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긴, 그녀도 예전에는 신씨 일가의 따님이었으니까.공주처럼 살아온 그녀이기에 지금 좀 색바래지더라도 늘 지닌 아우라는 변함이 없었다.“가람 씨가 왜 주원 씨 파트너예요?”구동하가 오지랖 넓게 물었다. 이 장면을 박정후에게 들킨다면 얼마나 다채로워질까.한편 신가람은 솔직하게 대답했다.“대표님이 여자 파트너가 없어서 한번 도와주는 것뿐이에요.”“선심 쓰다 괜히 이용당할라, 조심하세요.”구동하는 이주원이 절대 단순한 사람이 아니란 걸 너무 잘 안다.이씨 일가에서 나온 사람이 단순하면 얼마나 단순할까.박정후와 안 마주칠 줄 알았는데 불행하게도 그가 한창 가까운 곳에 서서 음침한 표정으로 신가람을 쳐다보고 있었다.화려하게 차려입은 그녀를 보며 박정후는 싸늘한 한기를 내뿜었고 옆에 있던 소지율까지 심장이 빨리 뛰었다. 그녀는 잔뜩 흥분한 채 박정후에게 물었다.“가람 씨랑 주원 씨 잘 만나고 있나 봐. 두 사람 너무 잘 어울리네. 안 그래 정후야?”이에 박정후가 코웃음을 쳤다.‘너무 잘 어울리지. 한 놈은 시커먼 속내를 숨기고 있고 또 한 명은 멍청할 정도로 어리석으니...’그는 술잔을 꽉 잡고 나란히 서 있는 두 사람을 번갈아 가며 째려봤다.그의 따가운 시선을 눈치챘는지 신가람도 이리로 시선을 돌렸다.그녀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고 마치 잘못을 저지른 어린아이처럼 재빨리 도망치려 했다.이때 이주원이 그녀를 덥석 끌어오며 그들에게 인사했다.“박 대표님, 지율 씨, 또 뵙네요.”이주원은 뻔뻔스럽게 인사를 건넸고 구동하는 팔짱을 낀 채 구경에 나섰다.그 시각 신가람은 제자리에서 증발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역시 남자 말은 믿을 게 못 됐다.“가람 씨 오늘 너무 예쁘시네요. 이 대표님과도 너무 잘 어울려요.”소지율이 박정후의 팔짱을 끼고 살며시 그에게 기댔다.다만 박정후가 차가운 시선으로 그녀에게 되물었다.“뭐가 잘 어울려?”“뭐든 다. 이 대표님 가람 씨 좋아하는 게 안 보여? 이참에 가람 씨가 기회 한번 줘요. 서로 만나봐야 맞는
강민석의 일을 계기로 신가람은 호신용 스프레이도 사고 또한 간단한 호신술도 몇 개 배웠다.“대표님이 여긴 어쩐 일이세요?”박정후의 얼굴을 본 그녀는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뒤에 있던 구동하는 감히 앞으로 나서지 못한 채 멀찍이 서서 입을 열었다.“맞았어?”“아니.”박정후는 이를 악물고 손을 놓아준 후 차갑게 쏘아붙였다.“계속 서 있을 거야? 당장 가서 내 눈 씻으라고!”신가람은 허둥지둥 스프레이를 가방에 넣고 박정후를 부축해 화장실로 들어간 후 흐르는 물로 그의 눈을 씻어줬다.옆에서 구동하가 쉴 새 없이 재잘거렸다.“천만다행이네. 만에 하나 걷어차이고 고장 나버리면 나중에... 참다 폭발해버릴 수도 있잖아! 가람 씨 정말 대단하네요. 호신술이 아직 좀 약하니 나중에 제가 전문적인 태권도 선생님을 소개해드릴게요. 그땐 무조건 한 방에 저격할 수 있을 거예요.”“그 입 닥치라고, 시끄러워죽겠네.”박정후는 키도 큰데 세면대 앞에서 허리를 곧게 펴고 서 있으니 신가람은 마지못해 발꿈치를 들고 그의 눈을 닦아줘야만 했다.그녀는 흥미진진한 얼굴로 구동하에게 대답했다.“그럼 상세한 건 나중에 연락해요, 동하 씨.”