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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신가람은 말문이 막혔다.

만약 박정후와 소지율이 약혼하게 된다면 자신한테 쓴 돈은 모두 청구할 가능성이 컸다.

그러니 무슨 자격으로 박정후에게 돈을 요구하겠는가?

“무슨 일인데 그렇게 뜸 들이죠? 설마 입에 담기도 힘든가요?”

날이 잔뜩 선 말은 귀에 거슬릴 지경이다.

신가람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퉁퉁 부어 욱신거리는 턱은 조금 전의 일을 상기시켜주었다.

“아니에요. 단지 휴가를 내고 싶어서, 대표님이 바쁘신 것 같으니 나중에 사내 어플로 다시 신청할게요.”

그리고 말도 없이 전화가 끊겼다.

...

통화를 마치고 뒤돌아서는 순간 박정후가 나타났다.

뚜렷한 이목구비와 우수에 찬 눈빛, 훤칠한 몸매는 쳐다보기만 해도 가슴이 설렜다.

“누구야?”

이내 다가가 휴대폰을 건네받았지만 발신자 번호를 찾지 못했다.

소지율은 방금 통화 기록을 삭제해 버렸다.

“아니야, 스팸 전화인데 이미 지웠어. 어차피 보면 짜증만 나잖아.”

백옥처럼 하얀 손가락이 희롱하듯 남자의 가슴을 스쳐 지나갔고, 은은한 눈빛으로 도톰한 입술을 달싹였다.

여자의 유혹을 거부하는 남자는 이 세상에 없을 테니까.

박정후는 무심한 얼굴로 그녀의 손을 끌어내렸다.

“하이힐은 자주 신지 마. 행여나 넘어져서 다치면 심장병이 재발할지도 몰라.”

“그렇게 걱정돼? 그럼 내 기분 달래주는 셈 치고 키스해줘.”

이내 빨간 입술을 살짝 내밀며 키스를 요구했다.

“장난 그만해. 나 아직 할 일이 많아.”

박정후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때마침 소지율의 어머니 강정애가 연락이 와서 운전기사가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다고 했다.

박정후는 잽싸게 그녀를 배웅했다.

“집에 도착하면 문자 보내. 혹시 불편한 데 있으면 제때 알려주고.”

소지율은 활짝 웃으며 까치발을 들어 남자의 볼에 입을 맞추었다.

“알겠어. 정후 씨.”

그러고 나서 차에 올라타 유유히 떠났다.

박정후는 손수건을 찾아 얼굴을 닦고 휴대폰을 힐긋 쳐다보았다. 신가람은 연락하기는커녕 문자조차 보내지 않았다.

이내 조민형에게 전화했다.

“어떻게 됐어?”

“가람 씨 어머니가 넘어지는 바람에 뇌간 출혈로 수술받았어요. 상당히 초조해 보이던데 무슨 문제라도 생겼는지 모르겠네요. 한 번 여쭤볼까요?”

박정후는 뒤돌아서 집으로 들어섰다.

“아니야. 본인이 입이 없는 것도 아니고.”

한편, 신가람은 저녁 8시까지 남아 어머니가 고비를 넘긴 것을 확인한 뒤 지친 몸을 이끌고 오피스텔로 돌아왔다.

이는 회사에서 제공한 숙소로 직장과 거리가 매우 가까웠다.

침실로 가서 서랍을 열자 안에 벨벳 상자 몇 개가 들어 있다.

지난 3년 동안 박정후한테서 꽤 많은 주얼리와 목걸이를 선물 받았고, 명품 가방 몇 개를 포함해 전부 개봉하지 않은 새 제품이라 만약 리셀한다면 적어도 판매가의 80~90%는 될 것이다.

사진을 찍어 중고 사이트에 올리자마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고, 쿵쿵쿵 계속해서 울렸다.

신가람은 서랍을 닫고 문을 열러 나갔다.

이내 잔뜩 경계하며 틈만 살짝 벌렸고, 밖에 서 있는 남자를 확인하자 눈살을 찌푸렸다.

