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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화

박정후와 소지율이 백마 라운지에 도착했을 때 일찍 온 여러 명의 예쁜 재벌 집 아가씨들은 이미 남자들과 신나게 웃으며 떠들고 있었다.

하지만 박정후가 VIP룸 문을 열고 들어서자 자연스레 풍기는 그 범접할 수 없는 고귀한 아우라에 그들은 알아서 센터 자리를 내어주며 남자들을 떨쳐내고 박정후에게 달라붙기 시작했다.

“어머, 다들 대표님이랑 지율 씨만 기다리고 있었어요!”

소지율과 함께 팔짱을 끼고 들어온 박정후는 자리를 비켜주는 여자들이 아니라 테이블 위에 진열된 명품 백에 먼저 시선이 갔다.

그런데 입술을 말아 물고 그 명품 백들을 찬찬히 들여다보던 박정후의 표정이 점점 굳어져 갔다.

“정후 씨, 어때? 예쁘지? 직원이 그러는데 다 정품에다 한정판이래. 근데도 20%나 할인한대. 돈이 많이 급한가 봐.”

소지율이 아무 가방이나 들어 열어보자 안에는 구매한 날짜가 적혀있는 인보이스가 들어있었다.

깔끔하게 적혀있는 익숙한 글자들을 본 박정후는 코웃음을 쳤다.

돈이 급하긴 했나 보네.

그때 룸의 문이 다시 한번 열리더니 신가람이 사과를 하며 안으로 걸어들어왔다.

“죄송해요, 전화 좀 받고 왔어요.”

핸드폰을 집어넣던 신가람은 갑자기 쥐 죽은 듯 조용해진 주위에 의아함을 느껴 고개를 들어봤는데 제 눈앞에 서 있는 의외의 인물에 웃던 얼굴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온몸에 소름이 쫙 끼쳤고 마치 누가 머리 위로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몸이 떨려왔다.

신가람은 누구 하나 잡아먹을 듯이 이글거리는 박정후의 눈을 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대표님이 왜 여기에... 계시는 거예요?”

“이 정도로 돈이 급한 거야?”

차가운 음성이 귀에 내리꽂히자 이명까지 들리는 듯해 신가람은 서둘러 해명 아닌 해명을 하기 시작했다.

“아니요, 그건 아니고... 가지고 있어도 저는 안 메니까 그럴 거면 그냥 필요한 사람들한테 주고 싶어서요.”

신가람의 말을 들은 박정후는 입은 웃고 있었지만 눈빛은 너무나도 날카로워 신가람은 마치 살을 에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때 소지율이 가방 하나를 들고 흔들며 물었다.

“누가 이렇게 여유로운가 했더니 가람 씨였네요? 가람 씨가 이렇게 좋은 것들을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누가 사준 거예요? 남자친구?”

소지율의 말에 신가람은 눈을 내리깐 채 손가락을 괴롭히며 말했다.

“예전에 갖고 있던 것들인데 잘 안 메는 거예요.”

신가람의 말에 박정후는 손가락으로 무릎을 톡톡 치고 있었다.

그건 박정후가 화났을 때 자주 하는 행동이었다.

룸에 있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박정후의 눈치를 보며 말을 못 하고 있었기에 고요한 룸 안에는 소지율이 가방 체인을 흔드는 소리뿐이었다.

그에 신가람은 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소지율에게로 다가가 가방을 받아들려 했다.

“죄송한데 못 팔 것 같아요. 마음이 바뀌었어요.”

급히 걸음을 옮기던 신가람은 튀어나온 발 하나를 못 보고 걸려 넘어진 탓에 박정후의 다리 쪽으로 넘어지며 테이블에 이마까지 찧었다.

“어머, 괜찮아요?”

빨개진 신가람의 이마를 본 소지율은 걱정하는 척 물었다.

그에 신가람은 괜찮다고 했지만 박정후의 시선이 제 몸에 닿았다 떨어지자 온몸이 굳어버려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미 분위기가 이상해진 이곳에 계속 있다가는 어떤 모욕을 당하게 될지 몰라 신가람은 빨리 자리를 뜨고 싶었다.

