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위 모든 조명이 당당한 모습으로 연설하고 있는 배현우를 비췄고 그에게 모든 관심과 이목이 쏠렸다. 그는 기세 좋게 발언을 이어나가며 자신을 믿고 따라주신 모든 손님에게 감사의 말을 표했다.그의 조각 같은 얼굴이 내 눈 속에서 점점 확대되며 깊이 박혔고 나는 애써 요동치는 감정을 제어하며 그를 잃게 되었을 때 어떻게 다시 그와 마주할지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그때 웨이터 한 명이 다가와 조심스럽게 말했다.“한 대표님, 옥상에서 누가 부르십니다. 가보셔야 할 것 같아요.”갑작스러운 요청에 당황해하는 사이 웨이터는 이미 없어졌다.의심스러운 마음에 옆을 둘러봤지만 다들 무대 위의 배현우에게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그럼 누가 날 찾는 거지?나는 인파를 파헤치고 홀을 빠져나왔다. 원래 있던 층이 제일 꼭대기 층이었기에 계단을 통해 옥상으로 갈 수 있었다. 탁 트인 정원 형태의 옥상은 보기만 해도 마음이 열릴 듯 우아하고 아름다웠다.오늘의 연회로 인해 옥상도 개방상태였고 사람도 적고 홀보다 조용하여 중요한 이야기를 하기엔 적합한 장소였다.내가 옥상에 왔을때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홀에서 오늘의 주인공이 발언하고 있어 자리를 뜰 사람들이 없었다.나는 주위를 돌아보았으나 나를 기다리는 사람 따윈 없었다.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쯤에 뒤쪽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황급히 뒤돌아보자 한소연이 도도하게 걸어오고 있었다.오늘의 그녀 또한 이곳의 주인공이었다. 남자 주인공의 파트너로 등장해 배현우와 함께 모든 주목을 받고 있었으니 말이다 “말해봐요, 나한테 무슨 볼일이 있는 거죠?” 그녀가 오만한 자태로 먼저 말을 걸어왔다. 그때 나의 사무실에 찾아와 소식을 물어볼 때와는 사뭇 다른 태도였다.“제... 제가 소연 씨를 찾았다고요?” 나는 의아한 얼굴로 그녀에게 물었다. 내가 한소연을 불러낼 이유가 없었다.“네? 웨이터한테 옥상으로 올라오라고 부르셨잖아요.” 그녀는 불쾌하다는 듯이 날 바라보며 오만한 어조로 말을 이어나갔다.“한 대표
나는 떨어지는 구조물을 보며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르며 그녀를 잡아당기려 하였으나 그녀는 내 호의를 무시하고 내 손을 뿌리쳤다. 삽시에 구조물이 떨어지고 나와 한소연 모두 부상을 면치 못했다.다행히 내가 서 있던 자리는 구조물과 거리가 멀어 맞진 않았지만, 한소연은 내 손을 뿌리치는 바람에 넘어지면서 구조물에 다리를 짓눌렸다.옥상에 있던 사람들은 놀라 소리를 지를 뿐 다가오지 못했고 누군가 뛰쳐 내려가 사람을 불러왔다.한소연은 다리가 깔린 채 대성통곡하며 나를 욕했다.나 역시도 발목에서 극심한 통증이 느껴졌으나 또 다른 구조물이 떨어질까 봐 이를 악물고 일어나 그녀를 부축하려 하였다.“지아 씨, 어떻게 이렇게 독할 수가 있어요?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는데요?”한소연이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질렀다.“다친 곳이 없는지 먼저 일어나봐요, 말했잖아요, 제가 부른 게 아니라고... ”나는 그녀에게 사실을 설명하며 그녀를 일으켜 세우려고 애썼다.바로 그때, 옥상으로 많은 사람이 밀려왔고 한소연은 여전히 울고만 있었다.“현우 씨...저 다리가 너무 아파요...”이내 탄탄한 몸을 가진 누군가가 쏜살같이 달려왔고 나는 자리를 내어 한소연의 상처를 살펴보게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발목의 극심한 통증으로 인해 서 있지 못하고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고개를 들자 깊고도 차가운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눈에는 뜻 모를 깊은 심연이 담겨있었다. 몇 초간 시선을 맞추더니 그는 바로 몸을 굽혀 한소연을 바라보며 물었다.“괜찮아요?”“다리가... 너무 아파요...”그녀는 본능적으로 구조물 아래에 깔린 다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나는 멍하니 배현우의 얼굴을 바라보며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그는 황급히 구조물을 치우고 조심스럽게 한소연의 다리를 문질렀다. 그녀는 애교 섞인 목소리로 소리 질렀다. “현우 씨...아파요!”배현우는 곧바로 한소연을 안아 들고 밖으로 나갔다.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나한테는 눈길 한번 주지 않고 괜찮냐는 말 한마디 없이 한소연
