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빨리 죽고 싶지는 않았던 신가람은 당연히 박정후가 그 돈을 준다 해도 받을 엄두가 없었다.신가람은 서둘러 샤워를 마치고 나서 양치까지 깨끗이 한 뒤에 박정후를 찾아갔지만 박정후는 여전히 화가 난 것인지 신가람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있었다.방 밖에서 한참을 기다리던 신가람은 결국 열쇠를 찾아 알아서 문을 열고 들어갔다.신가람은 늘 그래왔듯 박정후가 누워있는 침대에 올라가 손으로 그의 얼굴을 매만졌다.일정한 호흡을 내뱉고 있던 박정후는 이미 신가람이 하도 만진 탓에 얼굴이 빨개져 있었다.박정후는 갑자기 몸을 돌려 신가람을 제 품 안에 가두더니 손가락으로 그녀의 혀를 쓸어내렸다.축축하고 뜨거운 그것을 만지작거리며 박정후가 나무라듯 말했다.“이 입으로는 거짓말밖에 할 줄 몰라?”신가람은 저릿해 나는 혀에 대답을 하지 못했지만 박정후가 대신해서 답을 해주었다.“아니면 내가 준 게 부족해서 그런가? 좀 더 많이 먹어보면 고분고분해지나?”곧바로 신가람의 입안에는 손가락이 아닌 다른 것이 들어왔다.아까와는 차원이 다른 크기에 금세 힘들어진 신가람은 또다시 술기운이 올라오는지 속이 쓰려와서 배를 부여잡고 애원했다.“토할 것 같아요... 화장실 한 번만 다녀오면 안 돼요?”그 말에 표정이 굳어버린 채 신가람의 등을 응시하던 박정후는 그녀의 목덜미에 빨간 자국을 남겨놓고는 거칠게 입을 뗐다.신가람은 신발을 신을 겨를도 없이 그길로 뛰쳐나가서는 10분이 지나서야 다시 깨끗이 씻고 화장실 밖으로 나왔다.“나가.”“계속할 수 있어요.”창백해진 얼굴에 땀방울을 매달고 말하는 신가람이었지만 물기가 가득한 눈에 자기주장 뚜렷한 이목구비는 여전히 예뻐서 지금 이 순간조차도 박정후를 유혹하고 있었다.“신씨 집안 아가씨가 이 정도로 밝히는지는 몰랐는데, 내가 널 너무 만만하게 봤던 것 같아. 그깟 돈 때문에 몸도 팔더니 이젠 자존심도 필요 없다 이거야?”박정후의 말에 정곡이 찔린 신가람은 무슨 생각에서인지 다시 침대에 누워서 두 팔과 다리를 벌리고 말했다.
[쓸데없는 말 하지 말고 빨리 보내기나 해.]문자를 다 보낸 박정후는 핸드폰을 책상 위로 던져버리고 한숨을 쉬더니 그제야 휴게실로 향했다.그러자 침대에 누워 하얀 다리를 드러내며 유혹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는 소지율이 보였다.“정후 씨, 나 좀 졸려서 그러는데 여기서 자도 돼?”풀린 눈으로 빨간 입술을 오물거리는 소지율은 보면서도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던 박정후는 그저 웃으며 말했다.“응, 일어나면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응.”침대에 누워 베개를 끌어안던 소지율은 그 위에서 느껴지는 박정후의 향기에 미소를 짓다가도 신가람도 여기에 누웠을 생각을 하니 다시 화가 치밀어오르며 당장이라도 침대를 내다 버리고 싶었다.그래도 박정후가 신가람을 도구로만 여기니 소지율은 자신이 참아주기로 했다.한편 사무실로 돌아온 신가람은 갑자기 사라져버린 서류에 깜짝 놀라며 조민형에게 CCTV를 돌려달라고 부탁했다.하지만 이방에 들어왔다 간 사람들은 기획팀의 하지영, 마케팅팀 팀장, 그리고 소지율뿐이었다.CCTV에 찍힌 걸 보면 이방에 들어왔다간 사람은 세 명뿐이었는데 하지영과는 개인적으로 사이가 나쁘긴 했지만 이 서류들을 몰래 가져가는 게 그녀한테 큰 의미가 있진 않았다.범인을 찾지 못한 신가람이 미간을 찌푸리고 있을 때 대표실에서 호출이 걸려왔다.