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호연이 딸을 데리고 집에 돌아왔을 때, 난 이미 요리를 끝낸 상태였다.“엄마, 저 다녀왔어요! 아빠가 저를 데리러 왔어요!”콩이가 토끼 마냥 총총 뛰어와 나에게 말을 걸었고 그 앳된 목소리에 순간 눈시울이 붉어진 난 억지로 눈물을 참으며 대답했다.“우리 콩이가 제일 좋아하는 딸기 사 왔어!”“와! 엄마 최고! 지금 먹을래요! 얼른 먹고 싶어요!”방방 뛰던 콩이가 돌아서서 신호연에게 달려가 안기며 계속 졸랐다.“아빠, 저 딸기 먹을래요!”“그래, 그럼 일단 하나만 먹고 나머지는 밥을 먹고 나서 먹자!”신호연이 딸기 한 알을 씻어서 콩이에게 건넸고 좁은 주방으로 들어오더니 뒤에서 나를 껴안으며 물었다.“오늘 맛있는 거 왜 이렇게 많이 했어?”마음이 너무 씁쓸했다. 이렇게 화목하고 행복한 가정인데 한순간에 위기에 빠지다니.“출장 다녀오느라 고생했잖아! 오늘 바빴어?”난 피식 웃으며 덤덤한 표정으로 물었고 그는 나의 어깨에 기대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마음이 철렁 내려앉은 나는 팔꿈치로 그를 밀쳐내며 말했다.“수저 챙겨, 얼른 밥 먹자!”난 그의 스킨십에 헛구역질이 났다. 나를 안고 있는 이 순간에도 다른 여자를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 의심됐다.“한잔할래? 오랜만에 술을 마시고 싶네.”식탁에 앉아 억지웃음을 보이며 그에게 묻자 신호연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물었다.“왜 갑자기 술을 마시고 싶어?”“별다른 일도 없잖아. 당신 또 나갈 거 아니지? 맛있는 거 많이 했는데 분위기 있게 한잔해야지!”대꾸를 하면서도 마음속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술이 약한 신호연의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난 그에게 조금 따라주고 나머지는 내가 마셨다.술이 어느 정도 취하자 우리 두 사람은 말이 점점 많아지기 시작했고 난 감개무량한 척하며 그와 옛 추억을 들먹였다.내가 신나 보이자 신호연은 자신에게 술을 조금 더 따르면서 나에게 과음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지만 결국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많이 마신 건 신호연이었다.그를 침대로 부축했을 때 그는 이미 만취
이튿날 아침, 나는 퀭한 눈으로 겨우 정신을 차리고 침대에서 일어났고 신호연이 초췌한 나의 모습을 보며 깜짝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지아야, 너 어디 아파? 안색이 너무 안 좋네?”“네가 날 밤새 괴롭혔잖아. 몰라서 물어?”대충 얼버무리자 흠칫하던 신호연이 씩 웃으며 나를 껴안았다.“앞으로 술 마시지 말고 운동하자! 수면에 도움이 된대!”그의 말에 갑자기 구역질이 확 올라온 탓에 화장실로 달려가 콧물까지 흘려가며 토했고 신호연은 뒤에서 긴장한 얼굴로 내 등을 두드려 주며 말했다.“왜 이래? 나랑 같이 병원 가자!”“아니야, 몸이 살짝 피곤해서 그래. 당신이 콩이를 어린이집에 데려다줘. 난 조금만 더 잘게!”난 신호연을 밀쳐내며 억지웃음을 보였고 그는 갑자기 나를 번쩍 들어 올리더니 침대에 눕힌 뒤, 이불까지 덮어줬다.“그럼 더 자. 딸은 내가 등원시킬게. 걱정하지 마. 혹시 많이 아프거나 불편하면 나에게 전화를 해. 알았지?”난 고개를 끄덕였고 이내 두 부녀의 소리가 점점 멀어지더니 현관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난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창가에 기대 신호연이 콩이를 차에 태우고 동네를 벗어나는 걸 확인했으며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모든 게 예전처럼 평범하고 행복했으면 얼마나 좋을까?정신을 차리고 다급하게 나갈 준비를 했으며 평소의 옷차림과는 다르게 흰 티에 청바지, 그리고 머리를 깔끔하게 묶은 뒤, 모자를 푹 눌러썼다.진후 빌딩 맞은편에 있던 카페에 도착하여 빌딩이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은 뒤, 빤히 빌딩 입구만 쳐다보았다.가장 멍청해 보이는 방법이지만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다.하지만 3일 내내 카페에서 지켜보고 있어도 아무런 수확이 없었다. 난 신호연의 그림자조차 발견하지 못했다.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게 있었는데 신호연은 보통 지하 주차장으로 출입했으며 그곳에는 빌딩 로비로 통하는 통로가 있었다.4일째 되던 날, 점점 주의력이 분산되던 그때, 신호연이 핸드폰을 들고 빠른 걸음으로 빌딩에서