이에 박정후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으며 두 사람을 그대로 얼어붙게 했다.눈을 다 씻은 후에도 그는 여전히 햇빛을 마주하기 힘들었다.스프레이는 신가람이 친구가 SNS에 홍보하는 걸 보고 산 브랜드도 없는 제품이라 성분이 아주 복잡했다. 고추냉이, 후춧가루, 거의 없을 게 없는 환장의 스프레이였다.박정후는 결국 병원에 가서 더 정밀한 검사를 받아야만 했다.생신 연회는 아쉽게도 참석하지 못할 듯싶다.신가람은 하마터면 상사를 해칠 뻔했던지라 옆에서 친절한 태도로 앵무새처럼 재잘거릴 뿐이었다.“대표님, 물 마실래요? 눈 계속 아파요? 천천히 걸으세요. 제가 부축해드릴게요.”그 모습에 구동하가 피식 웃었다.“얼른 가봐. 내가 대신 안에 두 사람한테 얘기할게.”아무래도 박정후를 제압할 수 있는 건 신가람 뿐인 것 같았다. 섹스 중독이란
욕실은 어느덧 아수라장이 돼버렸다.박정후는 눈을 감으니 다른 감각들이 더 강렬해졌고 내면의 폭군 기질이 점점 더 미친 듯이 거세졌다.그는 신가람의 허벅지를 꽉 잡고 여지없이 밀어붙였다.그녀의 신음은 끊이질 않았고 욕실 안의 열기가 온몸을 집어삼킬 것만 같았다.30분 후 박정후는 그녀를 안고 침대로 가서 계속하려고 했다.이때 그만 빨간 피가 새어 나왔고 그녀의 얼굴도 빨갛게 달아올랐다.“대표님, 저 생리 왔어요.”박정후는 늘 오래 하는 법이라 이번에도 덜 만족한 상태였다.“사흘 미뤘네?”“네. 피임 주사 부작용이 바로 내분비 장애와 생리불순이거든요.”그는 결국 신가람을 내려놓고 흐릿한 불빛 아래에서 옷을 주워입었다. 별장에 쟁여둔 생리대를 다 써서 그녀는 마지못해 근처 마트로 나가야 했다.차가 이제 막 멈췄을 때 메시지 알림음이 울렸다.오피스텔에 사는 이웃 주민한테서 온 메시지였다.[가람 씨, 요즘 들어 어떤 남자가 계속 가람 씨네 집 앞을 서성거리더라고요. 뭐 하는 분인지는 모르겠지만 가람 씨 외출할 때 꼭 조심하라고 미리 말해주는 거예요.]이웃이 사진도 한 장 보내왔는데 사진 속 남자는 카메라를 등지고 서 있었다. 그는 훤칠한 키에 넓은 어깨, 좁은 허리를 지녔고 살짝 마른 편이었다.신가람은 사진을 들여다본 순간 온몸이 얼어붙고 몇 분 뒤에야 겨우 정신을 다잡았다.생리대를 다 사고 마트에서 나오자 어둠 속 길 건너편에 벤틀리 한 대가 세워져 있었다.젊고 잘생긴 남자가 차 옆에 서서 그녀와 시선이 마주치더니 곧바로 그녀에게 다가왔다.짧디짧은 십여 미터지만 그녀에겐 몇 세기처럼 느껴졌다.신가람이 도망치려 하자 남자가 걸음을 재촉했고 하마터면 달려오는 차에 부딪힐 뻔했다.기사가 창문을 열고 그에게 욕설을 퍼부었다.다만 그 남자는 거들떠보지 않은 채 빨개진 눈시울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가람아.”신가람은 손에 든 쇼핑백을 바닥에 내던지고 허겁지겁 도망쳤다. 이 모든 게 너무 갑작스럽게 펼쳐졌으니까.그는 마치 그해 갑자기
박정후가 말한 다른 방식 때문에 신가람은 결국 잠잘 때도 입이 다물어지질 않았다.오늘 하루의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드디어 잠든 그녀는 악몽을 꾸면서 손을 마구 흔들다가 옆에 있는 남자를 툭 내리쳤다.박정후는 그대로 뺨을 맞고 말았다. 태어나서 이날 이때까지 엄마를 제외한 또 다른 여자에게 맞아보긴 이번이 처음이었다.그는 미간을 찌푸리고 헛소리를 퍼붓는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봤다.신가람은 꿈결에 무심코 그 이름을 불렀다.“강인 씨.”