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 마지못해 고개를 들어 서강민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서강민 씨, 먼저 들어가시죠. 언니가 깨서 서강민 씨를 보면 또 흥분할 것 같은데... 지금 같은 상황에 언니가 회복하는 게 제일 중요하잖아요.”그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는 않았지만, 나는 한마디 더 보탰다.“어떤 일들은 천천히 해야 해요. 언니한테 시간을 좀 주세요. 서로 생각을 정리해 봐요.”서강민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않고 깊은 잠에 빠진 도혜선을 한참이나 지켜보았다. 발길을 돌리기 전에도 아쉬움에 한 번 더 뒤돌아보며 나한테 말했다.“고생해 줘요.”나도 담담히 답했다.“제가 해야 할 일인걸요. 언니에게 시간을 좀 줘요. 언니도 회복할 시간이 필요할 수 있잖아요.”내가 말하는 회복이 뭔지는 서강민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건 도혜선이 마음에 입은 상처였다. 오늘 도혜선의 행동에서도 알 수 있다시피 그녀의 상처는 아물 수 없을 것이다. 언급만 해도 피가 흘러내릴 만한 상처였다.잠시 후, 서강민은 한발 물러섰지만, 눈길은 여전히 도혜선에게 머물러 있었다. 평온해 보이는 모습 아래에서 어떠한 파도가 휘몰아치는지 나는 몰랐다.한참 전 도혜선이 했던 말들은 마디마디가 주옥이었다. 모두 그녀가 마음속으로만 담아두었던 것들이었고 또한 서강민의 약점이었다. 얼마나 아플지는 서강민 본인만 알고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쓰디쓴 독주도 그는 혼자 삼켜내야만 했다.도혜선의 눈가가 파르르 떨려와 깨어나려는 낌새가 보이고 나서야 서강민은 조용히 병실을 나갔다.나는 마음이 아파와 한숨을 내쉬며 손을 뻗어 도혜선의 손을 맞잡았다.인제야 하루 종일 배현우에게서 연락이 없었다는 것이 생각났다. 그쪽에는 어떤 상황인지, 김우연에게서는 소식이 없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도혜선을 보니 아직 깨어나지 않은 것 같아 살며시 그녀의 손을 놓고 일어서려 했을때, 그녀는 다시 나를 잡으며 미약한 목소리로 말했다.“가지 마...”나는 너무 놀라 얼른 그녀를 향해 몸을 돌렸다.
깊은 밤, 딸을 재우고 나서야 난 겨우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침대에 기대어 핸드폰으로 틱톡 동영상을 넘겨보다가 길거리에서 진행하고 있는 라이브 방송 화면에 시선이 꽂혔다.순간, 화들짝 놀란 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화면을 자세히 보려고 핸드폰을 가까이 댔지만 라이브 방송을 진행하던 비제이가 화면을 돌려버렸다.난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고 핸드폰을 쥐고 있던 손에는 땀이 줄줄 흘렀다. 라이브 방송 시간을 확인해 보니 지금 시간 때와 똑같았기에 실시간 방송이 확실했을 뿐만 아니라 라이브 방송 장소가 바로 내가 살고 있는 서울이었다.난 다급하게 남편 신호연에게 영상 통화를 걸었다. 남편이 부산에 출장 간지 3일이 지났는데 조금 전의 라이브 방송에 그의 모습이 찍혔다. 남편은 한 여자의 허리를 감싸고 있었다.연결음이 한참 울리고 나서야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화면이 살짝 흔들리더니 훤칠한 외모의 신호연이 나타났고 그는 카메라를 보며 나에게 다정하게 말을 걸었다.“여보!”“당신 지금 어디야?”난 남편에게 물으면서 화면 속 배경을 자세히 훑어보았다. 식당의 복도인 듯했는데 남편은 흰색 셔츠에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하지만 조금 전에 라이브에서 잠깐 봤던 남자는 분명히 회색 코트를 입고 있었다.“난 고객이랑 밥 먹고 있다가 당신 전화를 받았지. 왜? 무슨 일 있어? 콩이는 자?”남편이 술술 대답했지만 난 여전히 의심이 들어서 계속 물었다.“당신 지금 부산에 있어?”“당연하지. 왜 그래?”남편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화면 속의 나를 쳐다보면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그래? 아… 아니야! 언제 돌아와?”내 질문에 남편이 피식 웃으면서 다정하게 대답했다.“곧 돌아갈 거 같아. 여기 일만 잘 처리되면 바로 돌아갈게. 남편이 보고 싶은 거야? 최대한 일찍 갈 테니까 얼른 자. 난 아직 좀 바빠서 이만 끊을게!”남편은 나에게 입술을 삐죽 내민 뒤, 영상 통화를 끊었고 난 핸드폰을 손에 쥔 채, 남편을 의심한 나 자신에게 살짝 실망스러웠다.신호연은 모
