기까지 얘기하던 민혁은 복잡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하지만 이런 치료는 조금의 실수도 없어야 해요. 최면이 효과가 없어지면 도준 형
민혁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시윤 씨, 제삼자인 제가 이런 말 할 자격 없다는 거 알아요. 돌아가신 분은 시윤 씨의 아버지이니 누구라도 마음의 응어리가 풀리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한 가지 부탁만 들어줘요.”시윤은 마음이 심란하여 멍한 눈으로 되물었다.“뭘요?”“만약 도준 형과 다시 시작하겠다면 여기서 형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고, 만약 아니라면 떠나주세요. 도준 형 앞에 나타나지 마세요.”시윤은 멍해졌다.“지금 그 말...”시윤의 눈빛에 민혁은 잔인하다는 걸 알면서도 솔직히 말했다.“희망이 있었다 사라지는 것보다 처음부터 없는 게 낫잖아요. 다시 그런 경험을 하면 도준 형 정말 지쳐버릴 지도 몰라요.”시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하긴, 내가 처음부터 나타나지 않았다면 도준 씨는 여전히 그 대단하신 민 사장님이었을 텐데.’그런데 시윤은 그런 그에게 감정을 가르쳐주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또 떠나버렸다.행복을 얻어본 적 없는 사람은 외로움을 느끼지 못할 텐데...굳게 닫힌 문을 보며 시윤은 고통스러운 선택의 기로에서 갈등했다.그날 비행기에 오른 순간, 시윤은 사실 도준의 곁을 떠나기로 완전히 마음먹었었다.그녀로서는 절대 아버지를 죽게 만든 범인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아버지를 그토록 사랑하던 어머니더러 그런 사위를 받아들이라고 강요할 수도 없었으니까.하지만 지금.시윤은 또다시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 중에서 갈등하기 시작했다.눈앞에 가끔은 가족과 다시 만나던 그날이 떠올랐고, 도준이 외롭게 밖에서 기다리던 모습이 떠올랐고, 또 때로는 어머니가 병상에 누워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호소하던 모습이 떠올랐다.‘대체 나더러 어떻게 선택하라고...’...그 시각 방 안.한참 동안 목이 졸린 수진은 끝내 기절해 버렸고, 그걸 본 나석훈은 다급히 수진의 호흡을 체키하고 나서야 식은땀을 닦으며 창가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도준을 바라봤다.20여 년간 심리 치료사 일을 해오면서 그는 한 번도 도준과 같은 환자를 만난 적이 없다.민도준
시간은 일분일초 흘러가고 있었다. 도준은 담배 하나를 다 태우고 나서야 천천히 문 앞으로 걸어갔다.그러다가 커다란 손으로 문고리를 잡은 순간 몇 초간 멈췄다.심리 치료사인 나석훈은 당연히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이건 이제 곧 일어날 일에 대한 불확실함에서 나온 행동이다.이런 망설임은 보통 사람들에게는 매우 정상적일 테지만 도준이 이런 행동을 보이자 나석훈은 얼른 노트를 꺼내 뭔가를 끄적이며 동그라미를 그렸다.그리고 나석훈의 노트가 닫히는 순간, 문도 열렸다.문밖은 아무도 없었다.도준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진작 짐작했다는 듯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나석훈도 밖을 두리번대더니 물었다.“오늘 한 사장님이 안 계시네요?”...한편, 민혁은 시윤을 차에 태운 채 엑셀을 밟으며 공항으로 향했다.그러는 와중에도 시윤을 위로하는 걸 잊지 않았다.“불안해할 거 없어요. 어머님 꼭 괜찮을 거예요.”사실 방금 전, 시윤은 해원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게 되었다. 하지만 하필 이승우가 출장을 간 탓에 동네에서 쓰러진 양현숙을 동네 주민이 발견하고 병원으로 이송했던 거다.가는 길에 시윤은 가장 빠른 비행기를 놓치기라도 할까 봐 쉴 새 없이 시계를 확인했다.심지어 3시간이라는 비행시간 동안 불안함에 안절부절못하며 어머니에게 아무 일 없기를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전화 통화를 할 수 없는 터라 3시간은 3년처럼 느껴졌다.너무 늦어 일찍 해원에 돌아오지 않는 저를 나무라기까지 했다.만약 공연이 끝나고 바로 돌아왔으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텐데.해원에 도착하자마자 시윤은 곧장 병원으로 달려갔다.“간호사님, 양현숙 환자분 병실이 어디 있나요?”간호사는 기록을 확인하다가 한참 뒤 대답했다.“입원 병동 6층 612호 병실입니다.”전속력으로 달려 병실에 들어간 시윤은 저를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양현숙을 보자 그제야 가슴을 쓸어내리며 눈물을 왈칵 쏟아냈다.시윤은 곧바로 병상 쪽으로 달려가며 흐느꼈다.“엄마, 미안해요. 미안해요.”“우리 딸, 왜 울고 그래?