‘역시 많이 신경 쓰고 있었네! 거짓말도 참 잘하지.’박정후는 이렇게 생각하며 그녀의 몸을 더듬었다.새벽 무렵, 신가람은 몸이 간지러워 어렴풋이 눈을 떠보니 이 남자가 글쎄 몸을 더듬다가 끝내 절정에 다다른 것이다. 그녀는 눈을 꼭 감고 계속 자는 척 연기했다.“깼어? 잘됐네, 나 혼자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말을 마친 박정후는 이불을 걷고 그녀의 손을 덥석 잡으며 강하게 밀어붙였다.“아직 만족하지 못했어.”이 말에 신가람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혀가 뻣뻣해지고 꿈에 무슨 장면이었던지조차 생각나지 않았다.‘이 남자 대체 왜 이렇게 욕구불만인 거야?’소지율 같은 가녀린 여자가 박정후와 결혼한다면 자칫 만족하지 못했다고 밖에서 딴 여자랑 그 짓거리를 할 게 뻔했다.“네 요령 한번 보여줘 봐. 전에 나한테 잘 보이려고 하마터면 컴퓨터까지 망가뜨릴 뻔했잖아!”신가람은 화들짝 놀랐다.“그런 일 없거든요.”박정후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낡은 노트북을 꺼내더니 바로 D 드라이브를 클릭했다.그녀는 재빨리 낚아채고 싶었지만 그의 힘에 못 이겨 동영상이 재생되는 걸 두 눈 멀쩡히 뜨고 지켜봐야만 했다.침실에 애틋한 신음이 울려 퍼졌다.“백여 편이나 있네? 우리 가람 씨는 이론에 능한데 실전은 영 아니야.”박정후가 ‘증거’를 끄집어내자 그녀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개자식! 내가 진작 삭제했는데 언제 다시 데이터를 복구한 거야?!’결국 신가람은 생리 첫날이라 양도 엄청 많은데 밤새 엎드려
박정후는 아직 눈이 채 회복하지 못해서 아침 일찍 병원에 갔을 테니 이건 절대 그일 리가 없다.고개를 든 그녀는 익숙한 눈빛과 마주했고 이마에 난 상처까지 발견하곤 움찔 놀랐다.“저희 대표님은 오후에 나오실 겁니다. 용건 있으시면 제가 대신 전달해드릴게요.”한편 주강인은 그녀의 책상 위에 딸기우유와 슈크림빵을 내려놓았다.“너 이 브랜드 제일 좋아하잖아. 아까 올 때 편의점 들러서 샀어.”“주 대표님, 이건 무슨 뜻이죠?”그녀가 미간을 구겼다.앞으로 서로 방해하지 말고 각자 갈 길을 가자고 분명 약속했으면서 왜 또 이러는 걸까?주강인은 부드러운 눈길로 그녀를 바라봤다.“네가 안 믿는 거 알지만 그래도 말해야겠어. 3년 전에 난 일부러 널 떠난 게 아니야. 이 모든 게 오해라고. 하지만 네가 가장 도움이 필요할 때 옆에 없었던 건 내 잘못이야. 평생 갚으면서 살게.”신가람은 그가 보는 앞에서 빵과 우유를 휴지통에 버렸다.“대표님, 우린 이미 끝났어요.”“넌 끝났겠지만 나한텐 이제 곧 시작이야.”그는 마치 말귀를 못 알아듣는 것만 같았다.“널 향한 내 마음이 단 한순간도 변한적 없다는 걸 꼭 증명해줄 거야.”‘내가 왜 우유를 휴지통에 버렸지? 그냥 확 저 얼굴에 퍼붓는 건데...’그날 오후 회사에 돌아온 박정후는 소문으로 떠도는 얘기를 듣더니 표정이 확 굳어졌다.그가 강압적인 포스를 내뿜자 지나가는 곳마다 싸늘한 정적이 흘렀다.신가람도 감히 그를 건드리지 않았다. 괜히 불편하게 만들었다가 나중에 벌 받는 건 본인일 테니까.제시간에 맞춰 퇴근하려고 했지만 전형적인 자본가인 박정후가 쉽게 그녀를 보내줄 리가 없었다.퇴근 무렵, 내선으로 전화를 걸었지만 그녀는 못 들은 척 가방을 챙기고 병원에 가려고 했다.이때 휴대폰도 덩달아 울렸는데 박정후가 아니라 주선희한테서 걸려온 전화였다.어떤 낯선 남자가 줄곧 병실 밖에 머무르며 신씨 일가의 옛 지인이라고 하면서 심지어 입원비용으로 1억 원까지 넣어줬다고 한다.신가람은 곧바로 주강인인 걸