내가 발신자를 확인하려고 핸드폰에 손을 뻗은 순간, 신호연이 갑자기 안방으로 돌아와 핸드폰을 확 낚아채더니 문자 내용을 힐끔 쳐다보고는 멍하니 자리에 굳어버린 나에게 말을 건넸다.“연아가 보낸 카톡이야!”“무슨 일인데 나한테 들키면 안 돼?”내가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남편을 빤히 쳐다보며 추궁했고 괜히 마음이 불안했다.그 카톡 내용은 단 한 마디였다.[혹시 들켰어?]간단한 몇 글자에 너무도 많은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나에게 뭔가 들킬까 봐 걱정하고 있는 게 분명했을 뿐만 아니라 왠지 말투도 야릇해 보였다.난 신호연을 빤히 쳐다보면서 불길한 예감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이때, 신호연이 갑자기 피식 웃더니 핸드폰을 침대 끝에 다시 놓아둔 채, 나를 품속으로 확 잡아당기더니 가볍게 입을 맞추면서 말했다.“이상하게 생각하지 마! 네가 아니라 우리 엄마 얘기야! 연아가 또 나를 내세워서 엄마한테서 돈을 가져갔거든!”신연아는 신호연의 여동생으로 어렸을 때부터 몸이 허약하고 잔병치레가 많았기에 남편 집에서 애지중지 키웠던 것이다. 덕분에 부잣집 공주님 성격이 되어버린 신연아는 20대 중반이 되었지만 여태껏 일도 안 하고 여기저기 여행만 다니고 있었다.“어머님 돈을 가져갔다니, 어머님 돈이 결국 누구 돈인데?”내가 입을 삐죽 내밀면서 말하자 신호연이 실실 웃으면서 알몸인 나를 번쩍 안더니 연신 뽀뽀를 하며 욕실로 향했다.“그럼, 그럼, 다 우리 여보 돈이지! 난 착하고 마음이 넓은 와이프가 있어서 너무 좋아!”난 늘 남편의 이 한마디에 넘어갔었다. 결혼해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시댁에 인색한 적이 없었으며 가정이 평화로워야 모든 것이 잘 풀린다고 여겼다.또한 내가 진심으로 상대방을 대하면 상대방도 그만큼 나에게 진심을 보일 것이다.욕조에서 남편의 사랑을 듬뿍 받은 난 기분이 너무 좋아서 불안했던 마음과 원망스러운 마음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늦은 밤, 침대에 누운 난 신호연의 품에 안겨 아파트 얘기를 다시 꺼낼 수밖에 없었다. 결혼하고부터
“그저께? 어디서 봤는데?”난 자신도 모르게 말이 빨라졌고 이미연은 이런 나를 어리둥절하게 쳐다보며 되물었다.“반응이 왜 이래?”“그 사람을 어디서 봤는데?”난 그녀의 말에 대답할 겨를도 없이 추궁했고 바로 이때, 그녀의 핸드폰이 울렸으며 발신자를 확인한 그녀는 나에게 조용히 하라고 손짓하면서 몸을 뒤로 기댄 채, 전화를 받았다.“뭐? 내가 지금 당장 거기로 갈게!”통화를 하던 이미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나를 힐끔 쳐다보다가 이내 노트북을 탁 닫더니 황급히 밖으로 향했다.“나중에 다시 연락할게. 나 먼저 간다!”“아니… 야!”이미연은 나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나를 가게에 덩그러니 남겨두고 부랴부랴 떠나갔고 난 그녀가 남긴 말을 곱씹었다.‘그저께 신호연을 만났다고? 그저께라면 남편은 분명히 부산에 있었는데 이미연은 남편을 어디서 본 거지? 그럼 그 시간에 미연이도 부산에 출장 간 건가? 그런 기막힌 우연이 있다고?’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입을 꾹 닫은 채 앉아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불안감이 엄습했다. 라이브 방송에서 봤던 장면이 다시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그 사람이 신호연이 맞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설마 신호연이 나에게 거짓말을 한 건가? 애초부터 부산에 가지 않은 건가? 남편에게 여자가 생긴 걸까?’한 홀로 멍하니 디저트 가게에 앉아 머릿속이 복잡해졌으며 온몸은 어느새 얼음장 마냥 차갑게 식어버렸다.‘만약 신호연이 정말 바람을 피운 거라면 난 어떡해야 하지? 우리 콩이는 어떡하지? 우리 가정은 어떻게 되는 거지?’난 영혼을 잃은 시체 마냥 해롱해롱한 정신으로 하루를 보내느라 어린이집에 콩이를 데리러 가는 것마저 잊었다.다행히 신호연이 일찍 퇴근한 덕분에 아이가 집에 없는 걸 눈치채고 다정하게 날 위로해 준 뒤, 어린이집으로 향했고 난 겨우 정신을 차리고 나서 식사를 차리러 주방으로 들어갔다.신호연과 아이가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신연아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그녀는 우리 집 비밀번호를 알고 있었기에 본인 집처럼 들락