난 씁쓸하게 웃으며 알겠다고 한 뒤, 전화를 끊었다.지금 이 순간, 이미연이 내 남편에게 꼬리를 치는 여우로 느껴졌으며 내 앞에서는 자기 계발을 하라고 그렇게 구구절절 설득하더니 지금은 내 남편 앞에서 한가한 여자라고 비꼬다니. 진짜 너무 소름이 돋았다.인제 보니 신호연을 봤다고 얘기한 것도 괜히 마음이 뜨끔해서 나를 떠본 것이 분명했다. 그날 밤 신호연도 나에게 이미연을 본지도 꽤 됐다고 말했던 게 생각이 났다.가장 친한 사람에게 농락을 당했다는 생각에 마음이 너무 아팠다. 이 낯선 도시에서 유일하게 진심으로 최선을 다한 두 사람인데 이렇게 대놓고 날 바보로 만들다니. 이제 아무도 믿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난 창문을 빤히 바라보면서 한 치의 고민도 없이 신호연에게 전화를 걸었고 내 예상대로 그의 대답은 이미연과 완벽하게 일치했다.화가 치밀어 올라서 찻집으로 들어가려던 순간, 핸드폰이 울렸고 콩이가 어린이집 미끄럼틀에서 떨어졌다는 선생님의 전화였다.화들짝 놀란 마음에 택시를 잡고 병원으로 향하면서 신호연에게 전화를 걸어 딸이 사고가 났다고 전했다.나와 신호연은 거의 동시에 병원에 도착했고 응급실에 누워있는 콩이를 발견하자마자 아이가 땀까지 줄줄 흘리며 목 놓아 울기 시작했다. 갈기갈기 찢어지는 듯한 마음을 꾹 참고 선생님 품에서 아이를 건네받아 품에 꼭 안은 채, 그들을 원망했다.똑같이 놀란 신호연은 의사에게 콩이 상황을 물어보았고 의사가 검사 결과를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아이가 어리고 몸이 유연한 덕분에 크게 다치지는 않았지만 이마에 상처가 많이 생겨서 뇌진탕이 의심되기도 하기에 병원에 입원해서 관찰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고 했다.더군다나 병원에 오기 전에 구토 현상도 있었다고 한다.콩이 담당 선생님은 너무 놀라서 두 눈이 벌겋게 충혈될 정도로 울고 있다가 신호연과 원장 선생님을 쳐다보며 연신 사과를 했다.신호연도 기분이 언짢긴 했지만 이성적으로 아이의 사고 과정을 물었고 원장 선생님은 미끄럼틀에서 한 통통한 남자애한테 밀려 떨어졌다고
“지아가 지금 기분이 안 좋아!”내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신호연이 나서서 설명을 하다가 이내 내 어깨에 손을 올려놓은 채, 힘을 살짝 주면서 다정하게 말했다.“여보, 걱정하지 마. 의사 선생님도 괜찮다고 했어. 집에 가서 조금만 주의하면 된대!”집이라는 말에 자극을 받아 순간 이성을 잃어버린 난, 신호연을 밀어버리고 벌떡 일어나 병실을 나서서 눈물을 흘렸고 이미연이 다급하게 나를 따라 나왔다.갑작스러운 모습에 병실에 있던 콩이도 목 놓아 울기 시작했다.“지아야, 너 왜 그래? 아이가 놀라잖아! 기분이 안 좋아도 아이를 위해서 좀 참아야지!”이미연이 나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렸고 화가 치밀어 오른 난 그녀를 노려보며 소리를 질렀다.“참아? 내가 어떻게 참아?”이성을 잃은 나 자신에 정신이 번쩍 들어 겨우 감정을 억누르고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입꼬리를 덜덜 떨며 말을 이어갔다.“너 먼저 돌아가. 우린 괜찮아. 네가 얼마나 바쁜데 네 일에 지장을 주면 안 되지!”말을 마친 뒤, 눈물을 닦고 이미연을 지나쳐서 병실로 돌아왔다. 콩이를 다독여주고 있는 신호연을 밀쳐내고 콩이 곁에 앉아 눈물을 뚝뚝 흘렸다.곁으로 밀려난 신호연은 멍한 표정으로 자리에 굳어 있다가 이내 다정하게 날 위로했다.“걱정하지 마. 응? 아이가 놀라잖아!”한참 지나고 나서야 병실로 돌아온 이미연은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입술만 만지작거리고 있었고 분위기는 더할 나위 없이 어색했다.“지아야, 나 먼저 갈게. 너무 마음 졸이지 말고 내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전화해!”조심스럽게 말을 하던 이미연은 돌아서서 콩이에게도 인사를 했다.“콩이야, 이모 이만 가볼게. 얼른 나아서 이모랑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당신 미연이를 오랜만에 보는 거잖아. 좀 바래다줘!”난 눈물을 닦으며 신호연에게 눈치를 주었고 흠칫하던 신호연은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그래! 당신 그만 울어! 알겠지?”신호연이 이미연을 바래다주려고 병실을 나서던 순간, 이미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바래다줄 필
넘어진 후의 콩이는 조금 놀랐는지 하루 종일 내 품에 달라붙어 조금도 떨어지지 않으니 난 속이 타들어 갔다.신호연은 늙은 여우처럼 나에게 조금의 틈도 주지 않았다. 제시간에 출근하고, 제시간에 집에 돌아와 아무런 허점도 보이지 않았다.신호연이 가져온 모든 물건은 아무런 단서도 찾을 수 없었다. 때로는 내 자신이 망상증에 걸린 것이 아닌지 의심스러웠다.점심, 겨우 콩이를 재우고 보니 집에 신선한 야채와 과일이 전혀 없었다. 콩이가 깊이 잠든 것을 보고 빨리 시장에 다녀오려 했다.시장은 집에서 가까웠고, 옷을 갈아입기 귀찮아 바로 집 문을 나섰다.하지만 장을 보고 돌아온 나는 멍해지고 말았다. 열쇠가 보이지 않았다!한참이나 곰곰이 생각한 나는 괴로워하며 머리를 때렸다. 틀림없이 나올 때 열쇠를 챙기지 않았을 것이다.신호연에게 전화를 거니, 그는 작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나는 자초지종을 설명했다.