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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박정후는 입술을 달싹이며 둘만 들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러고는 뒤돌아서서 밖으로 걸어 나갔다.

이정미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걱정스럽게 물었다.

“둘이 싸웠어? 강인이 왜 저래?”

신가람은 사과를 내려놓으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잘 만나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일단 따라가서 확인해 보고 올게요.”

이내 주선희에게 어머니를 잘 보살펴달라고 당부하고는 박정후의 뒤를 따랐다. 하지만 갑자기 멈춰서는 남자 때문에 등에 정통으로 부딪혔다.

“죄송해요.”

신가람은 뒤로 물러서며 이마를 문질렀다.

뒤돌아서 그녀를 바라보는 박정후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주강인이라... 내 기억에 당시 너랑 약혼을 앞둔 남자 맞지? 남의 약혼녀가 될 여자가 기꺼이 다른 사람의 노예로 전락해 밤일까지 마다하지 않는 신세라니.”

한 뼘 거리에서 청량한 향기를 뿜어내는 남자 때문에 신가람은 심장을 쥐어짜는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오래전에 이미 끝난 사이에요. 대표님, 지난 3년 동안 정말 고마웠지만 마지막으로 한 번만 도와주면 안 될까요? 엄마가 몸이 편찮으신데 의사 선생님께서 더는 자극하지 말라고 했거든요.”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그녀는 어느새 눈가에 눈물이 고였고, 맑고 투명한 액체가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것 같았다.

박정후는 눈을 가늘게 떴다.

“1억을 준 지 얼마나 되었다고? 사람이 욕심을 너무 부리면 안 돼.”

신가람이 초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엇이든 할게요.”

“그래?”

남자는 눈썹을 까딱하더니 능글맞은 미소를 지었다.

신가람은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텅 빈 화장실은 불이 꺼져 있었고, 문틈 사이로 복도 불빛이 새어 들어와 얼굴을 확인하기 어려웠지만 뚜렷한 이목구비만큼은 어렴풋이 보였다.

주변이 조용할수록 침묵 속에서 울려 퍼지는 신음은 점점 또렷하게 들렸다.

시간이 지나면서 더는 감출 수 없어 자칫 들킬세라 두려울 지경이다.

격정의 순간을 끝으로 신가람이 물었다.

“이 정도면 되나요? 어차피 사귀는 척하는 거니까 크게 걱정할 필요 없어요. 절대 대표님을 난처하게 하지 않을게요. 나중에 엄마가 기억을 되찾게 되면...”

박정후는 신가람의 턱을 움켜쥐고 코앞까지 다가가서 말했다.

“도움을 청하는 사람이 어느 정도 성의는 보여줘야지? 고작 한 번으로 퉁치려고? 신가람, 날 만족시킬 다른 방법부터 찾는 게 시급해 보이는데?”

신가람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고,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지율 씨가 알면 속상할지도 몰라요. 대표님은 정녕 아무렇지 않나요?”

“감히 말할 배짱은 있고?”

큼지막한 손이 가느다란 목을 감싸 쥐었고, 조금만 힘을 줘도 부러뜨릴 수 있지만 단지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며 애무했을 뿐이다.

“실적으로 보답해 드릴게요.”

꼭 육체적일 필요는 없으니까.

흑요석 같은 눈동자가 그윽하게 빛났다.

“굳이 실적을 채우지 않아도 회사는 이미 잘나가는데?”

결국 다른 방식으로 보상하라는 뜻이었다.

손을 씻고 나서 박정후는 핸드타월로 닦고 휴지통에 버린 다음 긴 다리를 움직여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화장실에는 신가람만 넋을 잃은 채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거울 속에 비친 퉁퉁 부어오른 입술과 살짝 달아오른 얼굴의 여자를 들여다보자 순간 낯선 기분이 들었다.

박정후가 나오자 복도에서 기다리던 조민형은 흡족한 상사의 표정을 보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굳이 짐작하지 않아도 뻔했다.

이내 머리를 긁적이며 휴대폰을 건네주었다.

“지율 씨가 연락이 왔는데 몸이 안 좋다고 하네요.”

박정후는 휴대폰을 건네받아 다시 전화를 걸었다.

“아직도 안 좋아? 심장이 계속 불편하면 최대한 빨리 전문의를 모셔 올게.”

소지율의 애교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후 씨가 옆에 있으면 괜찮을 것 같은데, 얼른 돌아와서 같이 놀아달란 말이야.”

즉, 약을 먹었으니 괜찮다는 뜻이다.

박정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소지율, 항상 명심해. 상황을 모면하려고 자기 몸을 망가뜨리면 안 돼.”

소지율은 입을 삐죽했다.

“내가 언제? 아까는 가람 씨 때문에 열을 받아 진짜 아팠다고. 게다가 손도 아직 회복되지 않았어. 그런 사람한테 돌봐달라고 부탁했으니 화낼 일이 없게 하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할 따름이야.”

