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참 동안 갈등한 끝에 하윤은 끝내 조수석 문손잡이를 잡았다. 하지만 이제 막 문을 열려고 할 때, 도준이 뒷좌석으로 끌어가는 바람에 하윤은 순간 경계했다.“뭐 하려고 그래요?”그때 도준이 곧바로 뒷좌석에 앉더니 상냥하게 웃었다.“내가 앞에 앉았다가 그대로 엑셀을 밟고 자기 보쌈해 갈면 어떡하려고?”‘그런 것 같기도 하고...’하지만 그런 생각이 들기도 잠시, 아무런 가림막도 없이 나란히 앉아 있는 지금의 상황도 안전하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밤 10시가 넘은 시각, 하늘은 이미 어두컴컴했고, 고작 주택가 창문을 뚫고 나오는 따스한 조명만이 주위를 비춰주고 있었다.하지만 마침 차안을 비친 빛줄기마저 구석진 뒷좌석은 비추지 못했다.어둠 속, 남자가 점점 저를 덮쳐오는 바람에 하윤은 두 팔로 시트를 지탱한 채 점점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좁은 차 안인지라 곧바로 문에 막혀버렸다.“너... 너무 늦었어요...”“응.”그때 도준은 조금만 더 가면 입술이 닿을 거리에 멈춰선 채 제 코끝으로 하윤의 코끝을 콕 눌렀다. 서로의 숨결이 뒤섞여 긴장감이 배로 되었을 때, 도준의 낮게 깔린 음성이 귀를 간지럽혔다.“그러니까 잘 생각해 봐. 어떻게 해야 나 빨리 쫓을 수 있을지.”눈을 든 순간, 저를 집어삼킬 것만 같은 도준의 뜨거운 시선과 맞닿자 하윤의 심장은 저도 모르게 떨리기 시작했다.이대로 시간을 끌면 나중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하윤은 잘 알고 있었다.결국 마지못해 깊은숨을 한번 들이마시고는 눈을 꼭 감고 도준의 입술 위에 제 입술을 포갰다.말캉하고도 살짝 차가운 입술은 마치 푸딩처럼 도준의 입술을 간지럽혔다가 이내 떨어졌다. 하지만 하윤이 멀어지려고 할 때, 도준은 하윤의 뒷목을 꽉 잡더니 제 쪽으로 더 끌어당겼다. 도준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굳어버린 하윤을 보며 피식 웃었다.“지금 나랑 장난해?”말하는 와중에 꼭 붙은 입술이 자꾸만 스치는 바람에 간질거렸다.심지어 당장이라도 도준과 맞닿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 간지러움을
어느덧 어두운 밤에 녹아든 도준은 빛이 새어 나오는 집과 집 문 앞에 서서 한참 동안 들어가지 않는 여인을 빤히 바라보고 있다.‘그렇게 도망치고 싶어 하더니 기회가 주어졌는데 또 뭘 망설이는 거지?’그러던 그때, 문이 움직이더니 바닥을 비추고 있던 긴 불빛이 점점 좁아지더니 이내 어둠이 드리웠다...그러다가 문이 완전히 닫히려는 찰나, 다시 활짝 열리더니 집안의 불빛이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이윽고 하윤이 눈 깜짝할 새에 도준의 앞에 다가와 그에게 외투를 건네주었다.“외투 도준 씨 거잖아요. 입어요.”그 말을 끝으로 하윤은 다시 쪼르르 집안으로 달려가 문을 닫았다.도준은 하윤의 온기가 남아 있는 외투를 손에 쥔 채 눈썹을 치켜올렸다.그 시각.하윤은 쿵쾅거리는 가슴을 달래며 문에 기댄 채 마음 약해진 자신을 탓했다.‘비바람도 부를 수 있을 정도로 대단한 사람한테 내 동정 따위가 뭐 필요하다고.’그때 마침 핸드폰이 울렸다.[자기 냄새 다 뱄어. 더 보고 싶어지라고 일부러 나 엿먹이는 거야?]문자를 본 순간 하윤은 더 짜증이 치밀었다.마음을 끊어내지 못하는 저 자신이 미웠지만 혼자 밖에 서있던 도준의 모습이 자꾸만 잊히지 않았다....늦은 밤.