“아, 이거 안 판다고 그랬죠 방금?”

“네, 그냥 소장용으로 보고 있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서요.”

대충 묻는 소지율의 말에 대답을 해준 신가람은 가방들을 다시 캐리어에 집어넣었다.

박정후 앞에서 이런 꼴을 보이기는 싫었던 신가람이 어느 때보다도 빨리 정리를 마쳤지만 박정후는 그녀를 가소롭다는 듯이 쳐다봤다.

“뭘 또 괜찮은 척이야. 돈이 필요하면 이왕 꺼내온 김에 좀 더 솔직해져 보지 그래? 그럼 나도 널 다시 봤을 텐데.”

조롱 섞인 박정후의 말에 신가람은 입술을 깨물며 속으로만 당신이 다시 봐주는 것 따윈 필요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4천만 원 더 줄게요. 누구나 힘든 시기가 있는 법이잖아요. 그냥 나랑 정후 씨가 도와줄게요.”

신가람을 치욕스럽게 만들 절호의 기회를 놓칠 리가 없는 소지율이 새침하게 말했다.

1억 4천만 원에 내놓은 가방들인데 거기에 4천만 원까지 더하면 신가람은 절대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었다.

그때 박정후가 코웃음을 치며 소파에 기대앉은 채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전형적인 상류층 사람다운 고고한 태도로 말했다.

“돈 급한 거 아니었어? 2억 줄 테니까 이거 다 나한테 팔아.”

이런 말이 박정후의 입에서 나온 건 꽤나 의외였기에 룸에 같이 있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놀라운 표정들을 지었다.

그에 신가람도 자신이 박정후의 심기를 제대로 건드렸다는 걸 알아채고는 어차피 죽는 마당에 돈이라도 건져보자는 심정으로 직장생활을 하면서 디폴트가 되어버린 자본주의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대표님께서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저도 거절하는 건 예의가 아니겠죠.”

“단, 조건이 있어.”

박정후가 담담하게 대꾸하자 소지율이 그의 팔을 껴안으며 아양을 부려댔다.

“정후 씨, 신 비서님 힘들게 하지 마. 어머님이 병원에 있는데 집안 사정도 안 좋아서 힘든 것 같아.”

소지율의 말에 마음이 아릿해진 신가람이었지만 돈이 필요한 건 사실이었기에 이를 악물며 대답했다.

“말씀하세요.”

초침이 움직이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고요한 룸 안에서 모두들 숨을 죽이고 박정후의 얼굴만 주시하고 있었다.

10분 뒤, 저마다 와인과 고량주를 든 직원들이 일렬로 룸 안에 들어섰다.

박정후는 그들을 보며 담담히 말했다.

“저 사람들이 든 거 다 마시면 2억 줄게.”

술이 많지는 않았지만 와인과 고량주가 섞여 있어 다 마시고 나면 몸을 제대로 가눌 수도 없을 게 뻔했기에 기분이 좋아진 소지율은 좋은 구경거리를 볼 생각에 들떠있었다.

신가람은 원래는 주량이 별로였지만 신 씨 집안이 파산한 뒤로 직장생활을 하며 어쩔 수 없이 술을 마시느라 지금은 꽤 많이 늘어있었다.

그리고 술버릇도 딱히 없는 편이라 취해서 이상한 짓을 할 걱정도 없었기에 신가람은 숨을 한 번 크게 내쉬고 나서 직원들 앞으로 걸어가더니 한잔 한잔 그들 손에 들린 술을 마셔 넘기기 시작했다.

몇 번의 반복되는 동작 끝에 술잔을 모두 비워낸 신가람은 뒤돌아서 박정후를 보며 말했다.

“대표님, 지율 씨. 술 다 마셨으니까 돈은 제 계좌로 보내주세요. 그럼 더 이상 두 분 방해 안되게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하지만 곧바로 술기운이 올라온 신가람은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었는데 속까지 쓰려와서 휘청거리며 화장실로 들어가 구토를 하기 시작했다.