샘플 채취 수, 시윤은 곧장 병실에 돌아가는 대신 복도 창가에 서서 멍하니 밖을 바라봤다.확실히 수아의 말대로 해원에는 벌써 꽃들이 피어 있었다.물론 많은 편은 아니지만 경성보다 일찍 따뜻하져 벌써 봄의 기운이 물씬 느껴졌다.방금 바삐 뛰어다닐 때는 생각할 여유가 없었지만 조용해지니 이제야 경성을 떠났다는 게 실감이 났다.시윤은 결국 그 문을 열지 않았고, 운명에 이끌린 듯 해원으로 돌아왔다.‘이게 우리의 바뀌지 않는 운명인가 보네...’“윤아.”시윤은 번쩍 정신을 차리며 돌아섰다. 승우도 어느새 샘플 채취를 마치고 돌아왔다.“오빠.”승우는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동생을 한참 동안 바라보더니 마음 아픈 듯 말했다.“여위었네.”그 말에 시윤은 오히려 피식 웃었다.“뚱뚱해지면 쌤이 욕해.”이윽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승우를 빤히 바라봤다.“그러는 오빠야말로 멋있어진 것 같네. 혹시 형수는 언제 데려올 거야?”승우는 눈을 내리깔며 속내를 숨기려 했다.“급할 거 없어.”시윤이 떠난 1년 반 동안 승우는 제자들이 점점 많아지자 예전에 바이올린 연습에 기울이던 노력을 모두 학생을 가르치는 데 기울였다. 심지어 전에 사용하던 연습곡도 리뉴얼하고 많은 기법도 새로 추가했다.그 뿐만 아니라 일전에 천재로 이름이 많이 알려진 덕에 많은 토크쇼에 초대되었고, 그 방송분이 공개되자 수많은 여자 후배들이 시윤에게 승우의 연락처를 물어보기까지 했다.심지어 수아는 잘생긴 것보다는 바이올린 켜는 남자가 좋다며 다리를 놔줄 걸 제안했지만 승우가 거절했다.물론 승우가 거절한 사람은 시윤의 후배뿐이 아니다. 그동안 지내오면서 시윤은 심지어 제 오빠가 이성과 가까이 지내는 걸 본 적이 없다.‘잠깐, 설마 오빠 남자가 취향인가?’승우는 갑자기 이상야릇해진 시윤의 표정을 보며 우스운 듯 물었다.“윤아, 너 표정 왜 그래?”시윤은 승우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오빠, 저기 있잖아. 나 오픈 마인드라 형수는 여자가 아니어도 괜찮아.”그 말에 승우는 잠깐 멍해 있다
연말이 되자, 하윤은 사람들 다 같이 경성에서 새해를 맞이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경성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진가연과 한성운도 그러고 싶어 했다.남은 사람은 양현숙이었다.하윤은 원래 양현숙을 데리고 경성에 오려고 했는데, 양현숙이 해성시의 집을 떠나기 싫어했다. 양현숙은 집을 지켜야 한다면서 오래 집을 비우면 너무 처량한 느낌이 난다고 했다.하윤은 양현숙이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집뿐만이 아니라 이성호와의 추억이다.그래서 하윤은 그렇게 요구하지 않고 도윤을 데리고 자주 보러 갔다.이번에 하윤의 요청에 양현숙이 기분 좋게 동의하면서 31일에 같이 새해를 맞이하기로 했다.하윤은 손님 맞을 준비를 했고 곧 새해가 다가왔다. 양현숙이 하윤에게 전화를 걸었고 조금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하윤에게 물었다.“하윤아, 네 오빠 귀국한다는데, 만나볼래? 싫으면 너희 방해하지 말라고 할게.”그때 병원에서 기분 나쁘게 헤어진 뒤로 만난 적이 없었다.승우는 도윤의 나이를 잘 기억하고 있어 가끔 나이에 맞는 장난감을 보내주었다.이렇게 여러 해 지나고 하윤은 전의 일을 마음에 담아주지 않았으며 오히려 너무 오랫동안 연락을 안 한 것에 대해 조금 자책했다. 양현숙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하윤은 양현숙이 중간에서 힘들까 봐 가볍게 말했다.“오빠 돌아왔으면 같이 오세요. 우리 한 가족 되게 오래 같이 못 만났잖아요?”양현숙은 기뻐서 대답했다.