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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당시 그는 책상에 눕히고 두 다리로 자기 허리를 휘감게 했다.

그리고 거리낌 없이 욕구를 풀었고, 누군가 사무실에 찾아오든 말든 안중에 없었다. 마치 지금처럼...

신가람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만약 그녀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더욱 진한 스킨십으로 발전할지도 모른다.

결국 들어가야 할지 말지 몰라서 망설이기 시작했다.

이때, 소지율이 투정을 부렸다.

“정후 씨, 하지 마. 가람 씨가 밖에 있어.”

박정후는 눈살을 찌푸리며 뒤돌아서 신가람을 바라보았다.

“거기 서서 뭐 해?”

“내가 가람 씨한테 커피 한 잔 내려달라고 부탁했어. 비행기에서 내렸더니 커피가 당겨서...”

이내 남자의 품에 살포시 기대었고, 예쁘장한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몸도 안 좋은데 자극적인 거 마시면 어떡해?”

박정후는 그녀를 부축해서 앉히고 무릎에 담요를 덮어주었다.

그러고 나서 싸늘한 시선은 신가람을 향했다.

“앞으로 지율한테 자극적인 음식 가져다주지 마.”

소지율이 어렸을 때 심장병이 있어서 몸이 약하다는 소문은 익히 전해 들었고, 외국에서 수술받고 몇 년 동안 요양했다고 하지만 커피마저 못 마실 줄은 몰랐다.

“죄송합니다. 다음부터 조심할게요.”

소지율이 남자의 손을 끌어당겼다.

“정후 씨, 의사 선생님이 결혼하고 아이 낳아도 될 만큼 건강하다고 하니까 일일이 신경 안 써도 돼.”

그녀가 이번에 귀국한 목적이 바로 박정후와 결혼하고 아이까지 낳아주는 것이다.

박정후는 소지율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더니 굳은 얼굴로 신가람에게 커피를 가져다 달라고 했다.

이내 소지율에게 건네는 순간, 상대방이 제대로 못 잡은 건지 몰라도 커피잔이 기울어지면서 뜨거운 액체가 몇 방울 튀었다.

소지율은 비명을 지르더니 손으로 커피잔을 건드렸다. 결국 옆으로 엎어진 잔에서 70도에 육박하는 커피가 흘러내려 신가람의 다리를 적셨다.

바지를 사이에 두고도 화끈거리는 통증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갑작스럽게 연출된 여우짓 때문에 신가람은 넋을 잃고 말았다. 이내 소지율을 바라보며 서둘러 사과했다.

“지율 씨, 죄송해요.”

박정후가 싸늘한 얼굴로 밀어내자 그녀는 비틀거리며 자칫 쓰러질 뻔했다.

그리고 초조한 듯 소지율을 품에 안고 두 눈을 부라렸다.

“어쩌면 제대로 하는 일이 하나도 없어? 얼른 차를 대기시키지 않고 뭐 해?”

신가람은 처음 보는 남자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

그녀의 기억 속에 박정후는 성격이 쌀쌀맞고 일도 차분하게 처리하는 편이라 가끔 변덕이 심할 때 있더라도 다짜고짜 화를 내지는 않았다.

“대표님, 제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에요.”

분노에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이 그녀를 향했다.

신가람은 의아하면서도 한 편으로 씁쓸함이 밀려왔다.

“당장 차 대기시켜.”

박정후는 그녀에게 눈길조차 안 주고 밖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신가람은 곧바로 운전기사에게 연락했고, 5분 뒤 남자는 소지율을 품에 안고 차에 올라타 가까운 병원으로 달려갔다.

의사는 진찰하고 나서 단지 피부가 빨갛게 부은 것 빼고는 별문제 없다고 했다.

하지만 소지율이 아프다고 징징거려서 마지못해 붕대를 칭칭 감아주었다.

“심장은 괜찮아요?”

박정후의 검은 눈동자는 심연처럼 깊었다.

의사는 의아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럼요. 아주 멀쩡해서 탈이죠. 걱정하지 마세요.”

