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윤은 눈시울이 뜨거워 났다. 그러다 갑자기 벌떡 일어서며 도준을 가리켰다.“혹... 혹시 공은채가 그렇게 전하라고 시켰어요? 왜 공은채를 도왔어요? 사랑하지 않았다면서, 왜 도와줬어요?”도준도 따라서 일어났다. 하지만 도준이 일어나자 하윤은 할 수 없이 고개를 뒤로 젖혀야 했다. 부릅뜬 하윤의 눈은 시뻘게져 있었고 분노 외에도 속상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도준이 눈물을 닦아주려고 손을 뻗은 순간, 하윤은 바로 피해버리더니 원수 보듯 도준을 노려봤다.그러자 도준은 혀를 입안에서 굴리더니 다시 손을 거두었다.“공은채의 복수 대상은 공씨 가문이었어. 나도 마침 그걸 원했고.”도준은 하윤의 눈을 보면서 입가에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그때 그 폭동 이후, 공태준은 공은채의 심장과 맞는 이식 상대를 찾다가 내 어머니를 찾아냈거든. 심지어 거이 죽어가는 내 어머니 심장을 더 오래 보존하겠다고 금지된 약물도 사용하면서 일주일이나 더 살려두었어. 그렇게 마음대로 살려두더니, 이식 수술은 어머니가 살아 있을 때 해서 그대로 돌아가셨어.”하윤은 순간 심장이 쥐어 짜지는 듯 아팠다. 진명주가 임종을 맞이하면서 어떤 고통을 받았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도준의 성격상 그런 공씨 가문을 가만히 놔뒀을 리 없다. 하지만 도준은 그때 마침 경성에서 제 가족들과 싸우고 있었기에 공은채를 이용할 기회를 쉽게 놓쳤을 리 없다.그러고 보면 공은채든 민도준이든 모두 뼛속까지 똑 같은 부류다.그걸 인지한 순간, 머릿속에서 무언가 뚝하고 끊어진 것 같았다.그건 하윤이 잡고 있던 유일한 동아줄이자 마지막 생명줄이다.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하윤은 그대로 뒤돌아서 나갔다.‘이 사람을 떠나야 해. 공은채와 관련 있는 이 사람을 떠나야 해.’그때, 도준이 하윤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이거 놔요!”하윤은 마구 버둥댔지만 도준의 힘을 이길 수는 없었다. 심지어 얼마 못 가 다시 소파 위로 돌아왔다.“우선 다 들어.”하윤은 더 이상 들을 게 없다고 생각했지만, 제대로 말하기
‘모든 게 다 가짜였어. 모두 가짜였어...’하윤은 울지도 웃지도 못한 채 멍하니 중얼거렸다.“모두 가짜였어. 모두 가짜야...”도준은 점점 창백해지는 하윤을 보자 얼른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들어 올렸다.“뭐가 가짜인데?”하지만 하윤은 마치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멍하니 있었다. 심지어 이제 막 뭍 위로 건져낸 물고기처럼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당장이라도 질식할 것처럼 굴었다.도준은 손으로 하윤의 턱을 힘껏 쥐어 입을 벌리게 하고는 그녀가 숨을 고르기를 기다렸다.그러다가 낯빛이 조금 괜찮아지자 차가운 하윤의 얼굴을 비벼 온기를 나눠주고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조금 괜찮아졌어?”하윤은 조금 정신이 돌아온 듯했으나 마치 도준을 처음 보는 것처럼 바라봤다.이윽고 손을 뻗어 도준의 깊은 아이홀과 눈을 만졌다.‘언제부터였을까? 이 차가운 눈동자 속에 내가 있었던 건? 이젠 나만 있네.’차가운 손끝이 점차 내려가며 도준의 입술을 만졌다.‘기억 속에 늘 세상 만사를 비웃는 것 같은 미소가 걸려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웃음도 없어진 채 나만 주시하고 있어. 이런 느낌 참 좋았는데.’결국 하윤은 천천히 도준의 턱을 매만지더니 저를 빤히 보는 도준의 눈을 보며 또박또박 말했다.“우리 이혼해요.”...도준의 목울대는 몇 번 꿀렁이더니 제 턱에서 떨어지려는 하윤의 손을 낚아챘다.“안돼. 그것만은 안돼.”하윤은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심지어 가벼운 말투로 말했다.“그럼 앞으로 내 앞에 나타나지 마요.”도준은 저를 보며 진지하게 말하는 하윤을 보며 웬일인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창밖에는 언제부턴가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눈마저 실내에서 오가는 가벼운 말보다 차갑지는 않았다.도준은 손을 뻗어 하윤의 잔머리를 귀 뒤로 넘겨주더니 나지막하게 말했다.“잊었어? 우리 결혼했어. 자기는 내 와이프고, 그러니 우리는 반드시 같이 있어야 해.”“그럼 이혼해요.”“안돼.”둘은 순간 교착 상태에 빠졌다.하지만 하윤은 더 이