“알았어, 그렇게 오빠한테 전달할게.”...통화를 마친 하윤은 이 일을 도준에게 얘기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승우가 하윤의 오빠지만, 하윤이 이 이년 사이에 아무 이성과 접촉하지 않았다. 심지어 수컷 모기까지 도준은 하윤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도준은 승우를 항상 경계해 왔다.도준이 동의하지 않을까 봐 그날 저녁 도준이 돌아왔을 때, 하윤은 120%로 잘 보이려고 했다.하윤은 발꿈치를 들고 도준의 외투를 벗겨주었다.“여보 왔어요? 어땠어요? 오늘 일은 힘들지 않았어요?”도준이 하윤을 힐끔 쳐다보고 소파에 앉아
하윤은 요즘 아들이 조금 이상한 것 같았다.도윤은 다른 애들과 달리 장난감으로 놀기 좋아하거나,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가장 많이 하는 일이 책을 보는 일이었다.가끔 하윤은 도윤이 너무 오래 앉아 있어 힘들까 봐 텔레비전 앞에 데려와서 애니메이션을 틀어줬다.그러나 하윤이 할 일을 하고 돌아오니, 도윤이 뉴스 채널을 돌려서 재밌게 보고 있었다.소파 위에 있는 작은 아들을 보고 하윤은 걱정이 앞섰다.‘설마 내가 너무 연습에 몰두해서 아들을 소홀히 했나? 그래서 아들이 상처를 받아서 저런가? 안 돼! 도윤에게 완벽한 동년을 줄 거야!’하윤은 이 일이 엄청나게 큰 일이라고 생각해서 한동안 생각하고 도윤을 데리고 나이가 비슷한 아이들과 많이 만나게 하려고 했다. 많이 만나면 도윤의 동심이 돌아오지 않을까 싶었다.하윤은 어디를 가던 도우미가 자기를 보는 것이 싫어, 그냥 아파트에 살았다. 이곳에는 아이들이 노는 놀이터가 있었고 그중에 모래로 촉감놀이 하는 곳이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하윤은 그곳에 도윤을 데리고 가기로 마음먹었다.날씨가 좋아 하윤은 도윤의 손을 잡고 그를 집 밖으로 데리고 갔다.모래가 있는 곳으로 가자, 도윤은 모래를 뿌리며 재밌다고 웃어대는 친구들을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하윤은 도윤의 표정을 보지 못하고 신나게 말했다.“도윤아, 친구들 얼마나 재밌게 놀아, 우리도 얼른 들어가서 놀자.”도윤은 눈썹이 붙을 정도로 찌푸렸지만, 하윤이 기대에 찬 모습에 하윤과 함께 놀아줘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래서 도윤은 하윤이 시키는 대로 신발을 벗고 양말을 신은 채로 하윤과 함께 모래에 들어갔다.도윤의 눈썹과 눈은 하윤을 닮았고 나머지는 도준과 똑같았다. 너무 잘생겨서 순식간에 다른 애들의 주의를 끌었다.한 아이가 도윤에게 말했다.“우리 같이 모래 파서 궁전 만들자!”그 아이가 손을 잡으려고 하자 도윤이 한 걸음 물러났다.“미안, 난 엄마랑 놀아야 해서.”하윤은 도윤이 자기랑 놀고 싶어 하는 줄 알고 마음속으로
하윤이 해성시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됐는데, 소혜에게서 전화가 왔다. 소혜는 딸 민효연이 첫돌 생일을 쇠는 김에 미뤘던 결혼식도 같이 한다고 했다.지훈이 산을 구매해서 이제 산속에서 결혼식을 한다고 했다.하윤이 깜짝 놀랐다.“결혼식 한다고?”“네!”소혜는 간식을 먹으며 말했다.하윤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소혜를 불렀다.“소혜야.”소혜가 목을 쭉 뻗었다.“네?”지훈이 욕실에서 몸을 내밀자, 빛나는 눈은 여우처럼 사람을 홀렸고 머리가 젖어 더욱 섹시해 보였다.지훈의 보조개는 아주 귀여웠다.“수건 가져다줘.”지훈의 섹시한 모습에 소혜가 다급히 말했다.“언니, 오빠한테 언제 시간 되는지 물어봐 줄래요? 그럼, 이렇게 정하고 저는 남자 만지러, 아, 아니, 수건 가져다주러 갈게요!”‘헤헿.’통화를 마친 하윤이 소혜가 보낸 웨딩사진을 보고 마음이 조금 찡했다.