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후는 아직 눈이 채 회복하지 못해서 아침 일찍 병원에 갔을 테니 이건 절대 그일 리가 없다.고개를 든 그녀는 익숙한 눈빛과 마주했고 이마에 난 상처까지 발견하곤 움찔 놀랐다.“저희 대표님은 오후에 나오실 겁니다. 용건 있으시면 제가 대신 전달해드릴게요.”한편 주강인은 그녀의 책상 위에 딸기우유와 슈크림빵을 내려놓았다.“너 이 브랜드 제일 좋아하잖아. 아까 올 때 편의점 들러서 샀어.”“주 대표님, 이건 무슨 뜻이죠?”그녀가 미간을 구겼다.앞으로 서로 방해하지 말고 각자 갈 길을 가자고 분명 약속했으면서 왜 또 이러는 걸까?주강인은 부드러운 눈길로 그녀를 바라봤다.“네가 안 믿는 거 알지만 그래도 말해야겠어. 3년 전에 난 일부러 널 떠난 게 아니야. 이 모든 게 오해라고. 하지만 네가 가장 도움이 필요할 때 옆에 없었던 건 내 잘못이야. 평생 갚으면서 살게.”신가람은 그가 보는 앞에서 빵과 우유를 휴지통에 버렸다.“대표님, 우린 이미 끝났어요.”“넌 끝났겠지만 나한텐 이제 곧 시작이야.”그는 마치 말귀를 못 알아듣는 것만 같았다.“널 향한 내 마음이 단 한순간도 변한적 없다는 걸 꼭 증명해줄 거야.”‘내가 왜 우유를 휴지통에 버렸지? 그냥 확 저 얼굴에 퍼붓는 건데...’그날 오후 회사에 돌아온 박정후는 소문으로 떠도는 얘기를 듣더니 표정이 확 굳어졌다.그가 강압적인 포스를 내뿜자 지나가는 곳마다 싸늘한 정적이 흘렀다.신가람도 감히 그를 건드리지 않았다. 괜히 불편하게 만들었다가 나중에 벌 받는 건 본인일 테니까.제시간에 맞춰 퇴근하려고 했지만 전형적인 자본가인 박정후가 쉽게 그녀를 보내줄 리가 없었다.퇴근 무렵, 내선으로 전화를 걸었지만 그녀는 못 들은 척 가방을 챙기고 병원에 가려고 했다.이때 휴대폰도 덩달아 울렸는데 박정후가 아니라 주선희한테서 걸려온 전화였다.어떤 낯선 남자가 줄곧 병실 밖에 머무르며 신씨 일가의 옛 지인이라고 하면서 심지어 입원비용으로 1억 원까지 넣어줬다고 한다.신가람은 곧바로 주강인인 걸
가랑비가 부슬부슬 내리며 빗소리가 끊이지 않았다.빗속에서 리드미컬하게 움직이는 차체가 어렴풋이 보였고, 안개가 낀 유리에 가느다란 손가락 자국 너머로 또렷한 윤곽이 나타났다.온몸으로 뜨거운 열기를 내뿜는 한 쌍의 남녀가 비 오는 밤의 고요함을 깨뜨렸다.남자의 눈은 벌겋게 달아올랐고, 그윽한 눈빛으로 품에 안긴 사랑스러운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지배자로서 모든 것을 컨트롤해야만 했다.하지만 지금은 등에 여자의 손톱자국이 남아 있더라도 대수롭지 않았다.한참이 지나고 영원할 것 같던 후끈한 열기가 서서히 식어가더니 남자는 일말의 미련도 없이 일어섰다.“오늘부로 우리 관계는 여기서 끝이야.”목소리에 담긴 욕구가 어느새 싹 사라지고 평소처럼 싸늘하게 돌아왔다.신가람은 흠칫 놀라며 멍하니 바라보았다.“그게 무슨 뜻이죠?”박정후가 늘씬한 손가락으로 셔츠 단추를 채웠고, 이내 격정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던 가슴이 가려졌다.“소지율이 돌아왔어.”그는 옷을 입고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이만 가 봐.”싫증이 나면 헌신짝처럼 버리는 건 박정후의 성격다운 행동이다.차 문이 열리자 비서 조민형이 서둘러 우산을 들고 뛰어왔다.“같이 약 사러 가 줘.”박정후는 말을 이어갔다.“그리고 먹는 것까지 확인해.”신가람의 심장이 따끔거렸다. 어쨌거나 3년 동안 이어온 관계로서 사적인 감정이 전혀 없다는 건 말이 안 되었다.다만 떳떳하지 못한 사이인 만큼 그녀에게 임신할 여지를 절대로 내어줄 남자가 아니었다.“대표님, 걱정하지 마세요. 지난달에 피임 주사를 맞았는데 유효 기간이 3개월이에요. 그나저나 확인하고 싶은 일이 있어요. 이제 관계를 끊고 싶다고 했으니 회사에도 사직서를 제출해야 할까요?”3년 전, 신풍그룹은 부도가 났다.신가람의 아버지는 교통사고로 사망하면서 골치 아픈 일거리를 남겼고, 수백 명의 임금도 체납하게 되었다. 결국 직원들은 매일같이 집 앞에 찾아와 돈을 내놓으라고 시위까지 했다.게다가 빚 독촉 전화도 끊이지 않았다.그중에서 가