어떻게 잘지가 문제가 되고 말았다. 하윤은 어머니와 함께 자고 싶었지만 시영은 언니와 함께 자겠다고 하는 바람에 결국은 왼쪽으로부터 양현숙, 하윤, 시영 이런 순서로 한 침대에 눕게 되었다.비록 좁았지만 마침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달랠 수 있어 하윤은 오히려 든든했다.너무 오랫동안 떨어져 지내 할말도 많아 세 모녀가 함께 누운 방에는 대화가 끊이질 않았다.그때 마침 물 마시러 밖을 나왔던 승우가 방 안 모습을 보며 싱긋 웃었다.“셋이서 지금 나 혼자 왕따 시키는 거야?”혼자 외로워하는 오빠를 보자 하윤은 으쓱한 듯 웃어 보였다.“그러니까 누가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으래? 아까 어필했으면 다 같이 잤을 텐데.”옆에 있던 시영이 끼어들었다.“맞아. 침대는 자리가 없으니까 정 우리와 같이
하윤의 울음은 한참 동안 지속됐다. 마치 그동안 받은 서러움을 한꺼번에 털어내기라도 하이.승우는 말없이 옆에서 티슈를 건네주었다가 하윤이 눈물을 닦은 티슈를 조용히 가져갔다.그러다 어느새 쓰레기통을 꽉 메운 티슈를 보자, 승우는 끝내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이제 늦었는데 우리 내일 다시 울까?”흐느끼고 있던 하윤은 그 말에 순간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우는 것도 끊었다가 다시 울 수 있어? 오빠, 분위기 너무 깨는 거 아니야?”양현숙도 승우가 못마땅하다는 듯 끼어들었다.“저리가. 어쩜 애 달랠 줄도 몰라? 위로해 주면 되지 내일 울라는 건 또 뭔데?”집안 서열에서 항상 밀려나던 게 습관 됐는지 승우는 곧바로 사과했다.“네네, 다 제 잘못입니다.”하지만 승우의 말 덕분에 하윤의 울음도 쏙 들어갔다.승우는 붉게 물든 하윤의 눈시울을 보며 입을 열었다.“얼음찜질이라도 하지 않을래? 안 그러면 내일 퉁퉁 부을 걸.”내일 또 연습이 있다는 생각에 하윤은 양현숙더러 먼저 자라고 일러두고는 곧장 승우와 함께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아쉽게도 냉장고에는 얼음이 없었지만 그나마 차가운 음료수가 있었다. 그마저도 승우는 하윤의 손이 시리기라도 할까 봐 대신 손에 쥐고 도와주었다.하윤은 소파에 벌러덩 드러누워 눈을 꼭 감고 승우의 보살핌을 마음껏 누렸다.스탠드 등의 따뜻한 조명 아래, 승우는 눈을 내리깐 채 부드러운 눈빛으로 하윤을 바라봤다.“내일 연습하지? 오빠가 데려다줄게.”하윤은 어느새 졸음이 쏟아졌는지 웅얼거리며 답했다.“아니야, 도준 씨가 데리러 온다고 했어.”도준의 얘기가 나오자 승우의 손이 순간 멈칫했다.“민도준이 너 많이 신경 쓰는 것 같던데.”“응.”만약 도준이 하윤을 신경 쓰지 않는다면 하윤은 벌써 몇백 번도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하윤의 망설임을 눈치챈 승우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왜 풀이 죽었는데? 전에는 민도준이 너한테 얼마나 잘해주는지 자랑하지 못해 안달이더니.”확실히 그랬을 때도 있었다. 물론 하윤이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차분하게 가라앉은 승우의 목소리에 하윤은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알았냐니? 오빠도 알고 있었어? 아빠가 돌아가시기 전에 도준 씨 만난 걸 이미 알고 있었던 거야? 아니면 도준 씨가 아빠 협박해서 죽게 만든 걸 알고 있었던 거야? 말 좀 해봐!”승우는 흥분한 하윤을 곧장 달랬다.