한소연의 광팬들은 장소를 가리지 않았고, 진실 따윈 중요하지 않은 듯 보였다. 병원 앞은 혼돈 그 자체였다.병실의 창문은 깨지고 문은 파손당했으며 그들은 미친 듯이 나에게 날달걀과 쓰레기를 던져댔다. 병실의 상황은 아수라장이 되어버렸고 엉망이 된 채 길거리의 쓰레기통보다도 더러운 모습이었다.혼란 속에서 영식은 나를 보호하려다 온 얼굴에 날달걀을 맞아 엉망이 되었고 흘러내린 달걀이 온몸을 뒤덮었다.얼마쯤 지나, 병원 쪽에서 신고를 하였는지 경찰이 출동했고 앞장서서 난동을 부린 몇몇을 체포하여 데려가고 나서야 상황은 일단락됐다.소문을 듣고 찾아온 도혜선은 오물이 덕지덕지 묻은 채로 무서움에 벌벌 떨고 있는 나를 스스럼없이 안고 울었다.어제 너무 울어서일까, 이미 눈물이 말랐는지 미친 사람들 때문에 무서워 몸이 떨리는 것 외에는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미연이는 화를 못 이기고 바로 한소연이 있는 고급병실로 찾아갔다. 원래 계획은 배현우를 찾아가 따질 생각이었지만 경호원들이 쫙 깔린 덕분에 허탕만 치고 왔다고 한다. 아마 한소연의 휴식에 방해될까 미리 손을 쓴 것이었다.아무런 성과 없이 돌아온 그녀는 분노에 휩싸여 얼굴이 뻘겋게 달아올랐다. 나는 이성을 붙들고 영식에게 냉정하게 말했다.“퇴원하자.”그는 머리를 끄덕이고 도혜선과 잠시 의논하더니 우리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함께 출장을 나간다고 알리고는 바로 퇴원 절차를 준비했다.나가기 전에 도혜선이 간단하게 세수를 시켜줬지만, 여전히 엉망진창인 모습 그대로였다.영식은 휠체어에 달걀 물 범벅인 나를 앉힌 채 밖으로 나갔다. 마침 복도에서 한소연을 보러 온 배현우와 마주쳤다. 시선이 엉키자 그 깊은 눈동자는 찬찬히 내 얼굴에 시선을 맞추더니 고정 장치를 끼고 있는 다친 발로 옮겨갔다. 배현우의 얼굴에는 이상하리만큼 차가운 빛이 서려 있었고 온몸으로 냉기만을 뿜어내고 있었다. 나는 그가 주먹을 꽉 움켜쥐는 것을 보았다.나는 담담하게 눈을 피하고 무표정을 한 채 그대로 그를 지나쳤다.옆에 서 있
이동철은 아침 일찍 우리 집에 와서 USB에 담긴 내용을 보여 주었는데, 안에는 사건의 자초지종이 담겨있었다.“사실 일이 있고 난 뒤에 장 부장님이 한지아 씨를 병원에 데려다주었고 제가 옥상 CCTV를 확인했지만 그 시간대의 CCTV가 해킹되어서 아무것도 찾지 못했어요. 스타라이트는 천우 그룹에 소속되어 있는 호텔이기 때문에 감히 그들의 시스템에 들어갈 수 없었지만, USB에 있는 이 자료들을 보면 분명 누군가가 우리보다 기술이 더 뛰어나고 ... 그러니까 아마도 이 자료들은 출처가...”이동철이 말을 계속하지 않았지만 우리 두 사람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마음이 통했기에 당연히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잘 알고 있었다.USB에 인적, 물적 증거가 모두 있다는 것만으로도 난 매우 우스꽝스럽게 느껴졌고 이 자료들은 생각보다 너무 빨리 왔고 한눈에 알아볼 수도 있었지만 그 배후에서 조종하는 사람이 좀 마음에 들지 않았다.그 사람은 나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더구나 만난 적도 없는 헤라의 앞잡이 아린이었다.이동철은 나를 보며 잠시 머뭇거리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지아 씨 계속 조사할까요? 저도 이 일이 아린이가 한 짓이라고 믿지 않아요. 그는 단지 희생양일 뿐인 것 같아요!”난 냉소를 지었다.“조사해요! 하지만 희생양이 있는 이상 단 한 명도 헛되이 희생시켜서는 안 되죠. 이 일은 반드시 끝을 맺어야 해요. 그렇다고 내가 진실을 알고 싶지 않은 건 또 아니에요!”이동철은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요!”“이해월과 법무팀에게 새로운 방안을 짜라고 해요. 기자회견을 진후 빌딩의 1층 로비에서 열 거예요. 시간을 모레 오전 10시로 정하고요. 명단에서 가장 심하게 난동을 부린 기자들을 한 명도 빼놓지 말고 모두 모셔요. 구 변호사에게 개인이든 단체든 아니면 기업이든 하나도 빠짐없이 고소하고, 공개적으로 나에게 사과하라고 통보하세요! 경찰서에 가서 입건하고 돈을 받고 일한 매체, 악성 댓글 게시자들... 난 무조건 그들의 법적 책임을 물을 것이고 반드시 그들
그 기자들은 누군가가 나서서 말하자 모두 주동적으로 길을 내주었고 이동철은 나를 호위하며 차에 타서 곧장 회사로 향했다.백미러로 나는 그 사람들이 흩어져서 제 갈 길을 가는 것을 보았다.이때 회사 아래층에도 광적인 기자들이 웅크려 앉아 있었고 또 한소연의 팬들로 지하 차고까지 인산인해였다.다행히 이동철의 반응이 매우 빨라 조용히 차를 후진시켜 진후 빌딩을 빠져나갔고 나는 갑자기 경공관이라는 좋은 회의 장소가 떠올랐다.그래서 난 이동철에게 경공관에 모이라고 전달하게 했는데 회사랑 거리가 가까워서 얘기하기 딱 좋은 곳이었다.경공관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갑자기 내가 지금 가장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을 보았고 정말 생각지도 못했다. 보고 싶을 때는 아득히 먼 곳에 있더니 보고 싶지 않을 때는 눈만 들면 보이는 곳에 있었다.그 순간, 나는 몸이 굳어졌고 시선은 서서히 뭇 여자들을 매혹하는 냉담하고도 준엄한 그의 얼굴에 머물렀다. 난 나를 부축하고 있는 이동철의 손을 필사적으로 붙잡았다. 그 순간 버팀목이 너무나도 필요했다.그러자 이동철은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멋지게 인사를 건넸다.