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윤이 말한 모든 건 그저 사막 위에 뜬 신기루에 불과했다.분명 모두 거짓이지만 너무 목 마른 나머지 그런 희망이라도 갖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도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떨리는 하윤의 등을 계속 토닥였다.너무 오래 울다 지친 걸까? 아니면 이 따뜻한 온기가 너무 그리웠던 걸까? 하윤은 그대로 잠들어 버렸다.하지만 편한 모습은 아니었다. 자다가 아버지가 투신하는 모습이 나타나지 않으면, 경성에서 있었던 간 떨어지는 경험들이 꿈에 나타났으니까.몇 시간 자지도 못했지만 깨어났을 때 하윤은 온 몸이 식은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숨을 헐떡이며 눈을 뜬 하윤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도준이 등을 토닥였다.“악몽 꿨어?”“네.”그래도 잠을 자서인지 하윤의 정신은 어젯밤처럼 날카롭지는 않았다.이윽고 잠깐 침묵하더니 이내 일어났다.“저 세수하고 올게요.”하윤이 화장실에 들어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도준도 따라 들어왔다.이곳 세면대는 하윤의 요구대로 두 사람이 나란히 씻을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심지어 양치 도구까지 모두 커플로 되어 있었다.분명 훈훈해야 할 장면이지만, 무겁게 깔린 침묵 때문에 이상하리만치 괴이했다.도준은 본인 스타일에 맞지 않게 지나치게 여성스럽고 귀여운 수건을 도로 원위치에 걸어두고는 입을 열었다.“밖에서 기다릴게.”말을 마친 뒤 그는 그대로 문을 나섰다.사실을 맞이해야 할 때가 오자 하윤은 오히려 조급해지지 않았다.그도 그럴 게, 도준은 늘 내뱉은 말은 지키기에 어젯밤 모든 진실을 말해주겠다고 약속했으니 어기지 않을 거라고 믿고 있었다.세수를 마친 하윤은 침실에서 옷을 갈아입은 뒤 호흡을 가다듬고 침실 문을 열었다.도준은 거실 소파에 기댄 채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끼고 있었다. 길게 붙어 있는 재를 보면 도준이 한참 동안 담배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하윤이 말끔하게 준비하고 나온 걸 보자 도준의 눈동자는 미세하게 흔들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눈빛으로 제 옆을 가리켰다.“뭘
하윤은 눈시울이 뜨거워 났다. 그러다 갑자기 벌떡 일어서며 도준을 가리켰다.“혹... 혹시 공은채가 그렇게 전하라고 시켰어요? 왜 공은채를 도왔어요? 사랑하지 않았다면서, 왜 도와줬어요?”도준도 따라서 일어났다. 하지만 도준이 일어나자 하윤은 할 수 없이 고개를 뒤로 젖혀야 했다. 부릅뜬 하윤의 눈은 시뻘게져 있었고 분노 외에도 속상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도준이 눈물을 닦아주려고 손을 뻗은 순간, 하윤은 바로 피해버리더니 원수 보듯 도준을 노려봤다.그러자 도준은 혀를 입안에서 굴리더니 다시 손을 거두었다.“공은채의 복수 대상은 공씨 가문이었어. 나도 마침 그걸 원했고.”도준은 하윤의 눈을 보면서 입가에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그때 그 폭동 이후, 공태준은 공은채의 심장과 맞는 이식 상대를 찾다가 내 어머니를 찾아냈거든. 심지어 거이 죽어가는 내 어머니 심장을 더 오래 보존하겠다고 금지된 약물도 사용하면서 일주일이나 더 살려두었어. 그렇게 마음대로 살려두더니, 이식 수술은 어머니가 살아 있을 때 해서 그대로 돌아가셨어.”