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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릿한 쾌감에 녹아드는 악마
짜릿한 쾌감에 녹아드는 악마
작가: 강운성

제1화

가랑비가 부슬부슬 내리며 빗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빗속에서 리드미컬하게 움직이는 차체가 어렴풋이 보였고, 안개가 낀 유리에 가느다란 손가락 자국 너머로 또렷한 윤곽이 나타났다.

온몸으로 뜨거운 열기를 내뿜는 한 쌍의 남녀가 비 오는 밤의 고요함을 깨뜨렸다.

남자의 눈은 벌겋게 달아올랐고, 그윽한 눈빛으로 품에 안긴 사랑스러운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지배자로서 모든 것을 컨트롤해야만 했다.

하지만 지금은 등에 여자의 손톱자국이 남아 있더라도 대수롭지 않았다.

한참이 지나고 영원할 것 같던 후끈한 열기가 서서히 식어가더니 남자는 일말의 미련도 없이 일어섰다.

“오늘부로 우리 관계는 여기서 끝이야.”

목소리에 담긴 욕구가 어느새 싹 사라지고 평소처럼 싸늘하게 돌아왔다.

신가람은 흠칫 놀라며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뜻이죠?”

박정후가 늘씬한 손가락으로 셔츠 단추를 채웠고, 이내 격정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던 가슴이 가려졌다.

“소지율이 돌아왔어.”

그는 옷을 입고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만 가 봐.”

싫증이 나면 헌신짝처럼 버리는 건 박정후의 성격다운 행동이다.

차 문이 열리자 비서 조민형이 서둘러 우산을 들고 뛰어왔다.

“같이 약 사러 가 줘.”

박정후는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먹는 것까지 확인해.”

신가람의 심장이 따끔거렸다. 어쨌거나 3년 동안 이어온 관계로서 사적인 감정이 전혀 없다는 건 말이 안 되었다.

다만 떳떳하지 못한 사이인 만큼 그녀에게 임신할 여지를 절대로 내어줄 남자가 아니었다.

“대표님, 걱정하지 마세요. 지난달에 피임 주사를 맞았는데 유효 기간이 3개월이에요. 그나저나 확인하고 싶은 일이 있어요. 이제 관계를 끊고 싶다고 했으니 회사에도 사직서를 제출해야 할까요?”

3년 전, 신풍그룹은 부도가 났다.

신가람의 아버지는 교통사고로 사망하면서 골치 아픈 일거리를 남겼고, 수백 명의 임금도 체납하게 되었다. 결국 직원들은 매일같이 집 앞에 찾아와 돈을 내놓으라고 시위까지 했다.

게다가 빚 독촉 전화도 끊이지 않았다.

그중에서 가장 큰 액수를 차지한 채무자가 바로 박정후의 천하그룹이었다.

당시 어머니가 병마에 시달리는 바람에 막다른 골목에 이른 그녀는 자존심을 버리고 박정후에게 모든 것을 내어주었고, 그는 육체적인 쾌감에 만족한 듯 선심을 써서 무려 3년간의 계약을 맺었다.

그리고 수시로 부려 먹을 수 있게 회사에 출근시키기도 했다.

조금 전의 장면은 그녀에게 일상과 다름없었다.

차, 사무실, 주차장, 심지어 그녀의 오피스텔까지.

“공과 사는 구분해야 하니까 계속 다녀도 돼. 3년 치 보상으로 어머님 병원비는 계속 낼 테니까.”

신가람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직장에 꽤 만족하고 있는지라 월 천만 원에 연말 상여금까지 주는 회사는 흔치 않았다.

이 정도 대우는 S시에 드문 축에 속했으니까.

어차피 성인 남녀가 각자 필요로 만났는데 굳이 고상하게 굴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알겠어요. 고마워요. 그럼 내일 일정은 나중에 메일로 보내드릴게요.”

이내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차 문을 열고 내렸다. 고개를 돌리는 순간 의자에 기대어 있는 남자가 눈을 살짝 감고 있었고,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이마에 몇 가닥 흘러내렸다. 광란의 시간을 보내고 나서 그런지 희미한 불빛을 받아 왠지 모르게 성적인 매력까지 더해졌다.

대시 보드 위에 놓인 휴대폰이 윙윙 울렸다.

화면에 [소지율]이라는 세 글자가 떴다.

단지 이름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남자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번졌고, 전화를 받는 순간 다른 사람으로 변했다.

“내일 몇 시 비행기야? 픽업할 차를 보낼게.”

신가람은 문 옆에 우두커니 서 있었고, 잠시 후 허스키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내일 오후 4시에 소지율 픽업하러 공항에 가.”

회사에서 소울그룹의 따님이 곧 귀국하여 박씨 가문과 혼인을 올릴 예정이라고 소문이 자자했다. 따라서 박정후가 약속된 기간을 어기고 일찍이 계약을 파기한 것이다.

“네.”

신가람은 재빨리 대답했다. 이내 씁쓸한 기분을 숨기기 위해 눈을 내리깔았다.

어쨌거나 그녀도 욕망이 절정에 달했을 때 비현실적인 환상을 품고 있었던 건 사실이다.

