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라고요?”하윤은 놀란 듯 물었다.“그럼 곽도원은 염옥란에 대한 옛정 때문에 공은채를 도운 거예요?”“하.”도준은 비꼬는 듯 픽, 웃었다.“옛정은 다 부질없는 거야. 그게 뭐라고.”그 말에 하윤은 더 이해가 가지 않았다.“그럼 곽도원이 왜 공은채를 도와주는 거예요?”“추세를 따르는 거지.”현재 도준의 손에 있는 칩은 누구나 다 눈독 들이는 물건이다. 그런데 도준 곁에 조관성이 있어 끼어들 틈을 찾지 못하던 참에, 상황을 엿들을 수 있고 옛 첫사랑의 딸을 도왔다는 자아만족을 할 기회가 있으니 안 할 이유도 없었을 거다.도준의 설명을 들은 하윤은 마음이 놓이기는커녕 오히려 더 걱정되었다.만약 곽도원이 옛 사랑 때문에 공은채를 도운 거라면 그마나 다행인데, 도준한테 손을 쓸 마음을 갖고 도왔다면 도준이 위험하니까.하윤은 다급한 듯 말했다.“그... 그러면 당장 도망가지 않고 뭐 해요?”그 말에 도준은 피식 웃더니 낮은 소리로 느긋하게 대답했다.“그래, 그럼 자기가 가르쳐줘. 어디로 도망갈까?”너무 걱정한 하윤은 도준이 저를 놀리는 것조차 눈치채지 못하고 제가 봤던 영화들을 머릿속에 떠올렸다.“뭐 이불 커버를 묶어 창문으로 도망치는 건 어때요?”“음, 괜찮은 것 같네. 또 더 있어?”“그리고...”하윤은 진지하게 고민했다.“땅굴을 파요! 그것도 안 되면 의사인 척 가운을 입고 유유히 빠져나온다던가!”“그거 좋겠네. 도망치고 나서 자기랑 역할극도 하고 딱이겠다. 침대에서 주사라도 놔줄까?”저는 조급해 미칠 지경인데 여전히 장난스럽게 말하는 도준을 보자 하윤은 화가 치밀었다.“좀 진지해질 수는 없어요? 도준 씨한테 무슨 일이라도 나면 저...”이틀간 마음을 졸이며 걱정한 하윤은 끝내 참지 못하고 또 흐느끼기 시작했다.“저는 어떡하라고요?”분명 선조차 없는 핸드폰으로 통화를 하고 있었는데, 그 눈물은 마치 전화선처럼 두 사람을 꼭 묶어주었다.그런 감정은 뭐라 표현할 수는 없었지만 왠지 몽글몽글하고 간질간질하니 좋았다.도
남자는 반백 살 되는 나이에 넓은 어깨를 가지고 있었으며 모든 사람을 깔보는 듯한 고고한 태도는 지위의 증명이었다.곽도원이 오자 조관성은 도준과 투덜대던 걸 멈추고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인사했다.“곽 국장님.”곽도원 역시 고개를 까닥 끄덕였다. 하지만 평등한 관계가 아닌 부하직원에게 인사하는 것처럼 다소 건방져 보였다.“반가워요.”물론 두 사람의 직위가 동등하다고 하나, 곽도원의 경력이 조관성보다 훨씬 높은 건 인정할 수밖에 없다. 심지어 손에 쥐고 있는 실권도 적지 않다.그에 비해 조관성은 그저 이제 막 떠오르는 샛별 같은 존재이며, 이미 많은 공적을 세워 앞으로의 가능성이 무한한 사람이다.때문에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해 꺼려하고 있고, 서로 예의를 지키는 서먹서먹한 그런 관계다.그때 조관성이 도준을 힐끗 보더니 입을 열었다.“훈련 기지의 일로 민 사장의 도움이 필요하니,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곽도원이 덤덤하게 말했다.“뭐 시범 훈련이 중요하긴 하나, 사람 목숨도 작은 일은 아니죠. 공씨 집안이 해원에서 그나마 위상 있는 가문인데, 공씨 집안 딸내미가 영문도 모른 채 심장을 바꿔 치기 당했다면 잘 조사해 봐야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만약 나중에 사실이 밝혀지면 조 국장 명성에 누가 될까 걱정이니 차라리 확실히 말하고 가는 게 어떻겠습니까?”어쨌든 동료이기에 조관성도 곽도원의 체면을 세워주지 않을 수 없었다.“민 사장, 곽 국장님이 민 사장을 오해하는 것 같은데, 제대로 설명하세요.”도준은 나른하게 소파에 기댄 채 귀찮은 듯 말을 꺼냈다.