난 얼른 핸드폰을 들고 안방으로 들어가 전화를 받자마자 이미연에게 원망을 털어놓았다.“너 어떻게 그런 말만 남겨두고 도망갈 수 있어?”“회사에 문제가 좀 생겨서 급했어. 지금 막 처리하고 너에게 전화하는 거야. 왜 소리를 질러! 내가 너처럼 그렇게 한가한 줄 알아?”이미연의 목소리는 매우 피곤해 보였다. 잠시 머뭇거리던 난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그게… 너 그저께 신호연 봤다고 했잖아. 몇 시에 어디서 봤어?”난 하루 종일 이 질문을 하고 싶어서 미칠 것만 같았고 전화기 너머 이미연은 흠칫 놀란 듯하다가 이내 덤덤하게 대답했다.“나도 어디서 봤는지 기억은 안 나. 차를 타고 가다가 우연히 본 거거든.”“그래?”왠지 모르게 난 이미연의 대답에 살짝 실망스러웠다. 하지만 덕분에 전전긍긍하고 있던 마음은 훨씬 홀가분했으며 피가 날 정도로 꽉 쥐고 있던 주먹도 스르르 풀렸다.어떻게든 신호연이 바람을 피웠다는 걸 입증하고 싶어 하는 나 자신에게 너무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신호연이 나의 하늘이고 그 하늘이 무너질까 봐 늘 조심스러운 건 사실이다.“넌 진짜 남편밖에 모르는구나. 신호연 이름만 언급되면 이렇게 신경을 곤두세우다니. 너도 이제 너 자신을 좀 가꿔 봐. 콩이도 어린이집에 보냈으니까 너도 네 할 일을 찾아야지. 설마 평생 신호연의 부속품으로 살 건 아니지? 너 그러다가 사회와 완전히 멀어져서 네 세상에 신호연 한 사람만 남을 수도 있어!”이미연이 구구절절 얘기하며 나에게 호통을 쳤고 입장이 난처해진 난 한숨을 푹 내쉬며 대답했다.“근데 신호연이…”“거 봐. 맨날 신호연, 신호연. 내 말이 맞지? 네 세상에는 이제 신호연밖에 없어. 그 사람 말이 법이고 성지가 됐다고! 너 그러다가 신호연이 죽으라면 죽을 거야? 널 어디에 팔아버려도 좋다고 실실 웃을 거야?”이미연이 한심한 듯 꾸짖었고 그 말에 난 버럭 반박했다.“퉤! 너 진짜! 그런 말 하지도 마! 신호연은 날 너무 사랑해서 절대 날 못 팔아!”“그래, 그래. 네 말
”오빠, 나 바래다주면 안 돼?”식사를 마치고 잠시 소파에 앉아있던 신연아가 신호준에게 말했고 그 모습에 내가 신연아를 힐끔 째려보았지만 그녀는 못 본 척하며 신호연의 팔을 잡고 계속 흔들었다.신호연은 난감한 표정으로 날 쳐다보며 내 의견을 묻는 듯했지만 내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자 신호연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조금만 기다려. 네 형수를 도와서 설거지만 하고 바래다줄게.”난 신연아의 꼴을 일 초도 더 보기가 싫었기에 신호연을 보며 손을 흔들었다.“얼른 바래다줘! 나 혼자서 치울 수 있어!”“아빠! 어디 가요? 나도 갈래요!”의자에 앉아있던 콩이가 벌떡 일어나 작은 손을 뻗으며 말하자 신호연은 아이가 혹시라도 떨어질까 봐 재빨리 아이를 안은 채, 볼에 가볍게 뽀뽀를 했다.“아빠 바로 올게! 엄마랑 잠깐만 놀고 있어. 착하지?”“어린 게 왜 따라오려고 그래?”신연아는 콩이에게 전혀 관심이 없었고 심지어 아이를 너무 귀찮아했다.“콩이야, 아빠는 고모를 바래다주러 가는 거야. 조금만 있으면 돌아올 거니까 엄마랑 잠깐만 있어주면 안 돼?”내가 아이를 건네받은 뒤, 아이에게 묻자 콩이가 맑고 고운 눈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고 팔로 내 목을 감싸더니 고개를 돌려 신호연에게 말했다.“그럼 일찍 와요 아빠!”“알았어!”콩이의 이마에 뽀뽀를 남긴 신호연이 차 키를 챙겨 신연아와 집을 나섰고 오빠의 팔짱을 꽉 잡고 있던 신연아는 고개를 돌려 나를 보며 의기양양하게 웃었다.이날 밤, 일찍 들어오겠다던 신호연은 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지극한 효자인 그가 또 부모님과 얘기를 나누느라 늦은 거라고 여긴 나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이튿날 아침, 일찍 일어난 신호연은 9시에 중요한 회의가 있다고 하면서 내가 힘들까 봐 겸사겸사 아이까지 어린이집에 데려다주었다.신호연은 이렇듯 다정하고 세심한 사람이었으며 덕분에 난 신경 쓸 일이 거의 없었다. 이미연의 말처럼 신호연은 나를 완전히 애지중지 아꼈으며 모두가 인정하는 일등 남편이었다.