“배 대표님 안녕하십니까, 여기에 계셨군요. 아, 이 대표님도 계셨네요!”“응, 일이 좀 있어서.”낮은 어조로 말하는 배현우의 눈은 계속 내 얼굴을 응시했다. 그러고 나서 그는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발은 괜찮아요?”나는 웃으며 담담하게 말했다.“괜찮아요, 감사합니다!”그리고 나는 계속 한쪽에 서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이청원을 바라보며 말했다.“이 대표님, 돌아가시려고요?”그러자 이청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내 발을 살폈다.“이렇게 심각하게 다친 거예요? 아직도 안 나았다니, 푹 쉬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괜찮아요. 임시로 일이 있어서 온 거예요.”나는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말했고 이동철의 손을 잡았다.“들어가요! 이 대표님 먼저 실례하겠습니다.”나는 배현우를 한 번도 쳐다보지 않고 없는 사람 취급을 했다. 이동철이 나를 부축하여 안으로 들어갔는
우리 쪽에서는 준비가 한창이었고 내가 모레 기자회견을 한다는 기사가 인터넷에 들끓고 있어 또다시 사태를 고조로 이끌었다.일부 활동적인 네티즌들은 기자회견 때 진실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팬들을 모으고 있었는데 아마도 기자 회견 때 짚고 넘어가려는 듯싶었다. 난 그저 별 생각 없이 기자회견을 열려고 했는데 이렇게 큰 소동이 일어날 줄은 몰랐다.종일 준비를 다 보니 기진맥진했고 이미연은 지친 내 모습을 보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지아야, 일단 내가 널 집에 데려다줄게!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해, 모레 기자회견은 우리가 아무리 주도면밀하게 계획했다고 해도 네가 컨디션이 좋아야 임기응변할 수 있어. 지금 네 상태 너무 안 좋아.”도혜선은 계속 이미연에게 눈짓하며 말하지 말라고 했고 나는 콧등을 쓱 만지고는 한숨을 쉬었다.“난 괜찮아. 기자회견이 끝나면 푹 쉴 거야!”입으로는 이렇게 말했지만 나는 마음에 응어리가 맺힌 상태로는 아무리 쉬어도 제대로 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아킬레스건을 다쳐서 발을 백일 동안 땅을 밟을 수도 없는데 내가 어디에 갈 수 있단 말인가?기분을 푼다는 것은 말이 안 되었다, 기분은 풀 수 없었고 세상 끝까지 갔다고 해도 풀리지 않을 것이다.“참 너에 대해서 좀 말해볼까?”나는 갑자기 고개를 들어 이미연을 바라보았다.“내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지 않아도 돼. 넌 내가 그날 밤의 일을 잊은 줄 알았어?”도혜선은 내 말을 듣고 이미연을 바라보았고 영리한 도혜선은 분위기를 순식간에 파악하고는 얼른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물어보았다.“뭐야? 내가 모르는 게 또 있어?”이미연은 나를 쳐다보며 어색한 표정을 지었고 얼른 화제를 돌리려고 했다.“아이고, 말 좀 끊지 마. 물어보잖아, 집에 갈 건지 말 건지. 지금이 몇 시인데...”도혜선은 어렵게 짚은 대화의 포인트를 쉽게 놓칠 리가 없었다.“에이, 너야말로 말 돌리지 말고 빨리 말해, 무슨 일이야?”“아무것도 아닌데?”이미연은 바보인 척했고, 나는 애써
사실, 이 순간, 나는 무슨 말을 해도 늦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날 밤의 상황으로 볼 때, 이미연은 이미 헤어나올 수 없는 상태였고 그 남자는 이미 그녀의 마음속에 제대로 자리를 잡았다.이미연은 땅이 꺼지게 한숨을 내쉬었다.“너희들은 다 경험이 있는 사람이니까 잘 알 거야. 감정 같은 건 정말 아무도 모르는 일이야. 사랑에 빠지면 그게 사랑인 거지, 되고 안 되고의 문제가 아니야!”분명히 이미연은 변명하고 있었는데 난 그녀의 말이 틀렸다고 반박할 수 없었다.도혜선과 서강민 그리고 나와 배현우처럼, 누가 우리의 사랑이 틀렸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이 선택은 틀렸고 둘 사이에 결과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당시의 설렘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용감하게 앞으로 나아갔다.“얘기해 봐, 우리가 못 본 지 얼마 안 됐는데 왜 이런 늪에 빠진 거야?”도혜선은 조금 기가 막혔다.“이런 감정이 얼마나 쓰라린지, 이건 일종의 파멸이라는 것을 너 알고 있어? 설마 우리 셋 중에 하나라도 행복하면 안 된다는 거야?”나는 도혜선의 말에서 허탈함을 알아챘다. 사실 나와 도혜선의 감정사에 비교해 보았을 때 그녀는 여전히 희망이 있었지만 나와 배현우가 잘 될 가능성은 이제 하늘의 별 따기가 되었다.“난 네가 도도하고 제멋에 사니까 아직 감정에 발을 들여놓지 않은 줄 알았어. 그래서 앞으로 좋은 기회가 많은 줄 알았고 지아도 배현우와 좋은 결실을 볼 줄 알았는데... 봐봐, 우리 왜 이러는 거니? 내 인생은 이미 영혼 없는 삶으로 결론 났어. 하지만 넌 이런 불구덩이에 뛰어들면 안 돼!”“너희들이 날 좀 도와줄래?”이미연은 어쩔 수 없이 우리 둘에게 도움을 청했다.“미연아, 내가 너에게 겁주려고 하는 말이 아니야. 이런 감정은 정말 영원한 재앙으로 다가올 거야!”도혜선은 이미연에게 정색했고 나는 너무 어이가 없어서 뒤로 누워 찻상 위에 다친 발을 올려놓고는 트림을 하며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나도 알아, 좋은 결과는 없을 거라는 걸... 그런데 나도 날
