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베이터 안에서 우리는 입을 열지 않았다. 신연아는 고개를 숙이고 입을 비쭉거리며 엘리베이터에 기대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신호연처럼 그녀의 못된 버릇을 받아 줄 마음이 없었다.신호연의 사무실에 도착해서 보니, 그는 진짜 회의 중이었다. 부하직원이 그를 불렀고, 나와 신연아의 모습을 본 신호연은 의아해하며 우리 둘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그리고 나의 옷차림에 시선이 고정되었다.“당신 옷차림이...”“창피하다 이거지? 장 보러 시장에 가는데 뭣하러 차려입어?”나는 신호연의 말을 끊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당연히 알고 있어 퉁명스럽게 말했다.“열쇠나 빨리 줘. 콩이 아직도 자고 있어.”신호연은 서둘러 사무실 책상으로 걸어갔고, 문서 가방에서 열쇠 꾸러미를 건네주었다.“내가 연아한테 말해서 열쇠 가져가라고 했잖아?”열쇠를 받아든 나는 불쾌하게 신연아를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아가씨가 나한테 열쇠를 갖다 줄 시간이 어디 있어? 여기서 ‘신 사모님’행세하는 게 열쇠보다 더 중요한데.”“당신은 ‘신 사모님’이랑 좋은 시간 보내. 난 ‘신 사모님’을 행차하게 할 자격이 안 돼.”이번만큼은 신연아의 체면을 세워 줄 생각이 없었다.“오빠라는 사람이 참 대단하기도 하지. 어떻게 자기 부인 타이틀까지 동생한테 내어줘?”말을 마친 나는 냉담한 얼굴로 돌아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집에 콩이가 자고 있으니 더 이상 그들과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았다.나는 화가 잔뜩 난 채로 열쇠를 들고 빌딩을 나와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문을 열 때, 나는 손에 든 열쇠 꾸러미를 주의 깊게 보았다. 그중 두 개는 새것 같았다. 이리저리 뒤적여 보면서 대체 어디 열쇠인지 의문이 들었다.우리 집 열쇠를 찾아 문을 열고 급히 침실로 달려갔다. 콩이가 아직 깊이 잠들어 있는 것을 보고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침대 앞에 주저앉았다. 다행이야!나는 손에 든 묵직한 열쇠를 쳐다보았다. 그 두 개의 새 열쇠는 왠지 모르게 불길한 예감이
“왜 그래?”신호연은 나를 올려다보며 물었다.“힘들어서 그래? 잠깐 들어가서 쉬어. 내가 콩이랑 놀고 있을게.”나는 감정을 억누르며 고개를 끄덕였다.“응, 힘들어. 그러면 잘 놀고 있어. 들어가서 눈 좀 붙일게.”나는 말을 마치고, 과일을 탁자 위에 놓았다.“콩이한테 먹여줘. 주방에 다른 것도 있어.”“그래, 들어가서 쉬어. 깨면 같이 나가서 밥 먹자!”신호연은 말하면서 포크를 집어 콩이에게 피타야를 먹였다.나는 돌아서서 침실로 돌아와 침대에 누웠다. 호흡이 가빠지더니 눈물이 흘러내렸다.보아하니 그 두 열쇠는 절대로 평범하지 않다. 급하게 집으로 달려온 것은 콩이가 걱정되어서가 아니라 열쇠를 돌려받기 위해서였다.바람난 남자는 너무 뻔뻔했다. 어쩌면 열쇠는 그 여자 집의 열쇠일지도 모른다.나는 저도 모르게 이미연이 생각났다. 2년 동안 사업이 번창해서 혼자 큰 아파트에 입주한지 오래되었지만 종래로 어디에 사는지 말한 적이 없었다. 나를 집으로 초대하지도 않았다. 보아하니 남자를 집으로 데려가기 위해서였다.생각하면 할수록 분통이 터졌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더니, 배신당한 느낌에 구역질이 났다. 어쩐지 이미연이 나보고 신호연에게 속아 아무것도 모른다고 하더라니.이건 나에 대한 노골적인 도발이었다.비록 이미연이 가짜 ‘신 사모님’이 아니더라도, 그녀는 절대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다. 속에 꿍꿍이가 없는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겠는가?