“윤아, 우선 진정해. 나는...”이윽고 뭔가 망설이다가 끝내 다시 입을 열었다.“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민도준 만났다는 거 짐작은 했어...”방금까지 흥분해 있던 하윤은 순간 멍해졌다. 도저히 이 상황을 믿을 수 없었다.“알고 있었어? 그런데 왜 나한테 말 안 했어?”승우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네가 민도준에 관한 얘기를 꺼냈을 때 이미 만나고 있었잖아. 내가 말하면 네가 충동적으로 바보 같은 짓을 저지를까 봐 말 안 했어.”하긴, 하윤이 처음 승우에게 도준에 대해 물었을 때 두 사람은 이미 단단히 얽혀 있었다.그 기억을 떠올리자 하윤은 순간 목이 메었다.“그래서 공은채와 도준 씨의 일을 나한테 말한 거야?”“응.”승우는 푹 한숨을 내쉬었다.“위험한 사람이니 피하라고 귀띔이라도 해주고 싶었어. 그런데 두 사람이 결혼까지 했을 줄 누가 알았겠어.”저와 도준이 결혼할 거라고 통보하듯 말했던 장면이 떠오르자 하윤은 하려던 말을 도로 삼켰다. 이제야 그날 뭔가 말하려는 듯 계속 망설이던 오빠의 모습이 조금 이해가 됐다.도준이 은채의 일을 알게 되면 두 사람 사이가 곤란해질 거라던 오빠의 말이 곧이어 뇌리를 스쳤다.그 곤란할 거라는 상대는 하윤뿐만 아니라 도준도 해당하였던 거였다.‘그때부터 우리 결말은 이미 정해졌던 거였어.’흥분해서 잡았던 승우의 손을 놓으며 하윤은 잔뜩 상처받은 듯 중얼거렸다.“왜? 왜 진작 말해주지 않았어?”“민도준이 너랑 결혼까지 했으니 당연히 쉽게 놓아주지 않을 거고, 네가 억지로 떠나려 하면 다쳤을 거야. 윤아, 오빠는 네가 항상 무탈했으면 좋겠어.”그날과 거의 똑같은 말이었지만 지금 들으니 심경은 사
하윤의 말을 들은 승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위로했다.“다 지난 일이야. 너도 민도준과 결혼했으니 지난 일은 잊어.”하지만 하윤은 이 일을 끝까지 파고들기라도 하려는 듯 끊임없이 질문했다.“오빠는 도준 씨가 아빠 만났다는 거 어떻게 알았어? 혹시 아빠가 말했어? 아빠가 다른 말은 안 남겼어?”고요한 자정, 하윤의 거친 숨결은 유난히 또렷햇다.그때 몇 초간 침묵하던 승우가 고개를 저었다.“없어. 그냥 공은채한테 미안하고 우리한테 미안하다고만 하고 뛰어내렸어.”‘공은채한테 미안하다고...’‘하긴, 도준 씨한테서 공은채가 임신했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 모든 게 본인 때문이라고 생각하셨겠지. 모든 게 그날 술 마시고 실수한 것 때문이라고 생각하셨겠지. 본인은 그저 희생양이었다는 것도 모르고.’역시나 아무런 반전 없는 사실에 하윤은 어떤 기분인지 말할 수 없었다.하지만... 도준이 어떤 사람인 줄 안 이상, 다른 사람한테서 그가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는 걸 들어도 믿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민시영도, 민상철도 모두 도준은 마음이 없는 사람이라고 했었다.하윤은 지금껏 본인이 특별한 경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하윤의 존재는 도준에게 그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도준은 정말 사람들이 말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이 맞았다.몸도 마음도 지친 하윤은 더 이상 얘기할 마음도 사라졌는지 피곤한 목소리로 말했다.“나 그만 방에 돌아갈게. 