도혜선은 이미연을 쳐다보았지만, 사실 우리 둘 다 마음속으로 이 관계를 끊는다고 바로 끊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이미연은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도혜선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배현우는 그래도 정직한 사업가지만 문기태는 정말 예측할 수 없는 인간이야. 미연아, 내가 정말 너에게 겁주는 려는 게 아니야.”뜻밖에도 도혜선의 말이 끝나자 이미연이 고개를 들고 입꼬리를 살짝 치켜들었다.“알아! 그 사람을 알게 된 첫날부터 나는 알고 있었어!”“한지아... 너 지금 봤어? 망했어... 이 계집애는 정말 끝장이야, 구제 불능이라고!”도혜선은 이미연의 태연한 모습에 어이없는 웃음을 지었다.“일이 숨돌릴 새 없이 일어나네. 지아의 일이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네가 또 일을 만드는구나.”“내가 무슨 일을 만들었다고 그래! 일이 나를 건드린 거야!”이미연은 인정하지 않으면서 소리 질렀다..“이것은 하늘의 뜻이라고!”“야 됐어, 이게 무슨 하늘의 뜻이야?”도혜선이 코웃음을 쳤다.“이미연. 넌 그 사람 아내에게 이 사실을 들켜야 무엇이 하늘의 뜻인지 알 거야.”나는 질의의 눈길로 도혜선을 바라보았다.“무슨 말을 또 그렇게 무섭게 해?.”“하...”도혜선은 내 말을 듣고 완전히 무너졌다.“내 말 좀 들어봐, 남미주는 완전 마녀야. 그녀가 한 모든 일을 글로 써도 다 못 쓴다고. 미연아, 내가 충고하는데 넌 좀 조심하는 것이 좋겠어. 문기태일지라도 남미주를 어찌할 도리가 없다고.”“우리 항상 조심하고 있어.”이미연은 우리를 보고 속삭였다.“사실, 이 일은 설명하기 어려운데 첫 만남부터 얘기하기가 힘들어.”나는 이미연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고 의아해했다.“이미연, 너 또 무슨 고생을 사서 하려고 그래?”한순간 어떻게 말려야 할지 몰라 무력감이 점점 커지는 것 같았다.“됐어, 이제 나에 대해서는 말하지 말자. 어쨌든 될 대로 되겠지. 지금은 그래도 지아의 일이 제일 우선이잖아. 그리고 문기태는 너희들이 생각하는 것
나는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 마지못해 고개를 들어 서강민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서강민 씨, 먼저 들어가시죠. 언니가 깨서 서강민 씨를 보면 또 흥분할 것 같은데... 지금 같은 상황에 언니가 회복하는 게 제일 중요하잖아요.”그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는 않았지만, 나는 한마디 더 보탰다.“어떤 일들은 천천히 해야 해요. 언니한테 시간을 좀 주세요. 서로 생각을 정리해 봐요.”서강민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않고 깊은 잠에 빠진 도혜선을 한참이나 지켜보았다. 발길을 돌리기 전에도 아쉬움에 한 번 더 뒤돌아보며 나한테 말했다.“고생해 줘요.”나도 담담히 답했다.“제가 해야 할 일인걸요. 언니에게 시간을 좀 줘요. 언니도 회복할 시간이 필요할 수 있잖아요.”내가 말하는 회복이 뭔지는 서강민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건 도혜선이 마음에 입은 상처였다. 오늘 도혜선의 행동에서도 알 수 있다시피 그녀의 상처는 아물 수 없을 것이다. 언급만 해도 피가 흘러내릴 만한 상처였다.잠시 후, 서강민은 한발 물러섰지만, 눈길은 여전히 도혜선에게 머물러 있었다. 평온해 보이는 모습 아래에서 어떠한 파도가 휘몰아치는지 나는 몰랐다.한참 전 도혜선이 했던 말들은 마디마디가 주옥이었다. 모두 그녀가 마음속으로만 담아두었던 것들이었고 또한 서강민의 약점이었다. 얼마나 아플지는 서강민 본인만 알고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쓰디쓴 독주도 그는 혼자 삼켜내야만 했다.도혜선의 눈가가 파르르 떨려와 깨어나려는 낌새가 보이고 나서야 서강민은 조용히 병실을 나갔다.나는 마음이 아파와 한숨을 내쉬며 손을 뻗어 도혜선의 손을 맞잡았다.인제야 하루 종일 배현우에게서 연락이 없었다는 것이 생각났다. 그쪽에는 어떤 상황인지, 김우연에게서는 소식이 없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도혜선을 보니 아직 깨어나지 않은 것 같아 살며시 그녀의 손을 놓고 일어서려 했을때, 그녀는 다시 나를 잡으며 미약한 목소리로 말했다.“가지 마...”나는 너무 놀라 얼른 그녀를 향해 몸을 돌렸다.