신연아 이 얼간이는 하필 이 지점에 일을 벌여 사태를 복잡하게 만들었지만, 이미연이 그날 신호연과 함께 쌍으로 거짓말을 한 것은 분명 뭔가 있다.알려져서는 안 되는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이 분명하다.보아하니 신호연은 진작에 날 방비하고 있었다. 어쩐지 여태까지 아무런 낌새도 찾을 수 없더라니. 대체 언제부터 신호연이 밤마다 도둑처럼 날 방비하고 있었지?여기까지 생각한 나는 가슴팍을 움켜쥐었다. 가슴에 큰 바위가 눌린 것처럼 답답하고 아팠다.밖에서 부녀는 재밌게 놀고 있는데
서강훈은 우리 회사의 마케팅 부서의 총괄 담당자이다. 우리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아주 열정적으로 맞이했다. 콩이와도 놀아주면서 우리의 주문을 도와주었다.서강훈은 마케팅 부서를 담당하고 있으니 내 자리를 이어받은 셈이다.서강훈은 내가 채용하여 회사로 들여왔고 나랑 1년 넘게 일했다. 그 당시 마케팅 부서는 발로 뛰는 단일한 마케팅 방식이었고 다섯 명의 직원밖에 없었다. 서강훈은 대학을 졸업하고 머리가 잘 돌아가, 죽은 사람도 입으로 살려내는 마케팅에 최적화된 사람이었다.내가 임신한 후, 내 자리를 이어받아 신호연의 밑에서 집중 트레이닝을 받으며 자랐다.지금은 이미 신호연의 오른팔이자 왼팔이었다.이 식당에 자주 오는지, 우리를 보자마자 매니저를 찾아 단독 룸을 마련해 주었다. 신호연의 말보다 잘 먹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계속 우리 대표님이라고 강조하며 절대 선을 넘지 않는 모습이었다.신연아는 서강훈과 잘 아는 사이인 듯 주문할 때 눈을 마주치며 말을 주고받았다.나는 콩이를 데리고 주문은 신경 쓰지 않고 바로 룸으로 들어갔다. 이 방면에서 신호연은 절대 믿을 수 있었다.음식을 주문하고 서강훈도 따라 들어왔다. 마침 오랫동안 그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앉아서 이야기하자고 했다.나는 그에게 지금 회사의 상황을 물었고, 서강훈은 하나도 빠짐없이 설명하면서 신호연을 흘끔 쳐다보았다. 지금의 서강훈은 내가 회사에 있을 때의 서강훈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지금의 주인은 신호연이니, 그의 눈에 난 그저 한물간 대표일 뿐이었다. 지금의 대표에게 잘 보이려는 것도 어쩌면 당연했다.난 속으로 섭섭했다. 어쩌면 이미연의 말처럼 난 이미 도태되었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신흥 건재에서는 이미 과거형이 되었고, 신 사모님이라는 소리도 충분히 나를 존중하는 호칭이다.어느 날 나와 신호연이 헤어지게 되면 이 사람들은 아예 날 모른 척할 것이다. 신호연도 날 배신했는데, 누가 회사를 위해 피를 토해가며 술을 마시던 전처를 기억하겠는가?슬프게도 그때의 일로 나는 담
이상한 소리였다. 서로 잡아당기는 것 같기도 하고 또 마치...칸막이를 밀치고 나오려는데, 한 남자의 말소리가 들렸다.“이쁜이, 드디어 만났네.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알아?”나는 멍해졌다. 분명 서강훈의 목소리였다. 나는 문을 열려던 손을 갑자기 움츠렸다.서강훈이 이렇게 대담한 사람인 줄은 전혀 몰랐다. 그의 아내는 아주 괜찮은 여자인데도 밖에서 이런 짓을 하는 걸 보면 남자는 역시 똑같다.“뻥치지 마, 요즘 딴 년이랑 눈이 맞은 거 아니었어?”여자는 질투 섞인 말투로 말했다.“방금 문 앞에서 열정적이던 모습은 어디 갔어? 나한테는 왜 그만큼 열정적이지 않는 건데? 그런데도 내가 당신한테 중요한 사람이라고? 쳇. 입만 살았지.”“오해야. 널 얼마나 좋아하는데...”그리고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기다려 봐. 키스하고 싶어 미치겠어...”서강훈의 도발적인 말에 나는 얼굴이 빨개졌다.“회사 대표님인데 당연히 열정적으로 모셔야지, 안 그래? 내 밥그릇을 잘 챙기지 않으면 뭔 돈으로 우리 이쁜이를 만나겠어?”