“가람 씨, 오늘 왜 출근 안 했어? 어디 아파?”

이제 중년에 접어든 마케팅팀 강민석은 기름진 얼굴을 들이밀고 그녀를 음흉하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눈동자는 위아래로 움직이기 바빴다.

신가람은 본능적으로 혐오감을 느꼈다.

“차장님, 무슨 일이죠?”

“일이 있어야 가람 씨 보러 오나? 우리가 남남도 아니고, 잠깐 들어가도 될까? 이번 기회에 허심탄회하게 얘기 한 번 해보자고.”

말을 이어가면서 손을 뻗어 문을 밀었다.

신가람은 필사적으로 막았고, 싸늘한 어조로 대답했다.

“딱히 할 말이 없어요.”

“그런데 왜 자꾸 히죽거리며 추파를 던지는 거야? 양기가 부족한 건 아니고?”

강민석은 있는 힘껏 밀더니 틈 사이로 비집고 들어와 문을 쾅 닫았다.

신가람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남자의 몸에서 풍기는 진한 술 냄새를 맡자 경계심 어린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그리고 더듬거리다가 현관에 기대어 있는 빗자루를 번쩍 들어 올렸다.

“남의 집에 함부로 무단 침입하는 건 불법이니 경찰에 신고할 거예요.”

“시치미 떼지 마. 회사에서 우리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라고 소문이 자자해. 사실 가람 씨를 처음 봤을 때부터 마음에 들었어. 매달 200만 원씩 줄 테니까 나랑 만나.”

그는 이미 결혼했고, 최근에 아내가 임신하는 바람에 하루하루 무미건조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업소 접대부들은 나름대로 싸구려 맛이 있긴 하지만 느낌이 덜 했다.

하지만 신가람을 보는 순간 욕망이 한순간에 불타올랐다.

이내 뛰어가서 그녀를 와락 껴안았다.

신가람은 두 팔로 죽을힘을 다해 반항했다.

“저리 꺼져!”

어쨌거나 여자 혼자서 남자의 힘을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라 결국 바닥에 쓰러져 옴짝달싹 못 했고, 소시지 같은 손가락에 얼굴을 붙잡히자 턱에서 극심한 고통이 밀려왔다.

강민석은 신가람의 속옷을 벗기고 당장이라도 삽입하고 싶어 안달이 났다.

신가람이 몸부림치며 다리를 들어 올려 남자의 중심부를 세게 걷어찼고, 곧이어 처참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강민석은 옆으로 스르륵 쓰러지더니 그곳을 잡고 데굴데굴 구르며 욕설을 퍼부었다.

“이 빌어먹을 년이! 아악! 나 죽네...”

신가람은 휴대폰을 들고 비틀거리며 집 밖으로 뛰쳐나갔고, 단숨에 큰길까지 도망갔다. 차가운 저녁 바람을 맞으며 한참 동안 숨을 돌리고 나서야 떨리는 손으로 경찰에 신고했다.

그리고 회사 법무팀 이정신 변호사에게 연락했다.

“마케팅팀 강민석을 고소할게요. 절 스토킹해서 해코지하려는 걸 이미 경찰에 신고했죠. 경찰서에 변호사님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가람 씨?”

“네, 대표 비서실 신가람이에요.”

휴대폰 너머로 침묵이 이어지더니 다시 말을 이어갔다.

“알겠어요. 금방 가라고 할게요.”

이정신은 즉시 박정후에게 연락해 상황을 공유했다.

“강민석은 소지율 씨 어머니의 남동생인데 만약 사실이라면 회사에 더는 남아 있을 수 없는 상황이에요. 강 사모님 측에도 설명하기 어려울 텐데...”

박정후의 얼굴이 싸늘하게 변했다. 애초에 강민석을 고용한 것도 소씨 가문의 체면을 생각해서였다.

그나마 실적이 있었기에 여태껏 자르지는 않았지만 감히 그의 사람을 건드린 이상 죽음을 자초한 셈이다.