하윤은 순간 심장이 쥐어 짜지는 듯 아팠다. 진명주가 임종을 맞이하면서 어떤 고통을 받았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도준의 성격상 그런 공씨 가문을 가만히 놔뒀을 리 없다. 하지만 도준은 그때 마침 경성에서 제 가족들과 싸우고 있었기에 공은채를 이용할 기회를 쉽게 놓쳤을 리 없다.그러고 보면 공은채든 민도준이든 모두 뼛속까지 똑 같은 부류다.그걸 인지한 순간, 머릿속에서 무언가 뚝하고 끊어진 것 같았다.그건 하윤이 잡고 있던 유일한 동아줄이자 마지막 생명줄이다.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하윤은 그대로 뒤돌아서 나갔다.‘이 사람을 떠나야 해. 공은채와 관련 있는 이 사람을 떠나야 해.’그때, 도준이 하윤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이거 놔요!”하윤은 마구 버둥댔지만 도준의 힘을 이길 수는 없었다. 심지어 얼마 못 가 다시 소파 위로 돌아왔다.“우선 다 들어.”하윤은 더 이상 들을 게 없다고 생각했지만, 제대로 말하기
‘모든 게 다 가짜였어. 모두 가짜였어...’하윤은 울지도 웃지도 못한 채 멍하니 중얼거렸다.“모두 가짜였어. 모두 가짜야...”도준은 점점 창백해지는 하윤을 보자 얼른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들어 올렸다.“뭐가 가짜인데?”하지만 하윤은 마치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멍하니 있었다. 심지어 이제 막 뭍 위로 건져낸 물고기처럼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당장이라도 질식할 것처럼 굴었다.도준은 손으로 하윤의 턱을 힘껏 쥐어 입을 벌리게 하고는 그녀가 숨을 고르기를 기다렸다.그러다가 낯빛이 조금 괜찮아지자 차가운 하윤의 얼굴을 비벼 온기를 나눠주고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조금 괜찮아졌어?”하윤은 조금 정신이 돌아온 듯했으나 마치 도준을 처음 보는 것처럼 바라봤다.이윽고 손을 뻗어 도준의 깊은 아이홀과 눈을 만졌다.‘언제부터였을까? 이 차가운 눈동자 속에 내가 있었던 건? 이젠 나만 있네.’차가운 손끝이 점차 내려가며 도준의 입술을 만졌다.‘기억 속에 늘 세상 만사를 비웃는 것 같은 미소가 걸려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웃음도 없어진 채 나만 주시하고 있어. 이런 느낌 참 좋았는데.’결국 하윤은 천천히 도준의 턱을 매만지더니 저를 빤히 보는 도준의 눈을 보며 또박또박 말했다.“우리 이혼해요.”...도준의 목울대는 몇 번 꿀렁이더니 제 턱에서 떨어지려는 하윤의 손을 낚아챘다.“안돼. 그것만은 안돼.”하윤은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심지어 가벼운 말투로 말했다.“그럼 앞으로 내 앞에 나타나지 마요.”도준은 저를 보며 진지하게 말하는 하윤을 보며 웬일인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창밖에는 언제부턴가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눈마저 실내에서 오가는 가벼운 말보다 차갑지는 않았다.도준은 손을 뻗어 하윤의 잔머리를 귀 뒤로 넘겨주더니 나지막하게 말했다.“잊었어? 우리 결혼했어. 자기는 내 와이프고, 그러니 우리는 반드시 같이 있어야 해.”“그럼 이혼해요.”“안돼.”둘은 순간 교착 상태에 빠졌다.하지만 하윤은 더 이