‘서강민은 본인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기나 하는 걸까?’“당시의 사고는 내가 저지른 거야. 그녀도 나 때문에 다쳐서 지금처럼 된 거고… 나는 좋은 남편이 아니야. 아내가 식물인간이 되었는데 나는 다른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으니 말이야...”서강민은 여기까지 말하며 후회하는 기색을 내비쳤다.“그녀를 마주할 때마다 너무 죄책감이 들고 고민스러워. 나 또한 발버둥 쳐봤지.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나의 일탈을 받아들일 수 있어 해. 그녀한테 정말 미안한 일이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내가 널 사랑하고 있다는 거야...”“강민 씨!”도혜선은 꾸짖는 듯한 말투로 그의 말을 잘랐다.“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고 당신 아내가 듣고 있을 거예요. 저를 끌어들여서 같이 속죄할 생각하지 마세요. 저는 당신의 구세주가 아니에요. 저는 그냥 사람답게 살고 싶은 평범한 여자라고요. 저 좀 그냥 내버려둘 순 없어요?”도혜선은 말하면 할수록 화가 치밀어 올라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하얗게 질린 얼굴이 일그러지며 그녀는 한 손으로 본능적으로 가슴을 움켜쥐었다. 나는 깜짝 놀라 그녀 앞으로 갔다.“혜선 언니, 움직이지 마! 위험해...”늑골 골절과 뇌진탕이 있는 환자다 보니 이러한 행동은 그녀에게 너무나도 위험했다.도혜선은 손을 들어 그녀를 안으려고 하는 한지아를 제지했다.“제가 오늘 한 말이 아직도 이해가 안 되나요? 서강민 씨, 저의 인생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당신한테 묶여 당신의 부속품이 되었었는데 저도 자존심이 있어요. 더 이상 당신처럼 지난날의 죄책감을 짊어지며 답답하게 살아가지 않을 거예요.”도혜선은 여전히 분노에 차 외치고 있었다.“매일 제 앞으로 와 지난날의 행동에 대해 속죄하라고 일깨워 주실 필요 없어요! 당신을 보면 저는 지난날 모든 서울 사람의 웃음거리가 되었던 치욕적인 과거가 떠올라요. 당신은 마음 가는 대로 해요. 당신은 아내와 했던 약속을 지켜야 해요.”말을 마친 도혜선은 숨이 차올랐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보였다.
