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현숙의 경악과 실망 섞인 눈빛이 자꾸만 떠올라 하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도준의 차를 빙 돌아 밖으로 걸어 나갔다.하윤의 배척은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졌다. 예전에는 이성과 감성의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것에 가까웠던 것 같다. 말로는 다신 볼 수 없다고 하면서 눈빛에는 그리움이 가득 담겨 있었으니까.하지만 지금, 그녀는 마음속에서부터 도준을 배척하고 있다. 심지어 그의 존재마저 배척하고 있다.그걸 인지한 도준의 표정은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차 문을 열고 긴 다리로 몇 걸음 성큼성큼 걸어가자 곧바로 하윤을 따라잡았다.“이 시간에 택시 안 잡혀. 타.”도준에게 붙잡힌 순간 하윤은 미친 듯이 그를 두들겨 팼다.“놔요, 건드리지 마요!”심지어 행인들마저 그 광경에 잇달아 눈빛을 보냈다.다만 사람을 압도하는 도준의 기세에 눌려 앞으로 다가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그때, 한 여자아이가 용기 내어 다가가 휴대전화를 손에 들고 말했다.“저기 혹시 도움 필요해요? 이 사람 아세요?”한 사람이 입을 열자 군고구마를 파는 할아버지도 따라나섰다.“그래요, 당신 그 처자 알아요?”“이 사람 제 마누랍니다. 아는 거 당연한 거 아닌가요?”그 말에 할아버지는 이내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소녀는 여전히 정의롭게 나섰다. “아내라 해도 상대방 의견을 무시한 채 강요하면 안 되죠. 언니, 경찰에 신고해 드릴까요?”“...”주변에 사람이 몰려들자 도준은 하윤을 옆구리에 둘러메고 차 안으로 던져버리고는 엑셀을 밟으며 곧장 그 자리를 떠났다.오후 내내 울어 눈이 팅팅 부은 하윤은 도준을 차갑게 쏘아봤다.“제가 차에서 뛰어내리는 거 보고 싶어서 그래요? 내려줘요!”도준도 더 이상 인내심이 없어진 듯 콧방귀를 뀌었다.“그래, 뛰어내릴 수 있으면 뛰어내려. 다리가 부러지면 내가 마침 쇠사슬로 묶어 집에 가둘 수 있게. 그 상태에서 어떻게 도망가는지 두고 보다고.”하윤은 순간 얼어붙어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저를 가둬놓고 싶어요?”“내가 자기를 가
살짝 눈을 찌푸린 하윤은 참을성 있게 대답했다.“데려다주는 사람 있으면 우리도 더 빨리 먹을 수 있잖아, 안 그래?”그제야 시영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그건 그렇네.”...레스토랑으로 향하는 길, 하윤은 시영과 함께 뒷좌석에 자리했다. 그사이 시영은 학원에서 있었던 일을 쉴 새 없이 재잘댔지만 하윤은 자꾸만 넋을 잃은 모습을 보일 뿐이었다. 심지어 식사 자리에서도 입맛이 없다는 이유로 입을 꾹 다문 채 시영을 도와 스테이크를 자르는가 하면 피자를 나눠 주기만 했다.그렇게 식사가 끝난 뒤, 시영은 입에 포크를 문 채로 물었다.“나 배불러. 엄마랑 오빠는 식사했어? 조금 싸갈까?”하윤은 순간 손을 멈칫했다.“오빠는 엄마랑 같이 친척 집에 내려갔어. 거기서 며칠 있다가 온대.”“뭐?”시영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왜 하필 지금인데? 나한테 미리 말도 안 하고.”하윤은 싱긋 웃었다.“당연히 너도 가겠다고 떼쓸까 봐 말 안 했지.”“흥, 누가 떼쓴다고.”시영이 화장실에 간 사이, 도준이 손을 뻗어오자 하윤은 반사적으로 물러섰다. 