한때 집 앞 작은 화단에 여러 가지 꽃들이 피어 있었는데 이제는 온통 잡초만 남아 있었다. 심지어 하윤의 어머니 양현숙이 정성껏 가꿨던 꽃들마저 모두 메말라 누렇게 변해 있었고 가지 위에 고작 누런 이파리 몇 개밖에 달려있지 않았다.하윤은 굳게 채워진 철문을 보면서 아쉬운 듯 밀었다.그때, 옆으로 손 하나가 쑥 나와 문을 열어주자, 하윤은 몸을 돌려 의아한 듯 도준을 바라봤다.이 집은 사실 오래 전에 경매로 팔렸다.‘공태준이 분명 본인이 사들였다고 했는데, 왜 도준 씨가 열쇠를 갖고 있지?’‘아, 하긴, 공씨 가문이 무너졌으니 도준 씨 마음대로 하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지.’‘우리 가족을 장악했던 게 공씨 가문이었지만 결국은 모두 도준 씨 손에 들어갔던 것처럼.’철문을 열고 집에 들어간 하윤은 옛날의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그러자 도어락에서 삐리릭, 하는 소리가 울리더니 문이 열렸다.하윤의 집은 민씨 저택이나 공씨 저택처럼 호화롭거나 널찍하지 않다. 그러나 2층으로 된 단독 빌라에 생활의 흔적이 곳곳에서 느껴졌다.특히 아이 셋을 키우다 보니 세 오누이가 받은 상장만 해도 진열대를 꽉 채웠다.이성호가 받았던 국제 트로피는 세 오누이가 학교에서 받았던 상장과 트로피들 때문에 모두 구석으로 밀려났다.심지어 넘쳐나는 옷가지들은 아래층에 궤짝을 만들어 넣었고, 작은 테이블 위에는 어머니의 손길이 느껴지는 레이스 식탁보가 펼쳐져 있어 따뜻하고 아늑한 느낌을 주었다.주위를 빙 둘러보던 하윤은 수납식 계단을 올라 제 방으로 가 문을 열었다.그 순간 마치 시공간의 문을 열기라도 한 듯 오래된 기억들이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왔다.조용한 방 안에서 갑자기 웃음소리가 들려왔다.‘언니, 나 그 치마 한 번만 입어 볼 게. 절대 더럽히지 않을게, 약속해.’‘윤이야, 오빠가 잘못했어. 다음 번에 닭강정 사줄게, 그러니까 화 풀어.’‘우리 딸, 내려와서 밥 먹어야지.’‘흥, 피아노는 열심히 치지 않더니 밥 먹으라는 소리에는 바로 반응하네.’하윤은 문득 고개
두 사람은 앞뒤로 나란히 서서 빌라를 나섰다.그때, 문 앞 차안에서 비몽사몽해 있던 민혁은 대문이 열리는 소리에 흠칫 놀라 일어나더니 이내 차에서 내렸다.“어디 가요? 데려다 줄게요.”하윤은 무시한 채 민혁을 지나쳤지만 곧장 도준에게 잡혀버리고 말았다.“타.”밤새 잠을 이루지 못한 도준의 눈은 이미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고 턱에는 거뭇거뭇하게 수염이 자라났다. 하지만 그런 모습에도 도준은 초라하기는커녕 오히려 남성미가 더해졌다.‘그래. 이게 민도준이지. 어떤 상황이든 여전히 태산처럼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사람.’하윤은 도준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입을 열었다.“극단에 갈 거예요.”그로부터 30분 뒤, 차는 극단 앞에 멈춰 섰다.하윤은 아무 미련 없이 차에서 내리더니 곧장 안으로 들어갔다.그 시각 민혁은 백미러로 도준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도준 형, 오늘 조 국장 쪽에 가봐야 하는데...”“응, 우선 옷부터 갈아입고.”차는 곧장 골든 빌라로 향했다. 한참 뒤 차에서 내린 도준의 얼굴에는 밤을 샌 흔적이 조금도 없었다. 오히려 민혁이 기운 없이 연신 하품을 해댔다.“차키 이리 줘.”민혁은 무의식적으로 손에 든 차키를 도준에게 건넸고, 다음 순간 도준은 운전석에 올라타더니 쌩하고 떠나버렸다. 그제서야 민혁은 자기가 버림받았다는 걸 인지했다.‘그래, 뭐. 택시 타고 가면 되지.’하지만 현실을 빠르게 받아들이고 주머니를 뒤진 순간, 뭔가 깨달은 듯 차 뒤꽁무니를 향해 목청껏 소리쳤다.“내 핸드폰과 지갑...”