신흥 건재 회사가 진후 빌딩으로 이사 온 뒤, 난 이사 초기에 딱 한 번 회사에 와봤으며 그것도 신호연이 나를 데리고 구경한 것이다. 회사가 건물 전체를 전세 냈으며 보기만 해도 너무 화려하고 성취감이 느껴졌다. 그날 신호연은 나를 꽉 껴안으며 사무실 창가에 서서 세상 다정한 목소리로 나에게 약속했다.“고마워, 여보! 당신이 나에게 마음껏 꿈을 펼칠 자본을 만들어줬어! 난 상상치도 못한 인생을 살게 되었어! 내가 더 힘내서 조만간 이 건물을 당신에게 선물로 줄 테니까 나 믿고 딱 기다리고 있어!”이런저런 생각에 난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지금 신호연이 두 손으로 직접 이 모든 걸 부수고 있는 셈이다.건물에 들어서자 데스크를 지키고 있던 직원이 나에게 몇 층으로 갈 건지, 또 누구를 찾는 건지 물었다. 내 입에서 신호연 이름이 언급되자 직원이 나를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공적인 태도를 장착한 채 말했다.“죄송합니다! 신 대표님은 지금 자리에 없습니다. 사모님과 함께 나가셨습니다!”난 순간 번개라도 맞은 듯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이곳에 오기 전에 충분한 마음의 준비도 했고 별의별 상황을 전부 상상했지만 이런 답을 듣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가방을 꽉 움켜쥔 난 최대한 감정을 억누르며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뭐라고요? 혹시 뭔가 오해가 있는 거 아니에요?”“전 오해할 리가 없어요. 10층 신흥 건재 회사의 신호연 대표님을 찾으시는 거 아닌가요? 그분은 확실히 아침 일찍 사모님과 나가셨습니다.”직원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확신에 찬 듯 말했다. 그녀의 단호함에 머리가 복잡해진 난 대체 같이 나간 그 사모님이 누구인지, 그러면 난 또 누구인지 너무도 물어보고 싶었지만 끝내 참은 채, 이를 악물고 진후 빌딩을 나섰다.난 최후의 체면을 챙기고 싶었던 것이다. 또한 저 직원이 잘못 알고 있는 거라고 믿고 싶었으며 신호연에게도 최후의 양심을 남겨주고 싶었다.데스크 직원의 말을 확인하기 위해 난 떨리는 손으로 신흥 건재 마케팅 부서의 서강훈에게 전화를 걸
신호연이 딸을 데리고 집에 돌아왔을 때, 난 이미 요리를 끝낸 상태였다.“엄마, 저 다녀왔어요! 아빠가 저를 데리러 왔어요!”콩이가 토끼 마냥 총총 뛰어와 나에게 말을 걸었고 그 앳된 목소리에 순간 눈시울이 붉어진 난 억지로 눈물을 참으며 대답했다.“우리 콩이가 제일 좋아하는 딸기 사 왔어!”“와! 엄마 최고! 지금 먹을래요! 얼른 먹고 싶어요!”방방 뛰던 콩이가 돌아서서 신호연에게 달려가 안기며 계속 졸랐다.“아빠, 저 딸기 먹을래요!”“그래, 그럼 일단 하나만 먹고 나머지는 밥을 먹고 나서 먹자!”신호연이 딸기 한 알을 씻어서 콩이에게 건넸고 좁은 주방으로 들어오더니 뒤에서 나를 껴안으며 물었다.“오늘 맛있는 거 왜 이렇게 많이 했어?”마음이 너무 씁쓸했다. 이렇게 화목하고 행복한 가정인데 한순간에 위기에 빠지다니.“출장 다녀오느라 고생했잖아! 오늘 바빴어?”난 피식 웃으며 덤덤한 표정으로 물었고 그는 나의 어깨에 기대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마음이 철렁 내려앉은 나는 팔꿈치로 그를 밀쳐내며 말했다.“수저 챙겨, 얼른 밥 먹자!”난 그의 스킨십에 헛구역질이 났다. 나를 안고 있는 이 순간에도 다른 여자를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 의심됐다.“한잔할래? 오랜만에 술을 마시고 싶네.”식탁에 앉아 억지웃음을 보이며 그에게 묻자 신호연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물었다.“왜 갑자기 술을 마시고 싶어?”“별다른 일도 없잖아. 당신 또 나갈 거 아니지? 맛있는 거 많이 했는데 분위기 있게 한잔해야지!”대꾸를 하면서도 마음속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술이 약한 신호연의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난 그에게 조금 따라주고 나머지는 내가 마셨다.술이 어느 정도 취하자 우리 두 사람은 말이 점점 많아지기 시작했고 난 감개무량한 척하며 그와 옛 추억을 들먹였다.내가 신나 보이자 신호연은 자신에게 술을 조금 더 따르면서 나에게 과음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지만 결국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많이 마신 건 신호연이었다.그를 침대로 부축했을 때 그는 이미 만취
나는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 마지못해 고개를 들어 서강민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서강민 씨, 먼저 들어가시죠. 언니가 깨서 서강민 씨를 보면 또 흥분할 것 같은데... 지금 같은 상황에 언니가 회복하는 게 제일 중요하잖아요.”그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는 않았지만, 나는 한마디 더 보탰다.“어떤 일들은 천천히 해야 해요. 언니한테 시간을 좀 주세요. 서로 생각을 정리해 봐요.”서강민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않고 깊은 잠에 빠진 도혜선을 한참이나 지켜보았다. 발길을 돌리기 전에도 아쉬움에 한 번 더 뒤돌아보며 나한테 말했다.“고생해 줘요.”나도 담담히 답했다.“제가 해야 할 일인걸요. 언니에게 시간을 좀 줘요. 언니도 회복할 시간이 필요할 수 있잖아요.”내가 말하는 회복이 뭔지는 서강민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건 도혜선이 마음에 입은 상처였다. 오늘 도혜선의 행동에서도 알 수 있다시피 그녀의 상처는 아물 수 없을 것이다. 언급만 해도 피가 흘러내릴 만한 상처였다.잠시 후, 서강민은 한발 물러섰지만, 눈길은 여전히 도혜선에게 머물러 있었다. 평온해 보이는 모습 아래에서 어떠한 파도가 휘몰아치는지 나는 몰랐다.한참 전 도혜선이 했던 말들은 마디마디가 주옥이었다. 모두 그녀가 마음속으로만 담아두었던 것들이었고 또한 서강민의 약점이었다. 얼마나 아플지는 서강민 본인만 알고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쓰디쓴 독주도 그는 혼자 삼켜내야만 했다.도혜선의 눈가가 파르르 떨려와 깨어나려는 낌새가 보이고 나서야 서강민은 조용히 병실을 나갔다.나는 마음이 아파와 한숨을 내쉬며 손을 뻗어 도혜선의 손을 맞잡았다.인제야 하루 종일 배현우에게서 연락이 없었다는 것이 생각났다. 그쪽에는 어떤 상황인지, 김우연에게서는 소식이 없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도혜선을 보니 아직 깨어나지 않은 것 같아 살며시 그녀의 손을 놓고 일어서려 했을때, 그녀는 다시 나를 잡으며 미약한 목소리로 말했다.“가지 마...”나는 너무 놀라 얼른 그녀를 향해 몸을 돌렸다.