도혜선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계속하여 들려왔다.“당신은 아무런 부담 가질 필요 없어요. 저 같은 여자 마음속에 담아두지 않아도 돼요.”그녀는 자기비하적인 말을 내뱉었다.”선아...”“설사 강민 씨가 와이프와의 약속을 안 지킨다 해도 당신의 신분과 지위로 당신에게 더 어울릴만한 사람 충분히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저는 당신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에요. 하물며 당신네 부부 눈에는 저는 그냥 염치없고 미천한 사람일 뿐이죠. 저 같은 사람은 본처가 되기에 적합하지 않아요. 사모님이라는 호칭도 어울리지 않죠.”“나는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 오해하지 마.”서강민은 조급함에 한 발 앞으로 나서며 해명하려 했다.하지만 도혜선은 손을 들어 그를 막아섰다.“강민 씨... 해명하지 않아도 돼요. 당신의 행동이 모든 걸 설명해 주고 있어요! 장담하건대 아직 당신들이 어떤 의도로 얘기하고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바보가 된 건 아니에요. 그녀는 정말 대단하네요. 죽을 때까지도 제가 이길 수 없는 사람이었어요. 그녀는 아무리 병상에 누워있어도 고상한 사람이고 저는 그냥 미천한 사람일 뿐이니 말이에요.”도혜선은 말을 내뱉으며 입가에 처량한 미소를 비췄다. 누가 봐도 가슴 아픈 미소였다.“이전의 저는 확실히 허례허식에 차 있는 사람이었지만 저도 성장했어요. 정신 차렸어요. 당신 앞에 있는 저의 진정한 가치가 어떤 것인지 깨달았어요. 저는 하나의 도구, 들러리뿐이었지만 원망하지 않았어요.”그녀는 여기까지 말하고 한숨 돌렸다. 얼굴빛은 아까보다 더 창백해져 있었다.“하지만 이제 저는 자존감을 챙기며 살고 싶어요. 누군가에게 의탁하지 않고 쓰레기같은 취급을 받더라도 최소한의 존엄을 지키며 살고 싶어졌어요.”점점 더 차가워지는 도혜선을 바라보며 서강민은 답했다.“혜선아, 나는 널 한 번도 무시한 적 없어. 나는 그냥 내가 뭘 하든지 네가 다 이해해 줄 줄 알았어.”도혜선의 서강민의 말을 듣고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안색은 더 창백해져 있었다.“이해? 당신이 어떤 말을
방금 허투루 한 말이 어머니의 진실인가 싶다. 보아하니 어머니가 나를 속이는 일이 있는 것 같았다. 마음속의 의문점이 점점 많아졌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식사를 마치고 차씨 가문의 할머니께 말씀을 드린 후, 위층으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고 도혜선을 보러 가려고 준비했다.그리고 팔도 겸사겸사 검사하려고 했다. 차에 앉고 나서 배현우한테 전화를 걸었는데 받지 않았다. 이 이른 아침에 뭐 하러 갔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김우연 쪽에 무슨 소식이 있는 건 아닌지 걱정했다.'생각해 보니 이렇게 빠르진 않겠지? 몇 시간밖에 안 됐는데.'병실에 도착하자마자 도혜선이 노발대발하는 장면을 포착했다. 병실에는 도혜선과 서강민 두 사람만 보이고 이미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내가 들어서자 분위기가 좀 이상하고 심상치 않는 것을 느꼈다.침대 옆 머릿장에는 보온병이 놓여있다. 서강민은 오늘도 도혜선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주러 온 것 같다.서강민은 침대 앞에 떡 하니 서있었고 침대에 있던 도혜선은 차가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도혜선은 내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 같았다.상황을 정리하려고 다가가서 서강민에게 인사를 하고 도혜선에게 다가갔다. "오늘은 좀 어때?""별로야."도혜선은 차갑게 대답하더니 또 말을 건넸다. "지아야, 손님 좀 배웅해 줄래?"난감했다, 도혜선은 서강민을 내쫓으라고 하는 거였다. 난 당연히 그 뜻을 알고 있다. 조심스럽게 서강민을 쳐다보았다. "혜선아, 꼭 이래야 하니?"서강민은 씁쓸한 표정으로 도혜선을 바라보며 물었다."네! 서강민씨, 저는 이미 분명히 말했고 두 번 다시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도혜선은 내가 그 자리에 있다고 해서 서강민의 체면을 세워주지 않았다.참지 못하고 웃어 버렸다. "언니, 화 그만 내고 진정 좀 해. 초조해하는 거 알아, 점차 좋아질 거야. 강민씨랑 얘기 좀 하고 있어. 나는 팔 검사해야 돼서, 금방 돌아올 거야!"나는 핑계를 대고 떠나서 그들에게 자리를 비워주었다.