소혜를 보고 그런 것이 아니라 지훈을 보고 그런 느낌이 들었다.저녁 식사를 할 때, 하윤이 이 일을 도준에게 말했다.“지훈이 소혜랑 결혼식 올린대요. 다음 달에 한다는데, 당신이 언제 경성에 있는지 물어보라고 하던데.”도준이 하윤을 바라봤다.“그건 당신한테 달린 거 아닌가? 당신이 자꾸 밖으로 돌아다니니까 내가 힘을 좀 써서 당신을 잡아와야지.”“말하는 것 좀 봐요. 제가 무슨 나쁜 일을 하는 사람처럼 말하네요? 다 연습하러 가는 거지.”하윤은 젓가락을 입에 물고 일부러 아까 했던 말을 반복했다.“소혜랑 지훈이 결혼식 한대요.”도준은 물을 마시고 콧소리가 섞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응.”도준이 눈치채지 못하자, 하윤은 더 선명하게 눈치를 줬다.“아니, 쟤네는 아이가 태어난 뒤에 미뤘던 결혼식 올리는 거네요?”도준이 웃으며 말했다.“아니면? 아기를 배속에 다시 밀어 넣고 결혼식 할 수는 없잖아?”하윤은 화가 나 그릇에 담겼던 완자에 구멍을 뚫었다.“맞아요! 맞는 말이죠!”도준이 눈치가 없자, 하윤은 밥을 다 먹고 나서도 도준과 한마디도 하지 않고 텔레비전을 봤다.
경성에서 하윤이 자기 전에 핸드폰을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침대에서 급히 일어나 욕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여보!”“도준 씨!”“도준 씨!!”욕실의 안개가 도준의 넓은 어깨에 흩어졌고 도준은 가운을 걸치고 나왔다. 가슴팍이 보였고 물기를 채 닦지 않아 가슴팍과 근육을 따라 아래로 흘러내렸다.도준은 하윤의 다급한 부름에 어디 부딪힌 줄 알고 급히 나왔는데, 나와보니 하윤이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파닥거리고 있었다.도준은 들고 있던 수건으로 하윤의 엉덩이를 때렸다.“왜 그래? 무슨 귀신이라도 봤어?”하윤은 침대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도준의 어깨에 놓고 핸드폰을 도준에게 들이밀었다.“빨리 봐봐요! 빨리!”하윤이 너무 날뛰어 핸드폰을 너무 가까이 대는 바람에 도준은 화면이 잘 보이지 않았다.도준은 하윤의 손목을 뒤로 잡아당겼지만 하윤이 손을 흔드는 바람에 인내심이 없어 하윤의 허리를 안고 침대에 눕혔다. 혹시라도 너무 흥분해서 침대 밑으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보기 귀찮으니까 얘기해 줘.”“고은지가 결혼한대요! 누구랑 하는지 맞혀 봐요!”도준이 물어보기도 전에 하윤은 참지 못하고 얘기했다.“곽준호! 곽도원의 아들 말이에요! 세상에, 아무런 연관이 없던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결혼하게 된 거죠?”도준은 침대에 기대며 말했다.“아무 연관이 없진 않지. 전에 곽도원이 고은지를 새 아내로 맞이한다고 술자리를 열었었어.”“네?”하윤이 깜짝 놀랐다.‘그럼, 고은지가 곽준호 새엄마? 세상에! 나보다 더 용감하네?’하윤은 참지 못하고 도준을 밀었다.“얼른 얘기해 봐요.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도준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팔을 하윤의 다리에 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하윤은 도준의 팔을 치워버렸다.“쳇, 당신도 몰라요?”하윤의 귀여운 모습에 도준이 하윤의 볼을 꼬집으며 그녀를 돌렸다.“그렇게 알고 싶으면 결혼식에 가면 되겠네.”하윤은 볼이 꼬집혀서 말을 똑바
