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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사모님께서 선심을 베푸셨다고 하니 고마울 따름이네요.”

신가람은 더는 실랑이를 벌일 기력이 없었다.

이때, 옆에 있던 조민형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가람 씨 어머니는 무사해요. 30분 전에 대표님의 지시에 따라 이미 병원으로 다시 모셔갔어요.”

신가람의 눈시울이 대뜸 빨개지더니 조민형의 손을 덥석 붙잡고 초조하게 물었다.

“엄마는 괜찮아요?”

반면, 그녀를 바라보는 박정후의 눈빛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상사의 따가운 눈초리에 조민형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고, 황급히 신가람의 손을 뿌리치고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양팔을 등 뒤로 가져갔다.

“네, 멀쩡해요.”

신가람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오늘 있었던 일은 절대로 그냥 넘어갈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후들거리는 다리를 움직여 강정애를 향해 걸어갔다.

“그 눈빛 뭐야? 잘하면 손찌검이라도 하겠는데?”

강정애는 살벌한 분위기에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방금 제가 사모님 남동생의 인생을 망쳤다고 했는데 법을 알면서도 고의로 죄를 저질렀으면 들춰내서 구속해야 하는 게 당연하지 않나요? 사모님께서 권력을 무기 삼아 휘두르는 이상 저 같은 하찮은 시민은 대적하기 힘든 법이죠. 하지만 감히 우리 엄마를 다치게 한다면 설령 이 한 몸을 바치더라도 끝까지 맞서 싸울 거예요.”

어차피 이미 갈 데까지 갔기에 두려움 따위 없었고, 설령 명성이 더럽혀지더라도 무관했다.

박정후는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잔뜩 세운 그녀의 모습은 처음 보았다. 얼굴에 겁을 먹은 기색은커녕 너 죽고 나 죽자는 각오도 얼핏 보였다.

그녀의 기세에 눌린 강정애는 저도 모르게 경호원을 부르려다가 조민형에게 죄다 쫓겨난 사실을 깨닫고 이를 악물고 딸을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정후 씨, 왜 한마디도 안 해? 어떻게 비서 따위가 우리 엄마에게 협박하는 걸 마냥 지켜볼 수 있어? 그래도 한참 어른인데 너무 건방진 거 아니야?”

소지율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심장이 아픈 척 연기했다.

박정후는 눈을 내리깔고 그녀를 관찰하다시피 훑어보았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강정애가 먼저 태클을 걸었다는 것을 보아낼 수 있다.

이내 싸늘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말은 바른대로 해야지. 사모님이 애초에 강 차장을 천하그룹에 취직시키는 조건이 바로 내 조력자가 되게 하는 건데, 도움을 받기는커녕 되레 골칫거리만 잔뜩 안겨주었어.”

병상에 누워 있는 강민석은 이불 속에서 몸을 웅크리고 사시나무 떨듯 벌벌 떨었다. 어젯밤 흠씬 두들겨 맞았던 기억이 아직도 머릿속에 생생하게 떠올랐다.

지독한 사람들이 무자비하게 공격하는 바람에 앞니 두 개를 부러뜨리는 건 한 주먹 거리에 불과했다.

결국 찍소리도 못했고, 행여나 숨소리라도 들릴세라 쥐 죽은 듯 있었다.

“그게... 민석도 잠깐 뭐에 홀려 속임수에 빠졌나 봐요. 정후 씨, 우리 동생한테 개과천선할 기회를 한 번만 주면 안 될까요? 저런 여우 같은... 아니, 가람 씨의 일방적인 주장만 듣는 것도 아니죠. 당시 무슨 상황인지 누가 알아요? 어쩌면 가람 씨가 민석이 오해할 만한 짓을 했을지도 모르잖아요.”

강정애는 신가람에게 화살을 겨누었다.

신가람이 냉소를 지었다.

이때, 조민형이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사모님이 간과한 사실이 있는데 회사에서 강 차장님이 성추행했다고 신고한 여직원이 5명이나 되죠. 이미 경찰서에 가서 진술서를 작성했고, 증거가 확실한 이상 법적 책임도 물어야 할 거예요. 따라서 남편분의 명의로 남동생을 보석했으니 소명준 회장님도 위험을 감수하기 마련이죠.”

그의 말에 강정애는 어안이 벙벙했고, 딱딱하게 굳은 얼굴은 어느새 표정 관리가 안 되었다.

박정후는 그녀를 도와줄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내 눈치를 주자 조민형은 곧바로 경호원 7~8명을 데리고 들어와 거북이처럼 이불속에 숨어 있던 강민석을 붙잡고 병동 밖으로 끌고 나갔다.

강민석은 울면서 외쳤다.

“누나, 지율아, 살려줘!”

강정애는 애가 타서 발만 동동 굴렀고,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외삼촌...”

소지율은 나지막이 외치더니 심장을 부여잡고 눈동자가 뒤집힌 채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박정후의 안색이 대뜸 어두워지더니 그녀를 안고 재빨리 걸어 나갔다.

신가람을 지나칠 때 소지율의 하이힐이 어깨를 건드렸는데 기절했다는 사람치고는 힘이 장사였다. 쓰러진 게 연기가 아니고서는 납득이 안 되는 상황이다.