당시 그는 책상에 눕히고 두 다리로 자기 허리를 휘감게 했다.그리고 거리낌 없이 욕구를 풀었고, 누군가 사무실에 찾아오든 말든 안중에 없었다. 마치 지금처럼...신가람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만약 그녀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더욱 진한 스킨십으로 발전할지도 모른다.결국 들어가야 할지 말지 몰라서 망설이기 시작했다.이때, 소지율이 투정을 부렸다.“정후 씨, 하지 마. 가람 씨가 밖에 있어.”박정후는 눈살을 찌푸리며 뒤돌아서 신가람을 바라보았다.“거기 서서 뭐 해?”“내가 가람 씨한테 커피 한 잔 내려달라고 부탁했어. 비행기에서 내렸더니 커피가 당겨서...”이내 남자의 품에 살포시 기대었고, 예쁘장한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몸도 안 좋은데 자극적인 거 마시면 어떡해?”박정후는 그녀를 부축해서 앉히고 무릎에 담요를 덮어주었다.그러고 나서 싸늘한 시선은 신가람을 향했다.“앞으로 지율한테 자극적인 음식 가져다주지 마.”소지율이 어렸을 때 심장병이 있어서 몸이 약하다는 소문은 익히 전해 들었고, 외국에서 수술받고 몇 년 동안 요양했다고 하지만 커피마저 못 마실 줄은 몰랐다.“죄송합니다. 다음부터 조심할게요.”소지율이 남자의 손을 끌어당겼다.“정후 씨, 의사 선생님이 결혼하고 아이 낳아도 될 만큼 건강하다고 하니까 일일이 신경 안 써도 돼.”그녀가 이번에 귀국한 목적이 바로 박정후와 결혼하고 아이까지 낳아주는 것이다.박정후는 소지율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더니 굳은 얼굴로 신가람에게 커피를 가져다 달라고 했다.이내 소지율에게 건네는 순간, 상대방이 제대로 못 잡은 건지 몰라도 커피잔이 기울어지면서 뜨거운 액체가 몇 방울 튀었다.소지율은 비명을 지르더니 손으로 커피잔을 건드렸다. 결국 옆으로 엎어진 잔에서 70도에 육박하는 커피가 흘러내려 신가람의 다리를 적셨다.바지를 사이에 두고도 화끈거리는 통증이 고스란히 전해졌다.갑작스럽게 연출된 여우짓 때문에 신가람은 넋을 잃고 말았다. 이내 소지율을 바라보며 서둘러 사과했다.“지율 씨, 죄
매장에 도착하니 점장이 친히 마중 나왔다.I국에서 핸드 메이드로 만든 드레스는 파란색 피시테일 디자인으로 등이 훤히 파였고, 치맛자락에 자잘한 다이아몬드로 장식되어 있다.“소지율 씨, 이 드레스는 장인이 한땀 한땀 바느질했죠. 999개의 다이아몬드는 영생을 뜻하며 박 대표님과 평생 행복하길 바라는 염원이 담겨 있어요.”점장은 부지런히 아첨했고, 한 마디 한 마디가 소지율의 마음에 쏙 들었다.소파에 앉은 박정후는 힐긋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들어가서 피팅 도와주세요.”“정후 씨, 가람 씨도 같이 들어가면 안 될까? 다 모르는 사람이라 좀 뻘쭘하네.”소지율은 생글생글 웃으며 신가람을 바라보았다.“가람 씨, 괜찮죠?”“안 괜찮을 리가 있나? 같이 가.”박정후의 싸늘한 눈빛이 신가람을 향했다.