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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소지율은 의기양양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팔을 빼냈다. 그리고 아버지의 말을 떠올려 최대한 박정후를 설득하는 데 공을 들여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문을 열고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정후 씨.”

휴게실에서 나온 박정후는 어리둥절하더니 금세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왜 미리 온다고 얘기 안 했어? 기사님 픽업 보내면 되는데.”

“정후 씨 보고 싶어서 그랬지. 나 안 보고 싶어?”

말을 이어가면서 그에게 찰싹 달라붙어 백옥같은 팔로 목덜미를 감싸 안더니 새빨간 입술로 고혹적인 웃음을 지었다.

신가람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고, 사랑을 속삭이는 남녀의 말소리를 들으며 마음이 씁쓸했지만 문을 살포시 닫아주었다.

이제 이런 지긋지긋한 상황을 벗어나고 싶었지만 현실은 계속 구질구질하게 엮여야만 했다.

저녁에 병원으로 갔더니 이정미가 휴대폰을 들고 사진을 보여주었다.

“약혼반지는 왜 안 보여?”

어쨌거나 오지랖 넓게 간섭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시력이 점점 나빠지는 와중에도 놓치기 쉬운 부분까지 단번에 문제점을 캐치했다.

그동안 주강인은 언제 어디서든 왼손에 실버 반지를 끼고 있었다.

신가람은 태연하게 거짓말했다.

“제가 뺐어요.”

그리고 가방에서 반지 두 개를 꺼냈다.

“너무 옛날 스타일이라 매장 가서 새로 사려고.”

“그럼 됐어.”

이정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머니와 한참 이야기를 나눈 다음 신가람은 이불을 여미어주고 의사를 찾아갔다. 컨디션을 확인했더니 회복 상태가 나쁘지 않다는 대답을 듣고 다시 병실로 돌아가려고 했다.

이때, 한 젊은 인턴이 그녀를 불렀다.

“가람 씨, 낮에 남자친구가 생겼다고 하던데 맞아요?”

신가람이 웃으면서 말했다.

“네.”

“남자친구랑 사이가 좋나 보네요.”

잘생긴 젊은 인턴은 실망한 표정이 역력했다.

“곧 인턴십이 끝나서 다른 곳으로 전근 갈 것 텐데, 밥 한 끼 사드려도 될까요?”

신가람은 그의 제안을 완곡하게 거절했다.

남자는 좌절한 듯 말했다.

“아, 그럼 일 보세요.”

어깨가 축 처진 뒷모습은 충격을 꽤 많이 받은 모습이었다.

신가람은 동정할 겨를도 없었고, 병실로 돌아와 주선희에게 쉬라고 하고는 대신 어머니의 곁을 지켰다.

휴대폰에 문자 한 통이 도착했고, 발신인은 박정후였다.

[10시 30분, 그랜드베이.]

이내 등줄기가 오싹했다. 낮에 잠깐 맛만 보았는지라 전혀 만족하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어머니가 잠든 것을 확인하고 나서 그녀는 가방을 챙겨서 병원을 떠났다.

입구에서 기다리던 조민형은 신가람을 발견하고 곧바로 차 문을 열어주더니 아무 말 없이 운전해서 별장으로 향했다.

샤워하고 잠옷으로 갈아입고 침실로 걸어가 발을 들이는 순간 남자의 품에 안기게 되었다.

허리를 감싼 단단한 팔은 마치 부러뜨릴 기세로 힘이 점점 들어갔다.

“인턴이 아주 잘 챙겨주나 봐?”

이내 뜨거운 입김이 귓가에 닿았다.

신가람은 마치 감전이라도 된 듯 전신이 찌릿하더니 머릿속에 경보음이 울렸다.

“그게 무슨 말이죠?”

남자는 입을 벌리고 귓불을 살짝 깨물더니 힘껏 빨아들였다. 그리고 이빨로 잘근잘근 씹으며 중간중간 혀로 농락하기도 했다.

신가람의 몸이 서서히 나른해지기 시작했다. 벌써 3년이 지났지만 강약이 적절한 남자의 스킬에 여전히 정신 차리기 힘들었다.

“만약 데이트 신청에 응했다면 과연 무사히 인턴을 수료했을지는 미지수라고 장담하지.”

신가람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잠시 후 겨우 정신을 차리고 나서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설마 날 감시하고 있었던 거예요?”

“도움을 청한 게 한두 번도 아니고 부탁하는 사람으로서 기본은 지켜야지. 나 몰래 다른 남자 만날 생각은 하지도 마. 더러운 여자 제일 질색하는 거 알지?”

말을 마치고 나서 잠옷을 들추고 큼지막한 손을 집어넣었다.

거친 손가락이 피부를 타고 조금씩 위로 향했다.

분명 공개할 수 없는 사이지만, 왠지 모를 다정한 느낌에 매번 착각에 빠지게 했다.

한참 후.

“앞으로 내가 말하기 전에 매일 별장으로 와.”

신가람은 어안이 벙벙했다.

“그건 힘들어요. 병원에 가서 엄마도 간호해야 하는데...”

남자의 말투에 불쾌함이 섞여 있었다.

“하고 나서 가도 문제없잖아.”

마치 내일 아침 뭘 먹을지 정하는 것처럼 대수롭지 않다니.

신가람은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 채 고민하다가 넌지시 부탁했다.

“목에 키스 마크만 조심해주면 안 될까요? 다른 사람이 볼지도 몰라요.”