가랑비가 부슬부슬 내리며 빗소리가 끊이지 않았다.빗속에서 리드미컬하게 움직이는 차체가 어렴풋이 보였고, 안개가 낀 유리에 가느다란 손가락 자국 너머로 또렷한 윤곽이 나타났다.온몸으로 뜨거운 열기를 내뿜는 한 쌍의 남녀가 비 오는 밤의 고요함을 깨뜨렸다.남자의 눈은 벌겋게 달아올랐고, 그윽한 눈빛으로 품에 안긴 사랑스러운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지배자로서 모든 것을 컨트롤해야만 했다.하지만 지금은 등에 여자의 손톱자국이 남아 있더라도 대수롭지 않았다.한참이 지나고 영원할 것 같던 후끈한 열기가 서서히 식어가더니 남자는 일말의 미련도 없이 일어섰다.“오늘부로 우리 관계는 여기서 끝이야.”목소리에 담긴 욕구가 어느새 싹 사라지고 평소처럼 싸늘하게 돌아왔다.신가람은 흠칫 놀라며 멍하니 바라보았다.“그게 무슨 뜻이죠?”박정후가 늘씬한 손가락으로 셔츠 단추를 채웠고, 이내 격정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던 가슴이 가려졌다.“소지율이 돌아왔어.”그는 옷을 입고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이만 가 봐.”싫증이 나면 헌신짝처럼 버리는 건 박정후의 성격다운 행동이다.차 문이 열리자 비서 조민형이 서둘러 우산을 들고 뛰어왔다.“같이 약 사러 가 줘.”박정후는 말을 이어갔다.“그리고 먹는 것까지 확인해.”신가람의 심장이 따끔거렸다. 어쨌거나 3년 동안 이어온 관계로서 사적인 감정이 전혀 없다는 건 말이 안 되었다.다만 떳떳하지 못한 사이인 만큼 그녀에게 임신할 여지를 절대로 내어줄 남자가 아니었다.“대표님, 걱정하지 마세요. 지난달에 피임 주사를 맞았는데 유효 기간이 3개월이에요. 그나저나 확인하고 싶은 일이 있어요. 이제 관계를 끊고 싶다고 했으니 회사에도 사직서를 제출해야 할까요?”3년 전, 신풍그룹은 부도가 났다.신가람의 아버지는 교통사고로 사망하면서 골치 아픈 일거리를 남겼고, 수백 명의 임금도 체납하게 되었다. 결국 직원들은 매일같이 집 앞에 찾아와 돈을 내놓으라고 시위까지 했다.게다가 빚 독촉 전화도 끊이지 않았다.그중에서 가
당시 그는 책상에 눕히고 두 다리로 자기 허리를 휘감게 했다.그리고 거리낌 없이 욕구를 풀었고, 누군가 사무실에 찾아오든 말든 안중에 없었다. 마치 지금처럼...신가람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만약 그녀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더욱 진한 스킨십으로 발전할지도 모른다.결국 들어가야 할지 말지 몰라서 망설이기 시작했다.이때, 소지율이 투정을 부렸다.“정후 씨, 하지 마. 가람 씨가 밖에 있어.”박정후는 눈살을 찌푸리며 뒤돌아서 신가람을 바라보았다.“거기 서서 뭐 해?”“내가 가람 씨한테 커피 한 잔 내려달라고 부탁했어. 비행기에서 내렸더니 커피가 당겨서...”이내 남자의 품에 살포시 기대었고, 예쁘장한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몸도 안 좋은데 자극적인 거 마시면 어떡해?”박정후는 그녀를 부축해서 앉히고 무릎에 담요를 덮어주었다.그러고 나서 싸늘한 시선은 신가람을 향했다.