하지만 도준은 여전히 하윤의 입가에 묻어 있는 소스를 닦아주더니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거짓말하면서 눈도 깜빡하지 않네?”“저처럼 변변치 않은 사람은 원래 다 이래요.”하윤의 자조적인 한 마디에 도준은 미간을 좁혔다. 이제 막 뭐라 하려는 찰나 시영이 오는 바람에, 도준은 말을 삼킨 채 두 사람을 집까지 바래다주었다.집 문 앞에 도착한 하윤은 시영과 함께 안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이제 막 걸음을 뗀 순간 팔을 붙잡혔다.남자의 커다란 손은 마치 강철처럼 단단해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어둠 속에서 드리워 오는 도준의 눈빛은 무섭기까지 했다.그 모습을 보고 있던 시영이 언짢은 듯 끼어들었다.“무슨 자격으로 우리 언니를 잡고 놔주지 않는데요?”도준은 시영을 흘끗 바라봤다.“네 형부 자격으로.”“...”너무 맞는 말이라 시영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그때 시영 앞에서 싸우고 싶지 않았는지
도준은 하윤의 가느다란 목을 움켜쥐고는 그녀의 얼굴을 천천히 훑어 내렸다.한때 그는 이 양심도 없는 여자를 몇 번이나 목 졸라 죽이고 싶었는지 모른다.다시는 그런 감언이설을 하지 못하도록, 제 곁에서 도망치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못하도록 만들고 싶었다.함께 지내면서 그런 기회는 수도 없이 많았다. 하지만 매번 하윤이 마음대로, 심지어는 제 머리 꼭대기에 기어올라 심기를 거슬러도 끝내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그 결과가 이거라고? 내 마음을 짓밟고 도망치겠다? 하, 차라리 목 조르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어.’분노가 휘몰아쳐 잔인함이 점점 깨어나고 있었다. 늘 내비치던 태도에 오히려 익숙하고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솔직히 말해서 도준은 지금까지 좋은 사람이었던 적이 없다.도준이 육식을 즐기는 사자라면, 하윤은 풀을 먹는 토끼다. 사자가 토끼 때문에 그동안 입에 맞지도 않는 풀을 같이 먹어줬는데, 토끼가 겁먹고 도망간다면, 계속 풀을 먹을 의미가 있을까?다음순간 도준은 손을 점점 움켜쥐었다. 가는 목선으로 느껴지는 맥박이 위험을 감지하기라도 한 것처럼 격렬하게 뛰기 시작했다.예전이었다면 이러한 위험을 감지하는 순간 당황한 표정을 짓던 하윤은 마치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것처럼 스르르 눈을 감았다. 심지어 해이해진 표정이었다.몸부림치지도, 버둥대지도 않고 마치 죽은 것처럼 조용해졌다.꽉 조인 목구멍 때문에 점점 숨이 막혀 얼굴이 점점 붉어지다가...점점 호흡이 곤란할 때쯤, 도준이 갑자기 손을 풀었다.차가운 밤공기가 폐부로 흘러드는 순간, 하윤은 연속으로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콜록콜록...”폐가 찢어질 것처럼 머리를 숙이고 한창 기침을 하고 있을 때, 위쪽에서 기분을 읽을 수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죽어도 내 곁에 있기 싫다 이건가?”하윤은 눈가에 맺힌 생리적인 눈물을 닦고는 고개를 들었다. 물기를 머금은 하윤의 눈은 여느 때보다 더 맑고 깨끗했지만, 눈동자 깊은 곳은 죽은 듯 고요했다.“내가 죽어야 모두한테 떳떳할 수 있을 것 같아서