“회의 중이야. 지금 못 가. 연아한테 전화해 봐!”또 회의? 핑계는 여태껏 변하지도 않네.난 하는 수없이 신연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에게 집 열쇠가 있었다. 만약 이번 기회에 그녀의 열쇠를 돌려받을 수 있다면 더욱 완벽했다.연결음이 한참 울린 후에야 신연아는 전화를 받았다. 많은 사람의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려왔고, 신연아의 목소리가 맑게 들려왔다.“새언니, 무슨 일이에요?”“열쇠를 집에 놓고 외출을 했어요. 열쇠 좀 갖다주시겠어요?”“저 지금 밖에 있어요. 갈 시간이 없네요.”신연아는 단칼에 거절했다. 그리고 옆 사람에게 말하는 듯했다.“저기… 잠깐만 기다려!”“그럼 어디예요? 제가 갈게요.”열쇠를 돌려받을 좋은 기회라 나는 얼른 말했다.신연아가 대답하기도 전에 전화 너머에서 누군가 말했다.“아가씨, 캐비닛 위치 좀 봐주세요.”곧 전화가 끊어졌다.캐비닛? 무슨 캐비닛?신연아가 무슨 캐비닛을 보고 있는지 영문을 몰라 답답했다. 집에서 금이야 옥이야 자란 아가씨라, 기름병이 넘어져도 부축하지 않는데 무슨 캐비닛을 보고 있을까?
그 젊은 직원이 아첨하는 목소리로 ‘신 사모님’이라고 부르는 것을 듣고 날벼락을 맞은 것 같았고, 화가 머리끝까지 차올라 홱 돌아섰다. 내 직함을 들먹이며 사기를 치고 다닌 이미연이 나를 보고 어떤 표정을 지을지 확인하고 싶었다.나는 매서운 눈빛으로 뒤를 보았다. 이미연이 서 있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신연아가 보였다.옷은 화사하고 멋스럽게 차려입고, 린넨 색의 긴 머리는 웨이브를 넣어 풀어헤쳤고, 작은 얼굴은 정교하게 화장했다. 평범했던 얼굴에 약간의 요염함이 더해졌다.신연아는 우아한 발걸음으로 다가와 여유롭게 웃으며 입을 열려고 하는데, 사악한 기운을 띠며 고개를 홱 돌린 나를 보고 갑자기 눈이 움츠러들었다. 의아한 듯 자리에 멈추더니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오늘 우리 두 사람의 모습은 확실히 누가 봐도 그녀가 ‘신 사모님’이고 난 가정부였다.옷이 날개라고, 파자마 차림은 절대 명품의 아우라를 따라갈 수 없었다.신연아를 보고 신 사모님이라고 불렀다고?아주 제멋대로인 여동생이야.그 젊은 직원은 나의 반응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계속 신연아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었다. 신연아가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으니 젊은 직원은 나를 한번 힐끗 보더니 신연아에게 말했다.“신 사모님...”“잠깐!”난 그녀의 말을 끊고 신연아를 한번 본 다음 그 직원에게 물었다.“누가 신 사모님이라는 거죠?”젊은 직원은 나를 보더니 약간 의아한 미소를 지었다. 경멸하는 눈으로 나를 보더니 말했다.“이분은 10층 신흥 건재 대표님의 사모님이세요!”난 순간 참지 못하고 ‘푸’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비록 젊은 직원의 태도가 기분 나빴지만, 자칭 ‘신 사모님’의 출현으로 며칠 동안 나의 응어리가 풀린 셈이다.아무리 철이 없는 시누이라도 정도가 있지.‘신 사모님’의 자리까지 사칭하다니!내가 제멋대로 웃으니 현장의 여러 직원들도 어리둥절해서 나를 쳐다보았다. 그들의 눈에는 분명히 네 글자가 적혀있었다. 미친 여자!나는 신
엘리베이터 안에서 우리는 입을 열지 않았다. 신연아는 고개를 숙이고 입을 비쭉거리며 엘리베이터에 기대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신호연처럼 그녀의 못된 버릇을 받아 줄 마음이 없었다.신호연의 사무실에 도착해서 보니, 그는 진짜 회의 중이었다. 부하직원이 그를 불렀고, 나와 신연아의 모습을 본 신호연은 의아해하며 우리 둘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그리고 나의 옷차림에 시선이 고정되었다.“당신 옷차림이...”“창피하다 이거지? 장 보러 시장에 가는데 뭣하러 차려입어?”나는 신호연의 말을 끊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당연히 알고 있어 퉁명스럽게 말했다.“열쇠나 빨리 줘. 콩이 아직도 자고 있어.”신호연은 서둘러 사무실 책상으로 걸어갔고, 문서 가방에서 열쇠 꾸러미를 건네주었다.“내가 연아한테 말해서 열쇠 가져가라고 했잖아?”열쇠를 받아든 나는 불쾌하게 신연아를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아가씨가 나한테 열쇠를 갖다 줄 시간이 어디 있어? 여기서 ‘신 사모님’행세하는 게 열쇠보다 더 중요한데.”“당신은 ‘신 사모님’이랑 좋은 시간 보내. 난 ‘신 사모님’을 행차하게 할 자격이 안 돼.”이번만큼은 신연아의 체면을 세워 줄 생각이 없었다.“오빠라는 사람이 참 대단하기도 하지. 어떻게 자기 부인 타이틀까지 동생한테 내어줘?”말을 마친 나는 냉담한 얼굴로 돌아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집에 콩이가 자고 있으니 더 이상 그들과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았다.나는 화가 잔뜩 난 채로 열쇠를 들고 빌딩을 나와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문을 열 때, 나는 손에 든 열쇠 꾸러미를 주의 깊게 보았다. 그중 두 개는 새것 같았다. 이리저리 뒤적여 보면서 대체 어디 열쇠인지 의문이 들었다.우리 집 열쇠를 찾아 문을 열고 급히 침실로 달려갔다. 콩이가 아직 깊이 잠들어 있는 것을 보고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침대 앞에 주저앉았다. 다행이야!나는 손에 든 묵직한 열쇠를 쳐다보았다. 그 두 개의 새 열쇠는 왠지 모르게 불길한 예감이
