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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매장에 도착하니 점장이 친히 마중 나왔다.

I국에서 핸드 메이드로 만든 드레스는 파란색 피시테일 디자인으로 등이 훤히 파였고, 치맛자락에 자잘한 다이아몬드로 장식되어 있다.

“소지율 씨, 이 드레스는 장인이 한땀 한땀 바느질했죠. 999개의 다이아몬드는 영생을 뜻하며 박 대표님과 평생 행복하길 바라는 염원이 담겨 있어요.”

점장은 부지런히 아첨했고, 한 마디 한 마디가 소지율의 마음에 쏙 들었다.

소파에 앉은 박정후는 힐긋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가서 피팅 도와주세요.”

“정후 씨, 가람 씨도 같이 들어가면 안 될까? 다 모르는 사람이라 좀 뻘쭘하네.”

소지율은 생글생글 웃으며 신가람을 바라보았다.

“가람 씨, 괜찮죠?”

“안 괜찮을 리가 있나? 같이 가.”

박정후의 싸늘한 눈빛이 신가람을 향했다.

신가람은 잠자코 구석에 서서 최대한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았다.

물론 시중을 들어본 적이 없는 건 아니지만... 이내 한숨을 살짝 내쉬더니 여유로운 미소를 장착하고 피팅룸으로 따라갔다.

소지율은 한참을 피팅하다가 드레스는 꽤 만족했는데 유독 신발이 튀는 느낌이 들었다.

“가람 씨, 이 드레스에 어울릴 만한 힐을 골라 줘요.”

당당한 목소리는 마치 당연한 일처럼 느껴졌다.

신가람도 딱히 거절하지 않았고, 이내 신발 코너로 가서 은색 하이힐 한 켤레를 챙겨서 그녀의 앞에 내려놓았다.

“손이 이 모양이라 신발을 갈아 신을 수 없네요. 미안하지만 좀 도와줄래요?”

하지만 말과 달리 이미 발을 내밀고 있었다.

“공짜로 시키는 건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나중에 정후 씨랑 잘 얘기해서 월급 올려주라고 할게요.”

신가람은 한쪽 무릎을 구부리고 앉아 그녀에게 하이힐을 갈아 신겼다.

이때, 소지율이 갑자기 다리를 번쩍 들어 올리는 바람에 구두코가 신가람의 턱을 강타했다.

힘이 어찌나 센지 구두에 달린 장식품이 피부를 스쳐 지나가면서 금세 상처가 벌어졌고, 갑작스러운 통증이 밀려와 눈시울이 시큰거리며 무의식중으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런!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왜 울어요?”

소지율은 허리를 굽히며 콧방귀를 뀌었다.

“만약 쌤통이라고 하면 무슨 생각이 들어요?”

신가람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을 부릅뜨고 그녀의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이내 반박하려는 순간 그제야 입 안이 피투성이가 된 사실을 깨달았다. 방금 이를 꽉 깨물면서 실수로 혀끝도 다치게 되었다.

소지율이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회사에서 가람 씨가 방탕하다는 소문이 무성하던데, 유부남과 바람을 피우면서도 대표 부인 자리까지 탐낸다고.”

신가람은 고통을 참으며 말했다.

“근거 없는 허튼소리니까 함부로 입을 놀리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신창호의 딸 신가람,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로 남겨진 골칫거리를 누가 대신 해결해줬는지 정녕 모를 것 같아요? 다들 보는 눈이 있는데 바보 취급하지 마요. 부모님께서 매춘부를 시키려고 금지옥엽으로 키우진 않았을 거잖아요?”

신가람이 고개를 번쩍 들더니 주먹을 불끈 쥐었고, 화를 참느라 이마에 핏줄이 불끈 튀어 올랐다.

애초에 3년 계약을 맺으면서 박정후는 여자 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밝히지 않았고, 그녀도 대표 부인 자리를 탐낸 적이 없었다.

설령 수렁에 빠졌다고 한들 제힘으로 살아남으려고 애를 썼다.

따라서 일하면서도 최대한 실수를 줄이려고 했다.

신가람은 손으로 턱을 가리고 입 안에 고인 피를 삼켰다.

“지율 씨, 피팅 끝났으면 이만 나가 봐도 될까요?”

“본인의 신분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괜히 화를 자초하지 말고.”

소지율이 경멸이 가득한 눈빛으로 말했다.

매장 직원들이 몰래 그녀를 손가락질하며 비웃기 급급했다.

갑자기 공기가 탁해진 느낌에 숨통이 점점 조여왔고, 당장이라도 피팅룸을 벗어나고 싶었다.

신가람은 커튼을 젖히고 화장실로 향했다.

허둥지둥 뛰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 박정후는 눈살을 찌푸리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따라가려고 했다.

“정후 씨, 어때? 예뻐?”

소지율은 남자의 앞에서 한 바퀴 돌았고, 다이아몬드가 불빛을 받아 눈부시게 반짝거려 이루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박정후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살짝 지었다.

“예쁘네.”

“그럼 약혼식 날에 이거 입을게. 괜찮지?”

그리고 팔짱을 살포시 끼며 기대에 가득 찬 얼굴로 바라보았다.

“입고 싶은 거 입어. 신발도 잘 어울리네. 이따가 액세서리만 사면 끝이겠군.”