배현우는 나의 우울한 모습을 보고 말했다. "그리고 내가 없는 동안에 회사 일도, 한심로얄의 마지막 한방도 둘 다 포기할 수 없잖아요. 신예 쪽 일도 있고, 전희가 다시 살아날 기회를 얻지 않도록 조심해야 돼요. 지금 모든 게 중요한 시기이니까요.""지금 그 누구도 아버지보다 중요하지 않아요! 수십년간 도망치면서만 살았는데 죄책감도 가지고 있었을 거예요, 분명 아주 괴로워하고 있을 거예요. 그리고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무도 모르고 있는데, 내가... 내가 딸로서, 난..."배현우는 내 말을 듣고 나서 침대에 누워 나를 꼭 껴안고 말했다. "일단 내일 소식을 기다려 봅시다. 김우연 쪽에서 어떤 정보를 얻었는지 보고 결정합시다."배현우는 나의 어깨를 툭툭 쳤다. "제 말 듣고 일단 자세요, 내일 일어나서 먼저 할 일들을 처리하고 준비하고 있으세요, 만약에 상황이 좋으면 내일 같이 데리고 갈게요, 당신 마음 충분히 이해해요."배현우가 지금 나를 위로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다. 내가 기분 나빠하는 모습을 보지를 못한다. 그 말을 들으니 마음이 좀 편해지는 것 같았다. 배현우의 따뜻한 품에 안기며 눈을 감고 내일 먼저 무엇을 처리해야 할지 생각했다.근데... 눈을 떠서 배현우를 쳐다보는데 배현우도 잠에 들지 않았다. "현우씨... 할머니가 보존하고 있는 CCTV를 보여주시겠어요?"'그 영상을 꼭 보고 싶었다, 알고 싶었다. 어머니가 어떻게...'"알았어요, 하지만 지금은 자세요, 나중에 보여 드릴게요. " 팔짱을 끼더니 분명히 나를 얼버무리고 있는 것이다. 배현우가 그 장면을 내게 보여주고 싶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밤이 깊었고, 비까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꼼짝도 하지 않은 채 배현우의품에 안겨 점점 잠이 들었다. 아침이 밝았다. 날씨는 여전히 흐렸다. 배현우는 이미 곁에 없었고, 손을 뻗어 그가 누워 있던 곳을 만졌다. 이미 차가운 걸 보니 배현우는 일찍 침대에서 일어났나 보다.'무슨 소식이라도 왔나?'이
"할머니가 이번 사건을 피할 수 있었던 건 당시 큰 병을 앓은 것에 대해 감사해야 했어요. 제 생각에는 반은 꽤병인것 같아요. 직접 사표를 쓰고 나서도 서둘러 호주를 떠나지 않았다는 게 참 슬기로운 선택이었어요.""네?"너무 놀라서 몸 둘바를 몰랐다.배현우는 인정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할머니는 호주를 떠나지 않으셨어요. 그곳에 머물면서 배씨 저택의 인기척을 살피다가 배씨 저택의 요상한 소문들이 완전히 자취를 감춘 뒤에야 조용히 호주를 떠나셨어요."나도 모르게 할머니의 메커니즘에 감탄했다."저도 그때 상황을 잘 몰라서, 할머니도 몸이 허약했고 내 행방을 알아 볼 길이 없어 그 비밀을 계속 지켜왔었나봐요. 부하들이 할머니를 찾고 나서도 여전히 어리석은 척을 하고 있었지 뭐에요."배현우는 그제야 미소를 지었다."할머니께서 저를 두눈으로 직접 보고서야 그걸 꺼냈어요."배현우의 말을 듣고 나니 할머니를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러던 중 배현우가 나를 쳐다보더니 나의 지친 모습을 보고서야 손을 들어 대문을 열어 장벽들이 천천히 열리는 걸 볼 수 있었다.차는 왔던 길을 따라 경원으로 다시 돌아갔다. 벌써 자정이 되어 우리 둘은 차를 세우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층으로 올라가 방에 돌아왔다.'우리를 배신한 소인이 두 집안을 풍비박산 시켰다니. 오늘 밤 일어난 모든 일들은 듣고도 믿기지 않았다.'간단히 씻고 걱정 가득채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태어나서 얼굴도 한번 못 본 아버지가 어디 있는지, 밥은 먹고 다니는지를 걱정해 발 뻗고 자지 못했다. '한강인이랑 한걸은 이미 잡혔는데, 우리 아버지는? 그의 처지는 어떤지.''한씨 부자가 그저 아버지를 인질로 삼아 그들의 안전을 확보하려 했다면 왜 배현우는 그곳의 환경이 복잡하다고 했을가.''이유는 간단하다. 누군가 아버지를 미끼로 삼으려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누구를 보고 싶으려는 걸가?''배현우? 아니면 배유정?'생각할수록 더욱 걱정이 됬다.아버지의 이번생은 이미 충분히 힘들다.어머니랑 서로
나는 걱정스레 배현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배현우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계속 말했다.“후에 목격자 어르신을 찾고서 한강인을 자세히 조사하니 한강인은 이 모든 것이 일어난 뒤에야 천우 그룹을 떠난 거였어요. 지아 씨도 알잖아요. 그때 당시 천우 그룹은 아직 배유정 손에 있었어요.”“현우 씨의 말은 한강인은 배유정 과도 사이가 틀어졌단 말인가요?”나는 추측하며 물었다.“우리가 조사할 때 이상한 단서 하나가 나왔어요. 한동안 배유정도 한강인을 찾았고 심지어 한강인에 대한 추살령도 내렸어요! 참 이상해요. 배유정은 왜 한강인을 죽이라고 지령을 내린 걸까요?”“이유는 하나뿐이죠. 즉 한강인이 분명 무엇을 알아냈거나? 아니면 어떤 일에 참여하였거나?”나는 대답했다.배현우는 고개를 끄덕이었다.“진백이 죽임을 당했듯이 이 안에는 분명 남들한테 들키면 안 되는 비밀이 있는 거겠죠. 우리는 이 단서를 따라 계속 추적해 보니 한강인의 혐의가 점점 더 드러나더군요. 그리고 그의 아들 한결도 같이 도망쳤어요.”“그러고 보니 이 안에는 분명히 또 다른 요소가 있겠네요!”나는 사색에 잠겼다.“그래서 우리는 추측했죠. 한강인은 확실히 이 사건이랑 연관이 있고 둘이 도주하는 과정에 서로 연락하는 빈도를 보아서 부자 둘은 서로 다른 곳에 있는 것으로 판단했어요.”“그리고 한강인이 도망 다니는 그 시기에 그의 모친이랑 누나 모두 영문도 모른 채 실종되었어요. 지금 보니 그분들은 아마 이미 이 세상을 떠난 것 같네요. 이 때문에 한강인은 고두리에 놀란 새가 돼서 끊임없이 도망치며, 이 또한 한강인이 지금의 상태로 되게 한 원인인 것 같아요. 사실 한강인은 원래 지금의 모양이 아니거든요.”배현우의 말을 듣자 나는 저도 모르게 아까 보았던 한강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한강인은 극도의 공포 속에서 엄청 정신적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니면 다른 기타 방식으로 정신을 잃지 않게 버티고 있거나. 그렇지 않으면 사람이 저렇게 말라죽을 정도일 리가 없다.“그리고 한 가