“왜 그래?”신호연은 나를 올려다보며 물었다.“힘들어서 그래? 잠깐 들어가서 쉬어. 내가 콩이랑 놀고 있을게.”나는 감정을 억누르며 고개를 끄덕였다.“응, 힘들어. 그러면 잘 놀고 있어. 들어가서 눈 좀 붙일게.”나는 말을 마치고, 과일을 탁자 위에 놓았다.“콩이한테 먹여줘. 주방에 다른 것도 있어.”“그래, 들어가서 쉬어. 깨면 같이 나가서 밥 먹자!”신호연은 말하면서 포크를 집어 콩이에게 피타야를 먹였다.나는 돌아서서 침실로 돌아와 침대에 누웠다. 호흡이 가빠지더니 눈물이 흘러내렸다.보아하니 그 두 열쇠는 절대로 평범하지 않다. 급하게 집으로 달려온 것은 콩이가 걱정되어서가 아니라 열쇠를 돌려받기 위해서였다.바람난 남자는 너무 뻔뻔했다. 어쩌면 열쇠는 그 여자 집의 열쇠일지도 모른다.나는 저도 모르게 이미연이 생각났다. 2년 동안 사업이 번창해서 혼자 큰 아파트에 입주한지 오래되었지만 종래로 어디에 사는지 말한 적이 없었다. 나를 집으로 초대하지도 않았다. 보아하니 남자를 집으로 데려가기 위해서였다.생각하면 할수록 분통이 터졌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더니, 배신당한 느낌에 구역질이 났다. 어쩐지 이미연이 나보고 신호연에게 속아 아무것도 모른다고 하더라니.이건 나에 대한 노골적인 도발이었다.비록 이미연이 가짜 ‘신 사모님’이 아니더라도, 그녀는 절대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다. 속에 꿍꿍이가 없는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겠는가?신연아 이 얼간이는 하필 이 지점에 일을 벌여 사태를 복잡하게 만들었지만, 이미연이 그날 신호연과 함께 쌍으로 거짓말을 한 것은 분명 뭔가 있다.알려져서는 안 되는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이 분명하다.보아하니 신호연은 진작에 날 방비하고 있었다. 어쩐지 여태까지 아무런 낌새도 찾을 수 없더라니. 대체 언제부터 신호연이 밤마다 도둑처럼 날 방비하고 있었지?여기까지 생각한 나는 가슴팍을 움켜쥐었다. 가슴에 큰 바위가 눌린 것처럼 답답하고 아팠다.밖에서 부녀는 재밌게 놀고 있는데
나는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 마지못해 고개를 들어 서강민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서강민 씨, 먼저 들어가시죠. 언니가 깨서 서강민 씨를 보면 또 흥분할 것 같은데... 지금 같은 상황에 언니가 회복하는 게 제일 중요하잖아요.”그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는 않았지만, 나는 한마디 더 보탰다.“어떤 일들은 천천히 해야 해요. 언니한테 시간을 좀 주세요. 서로 생각을 정리해 봐요.”서강민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않고 깊은 잠에 빠진 도혜선을 한참이나 지켜보았다. 발길을 돌리기 전에도 아쉬움에 한 번 더 뒤돌아보며 나한테 말했다.“고생해 줘요.”나도 담담히 답했다.“제가 해야 할 일인걸요. 언니에게 시간을 좀 줘요. 언니도 회복할 시간이 필요할 수 있잖아요.”내가 말하는 회복이 뭔지는 서강민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건 도혜선이 마음에 입은 상처였다. 오늘 도혜선의 행동에서도 알 수 있다시피 그녀의 상처는 아물 수 없을 것이다. 언급만 해도 피가 흘러내릴 만한 상처였다.잠시 후, 서강민은 한발 물러섰지만, 눈길은 여전히 도혜선에게 머물러 있었다. 평온해 보이는 모습 아래에서 어떠한 파도가 휘몰아치는지 나는 몰랐다.한참 전 도혜선이 했던 말들은 마디마디가 주옥이었다. 모두 그녀가 마음속으로만 담아두었던 것들이었고 또한 서강민의 약점이었다. 얼마나 아플지는 서강민 본인만 알고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쓰디쓴 독주도 그는 혼자 삼켜내야만 했다.도혜선의 눈가가 파르르 떨려와 깨어나려는 낌새가 보이고 나서야 서강민은 조용히 병실을 나갔다.나는 마음이 아파와 한숨을 내쉬며 손을 뻗어 도혜선의 손을 맞잡았다.인제야 하루 종일 배현우에게서 연락이 없었다는 것이 생각났다. 그쪽에는 어떤 상황인지, 김우연에게서는 소식이 없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도혜선을 보니 아직 깨어나지 않은 것 같아 살며시 그녀의 손을 놓고 일어서려 했을때, 그녀는 다시 나를 잡으며 미약한 목소리로 말했다.“가지 마...”나는 너무 놀라 얼른 그녀를 향해 몸을 돌렸다.