“신 비서, 들어와.”박정후의 목소리를 들은 신가람은 누군가 자신에게 누명의 씌웠을 것만 같은 불안함에 천천히 대표실로 들어갔다.역시나 그 안에는 표정을 굳힌 박정후가 앉아있었다.“이 서류가 왜 인터넷에 떠도는 거지?”그에 어리둥절해진 신가람이 놀라고 있을 때 사무실의 전화기로 하나둘 울리기 시작했다.핸드폰을 켜보니 마케팅팀, 기획팀에서 다들 신가람에게 인터넷에 떠도는 서류에 대해 묻고 있었다.여러 계정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빠르게 서류의 스캔본을 “천하 그룹 내부 계약서”라는 제목과 함께 전파하고 있었다.계약서를 유출은 회사의 금지조항이기도 했고 회사 명성에 영향을 주는 건 물론 심하면 주가까지 폭락할
소지율은 허리를 배배 꼬며 박정후 앞까지 걸어가서는 손으로 어깨를 쓸어내리며 말했다.“그럼 나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지 말고 빨리 와야 해.”박정후는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기사를 불러 소지율을 데려다주게 했다.밖으로 나가면서까지 조롱하는 듯한 눈빛을 보내는 소지율에 신가람도 이번 일이 그녀와 연관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직 증거가 없으니 일단은 혼자 책임져야 했다.“주 씨 집안은 전 혼처 아니었나.”하지만 박정후는 신가람이 무엇 때문에 초조한지 바로 눈치채고 물었다.“이미 헤어진 지 오래예요. 지금 바로 다녀올게요.”말을 마친 신가람은 어차피 처리해야 할 일 빨리하는 편이 나으니 바로 사무실을 빠져나갔고 박정후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그 뒷모습을 주시하고 있었다.부원그룹에 도착한 신가람이 프로젝트 담당자를 찾아가 봤지만 그쪽에서도 난감해하며 말했다.“사모님, 이 일은 저희가 아니라 시즌즈 호텔에 가서 주 회장님하고 직접 얘기하셔야 할 것 같아요.”신가람은 바로 호텔 로비에 가서 물어봤지만 직원은 기다려야만 한다고 답했다.“오늘 부원그룹 임원분들이 이곳에서 행사를 하시는 건 맞지만 비공개라서 밖에서 대기하셔야 합니다.”그 말에 신가람은 밖에서 기약 없이 기다리고 있었고 밤이 어둑어둑해질 때가 돼서야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는 게 들렸다.김현정과 강정애를 포함한 재벌 집 사모님들이 주얼리를 가득 두르고 걸어 나오고 있었다.그때 신가람을 본 김현정이 다른 사람들을 보며 그녀를 조롱하기 시작했다.“이 아가씨가 그때 우리 집에 시집오겠다고 아주 난리를 쳤다니까요. 다행히 강인이가 출국하는 바람에 헤어지게 됐죠. 지금은 여자친구도 사귀고 잘 지내요. 그때 안 그랬으면 저 거지 같은 게 우리 아들한테 붙어서 거머리처럼 안 떨어졌을 거라니까요.”그에 강정애가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그 망했다던 신풍 그룹 딸이죠? 나도 들은 적 있긴 한데 여기까지 찾아오고, 어린 게 부끄러움도 없나 봐요.”그 비아냥들을 들으면서도 신
