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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차가운 어조로 묻는 남자의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았다.

신가람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키스한 적 없어요. 제가 스스로 부딪힌 거예요.”

그는 결벽증이 심한 만큼 더럽다고 생각하는 물건을 가차 없이 버렸고, 여자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질문에 대한 답변을 보탰다.

“혹시 8천만 원만 먼저 보내주면 안 될까요? 카드에 2천만 원이 남았는데 병원에서 1억을 준비하라고 하네요.”

사람은 비천한 처지에 놓이는 순간 마치 구걸이라도 하는 듯 자존심 따위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게 된다.

“한꺼번에 이렇게 많은 돈을 요구하는 게 말이 안 된다는 걸 알아요. 물론 공짜로 받을 생각은 없어요.”

그리고 고개를 젖혀 옷깃을 향해 손을 뻗어 단추를 하나씩 풀고 외투를 벗었고, 이내 백옥처럼 하얗고 매끈한 몸이 나타났다.

깨끗한 피부에서 은은한 향기가 풍겼고, 며칠 전 차 안에서 그가 남겼던 흔적만 몇 군데 남아 있었다.

박정후의 눈빛이 서서히 어두워졌다.

그는 성욕이 강한 만큼 결벽증도 심해서 3년 동안 만진 여자가 단 한 명뿐이었다.

게다가 사랑을 나누면서 조건도 까다롭기 그지없었다.

남자를 만족시키기 위해 신가람은 얼마나 많은 동영상을 봤는지 모를 정도였다.

박정후는 그녀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일단 깨끗이 씻고 와.”

곧이어 탁한 목소리가 들려왔고, 무심하기만 하던 눈빛은 뜨거운 열기로 활활 타올랐다.

결국 한참을 시달리게 되었다. 이내 연고를 찾으러 갔다가 머리가 어지러운 와중에 남자가 흘러가듯이 한 마디 던졌다.

“3년이나 되는데 아직도 이리 칠칠하지 못해서야 원.”

박정후는 샤워를 마치고 잠옷으로 갈아입은 뒤 침대에 기대어 담배에 불을 붙이고 서둘러 화장실로 가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담배를 끄고 휴대폰을 집어 들고 1억을 보내주었다.

연고를 바르고 나온 신가람은 입금 문자에 뜬 금액을 확인했다.

속으로 울컥하는 감정이 치밀어오르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졌지만, 본인의 선택이니 불만은 없었다.

“옆방 가서 자.”

그는 다른 사람과 침대를 같이 쓰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지난 3년 동안 신가람은 볼일이 끝나면 아무리 피곤해도 자리를 피해주었다.

이내 사람 탈을 쓴 짐승 같은 남자를 보며 말했다.

“네, 그리고 고마워요. 앞으로 더 열심히 일할게요.”

그녀가 문을 나서기 전에 박정후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아마도 소지율의 연락인 듯, 다정한 말투로 휴대폰에 대고 달래주며 여자를 재웠다.

신가람은 쓰라린 마음을 뒤로 하고 별장에 머물러 있는 대신 옷을 갈아입고 서둘러 병원으로 향해 치료비 계좌에 충전했다.

그리고 주선희에게 200만 원을 보내주었다.

주선희는 중환자실 밖에서 임시로 얻은 간이 침대에 누워 잠이 들었고, 신가람은 이불을 덮어주고는 벤치에 앉아 밤을 꼴딱 새웠다.

눈을 뜨자마자 그녀를 발견한 주선희가 깜짝 놀랐다.

“아니, 벤치에 앉아서 잠이 들면 어떡해요?”

어린 나이에 가족을 책임지고 밤낮으로 일하는 신가람이 너무 안쓰러웠고, 설령 강철같은 체력을 지닐지언정 언젠간 쓰러지기 마련이라고 생각했다.

“괜찮아요. 우리 엄마를 돌봐주느라 이모님이 더 고생이죠.”

신가람은 어깨를 주물렀고, 휴대폰 화면이 번쩍 켜지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 이따가 출근해야 하니까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연락해주세요.”

“눈 좀 붙여야 하지 않아요? 턱은 왜 다쳤어요?”

불필요한 질문을 차단하기 위해 신가람은 대충 핑계를 대고 얼버무렸다.

회사에 도착하자 수상한 시선이 느껴져 가시방석이 따로 없었다.

“그거 봤어요? 법무팀에서 공지가 내렸는데 마케팅팀 차장님이 회사 여직원을 성추행해서 해고 처분받았고 법적 책임까지 물어야 한다네요. 그래서 아직도 경찰서에 잡혀 있대요.”

“누구를 성추행했어요?”

“신가람 씨를 제외하고 다른 사람이 있겠어요?”

모처럼 집은 기회인데 하지영은 분풀이를 제대로 하려고 칼을 갈았다.

그리고 대담한 추측을 이어갔다.

“내가 강민석과 바람 피우는 사이가 맞다고 했죠? 성추행은 무슨, 아마도 가격 협상이 제대로 안 돼서...”

뚜껑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신가람은 손에 든 뜨거운 커피를 하지영의 머리에 그대로 끼얹었다.

하지영은 화끈거리는 통증에 비명을 질렀다.

