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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걱정하지 마세요. 그런 일은 없을 테니까.”

“그럼 다행이고.”

이정미는 한시름 놓으며 ‘주강인’을 붙잡고 한참이나 수다를 떨었고, 나중에 닭백숙까지 한 그릇을 먹었다.

그러고 나서 졸음이 몰려오자 병상에 누워서 잠이 들었다.

신가람은 박정후를 배웅했고, 넓은 등을 바라보며 감사의 인사를 전하려는 순간 남자가 몸을 돌리더니 그윽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성의 보여주기로 한 거 잊지 말고.”

입술을 질끈 깨문 그녀는 얼굴은 물론 귓불마저 빨갛게 달아올랐다. 박정후가 원하는 성의는 단순하면서 원초적이었다.

“대체 몇 번을 원하죠?”

신가람의 목소리는 기어들어 가다시피 했다.

박정후가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얼마나 해줄 수 있는데?”

애초에 횟수로 가늠하는 일이 아니었기에 섣불리 대답하기 힘들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계약이 끝난 상황에서 또다시 부득이하게 얽히고설키지 않았는가? 이제 본인마저 그가 베푼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를 정도였다.

강민석은 다시 경찰서로 끌려갔다. 대부분 경미한 찰과상이라 뼈와 근육이 멀쩡한 이상 굳이 입원할 필요도 없었다.

3일 뒤 법원은 유죄 판결을 내렸다.

동료를 강제로 성추행하고 여성을 유인한 다음 성관계를 가지고 나서 위협하고 협박까지 마다하지 않아 징역 3년 5개월을 선고했다.

회사는 공지를 내려 통보했고, 실명으로 신고한 직원들에게 감사장을 수여했다.

직원들의 사생활 보호를 위해 제보자의 신원은 공개하지 않았고 포상금은 비공개로 지급했다.

점심시간, 신가람은 여전히 사무실에서 서류를 정리하느라 바빴다.

문밖에 수상쩍은 그림자가 얼씬거리자 곧바로 발견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무슨 일이죠?”

하지영이 고개를 빼꼼 내밀고 그녀를 바라보더니 우물쭈물 말했다.

“가람 씨, 잠깐 시간 괜찮아요? 얘기 좀 나눠요.”

“들어오세요.”

비록 호감은 없지만 같은 회사에서 업무를 인수인계하는 와중에 안면박대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영은 커피를 손에 들고 환심을 사려는 듯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전에는 미안했어요. 다 제 잘못이죠. 어디서 주워들은 말을 제멋대로 과대 해석해서 이런 사달이 났어요. 부디 넓은 아량으로 용서해주면 안 될까요?”

고개를 든 신가람의 표정은 무미건조했다.

“회사는 가치를 창출하려고 돈을 주고 직원을 고용하는 건데 지영 씨는 불필요한 말썽을 일으켰으니 대가를 치르는 게 당연하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굳이 나한테 용서를 구할 필요도 없어요. 어쨌든 직장에서 가장 금기시하는 사항을 어겼잖아요.”

“알아요.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약속할게요. 다만 대표님께 잘 얘기해서 인사팀한테 추천서를 받을 수 있도록 해주면 안 될까요?”

정상적인 이직이 아닌 이상 동종업계에서 근무 경력을 확인하기 마련이고, 새로운 회사에서 하지영이 저지른 일을 알게 되는 순간 채용이 불발될 게 뻔했다.

신가람은 피식 웃었다.

“미안하지만 도움이 되지는 못할 것 같네요.”

하지영은 이를 악물고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화를 참았다.

“가람 씨, 사람을 궁지에 몰아넣을 필요는 없잖아요? 잘못까지 시인했는데 무릎이라도 꿇었으면 하는 거예요?”

그동안 직장을 다니면서 가스라이팅하는 경우를 수도 없이 겪었지만, 이렇게 뻔뻔스럽고 당당한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이만 가봐요. 나머지 인수인계나 잘하시고, 아마도 지영 씨 업무를 마무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지 않을까 싶네요. 어쩌면 인사팀에서 인정받아 대표님께 먼저 신청할 수도 있잖아요?”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내쫓을 기세였다.

하지영은 계속 남아 있기 애매해서 몸을 돌렸고, 책상에 올려놓은 커피도 챙겼다.

신가람은 어이가 없었다. 그리고 박정후를 찾으러 가려는 순간 책상 위의 휴대폰이 울렸다.

이내 통화 버튼을 누르자 어머니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가람아, 요즘 강인이랑 잘 지내?”

“그럼요.”

“엄마가 너무 걱정돼서 그러는데 혹시 둘이 같이 있는 영상이라도 보내줄래? 사진도 괜찮으니까 보고 나면 안심이 될 것 같아.”

신가람은 난색을 보였다.

“엄마, 지금 출근하는데 동영상을 어떻게 찍어요?”

“그럼 퇴근하고 나서 보내줘. 엄마 몸도 이제 예전 같지 않아서 자칫 너랑 강인한테 부담이 될까 봐 그래. 엄마한테 솔직하게 얘기해. 강인이가 슬슬 지친다고 한 거야?”

휴대폰 너머로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이때, 주선희가 한마디 보탰다.

“아가씨, 사진 몇 장 찍는 게 어려운 일도 아니고 강인 씨한테 부탁 좀 해보면 안 돼요?”

신가람은 말문이 막혔고, 딱히 거절할 핑계가 떠오르지 않아 마지못해 대답했다.

“알았어요. 이따가 시간 나면 찍어서 보내줄게요.”

주강인 흉내를 내게 하는 것도 힘든데 설상가상으로 사진까지 찍어야 하다니.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리는 셈이지 않은가?