배현우는 나를 한눈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었다.“맞아요. 제 씨 어머니가 얼마나 총명한지 그 누구도 생각지 못했어요. 제 씨 어머니는 책 속에 카메라를 숨겨두고 만약 사고가 난다면 여기에 있는 이 물건을 숨겨두었다가 훗날 믿음직스러운 사람에게 주라고 할머니한테만 똑똑히 당부해 두셨어요!”나는 코가 찡긋거리더니 눈에는 눈물이 핑 돌았다.“보아하니 제 씨 어머니는 분명 위험이 닥칠 거라는 것을 미리 예감했던 거네요!”배현우는 안색이 조금 어두워지더니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갑자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제 씨 어머니는 만약 자신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할머니더러 애들을 데리고 허씨 가문으로 가라고 할머니한테 당부하셨어요.”나는 끝내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고 코를 훌쩍이었다.배현우는 자기 손을 꽉 움켜쥐며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참 생각지도 못한 게 모든 것이 제 씨 어머니의 예상대로 일어났고 감춰둔 카메라에 모든 것이 담겼어요! 근데 할머니는 제 씨 어머니의 뜻대로 우리 둘을 순리롭게 허씨 가문으로 데려가지 못했어요.”“급한 나머지 할머니는 고씨 가문에만 소식을 전했고 그마저도 나쁜 놈들보다 동작이 빠르지 못해 그들이 지아 씨를 데려간 후였어요. 그래서 저만 고씨 가문에서 데려갔어요.”나는 눈물을 닦아내면서 그때 당시의 내가 얼마나 힘없고 무력했을지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다. 갑작스럽게 어머니가 돌아가신 데다가 배현우와 억지로 갈라지게 되었다.배현우는 내 손을 꽉 잡으며 손에 힘을 주었다.나도 배현우 지금의 심정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날 배현우는 눈앞에서 억지로 끌려 나가는 나를 보기만 하고 반항할 수도 없는 그런 무능력함은 아마 배현우한테 평생 잊지 못할 아픔이 되었을 것이다.차 안은 갑자기 조용해졌고 자동차가 앞으로 가는 소리밖에 안 들렸다.한참 뒤에야, 배현우의 잠긴 목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이런 것들을 찾은 후에야 비행기 추락 사고가 떠올랐고 이로써 모든 것들이 비로소 한강인을 추측하게 했으며 그 이후에 우리는 한강인
이 소식은 그야말로 나를 입이 떡 벌어지게 했다. ‘나를 데려간 게 어떻게 그 사람이지?’“맞아요. 우리는 유일한 목격자를 찾았어요. 그 당시 그쪽 산에서 약재를 캐는 어르신이신데 그때는 중년인이셨어요. 하늘의 뜻인지, 우리가 수년을 찾아 헤맨 끝에야 비로소 이 참극의 전부를 직접 목격한 증인을 찾아냈어요.”“그 어르신 정말로 전체 과정을 모두 목격하셨나요?”나는 믿어지지가 않았다. 배현우 얘네가 얼마나 큰 공을 들여야 바다에서 바늘 건지는 것 같은 일을, 그것도 몇 년이 지났는데도 당시의 목격자를 찾아낸 걸까.“어르신의 말로는, 당시 자기는 산 위에서 내려오는 도중에 잠시 계단에서 쉬고 있었는데 그러다가 아래 도로에서 일어나는 광경을 목격했다고 해요. 알다시피 외국에서는 약재를 캐는 일은 엄청 드물어요.”배현우는 엄청 뿌듯한 말투로 말했다.“우리 형제들이 엄청나게 고생 많았어요. 십수 년을 하루같이 귀찮음을 마다하고 사건 지역을 탐방하러 다니면서 일말의 흔적도 소홀히 하지 않았어요.”나도 믿어지지 않아 입을 열었다.“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어요. 참 노고가 많았어요.”“어르신이 말씀하기를 당시의 장면은 엄청 아슬아슬했대요. 부딪힌 차는 거의 굴러떨어지기에 일보 직전이었는데 후에 폭발했대요. 어르신은 우리의 차가 폭발한 뒤 키 크고 마른 한 남자가 차에서 내리는 걸 똑똑히 봤다고 해요. 그리고 그 남자는 길 왼쪽의 언덕 아래로 달려가 무언가를 찾았대요.”배현우는 그때 당시의 장면을 묘사하였다. 나는 머릿속으로 그때 당시의 상황을 필사적으로 상상해 내려고 하니 머리가 또 아파 났지만, 배현우가 말을 멈출까 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당시에 일어난 이 모든 것, 전부 나한테는 엄청난 매력이었다. 나는 지금 내가 찾아낸 산산조각 난 퍼즐들을 하루빨리 제 위치에 맞춰서 하나의 완전한 그림을 만들어 내고 싶었으며 그때 당시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을 되찾고 싶었다.그 뒤로 난 어떻게 Z 국의 만덕동에서 떠돌게 되었고 또 어떻게 지금의 한지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