“회사 규정에 따라 처리하고, 사적인 관계는 무시해도 돼.”

박정후는 노트북을 닫고 손가락을 풀었다. 서늘한 안색은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법무팀 변호사를 제외하고 그는 조민형도 동행하도록 지시했다.

밤 10시 30분, 신가람은 경찰서 로비에 앉아 있었다.

진술서를 작성한 젊은 경찰관이 따뜻한 물 한 컵을 부어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고마워요.”

이내 종이컵을 들고 한 모금 마셨고, 경찰관은 소독약과 반창고까지 챙겨주었다.

그는 신가람의 턱을 가리키며 물었다.

“턱에 상처 났네요. 범인 때문에 다친 거예요?”

만약 사실이라면 진술서에 기록해야 하며, 나중에 증거로 사용할 수 있다.

신가람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조금 전에 겪은 일을 자세히 묘사했고, 피해자로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침착했다.

상처를 치료하고 반창고를 붙이고 나니 법무팀 변호사와 조민형이 들어왔다.

그녀를 발견하는 순간 조민형은 흠칫 놀랐다.

안색이 하얗게 질린 여자는 경찰복 외투를 걸친 채 불빛 아래에서 커다란 의자에 홀로 앉아 있었고, 표정이 유난히 고집스러워 보였다.

“안녕하세요, 저는 천하그룹 법무팀 변호사인데 지금 무슨 상황인가요?”

경찰이 대답했다.

“범인은 병원에 실려 가 치료받았지만 앞으로 남자구실을 못 하게 되었죠. 물론 생명에는 지장이 없어요. 현재로서 피해자의 정당방위에 속해요.”

단 한 방에 해결하다니? 백발백중이 따로 없었다.

정당방위라는 말을 듣자 신가람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진술서를 마무리하고 경찰에게 외투를 돌려준 다음 감사의 인사를 끝으로 조민형을 따라 경찰서를 나섰다.

“집까지 데려다줄게요. 시간도 늦어서 택시 잡기도 힘들 거예요.”

조민형은 차를 몰고 와서 창문을 내리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신가람의 스커트는 처참하게 구겨졌고, 턱에 상처까지 나서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행세로 병원에 갈 수 없으니 우선 돌아가서 씻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다시 움직일 생각이었다.

하지만 조민형은 오피스텔로 데려가는 대신 박정후의 별장으로 향했다.

“가람 씨, 이번 사건은 대표님께 설명하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신가람은 입을 삐죽거렸다. 사실 이런 비참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결국 문밖에 서서 머리와 옷을 정리한 뒤 안으로 들어갔다.

남자는 거실 소파에 앉아 느긋하게 잡지를 넘기고 있었고, 빳빳한 셔츠와 고급 질감을 자랑하는 정장 바지 차림으로 싸늘한 기운을 풍겼다.

신가람이 입술을 달싹였다.

“강민석과 아무 일도 없었어요. 회사에서 은근히 호감을 보여서 딱 잘라 거절했는데 이번에 집까지 따라올 줄은 몰랐어요.”

잡지를 덮고 박정후는 고개를 들어 무심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그녀는 목이 바짝 마르는 느낌에 침을 꼴깍 삼켰다.

“공정하게 처리할 생각이신가요?”

“난 사사로운 정에 얽매이는 사람은 아니지.”

이내 위아래로 훑어보며 말했다.

“돈이 부족한가? 이번엔 얼마나 필요하지?”

신가람은 어리둥절하더니 이내 주먹을 움켜쥐었다. 남자는 소파에서 일어나 천천히 다가오더니 그녀의 턱을 치켜들었다.

시종일관 무미건조한 눈빛에 불꽃이 튀기 시작하더니 적나라한 욕망이 화르르 타올랐다.

손가락으로 반창고를 만지던 박정후는 눈을 가늘게 떴고, 이내 부어오른 입술을 발견했다.

남자의 안색이 서서히 굳어갔다.

“너한테 키스까지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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