준호는 가볍게 물었지만, 눈빛에는 긴장함이 깃들어 있었다.준호는 은지의 차가운 얼굴을 보고, 그녀의 마음도 자신처럼 뜨거운지 보아낼 수 없었다. 그리고 은지가 왜 준호를 찾지 않고 준호가 왔을 때 그에게 기회를 주는지 알지 못했다.사람은 누구나 욕심이 수도 없이 많아진다. 은지를 볼 수 없을 때는 볼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또 만나니까 가지 말라고 잡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가지 말라고 잡으면 은지 마음속에 준호가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준호의 마음은 조각조각으로 나뉘어 흩어져 버렸다.준호의 손에는 점점 힘이 들어갔고 자신의 기분을 은지가 느끼게 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난 너 속이기 싫어, 난 너 없어도 잘 살아.”준호의 손에 힘이 빠졌고 빛나던 눈도 빛을 잃었다.준호가 기분이 처져 손을 떼려고 하는데, 은지의 차가운 손이 준호의 손등을 감쌌다.“근데 네가 있으면 난 더 기분이 좋아서 매일 행복하게 살 거 같아.”실망했던 준호는 조금 희망을 얻고 말했다.“왜 말을 그렇게 늦게 해! 날 그렇게 힘들게 할 거야?”은지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아마도?”준호는 은지가 웃는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었고, 이렇게 정말 기뻐서 나오는 웃음은 더 본 적이 없었다.준호는 성큼성큼 은지에게 다가가 입맞춤했다.“고은지, 너 이번에 또 가면 너 절대 안 놔줄 거야!”“응.”비음이 섞인 은지의 목소리에 준호의 몸은 순식간에 타올랐고 준호는 은지를 품에 안았다.“더 이상 나 화나게 하면 안 된다?”“될수록 그렇게 해볼게.”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말했다.“네 성격에는 문제가 없어?”“너!”준호는 화를 내고 싶었지만 계속 품에 안고 싶었던 은지를 안고 있어 화를 낼 수 없었다.“성격 안 좋은 거 나도 알아, 차근차근 알려주면 나 다 고칠 수 있어.”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도 말은 잘 듣네.’“다 고쳐도 나 좋아해야 된다? 안 그러면 너 안 놔줄 거야!”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될
아까는 은지에게 핍박을 당해 자기도 모르게 질문이 나왔다.두 사람은 마주 보며 차에 앉아 있었고 은지가 준호를 지그시 바라보자, 준호는 그 물음을 다시 물어볼 수 없었다.그러나 준호가 물어보지 않았는데, 은지가 고개를 끄덕였다.“생각한 적 있어.”아까까지 겨울의 추위에 덜덜 떨던 준호가 은지의 대답에 봄으로 끌려온 것 같았다.준호는 자기가 잘못 들은 것인지 알지 못했지만, 기분이 좋아 다시 물었다.“뭐라고?”은지는 담담하게 바로 대답했다.“이 6개월 동안 너 생각한 적 있다고.”이 6개월 동안 은지는 준호처럼 어린 사람, 준호처럼 무모한 사람, 은지를 마음에 들어한 사람,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 중에 준호처럼 진심으로, 물을 끼얹어도 꺼지지 않는 불씨와 같은 열정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은지는 30여 년간 계속 연기를 했었다. 이성희한테서 귀염을 받으려고, 고씨 집안의 사랑을 받으려고, 곽도원의 귀염을 받으려고 말이다.은지가 수많은 자태를 뽐냈지만, 준호는 은지가 가장 악독하고 차가운 모습을 보고도 좋아한 사람이다. 그래서 준호를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생각났다.“그럼, 앞으로 생각 안 할 거야.”“너!”준호가 다급히 말했다.“왜? 아까는 내 생각 했다며?”은지는 대답하지 않고 준호를 바라보았다. 은지는 준호의 화가 차츰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준호가 부끄러워하며 말했다.