특히 소지율에게 꼬투리 잡혀서 불필요한 언쟁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다.

박정후의 말투는 무심하기만 했다.

“돈 갖고 나서 부탁하더니 이제 와서 잔소리까지? 슬슬 선 넘기 시작하네?”

변덕이 워낙 심한 남자라 언제 어디서 화를 낼지 모른다. 지난 3년 동안 신가람은 그를 달래기 위해 갖은 수단과 방법을 동원했다.

“아니에요. 저야 대표님의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죠.”

1억을 받고 나서 남자친구 행세를 부탁한 건 사실이라 그가 시키는 대로 해야만 하는 입장이다.

신가람은 옷을 입고 침실을 정리한 뒤 물 한 잔을 따라주고 방을 떠났다.

밖으로 나오자 조민형을 발견하고 물었다.

“대표님께서 날 감시하라고 시켰나요?”

조민형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단지 병원 측에 CCTV 영상을 수시로 보내달라고 했을 뿐이죠. 며칠 전에 모니터링을 제때 해서 다행이지, 아니면 가람 씨 어머니가 강정애의 부하들이 데려간 사실을 발견하지 못했을 거예요.”

이건 미행과 다를 게 뭐가 있냐는 말이다.

신가람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고, 차마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울컥하는 마음을 스스로 삭였다.

가방 안에 있던 휴대폰이 울리더니 어플 알람이 떴고, 이내 터치해 보니 온라인 문의가 들어왔다.

[가방 구매 영수증은 있나요?]

박정후는 눈썰미가 뛰어났기에 시즌별 신제품만 골라서 샀고, 전 세계적으로 10 개 미만으로 판매되는 가방도 있다. 따라서 수요는 많지만 매물이 없어서 돈이 넘쳐나도 사지 못하는 사람이 수두룩했다.

이내 답장을 보냈다.

[진품이에요. 같이 매장 가서 감정 맡겨도 됩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한테 부탁해서 구매한 거라 영수증은 없어요. ]

상대방도 흔쾌히 대답했고, S시 매장에서 만나자고 했다.

그녀가 소유한 가방들이 대부분 새것이라서 설령 싸게 판다고 해도 몇천만원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불운의 연속 끝에 드디어 기뻐할 만한 일이 생겼다. 신가람은 서둘러 오피스텔로 돌아가 가방을 박스에 포장하고 메모지에 구매 날짜까지 적었다.

주말이 되자 작은 캐리어를 끌고 지정된 매장에 도착했다.

응접실에 화려한 옷차림의 패셔니스타 한 명이 일찌감치 앉아 있었고, 옆에는 회색 정장을 입은 검수원 3명이 보였다.

상대방은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레어템 5개나 가진 사람이 당신이에요?”

수수한 모양새의 신가람은 명품을 구매할 만한 부잣집 자제처럼 보이지 않았다. 이내 거침없이 캐리어를 열고 모든 가방을 유리로 된 원형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모두 진품이라고 장담하니까 편하게 검수하세요.”

박정후가 설마 가품을 사서 그녀를 속일 일은 없으니까.

검수원이 흰 장갑을 끼고 기구로 무려 한 시간 동안 낱낱이 살피더니 확신했다.

“100% 진품이에요. 가격은 시중 판매가보다 무려 4천만 원이나 저렴하죠.”

상대방은 그제야 가방을 들고 요리조리 살피더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부 포장해주세요. 선물할 거라서 스카프도 하나씩 매칭해주세요.”

검수원은 가방을 닦으면서 신가람에게 물었다.

“정말 20% 할인하는 거 맞아요?”

급전이 필요한 상황이라 현금 거래를 선호하는 건 사실이었다.

“네. 거래 영수증 주시고, 이 계좌로 입금 부탁드릴게요.”

그리고 계좌 번호를 보내주었다.

상대방은 송금하는 와중에 수취인을 보자 안색이 살짝 변하더니 다시 신가람을 힐긋 쳐다보았다.

그러나 몇 분 후, 갑자기 물건을 확인하려는 다른 사람이 있다며 거래 장소를 변경했다.

신가람은 의심스러웠지만 한꺼번에 가방 5개를 처리하는 기회가 흔치 않은지라 일단 가서 확인해보기로 했다.

...

“정후 씨, 같이 가자. 최근에 새로 나온 전시품이 뭐 있는지 구경만 하면 돼. 옛날부터 갖고 싶었는데 매물이 없어서 못 샀거든.”

소지율은 박정후의 회사로 찾아갔다. 주말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일에 파묻혀 시간을 보냈다.

“카드 줬잖아. 한도 없으니까 마음껏 긁어.”

박정후는 딱 잘라 거절했다.

소지율은 발끈하더니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남자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나랑 같이 가주는 것도 안 돼?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들이라 술을 권해서 취하기라도 하면 어떡해?”

어차피 술을 못 마시지만 일부러 언급했다.

아니나 다를까 박정후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술친구들은 일찌감치 연락 끊어.”

“서로 안 지 꽤 오래됐어. 우리 아빠 거래처 딸인데 집안 사업까지 망치게 할 수는 없잖아.”

박정후는 불쾌한 표정으로 서류를 덮었다.

“무슨 사업인데 네가 접대까지 해야 해?”

“사실 전시용 가방이 갖고 싶었을 뿐이야. 나랑 같이 가자, 응?”

이내 침묵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자.”

소지율은 만면에 웃음을 띠며 잽싸게 팔짱을 꼈다.

“그럼 옆에서 잘 봐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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