‘서강민은 본인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기나 하는 걸까?’“당시의 사고는 내가 저지른 거야. 그녀도 나 때문에 다쳐서 지금처럼 된 거고… 나는 좋은 남편이 아니야. 아내가 식물인간이 되었는데 나는 다른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으니 말이야...”서강민은 여기까지 말하며 후회하는 기색을 내비쳤다.“그녀를 마주할 때마다 너무 죄책감이 들고 고민스러워. 나 또한 발버둥 쳐봤지.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나의 일탈을 받아들일 수 있어 해. 그녀한테 정말 미안한 일이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내가 널 사랑하고 있다는 거야...”“강민 씨!”도혜선은 꾸짖는 듯한 말투로 그의 말을 잘랐다.“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고 당신 아내가 듣고 있을 거예요. 저를 끌어들여서 같이 속죄할 생각하지 마세요. 저는 당신의 구세주가 아니에요. 저는 그냥 사람답게 살고 싶은 평범한 여자라고요. 저 좀 그냥 내버려둘 순 없어요?”도혜선은 말하면 할수록 화가 치밀어 올라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하얗게 질린 얼굴이 일그러지며 그녀는 한 손으로 본능적으로 가슴을 움켜쥐었다. 나는 깜짝 놀라 그녀 앞으로 갔다.“혜선 언니, 움직이지 마! 위험해...”늑골 골절과 뇌진탕이 있는 환자다 보니 이러한 행동은 그녀에게 너무나도 위험했다.도혜선은 손을 들어 그녀를 안으려고 하는 한지아를 제지했다.“제가 오늘 한 말이 아직도 이해가 안 되나요? 서강민 씨, 저의 인생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당신한테 묶여 당신의 부속품이 되었었는데 저도 자존심이 있어요. 더 이상 당신처럼 지난날의 죄책감을 짊어지며 답답하게 살아가지 않을 거예요.”도혜선은 여전히 분노에 차 외치고 있었다.“매일 제 앞으로 와 지난날의 행동에 대해 속죄하라고 일깨워 주실 필요 없어요! 당신을 보면 저는 지난날 모든 서울 사람의 웃음거리가 되었던 치욕적인 과거가 떠올라요. 당신은 마음 가는 대로 해요. 당신은 아내와 했던 약속을 지켜야 해요.”말을 마친 도혜선은 숨이 차올랐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보였다.