박정후는 신가람이 술을 마실 때부터 그녀가 나가기까지 줄곧 굳은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사실 그가 이 가방들을 사들인 건 다른 데서 몰래 팔지 말고 그냥 쓰라는 의미에서였다.

그래서 박정후는 조민형에게 그 가방들을 따로 넣어두라고 지시했다.

“나 주려고?”

“중고는 너한테 안 어울리지. 나중에 신상으로 사줄게.”

소지율도 당연히 가방을 원해서가 아니라 그냥 신가람을 망신 주고 싶었던 것이기에 박정후의 말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오늘 정후 씨 집에서 자도 돼?”

한편 오늘을 위해 섹시한 속옷들을 준비한 소지율은 들뜬 마음으로 박정후를 향해 물었지만 지금 박정후의 신경은 온통 화장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가 있었다.

그 소리를 들을수록 표정이 어두워지던 박정후는 소지율에게 맞춰줄 여유가 없어서 대충 둘러대며 그녀를 데리고 라운지를 빠져나왔다.

“집엔 조 비서가 데려다줄 거야.”

항상 준비는 다 되어있는데 기회가 없어서 문제였던 소지율은 오늘도 누구 들으라는 듯이 일부러 저렇게 큰 소리로 토하는 신가람 때문에 일을 그르쳐버려 좋았던 기분이 바로 가라앉았다.

그 시각 한참이나 토하던 신가람은 조금 편해진 속에 고개를 들고 핸드폰을 켜보았다.

9시에 박정후의 별장으로 가기로 했는데 지금 시간을 벌써 8시였다.

밖으로 나와보니 사람들은 이미 다 가고 없었고 아주머니만이 청소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신가람도 휘청이는 몸을 이끌고 최대한 빠르게 방을 빠져나와 택시를 잡아탔다.

차에 탄 신가람은 바람이라도 맞으면 술이 깰까 싶어 창문을 내렸는데 그때 기사 아저씨가 백미러로 신가람을 보며 한마디 했다.

“아가씨, 술 마시고 바람 쐬면 입 돌아가.”

장난스러운 말이었지만 괜히 걱정된 신가람은 바로 창문을 올려버리고는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별장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때 마침 샤워를 마친 박정후가 덜 말려진 머리를 한 채 욕실에서 걸어 나오고 있었다.

가운을 입고 있긴 했지만 그 안으로 보이는 탄탄한 근육들에 시선을 뺏긴 신가람은 자연스레 박정후의 치골, 그리고 그 아래에까지 시선이 닿아버렸다.

그러던 신가람은 아까의 일이 떠올랐는지 바로 눈을 피하며 말했다.

“씻, 씻고 올게요.”

“취한 애랑 하는 건 별론데.”

“다 깼어요.”

옷에서 나던 술 냄새는 조금 가라앉았지만 말하다가 올라온 트림 때문에 입안에는 아직도 알코올 향이 가득했다.

“숙취해소제나 먹고 말해.”

신가람도 입안에 맴도는 술 냄새를 느꼈기에 두말하지 않고 방으로 들어가 마침 남아있던 숙취해소제를 마시고 다시 박정후를 찾아갔다.

“대표님, 오늘 일 해명할 수 있어요. 진짜 팔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라... 요즘 동네에 도둑이 든다는 소리가 들려서 잃어버릴까 봐 그랬어요.”

박정후는 조롱하듯 웃으며 신가람의 턱을 자신의 손가락으로 들어 올렸다.

“너를 멍청하다고 해야 할지 똑똑하다고 해야 할지. 내가 주는 걸로는 부족했어? 그래서 더 필요했던 거야?”

박정후의 손가락은 신가람의 목선을 타고 가슴까지 내려와 그곳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이렇게 겁이 많으면서 왜 자꾸 잔머리를 굴려.”

다급히 변명을 하는 신가람의 입술을 보니 오늘은 키스하고 싶은 생각도 없어지는 박정후였다.

신가람은 박정후의 기에 눌려 나지막하게 말했다.

“돈은... 안 주셔도 돼요.”

그에 박정후는 실소를 터뜨리며 물었다.

“주면 받을 수는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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