그리고 천근만근이 된 몸을 이끌고 오피스텔로 돌아갔다.

이정미에게 연락한 후 모녀는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고, 어머니의 컨디션이 문제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한시름 놓았다.

차에서 남자의 열정을 감당하지 못한 나머지 다리가 아직도 후들거렸다. 그녀는 얼른 샤워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곤히 잠들었다.

...

다음 날.

일단 급한 일부터 처리한 신가람은 비행기가 착륙하기 전 운전기사 양태수와 함께 SC공항으로 향했다.

출구로 쏟아져 나오는 인파를 지켜보던 순간 아리따운 모습이 그녀의 시선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선글라스를 낀 여자는 웨이브가 들어간 긴 머리와 새빨간 입술이 돋보였고, 온몸으로 우아한 분위기를 풍겼다.

“소지율 씨네요.”

그녀를 한눈에 알아본 양태수는 서둘러 다가가 캐리어를 건네받았다.

소지율이 선글라스를 벗자 또렷한 이목구비가 나타났고, 다만 묘하게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신가람은 흠칫 놀랐다. 그리고 비슷한 눈매를 가진 여자를 한참 동안 멍하니 쳐다보았다.

찰나의 경악을 끝으로 이루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밀려왔다.

정확히 말하면 그녀가 소지율을 닮은 편이다.

박정후가 그동안 자신을 대타로 삼았다는 건가? 절정에 이를 때 항상 얼굴을 만지며 애칭을 속삭여 주었고, 동작도 점점 더 격해졌는데...

그녀를 소지율로 생각했기에 가능했다는 뜻인가?

“신가람 씨? 안녕하세요, 전 소지율이라고 해요.”

여자가 우아하게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신가람은 얼른 감정을 추스르고 대답했다.

“안녕하세요. 대표님께서 회의 중이라 저한테 일단 회사로 모셔 오라고 했어요.”

“그럼 부탁드릴게요.”

소지율이 미소를 지으며 신가람의 얼굴을 힐긋 쳐다보더니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입을 삐죽거렸다.

회사로 돌아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와서 문을 나서는 순간 소지율이 뒤를 돌아보았다.

“신가람 씨, 혹시 커피 한 잔만 내려줄 수 있을까요? 만약 불편하시면...”

그리고 빤히 쳐다보며 마치 당연한 일을 부탁하는 듯 떳떳한 표정을 지었다.

신가람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

“아니에요. 대표님 사무실에서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말을 마치고 나서 몸을 돌려 탕비실로 커피를 준비하러 갔다.

문 앞에 다다랐을 때 안에서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거 들었어요? 소지율 씨가 이번에 귀국한 목적이 바로 천하그룹의 사모님이 되는 거래요. 앞으로 회사에 안주인이 생기면 신가람의 좋은 날도 끝이죠, 뭐.”

“고작 평범한 대학 졸업생이 오늘날의 자리까지 올라오는 데 뒤에서 아무 짓도 안 하고 다녔다는 게 말이 돼요?”

“지난번에 마케팅팀을 지나가다가 안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거든요. 마치 남녀가 그런 일을 하는... 마케팅팀 강민석 차장이 툭하면 신가람과 눈짓을 주고받잖아요.”

신가람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고, 손가락으로 컵을 움켜쥐었다.

“근무시간에 함부로 입을 놀려 유언비어를 퍼뜨리면 되겠어요? 기업 문화에 영향을 미치는 직원은 규정에 따라 자진 퇴사하거나 해고되거나 둘 중 하나인 거 몰라요?”

기획팀 하지영은 신가람이 눈에 거슬렸지만 차마 자기 일자리까지 걸고 모험할 엄두는 안 나서 마지못해 말했다.

“가람 씨, 정말 미안해요. 전 워낙 입이 가벼워서 아무 말이나 막 하거든요.”

“그럼 입단속 잘해요. 괜히 함부로 나불대지 말고, 필요 없을 때는 꾹 닫고 다녀요.”

신가람이 단호한 말투로 쏘아붙였다.

천하그룹에 입사하자마자 능력을 의심받던 시절에 기획팀과 마케팅팀을 오가며 실력을 쌓아 차근차근 지금의 자리까지 올라오게 되었고, 오로지 본인의 노력 덕분이었다.

아니면 박정후도 굳이 쓸모없는 사람을 곁에 두지 않았을 테니까.

하지영은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고, 고개를 숙인 채 신가람을 스쳐 지나가 허둥지둥 탕비실을 나섰다.

다른 사람도 뻘쭘한 얼굴로 뿔뿔이 흩어졌다.

그녀는 물을 받아 능숙하게 커피를 내리고 대표 사무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노크하려는 찰나 빼꼼 열린 문을 발견했다.

등을 지고 서 있는 남자는 깔끔한 슈트를 빼입었고, 마치 한 그루의 소나무처럼 꼿꼿했다.

여자는 단단한 허리를 양손으로 끌어안고 책상 모서리에 반쯤 기대어 앉았다.

애매한 자세는 보는 이의 상상력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물론 그녀에게도 시킨 적이 있으며, 박정후가 가장 좋아하는 체위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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