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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이렇게 빨리 죽고 싶지는 않았던 신가람은 당연히 박정후가 그 돈을 준다 해도 받을 엄두가 없었다.

신가람은 서둘러 샤워를 마치고 나서 양치까지 깨끗이 한 뒤에 박정후를 찾아갔지만 박정후는 여전히 화가 난 것인지 신가람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있었다.

방 밖에서 한참을 기다리던 신가람은 결국 열쇠를 찾아 알아서 문을 열고 들어갔다.

신가람은 늘 그래왔듯 박정후가 누워있는 침대에 올라가 손으로 그의 얼굴을 매만졌다.

일정한 호흡을 내뱉고 있던 박정후는 이미 신가람이 하도 만진 탓에 얼굴이 빨개져 있었다.

박정후는 갑자기 몸을 돌려 신가람을 제 품 안에 가두더니 손가락으로 그녀의 혀를 쓸어내렸다.

축축하고 뜨거운 그것을 만지작거리며 박정후가 나무라듯 말했다.

“이 입으로는 거짓말밖에 할 줄 몰라?”

신가람은 저릿해 나는 혀에 대답을 하지 못했지만 박정후가 대신해서 답을 해주었다.

“아니면 내가 준 게 부족해서 그런가? 좀 더 많이 먹어보면 고분고분해지나?”

곧바로 신가람의 입안에는 손가락이 아닌 다른 것이 들어왔다.

아까와는 차원이 다른 크기에 금세 힘들어진 신가람은 또다시 술기운이 올라오는지 속이 쓰려와서 배를 부여잡고 애원했다.

“토할 것 같아요... 화장실 한 번만 다녀오면 안 돼요?”

그 말에 표정이 굳어버린 채 신가람의 등을 응시하던 박정후는 그녀의 목덜미에 빨간 자국을 남겨놓고는 거칠게 입을 뗐다.

신가람은 신발을 신을 겨를도 없이 그길로 뛰쳐나가서는 10분이 지나서야 다시 깨끗이 씻고 화장실 밖으로 나왔다.

“나가.”

“계속할 수 있어요.”

창백해진 얼굴에 땀방울을 매달고 말하는 신가람이었지만 물기가 가득한 눈에 자기주장 뚜렷한 이목구비는 여전히 예뻐서 지금 이 순간조차도 박정후를 유혹하고 있었다.

“신씨 집안 아가씨가 이 정도로 밝히는지는 몰랐는데, 내가 널 너무 만만하게 봤던 것 같아. 그깟 돈 때문에 몸도 팔더니 이젠 자존심도 필요 없다 이거야?”

박정후의 말에 정곡이 찔린 신가람은 무슨 생각에서인지 다시 침대에 누워서 두 팔과 다리를 벌리고 말했다.

“저는 아직도 돈이 필요해요. 대표님만 원하신다면 전 언제든 팔 준비가 되어있어요, 그게 뭐든지. 자존심 따위는 버린 지 오래예요.”

눈을 감은 채 입술을 세게 깨물어 간신히 그 통증으로 정신을 부여잡고 있는 신가람이었다.

박정후는 딱딱하게 굳은 신가람의 몸을 아무 말도 없이 내려다보았다.

신가람은 박정후가 혹여나 말을 바꿀까 봐 불안해져서 다시 눈을 뜨고 조심스레 물었다.

“제 남자친구인 척해주신다는 건...”

“나는 내가 한 말은 꼭 지키는 사람이야.”

박정후의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 신가람은 바로 침대에서 일어나 옷을 챙겨입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방을 빠져나갔다.

“감사합니다, 그럼 다음에 또 뵐게요.”

귀신한테 쫓기기라도 하듯 빠르게 나가버리는 신가람의 뒷모습을 박정후는 미간을 찌푸린 채로 지켜보고 있었다.

욕구를 제대로 풀기도 전에, 마침 고조를 달리고 있을 때 끝나버린 상황에 박정후는 언짢은 듯 고개를 돌려 신가람이 누워있던 침대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우연히 그녀가 두고 간 속옷을 발견한 박정후는 큰 손으로 그것을 말아쥐었다.

오피스텔에 돌아온 신가람도 속옷을 두고 왔다는 걸 발견하긴 했지만 어차피 박정후가 알아서 버릴 거라고 생각해 딱히 신경을 쓰지는 않았다.

침대에 누운 신가람은 그 가방들은 다시 돌려받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박정후가 빚도 갚아주고 엄마의 병원비까지 해결해주니 신가람이 손해 볼 일은 없는 것이었다.

신가람은 그날도 착잡한 마음으로 잠에 들었다.

일요일에는 엄마를 보러 병원에 갔다가 그 의사를 다시 만났지만 그에게도 직장생활이라는 게 있었기에 별말은 섞지 않고 돌아왔다.

월요일도 그냥 그러하듯 평범하게 지나갈 줄 알았는데 회사로 출근한 신가람은 일진이 나쁜지 아침부터 소지율과 마주하게 됐다.

특별히 신상 백을 메고 온 소지율은 일부러 신가람을 보며 눈웃음을 흘렸다.

24시간 안에 이 백을 들여오기 위해 S 시에서 얼마나 많은 인맥을 동원했을지 안 봐도 뻔했다.

“신 비서님, 조 비서가 그러던데 가방 팔아서 받기로 했던 돈은 자선단체에 기부했대요. 신 비서님도 간접적으로 좋은 일 하신 거네요.”

신상 백을 받을 때 소지율은 집안도 망한 신가람이 명품 백들을 가지고 있는 게 이상해서 조민형에게 굳이 묻기까지 했었다.