“시비가 붙는 건 이유가 있기 마련이야. 상대방을 먼저 건드렸으니 너한테 화를 내는 게 아닐까?”

이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몸조리 잘해. 네가 자칫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가족들까지 생매장해버릴 테니까.”

소지율은 흠칫 놀랐다.

“지금이라도 해고하면 되잖아. 정후 씨 옆에서 매일같이 알짱거리며 유혹하는 게 꼴 보기 싫어.”

“단지 직원이니까 괜한 걱정하지 마. 집에서 잘 쉬고 있어. 다시 한번 말하지만 만약 너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가문 전체가 봉변당할 줄 알아.”

비록 좋은 말은 아니었지만 박정후가 자신을 걱정해준다는 생각에 속으로 은근히 흐뭇했다.

“알았어. 곧 정후 씨랑 결혼도 해야 하니까.”

전화를 끊자마자 소지율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소명준이 물었다.

“뭐래?”

소지율은 별생각 없이 소명준에게 곧이곧대로 알려주었다.

중년 남자의 눈빛에 서서히 분노가 드러나더니 탁자 위에 있던 찻잔을 집어 던졌다.

“건방진 녀석! 그럴 만한 능력은 있는지 두고 보자고.”

강정애의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서둘러 남편을 다독였다.

“당신도 진정해요. 지금은 내 동생부터 어떻게 빼낼지 고민해야 하죠.”

소명준이 콧방귀를 뀌었다.

“빼내긴 무슨! 어차피 자업자득이야. 신고당하면 구치소에 얌전히 있으라고 해. 당신도 괜히 말썽 일으키지 말고, 자칫 문제에 휘말리기라도 한다면 뒤처리할 사람은 나니까.”

“아빠! 외삼촌도 사실 저 대신 화풀이하려고 그랬을 뿐이에요. 신가람이 정후 씨한테 끼 부리는 걸 알고 있었거든요. 그런 여자는 출세하기 위해 못하는 짓이 없죠.”

비록 신가람이 눈에 거슬렸지만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차마 손을 쓸 수는 없는지라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다.

소명준은 표정이 돌변하더니 얼굴에 자애로운 미소가 번졌다.

“일개 비서가 얼마나 큰 파장을 일으킨다고. 지금은 박씨 가문과 약혼을 성사시켜 공식 발표하는 게 최우선이야. 남자는 말이야 물론 일편단심 타입도 있지만 마음만 떠나지 않는 한, 밖의 여자는 신경 안 써도 돼.”

강정애는 심기가 불편했지만 입을 꾹 닫고 있었다.

어쨌거나 남자는 결국 자기 가정으로 돌아오기 마련이니까.

“알아요, 하지만 신가람은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

벌써 밤 9시 30분이 되었지만 이정미는 쉽사리 잠이 들지 못했다.

행여나 딸과 사위의 사이가 틀어질까 봐 약도 마다하고 억지로 버티고 있었다.

신가람은 초조한 나머지 발만 동동 굴렀다.

“엄마, 강인과 전혀 문제 없으니까 우선 약부터 드세요. 네?”

“이게 다 엄마 아빠 잘못이야. 우리만 아니었으면 너랑 강인은 벌써 결혼하고도 남았을 텐데.”

이정미는 문득 무언가를 떠올렸다.

“네 아빠는? 아직 회사에 있어?”

아버지가 교통사고 당한 사실마저 잊어버리다니, 적어도 아픈 기억을 계속 떠올리지 않아도 되니까 오히려 좋은 일이었다.

“회사가 좀 바쁘대요. 빚을 해결하면 엄마 보러 오신대요.”

신가람은 미지근한 물과 약을 건네주었다. 비록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지만 꾹 참고 선의의 거짓말을 했다.

이정미는 전혀 눈치채지 못 했고, 약 먹기를 끝까지 고사했다.

무력감이 물밀듯이 밀려온 신가람은 문득 허탈한 기분이 들었다.

이때, 박정후가 자연스럽게 병실로 들어섰다.

손에는 보온병을 들고, 정장 차림으로 늠름한 모습도 여전했다.

유일하게 다른 점이 있다면 말투가 한껏 온화해졌다는 것이다.

“어머님, 방금 밖에서 포장해 온 닭백숙이에요. 일단 약부터 먹고 30분 후에 드시면 돼요.”

신가람의 눈은 휘둥그레지더니 찰나의 경악을 끝으로 감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강인아, 가람 옆에 앉아 봐.”

이정미는 싱글벙글 웃으며 흔쾌히 약과 물을 건네 받아 한입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 베개에 기대어 머뭇거리며 말했다.

“넌 착한 아이니까 가람과 절대 싸우면 안 돼. 그동안 힘들게 지켜온 관계인데 쉽게 포기하지 마.”

박정후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옆에서 바짝 긴장한 채 앉아 있는 여자를 힐긋 쳐다보았다.

지금은 얌전해 보여도 실상은 연기에 불과했다. 뼛속까지 고집이 센 사람이라 눈이 돌아가는 순간 상대가 누구든지 인정사정 봐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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