한때 집 앞 작은 화단에 여러 가지 꽃들이 피어 있었는데 이제는 온통 잡초만 남아 있었다. 심지어 하윤의 어머니 양현숙이 정성껏 가꿨던 꽃들마저 모두 메말라 누렇게 변해 있었고 가지 위에 고작 누런 이파리 몇 개밖에 달려있지 않았다.하윤은 굳게 채워진 철문을 보면서 아쉬운 듯 밀었다.그때, 옆으로 손 하나가 쑥 나와 문을 열어주자, 하윤은 몸을 돌려 의아한 듯 도준을 바라봤다.이 집은 사실 오래 전에 경매로 팔렸다.‘공태준이 분명 본인이 사들였다고 했는데, 왜 도준 씨가 열쇠를 갖고 있지?’‘아, 하긴, 공씨 가문이 무너졌으니 도준 씨 마음대로 하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지.’‘우리 가족을 장악했던 게 공씨 가문이었지만 결국은 모두 도준 씨 손에 들어갔던 것처럼.’철문을 열고 집에 들어간 하윤은 옛날의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그러자 도어락에서 삐리릭, 하는 소리가 울리더니 문이 열렸다.하윤의 집은 민씨 저택이나 공씨 저택처럼 호화롭거나 널찍하지 않다. 그러나 2층으로 된 단독 빌라에 생활의 흔적이 곳곳에서 느껴졌다.특히 아이 셋을 키우다 보니 세 오누이가 받은 상장만 해도 진열대를 꽉 채웠다.이성호가 받았던 국제 트로피는 세 오누이가 학교에서 받았던 상장과 트로피들 때문에 모두 구석으로 밀려났다.심지어 넘쳐나는 옷가지들은 아래층에 궤짝을 만들어 넣었고, 작은 테이블 위에는 어머니의 손길이 느껴지는 레이스 식탁보가 펼쳐져 있어 따뜻하고 아늑한 느낌을 주었다.주위를 빙 둘러보던 하윤은 수납식 계단을 올라 제 방으로 가 문을 열었다.그 순간 마치 시공간의 문을 열기라도 한 듯 오래된 기억들이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왔다.조용한 방 안에서 갑자기 웃음소리가 들려왔다.‘언니, 나 그 치마 한 번만 입어 볼 게. 절대 더럽히지 않을게, 약속해.’‘윤이야, 오빠가 잘못했어. 다음 번에 닭강정 사줄게, 그러니까 화 풀어.’‘우리 딸, 내려와서 밥 먹어야지.’‘흥, 피아노는 열심히 치지 않더니 밥 먹으라는 소리에는 바로 반응하네.’하윤은 문득 고개
두 사람은 앞뒤로 나란히 서서 빌라를 나섰다.그때, 문 앞 차안에서 비몽사몽해 있던 민혁은 대문이 열리는 소리에 흠칫 놀라 일어나더니 이내 차에서 내렸다.“어디 가요? 데려다 줄게요.”하윤은 무시한 채 민혁을 지나쳤지만 곧장 도준에게 잡혀버리고 말았다.“타.”밤새 잠을 이루지 못한 도준의 눈은 이미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고 턱에는 거뭇거뭇하게 수염이 자라났다. 하지만 그런 모습에도 도준은 초라하기는커녕 오히려 남성미가 더해졌다.‘그래. 이게 민도준이지. 어떤 상황이든 여전히 태산처럼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사람.’하윤은 도준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입을 열었다.“극단에 갈 거예요.”그로부터 30분 뒤, 차는 극단 앞에 멈춰 섰다.하윤은 아무 미련 없이 차에서 내리더니 곧장 안으로 들어갔다.그 시각 민혁은 백미러로 도준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도준 형, 오늘 조 국장 쪽에 가봐야 하는데...”“응, 우선 옷부터 갈아입고.”차는 곧장 골든 빌라로 향했다. 한참 뒤 차에서 내린 도준의 얼굴에는 밤을 샌 흔적이 조금도 없었다. 오히려 민혁이 기운 없이 연신 하품을 해댔다.“차키 이리 줘.”민혁은 무의식적으로 손에 든 차키를 도준에게 건넸고, 다음 순간 도준은 운전석에 올라타더니 쌩하고 떠나버렸다. 그제서야 민혁은 자기가 버림받았다는 걸 인지했다.‘그래, 뭐. 택시 타고 가면 되지.’하지만 현실을 빠르게 받아들이고 주머니를 뒤진 순간, 뭔가 깨달은 듯 차 뒤꽁무니를 향해 목청껏 소리쳤다.“내 핸드폰과 지갑...”주차장에는 일순 민혁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그러다 결국 방법이 없자, 할 수 없이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돈도 없는데 어디 가야지?’그렇게 한창 생각하고 있을 때, 민혁의 눈에 28층 버튼이 들어왔다.민혁은 갑자기 든 생각에 제 뺨을 찰싹 때리며 중얼거렸다.“어떻게 싸가지 집 비번을 안다고 그 집에 들어가 샤워하고 무전취식 하고 잠까지 잘 생각 할 수 있어? 이러면 안되지.”10분 뒤.삐리릭-민혁은 결국 가을의 집 문