하지만 이제 주강인한테는 아무런 감정도 들지 않았던 신가람은 담담히 대꾸했다.“걱정 마세요, 앞으로 만약에라도 강인 씨 보게 되면 최대한 돌아서 다니겠습니다. 저도 더 이상은 엮이고 싶지 않거든요.”신가람의 확답을 들은 김현정은 만족스러운 듯 웃으며 말했다.“네가 한 말 똑똑히 기억해. 안 그러면 제대로 망신당하게 해줄 테니까.”소란스러웠던 일들이 모두 해결되고 신가람만이 바람을 맞으며 그 자리에 서 있었다.그때 갑자기 걸려오는 전화에 핸드폰을 본 그녀는 화면에 떠 있는 해외번호에 심장이 빨리 뛰었고 호흡이 가빠져왔다.그런데 신가람이 전화를 받으려고 핸드폰을 들어 올릴 때 그 뒤로 다가온 누군가가 핸드폰을 낚아채 갔다.제 위로 드리워진 검은 그림자에 고개를 돌려보니 굳은 표정을 한 채로 서 있는 박정후가 보였다.그는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지만 그쪽에서는 계속 다시 걸고 있었다.“핸드폰 줘요.”신가람이 핸드폰을 다시 잡으려 하자 박정후는 자신의 큰 키를 이용해 손을 높게 들며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신경 쓰였는지 비서를 향해 말했다.“차 가져와.”“알아서 갈 거예요.”살짝 화가 나 있었던 신가람은 그동안 익숙해졌었던 가식적인 말들을 잊어버리고 순간 본인의 원래 성격대로 답했다.“대표님이 안 데려다주셔도 돼요.”그에 박정후는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넘겨짚지마, 지금 네 꼴을 봐봐. 다른 사람이 네가 천하 그룹 직원이라는 걸 알게 되기라도 하면 내 체면이 구겨지잖아.”그제야 신가람은 물에 젖은 옷이 몸에 달라붙어 드러낸 큰 곡선을 보며 서둘러 손을 들어 가슴을 가렸다.그러면서 드러난 상처에 자연스레 눈길이 간 박정후가 말했다.“부원그룹 담당자 만나고 오라니까 왜 여기서 저 아줌마 비위나 맞춰주고 있어?”“진작 오셨나 보네요? 그럼 제가 사모님 귀걸이 찾는 것도 다 보셨겠네요. 그렇게라도 하지 않았으면 주씨 집안 대문도 못 넘었을 거예요.”“지금도 못 넘는 건 마찬가지잖아.”신가람은 항상 이렇게 정곡을 찔러대는 박정후를 흘기면서도
립스틱, 쿠션 그리고 잡다한 물건들 사이로 반짝이는 무언가가 눈에 띄었다.신가람의 손이 박정후보다는 빠르지 못했기에 그녀가 아차 싶었을 때 반지는 이미 박정후의 발아래에 가 있었다.“주워.”차가운 목소리에 차 안의 공기까지 서늘해지자 조민형은 괜히 운전대를 더 세게 잡았다.찬물을 뒤집어썼을 때도 괜찮았던 신가람의 얼굴은 순식간에 창백해졌다.박정후가 밟고 있는 그 반지는 그냥 엄마의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 꺼내 들었던 건데 보여주고 나서 집에 둔다는 걸 깜빡해서 가방에 있었던 것이다.“아무것도 아니에요...”“신가람, 내 인내심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알아보고 싶은 거야?”신가람을 노려보던 박정후가 발을 치우자 그녀는 할 수 없이 허리를 굽혀 반지를 주워서 박정후에게 건넸다.“얼마 전에 산 액세서리에요.”“나도 눈은 멀쩡해. 이게 뭔지 내가 정말 모를 것 같아?”차 안에 그나마 켜져 있는 불빛 덕분에 반지 내부에 새겨진 강, 람이라는 두 글자는 너무나도 선명하게 보였다.누가 봐도 커플 반지인데 그걸 둘러대는 신가람에 박정후의 표정은 더욱더 굳어버렸다.“신 비서가 이 정도로 순정파인 줄은 몰랐네. 3년이나 지났는데 이 반지를 아직도 가지고 있었어?”말을 마친 박정후가 손가락을 튕겨내니 반지는 다시 바닥으로 떨어졌다.사실 그 반지는 그저 옛날의 실수를 상기시키는 용도로 간직하고 있었던 것인데 박정후에게도 들켰고 어차피 더는 필요 없기도 했기에 신가람은 반지를 다시 주워 매만지다가 창밖으로 던져버렸다.“그렇게 아쉬우면 남겨두지 그랬어. 누가 보면 강요한 줄 알잖아.”오늘따라 박정후는 유독 말에 감정을 실어 얘기하고 있었다.그래서 신가람도 자꾸만 말문이 막혀왔지만 그와 부딪쳐봐야 좋을 게 없었기에 고분고분하게 해명을 하기 시작했다.“강요해서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엄마가 왜 반지 안 끼냐고 걱정하시니까 보여드린 것뿐이에요.”“그래? 그럼 네가 원해서 버렸다는 걸 증명해봐.”달리는 차 안에서 입술을 살짝 깨물던 신가람은 손을 아래로 내