오빠도 일찍 자.”말을 마친 하윤은 이내 뒤돌아 위층으로 올라갔다. 스탠드의 불빛 아래에서 승우는 하윤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묵묵히 지켜봤다.새벽이 되었을 때 승우는 안방대신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이윽고 방 문을 잠그고 굳게 닫혀 있던 제 옷장 문을 열었다.오랫동안 열지 않은 탓에 문을 여는 순간 곰팡내가 얼굴을 덮쳐왔다. 승우는 쌓여 있던 옷을 헤집어 내고 느슨한 판자를 열어 안에 놓여 있던 상자 하나를 꺼냈다.상자를 열자 아가자기한 물건들이 안에 놓여 있었다. 잘 포장되어 있는 물건들은 한눈에 봐도 정성
그 시각, 옆방.지하늘은 가을을 억지로 끌고 와 테이블 맞은편에 앉은 중년 남자에게 술을 따르라고 강요했다.“가을아, 유 대표님한테 술 한잔 따라 봐.”“나 내일 스케줄 있어서 많이 마시면 안 돼요.”귀찮은 듯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퉁명스럽게 내뱉은 말에 유민철은 미간을 팍 구겼다.“가을 씨가 바쁘다면 오늘 그만둡시다.”“어? 잠깐만요. 그만두다니요. 저희 가을이 좀 내성적인 성격이라 그래요. 조금 있으면 바로 괜찮아질 거예요. 우선 제 잔부터 받으세요.”말 몇 마디로 분위기를 푼 하늘은 곧바로 둘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가을을 나무랐다.“스케줄은 무슨! 너 요즘 계약 줄줄이 파기되고 공연도 다 취소됐어! 회사에서도 너 이제 포기했는데 아직도 살 궁리를 하지 않고 뭐 하는 거야? 나중에 광고 위약금 나오면 어떡할 건데?”“말해두는데, 유 대표님은 이 업계에서 알아주는 분이셔. 이번에 여우 주연상 탄 그 배우도 전에 스캔들 크게 터졌는데 모두 유 대표님이 손써서 처리해 준 거라고. 유 대표님이 나서면 네 스캔들도 바로 사그라들 거야. 너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이렇게 포기할 거야?”그 말에 가을은 테이블 아래에 드리운 손을 꽉 그러쥐었다. 확실히 지금 이 자리에 오기까지 가을은 많은 노력을 했다. 만약 실력이 부족해서 연예계에서 퇴출 당하면 인정할 테지만, 누명을 쓰고 앞날을 망치는 건 절대 참을 수 없었다. 그렇게 많은 광고 위약금까지 한꺼번에 떠안아야 하니 더욱 안될 일이었다...결국 가을은 현실에 타협한 듯 입을 열었다.“술은 얼마든지 마실 수 있어요. 그런데 잠자리는 절대 안 돼요!”그 말에 하늘은 눈알을 굴리더니 곧바로 대답했다.“누가 너더러 잠자리를 가지랬어? 유 대표님 그런 분 아니야. 아까 네가 술 안 마시겠다고 하니까 바로 가겠다고 하시는 거 못 봤어?”하긴, 전에 만났던 주승범에 비하면 유민철의 평판은 줄곧 좋았다. 물론 바람기가 있다는 소문은 따라다녔지만 누구를 강요했다는 소문은 한 번도 난 적이 없다.하지만 유
하늘은 뜬금없는 말에 어리둥절했다.“네? 지금 누구랑 얘기하세요?”그러다 고개를 돌리는 순간 뺨을 맞았다.“이 개자식! 감히 날 엿 먹여?”민혁은 분풀이라도 하듯 하늘을 때리고 나서야 유민철을 향해 인사했다.“도준 형한테서 들었어요, 고마워요.”그때 유민철이 제 손에 들려 있던 핸드폰을 몇 번 클릭하더니 입을 열었다.“아니에요. 영상은 이미 보냈어요. 다른 일 없으면 저는 이만 가볼게요. 가을 씨 많이 취한 것 같으니까 들어가 봐요.”“네, 알겠어요.”민혁은 방으로 들어가기 전에 잊지 않고 하늘을 발로 걷어찼다.“오늘은 바쁘니까 내일마저 때릴게!”그 시각 방 안, 가을은 유민철의 말 대로 이미 술에 취해 뻗어 있었다.민혁은 그런 가을을 보며 노래를 부르더니 다리를 꼰 채 옆에 앉았다.“싸가지! 