오늘, 해원의 하늘은 유독 흐릿한 데다, 비록 경성처럼 눈이 내리지는 않았지만 오한이 느껴질만큼 추운 날씨다.그 때문인지 엘리베이터에 오른 진가을은 몸을 오소소 떨었다. 벌써 새집을 구한 가을은 어제 밤새 새집에서 짐을 정리하다가 결국 그곳에서 하루 묵고 오늘에야 돌아오는 길이다.오늘 마침 스케줄이 없는 틈에 귀중품을 옮기고 저녁에 이삿짐 센터를 부를 생각이었다.하지만 집 문을 연 순간, 코 고는 소리가 들려올 줄 누가 알았겠는가?그 순간 가을은 잔뜩 겁에 질렸다.‘안 그래도 요즘 사생팬이 연예인의 집에 숨어든다는 기사도 많던데, 설마 나도 재수없게 걸린 건 아니겠지?’소파 위에서 사람의 발을 보는 순간 가을은 곧바로 핸드폰을 들어 신고하면서 문 앞에 두었던 꽃병을 손에 들고 슬금슬금 들어섰다.‘젠장, 감히 내 집에 기어 들어와? 경찰이 오기 전에 정당방위로 화나 실컷 풀어야겠어.’가을이 아무리 용감하더라도 여자이기에 소파 위에 누워있는 남자의 등을 본 순간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결국 몸을 한껏 숙이고 속으로 숫자를 셌다.‘하나, 둘, 셋!’“이 때려 죽일 도둑놈아!”이윽고 가을은 꽃병을 세게 휘둘렀다. 맞으면 죽지는 않아도 머리가 깨질 정도로 센 공격이었다.다행히 산전수전 다 겪은 민혁은 기척에 깨어나 가까스로 그 공격을 피했다. 하지만 가을이 너무 세게 휘두른 탓에 꽃병은 민혁의 눈썹을 가격했고, 순간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이런 젠장! 잘생긴 내 얼굴!”그제야 ‘사생팬’의 얼굴이 민혁인 것을 발견한 가을은 말까지 더듬었다.“왜... 그쪽이...” 그와 동시에 핸드폰 너머로 경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여보세요, 들리십니까? 무슨 일로 신고하셨죠?”“어...”민혁은 순간 욕지거리를 퍼부었다.“누구 전화예요? 저승사자한테서 걸려온 거예요? 그럼 나 좀 데려가달라고 해요!”...전화에 대고 대충 이유를 둘러댄 가을은 곧바로 사과하고 끊어버렸다. 그러고는 민혁 따위는 그냥 무시하고 싶었는데, 저 때문에 피가 줄
민혁은 솔직히 말했다.“그쪽 매니저가 알려주던데요.”‘매니저...’‘하긴. 예전부터 포주처럼 굴었으니 이상할 것도 없지.’가을은 뭔가 이상했지만 그날 밤 제가 민혁을 덮친 기억이 떠오르자 이내 생각을 털어버리고 떨떠름하게 말했다.“됐어요. 이 돈으로 병원 가서 치료받아요. 난 이삿짐센터 예약해서 이사해야 하거든요.”알겠다는 듯 대답한 민혁은 문 앞에 다다르더니 갑자기 고개를 홱 돌렸다.“그, 저기 오늘 저녁 시간 있어요?”“왜요?”“저녁에 식사나 같이 해요. 혹시 양꼬치 좋아해요?”그 말에 가을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저 같은 대스타랑 지금 양꼬치를 뜯자고요?”“싫으면 말아요. 갈게요.가을의 거절에 민혁은 바로 포기하고 문을 나섰다. 그런데 마침 문이 닫기려는 순간, 안쪽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더 맛있는 가게 알아봐요.”그제야 민혁은 기분이 좋은 듯 웃었다.“알았어요.”가을도 닫히는 문을 향해 ‘흥’하고 콧방귀를 뀌더니 이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저녁 6시.간단히 샤워하고 옷을 갈아입은 하윤은 또 수아한테 붙잡혀 한창 동안 푸념을 들었다. 그래서인지 두 사람이 극단을 나설 때 밖에는 아무도 없었다.수아는 여전히 슬픈 듯 중얼거렸다.“선배, 저 다시는 사랑을 믿지 않을 거예요.”하윤은 눈을 내리 깐 채 대답했다.“응.”‘나도 안 믿어.’그러던 그때, 수아는 갑자기 하윤의 팔을 잡고 미친 듯이 흔들어댔다.“선배, 저기 봐요! 저 사람 민도준 아니에요?”그제야 눈치챈 듯 고개를 들었더니, 차 옆에서 담배를 피우는 도준이 하윤의 눈에 들어왔다. 보아하니 오랫동안 기다린 모양이었다.그 옆모습에 수아는 하트가 된 눈으로 흥분해서 말했다.“와, 진짜 잘 생겼네.”확실히 도준은 누구나 덮쳐 들게 할만한 얼굴을 갖고 있긴 하다.심지어 눈 깜짝할 사이에 홀려 간이고 쓸개고 모두 갖다 바칠 만큼 잘생겼다.수아는 도준의 실물을 보자 슬픔은 깡그리 잊고 사진을 찍어대기 바빴다.그러면서 하윤을 다그치기까지 했다
하윤이 짐을 들고 도준의 옆을 지날 때, 허리가 덥석 잡혔다.이윽고 하윤의 머리에 입을 댄 채 웅얼거리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여보.”하윤은 그 호칭에 버둥대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고개를 숙였다.그러자 허리를 감쌌던 남자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여보, 나 무시하지 마. 내가 다 보상해줄게.”“그래요. 그럼 우리 아빠 살려내요.”하윤은 아주 가볍게 말했지만 그 내용은 매우 단호했다.“내가 필요한 보상은 그것뿐이니까.”다음 순간. 도준은 하윤을 더 꽉 끌어안았다. 그 힘은 마치 하윤을 제 품안에서 으스러뜨릴 것만 같았다.그렇게 한참 동안 이어진 침묵 끝에 하윤이 부서지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도준 씨, 우리 그만 끝...”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도준이 하윤의 입술을 막으며 그녀의 숨결마저 앗아가 버렸다.