“당신네 대표 정말 잘생겼더라. 잠깐... 왜 이렇게 서두르는 거야. 이따가 누가 와... 악!”분명 낯 뜨거운 일을 벌이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조금 화가 난 나는 막 나가려는데 서강훈의 목소리가 들렸다.“아무리 잘생겨도 네가 가질 순 없어. 그분 주위에 어여쁜 꽃들이 얼마나 많은데, 넌 그냥 나만 잘 시중들면 돼.”나는 머리가 윙윙거렸다. 보아하니 신호연의 외도를 서강훈도 알고 있는 모양이다. 난 얼굴이 갑자기 화끈거렸다. 방금 말끝마다 사모님이라고 부르며 아첨하던 그 태도가 얼마나 가식적인가!사모님이라고 부르면서 속으로는 나를 얼마나 비웃었을까!휴대폰을 쥔 손이 부들부들 떨리며 가슴이 먹먹해났다.밖에서 나는 소리에 얼굴이 빨개진 나는 갑자기 어떤 생각이 떠올라, 휴대폰을 켜고 조용히 칸막이를 열었다.하지만 소리만 있을 뿐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소리를 따라가 보니, 가장 안쪽의 청소 도구실에서 흘러나왔다. 안에서는 나의
신연아는 내 말이 듣기 싫었는지 언짢게 말했다.“언니! 욕심이 너무 큰 거 아니에요? 우리 오빠가 언니한테 얼마나 잘하는데요? 오빠 혼자 밖에서 힘들게 일하니까 언니가 전업주부로 편안한 생활을 하는 거 아니에요? 무슨 자격으로 오빠한테 그런 말을 해요? 적당히 하세요.”나는 차갑게 신연아를 바라보았다.“왜요? 오빠한테 뭐라고 하니까 기분 나빠요? 언제부터 우리 대화에 끼어들 자격이 있었죠?”신연아는 어이없다는 듯 눈을 흘겼다.“난...”“전업주부가 어때서요?”난 신연아의 말을 뚝 끊었다.“내가 전업주부인 게 그렇게 마음에 걸렸나 봐요? 그래서 회사에 가서 사모님 놀이 한 거예요? 재밌었어요?”나는 공격적인 눈빛으로 신연아를 바라보았다. 예전엔 내가 너무 현모양처라 그녀까지도 나를 얕잡아보았다.“오빠 혼자서 일해요? 오빠한테 직접 물어봐요. 내 앞에서 이런 말 할 자격이 있는지!”난 신연아에게 다시 입을 열 기회를 주지 않았다.“내가 서울 바닥을 다 뛰어다니면서, 비굴하게 위출혈이 날 때까지 술을 마신 건 아가씨가 모르는 거예요? 아니면 그쪽 식구들은 다 모르는 거예요? 오빠도 감히 혼자 힘으로 여기까지 왔다고 말 못 하는데, 아가씨가 나한테 자격이 없다고 하는 거예요?”신연아는 화가 단단히 나서 신호연을 바라보았다.하지만 난 입을 다물지 못했다.“내가 일궈놓은 성과를 누리고, 우리 집 돈을 쓰면서 한치의 부끄러움도 없잖아요. 그럼 아무런 기여도 하지 않은 아가씨가 자격이 있는 걸까요?”나는 전에 없던 차가운 눈으로 신연아를 쏘아보았다.“우리 집에 계속 손 내밀고 싶다면 얌전히 있어요. 앞으로 내 앞에서 이런 말 따위 하지 말고요. 난 아가씨 오빠가 아니라서 못된 버르장머리를 받아줄 의무가 없어요.”“너!”“나보고 적당히 하라고요? 이 문제는 앞으로 아가씨한테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다시 얘기하죠.”나는 화가 치밀어 오른 신연아를 경시하며 쳐다보고, 신호연에게 말했다.“당신 동생 계속 버릇없게 내버려 둘 거야? 최소한의 예의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콩이는 잠이 들었다.차를 세우고 신호연은 콩이를 안고 방으로 들어가 눕혔다.나는 콩이를 침대에 잘 눕히고 샤워하러 가려 했다.신호연의 전화는 수시로 울렸다. 그는 힐끗 쳐다보고는 끊어버렸고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었다. 내 앞에서 절대 받지 않을 것이라는 걸 난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잠옷을 가져가는 김에 휴대 전화도 챙겼고, 욕실에 들어가서 물을 틀어놓고 문틈 사이로 바깥의 동정을 살폈다. 신호연은 역시 목소리를 낮추며 통화하고 있었다.나는 이미연에게 전화를 거니, 통화 중이라는 안내음이 흘러나왔다.역시나, 신호연은 분명 이미연과 통화 중이다. 나는 화가 나서 손이 떨렸다.나는 대충 헹구고 욕실을 나섰고, 신호연은 나의 움직임을 듣고 얼른 전화를 끊고 베란다에서 돌아와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여보, 다 씻었어?”