화장실에 도착한 신가람은 수도꼭지를 틀고 물을 받아 입 안의 피를 헹군 다음 세수까지 했다.

이때, 가방에 들어 있던 휴대폰이 진동했고 윙윙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급박하게 들렸다.

곧이어 젖은 손바닥을 깨끗이 닦고 휴대폰을 꺼내자 주선희의 번호가 화면에 나타났다.

“아가씨, 사모님이 오늘 외출했다가 실수로 넘어져서 머리를 다쳤어요. 아직 의식이 없는데 의사 선생님께서 뇌출혈이라고 해서 수술 동의서에 보호자가 사인해주기를 기다리고 있어요.”

신가람은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고, 마치 망치로 세게 얻어 맞은 느낌이 들었다.

설령 밖에서 멸시를 당하거나 수모를 겪어도 대수롭지 않았지만 어머니가 아프다는 소리를 듣는 순간 초조한 나머지 목소리마저 떨렸다.

그리고 의사에게 수술을 부탁했고, 휴대폰 너머로 침묵이 이어졌다.

“다른 사람에세 위임하여 사인도 가능하지만 모든 결과는 환자분의 가족이 감당해야 해요.”

“네, 일단 수술부터 진행해주세요. 금방 병원으로 갈게요.”

전화를 끊고 나서 신가람은 비틀거리며 화장실을 뛰쳐나왔고, 곧이어 마주 오는 사람과 세게 부딪혔다.

남자의 단단한 가슴팍에 정통으로 들이받은 나머지 코뼈가 부러질 듯싶었고, 가뜩이나 입이 아프고 턱도 벌겋게 부어올라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왜 이래?”

이내 큼지막한 손이 그녀의 턱을 움켜쥐었고, 찢어진 입가에 묻은 핏줄기를 보자 눈살을 찌푸렸다.

“꼴이 이게 뭐지?”

신가람은 통증을 참지 못하고 숨을 헉하고 들이켰다.

“대표님, 급한 사정이 생겨서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아요. 혹시 조 실장님한테 데려다 달라고 부탁하면 안 될까요?”

그녀의 초조한 모습에 박정후는 안색이 어두워졌고, 두말없이 조민형에게 데려다주라고 말했다.

소지율은 옷을 갈아입고 박정후의 팔짱을 꼈다.

그리고 남자의 시선을 따라 통유리창 너머로 허둥지둥 뛰어가는 신가람을 발견했다. 심지어 차를 타면서 천장에 머리까지 부딪혔는데 우스꽝스러운 모습은 마치 광대를 연상케 했다.

“왜 가람 씨만 쳐다봐? 혹시 어젯밤에 아무 일이 없었던 것도 내 심장병을 제외하고 가람 씨 때문은 아니야?”

박정후는 짜증이 살짝 났지만 그래도 인내심을 잃지 않고 차분하게 타일렀다.

“아니야. 이제 쇼핑하러 갈 거야? 아니면 너희 집으로 돌아갈래?”

“아무 데도 가기 싫어. 정후 씨 옆에만 있을래.”

그녀는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고, 속이 한결 후련했다.

단지 아까 더 세게 걷어차서 신가람의 얼굴을 망가뜨리지 못한 게 한스러울 뿐이었다.

신가람이 조민형을 계속해서 재촉했고,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수술실의 불이 켜져 있었다.

주선희는 어머니를 돌봐온 이모였고,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이게 다 내 잘못이에요. 사모님이 아가씨를 위해 보양식을 만들어 준다고 갈비 사러 나갔다가 그만... 제가 따라갈걸 그랬어요. 혼자 보내는 게 아니었는데.”

“이모님 탓 아니에요. 엄마가 워낙 남에게 폐를 끼치는 걸 싫어하는 분이라서...”

신가람을 애써 침착함을 유지했다.

수술은 무려 4시간 동안 지속되었다.

주치의가 수술실에서 걸어 나와 마스크를 벗으며 말했다.

“수술은 순조로운 편이에요. 다만 환자분이 기저질환이 세 개나 있고 낙상으로 인한 뇌간 출혈 때문에 한동안 중환자실에서 관찰해야 하죠. 앞으로 입원하면서 치료받아야 할지도 모르니 우선 계산부터 하고 오세요.”

신가람은 그제야 긴장이 풀렸고, 마치 목숨을 되찾은 듯 거듭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그리고 로비에 결제하러 갔을 때 계좌에 100만 원밖에 남지 않은 것을 확인했다.

이때, 친분이 있던 간호사가 한 마디 건넸다.

“가람 씨, 어머님께서 상태가 위독하시니 향후 치료비가 꽤 많이 들어갈 거로 예상하는데 돈은 최대한 많이 준비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신가람은 돈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내놓을 기세였다.

“얼마면 될까요?”

“1억이요.”

물론 돈이 없는 건 아니지만 단지 연초에 외할머니가 수술을 받으면서 큰돈을 썼기에 지금은 2천만 원 정도밖에 안 남았다.

신가람은 박정후를 떠올렸다. 어쨌거나 병원비를 대주겠다고 하지 않았는가? 결국 한참을 망설이다가 속으로 달달 외운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대표님...”

휴대폰 너머로 나른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가람 씨? 정후 씨가 오늘 피곤해서 일찌감치 샤워 중인데 할 말 있으면 나한테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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