‘서강민은 본인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기나 하는 걸까?’“당시의 사고는 내가 저지른 거야. 그녀도 나 때문에 다쳐서 지금처럼 된 거고… 나는 좋은 남편이 아니야. 아내가 식물인간이 되었는데 나는 다른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으니 말이야...”서강민은 여기까지 말하며 후회하는 기색을 내비쳤다.“그녀를 마주할 때마다 너무 죄책감이 들고 고민스러워. 나 또한 발버둥 쳐봤지.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나의 일탈을 받아들일 수 있어 해. 그녀한테 정말 미안한 일이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내가 널 사랑하고 있다는 거야...”“강민 씨!”도혜선은 꾸짖는 듯한 말투로 그의 말을 잘랐다.“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고 당신 아내가 듣고 있을 거예요. 저를 끌어들여서 같이 속죄할 생각하지 마세요. 저는 당신의 구세주가 아니에요. 저는 그냥 사람답게 살고 싶은 평범한 여자라고요. 저 좀 그냥 내버려둘 순 없어요?”도혜선은 말하면 할수록 화가 치밀어 올라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하얗게 질린 얼굴이 일그러지며 그녀는 한 손으로 본능적으로 가슴을 움켜쥐었다. 나는 깜짝 놀라 그녀 앞으로 갔다.“혜선 언니, 움직이지 마! 위험해...”늑골 골절과 뇌진탕이 있는 환자다 보니 이러한 행동은 그녀에게 너무나도 위험했다.도혜선은 손을 들어 그녀를 안으려고 하는 한지아를 제지했다.“제가 오늘 한 말이 아직도 이해가 안 되나요? 서강민 씨, 저의 인생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당신한테 묶여 당신의 부속품이 되었었는데 저도 자존심이 있어요. 더 이상 당신처럼 지난날의 죄책감을 짊어지며 답답하게 살아가지 않을 거예요.”도혜선은 여전히 분노에 차 외치고 있었다.“매일 제 앞으로 와 지난날의 행동에 대해 속죄하라고 일깨워 주실 필요 없어요! 당신을 보면 저는 지난날 모든 서울 사람의 웃음거리가 되었던 치욕적인 과거가 떠올라요. 당신은 마음 가는 대로 해요. 당신은 아내와 했던 약속을 지켜야 해요.”말을 마친 도혜선은 숨이 차올랐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보였다.