심지어 품에 못 박아두듯 꽉 끌어안은 탓에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그러다 겨우 떨어지더니 하윤의 귓가에 입술을 대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우리한테 시작은 있어도 끝은 없어. 날 싫어하면 내 옆에서 날 죽여 복수할 기회를 엿봐야 하는 거 아니야?”창백한 하윤의 얼굴에서 유독 입술만 빨갛게 부어 더 눈에 띄었다.하윤은 고개를 저었다.“전 도준 씨 못 죽여요.”그 말에 날카롭던 도준의 눈매가 살짝 풀리더니 제 가슴을 미는 하윤의 잡아 입에 댔다.“나 사랑해서?”“네.”하윤은 도준을 사랑한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 모든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사랑하지 않던 때로 돌아갈 수 없었다.그러니 얼른 도준한테서 도망쳐 원래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그곳에서 시시때때로 저에게 아버지의 죽음을 상기시켜 줘야 했으니까.그러지 않으면 편안한 나날을 보내면서 모든 걸 잊어버릴 수 있었으니까.도준도 하윤의 생각을 읽어냈기에 더욱더 하윤을 보내줄 수 없었다. 될 수만 있다면 하윤을 저에게서 영영 헤어 나오지 못하게 하고 싶었다.도준의 강렬한 눈빛에 하윤은 차갑게 말했다.“만약 저를 여기 붙잡아 두면, 언젠가
곽씨 집안 사람들은 정계에 발을 담그고 있기에 공은채를 사립 병원 대신 국립 병원으로 데려갔다.때문에 의사부터 간호사까지 바쁜 나머지 아무리 개인 병실을 사용한다 하더라도 은채는 사립 병원에서처럼 편안함을 누리지는 못했다.하윤이 병실에 들어갈 때만 해도 머리맡에 놓인 물병을 꺼내느라 애를 쓰는 모습이었으니. 하지만 하윤을 보자마자 은채는 잠깐 흠칫하더니 이내 여유로운 모습으로 변했다.“하하, 생각보다 늦게 왔네?”하윤은 얼른 은채의 침대 옆으로 다가가 그녀 몸에 연결된 수많은 의료기기들을 둘러보더니 비아냥댔다.“그러는 너야말로 생각보다 냉정하네.”은채는 순간 싸늘한 눈빛을 내비치더니 이내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다.“왜? 내 심장을 도둑질해간 걸 알고 내가 무너지기라도 바란 모양이야?”말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사실 제 심장이 바꿔치기 당했다는 걸 알자마자 은채는 자기가 함정에 빠졌다는 걸 깨달았다.이런 저런 상황을 고려해 그렇게 많은 조치를 취했는데도 결국 지고 말았다.심지어 의사로부터 앞으로 한달 정도 더 살 수 있다는 시한부 판정까지 받게 되었다. 고작 한달! 그녀의 목숨은 앞으로 한달밖에 남지 않았다.몇 년 동안 계략을 꾸며 모든 준비를 해둔 게 물거품이 되어버렸다.분명 마지막 한 단계만 성공하면 모든 걸 가질 수 있었는데!병상에 누운 은채는 독사의 눈빛으로 하윤을 노려봤다.“내가 널 참 쉽게 생각했나 봐. 평소에는 순진한 척 착한 척 굴더니, 나랑 가를 게 뭔데? 내 오빠가 널 좋아하는 마음 이용하고, 석지환이 너한테 느끼는 죄책감을 이용해서 같이 나를 상대했잖아.”하지만 하윤은 오늘 은채와 말다툼하려고 이곳에 온 게 아니었다. 더욱이 그런 일을 벌인 마당에 은채의 도발에 쉽게 넘어갈 리도 없고.때문에 아예 고개를 끄덕이며 쿨하게 인정했다.“맞다면 어쩔 건데? 네가 자주 사용하는 방법을 사용한 것뿐이야.”그 말에 은채는 입가에 냉소를 지었다.“그러면서 무슨 자격으로 피하자 코스프레를 하며 정의구현 하러 여기까지 찾아
연말이 되자, 하윤은 사람들 다 같이 경성에서 새해를 맞이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경성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진가연과 한성운도 그러고 싶어 했다.남은 사람은 양현숙이었다.하윤은 원래 양현숙을 데리고 경성에 오려고 했는데, 양현숙이 해성시의 집을 떠나기 싫어했다. 양현숙은 집을 지켜야 한다면서 오래 집을 비우면 너무 처량한 느낌이 난다고 했다.하윤은 양현숙이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집뿐만이 아니라 이성호와의 추억이다.그래서 하윤은 그렇게 요구하지 않고 도윤을 데리고 자주 보러 갔다.이번에 하윤의 요청에 양현숙이 기분 좋게 동의하면서 31일에 같이 새해를 맞이하기로 했다.하윤은 손님 맞을 준비를 했고 곧 새해가 다가왔다. 양현숙이 하윤에게 전화를 걸었고 조금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하윤에게 물었다.“하윤아, 네 오빠 귀국한다는데, 만나볼래? 싫으면 너희 방해하지 말라고 할게.”그때 병원에서 기분 나쁘게 헤어진 뒤로 만난 적이 없었다.승우는 도윤의 나이를 잘 기억하고 있어 가끔 나이에 맞는 장난감을 보내주었다.이렇게 여러 해 지나고 하윤은 전의 일을 마음에 담아주지 않았으며 오히려 너무 오랫동안 연락을 안 한 것에 대해 조금 자책했다. 