“뭐 하는 거예요?!”

신가람이 싸늘한 눈빛으로 쏘아보더니 테이블에서 핸드타월을 뽑아 손을 닦았다.

“입버릇은 여전히 고약하네요. 그날에 했던 말은 한 귀로 흘려보냈나 본데 대표님께 인사 조치를 신청할게요. 당신 같은 사람은 회사에 남아 있어 봤자 물만 흐릴 뿐이죠.”

“고작 비서 주제에 무슨 자격으로 날 해고한다는 거지? 혹시 찔리는 게 있어서 되레 화가 난 건 아니죠?”

하지영이 씩씩거리며 말했다. 화장은 번지고 입술만 시뻘건 모습이 사뭇 우스꽝스러웠다.

신가람은 또박또박 말했다.

“강민석은 벌을 받아 마땅하죠. 물론 지영 씨도 예외는 아니고, 아무런 근거 없이 남을 모욕한 증거로 회사 CCTV를 제출할 수도 있죠.”

하지영은 발을 동동 굴렀다.

물론 법무팀이 성추행당한 사람이 누구인지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은 건 사실이고, 그녀가 몰래 소문을 퍼뜨렸다.

만약 진짜 취조하게 된다면 빠져나갈 구멍은 없을 것이다.

신가람이 콧방귀를 뀌었다.

“강민석 같은 쓰레기가 여직원 한 명만 성추행한다는 게 말이 안 되죠. 만약 다른 피해자도 있으면 저한테 찾아오세요. 회사에서 적절한 조처를 해줄 테지만 원치 않는다면 굳이 무리하지는 마시고.”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자리에 있던 몇몇 여직원이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했다.

오전 회의에서 강민석 사건은 별도의 의제로 언급되었다.

박정후는 그 누구든 여직원을 건드리면 굳이 회사에 남아 있을 필요가 없다고 명확하게 못을 박았다.

이 말을 들은 신가람은 가슴이 뭉클했다.

상석에 앉은 남자가 회의실을 한 바퀴 둘러보며 각 부서 담당자들에게 말했다.

“직원 관리 잘하세요. 괜히 회사에 폐를 끼치지 마시고.”

경고의 의미가 다분한 말투에 팀장들은 서둘러 입장을 정리했다.

기획팀 팀장은 회의가 끝난 후 신가람을 찾아가 따로 인사까지 했다.

“하지영은 이미 해고했고, 업무 인수인계가 끝나면 그만둘 거예요. 이게 다 직원 관리에 소홀한 내 탓이니까 절대로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오늘 회의 때 박정후의 태도만 보더라도 모든 부서에 경종을 울리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신가람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팀장님, 아닙니다. 회사를 위해 일하는 직원으로서 사사로운 감정은 잠시 접어둬야죠.”

기계적인 답변에 양지원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이때, 신가람의 휴대폰이 문득 울렸다.

그녀는 비서실로 돌아와서야 전화를 받았다.

“이모님.”

주선희의 목소리는 어딘가 초조했고, 울음기가 섞여 있었다.

“아가씨, 누군가 사모님을 모셔갔어요.”

“네?”

신가람은 한껏 높아진 톤으로 물었다.

“아직 의식을 못 차린 거 아니에요? 어디로 갔는데요? 대체 무슨 상황이죠?”

주선희가 울먹이며 대답했다.

“조금 전에 사람들이 우르르 와서 중환자실로 직행하더니 다른 병원으로 옮겨서 더 좋은 치료를 받게 해준다고 사모님을 들것에 실어 갔어요. 게다가 병원에서도 동의했대요.”

보호자가 동의하지 않은 이상 병원은 환자를 대신해서 함부로 결정을 내릴 수 없다. 심지어 중환자의 경우는 조건이 더 까다로웠다.

신가람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고, 통화하는 와중에 병상에 누워 있는 어머니의 사진과 함께 낯선 번호로 문자 한 통이 와 있었다.

[만약 어머니를 만나고 싶으면 모아병원 3층으로 와. 절대 비밀을 유지하지 않으면 뒷감당은 오로지 본인 몫이 될 테니까.]

대체 누가 어떤 의도로 이런 문자를 보냈는지 알 수 없지만, 머릿속에 오로지 모아병원으로 당장 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이내 뒤돌아서 자리를 뜨려는 순간 남자의 단단한 가슴팍에 부딪혔다.

박정후는 가녀린 팔을 덥석 붙잡고 제 몸 하나 가누지 못하는 신가람을 일으켜 세웠다.

“어디 가?”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집에 일이 생겨서 두 시간 연차 낼게요.”

“이제 자기 주제도 모르는 건가? 회사가 놀이터야? 오고 싶으면 오고 가고 싶으면 가게? 그런 직원은 필요 없으니까 당장 짐 싸서 사표 내.”

이내 눈살을 찌푸렸고, 그제야 덜덜 떨고 있는 여자를 발견했다.

신가람은 울컥한 나머지 남자의 손을 뿌리치고 가방을 챙겨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럼 결근으로 처리해주세요.”

밖에 서 있던 조민형이 대신 가슴을 졸였다.

이게 과연 결근으로 무마할 문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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