그제야 한시름 놓은 남자는 고개를 돌려 문밖에 서 있는 신가람을 발견하고 어두운 안색으로 다가왔다.

“일부러 그랬어?”

신가람이 눈썹을 찡그렸다.

“네?”

박정후는 그녀의 손을 끌고 인적이 드문 구석으로 향했다.

“계약을 파기했다고 화가 나서 일부러 소지율에게 골탕 먹였냐고. 신가람, 똑똑히 들어. 내가 지켜보는 앞에서 이런 무식한 수작을 부리려고 하지 마.”

아무리 월급 받고 일하는 직원이라고 하지만 신가람도 자존심이 있는지라 본인이 저지른 일도 아닌데 억울하게 뒤집어쓸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전 속이 그렇게 좁은 사람이 아니에요. 끝이면 끝이지, 굳이 남한테 화풀이할 필요가 뭐 있죠?”

3년이라는 계약 기간 동안 사랑을 나눈 적이 어디 한 두 번 뿐인가? 설령 반려동물을 키운다고 해도 최소한 신뢰가 생기기 마련일 텐데 첫사랑과 재회했더니 기본적인 판단력마저 사라진 건가?

“두고 보지. 소지율이 손에 화상을 입어 거동이 불편하니까 다 나을 때까지 옆에서 시중 잘 들어.”

박정후의 말에 신가람은 어안이 벙벙했다.

“나도...”

그녀도 다쳐서 허벅지가 아직도 후끈거린다고 말하고 싶었으나 상대방은 대답할 여지조차 주지 않았다.

“오늘 밤부터 손이 회복될 때까지 24시간 케어해.”

대체 얼마나 걱정됐으면 이 정도로 애지중지한단 말이지?

하지만 일개 직원으로서 상사의 명령을 외면할 수 없다.

신가람은 고개를 끄덕였고, 목구멍까지 차오른 씁쓸함을 애써 삼켰다.

“알겠습니다. 원하시면 그렇게 해야죠.”

남자는 그제야 손을 놓아주고 싸늘한 시선으로 흘긋 쳐다보더니 뒤돌아서 병실로 돌아갔다. 소지율이 단지 살짝 데었을 뿐인데 마치 그의 목숨이라도 빼앗아 간 듯 호들갑이라니.

이내 의사를 찾아가서 화상 연고를 처방받고 응급 진료비를 정산한 뒤 약을 가방에 넣자 소지율을 안고 걸어 나오는 박정후를 발견했다.

“손을 다쳤지 다리를 못 움직이는 것도 아닌데 얼른 내려줘.”

소지율이 수줍은 얼굴로 말했다.

박정후가 모처럼 다정하게 타일렀다.

“가만히 있어.”

얼마나 자상하고 배려심이 깊은지, 대체 누가 매몰찬 마왕이라고 했는가? 그동안 단지 제대로 된 짝을 만나지 못해서 그랬을 뿐이다.

신가람은 입술을 살짝 깨물고 일부러 두 사람을 보지 않으려고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양태수에게 연락해서 병원 입구에 차를 대기시키라고 했고, 2분 뒤 차가 유유히 다가왔다.

박정후는 조심스럽게 소지율을 태우고 나서 뒤를 돌아 신가람을 바라보았다.

“별장으로 같이 따라가.”

“대표님, 저 놀고 있는 사람이 아니에요.”

아직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였는데 말이다.

하지만 그녀의 생사는 남자의 손에 달렸다.

“오늘부터 놀게 해줄까?”

신가람은 흠칫 놀랐다. 차마 명령에 거역할 수 없는지라 고분고분 대답했다.

“알겠어요. 지율 씨를 잘 케어해주면 되죠?”

말이 케어지, 사실 의식주부터 일상생활까지 모든 면에서 챙겨줘야만 했다.

지난 3년 동안 박정후를 살뜰히 보살펴준 신가람은 육체는 물론 모든 에너지와 시간을 쏟아부었다.

저녁 9시, 박정후는 국제회의를 마치고 서재를 나섰다.