양현숙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하윤은 양현숙이 중간에서 힘들까 봐 가볍게 말했다.“오빠 돌아왔으면 같이 오세요. 우리 한 가족 되게 오래 같이 못 만났잖아요?”양현숙은 기뻐서 대답했다.“알았어, 그렇게 오빠한테 전달할게.”...통화를 마친 하윤은 이 일을 도준에게 얘기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승우가 하윤의 오빠지만, 하윤이 이 이년 사이에 아무 이성과 접촉하지 않았다. 심지어 수컷 모기까지 도준은 하윤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도준은 승우를 항상 경계해 왔다.도준이 동의하지 않을까 봐 그날 저녁 도준이 돌아왔을 때, 하윤은 120%로 잘 보이려고 했다.하윤은 발꿈치를 들고 도준의 외투를 벗겨주었다.“여보 왔어요? 어땠어요? 오늘 일은 힘들지 않았어요?”도준이 하윤을 힐끔 쳐다보고 소파에 앉아
하윤은 요즘 아들이 조금 이상한 것 같았다.도윤은 다른 애들과 달리 장난감으로 놀기 좋아하거나,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가장 많이 하는 일이 책을 보는 일이었다.가끔 하윤은 도윤이 너무 오래 앉아 있어 힘들까 봐 텔레비전 앞에 데려와서 애니메이션을 틀어줬다.그러나 하윤이 할 일을 하고 돌아오니, 도윤이 뉴스 채널을 돌려서 재밌게 보고 있었다.소파 위에 있는 작은 아들을 보고 하윤은 걱정이 앞섰다.‘설마 내가 너무 연습에 몰두해서 아들을 소홀히 했나? 그래서 아들이 상처를 받아서 저런가? 안 돼! 도윤에게 완벽한 동년을 줄 거야!’하윤은 이 일이 엄청나게 큰 일이라고 생각해서 한동안 생각하고 도윤을 데리고 나이가 비슷한 아이들과 많이 만나게 하려고 했다. 많이 만나면 도윤의 동심이 돌아오지 않을까 싶었다.하윤은 어디를 가던 도우미가 자기를 보는 것이 싫어, 그냥 아파트에 살았다. 이곳에는 아이들이 노는 놀이터가 있었고 그중에 모래로 촉감놀이 하는 곳이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하윤은 그곳에 도윤을 데리고 가기로 마음먹었다.날씨가 좋아 하윤은 도윤의 손을 잡고 그를 집 밖으로 데리고 갔다.모래가 있는 곳으로 가자, 도윤은 모래를 뿌리며 재밌다고 웃어대는 친구들을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하윤은 도윤의 표정을 보지 못하고 신나게 말했다.“도윤아, 친구들 얼마나 재밌게 놀아, 우리도 얼른 들어가서 놀자.”도윤은 눈썹이 붙을 정도로 찌푸렸지만, 하윤이 기대에 찬 모습에 하윤과 함께 놀아줘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래서 도윤은 하윤이 시키는 대로 신발을 벗고 양말을 신은 채로 하윤과 함께 모래에 들어갔다.도윤의 눈썹과 눈은 하윤을 닮았고 나머지는 도준과 똑같았다. 너무 잘생겨서 순식간에 다른 애들의 주의를 끌었다.한 아이가 도윤에게 말했다.“우리 같이 모래 파서 궁전 만들자!”그 아이가 손을 잡으려고 하자 도윤이 한 걸음 물러났다.“미안, 난 엄마랑 놀아야 해서.”하윤은 도윤이 자기랑 놀고 싶어 하는 줄 알고 마음속으로
하윤이 해성시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됐는데, 소혜에게서 전화가 왔다. 소혜는 딸 민효연이 첫돌 생일을 쇠는 김에 미뤘던 결혼식도 같이 한다고 했다.지훈이 산을 구매해서 이제 산속에서 결혼식을 한다고 했다.하윤이 깜짝 놀랐다.“결혼식 한다고?”“네!”소혜는 간식을 먹으며 말했다.하윤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소혜를 불렀다.“소혜야.”소혜가 목을 쭉 뻗었다.“네?”지훈이 욕실에서 몸을 내밀자, 빛나는 눈은 여우처럼 사람을 홀렸고 머리가 젖어 더욱 섹시해 보였다.지훈의 보조개는 아주 귀여웠다.“수건 가져다줘.”지훈의 섹시한 모습에 소혜가 다급히 말했다.“언니, 오빠한테 언제 시간 되는지 물어봐 줄래요? 그럼, 이렇게 정하고 저는 남자 만지러, 아, 아니, 수건 가져다주러 갈게요!”‘헤헿.’통화를 마친 하윤이 소혜가 보낸 웨딩사진을 보고 마음이 조금 찡했다.소혜를 보고 그런 것이 아니라 지훈을 보고 그런 느낌이 들었다.저녁 식사를 할 때, 하윤이 이 일을 도준에게 말했다.“지훈이 소혜랑 결혼식 올린대요. 다음 달에 한다는데, 당신이 언제 경성에 있는지 물어보라고 하던데.”도준이 하윤을 바라봤다.“그건 당신한테 달린 거 아닌가? 당신이 자꾸 밖으로 돌아다니니까 내가 힘을 좀 써서 당신을 잡아와야지.”“말하는 것 좀 봐요. 제가 무슨 나쁜 일을 하는 사람처럼 말하네요? 다 연습하러 가는 거지.”하윤은 젓가락을 입에 물고 일부러 아까 했던 말을 반복했다.“소혜랑 지훈이 결혼식 한대요.”도준은 물을 마시고 콧소리가 섞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응.”도준이 눈치채지 못하자, 하윤은 더 선명하게 눈치를 줬다.“아니, 쟤네는 아이가 태어난 뒤에 미뤘던 결혼식 올리는 거네요?”도준이 웃으며 말했다.“아니면? 아기를 배속에 다시 밀어 넣고 결혼식 할 수는 없잖아?”하윤은 화가 나 그릇에 담겼던 완자에 구멍을 뚫었다.“맞아요! 맞는 말이죠!”도준이 눈치가 없자, 하윤은 밥을 다 먹고 나서도 도준과 한마디도 하지 않고 텔레비전을 봤다.