신가람은 잠자코 구석에 서서 최대한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았다.물론 시중을 들어본 적이 없는 건 아니지만... 이내 한숨을 살짝 내쉬더니 여유로운 미소를 장착하고 피팅룸으로 따라갔다.소지율은 한참을 피팅하다가 드레스는 꽤 만족했는데 유독 신발이 튀는 느낌이 들었다.“가람 씨, 이 드레스에 어울릴 만한 힐을 골라 줘요.”당당한 목소리는 마치 당연한 일처럼 느껴졌다.신가람도 딱히 거절하지 않았고, 이내 신발 코너로 가서 은색 하이힐 한 켤레를 챙겨서 그녀의 앞에 내려놓았다.“손이 이 모양이라 신발을 갈아 신을 수 없네요. 미안하지만 좀 도와줄래요?”하지만 말과 달리 이미 발을 내밀고 있었다.“공짜로 시키는 건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나중에 정후 씨랑 잘 얘기해서 월급 올려주라고 할게요.”신가람은 한쪽 무릎을 구부리고 앉아 그녀에게 하이힐을 갈아 신겼다.이때, 소지율이 갑자기 다리를 번쩍 들어 올리는 바람에 구두코가 신가람의 턱을 강타했다.힘이 어찌나 센지 구두에 달린 장식품이 피부를 스쳐 지나가면서 금세 상처가 벌어졌고, 갑작스러운 통증이 밀려와 눈시울이 시큰거리며 무의식중으로 눈물이 흘러내렸다.“이런!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왜 울
신가람은 말문이 막혔다.만약 박정후와 소지율이 약혼하게 된다면 자신한테 쓴 돈은 모두 청구할 가능성이 컸다.그러니 무슨 자격으로 박정후에게 돈을 요구하겠는가?“무슨 일인데 그렇게 뜸 들이죠? 설마 입에 담기도 힘든가요?”날이 잔뜩 선 말은 귀에 거슬릴 지경이다.신가람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퉁퉁 부어 욱신거리는 턱은 조금 전의 일을 상기시켜주었다.“아니에요. 단지 휴가를 내고 싶어서, 대표님이 바쁘신 것 같으니 나중에 사내 어플로 다시 신청할게요.”그리고 말도 없이 전화가 끊겼다....통화를 마치고 뒤돌아서는 순간 박정후가 나타났다.뚜렷한 이목구비와 우수에 찬 눈빛, 훤칠한 몸매는 쳐다보기만 해도 가슴이 설렜다.“누구야?”이내 다가가 휴대폰을 건네받았지만 발신자 번호를 찾지 못했다.소지율은 방금 통화 기록을 삭제해 버렸다.“아니야, 스팸 전화인데 이미 지웠어. 어차피 보면 짜증만 나잖아.”백옥처럼 하얀 손가락이 희롱하듯 남자의 가슴을 스쳐 지나갔고, 은은한 눈빛으로 도톰한 입술을 달싹였다.여자의 유혹을 거부하는 남자는 이 세상에 없을 테니까.박정후는 무심한 얼굴로 그녀의 손을 끌어내렸다.“하이힐은 자주 신지 마. 행여나 넘어져서 다치면 심장병이 재발할지도 몰라.”“그렇게 걱정돼? 그럼 내 기분 달래주는 셈 치고 키스해줘.”이내 빨간 입술을 살짝 내밀며 키스를 요구했다.“장난 그만해. 나 아직 할 일이 많아.”박정후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때마침 소지율의 어머니 강정애가 연락이 와서 운전기사가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다고 했다.박정후는 잽싸게 그녀를 배웅했다.“집에 도착하면 문자 보내. 혹시 불편한 데 있으면 제때 알려주고.”소지율은 활짝 웃으며 까치발을 들어 남자의 볼에 입을 맞추었다.“알겠어. 정후 씨.”그러고 나서 차에 올라타 유유히 떠났다.박정후는 손수건을 찾아 얼굴을 닦고 휴대폰을 힐긋 쳐다보았다. 신가람은 연락하기는커녕 문자조차 보내지 않았다.이내 조민형에게 전화했다.“어떻게 됐어?”“