도혜선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계속하여 들려왔다.“당신은 아무런 부담 가질 필요 없어요. 저 같은 여자 마음속에 담아두지 않아도 돼요.”그녀는 자기비하적인 말을 내뱉었다.”선아...”“설사 강민 씨가 와이프와의 약속을 안 지킨다 해도 당신의 신분과 지위로 당신에게 더 어울릴만한 사람 충분히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저는 당신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에요. 하물며 당신네 부부 눈에는 저는 그냥 염치없고 미천한 사람일 뿐이죠. 저 같은 사람은 본처가 되기에 적합하지 않아요. 사모님이라는 호칭도 어울리지 않죠.”“나는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 오해하지 마.”서강민은 조급함에 한 발 앞으로 나서며 해명하려 했다.하지만 도혜선은 손을 들어 그를 막아섰다.“강민 씨... 해명하지 않아도 돼요. 당신의 행동이 모든 걸 설명해 주고 있어요! 장담하건대 아직 당신들이 어떤 의도로 얘기하고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바보가 된 건 아니에요. 그녀는 정말 대단하네요. 죽을 때까지도 제가 이길 수 없는 사람이었어요. 그녀는 아무리 병상에 누워있어도 고상한 사람이고 저는 그냥 미천한 사람일 뿐이니 말이에요.”도혜선은 말을 내뱉으며 입가에 처량한 미소를 비췄다. 누가 봐도 가슴 아픈 미소였다.“이전의 저는 확실히 허례허식에 차 있는 사람이었지만 저도 성장했어요. 정신 차렸어요. 당신 앞에 있는 저의 진정한 가치가 어떤 것인지 깨달았어요. 저는 하나의 도구, 들러리뿐이었지만 원망하지 않았어요.”그녀는 여기까지 말하고 한숨 돌렸다. 얼굴빛은 아까보다 더 창백해져 있었다.“하지만 이제 저는 자존감을 챙기며 살고 싶어요. 누군가에게 의탁하지 않고 쓰레기같은 취급을 받더라도 최소한의 존엄을 지키며 살고 싶어졌어요.”점점 더 차가워지는 도혜선을 바라보며 서강민은 답했다.“혜선아, 나는 널 한 번도 무시한 적 없어. 나는 그냥 내가 뭘 하든지 네가 다 이해해 줄 줄 알았어.”도혜선의 서강민의 말을 듣고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안색은 더 창백해져 있었다.“이해? 당신이 어떤 말을
방금 허투루 한 말이 어머니의 진실인가 싶다. 보아하니 어머니가 나를 속이는 일이 있는 것 같았다. 마음속의 의문점이 점점 많아졌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식사를 마치고 차씨 가문의 할머니께 말씀을 드린 후, 위층으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고 도혜선을 보러 가려고 준비했다.그리고 팔도 겸사겸사 검사하려고 했다. 차에 앉고 나서 배현우한테 전화를 걸었는데 받지 않았다. 이 이른 아침에 뭐 하러 갔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김우연 쪽에 무슨 소식이 있는 건 아닌지 걱정했다.'생각해 보니 이렇게 빠르진 않겠지? 몇 시간밖에 안 됐는데.'병실에 도착하자마자 도혜선이 노발대발하는 장면을 포착했다. 병실에는 도혜선과 서강민 두 사람만 보이고 이미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내가 들어서자 분위기가 좀 이상하고 심상치 않는 것을 느꼈다.침대 옆 머릿장에는 보온병이 놓여있다. 서강민은 오늘도 도혜선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주러 온 것 같다.서강민은 침대 앞에 떡 하니 서있었고 침대에 있던 도혜선은 차가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도혜선은 내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 같았다.상황을 정리하려고 다가가서 서강민에게 인사를 하고 도혜선에게 다가갔다. "오늘은 좀 어때?""별로야."도혜선은 차갑게 대답하더니 또 말을 건넸다. "지아야, 손님 좀 배웅해 줄래?"난감했다, 도혜선은 서강민을 내쫓으라고 하는 거였다. 난 당연히 그 뜻을 알고 있다. 조심스럽게 서강민을 쳐다보았다. "혜선아, 꼭 이래야 하니?"서강민은 씁쓸한 표정으로 도혜선을 바라보며 물었다."네! 서강민씨, 저는 이미 분명히 말했고 두 번 다시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도혜선은 내가 그 자리에 있다고 해서 서강민의 체면을 세워주지 않았다.참지 못하고 웃어 버렸다. "언니, 화 그만 내고 진정 좀 해. 초조해하는 거 알아, 점차 좋아질 거야. 강민씨랑 얘기 좀 하고 있어. 나는 팔 검사해야 돼서, 금방 돌아올 거야!"나는 핑계를 대고 떠나서 그들에게 자리를 비워주었다.