“나, 나도 네 생각 했어.”이때 차의 라디오에서 로맨틱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준호는 평소에 이런 노래를 듣기 싫어했는데, 지금 들으니 아주 로맨틱했다.준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데, 은지가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가게는 저기 있어.”은지가 물어보지 않자, 준호도 은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나랑 가는 거야, 마는 거야? 물어보고 싶은데 물어볼 용기가 안 나!’마을이 너무 작아 노래 한 곡이 채 끝나지 않았는데, 목적지에 도착했다.은지가 차에서 내리자, 준호도 따라서 내렸고 은지가 계단으로 올라가자, 준호도 따라
호텔 내부의 뜨거운 공기에 준호는 재채기를 했고 곧이어 식탁 앞에 앉아 있는 은지를 발견했다.반년이 지나 은지의 머리는 좀 길었지만 조금 헝클어진 상태로 풀어 놓았다. 회색 니트를 입고 있었고 전에 비해 가벼운 느낌이었다. 준호는 뜨거운 공기 때문에 목이 말랐다. 열정 넘치는 아저씨가 준호 보고 얼른 와서 앉으라고 하면서 술을 부어주었다.“은지 남자 친구죠?”준호는 은지가 또 전처럼 새엄마라고 할까 봐 경계했다.그러나 은지는 그저 간결하게 대답했다.“아니요.”준호는 한숨 돌렸다. 그러나 곧이어 준호는 또 짜증이 났다.이제 은지가 준호의 새엄마도 아니니 정말 아무런 사이가 아니다.희현은 은지에게 귓속말했다.“저 사람은 왜 또 언니 잡으러 온 거예요? 제가 문 지킬 테니까 도망갈래요?”말을 채 하지 못했는데, 은지가 희현의 입에 음식을 넣어주었다.“왜요? 이 계획 별로예요?”“아니, 너 목소리 너무 커서 저 사람이 너 보고 있어.”과연 고개를 돌리자, 준호가 살기 가득한 눈으로 희현을 바라보고 있었다.희현은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이제 막 유명해지려고 하는데, 죽으면 안 되지.’희현이 한 말 때문인지, 은지가 준호를 불러 놓고 준호랑 말을 안 해서인지, 밥을 채 먹지 못했는데, 그는 은지가 화장실을 갔을 때 막아섰다.은지가 손을 씻고 돌아섰는데, 준호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은지는 놀라지 않았고 오히려 준호가 지금까지 버틴 것이 기적 같았다.“손 씻으려고?”준호는 잘 얘기해 보려고 했는데, 은지의 말에 또 화가 났다.“손 씻는다고? 내가 이렇게 먼 곳까지 찾아왔는데, 손 씻으러 왔겠어?”은지는 준호의 손에 묻은 양념을 가리키며 말했다.“그건 아니겠지만, 손은 씻어야 할 거 같아.”준호는 은지가 한 말에 반박할 수 없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씻었다.손을 다 씻은 준호는 은지가 자리에 돌아갔을 줄 알았는데, 고개를 들어보니 은지가 옆에 서 있었다. 거울 속의 두 사람은 연인처럼 붙어 있었다.은지가 준호를 보자,
‘설마 고은지?’곧이어 여자가 목도리를 벗자, 얼굴이 보였다.은지가 아니라, 전에 은지와 함께 준호를 속였던 배우 희현이었다.연말이 되자, 밖에서 일하던 자녀들이 다 무진으로 돌아왔기에 마을에 못 보던 차가 많이 세워져 있어 희현은 준호의 차를 의심하지 않고 차 주변을 돌며 통화를 했다.“여보세요? 언니, 저 도착했는데, 어디 계세요?”“호텔 쪽에 있어요? 아, 그럴 줄 알았으면 택시 타고 호텔로 갔죠.”준호는 희현의 통화를 듣고 마음이 다시 뜨거워졌다.‘언니? 고은지인가? 고은지도 여기 있나?’...무진에 호텔이 하나밖에 없었지만, 항상 손님이 별로 없었다. 연말이라 손님이 더 없어서 주인장은 일 층에 탁자를 다 붙여서 음식을 해놓았다. 아이들이 모여 있어 희현이 왔을 때 아이들이 희현에게 달려왔다.“희현 언니!”희현은 통쾌하게 용돈을 나눠줬다.