그는 가식적인 웃음을 보이며 내 손에 있는 수건을 가져가 내 뒤에 서서 머리를 닦아줬지만 정신은 딴 데 팔린 듯했다.“누구 전화야?”나는 담담하게 물었다.“엄마야!”신호연은 머리를 굴리지도 않고 곧바로 대답했다. 내 마음속에는 갑자기 불길이 치솟았다.콩이가 갑자기 울자, 신호연은 당황해서 손에 들고 있던 수건을 나에게 주고 콩이의 방으로 가며 대화를 회피했다.나는 수건을 들고 생각에 빠졌다. 그는 또 거짓말을 하고 있다. 이 저녁에 시어머니가 전화했을 리가 없다. 나는 욕실로 돌아가 시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역시나 시어머니는 아들에게 전화한 적이 없다고 한다.나는 욕실의 벽에 기대어 무력감을 느꼈다.신호연은 콩이를 안고 화장실로 들어왔다. 콩이는 오줌이 마려워서 잠에서 깼던 것이다.콩이는 여전히 졸려서 눈도 뜨지 못하고 오줌을 눴다. 저녁에 음료를 너무 많이 마신 탓인 듯했다.갑자기 신호연의 전화가 다시 울리기 시작했고, 좁은 화장실에서 그 벨 소리가 상당히 귀에 거슬렸다. 신호연은 당황한 나머지 손에 있던 콩이를 잊은 채 전화를 챙기러 갔다.콩이는 그대로 떨어져 변기 위에 내동댕이쳐졌고, 나는
우리 두 사람 모두 깜짝 놀랐다. 신호연의 눈은 갑자기 움츠러들었고, 나의 눈은 점점 더 날카로워졌다. 나는 공격적으로 그를 바라보며 의심할 여지없이 말했다.“받아!”신호연의 몸은 굳어지더니 그 자리에 뻣뻣하게 서 있었다.“신호연, 양심이라는 게 있다면 내 앞에서 전화받아! 마지막 기회야!”나는 울고 있는 콩이를 꼭 껴안고,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말했다.“세상 모든 남자들이 배신해도 당신은 아닐 줄 알았어. 당신이 날 저버린 거야.”난 마침내 마주하고 싶지 않은 말을 내뱉었다. 우리 둘 사이에 배신이라는 단어가 생길 줄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말을 마친 나는 눈물이 비 오듯 쏟아졌고, 콩이의 엉엉 소리와 함께 어우러져 끝없는 슬픔과 절망에 빠졌다. 신호연은 나의 협박에 천천히 휴대전화를 꺼냈다. 벨 소리는 더욱 맑게 울려 현재의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았다.나는 신호연을 쳐다보고, 신호연은 제자리에 서서 어쩔 줄 몰라 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주먹을 움켜쥐고 어금니를 꽉 깨물고 명령했다. “받아!”신호연은 휴대전화를 힐끗 쳐다보더니 말했다.“연아야!”“받아”!누구든 그에게 추호의 기회도 주고 싶지 않았다.그는 잠시 망설였지만 나의 굳건한 표정을 보고는 하는 수 없이 전화를 받고 서둘러 말했다.“연아야, 나 언니랑 얘기 중이니까 할 말 있으면 내일 해.”“그래, 그럼 내일 다시 전화할게!”전화기 너머에서 신연아의 목소리가 들렸다.신호연은 억울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예상치 못한 결과에 나는 멍해졌다. 콩이가 엄마를 외치며 우는소리에 더 이상 캐묻기 곤란했다. 나는 콩이를 안고 방으로 가서 문을 세게 닫았다.“여보, 여보.”문이 닫히는 순간, 나는 울음을 터뜨렸다.분명 그의 가면을 찢을 수 있었는데, 거의 다 왔는데. 관건적인 순간에 일이 그르친 건 분명 신연아가 오빠를 감싸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신연아는 충분히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신연아와 나는 절대 화목하게 지낼 수 없는 존재이다.지금의 신호연은