“상황 설명은 이미 드렸는데 문제는 곽 국장님이 대답에 만족을 못하시던데요. 곽 국장님, 아니면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면 제가 따라할게요.”곽도원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말했다.“조사에 다르면 민 사장이 수술 직전 공은채 양의 심장과 맞는 환자를 따로 알아 봤다던데, 이건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그건 당연히 만일의 경우를 대비한 거죠. 공은채가 어느날 갑자기
도준은 씩 웃으며 느긋하게 대답했다.“조 국장님, 잘 생가하세요. 제가 말하면 국장님도 공범이 되거든요. 앞길 망칠 일 있습니까? 그러니 말 안 할게요. 어쨌든, 앞날이 가십거리보다 훨씬 중요하니까요.”조관성을 미간을 팍 구겼지만 뭐라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해 문을 박차고 나가버렸다.그러다 몇 걸음 채 걷지도 않았을 때, 등 뒤에 있던 도준이 불러 세우는 바람에 차가운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왜요?”그러자 도준이 고개를 까딱였다.“고마웠어요. 나중에 갚을게요.”그 말에 조관성은 ‘흥’하며 콧방귀를 뀌더니 방금 전보다 한결 가벼운 발걸음으로 떠났다.조관성이 떠나자 도준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고, 연결음이 얼마 드리지 않아 곧장 전화가 연결되었다.“민 사장님.”“몸은 어때요?”곽준호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화제를 전환했다.“제 아버지가 떠난 모양이네요?”“네, 그러니까 사람 다시 데려와요.”사실 어제, 곽도원이 오기 전, 공은채의 목숨을 살릴 건지 그대로 둘 건지 선택하라는 도준의 말에 준호는 살짝 고민했었다.공은채에 관해서라면 준호도 일전에 조사해 본 적이 있다. 심지어 아주 악독하고 치밀한 여자라는 것까지 알고 있다. 그런 공은채가 건강한 상태로 곽씨 저택에 입성하면 준호의 어머니 자리를 위협하는 건 당연했다.이 모든 걸 생각한 준호는 약 반시간 남은 수술을 무사히 마치도록 시간을 끌기 위해 도준과 한판 ‘싸우는’ 걸 선택했다.심지어 제 아비인 곽도원을 속이기 위해 얼굴에 얼룩덜룩 상처와 멍을 만드는 것도 불사하면서. 그 결과 준호는 거의 반 병신 상태로 쥐어 터진 채 실려갔었다.그리고 모든 사람의 관심이 도준과 준호에게 있는 틈에, 이식 수술을 받은 남자애는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곽도원이 병원 전체를 이 잡듯 뒤지고, 병원에 드나드는 차를 찾아봐도 남자애를 차지 못한 원인은 그 남자애를 이송한 사람이 곽도원의 친아들 곽준호였기 때문이다.도준의 말에 준호는 눈살을 찌푸렸다.“지금 데려가면 우리 아버지가 다시 조사할까 봐
늦은 밤, 경성.침대에 누워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하윤의 머릿속에는 온통 도준에 대한 걱정일 뿐이다.그렇게 한창 생각하고 있던 찰나, 갑자기 핸드폰이 울리자 곧바로 정신이 들었다.당연히 도준이라고 생각했지만 발신자는 다름 아닌 석지환이었다.‘전에 기분 전환하러 간다고 하고는 감감무소식이더니, 이제 괜찮아졌나?’“여보세요? 진환 오빠. 이렇게 늦게 무슨 일이에요?”전화 건너편에서 거친 숨소리만 들려올 뿐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그러다 한창 심호흡을 하고는 겨우 입을 열었다.“윤아, 너 지금 경성에 있는 거 맞지? 잠깐 만날 수 있어?”“네? 지금요?”하윤은 침대 머리맡에 놓인 시계를 확인했다. 벌써 밤 10시에 가까운 시간.