황야에 번진 불길처럼 점점 강해지는 남자의 입맞춤에 하윤은 결국 몸을 맡겼다.짤막한 신음과 함께 몸이 문에 부딪힌 순간, 어두워졌던 불빛이 소리에 반응해 다시 켜졌다. 불빛 아래의 남자는 여자를 한사코 짓누르고는 커다란 손으로 뒤통수를 받쳐 들었다. 꼭 붙잡힌 턱 때문에 하윤은 거역할 수조차 없었다.불이 다시 꺼진 순간, 부끄럽고도 야릇한 소리가 공기 속에 흩어졌다.오랫동안 참아왔던 욕구가 폭발한 탓에 도준은 손을 멈출 수 없었다.뼈마디가 선명한 커다란 손이 어느새 하윤의 옷 속을 파고들었고, 단단한 이빨로 하윤의 연약한 목을 잘근잘근 짓씹었다.“1년...”“오늘밤만 같이 있자.”하윤의 옷은 어느새 흐트러졌고 입술은 빨갛게 부어올랐다. 도준이 다리로 받히고 있지 않았다면 진작 바닥에 주저앉았을지도 모른다.연신 숨을 깊게 들이쉬고 나서야 겨우 호흡을 가다듬은 하윤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시영 혼자 집에 둘 수 없어요.”“민혁과 진가을 씨더러 오라고 하면 되잖아.”도준의 숨결은 여전히 하윤의 목덜미를 누볐다.겨울철을 대비해 꽁꽁 껴입은 옷마저 도준의 사나운 기세를 막을 수 없었다.만약 예전이었다면 하윤은 거절했을 거다.하지만 1년...1년이란 시간 동안 또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쩌면 그때는 모든 것이 무뎌질지도, 아니면 이게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하윤이 거절하지 않자 도준은 그녀를 아이 안 듯 들어 안아 차 뒷좌석에 밀어 넣었다. 그러고는 곧바로 하윤에게 덮쳐 민감한 부위를 건드리면서 다른 한 손으로 민혁에게 전화를 걸었다....그 시각, 가을과 함께 족발을 삼고 있던 민혁은 핸드폰에 뜬 도준의 이름을 보자마자 한시도 지체하지 않고 전화를 받았다.“어, 형.”“예흥 빌라로 와서 아이 좀 봐줘. 진가을 씨랑 같이 와.”“뭐? 아이? 누 아이인데?”“여보세요? 도준 형!”민혁은 무슨 영문인지 몰라 어리둥절했지만 도준의 지시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게다가 무엇보다 목소리에 다급함이 묻어 있는 거로 봐서는 급
이미 두 사람의 결말을 예상해서인지, 아니면 도준의 분위기에 휩싸여서인지 하윤은 점점 달아오르는 몸으로 도준에게 매달려 그와 뜨거운 입맞춤을 나눴다.심지어 침실에 도착하기도 전에 현관 벽에 밀쳐진 채로 도준과 서로의 호흡을 나눴다.도준은 하윤의 목덜미에 울긋불긋한 꽃을 새기며 당장이라도 그녀를 제 품에 녹일 것처럼 굴었다.그러다 문뜩 거친 숨소리를 낸 순간, 흐리멍덩해 있던 하윤은 정신이 돌아왔는지 뒤늦게 몸부림쳤다.“여기서 싫어요... 침실에 들어가서...”도준은 하윤과 입술을 맞댄 채로 피식 웃었다.“나 지금 들어가고 있잖아.”“...”긴긴 밤은 오래도록 이어졌다.침실 안에서 들리는 야릇한 소리는 방 안 공기마저 후끈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벽에 걸려진 벽시계에 뿌연 수증기가 한층 뒤덮였고, 분침과 초침은 헤어지기 싫은 것처럼 붙었다 떨어지기를 반복하면서 앞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그러다 어느덧 새벽 5시가 되었을 때.몇 번이나 정신을 잃었는지 모르는 하윤은 이불 속에 얼굴을 파묻고는 미처 치지 못한 커튼을 멍하니 바라봤다.“날이 밝았네...”낮게 중얼거리는 하윤의 뒤에서 도준은 만족스러운 듯 그녀의 어깨에 입맞췄다.“저 샤워할래요.”하윤이 피곤한 듯 버둥거리며 이제 막 움직이려 할 때, 도준의 팔이 하윤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제 품에 다시 내리 눌렀다.땀 맺힌 도준의 가슴과 하윤의 등이 꼭 붙는 순간 질척거리고 뜨거운 공기가 얼굴을 확 덮쳤다.“이따가 씻어.”도준의 욕망이 고스란히 느껴지자 하윤은 흠칫 몸을 움츠렸다.“저 병원 가야 해요.”도준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고 하윤의 목덜미에 코를 박았다.“아직 해도 안 떴어.”다시 창밖을 보니, 이제야 겨우 하늘이 밝아지더니 태양이 점점 구름을 뚫고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아침이 밝아오는 시각, 꼭 끌어안은 남녀.분명 로맨틱하고 따뜻해야 할 장면이지만 왠지 쓸쓸한 분위기를 띠고 있었다.6시반, 침대에서 일어나 샤워를 하고.7시에 머리를 말리고 마지막 옷을 가방에 넣은 하윤