“앞으로 지율한테 자극적인 음식 가져다주지 마.”소지율이 어렸을 때 심장병이 있어서 몸이 약하다는 소문은 익히 전해 들었고, 외국에서 수술받고 몇 년 동안 요양했다고 하지만 커피마저 못 마실 줄은 몰랐다.“죄송합니다. 다음부터 조심할게요.”소지율이 남자의 손을 끌어당겼다.“정후 씨, 의사 선생님이 결혼하고 아이 낳아도 될 만큼 건강하다고 하니까 일일이 신경 안 써도 돼.”그녀가 이번에 귀국한 목적이 바로 박정후와 결혼하고 아이까지 낳아주는 것이다.박정후는 소지율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더니 굳은 얼굴로 신가람에게 커피를 가져다 달라고 했다.이내 소지율에게 건네는 순간, 상대방이 제대로 못 잡은 건지 몰라도 커피잔이 기울어지면서 뜨거운 액체가 몇 방울 튀었다.소지율은 비명을 지르더니 손으로 커피잔을 건드렸다. 결국 옆으로 엎어진 잔에서 70도에 육박하는 커피가 흘러내려 신가람의 다리를 적셨다.바지를 사이에 두고도 화끈거리는 통증이 고스란히 전해졌다.갑작스럽게 연출된 여우짓 때문에 신가람은 넋을 잃고 말았다. 이내 소지율을 바라보며 서둘러 사과했다.“지율 씨, 죄
매장에 도착하니 점장이 친히 마중 나왔다.I국에서 핸드 메이드로 만든 드레스는 파란색 피시테일 디자인으로 등이 훤히 파였고, 치맛자락에 자잘한 다이아몬드로 장식되어 있다.“소지율 씨, 이 드레스는 장인이 한땀 한땀 바느질했죠. 999개의 다이아몬드는 영생을 뜻하며 박 대표님과 평생 행복하길 바라는 염원이 담겨 있어요.”점장은 부지런히 아첨했고, 한 마디 한 마디가 소지율의 마음에 쏙 들었다.소파에 앉은 박정후는 힐긋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들어가서 피팅 도와주세요.”“정후 씨, 가람 씨도 같이 들어가면 안 될까? 다 모르는 사람이라 좀 뻘쭘하네.”소지율은 생글생글 웃으며 신가람을 바라보았다.“가람 씨, 괜찮죠?”“안 괜찮을 리가 있나? 같이 가.”박정후의 싸늘한 눈빛이 신가람을 향했다.신가람은 잠자코 구석에 서서 최대한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았다.물론 시중을 들어본 적이 없는 건 아니지만... 이내 한숨을 살짝 내쉬더니 여유로운 미소를 장착하고 피팅룸으로 따라갔다.소지율은 한참을 피팅하다가 드레스는 꽤 만족했는데 유독 신발이 튀는 느낌이 들었다.“가람 씨, 이 드레스에 어울릴 만한 힐을 골라 줘요.”당당한 목소리는 마치 당연한 일처럼 느껴졌다.신가람도 딱히 거절하지 않았고, 이내 신발 코너로 가서 은색 하이힐 한 켤레를 챙겨서 그녀의 앞에 내려놓았다.“손이 이 모양이라 신발을 갈아 신을 수 없네요. 미안하지만 좀 도와줄래요?”하지만 말과 달리 이미 발을 내밀고 있었다.“공짜로 시키는 건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나중에 정후 씨랑 잘 얘기해서 월급 올려주라고 할게요.”신가람은 한쪽 무릎을 구부리고 앉아 그녀에게 하이힐을 갈아 신겼다.이때, 소지율이 갑자기 다리를 번쩍 들어 올리는 바람에 구두코가 신가람의 턱을 강타했다.힘이 어찌나 센지 구두에 달린 장식품이 피부를 스쳐 지나가면서 금세 상처가 벌어졌고, 갑작스러운 통증이 밀려와 눈시울이 시큰거리며 무의식중으로 눈물이 흘러내렸다.“이런!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왜 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