주차장에는 일순 민혁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그러다 결국 방법이 없자, 할 수 없이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돈도 없는데 어디 가야지?’그렇게 한창 생각하고 있을 때, 민혁의 눈에 28층 버튼이 들어왔다.민혁은 갑자기 든 생각에 제 뺨을 찰싹 때리며 중얼거렸다.“어떻게 싸가지 집 비번을 안다고 그 집에 들어가 샤워하고 무전취식 하고 잠까지 잘 생각 할 수 있어? 이러면 안되지.”10분 뒤.삐리릭-민혁은 결국 가을의 집 문
오늘, 해원의 하늘은 유독 흐릿한 데다, 비록 경성처럼 눈이 내리지는 않았지만 오한이 느껴질만큼 추운 날씨다.그 때문인지 엘리베이터에 오른 진가을은 몸을 오소소 떨었다. 벌써 새집을 구한 가을은 어제 밤새 새집에서 짐을 정리하다가 결국 그곳에서 하루 묵고 오늘에야 돌아오는 길이다.오늘 마침 스케줄이 없는 틈에 귀중품을 옮기고 저녁에 이삿짐 센터를 부를 생각이었다.하지만 집 문을 연 순간, 코 고는 소리가 들려올 줄 누가 알았겠는가?그 순간 가을은 잔뜩 겁에 질렸다.‘안 그래도 요즘 사생팬이 연예인의 집에 숨어든다는 기사도 많던데, 설마 나도 재수없게 걸린 건 아니겠지?’소파 위에서 사람의 발을 보는 순간 가을은 곧바로 핸드폰을 들어 신고하면서 문 앞에 두었던 꽃병을 손에 들고 슬금슬금 들어섰다.‘젠장, 감히 내 집에 기어 들어와? 경찰이 오기 전에 정당방위로 화나 실컷 풀어야겠어.’가을이 아무리 용감하더라도 여자이기에 소파 위에 누워있는 남자의 등을 본 순간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결국 몸을 한껏 숙이고 속으로 숫자를 셌다.‘하나, 둘, 셋!’“이 때려 죽일 도둑놈아!”이윽고 가을은 꽃병을 세게 휘둘렀다. 맞으면 죽지는 않아도 머리가 깨질 정도로 센 공격이었다.다행히 산전수전 다 겪은 민혁은 기척에 깨어나 가까스로 그 공격을 피했다. 하지만 가을이 너무 세게 휘두른 탓에 꽃병은 민혁의 눈썹을 가격했고, 순간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이런 젠장! 잘생긴 내 얼굴!”그제야 ‘사생팬’의 얼굴이 민혁인 것을 발견한 가을은 말까지 더듬었다.“왜... 그쪽이...” 그와 동시에 핸드폰 너머로 경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여보세요, 들리십니까? 무슨 일로 신고하셨죠?”“어...”민혁은 순간 욕지거리를 퍼부었다.“누구 전화예요? 저승사자한테서 걸려온 거예요? 그럼 나 좀 데려가달라고 해요!”...전화에 대고 대충 이유를 둘러댄 가을은 곧바로 사과하고 끊어버렸다. 그러고는 민혁 따위는 그냥 무시하고 싶었는데, 저 때문에 피가 줄
민혁은 솔직히 말했다.“그쪽 매니저가 알려주던데요.”‘매니저...’‘하긴. 예전부터 포주처럼 굴었으니 이상할 것도 없지.’가을은 뭔가 이상했지만 그날 밤 제가 민혁을 덮친 기억이 떠오르자 이내 생각을 털어버리고 떨떠름하게 말했다.“됐어요. 이 돈으로 병원 가서 치료받아요. 난 이삿짐센터 예약해서 이사해야 하거든요.”알겠다는 듯 대답한 민혁은 문 앞에 다다르더니 갑자기 고개를 홱 돌렸다.“그, 저기 오늘 저녁 시간 있어요?”“왜요?”“저녁에 식사나 같이 해요. 혹시 양꼬치 좋아해요?”그 말에 가을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저 같은 대스타랑 지금 양꼬치를 뜯자고요?”“싫으면 말아요. 갈게요.가을의 거절에 민혁은 바로 포기하고 문을 나섰다. 그런데 마침 문이 닫기려는 순간, 안쪽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더 맛있는 가게 알아봐요.”그제야 민혁은 기분이 좋은 듯 웃었다.“알았어요.”