쉴 새 없이 울리는 벨 소리를 들으며 어떻게 나의 심정을 묘사해야 할지 몰랐다. 신호연이 바로 나간 이 기가 막힌 타이밍에 이미연이 전화가 왔으니,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분명 신호연이 나가서 상황을 보고했을 것이다.나는 담담하게 전화를 받았다.“응! 미연아!”“뭐 하고 있었어? 콩이는 괜찮아?”이미연의 목소리는 상당히 경쾌하고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나는 마음속으로 비뚤어진 생각을 했다. 나랑 신호연이 한바탕 싸웠으니 이미연은 당연히 기뻐할 수밖에 없지!“오늘 한가하나 봐? 이른 아침부터 웬 전화야?”나는 비꼬아서 말했다.“내가 뭔 로봇도 아니고, 당연히 에너지 충전하는 시간이 필요하지. 내가 밥 사줄까?”이미연은 웃으며 말했다.“콩이 아직 안 데려다줬어. 집에서 나랑 놀고 있어.”나는 덤덤하게 대답했다.“그래? 그럼 잘 됐네. 나한테 콩이 좀 보여줘. 저번엔 네가 화가 많이 나서 오래 못 봤잖아.”이미연은 장난스레 말했다.생각해 보니 이건 절호의 기회였다. 이미연이 먼저 적극적으로 나섰는데, 이 기회를 잘 이용하지 않는다면 그녀의 열정에 미안한 격이다.“좋아. 뭘 먹든 상관없어. 그냥 조용히 있고 싶어. 너희 집으로 갈게. 아직까지 날 한 번도 집으로 초대한 적 없잖아. 급한 일 있을 때 네가 연락이 안 되면 난 어디 가서 널 찾아? 집에 꿀단지라도 파묻었어? 왜 그렇게 꽁꽁 숨겨.”나는 평소의 대화방식대로 가볍게 말했다.이미연은 망설이는 것 같았고, 나는 휴대전화를 꼭 움켜쥐었다.“설마 거절할 거야?”이미연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나는 일부러 자극했다.“뭔 소리야? 내가 왜 거절해. 우리 집에 남자가 숨어있다고 해도, 남자를 쫓아내고 널 불러야지.”그녀는 통쾌하게 말했다.“그래, 그럼 우리 집에서 만나자. 조금 있다가 내가 데리러 갈 테니까, 너랑 콩이는 집에서 나 기다리고 있어. 내가 데리러 갈게!”전화를 끊은 나는 콩이를 안고 마음이 무거웠다. 이 모든 일이 사실이 아니라면 얼마나 좋을까. 깨어나면 사라지는 악
나는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 마지못해 고개를 들어 서강민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서강민 씨, 먼저 들어가시죠. 언니가 깨서 서강민 씨를 보면 또 흥분할 것 같은데... 지금 같은 상황에 언니가 회복하는 게 제일 중요하잖아요.”그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는 않았지만, 나는 한마디 더 보탰다.“어떤 일들은 천천히 해야 해요. 언니한테 시간을 좀 주세요. 서로 생각을 정리해 봐요.”서강민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않고 깊은 잠에 빠진 도혜선을 한참이나 지켜보았다. 발길을 돌리기 전에도 아쉬움에 한 번 더 뒤돌아보며 나한테 말했다.“고생해 줘요.”나도 담담히 답했다.“제가 해야 할 일인걸요. 언니에게 시간을 좀 줘요. 언니도 회복할 시간이 필요할 수 있잖아요.”내가 말하는 회복이 뭔지는 서강민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건 도혜선이 마음에 입은 상처였다. 오늘 도혜선의 행동에서도 알 수 있다시피 그녀의 상처는 아물 수 없을 것이다. 언급만 해도 피가 흘러내릴 만한 상처였다.잠시 후, 서강민은 한발 물러섰지만, 눈길은 여전히 도혜선에게 머물러 있었다. 평온해 보이는 모습 아래에서 어떠한 파도가 휘몰아치는지 나는 몰랐다.한참 전 도혜선이 했던 말들은 마디마디가 주옥이었다. 모두 그녀가 마음속으로만 담아두었던 것들이었고 또한 서강민의 약점이었다. 얼마나 아플지는 서강민 본인만 알고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쓰디쓴 독주도 그는 혼자 삼켜내야만 했다.도혜선의 눈가가 파르르 떨려와 깨어나려는 낌새가 보이고 나서야 서강민은 조용히 병실을 나갔다.나는 마음이 아파와 한숨을 내쉬며 손을 뻗어 도혜선의 손을 맞잡았다.인제야 하루 종일 배현우에게서 연락이 없었다는 것이 생각났다. 그쪽에는 어떤 상황인지, 김우연에게서는 소식이 없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도혜선을 보니 아직 깨어나지 않은 것 같아 살며시 그녀의 손을 놓고 일어서려 했을때, 그녀는 다시 나를 잡으며 미약한 목소리로 말했다.“가지 마...”나는 너무 놀라 얼른 그녀를 향해 몸을 돌렸다.