차가운 어조로 묻는 남자의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았다.신가람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키스한 적 없어요. 제가 스스로 부딪힌 거예요.”그는 결벽증이 심한 만큼 더럽다고 생각하는 물건을 가차 없이 버렸고, 여자도 마찬가지였다.그리고 질문에 대한 답변을 보탰다.“혹시 8천만 원만 먼저 보내주면 안 될까요? 카드에 2천만 원이 남았는데 병원에서 1억을 준비하라고 하네요.”사람은 비천한 처지에 놓이는 순간 마치 구걸이라도 하는 듯 자존심 따위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게 된다.“한꺼번에 이렇게 많은 돈을 요구하는 게 말이 안 된다는 걸 알아요. 물론 공짜로 받을 생각은 없어요.”그리고 고개를 젖혀 옷깃을 향해 손을 뻗어 단추를 하나씩 풀고 외투를 벗었고, 이내 백옥처럼 하얗고 매끈한 몸이 나타났다.깨끗한 피부에서 은은한 향기가 풍겼고, 며칠 전 차 안에서 그가 남겼던 흔적만 몇 군데 남아 있었다.박정후의 눈빛이 서서히 어두워졌다.그는 성욕이 강한 만큼 결벽증도 심해서 3년 동안 만진 여자가 단 한 명뿐이었다.게다가 사랑을 나누면서 조건도 까다롭기 그지없었다.남자를 만족시키기 위해 신가람은 얼마나 많은 동영상을 봤는지 모를 정도였다.박정후는 그녀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일단 깨끗이 씻고 와.”곧이어 탁한 목소리가 들려왔고, 무심하기만 하던 눈빛은 뜨거운 열기로 활활 타올랐다.결국 한참을 시달리게 되었다. 이내 연고를 찾으러 갔다가 머리가 어지러운 와중에 남자가 흘러가듯이 한 마디 던졌다.“3년이나 되는데 아직도 이리 칠칠하지 못해서야 원.”박정후는 샤워를 마치고 잠옷으로 갈아입은 뒤 침대에 기대어 담배에 불을 붙이고 서둘러 화장실로 가는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리고 담배를 끄고 휴대폰을 집어 들고 1억을 보내주었다.연고를 바르고 나온 신가람은 입금 문자에 뜬 금액을 확인했다.속으로 울컥하는 감정이 치밀어오르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졌지만, 본인의 선택이니 불만은 없었다.“옆방 가서 자.”그는 다른 사람과 침대를 같이 쓰는 걸 좋아하지
신가람은 초조한 마음에 박정후의 눈치를 볼 겨를도 없이 회사의 비상용 차 키를 들고 앞만 보고 직진했다.사무실 기온이 뚝 떨어졌고, 마치 엄동설한처럼 싸늘했다.박정후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따라가서 무슨 일인지 확인해 봐. 괜히 회사 차를 끌고 갔다가 교통사고를 당해 목숨이라도 잃으면 골치 아프니까.”조민형은 상사의 짜증스러운 말투에 담긴 걱정을 알아차리고 깜짝 놀랐다.어젯밤에도 느즈막이 연락와서 이정신과 함께 강민석을 ‘잘’ 챙겨주라고 하지 않았는가?얼굴이 퉁퉁 부은 강민석은 그동안 저질렀던 추잡한 짓거리를 술술 불었고 하나같이 가관이었다.회사를 벗어난 신가람은 내비게이션에 따라 S시에서 가장 큰 개인 병원, 모아병원으로 향했다.경비원들은 전부 군인 출신으로 경비가 삼엄했고, 그녀의 신분을 확인하고 나서야 안으로 들여보냈다.신가람은 주차하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시간도 아까운 듯 계단으로 뛰어 올라갔다.3층에 문이 열려 있는 병실은 하나뿐이고, 이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달려갔다.안으로 들어서서 병상에 누워 있는 사람을 보자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당신이 여기 웬일이지?”