도혜선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계속하여 들려왔다.“당신은 아무런 부담 가질 필요 없어요. 저 같은 여자 마음속에 담아두지 않아도 돼요.”그녀는 자기비하적인 말을 내뱉었다.”선아...”“설사 강민 씨가 와이프와의 약속을 안 지킨다 해도 당신의 신분과 지위로 당신에게 더 어울릴만한 사람 충분히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저는 당신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에요. 하물며 당신네 부부 눈에는 저는 그냥 염치없고 미천한 사람일 뿐이죠. 저 같은 사람은 본처가 되기에 적합하지 않아요. 사모님이라는 호칭도 어울리지 않죠.”“나는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 오해하지 마.”서강민은 조급함에 한 발 앞으로 나서며 해명하려 했다.하지만 도혜선은 손을 들어 그를 막아섰다.“강민 씨... 해명하지 않아도 돼요. 당신의 행동이 모든 걸 설명해 주고 있어요! 장담하건대 아직 당신들이 어떤 의도로 얘기하고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바보가 된 건 아니에요. 그녀는 정말 대단하네요. 죽을 때까지도 제가 이길 수 없는 사람이었어요. 그녀는 아무리 병상에 누워있어도 고상한 사람이고 저는 그냥 미천한 사람일 뿐이니 말이에요.”도혜선은 말을 내뱉으며 입가에 처량한 미소를 비췄다. 누가 봐도 가슴 아픈 미소였다.“이전의 저는 확실히 허례허식에 차 있는 사람이었지만 저도 성장했어요. 정신 차렸어요. 당신 앞에 있는 저의 진정한 가치가 어떤 것인지 깨달았어요. 저는 하나의 도구, 들러리뿐이었지만 원망하지 않았어요.”그녀는 여기까지 말하고 한숨 돌렸다. 얼굴빛은 아까보다 더 창백해져 있었다.“하지만 이제 저는 자존감을 챙기며 살고 싶어요. 누군가에게 의탁하지 않고 쓰레기같은 취급을 받더라도 최소한의 존엄을 지키며 살고 싶어졌어요.”점점 더 차가워지는 도혜선을 바라보며 서강민은 답했다.“혜선아, 나는 널 한 번도 무시한 적 없어. 나는 그냥 내가 뭘 하든지 네가 다 이해해 줄 줄 알았어.”도혜선의 서강민의 말을 듣고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안색은 더 창백해져 있었다.“이해? 당신이 어떤 말을
방금 허투루 한 말이 어머니의 진실인가 싶다. 보아하니 어머니가 나를 속이는 일이 있는 것 같았다. 마음속의 의문점이 점점 많아졌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식사를 마치고 차씨 가문의 할머니께 말씀을 드린 후, 위층으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고 도혜선을 보러 가려고 준비했다.그리고 팔도 겸사겸사 검사하려고 했다. 차에 앉고 나서 배현우한테 전화를 걸었는데 받지 않았다. 이 이른 아침에 뭐 하러 갔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김우연 쪽에 무슨 소식이 있는 건 아닌지 걱정했다.'생각해 보니 이렇게 빠르진 않겠지? 몇 시간밖에 안 됐는데.'병실에 도착하자마자 도혜선이 노발대발하는 장면을 포착했다. 병실에는 도혜선과 서강민 두 사람만 보이고 이미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내가 들어서자 분위기가 좀 이상하고 심상치 않는 것을 느꼈다.침대 옆 머릿장에는 보온병이 놓여있다. 서강민은 오늘도 도혜선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주러 온 것 같다.서강민은 침대 앞에 떡 하니 서있었고 침대에 있던 도혜선은 차가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도혜선은 내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 같았다.상황을 정리하려고 다가가서 서강민에게 인사를 하고 도혜선에게 다가갔다. "오늘은 좀 어때?""별로야."도혜선은 차갑게 대답하더니 또 말을 건넸다. "지아야, 손님 좀 배웅해 줄래?"난감했다, 도혜선은 서강민을 내쫓으라고 하는 거였다. 난 당연히 그 뜻을 알고 있다. 조심스럽게 서강민을 쳐다보았다. "혜선아, 꼭 이래야 하니?"서강민은 씁쓸한 표정으로 도혜선을 바라보며 물었다."네! 서강민씨, 저는 이미 분명히 말했고 두 번 다시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도혜선은 내가 그 자리에 있다고 해서 서강민의 체면을 세워주지 않았다.참지 못하고 웃어 버렸다. "언니, 화 그만 내고 진정 좀 해. 초조해하는 거 알아, 점차 좋아질 거야. 강민씨랑 얘기 좀 하고 있어. 나는 팔 검사해야 돼서, 금방 돌아올 거야!"나는 핑계를 대고 떠나서 그들에게 자리를 비워주었다.