배현우는 나의 우울한 모습을 보고 말했다. "그리고 내가 없는 동안에 회사 일도, 한심로얄의 마지막 한방도 둘 다 포기할 수 없잖아요. 신예 쪽 일도 있고, 전희가 다시 살아날 기회를 얻지 않도록 조심해야 돼요. 지금 모든 게 중요한 시기이니까요.""지금 그 누구도 아버지보다 중요하지 않아요! 수십년간 도망치면서만 살았는데 죄책감도 가지고 있었을 거예요, 분명 아주 괴로워하고 있을 거예요. 그리고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무도 모르고 있는데, 내가... 내가 딸로서, 난..."배현우는 내 말을 듣고 나서 침대에 누워 나를 꼭 껴안고 말했다. "일단 내일 소식을 기다려 봅시다. 김우연 쪽에서 어떤 정보를 얻었는지 보고 결정합시다."배현우는 나의 어깨를 툭툭 쳤다. "제 말 듣고 일단 자세요, 내일 일어나서 먼저 할 일들을 처리하고 준비하고 있으세요, 만약에 상황이 좋으면 내일 같이 데리고 갈게요, 당신 마음 충분히 이해해요."배현우가 지금 나를 위로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다. 내가 기분 나빠하는 모습을 보지를 못한다. 그 말을 들으니 마음이 좀 편해지는 것 같았다. 배현우의 따뜻한 품에 안기며 눈을 감고 내일 먼저 무엇을 처리해야 할지 생각했다.근데... 눈을 떠서 배현우를 쳐다보는데 배현우도 잠에 들지 않았다. "현우씨... 할머니가 보존하고 있는 CCTV를 보여주시겠어요?"'그 영상을 꼭 보고 싶었다, 알고 싶었다. 어머니가 어떻게...'"알았어요, 하지만 지금은 자세요, 나중에 보여 드릴게요. " 팔짱을 끼더니 분명히 나를 얼버무리고 있는 것이다. 배현우가 그 장면을 내게 보여주고 싶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밤이 깊었고, 비까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꼼짝도 하지 않은 채 배현우의품에 안겨 점점 잠이 들었다. 아침이 밝았다. 날씨는 여전히 흐렸다. 배현우는 이미 곁에 없었고, 손을 뻗어 그가 누워 있던 곳을 만졌다. 이미 차가운 걸 보니 배현우는 일찍 침대에서 일어났나 보다.'무슨 소식이라도 왔나?'이
"할머니가 이번 사건을 피할 수 있었던 건 당시 큰 병을 앓은 것에 대해 감사해야 했어요. 제 생각에는 반은 꽤병인것 같아요. 직접 사표를 쓰고 나서도 서둘러 호주를 떠나지 않았다는 게 참 슬기로운 선택이었어요.""네?"너무 놀라서 몸 둘바를 몰랐다.배현우는 인정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할머니는 호주를 떠나지 않으셨어요. 그곳에 머물면서 배씨 저택의 인기척을 살피다가 배씨 저택의 요상한 소문들이 완전히 자취를 감춘 뒤에야 조용히 호주를 떠나셨어요."나도 모르게 할머니의 메커니즘에 감탄했다."저도 그때 상황을 잘 몰라서, 할머니도 몸이 허약했고 내 행방을 알아 볼 길이 없어 그 비밀을 계속 지켜왔었나봐요. 부하들이 할머니를 찾고 나서도 여전히 어리석은 척을 하고 있었지 뭐에요."배현우는 그제야 미소를 지었다."할머니께서 저를 두눈으로 직접 보고서야 그걸 꺼냈어요."배현우의 말을 듣고 나니 할머니를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러던 중 배현우가 나를 쳐다보더니 나의 지친 모습을 보고서야 손을 들어 대문을 열어 장벽들이 천천히 열리는 걸 볼 수 있었다.차는 왔던 길을 따라 경원으로 다시 돌아갔다. 벌써 자정이 되어 우리 둘은 차를 세우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층으로 올라가 방에 돌아왔다.'우리를 배신한 소인이 두 집안을 풍비박산 시켰다니. 오늘 밤 일어난 모든 일들은 듣고도 믿기지 않았다.'간단히 씻고 걱정 가득채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태어나서 얼굴도 한번 못 본 아버지가 어디 있는지, 밥은 먹고 다니는지를 걱정해 발 뻗고 자지 못했다. '한강인이랑 한걸은 이미 잡혔는데, 우리 아버지는? 그의 처지는 어떤지.''한씨 부자가 그저 아버지를 인질로 삼아 그들의 안전을 확보하려 했다면 왜 배현우는 그곳의 환경이 복잡하다고 했을가.''이유는 간단하다. 누군가 아버지를 미끼로 삼으려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누구를 보고 싶으려는 걸가?''배현우? 아니면 배유정?'생각할수록 더욱 걱정이 됬다.아버지의 이번생은 이미 충분히 힘들다.어머니랑 서로
나는 걱정스레 배현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배현우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계속 말했다.“후에 목격자 어르신을 찾고서 한강인을 자세히 조사하니 한강인은 이 모든 것이 일어난 뒤에야 천우 그룹을 떠난 거였어요. 지아 씨도 알잖아요. 그때 당시 천우 그룹은 아직 배유정 손에 있었어요.”“현우 씨의 말은 한강인은 배유정 과도 사이가 틀어졌단 말인가요?”나는 추측하며 물었다.“우리가 조사할 때 이상한 단서 하나가 나왔어요. 한동안 배유정도 한강인을 찾았고 심지어 한강인에 대한 추살령도 내렸어요! 참 이상해요. 배유정은 왜 한강인을 죽이라고 지령을 내린 걸까요?”“이유는 하나뿐이죠. 즉 한강인이 분명 무엇을 알아냈거나? 아니면 어떤 일에 참여하였거나?”나는 대답했다.배현우는 고개를 끄덕이었다.“진백이 죽임을 당했듯이 이 안에는 분명 남들한테 들키면 안 되는 비밀이 있는 거겠죠. 우리는 이 단서를 따라 계속 추적해 보니 한강인의 혐의가 점점 더 드러나더군요. 그리고 그의 아들 한결도 같이 도망쳤어요.”“그러고 보니 이 안에는 분명히 또 다른 요소가 있겠네요!”나는 사색에 잠겼다.“그래서 우리는 추측했죠. 한강인은 확실히 이 사건이랑 연관이 있고 둘이 도주하는 과정에 서로 연락하는 빈도를 보아서 부자 둘은 서로 다른 곳에 있는 것으로 판단했어요.”“그리고 한강인이 도망 다니는 그 시기에 그의 모친이랑 누나 모두 영문도 모른 채 실종되었어요. 지금 보니 그분들은 아마 이미 이 세상을 떠난 것 같네요. 이 때문에 한강인은 고두리에 놀란 새가 돼서 끊임없이 도망치며, 이 또한 한강인이 지금의 상태로 되게 한 원인인 것 같아요. 사실 한강인은 원래 지금의 모양이 아니거든요.”배현우의 말을 듣자 나는 저도 모르게 아까 보았던 한강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한강인은 극도의 공포 속에서 엄청 정신적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니면 다른 기타 방식으로 정신을 잃지 않게 버티고 있거나. 그렇지 않으면 사람이 저렇게 말라죽을 정도일 리가 없다.“그리고 한 가