신가람은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대표실로 걸어가 문을 두드렸다. 이내 박정후의 나른한 목소리가 문 너머로 들려왔다.

“들어와.”

그리고 문을 열고 들어가자 책상에 앉아 있는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모니터의 희미한 불빛이 잘생긴 얼굴을 비추자 순간 넋을 잃고 말았다.

신가람은 엉뚱한 생각을 지우고 다가가서 문서를 건넸다.

박정후는 빠르게 훑어보더니 보완이 필요한 부분을 척척 찾아내고 그녀에게 알려준 뒤 수정해서 다시 가져오라고 했다. 그리고 눈두덩이를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나 휴게실로 향했다.

그녀는 제 자리에 서서 10분 동안 조용히 기다렸다.

이내 살금살금 안으로 걸어갔고, 커다란 침대에 누워 있는 남자는 눈을 감고 곤히 잠들었다.

신가람은 휴대폰을 꺼내 심호흡한 뒤 침대 옆에 쪼그리고 앉아 깍지를 끼고 손과 상반신만 나오게 얼굴 없는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손을 놓으려는 순간 강한 힘에 이끌려 침대 위로 올라가 가슴에 엎드리는 꼴이 되었다.

“이런 취미가 있는 줄은 몰랐네? 잘 때 몰래 사진을 찍어서 뭐 하려고?”

신가람이 당황한 표정으로 이실직고했다.

“엄마가 싸운 줄 알고 걱정하셔서... 사진 딱 한 장만 찍었어요. 게다가 얼굴은 잘랐으니까 보내주고 나서 바로 지울게요.”

지금 누워 있는 침대에서 얼마나 많은 사랑을 나누었는지 모른다.

신가람은 얼굴을 붉히며 일어나려고 발버둥 쳤다.

그러다 허리 근육에 손이 닿자 서서히 굳어지는 게 느껴졌다.

박정후의 시선은 싸늘하기 그지없었지만 손바닥은 불같이 뜨거웠다. 사실 은은한 향기를 풍기는 그녀의 체취 때문에 일찌감치 반응이 왔다.

이내 몸을 뒤집어 침대에 눕히고는 입을 벌려 목에서 가장 부드러운 살갗을 깨물었다.

신가람이 진저리를 쳤다.

“대표님...”

하지만 멈추지 않았고 애무가 길어질수록 심장이 터질 것처럼 쿵쾅거렸다. 남자의 입술은 턱을 스쳐 지나가 마침내 촉촉한 입술을 덮쳤고, 배려는커녕 마치 먹잇감을 찾은 맹수처럼 맛있는 음식을 즐기기 시작했다.

박정후는 혀로 거칠게 뜨거운 입안을 탐닉했다.

신가람의 눈이 휘둥그레졌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통제 불능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30분 후, 신가람은 떨리는 다리로 일어나 옷을 입고 돌아서서 어머니에게 사진을 보낸 뒤 삭제했다.

“다 지웠어요. 나중에 엄마 휴대폰에 있는 사진도 지울게요.”

그녀가 단호하게 말했다.

박정후는 늘씬한 손가락으로 셔츠 단추를 잠그고 여자를 흘긋 쳐다보았다. 발개진 얼굴과 살짝 부어오른 입술은 쾌락을 한껏 즐긴 모습이었다.

성욕이 워낙 강한 그는 지난 3년 동안 거의 매일 욕구를 풀었고, 덕분에 잠도 푹 잤다. 하지만 최근에 횟수가 줄어들면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는 경우가 많았다.

가끔 참기 힘들 때면 손으로만 성에 안 차 약을 먹어야 겨우 억제하는 정도였다.

방금 격하게 움직인 탓에 땀을 좀 흘리고 나니 기분도 금세 상쾌해졌다.

마음이 흡족하니 여유가 생기는지라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가 봐.”

남자의 무심함에 익숙해진 신가람은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고, 문을 열자마자 소지율과 정면으로 맞닥뜨렸다.

빨갛게 부어오른 그녀의 입술을 발견하는 순간 완벽한 메이크업이 돋보이는 소지율의 얼굴이 대뜸 일그러지더니 싸늘한 눈빛으로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가람 씨, 내연녀로서 흠잡을 데 없네요? 상사의 잠자리까지 담당할 정도라니, 아니면 다른 직원도 불러서 가람 씨가 얼마나 책임감 있는 사람인지 한 번 보여줘요?”

신가람은 입을 꾹 닫고 묵묵부답했다. 눈앞의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었지만 실상은 난감한 상황을 마주해야만 하는 신세였다.

“대표님께서 쉬고 계시는데 지율 씨가 왔다고 말씀드릴게요.”

소지율은 팔을 번쩍 들어 따귀를 날리려고 했으나 이번에는 신가람도 가만히 있지 않고 상대방의 손목을 덥석 붙잡았다.

“내연녀는 손가락질받아 마땅한 쥐새끼 같은 존재인데 무슨 낯짝으로 감히 반항하지?”

“어차피 대표님을 찾으러 왔을 텐데 굳이 저한테 시간 낭비할 필요 있나요? 괜히 뺨을 때리려고 하다가 손목이라도 삐끗하면 대표님이 속상할지도 몰라요.”

소지율이 피식 웃었다.

“정후 씨의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걱정하는 건 당연한 일인데 굳이 내연녀 따위가 언급해줄 필요가 있을까요? 하지만 가람 씨는 설령 천번 만번 사랑을 나누더라도 차마 낯을 들고 다닐 수 없는 정부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죠.”

어차피 신가람은 관계를 공개하고 싶지 않았기에 타격이 제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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