가을도 닫히는 문을 향해 ‘흥’하고 콧방귀를 뀌더니 이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저녁 6시.간단히 샤워하고 옷을 갈아입은 하윤은 또 수아한테 붙잡혀 한창 동안 푸념을 들었다. 그래서인지 두 사람이 극단을 나설 때 밖에는 아무도 없었다.수아는 여전히 슬픈 듯 중얼거렸다.“선배, 저 다시는 사랑을 믿지 않을 거예요.”하윤은 눈을 내리 깐 채 대답했다.“응.”‘나도 안 믿어.’그러던 그때, 수아는 갑자기 하윤의 팔을 잡고 미친 듯이 흔들어댔다.“선배, 저기 봐요! 저 사람 민도준 아니에요?”그제야 눈치챈 듯 고개를 들었더니, 차 옆에서 담배를 피우는 도준이 하윤의 눈에 들어왔다. 보아하니 오랫동안 기다린 모양이었다.그 옆모습에 수아는 하트가 된 눈으로 흥분해서 말했다.“와, 진짜 잘 생겼네.”확실히 도준은 누구나 덮쳐 들게 할만한 얼굴을 갖고 있긴 하다.심지어 눈 깜짝할 사이에 홀려 간이고 쓸개고 모두 갖다 바칠 만큼 잘생겼다.수아는 도준의 실물을 보자 슬픔은 깡그리 잊고 사진을 찍어대기 바빴다.그러면서 하윤을 다그치기까지 했다
하윤이 짐을 들고 도준의 옆을 지날 때, 허리가 덥석 잡혔다.이윽고 하윤의 머리에 입을 댄 채 웅얼거리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여보.”하윤은 그 호칭에 버둥대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고개를 숙였다.그러자 허리를 감쌌던 남자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여보, 나 무시하지 마. 내가 다 보상해줄게.”“그래요. 그럼 우리 아빠 살려내요.”하윤은 아주 가볍게 말했지만 그 내용은 매우 단호했다.“내가 필요한 보상은 그것뿐이니까.”다음 순간. 도준은 하윤을 더 꽉 끌어안았다. 그 힘은 마치 하윤을 제 품안에서 으스러뜨릴 것만 같았다.그렇게 한참 동안 이어진 침묵 끝에 하윤이 부서지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도준 씨, 우리 그만 끝...”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도준이 하윤의 입술을 막으며 그녀의 숨결마저 앗아가 버렸다.심지어 품에 못 박아두듯 꽉 끌어안은 탓에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그러다 겨우 떨어지더니 하윤의 귓가에 입술을 대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우리한테 시작은 있어도 끝은 없어. 날 싫어하면 내 옆에서 날 죽여 복수할 기회를 엿봐야 하는 거 아니야?”창백한 하윤의 얼굴에서 유독 입술만 빨갛게 부어 더 눈에 띄었다.하윤은 고개를 저었다.“전 도준 씨 못 죽여요.”그 말에 날카롭던 도준의 눈매가 살짝 풀리더니 제 가슴을 미는 하윤의 잡아 입에 댔다.“나 사랑해서?”“네.”하윤은 도준을 사랑한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 모든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사랑하지 않던 때로 돌아갈 수 없었다.그러니 얼른 도준한테서 도망쳐 원래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그곳에서 시시때때로 저에게 아버지의 죽음을 상기시켜 줘야 했으니까.그러지 않으면 편안한 나날을 보내면서 모든 걸 잊어버릴 수 있었으니까.도준도 하윤의 생각을 읽어냈기에 더욱더 하윤을 보내줄 수 없었다. 될 수만 있다면 하윤을 저에게서 영영 헤어 나오지 못하게 하고 싶었다.도준의 강렬한 눈빛에 하윤은 차갑게 말했다.“만약 저를 여기 붙잡아 두면, 언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