다행히 조민형도 숨기지 않고 대답한 덕분에 소지율은 그 가방들이 다 박정후가 사준 것임을 알게 되었다.

소지율은 분에 넘치는 걸 받았으면서도 만족을 모르고 그걸 팔아서 돈까지 받아내려 했던 신가람이 돈도 가방도 모두 잃은 게 아주 만족스러웠다.

쓸데없이 야망만 큰 사람들을 조련하는 데는 미끼를 던져주는 것만큼 확실한 방법은 없었다.

신가람은 저를 비꼬는 소지율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알려주셔서 감사해요. 저는 돈밖에 모르는 사람이라 저였으면 기부까지는 못했을 거예요. 그래도 대표님과 지율 씨 덕분에 그 가방의 가치가 더 빛을 발한 것 같아요.”

자신을 낮추며 상대를 추켜올리는 건 다년간 신가람의 몸에 밴 습관이었다.

하지만 소지율은 그녀가 이렇게 바로 인정할 줄 몰라 잠시 당황하며 물었다.

“어젯밤은 어디에 있었어요?”

“엄마 보러 병원에 갔었어요. 전 출근해봐야 해서 이만 들어가 볼게요. 대표님 만나서 오신 거면 조 비서님한테 연락해보세요. 비서님은 항상 대표님 곁에 있으실 거예요.”

소지율과 더 이상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았던 신가람이 대충 둘러댔지만 소지율은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그날 가람 씨 진짜 강아지 같았는데, 제발 도와달라고 꼬리 흔드는 강아지 말이에요.”

긁히라고 한 말이었지만 신가람은 별다른 반응 없이 그저 웃기만 했다.

그에 살짝 약 오른 소지율은 그녀를 향해 선전포고를 했다.

“정후 씨랑 나 결혼할 거예요.”

“축하드려요.”

지금 제 위치가 어디쯤인지 누구보다 잘 아는 신가람은 저 말에 어떠한 반응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그저 박정후의 말에 따라 움직이는 허수아비일 뿐이었다.

처음에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창업을 해볼까 하는 생각도 했었지만 그러려면 자금도 필요하고 파트너도 필요한데 신가람에게는 둘 다 없었다.

할아버지와 외할아버지 모두 의료계의 큰손이시라 신풍 그룹도 그쪽으론 조금 알려진 바가 있어서 신가람은 지금 두 분의 옛날 제자들에게 희망을 품으며 연락을 돌리고 있었다.

간신히 소지율에게서 벗어나 회사 안으로 들어온 신가람에게 하지영이 서류를 건네주며 말했다.

“가람 씨, 이건 기획팀 저번 분기 프로젝트인데 제가 맡아왔던 거라 인수인계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동료가 잘 못 따라와서 본 부장님한테 이 프로젝트만 마무리하고 퇴사하겠다고 말씀드렸어요.”

“얼마 안 걸릴 거에요. 혹시 불편한 건 아니죠?”

“이런 일은 기획팀이랑 마케팅팀에서 알아서 조율하면 되는 거죠. 저한테 굳이 알려주실 필요는 없어요.”

“다행이네요. 아까 팀장님이 이 계약서 대표님 결재받아야 한다고 가람 씨한테 전해주라고 하셨어요.”

“잊지 말고 전달 부탁해요.”

서류를 테이블 위에 올려두며 말하는 하지영에 신가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5분 뒤, 박정후가 회의에 들어가 있을 때 소지율이 회사 안으로 들어왔다.

주스를 달라는 말에 배달을 시켜주려 했지만 소지율이 신가람의 배달 앱을 들여다보며 던진 한마디에 신가람은 주스를 손으로 직접 착즙하고 있었다.

“난 이렇게 더러운 건 못 마시는데, 가람 씨가 직접 해줘요.”

그래도 앞으로 박정후와 같은 침대를 쓰게 될 사이이니 신가람은 소지율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마치 본인 땅을 순찰하듯 사무실과 대표 휴게실을 오가던 소지율은 구석에 놓여있는 침대를 보며 미간을 찌푸린 채 말했다.

“이거 시트 다 새 걸로 바꿔요.”

그 말이 어이가 없었지만 신가람은 그냥 시키는 대로 했다.

그러더니 소지율은 침대에 걸터앉아 신발을 벗으며 손으로 베개를 만지작거리다가 도발하듯 신가람을 보며 말했다.

“이 베개에서 걸레 냄새 나는 것 같은데, 이것도 버려요.”

“네, 알겠습니다.”

신가람은 바닥에 내던져진 베개를 주워들고 그걸 던지기 위해 밖으로 나갔는데 또 하필 박정후와 마주치게 되었다.

“뭐해?”

“지율 씨가 버리라고 해서요.”

신가람의 대답에 시선을 옮기던 박정후는 이상할 게 없다고 생각했는지 바로 대꾸했다.

“그럼 시키는 대로 해.”

그런데 옮기던 시선이 아직 사라지지 않은 목덜미의 이빨 자국에 닿자 박정후는 다시 가슴속 깊은 곳이 들끓는 것 같으면서 목이 간질거렸다.

어제 일에 대한 화가 가라앉지 않은 것인지 울대를 움직이던 박정후는 지금 당장이라도 신가람을 끌고 사무실로 들어가고 싶었다.

박정후는 바로 소지율을 보러 들어가지 않고 핸드폰을 들어 누군가에게 문자를 보냈다.

[약 다 먹었으니까 다시 만들어서 오늘 저녁에 가져와.]

[이렇게 빨리? 무슨 약을 밥 먹듯이 먹어. 그거 많이 먹으면 심장에 무리 가.]

박정후의 문자에 빠르게 답장하는 상대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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