배현우는 나를 한눈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었다.“맞아요. 제 씨 어머니가 얼마나 총명한지 그 누구도 생각지 못했어요. 제 씨 어머니는 책 속에 카메라를 숨겨두고 만약 사고가 난다면 여기에 있는 이 물건을 숨겨두었다가 훗날 믿음직스러운 사람에게 주라고 할머니한테만 똑똑히 당부해 두셨어요!”나는 코가 찡긋거리더니 눈에는 눈물이 핑 돌았다.“보아하니 제 씨 어머니는 분명 위험이 닥칠 거라는 것을 미리 예감했던 거네요!”배현우는 안색이 조금 어두워지더니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갑자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제 씨 어머니는 만약 자신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할머니더러 애들을 데리고 허씨 가문으로 가라고 할머니한테 당부하셨어요.”나는 끝내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고 코를 훌쩍이었다.배현우는 자기 손을 꽉 움켜쥐며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참 생각지도 못한 게 모든 것이 제 씨 어머니의 예상대로 일어났고 감춰둔 카메라에 모든 것이 담겼어요! 근데 할머니는 제 씨 어머니의 뜻대로 우리 둘을 순리롭게 허씨 가문으로 데려가지 못했어요.”“급한 나머지 할머니는 고씨 가문에만 소식을 전했고 그마저도 나쁜 놈들보다 동작이 빠르지 못해 그들이 지아 씨를 데려간 후였어요. 그래서 저만 고씨 가문에서 데려갔어요.”나는 눈물을 닦아내면서 그때 당시의 내가 얼마나 힘없고 무력했을지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다. 갑작스럽게 어머니가 돌아가신 데다가 배현우와 억지로 갈라지게 되었다.배현우는 내 손을 꽉 잡으며 손에 힘을 주었다.나도 배현우 지금의 심정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날 배현우는 눈앞에서 억지로 끌려 나가는 나를 보기만 하고 반항할 수도 없는 그런 무능력함은 아마 배현우한테 평생 잊지 못할 아픔이 되었을 것이다.차 안은 갑자기 조용해졌고 자동차가 앞으로 가는 소리밖에 안 들렸다.한참 뒤에야, 배현우의 잠긴 목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이런 것들을 찾은 후에야 비행기 추락 사고가 떠올랐고 이로써 모든 것들이 비로소 한강인을 추측하게 했으며 그 이후에 우리는 한강인
이 소식은 그야말로 나를 입이 떡 벌어지게 했다. ‘나를 데려간 게 어떻게 그 사람이지?’“맞아요. 우리는 유일한 목격자를 찾았어요. 그 당시 그쪽 산에서 약재를 캐는 어르신이신데 그때는 중년인이셨어요. 하늘의 뜻인지, 우리가 수년을 찾아 헤맨 끝에야 비로소 이 참극의 전부를 직접 목격한 증인을 찾아냈어요.”“그 어르신 정말로 전체 과정을 모두 목격하셨나요?”나는 믿어지지가 않았다. 배현우 얘네가 얼마나 큰 공을 들여야 바다에서 바늘 건지는 것 같은 일을, 그것도 몇 년이 지났는데도 당시의 목격자를 찾아낸 걸까.“어르신의 말로는, 당시 자기는 산 위에서 내려오는 도중에 잠시 계단에서 쉬고 있었는데 그러다가 아래 도로에서 일어나는 광경을 목격했다고 해요. 알다시피 외국에서는 약재를 캐는 일은 엄청 드물어요.”배현우는 엄청 뿌듯한 말투로 말했다.“우리 형제들이 엄청나게 고생 많았어요. 십수 년을 하루같이 귀찮음을 마다하고 사건 지역을 탐방하러 다니면서 일말의 흔적도 소홀히 하지 않았어요.”나도 믿어지지 않아 입을 열었다.“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어요. 참 노고가 많았어요.”“어르신이 말씀하기를 당시의 장면은 엄청 아슬아슬했대요. 부딪힌 차는 거의 굴러떨어지기에 일보 직전이었는데 후에 폭발했대요. 어르신은 우리의 차가 폭발한 뒤 키 크고 마른 한 남자가 차에서 내리는 걸 똑똑히 봤다고 해요. 그리고 그 남자는 길 왼쪽의 언덕 아래로 달려가 무언가를 찾았대요.”배현우는 그때 당시의 장면을 묘사하였다. 나는 머릿속으로 그때 당시의 상황을 필사적으로 상상해 내려고 하니 머리가 또 아파 났지만, 배현우가 말을 멈출까 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당시에 일어난 이 모든 것, 전부 나한테는 엄청난 매력이었다. 나는 지금 내가 찾아낸 산산조각 난 퍼즐들을 하루빨리 제 위치에 맞춰서 하나의 완전한 그림을 만들어 내고 싶었으며 그때 당시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을 되찾고 싶었다.그 뒤로 난 어떻게 Z 국의 만덕동에서 떠돌게 되었고 또 어떻게 지금의 한지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