박정후는 신가람을 안아서 침대에 눕히고는 아예 그녀의 속옷까지 벗겨냈다.“그만... 이제 그만 가요.”눈이 부시게 비춰대는 불빛들 때문에 적나라하게 보일 그곳에 부끄러워진 신가람이 다리를 움직이며 말했다.“괜찮아요, 남자친구 있으면 긴장도 풀리고 좋죠.”하지만 의사는 신가람의 마음도 모르고 아무렇게나 말하며 그녀를 도마 위에 올려진 생선처럼 뒤집으며 샅샅이 살펴봤다.한참 동안 보던 의사는 박정후를 보며 직설적으로 말했다.“남자친구가 돼서 여자친구가 아파하면 좀 조절을 했어야죠. 이렇게 거칠게 대하면 어떡해요? 지금 여자친구분 상태가 어떤지는 알아요?”의사의 말에 전에 있었던 일이 떠오른 신가람은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혔지만 이내 두려움이 몰려왔다.그때는 출혈이 조금 생긴 게 전부라 피만 빼고 나왔는데 이번에는 상황이 심각해졌을까 봐 걱정되었다.“CT 찍어야 할까요? 황체낭종파열일 수도 있다던데...”박정후의 말이 끝나자 진료실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고요한 침묵 속에서 의아하다는 듯 박정후를 응시하던 의사가 헛웃음을 흘리며 말했다.“그걸 아는 사람이 이렇게 힘을 쓴 거예요? 여자친구가 이렇게 아파하는 걸 꼭 보고 싶었어요? 여자 몸이 아주 약한 존재예요. 그러니까 아껴주셔야 한다고요. 앞으로는 조심 좀 하세요.”“네.”의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박정후를 보고 있던 신가람은 몰려오는 수치심에 그냥 이 자리에서 혀를 깨물고 죽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그럼 적어도 저런 얘기를 당사자 앞에 두고 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의사의 권유에 CT까지 다 찍어봤지만 다행히 황체에는 문제가 없고 그저 생리 올 때가 되어서 반응이 격해진 것뿐이라는 진단 결과 신가람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의사에게서 염증을 없애는데 좋은 연고와 열이 조금 있는 탓에 해열제를 함께 받은 신가람은 박정후의 겉옷을 걸치고 병원을 빠져나왔다.깔끔한 정장 차림에 긴 다리를 휘적이며 걷는 박정후는 한눈에 봐도 귀티가 철철 흐르는 외모 탓에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까지 풍겨내고
“강인이가 애쓰네.”부드럽게 웃던 이정미는 얼굴이 빨개진 신가람에게로 눈길을 돌리며 물었다.“근데 가람이는 왜 그래?”아까 들어올 때도 안겨있더니 혹시 어디 다친 건 아닌가 싶어 걱정스레 묻는 이정미에 신가람이 해명하려고 했지만 박정후가 그보다 더 빨리 답했다.하지만 이유가 좀 급조한 느낌이 다분했다.“길 가다가 실수로 벽에 부딪혔어요.”“네, 앞을 잘 못 봐서...”이렇게 유머러스한 면이 있는지는 몰랐는데 박정후의 그 유머에 맞춰야 하는 신가람은 괴롭기만 했다.이정미는 덤벙대는 딸을 나무라면서도 자상한 남편이 있다는 사실에 기뻐하며 또 2세 얘기를 꺼내기 시작했다.“너희들도 이젠 어린 나이는 아니잖아. 몇 년만 더 있으면 가람이도 서른인데, 그때 가서 애 낳으면 위험하기도 하고. 아이는 아직 생각 없는 거야?”