배현우는 나의 우울한 모습을 보고 말했다. "그리고 내가 없는 동안에 회사 일도, 한심로얄의 마지막 한방도 둘 다 포기할 수 없잖아요. 신예 쪽 일도 있고, 전희가 다시 살아날 기회를 얻지 않도록 조심해야 돼요. 지금 모든 게 중요한 시기이니까요.""지금 그 누구도 아버지보다 중요하지 않아요! 수십년간 도망치면서만 살았는데 죄책감도 가지고 있었을 거예요, 분명 아주 괴로워하고 있을 거예요. 그리고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무도 모르고 있는데, 내가... 내가 딸로서, 난..."배현우는 내 말을 듣고 나서 침대에 누워 나를 꼭 껴안고 말했다. "일단 내일 소식을 기다려 봅시다. 김우연 쪽에서 어떤 정보를 얻었는지 보고 결정합시다."배현우는 나의 어깨를 툭툭 쳤다. "제 말 듣고 일단 자세요, 내일 일어나서 먼저 할 일들을 처리하고 준비하고 있으세요, 만약에 상황이 좋으면 내일 같이 데리고 갈게요, 당신 마음 충분히 이해해요."배현우가 지금 나를 위로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다. 내가 기분 나빠하는 모습을 보지를 못한다. 그 말을 들으니 마음이 좀 편해지는 것 같았다. 배현우의 따뜻한 품에 안기며 눈을 감고 내일 먼저 무엇을 처리해야 할지 생각했다.근데... 눈을 떠서 배현우를 쳐다보는데 배현우도 잠에 들지 않았다. "현우씨... 할머니가 보존하고 있는 CCTV를 보여주시겠어요?"'그 영상을 꼭 보고 싶었다, 알고 싶었다. 어머니가 어떻게...'"알았어요, 하지만 지금은 자세요, 나중에 보여 드릴게요. " 팔짱을 끼더니 분명히 나를 얼버무리고 있는 것이다. 배현우가 그 장면을 내게 보여주고 싶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밤이 깊었고, 비까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꼼짝도 하지 않은 채 배현우의품에 안겨 점점 잠이 들었다. 아침이 밝았다. 날씨는 여전히 흐렸다. 배현우는 이미 곁에 없었고, 손을 뻗어 그가 누워 있던 곳을 만졌다. 이미 차가운 걸 보니 배현우는 일찍 침대에서 일어났나 보다.'무슨 소식이라도 왔나?'이
"할머니가 이번 사건을 피할 수 있었던 건 당시 큰 병을 앓은 것에 대해 감사해야 했어요. 제 생각에는 반은 꽤병인것 같아요. 직접 사표를 쓰고 나서도 서둘러 호주를 떠나지 않았다는 게 참 슬기로운 선택이었어요.""네?"너무 놀라서 몸 둘바를 몰랐다.배현우는 인정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할머니는 호주를 떠나지 않으셨어요. 그곳에 머물면서 배씨 저택의 인기척을 살피다가 배씨 저택의 요상한 소문들이 완전히 자취를 감춘 뒤에야 조용히 호주를 떠나셨어요."나도 모르게 할머니의 메커니즘에 감탄했다."저도 그때 상황을 잘 몰라서, 할머니도 몸이 허약했고 내 행방을 알아 볼 길이 없어 그 비밀을 계속 지켜왔었나봐요. 부하들이 할머니를 찾고 나서도 여전히 어리석은 척을 하고 있었지 뭐에요."배현우는 그제야 미소를 지었다."할머니께서 저를 두눈으로 직접 보고서야 그걸 꺼냈어요."배현우의 말을 듣고 나니 할머니를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러던 중 배현우가 나를 쳐다보더니 나의 지친 모습을 보고서야 손을 들어 대문을 열어 장벽들이 천천히 열리는 걸 볼 수 있었다.차는 왔던 길을 따라 경원으로 다시 돌아갔다. 벌써 자정이 되어 우리 둘은 차를 세우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층으로 올라가 방에 돌아왔다.'우리를 배신한 소인이 두 집안을 풍비박산 시켰다니. 오늘 밤 일어난 모든 일들은 듣고도 믿기지 않았다.'간단히 씻고 걱정 가득채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태어나서 얼굴도 한번 못 본 아버지가 어디 있는지, 밥은 먹고 다니는지를 걱정해 발 뻗고 자지 못했다. '한강인이랑 한걸은 이미 잡혔는데, 우리 아버지는? 그의 처지는 어떤지.''한씨 부자가 그저 아버지를 인질로 삼아 그들의 안전을 확보하려 했다면 왜 배현우는 그곳의 환경이 복잡하다고 했을가.''이유는 간단하다. 누군가 아버지를 미끼로 삼으려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누구를 보고 싶으려는 걸가?''배현우? 아니면 배유정?'생각할수록 더욱 걱정이 됬다.아버지의 이번생은 이미 충분히 힘들다.어머니랑 서로
나는 걱정스레 배현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배현우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계속 말했다.“후에 목격자 어르신을 찾고서 한강인을 자세히 조사하니 한강인은 이 모든 것이 일어난 뒤에야 천우 그룹을 떠난 거였어요. 지아 씨도 알잖아요. 그때 당시 천우 그룹은 아직 배유정 손에 있었어요.”“현우 씨의 말은 한강인은 배유정 과도 사이가 틀어졌단 말인가요?”나는 추측하며 물었다.“우리가 조사할 때 이상한 단서 하나가 나왔어요. 한동안 배유정도 한강인을 찾았고 심지어 한강인에 대한 추살령도 내렸어요! 참 이상해요. 배유정은 왜 한강인을 죽이라고 지령을 내린 걸까요?”“이유는 하나뿐이죠. 즉 한강인이 분명 무엇을 알아냈거나? 아니면 어떤 일에 참여하였거나?”나는 대답했다.배현우는 고개를 끄덕이었다.“진백이 죽임을 당했듯이 이 안에는 분명 남들한테 들키면 안 되는 비밀이 있는 거겠죠. 우리는 이 단서를 따라 계속 추적해 보니 한강인의 혐의가 점점 더 드러나더군요. 그리고 그의 아들 한결도 같이 도망쳤어요.”“그러고 보니 이 안에는 분명히 또 다른 요소가 있겠네요!”나는 사색에 잠겼다.“그래서 우리는 추측했죠. 한강인은 확실히 이 사건이랑 연관이 있고 둘이 도주하는 과정에 서로 연락하는 빈도를 보아서 부자 둘은 서로 다른 곳에 있는 것으로 판단했어요.”“그리고 한강인이 도망 다니는 그 시기에 그의 모친이랑 누나 모두 영문도 모른 채 실종되었어요. 지금 보니 그분들은 아마 이미 이 세상을 떠난 것 같네요. 이 때문에 한강인은 고두리에 놀란 새가 돼서 끊임없이 도망치며, 이 또한 한강인이 지금의 상태로 되게 한 원인인 것 같아요. 사실 한강인은 원래 지금의 모양이 아니거든요.”배현우의 말을 듣자 나는 저도 모르게 아까 보았던 한강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한강인은 극도의 공포 속에서 엄청 정신적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니면 다른 기타 방식으로 정신을 잃지 않게 버티고 있거나. 그렇지 않으면 사람이 저렇게 말라죽을 정도일 리가 없다.“그리고 한 가