이것 봐요, 그쪽 매니저가 유 대표 설득해서 약 타게 하는 영상. 그때랑 똑같은 상황이거든요!”영상을 튼 지 한참 지났는데도 여전히 반응이 돌아오지 않아 고래를 돌려 봤더니, 가을은 눈도 뜨지 않았다. 이에 민혁은 아예 가을의 눈을 손으로 벌리며 억지로 보여주었다.“이거 보라니까요! 나 정말 억울하다고!”한참을 외치던 민혁은 뜨겁게 달아오른 가을의 얼굴을 본 순간, 그녀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챘다.물론 술을 마시면 얼굴이 붉어지는 사람이 있다지만, 이건 그런 것과는 조금 달라 보였다.‘설마 또 약에 당한 건가? 아닌데? 약은 내 손에 있는데?’“이봐요. 왜 그래요? 왜 이렇게 뜨거워요?”몇 번을 불러도 대답이 없자 민혁은 억울함을 호소하는 대신 곧장 가을을 엎고 밖으로 뛰쳐나갔다.병원.“환자분 지금 감기 때문에 열이 난 상태예요. 그런 사람이 술을 이렇게 많이 마셨으니, 정 간호사, 얼른 링거 준비해 줘요.”가을이 감기에 걸렸다는 말에 민혁은 순간 죄책감이 들었다.“저... 저도 몰랐어요...”게다가 얼마 전에는 칼을 들고 달려들 만큼 기운 넘쳤으니, 아프다는 건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수금하고 돌아온 민혁은 병상에 누워
하윤은 갑자기 도준이 ‘비행기 사고’를 당하던 날이 떠올랐다.그때 하윤은 애간장이 타들어 가 하루하루가 괴로웠지만, 도준에게는 그저 모든 게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었다.결과로 보면 도준의 모든 선택은 늘 옳았다. 그 누구도 도준의 선택에 영향을 주지 못했다.대체 뭐가 잘못된 걸까? 그토록 악랄하던 공은채도 도준에 대한 약간의 기대 때문에 껌뻑 속아 넘어갔다.하지만 도준은 언제나 해냈다.하윤은 그제야 도준은 인간성이 없는 사람이라던 민상철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됐다. 그건 단지 도준의 잔인함과 포악함만을 말한 건 아니다. 인간적인 감정에 절대 휘둘리지 않는 도준의 마음을 말하는 것이었다.그 대상에 저도 포함되어 있었으니...분명 사랑하지만 하윤이 도준에게 그 어떤 제약도 될 수 없는 것처럼...지난 일들이 가을의 사건 때문에 하나, 둘 분명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하윤은 저와 도준 사이의 간극을 깊이 깨달았다....그 대화를 끝으로 극단에 도착할 때까지 차 안에는 침묵만 흘렀다.차가 멈춰서자, 하윤은 문을 나서기 전 어머니가 신신당부하던 게 떠올라 곧바로 내리는 대신 가방에서 미리 싸 온 도시락을 꺼내 도준에게 건넸다.“엄마가 만든 거예요. 가져다고 주래요.”도준은 눈썹을 치켜 올리며 말없이 도시락을 받았다.세 칸으로 나뉜 도시락에는 주먹밥과 찐빵 그리고 야채 볶음이 들어 있었다.도준이 보기만 할 뿐 입에 대지 않자 하윤은 다시 돌려받으려고 손을 뻗었다.“이런 음식 입에 안 맞으면 도로 가져와요.”도준은 하윤이 내미는 손을 꼭 잡으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그래도 장모님 성의가 있는데.”말하면서 도준은 곧바로 젓가락을 꺼내 들었다.“그럼 먹고 있어요. 전 먼저 가볼게요.”“같이 먹지 않고?”“밥 먹는 것도 같이 있어 줘야 해요?”하윤은 싫다는 티를 팍팍 내면서 말했다.도준은 그런 하윤의 목덜미를 잡은 채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그럼 오늘 저녁엔 나랑 같이 집에 갈 거지?”하윤은 그 질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