“엄마, 나 아직 스물다섯이에요.”“스물다섯이면 어리진 않지, 엄마는 스물다섯일 때 너는 집안일도 돕고 그랬었어.”이정미는 신가람을 끌어당기며 나지막이 말했다.“남자도 서른 넘으면 정자 질량이 안 좋아진대. 지금이 적기니까 빨리 애부터 낳아, 그래야 엄마도 살아있을 때 손자 안아보지.”“그런 말 하지 말라니까.”또 죽는다는 소리를 하는 이정미에 코끝이 찡해진 신가람이 투덜대자 이정미는 그녀의 손을 토닥이며 말했다.“알겠어, 안 할게.”엄마와 얘기할 때는 한없이 고분고분한 신가람에 박정후는 얌전한 고양이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그녀를 한동안 바라보다가 이내 이정미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사위”로서의 본분을 다했다.신가람은 천하 그룹 대표로서 카리스마 있게 일만 잘하는 줄 알았더니 이럴 때는 또 한없이 싹싹해지는 박정후를 신기하게 쳐다보고 있었는데 때마침 고개를 돌리는 박정후와 눈이 마주쳐버렸다.“참... 얘기도 잘하시네요.”“그래?”“한 집안사람끼리 뭘 그렇게 존대를 해? 너무 바빠서 다 까먹은 거 아니야?”둘 사이에 대해서 정확히는 모르는 이정미가 웃으며 말하자 신가람도 들킬까 봐 대충 둘러대며 말을 맞췄
자신은 인형이 아니라 사람인데, 밭도 지나치게 개간을 하면 상하는 법인데 자신한테만 멀쩡하길 강요하는 박정후가 매정해 보였지만 신가람은 이번에도 웃으며 말했다.“네, 다음엔 조심할게요.”그때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조민형이 머뭇거리며 박정후에게로 다가왔다.“구 박사님께서 집에서 기다리고 계신답니다.”둘이 관계를 하고 난 날에도 새벽에 눈을 떠보면 항상 창가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던 박정후를 봐왔기에 신가람은 그가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질병이 있는 건가 의심도 해봤지만 침대 위에서 힘을 쓰는 걸 보면 딱히 병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저는 알아서 갈게요.”아무튼 따로 볼일이 있어 보이는 박정후에 신가람은 그의 외투를 조민형에게 건네주며 말했지만 박정후는 돌아서는 그녀의 손목을 잡으며 말했다.“타.”“저 진짜 괜찮아요.”“같은 말 계속 반복하게 할래? 내가 말한 만큼 네가 갚아야 해 좀있다.”조민형은 이런 일이 익숙한지 아무렇지도 않게 차 문을 열었고 그 말에 앞으로 걸어갈 엄두가 사라져버린 신가람은 말없이 차에 탔다.그런데 차에 타자마자 박정후가 가방에서 연고를 꺼내어 신가람에게 던져주었다.“네가 직접 발라.”여기서 연고를 주며 말하는 박정후에 신가람은 얼굴이 창백해진 채 대꾸했다.“나중에 집에 가서 바를게요.”“네가 무슨 생각하는지 다 보이거든, 이걸 핑계 삼아 빠져나갈 생각 중인 것 같은데 그런 마음은 일찍 접는 게 나을 거야.”사업을 하면서 만나온 사람들이 많아서인지 박정후는 늘 이렇게 사람 마음을 잘 들여다보곤 했다.신가람도 사실 상처만 천천히 아물면 그에게서 며칠은 해방될 수 있을 것 같아 일부러 연고를 바르지 않으려 했었는데 그 희망 또한 무참히 짓밟아버리는 상대방에 할 수 없이 한숨을 한번 내쉬고는 치마를 올리고 장갑을 낀 손으로 연고를 펴 발랐다.차가운 연고가 피부에 닿으니 열기가 내려가면서 통증도 조금 가시는 것 같았다.박정후는 눈을 돌리지 않고 신가람의 행동을 하나하나 지켜보고 있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