“이리와, 언니 돈 많이 벌어서 너희 용돈 줄게!”아이들을 보내고 희현은 창 옆에 앉아 있는 여자에게로 다가갔다.“언니, 저 왔어요!”은지가 처음에 무진에 왔을 때는 준호를 피하려고 온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피할 필요가 없어져 사탕 가게를 책방으로 바꾸고 알바생을 찾았다. 이 책방에서 책을 보면 사탕을 먹을 수 있는 시스템으로 했다.이 반년 동안 은지는 여행을 다니면서 지냈다.며칠 전, 호텔 주인이 은지보고 무진에 와서 연말을 보내라고 했고 아이들이 은지를 보고 싶다고 해서 오기로 했다.희현은 옆 마을에서 드라마를 찍다가 같이 식사하러 왔다.식탁에는 맛있는 음식이 한 상 차려져 있었고 사람들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둘러앉았다.밖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준호만이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차가워진 도시락을 들고 화를 냈다.준호는 은지가 외롭게 연말을 보낼 줄 알고 도시락까지 싸서 왔는데, 이렇게 화목하게 모여서 보낼 줄 몰랐다.준호는 몇 시간을 운전해서 여기까지 온 자신이 참 바보 같았다.이렇게 도시락을 건네주기는 좀 그렇고, 아무 말도 안 건네고 가자니 아쉬
준호도 그동안 못 완성했던 임무를 마저 수행해야 했다.전에는 은지를 찾는 데만 집중해서 임무는 뒷전이었다. 이번에는 각 지역을 하나씩 제대로 돌아봐야 했다.돌아본 곳이 많아질수록 준호의 마음도 점차 평온해졌다.마을에 오랫동안 있으면서 자연과 마주하니 준호의 성격도 많이 누그러졌다.3개월이라는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고 준호는 남한성에 돌아가 만족스러운 결과를 냈다.팀장은 준호가 전과 달라진 모습에 칭찬했다.“이런 일 많이 하니까 좋은 점이 있네.”...그 후로 준호는 예전처럼 훈련하고 임무를 수행했다.이곳에 있으면 외계의 간섭을 덜 받기에 사람들이 준호의 집안이 현재 어떤 상황인지 개의치 않았다.그저 매일 밤 침대에 누우면 준호는 신옥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은지 씨가 정말 차가운 사람이라면 날 위해 비밀을 지켜주지 않았을 거야.’신옥영도 이 비밀을 준호가 알게 되면 많은 것을 바꾸게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은지처럼 작은 일도 따지는 사람은 무조건 알았을 것이다.준호는 전에 은지가 아무런 감정이 없는 냉혈 동물인 줄 알았는데, 지금은 잘 알 수 없었다.‘고은지 나한테 정은 있었나?’준호는 이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이 아프기도 했고 뜨겁기도 했다.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에 쉽게 들 수 없었다.‘만약 고은지가 나한테 마음이 없다면 이미 놔줬으니까 다시 가서 방해하면 안 돼. 근데 혹시 나한테 마음이 있었다면?’...눈 깜짝할 사이에 연말이 되어 길거리는 연말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준호는 신옥영이 머무는 저택으로 갔는데, 집안이 시끄러웠다.하나가 장원수를 지휘하며 집을 꾸몄고 하나는 신옥영과 함께 음식을 만들며 신옥영에게 애교를 부렸다.올해에 준호는 신옥영의 저택에서 이 부녀를 자주 봤는데, 처음에 그들을 만났을 때, 살기 가득한 눈으로 장원수를 쏘아보며 일자리며 가족 관계까지 다 물어봤었다. 나쁘지 않았다.그러나 신옥영은 재혼할 마음이 없어 보였고 준호는 신옥영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자기는 신옥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