경성에서 하윤이 자기 전에 핸드폰을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침대에서 급히 일어나 욕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여보!”“도준 씨!”“도준 씨!!”욕실의 안개가 도준의 넓은 어깨에 흩어졌고 도준은 가운을 걸치고 나왔다. 가슴팍이 보였고 물기를 채 닦지 않아 가슴팍과 근육을 따라 아래로 흘러내렸다.도준은 하윤의 다급한 부름에 어디 부딪힌 줄 알고 급히 나왔는데, 나와보니 하윤이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파닥거리고 있었다.도준은 들고 있던 수건으로 하윤의 엉덩이를 때렸다.“왜 그래? 무슨 귀신이라도 봤어?”하윤은 침대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도준의 어깨에 놓고 핸드폰을 도준에게 들이밀었다.“빨리 봐봐요! 빨리!”하윤이 너무 날뛰어 핸드폰을 너무 가까이 대는 바람에 도준은 화면이 잘 보이지 않았다.도준은 하윤의 손목을 뒤로 잡아당겼지만 하윤이 손을 흔드는 바람에 인내심이 없어 하윤의 허리를 안고 침대에 눕혔다. 혹시라도 너무 흥분해서 침대 밑으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보기 귀찮으니까 얘기해 줘.”“고은지가 결혼한대요! 누구랑 하는지 맞혀 봐요!”도준이 물어보기도 전에 하윤은 참지 못하고 얘기했다.“곽준호! 곽도원의 아들 말이에요! 세상에, 아무런 연관이 없던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결혼하게 된 거죠?”도준은 침대에 기대며 말했다.“아무 연관이 없진 않지. 전에 곽도원이 고은지를 새 아내로 맞이한다고 술자리를 열었었어.”“네?”하윤이 깜짝 놀랐다.‘그럼, 고은지가 곽준호 새엄마? 세상에! 나보다 더 용감하네?’하윤은 참지 못하고 도준을 밀었다.“얼른 얘기해 봐요.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도준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팔을 하윤의 다리에 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하윤은 도준의 팔을 치워버렸다.“쳇, 당신도 몰라요?”하윤의 귀여운 모습에 도준이 하윤의 볼을 꼬집으며 그녀를 돌렸다.“그렇게 알고 싶으면 결혼식에 가면 되겠네.”하윤은 볼이 꼬집혀서 말을 똑바
준호는 가볍게 물었지만, 눈빛에는 긴장함이 깃들어 있었다.준호는 은지의 차가운 얼굴을 보고, 그녀의 마음도 자신처럼 뜨거운지 보아낼 수 없었다. 그리고 은지가 왜 준호를 찾지 않고 준호가 왔을 때 그에게 기회를 주는지 알지 못했다.사람은 누구나 욕심이 수도 없이 많아진다. 은지를 볼 수 없을 때는 볼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또 만나니까 가지 말라고 잡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가지 말라고 잡으면 은지 마음속에 준호가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준호의 마음은 조각조각으로 나뉘어 흩어져 버렸다.준호의 손에는 점점 힘이 들어갔고 자신의 기분을 은지가 느끼게 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난 너 속이기 싫어, 난 너 없어도 잘 살아.”준호의 손에 힘이 빠졌고 빛나던 눈도 빛을 잃었다.준호가 기분이 처져 손을 떼려고 하는데, 은지의 차가운 손이 준호의 손등을 감쌌다.“근데 네가 있으면 난 더 기분이 좋아서 매일 행복하게 살 거 같아.”실망했던 준호는 조금 희망을 얻고 말했다.“왜 말을 그렇게 늦게 해! 날 그렇게 힘들게 할 거야?”은지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아마도?”준호는 은지가 웃는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었고, 이렇게 정말 기뻐서 나오는 웃음은 더 본 적이 없었다.준호는 성큼성큼 은지에게 다가가 입맞춤했다.“고은지, 너 이번에 또 가면 너 절대 안 놔줄 거야!”“응.”비음이 섞인 은지의 목소리에 준호의 몸은 순식간에 타올랐고 준호는 은지를 품에 안았다.“더 이상 나 화나게 하면 안 된다?”“될수록 그렇게 해볼게.”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말했다.“네 성격에는 문제가 없어?”“너!”준호는 화를 내고 싶었지만 계속 품에 안고 싶었던 은지를 안고 있어 화를 낼 수 없었다.“성격 안 좋은 거 나도 알아, 차근차근 알려주면 나 다 고칠 수 있어.”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도 말은 잘 듣네.’“다 고쳐도 나 좋아해야 된다? 안 그러면 너 안 놔줄 거야!”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될