“지금 너무 늦은데, 내일 만나면 안 돼요?”“내일 나 경성 떠나. 윤아, 나 너한테 정말 중요한 할 말이 있어서 그래. 부탁인데, 한 번만 여기 올 수 없을까?”늘 후배들에게 다정하고 예의 바르기만 하던 지환이었는데.‘뭔 일인데 이렇게 초조해하지? 설마 뭔 일이라도 났나?’“그래요. 주소 보내줘요. 지금 바로 갈게요.”지환은 곧장 한 주택가의 주소를 보내왔다. 골목길이 어찌나 구불구불한지 내비게이션을 켜고 한참을 찾아야 했다.“지환 오빠?”몇 번이나 문을 두드리고 나서야 안쪽에서 지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윤이 맞아?”“네, 저예요.”하윤이라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지환은 문을 열었다.이런 신중함에 하윤은 왠지 조금 불안했다.제가 들어서자마자 문을 잠그는 지환을 보며 하윤은 참지 못하고 물었다.“오빠, 대체 무슨 일이에요?”...그 시각, 해원.도준은 의사로부터 이식 수술 상황을 보고 받고 있다.“이식은 매우 성공적입니다. 환자가 이송된 병원의 의료 기술이 우리 병원보다는 못하지만 그래도 수술 후 치료를 매우 잘하여 환자분도 곧 깨어날 겁니다.”‘곽준호도 애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고 제대로 치료해 줬나 보네.’도준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잘 지켜봐요.”“네, 반드시...”
‘주림...’도준은 눈을 가늘게 접더니 곧장 전화번호를 눌렀다.그 시각, 경성.하윤이 묵고 있는 집안의 유선전화가 요란하게 울렸다.하지만 안내음이 들릴 때까지 받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그도 그럴 게, 집주인이 집에 없었으니까....먹구름이 가득 낀 밤하늘은 내일의 날씨가 흐릴 것이라는 걸 암시하는 듯했다.어두운 밤, 아늑해야 할 별장 분위기는 어딘가 스산해 보였다.하윤은 몸을 오소소 떨며 지환을 바라봤다.“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요?”“윤아, 너한테 보여주고 싶은 사람이 있어.”“누군데요?”말이 끝나자마자 문이 열리더니 문 앞에 깡마른 사람의 그림자가 보였다.남자는 문틀을 짚고 빨개진 눈으로 하윤을 바라보고 있었다.“윤아...”“주림 선배?”하윤은 어리둥절했다.“선배 병원에 있는 거 아니었어요? 이... 이제는 말할 수 있어요?”주림은 입을 뻐금거렸다. 그 모습은 수많은 말을 하고 싶지만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모르는 것 같았다. 그의 눈에는 미안함과 괴로움이 섞여 있었고 무언가 애쓰고 있는 듯했다. 그러다가 끝내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여기서 주림을 보자 하윤은 순간 오늘 심상치 않음을 감지하고 지환을 바라봤다.“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이에요?”“네가 본 그대로야. 내가 주림과 주림과 할아버님을 모셔왔어.”하윤은 왠지 불안한 예감이 들어 애써 버텼다.“혹시... 도준 씨가 마련해준 병원 의술이 안 좋아서...”“아니야.”지환은 하윤을 바라봤다. 하윤의 모습은 마치 공은채의 배신을 직면하기 싫어하던 자신 같았다.하지만 오래 아프기보다는 잠깐 아픈 게 낫다는 생각으로 지환은 말을 이었다.“윤아, 너 설마 주림이 지금껏 아무 병도 없었다는 거 몰랐어? 주림과 할아버님이 민도준의 병원에 갇혀 있었다는 거 몰랐냐고.”하윤은 무의식적으로 도준의 편에 서서 말했다.“아니에요. 그때 내가 살인범 누명을 써서 주리 선배와 할아버님 안전을 보장할 수 없어 도준 씨가 두 분을 병원으로 데려가 치료해 준 거예요. 보호하기 위해서.