도준의 눈은 일순 어두워졌다.솔직히 맞는 말이다. 도준은 분명 약속했다. 하지만 약속한들 어쩌겠나?‘규칙은 남을 위해 정하는 거지, 나랑 무슨 상관이 있는데?’1년 동안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모른다.가뜩이나 얌전히 있지 못하는 하윤을 1년 동안 풀어주는 건 고양이한테 생선 맡기는 거랑 다를 게 없다.‘팔다리를 부러뜨려서라도 곁에 가둬둘까? 안 될 것도 없지 않나?’‘나랑 결혼했으면 이렇게 될 거란 건 알았어야지.’‘나 건드린 그날부터 물러설 곳이 없다는 것쯤은 알았어야지.’하지만 하윤을 놓아준 순간, 새하얗게 질린 하윤의 얼굴을 본 순간, 스멀스멀 피어오르던 생각은 다시 사라져버렸다.온실 속 화초처럼 자란 하윤을 진짜 부러뜨리면 죽어버릴 지도 모른다.강제로 곁에 묶어두면 평생 미움을 받을 거고.‘수지가 안 맞네.’잠깐 멈춰 있던 도준은 끝내 현관에 걸려 있던 외투를 들어 하윤에게 입혀 주었다.하지만 너무 큰 덩치 차이 때문에 헐렁한 옷을 보며 하윤은 몸을 버둥댔다.“괜찮아요, 그렇게 안 추워요.”도준은 하윤의 몸부림을 무시한 채 단추를 하나하나 채워 나갔다.“오늘 눈 와.”이에 하윤도 결국은 인형처럼 도준에게 제 몸을 맡겼다.그러던 그때, 도준이 마지막 단추를 채우고는 하윤의 머리를 꾹 눌렀다.“가 봐.”뻣뻣한 자세로 문을 나선 하윤은 엘리베이터에 오르기 전 뭔가 눈치챈 듯 뒤돌아봤다.문은 여전히 열려 있었고, 도준도 그 자리에 서 있었다.그 순간 하윤은 갑자기 도준의 품속으로 달려가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고개만 돌리면 모든 게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 텐데...그때, ‘띵-’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하윤은 엘리베이터를 흘끗 보고는 추억이 담긴 집을 다시 바라봤다.하지만 추억에 젖어 있던 눈을 감았다 다시 뜨더니 굳은 결심이라도 내린 듯 망설임 없이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이건 결국 혼자서 가야 하는 길이다.빌라를 나서자 눈꽃이 몸 위로 떨어졌다가 옷 속으로 스며들었다.하윤은 고개를 들어
승우가 평소 즐겨 입던 흰 셔츠를 꺼내던 하윤은 아무 생각 없이 대답했다.“응, 당연하지. 옷장 문 안 열면 옷 어떻게 챙겨?”“필요 없어. 내가 집에 돌아가서 갈아입을 테니까 챙겨올 필요 없어.”“어? 나 병원 가는 김에 챙겨가는 거야. 옷도 이미 다 찾았어.”“필요 없다니까! 옷장 건드리지 마!”갑자기 터져 나온 성난 말투에 하윤은 손을 멈췄다.어릴 때부터 제 부탁이라면 뭐든 들어주던 오빠였는데. 옷장이 아니라 오래 공을 들여 키운 게임 캐릭터를 달라고 해도 선뜻 주고, 핸드폰마저 바꿔 사용하던 오빠였는데 옷장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게 너무 수상했다.“오빠, 옷장에 손 좀 댄 거로 왜 그래?”그제야 승우도 자기가 너무 흥분했다는 걸 발견했다. 하지만 침착할 수 없는 상황에 심호흡을 몇 번 한 후에야 입을 열었다.“다른 사람이 나 대신 옷 골라주는 게 익숙하지가 않아. 너 얼른 병원에 와. 내가 직접 돌아가서 갈아 입을게.”