아까는 은지에게 핍박을 당해 자기도 모르게 질문이 나왔다.두 사람은 마주 보며 차에 앉아 있었고 은지가 준호를 지그시 바라보자, 준호는 그 물음을 다시 물어볼 수 없었다.그러나 준호가 물어보지 않았는데, 은지가 고개를 끄덕였다.“생각한 적 있어.”아까까지 겨울의 추위에 덜덜 떨던 준호가 은지의 대답에 봄으로 끌려온 것 같았다.준호는 자기가 잘못 들은 것인지 알지 못했지만, 기분이 좋아 다시 물었다.“뭐라고?”은지는 담담하게 바로 대답했다.“이 6개월 동안 너 생각한 적 있다고.”이 6개월 동안 은지는 준호처럼 어린 사람, 준호처럼 무모한 사람, 은지를 마음에 들어한 사람,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 중에 준호처럼 진심으로, 물을 끼얹어도 꺼지지 않는 불씨와 같은 열정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은지는 30여 년간 계속 연기를 했었다. 이성희한테서 귀염을 받으려고, 고씨 집안의 사랑을 받으려고, 곽도원의 귀염을 받으려고 말이다.은지가 수많은 자태를 뽐냈지만, 준호는 은지가 가장 악독하고 차가운 모습을 보고도 좋아한 사람이다. 그래서 준호를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생각났다.“그럼, 앞으로 생각 안 할 거야.”“너!”준호가 다급히 말했다.“왜? 아까는 내 생각 했다며?”은지는 대답하지 않고 준호를 바라보았다. 은지는 준호의 화가 차츰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준호가 부끄러워하며 말했다.“나, 나도 네 생각 했어.”이때 차의 라디오에서 로맨틱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준호는 평소에 이런 노래를 듣기 싫어했는데, 지금 들으니 아주 로맨틱했다.준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데, 은지가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가게는 저기 있어.”은지가 물어보지 않자, 준호도 은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나랑 가는 거야, 마는 거야? 물어보고 싶은데 물어볼 용기가 안 나!’마을이 너무 작아 노래 한 곡이 채 끝나지 않았는데, 목적지에 도착했다.은지가 차에서 내리자, 준호도 따라서 내렸고 은지가 계단으로 올라가자, 준호도 따라
호텔 내부의 뜨거운 공기에 준호는 재채기를 했고 곧이어 식탁 앞에 앉아 있는 은지를 발견했다.반년이 지나 은지의 머리는 좀 길었지만 조금 헝클어진 상태로 풀어 놓았다. 회색 니트를 입고 있었고 전에 비해 가벼운 느낌이었다. 준호는 뜨거운 공기 때문에 목이 말랐다. 열정 넘치는 아저씨가 준호 보고 얼른 와서 앉으라고 하면서 술을 부어주었다.“은지 남자 친구죠?”준호는 은지가 또 전처럼 새엄마라고 할까 봐 경계했다.그러나 은지는 그저 간결하게 대답했다.“아니요.”준호는 한숨 돌렸다. 그러나 곧이어 준호는 또 짜증이 났다.이제 은지가 준호의 새엄마도 아니니 정말 아무런 사이가 아니다.희현은 은지에게 귓속말했다.“저 사람은 왜 또 언니 잡으러 온 거예요? 제가 문 지킬 테니까 도망갈래요?”말을 채 하지 못했는데, 은지가 희현의 입에 음식을 넣어주었다.“왜요? 이 계획 별로예요?”“아니, 너 목소리 너무 커서 저 사람이 너 보고 있어.”과연 고개를 돌리자, 준호가 살기 가득한 눈으로 희현을 바라보고 있었다.희현은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이제 막 유명해지려고 하는데, 죽으면 안 되지.’희현이 한 말 때문인지, 은지가 준호를 불러 놓고 준호랑 말을 안 해서인지, 밥을 채 먹지 못했는데, 그는 은지가 화장실을 갔을 때 막아섰다.은지가 손을 씻고 돌아섰는데, 준호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은지는 놀라지 않았고 오히려 준호가 지금까지 버틴 것이 기적 같았다.“손 씻으려고?”준호는 잘 얘기해 보려고 했는데, 은지의 말에 또 화가 났다.“손 씻는다고? 내가 이렇게 먼 곳까지 찾아왔는데, 손 씻으러 왔겠어?”은지는 준호의 손에 묻은 양념을 가리키며 말했다.“그건 아니겠지만, 손은 씻어야 할 거 같아.”준호는 은지가 한 말에 반박할 수 없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씻었다.손을 다 씻은 준호는 은지가 자리에 돌아갔을 줄 알았는데, 고개를 들어보니 은지가 옆에 서 있었다. 거울 속의 두 사람은 연인처럼 붙어 있었다.은지가 준호를 보자,