그 말에 하윤은 다른 건 생각할 겨를도 없이 초조한 마음으로 주림의 팔을 잡고 힘껏 흔들었다.“우리 아빠 어떻게 돌아가셨어요? 빨리 말해봐요.”3년간의 세월이 흘러 주림의 눈에는 더 이상 성공에 대한 갈망이 없고 타버리고 남은 잿더미만 남은 듯 생기가 없었다.너무 오랫동안 말하지 않은 목소리마저 약간 갈라져 있었다.“교수님은... 공은채와 민도준 때문에 돌아가신 거야.”민도준의 이름을 듣는 순간 하윤은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듯 굳어버리더니 무의식적으로 잡고 있던 주림의 팔을 놓고 고개를 저으며 뒷걸음질 쳤다.“아니야. 그럴 리 없어. 도준 씨가 그럴 리 없어. 도준 씨는 우리 아빠 해친 범인이 아니야!”마지막에 이르자 하윤의 목소리는 귀청 째질 듯 날카로워졌다.지환은 무너져가는 하윤을 보더니 어깨를 토닥여주었다.“윤아, 우선 진정해. 주림 얘기 천천히 들어 봐야지. 우선 앉아.”하윤은 지환에게 끌려 의자에서 한참 동안 냉정을 되찾은 뒤 입을 열었다.“방금 도준 씨가 우리 아빠 죽게 했다고 했는데, 혹시 증거 있어요?”주림은 애써 침착한 척하는 하윤의 얼굴을 보며 잠깐 뜸을 들이더니 말을 꺼냈다.“그해 공은채가 나더러 교수님 술에 약을 타게 하고는 자기랑 무슨 일이 벌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꾸며 교수님도 속았어...”4년 전.공은채는 강의를 들을 때 ‘부주의로’ 손목에 그어진 자해 상처를 드러낸 적이 있다.그 계기로 이성호는 은채가 어머니와 빼닮은 외모 때문에 어려서부터 공천하의 각별한 관심을 받았고, 성인이 된 후 점점 심해졌다는 걸 알게 되었다.은채는 친아버지가 저한테 그런 짓까지 버리는 걸 참을 수 없어 몇 번이고 자살을 시도했다고 털어놓았다.채영을 데리고 교장실에 가 억울함을 대신 호소하던 데로부터 알 수 있다시피, 이성호는 평소 학생들을 엄격히 대하지만 사적으로는 매우 아끼기에, 은채의 일을 알게 된 후 도우려고 마음먹었다....여기까지 들은 하윤은 오빠가 왜 공천하가 공은채한테 이상한 짓을 했다고 말했었는지 알 수 있
하윤은 그때 그 시절 아버지의 모습을 애써 회상했지만 그때의 아버지는 크게 다라진 건 없었다.여전히 하윤과 승우의 학업에는 더없이 엄격했고 두 사람의 행사에 한 번도 빠진 적 없었다.하윤의 생일, 승우의 공연, 시영의 학부모회, 그리고 어머니와의 결혼 기념일까지...그저 가끔 혼자 멍 때리는 것 외에는 특별한 게 없었다.그때 분명 지옥이나 다름없었을 텐데.하지만 이게 고작 시작에 불과하다는 걸 하윤은 알고 있었다.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차마 아버지가 어떻게 생의 기로에서 죽음을 선택했는지 들을 수 없었지만 그래도 이를 악물고 물었다.“공은채가 또 뭘 했어요?”주림은 눈을 감더니 목 멘 소리로 말을 이었다.“공은채의 계획대로 교수님은 은채와 단둘이 자주 밖에 나다녔어. 그러다 공천하한테 들키고 말았어...”결과는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딸이 유부남인 교수와 만난다는 걸 안 공천하가 얼마나 화를 냈을지.특히 그때의 은채는 매번 돌아가신 어머니의 옷을 똑같이 입고 말투와 행동을 따라했으니.만약 보통 사람이었으면 공천하는 아마 상대방을 바로 죽였을 거다.