마침 소지율에게 가져다주려고 따뜻한 우유 한 잔을 들고 가는 신가람을 발견했다.

“이리 주고 1층 손님방에 가서 있어.”

이내 우유를 건네받고 그녀를 힐긋 쳐다보더니 무심하게 시선을 돌렸다.

신가람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적어도 남의 행복을 훔쳐보는 제3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

오늘 밤에 소지율은 박정후를 유혹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할 것이다.

방으로 돌아온 그녀는 샤워를 마치고 연고를 발랐다. 그 와중에 머릿속으로 둘이서 지금 어떤 자세로, 얼마나 오랫동안, 어디서 할 것인지에 대한 상상이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자신과 무관한 일이라 괜한 고민할 필요가 없다고 스스로 위로했다.

그날 밤 신가람은 잠을 설쳤다.

다음 날 새벽, 박정후는 일찍 일어나서 아래층으로 내려갔고 주방을 오가는 분주한 모습을 보자 싸늘한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워낙 요리 솜씨가 뛰어난 여자라 설령 본인처럼 입맛이 까다로운 사람도 모처럼 밥 한 그릇을 더 먹게 했다.

신가람은 거품기로 계란을 풀다가 뒤돌아서는 순간 박정후를 발견했고, 눈 밑의 타크써클을 보자 계란물을 휘젓던 팔이 저도 모르게 우뚝 멈췄다.

소지율이 나타났을 때는 이미 아침 식사가 준비된 뒤였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박정후의 옆에 앉았고, 얼굴은 딱딱하게 굳은 채 두 눈에 원망이 가득했다.

신가람은 소지율의 ‘시중’을 들다가 조용히 주방으로 자리를 피했다.

“어젯밤에 왜 가만히 있었어? 게다가 묶어놓기까지 하고, 정후 씨 설마...”

소지율은 말을 잇지 못했다.

박정후가 여자를 옆에 두고 손가락 하나 건드리지 않았다는 게 신가람은 놀라울 따름이다.

그가 욕구를 통제하지 못하는 순간 상대방은 만신창이가 되기에 십상이다.

“심장이 안 좋으니까 위험을 조금이라도 무릅쓰면 안 된다고 했지? 나중에 전문의 선생님이 와서 진료해주고 문제가 없다고 하면 다시 얘기해. 자, 얼른 먹어.”

부드러운 말투는 마치 아이를 달래주는 듯싶었다.

소지율은 화가 금세 가라앉고 얼굴이 서서히 달아올랐다.

애틋한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는 두 남녀를 주방에서 지켜보던 신가람은 심장이 따끔거리더니 이내 욱신거리는 통증이 느껴졌다.

...

아침을 먹고 나서 소지율에게 연락이 왔고, 그녀가 귀국하기 전에 박정후가 주문 제작한 드레스가 가게에 도착했으니 피팅하러 오라고 했다.

“정후 씨, 가람 씨도 같이 가면 안 될까? 안목이 보통이 아닐 것 같은데 조언을 좀 받아볼까 해서.”

이내 다친 손을 들어 올리더니 도발적인 표정으로 눈썹을 까딱했다.

결국에는 자기편을 들어 줄 거라는 자신감에서 비롯된 오만방자한 액션에 불과했다.

아니나 다를까 박정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가.”

신가람은 어이가 없었지만 입을 꾹 닫았다.

드레스를 피팅하러 가는 길에 소지율은 박정후의 팔짱을 꼭 끼고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을 걸면서 거의 몸에 달라붙어 있다시피 했다.

평소에 차분하고 똑똑하던 남자도 갑자기 IQ가 하락한 듯 맞장구를 쳐주었고, 신가람은 팔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양태수가 신가람을 힐긋 쳐다보았다.

“가람 씨, 추워요?”

“아니요.”

그녀는 단지 과한 애정 표현에 반감이 생겼을 뿐이다.

이내 양팔을 비비던 순간 백미러로 박정후와 눈이 딱 마주쳤다.

매번 잠자리에 들 때 봤던 눈빛처럼 서늘했지만 차가워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실상은 지치지 않은 체력을 가진 소유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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