‘설마 고은지?’곧이어 여자가 목도리를 벗자, 얼굴이 보였다.은지가 아니라, 전에 은지와 함께 준호를 속였던 배우 희현이었다.연말이 되자, 밖에서 일하던 자녀들이 다 무진으로 돌아왔기에 마을에 못 보던 차가 많이 세워져 있어 희현은 준호의 차를 의심하지 않고 차 주변을 돌며 통화를 했다.“여보세요? 언니, 저 도착했는데, 어디 계세요?”“호텔 쪽에 있어요? 아, 그럴 줄 알았으면 택시 타고 호텔로 갔죠.”준호는 희현의 통화를 듣고 마음이 다시 뜨거워졌다.‘언니? 고은지인가? 고은지도 여기 있나?’...무진에 호텔이 하나밖에 없었지만, 항상 손님이 별로 없었다. 연말이라 손님이 더 없어서 주인장은 일 층에 탁자를 다 붙여서 음식을 해놓았다. 아이들이 모여 있어 희현이 왔을 때 아이들이 희현에게 달려왔다.“희현 언니!”희현은 통쾌하게 용돈을 나눠줬다.“이리와, 언니 돈 많이 벌어서 너희 용돈 줄게!”아이들을 보내고 희현은 창 옆에 앉아 있는 여자에게로 다가갔다.“언니, 저 왔어요!”은지가 처음에 무진에 왔을 때는 준호를 피하려고 온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피할 필요가 없어져 사탕 가게를 책방으로 바꾸고 알바생을 찾았다. 이 책방에서 책을 보면 사탕을 먹을 수 있는 시스템으로 했다.이 반년 동안 은지는 여행을 다니면서 지냈다.며칠 전, 호텔 주인이 은지보고 무진에 와서 연말을 보내라고 했고 아이들이 은지를 보고 싶다고 해서 오기로 했다.희현은 옆 마을에서 드라마를 찍다가 같이 식사하러 왔다.식탁에는 맛있는 음식이 한 상 차려져 있었고 사람들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둘러앉았다.밖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준호만이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차가워진 도시락을 들고 화를 냈다.준호는 은지가 외롭게 연말을 보낼 줄 알고 도시락까지 싸서 왔는데, 이렇게 화목하게 모여서 보낼 줄 몰랐다.준호는 몇 시간을 운전해서 여기까지 온 자신이 참 바보 같았다.이렇게 도시락을 건네주기는 좀 그렇고, 아무 말도 안 건네고 가자니 아쉬
준호도 그동안 못 완성했던 임무를 마저 수행해야 했다.전에는 은지를 찾는 데만 집중해서 임무는 뒷전이었다. 이번에는 각 지역을 하나씩 제대로 돌아봐야 했다.돌아본 곳이 많아질수록 준호의 마음도 점차 평온해졌다.마을에 오랫동안 있으면서 자연과 마주하니 준호의 성격도 많이 누그러졌다.3개월이라는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고 준호는 남한성에 돌아가 만족스러운 결과를 냈다.팀장은 준호가 전과 달라진 모습에 칭찬했다.“이런 일 많이 하니까 좋은 점이 있네.”...그 후로 준호는 예전처럼 훈련하고 임무를 수행했다.이곳에 있으면 외계의 간섭을 덜 받기에 사람들이 준호의 집안이 현재 어떤 상황인지 개의치 않았다.그저 매일 밤 침대에 누우면 준호는 신옥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은지 씨가 정말 차가운 사람이라면 날 위해 비밀을 지켜주지 않았을 거야.’신옥영도 이 비밀을 준호가 알게 되면 많은 것을 바꾸게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은지처럼 작은 일도 따지는 사람은 무조건 알았을 것이다.준호는 전에 은지가 아무런 감정이 없는 냉혈 동물인 줄 알았는데, 지금은 잘 알 수 없었다.‘고은지 나한테 정은 있었나?’준호는 이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이 아프기도 했고 뜨겁기도 했다.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에 쉽게 들 수 없었다.‘만약 고은지가 나한테 마음이 없다면 이미 놔줬으니까 다시 가서 방해하면 안 돼. 근데 혹시 나한테 마음이 있었다면?’...눈 깜짝할 사이에 연말이 되어 길거리는 연말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준호는 신옥영이 머무는 저택으로 갔는데, 집안이 시끄러웠다.하나가 장원수를 지휘하며 집을 꾸몄고 하나는 신옥영과 함께 음식을 만들며 신옥영에게 애교를 부렸다.올해에 준호는 신옥영의 저택에서 이 부녀를 자주 봤는데, 처음에 그들을 만났을 때, 살기 가득한 눈으로 장원수를 쏘아보며 일자리며 가족 관계까지 다 물어봤었다. 나쁘지 않았다.그러나 신옥영은 재혼할 마음이 없어 보였고 준호는 신옥영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자기는 신옥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