하지만 이서호는 명망 높은 음악가이기에 그런 사람이 갑자기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면 그의 학생, 가족 심지어 학교까지 가만있지 않을 거라는 걸 염두에 두었다.때문에 결국 명예를 박살내는 방법을 선택했다.이성호가 사회의 버림을 받기를 원하지만 은채를 끌어들일 수 없었던 공천하는 이성호의 친구와 학생을 매수하였다...크나큰 이익 앞에 굴복해 목숨 바쳐 도와주겠다는 사람은 쉽게 구할 수 있었다.그렇게 여론이 움직이면서 이서호는 존경받는 음악가에서 순간 사람의 탈을 쓴 짐승으로 전락되었다....그날의 암담했던 기억을 떠올리자 하윤은 눈시울을 붉히며 주림을 가리켰다.“그래서 플래카드를 들고 아빠를 도왔던 게 아빠를 믿어서가 아니라 사실을 알아서였어요?”다년간 숨겨왔던 사실이 드러나자 주림은 끝내 무너지듯 하윤의 앞에 무릎 꿇었다. 심지어 한편으로 울면서 하윤의 손을 잡아
하윤의 울부짖는 소리는 자정에 들리는 슬픈 음악처럼 울러 퍼졌다.한참 뒤, 겨우 진정한 하윤은 먼지투성이가 된 채 바닥에 엎드려 있는 주림을 보면서 싸늘하게 말했다.“우리 아빠 해친 건 분명 선배와 공은채인데 왜 도준 씨한테 뒤집어 씌워요? 그렇게 하면 본인의 죄를 씻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아니야. 나한테 증거가 있어.”주림은 눈물을 닦아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눈앞이 또 흐려졌다. 하지만 그걸 상관할 겨를도 없이 다급하게 말했다.“그때 뉴스가 터진 뒤 교수님은 떠날 기회가 있었어.”이성호가 은채에게 휘둘렸던 건, 제 ‘잘못’ 때문에 제자가 목숨을 잃는 걸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하지만 가족까지 위험해지자 이성호는 더 이상 다른 사람을 돌볼 겨를이 없었다.때문에 뉴스가 터지자마자 가족을 데리고 멀리 떠나려고 했었다.“내가 교수님을 도와 도망칠 차량도 구해줬어. 그런데 떠나기로 결심한 날, 민도준이 교수님을 보자고 했다는 거야. 민도준의 세력이 얼마나 막강한지는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잖아. 교수님은 자기가 나가지 않으면 가족한테 해가 갈까 봐 만나러 갔어. 그런데 그러고 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셨어.”주림은 눈물 범벅이 된 채 말을 이었다.“내가 그때 사진을 찍어 일기장에 꽂아뒀었어. 교수님은 민도준과 만나고 난 뒤 생을 포기했다고.”사진...‘공태준이 나한테 줬던 사진이 주림 선배가 찍은 거였어?’하윤은 가슴이 쪼그라들 것만 같았다.“그 사진을 또 누구한테 보여줬어요?”주림은 고개를 저었다.“보여준 적 없어. 그런데 내가 공씨 저택에 가서 공은채와 싸우던 날 그 사진기를 잃어버렸어.”존경하는 교수님이 건물에서 투신했다는 소식을 접한 날 주림의 세계는 무너져 내렸다.심지어 그 일로 공씨 저택에 쳐들어가 공은채를 죽이려고까지 했었다. 하지만 현실은 오히려 집 문턱도 넘지 못하고 제 목숨마저 잃어버릴 뻔했다.‘그 사진기가 공태준 손에 들어 간 거고, 그 안에 있던 사진도 다 봤던 거네. 그리고 몇 년 뒤 그 사진을 다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