배현우는 나를 한눈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었다.“맞아요. 제 씨 어머니가 얼마나 총명한지 그 누구도 생각지 못했어요. 제 씨 어머니는 책 속에 카메라를 숨겨두고 만약 사고가 난다면 여기에 있는 이 물건을 숨겨두었다가 훗날 믿음직스러운 사람에게 주라고 할머니한테만 똑똑히 당부해 두셨어요!”나는 코가 찡긋거리더니 눈에는 눈물이 핑 돌았다.“보아하니 제 씨 어머니는 분명 위험이 닥칠 거라는 것을 미리 예감했던 거네요!”배현우는 안색이 조금 어두워지더니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갑자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제 씨 어머니는 만약 자신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할머니더러 애들을 데리고 허씨 가문으로 가라고 할머니한테 당부하셨어요.”나는 끝내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고 코를 훌쩍이었다.배현우는 자기 손을 꽉 움켜쥐며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참 생각지도 못한 게 모든 것이 제 씨 어머니의 예상대로 일어났고 감춰둔 카메라에 모든 것이 담겼어요! 근데 할머니는 제 씨 어머니의 뜻대로 우리 둘을 순리롭게 허씨 가문으로 데려가지 못했어요.”“급한 나머지 할머니는 고씨 가문에만 소식을 전했고 그마저도 나쁜 놈들보다 동작이 빠르지 못해 그들이 지아 씨를 데려간 후였어요. 그래서 저만 고씨 가문에서 데려갔어요.”나는 눈물을 닦아내면서 그때 당시의 내가 얼마나 힘없고 무력했을지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다. 갑작스럽게 어머니가 돌아가신 데다가 배현우와 억지로 갈라지게 되었다.배현우는 내 손을 꽉 잡으며 손에 힘을 주었다.나도 배현우 지금의 심정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날 배현우는 눈앞에서 억지로 끌려 나가는 나를 보기만 하고 반항할 수도 없는 그런 무능력함은 아마 배현우한테 평생 잊지 못할 아픔이 되었을 것이다.차 안은 갑자기 조용해졌고 자동차가 앞으로 가는 소리밖에 안 들렸다.한참 뒤에야, 배현우의 잠긴 목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이런 것들을 찾은 후에야 비행기 추락 사고가 떠올랐고 이로써 모든 것들이 비로소 한강인을 추측하게 했으며 그 이후에 우리는 한강인
이 소식은 그야말로 나를 입이 떡 벌어지게 했다. ‘나를 데려간 게 어떻게 그 사람이지?’“맞아요. 우리는 유일한 목격자를 찾았어요. 그 당시 그쪽 산에서 약재를 캐는 어르신이신데 그때는 중년인이셨어요. 하늘의 뜻인지, 우리가 수년을 찾아 헤맨 끝에야 비로소 이 참극의 전부를 직접 목격한 증인을 찾아냈어요.”“그 어르신 정말로 전체 과정을 모두 목격하셨나요?”나는 믿어지지가 않았다. 배현우 얘네가 얼마나 큰 공을 들여야 바다에서 바늘 건지는 것 같은 일을, 그것도 몇 년이 지났는데도 당시의 목격자를 찾아낸 걸까.“어르신의 말로는, 당시 자기는 산 위에서 내려오는 도중에 잠시 계단에서 쉬고 있었는데 그러다가 아래 도로에서 일어나는 광경을 목격했다고 해요. 알다시피 외국에서는 약재를 캐는 일은 엄청 드물어요.”배현우는 엄청 뿌듯한 말투로 말했다.“우리 형제들이 엄청나게 고생 많았어요. 십수 년을 하루같이 귀찮음을 마다하고 사건 지역을 탐방하러 다니면서 일말의 흔적도 소홀히 하지 않았어요.”나도 믿어지지 않아 입을 열었다.“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어요. 참 노고가 많았어요.”“어르신이 말씀하기를 당시의 장면은 엄청 아슬아슬했대요. 부딪힌 차는 거의 굴러떨어지기에 일보 직전이었는데 후에 폭발했대요. 어르신은 우리의 차가 폭발한 뒤 키 크고 마른 한 남자가 차에서 내리는 걸 똑똑히 봤다고 해요. 그리고 그 남자는 길 왼쪽의 언덕 아래로 달려가 무언가를 찾았대요.”배현우는 그때 당시의 장면을 묘사하였다. 나는 머릿속으로 그때 당시의 상황을 필사적으로 상상해 내려고 하니 머리가 또 아파 났지만, 배현우가 말을 멈출까 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당시에 일어난 이 모든 것, 전부 나한테는 엄청난 매력이었다. 나는 지금 내가 찾아낸 산산조각 난 퍼즐들을 하루빨리 제 위치에 맞춰서 하나의 완전한 그림을 만들어 내고 싶었으며 그때 당시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을 되찾고 싶었다.그 뒤로 난 어떻게 Z 국의 만덕동에서 떠돌게 되었고 또 어떻게 지금의 한지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