승우는 본인이 애원하는 말투로 말하고 있다는 것조차 발견하지 못했다.오빠의 뜬금없는 태도에 의아했지만, 하윤은 끝내 승우의 말에 따랐다.“그럼 안 챙겨간다?”그제야 승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얼른 와.”“응, 지금 바로 갈게.”전화를 끊은 하윤은 승우의 옷을 다시 제 자리에 걸어 두었다.하지만 문을 닫기 전 안쪽을 살펴보니 오빠의 그런 태도가 더 이해되지 않았다.‘그냥 평범한 상자잖아, 왜 그렇게 흥분하는 거지?’...하윤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 양현숙은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때 하윤을 본 승우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윤아...”승우의 눈빛은 평온하고 여유롭던 평소와 달리 조급함과 두려움이 숨어 있었다.“너 괜찮지?“괜찮지 그럼, 내가 무슨 일이 있겠어?”하윤은 어리둥절한 듯 대답하고는 이내 눈살을 찌푸렸다.“오빠 오늘 되게 이상한 거 알아? 대체 왜 그래?”평소와 다를 바 없는 하윤의 모습에 승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싱긋 웃었다.“미안해, 어제 잠을 설쳐서 조금 예민했나
하윤은 감정을 애써 억눌렀지만 도준의 이름을 듣는 순간 끝내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엄마, 도준 씨가 앞으로 1년 동안 내 앞에 안 나타나겠다고 약속했어요. 아직은 이혼할 방법이 없어요, 미안해요...”흐느껴 울며 참회하는 하윤을 보자 양현숙은 눈을 감으며 조용히 눈물을 훔쳤다.“이혼하려 하는 게 엄마 때문이야? 아니면 네 생각이야?”“네?”하윤은 순간 막연한 표정을 지었다.그런 딸을 보자 양현숙은 눈물을 글썽이며 애써 미소 지었다.“엄마가 미안해. 어제 기분이 안 좋아 우리 딸한테 피해줬네. 꼭 이혼하라는 뜻 아니야. 만약... 만약 정말 민도준 사랑하면, 엄마는 괜찮아.”하윤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그 사람 아빠를 죽게 만들었어요. 그런데 괜찮을 리가 없잖아요!”이성호의 얘기를 꺼내자 양현숙은 또 다시 흐느꼈다.“그래서 그러는 거야. 네 아빠는 이미 돌아가셨잖아. 그래서 너까지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 민도준이 너 좋아한다는 거 엄마 눈에도 보여, 너도 민도준 좋아하고. 만약 엄마 때문이라면 엄만 괜찮아.”“...”억지미소를 짓는 양현숙을 보자 하윤은 마음이 쓰라렸다.어머니의 희생이 오히려 하윤을 더 미안하게 했다.그 순간 갑자기 은우가 떠올랐다. 은우도 똑 같은 말을 한 적이 있다.‘내 운명까지 짊어질 필요 없어. 내 선택은 내가 직접 한 거야, 너랑 상관없어. 민도준과도 상관없고.’‘좋아하면 만나.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윤아, 우리 여기까지만 하자.’...따지고 보면 하윤의 사랑은 지금껏 주변 사람들에게 상처만 주었다.예전에는 운우였다면, 지금은 어머니다.이 감정은 처음부터 잘못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하윤은 한참 동안 침묵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제 선택이에요.”“정말이야?”양현숙은 믿지 않았다.“네.”하윤은 눈을 내리깔았다.“나도 아버지를 죽게 만든 범인을 받아줄 수 없어요. 엄마, 우리 앞으로 우리 앞길만 봐요.”...이번 겨울의 첫눈으로 인해 해원은 한층 더 추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