강민석은 머리에 붕대를 감은 채 눈은 호두처럼 퉁퉁 부었고, 험상궂은 얼굴로 그녀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게다가 이빨이 두 개나 부러진 탓에 어눌한 말투로 협박했다.“저 빌어먹을 년을... 붙잡아...”경호원 몇 명이 다가와 신가람을 즉시 포박했다.장정들을 어찌 여자 혼자서 상대하겠는가? 결국 바닥에 양쪽 무릎을 꿇고 목덜미까지 붙잡혀 옴짝달싹 못 하는 신세가 되었다.신가람은 숨을 헐떡이며 물었다.“우리... 엄마를... 어디로 데려간 거죠?”“젠장, 내가 어떻게 알아?!”강민석은 침대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중심부를 걷어차인 바람에 움직일 때마다 극심한 통증이 밀려왔다.이내 이를 바득바득 갈며 욕설을 퍼부었다.신가람은 포박에서 벗어나려고 젖 먹던 힘까지 다해 버둥거렸다.“고집이 장난 아니네? 듣던 대로 호락호락하지 않구나.”이때, 등 뒤로 귀에
“사모님께서 선심을 베푸셨다고 하니 고마울 따름이네요.”신가람은 더는 실랑이를 벌일 기력이 없었다.이때, 옆에 있던 조민형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가람 씨 어머니는 무사해요. 30분 전에 대표님의 지시에 따라 이미 병원으로 다시 모셔갔어요.”신가람의 눈시울이 대뜸 빨개지더니 조민형의 손을 덥석 붙잡고 초조하게 물었다.“엄마는 괜찮아요?”반면, 그녀를 바라보는 박정후의 눈빛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상사의 따가운 눈초리에 조민형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고, 황급히 신가람의 손을 뿌리치고 뒤로 물러섰다.그리고 양팔을 등 뒤로 가져갔다.“네, 멀쩡해요.”신가람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오늘 있었던 일은 절대로 그냥 넘어갈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후들거리는 다리를 움직여 강정애를 향해 걸어갔다.“그 눈빛 뭐야? 잘하면 손찌검이라도 하겠는데?”강정애는 살벌한 분위기에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방금 제가 사모님 남동생의 인생을 망쳤다고 했는데 법을 알면서도 고의로 죄를 저질렀으면 들춰내서 구속해야 하는 게 당연하지 않나요? 사모님께서 권력을 무기 삼아 휘두르는 이상 저 같은 하찮은 시민은 대적하기 힘든 법이죠. 하지만 감히 우리 엄마를 다치게 한다면 설령 이 한 몸을 바치더라도 끝까지 맞서 싸울 거예요.”어차피 이미 갈 데까지 갔기에 두려움 따위 없었고, 설령 명성이 더럽혀지더라도 무관했다.박정후는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잔뜩 세운 그녀의 모습은 처음 보았다. 얼굴에 겁을 먹은 기색은커녕 너 죽고 나 죽자는 각오도 얼핏 보였다.그녀의 기세에 눌린 강정애는 저도 모르게 경호원을 부르려다가 조민형에게 죄다 쫓겨난 사실을 깨닫고 이를 악물고 딸을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정후 씨, 왜 한마디도 안 해? 어떻게 비서 따위가 우리 엄마에게 협박하는 걸 마냥 지켜볼 수 있어? 그래도 한참 어른인데 너무 건방진 거 아니야?”소지율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심장이 아픈 척 연기했다.박정후는 눈을 내리깔고 그녀를 관찰하다시피 훑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