그러나 박정후는 안중에도 없었다.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한 얼굴은 품에 안긴 여자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고스란히 보여주었다.

신가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김칫국부터 마신 자신을 비웃으면서 묵묵히 뒤돌아 밖으로 걸어가 운전기사한테 병원으로 데려다 달라고 했다.

저녁 7시쯤.

드디어 정신을 차린 이정미는 살짝 어지러웠지만 신가람을 보자마자 물었다.

“가람아, 강인은? 둘이 약혼하기로 한 거 아니야? 어디 갔대?”

신가람은 의아한 얼굴로 어머니를 바라보았고, 기쁨으로 가득한 마음도 한순간에 가라앉았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진찰 중인 의사를 바라보았다.

“우리 엄마 괜찮아요?”

주강인은 그녀의 전 남친인데 당시 아버지가 교통사고를 당하고 나서 자취를 감추더니 행방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엄마의 기억은 놀랍게도 3년 전에 멈춰 있었다.

“아마도 넘어지면서 뇌 조직이 손상되어 기억 상실증에 걸린 것 같아요. 시간이 지나면 완화되는 증상이지만 환자분을 더는 자극하면 안 돼요.”

의사는 진료 차트를 치우며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낮에 있었던 일은 정말 죄송합니다. 그쪽에서 보호자 분이 서명한 위임장을 제시하는 바람에... 이건 엄연히 병원 측의 직무 유기죠. 원장님께서 사과의 뜻으로 어머님의 진료비를 일부 면제해 주겠다고 했어요.”

그러나 신가람의 귀에 한 마디도 들리지 않았다.

이내 이정미의 손을 잡고 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한참이 지나서야 대답했다.

“집에 일이 있어서 먼저 돌아갔어요. 엄마, 걱정하지 마세요. 약혼식은 정상적으로 진행될 거예요.”

사실 약혼 얘기가 오갈 때 아버지는 이미 교통사고를 당했고, 주강인도 소리소문없이 사라졌다.

신씨 가문 대신 무거운 짐을 기꺼이 짊어질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 도망친다고 한들 나름대로 이해는 갔다.

“얼른 돌아오라고 해. 작은 일도 아닌데 어떻게 말도 없이 그냥 가? 사돈어른들은? 난 왜 또 병원에 있고?”

이정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병실 문이 열렸다.

훤칠한 키와 탄탄한 몸매를 자랑하는 남자가 유유히 걸어 들어왔고, 뚜렷하고 시원한 이목구비, 쌀쌀맞으면서도 고귀한 분위기는 누가 봐도 혹할 지경이다.

신가람은 넋을 잃고 바라보았고, 입술만 달싹였을 뿐 대표님이라는 말은 끝까지 내뱉지 못했다.

이정미가 웃으면서 손짓했다.

“강인아, 드디어 왔네. 얼른 이리 와.”

신가람은 무의식중에 부인했다.

“엄마, 사람 잘못 봤어요. 강인이 아니...”

“아니긴 뭐가 아니야. 강인이 맞네! 눈, 코, 입 어느 하나 다른 게 없는데, 나이도 젊은 얘가 벌써 노안이 오면 어떡해?”

이정미가 툴툴거렸다.

사위 사랑은 역시 장모라고,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게다가 주강인이 갑자기 잘생겨진 것 같은 느낌에 어디 하나 흠잡을 데 없었다.

박정후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그리고 싸늘한 눈빛으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감히 고개도 들지 못할 정도로 찔린다는 건가?

“강인아, 걱정하지 마. 가람이 아빠가 빚을 처리할 테니까 너한테 부담 주는 일은 없어. 굳이 탓하자면 우리 잘못이니까 절대로 가람과 헤어지면 안 돼.”

이정미는 초조한 나머지 연신 숨을 헐떡였다.

“엄마, 제발 가만히 누워 있어요.”

신가람이 남자를 바라보며 도움의 눈길을 보냈다.

박정후는 입을 꾹 닫고 천천히 걸어가 침대 옆에 섰다.

“어머님.”

등 뒤에 서 있는 조민형은 말문이 막혔다.

그리고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잽싸게 자리를 피했다.

사람은 초조하면 괜스레 일을 찾아서 하게 된다. 신가람은 엄마에게 이불을 여미어주고 박정후에게 우물쭈물 앉으라고 권했다.

하지만 꼿꼿이 서서 내려다보는 남자 때문에 압박감이 느껴졌다.

“둘만 잘 되면 나랑 가람이 아빠는 소원이 없어.”

이정미는 박정후의 손을 끌어당겨 신가람의 손등에 올려놓았다.

커다란 손이 가녀린 손을 완벽히 가렸다.

신가람은 심장이 콩닥거렸고 침을 꼴깍 삼켰다.

“잠이 깼으면 사과라도 잘라 드릴까요?”

그리고 사과 껍질을 깎고 먹기 좋게 잘랐다.

“나 안 먹어. 강인이 줘.”

커플끼리 서로 먹여주는 건 당연한 일이며, 그렇게 해야만 사이가 더 돈독해진다고 여겼다.

신가람은 귀까지 빨개졌고, 영혼 없는 사람처럼 사과를 박정후의 입가에 가져다 대더니 소리 없이 애원했다.

“먹으라고? 공짜는 힘든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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