‘서강민은 본인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기나 하는 걸까?’“당시의 사고는 내가 저지른 거야. 그녀도 나 때문에 다쳐서 지금처럼 된 거고… 나는 좋은 남편이 아니야. 아내가 식물인간이 되었는데 나는 다른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으니 말이야...”서강민은 여기까지 말하며 후회하는 기색을 내비쳤다.“그녀를 마주할 때마다 너무 죄책감이 들고 고민스러워. 나 또한 발버둥 쳐봤지.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나의 일탈을 받아들일 수 있어 해. 그녀한테 정말 미안한 일이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내가 널 사랑하고 있다는 거야...”“강민 씨!”도혜선은 꾸짖는 듯한 말투로 그의 말을 잘랐다.“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고 당신 아내가 듣고 있을 거예요. 저를 끌어들여서 같이 속죄할 생각하지 마세요. 저는 당신의 구세주가 아니에요. 저는 그냥 사람답게 살고 싶은 평범한 여자라고요. 저 좀 그냥 내버려둘 순 없어요?”도혜선은 말하면 할수록 화가 치밀어 올라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하얗게 질린 얼굴이 일그러지며 그녀는 한 손으로 본능적으로 가슴을 움켜쥐었다. 나는 깜짝 놀라 그녀 앞으로 갔다.“혜선 언니, 움직이지 마! 위험해...”늑골 골절과 뇌진탕이 있는 환자다 보니 이러한 행동은 그녀에게 너무나도 위험했다.도혜선은 손을 들어 그녀를 안으려고 하는 한지아를 제지했다.“제가 오늘 한 말이 아직도 이해가 안 되나요? 서강민 씨, 저의 인생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당신한테 묶여 당신의 부속품이 되었었는데 저도 자존심이 있어요. 더 이상 당신처럼 지난날의 죄책감을 짊어지며 답답하게 살아가지 않을 거예요.”도혜선은 여전히 분노에 차 외치고 있었다.“매일 제 앞으로 와 지난날의 행동에 대해 속죄하라고 일깨워 주실 필요 없어요! 당신을 보면 저는 지난날 모든 서울 사람의 웃음거리가 되었던 치욕적인 과거가 떠올라요. 당신은 마음 가는 대로 해요. 당신은 아내와 했던 약속을 지켜야 해요.”말을 마친 도혜선은 숨이 차올랐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보였다.
도혜선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계속하여 들려왔다.“당신은 아무런 부담 가질 필요 없어요. 저 같은 여자 마음속에 담아두지 않아도 돼요.”그녀는 자기비하적인 말을 내뱉었다.”선아...”“설사 강민 씨가 와이프와의 약속을 안 지킨다 해도 당신의 신분과 지위로 당신에게 더 어울릴만한 사람 충분히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저는 당신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에요. 하물며 당신네 부부 눈에는 저는 그냥 염치없고 미천한 사람일 뿐이죠. 저 같은 사람은 본처가 되기에 적합하지 않아요. 사모님이라는 호칭도 어울리지 않죠.”“나는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 오해하지 마.”서강민은 조급함에 한 발 앞으로 나서며 해명하려 했다.하지만 도혜선은 손을 들어 그를 막아섰다.“강민 씨... 해명하지 않아도 돼요. 당신의 행동이 모든 걸 설명해 주고 있어요! 장담하건대 아직 당신들이 어떤 의도로 얘기하고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바보가 된 건 아니에요. 그녀는 정말 대단하네요. 죽을 때까지도 제가 이길 수 없는 사람이었어요. 그녀는 아무리 병상에 누워있어도 고상한 사람이고 저는 그냥 미천한 사람일 뿐이니 말이에요.”도혜선은 말을 내뱉으며 입가에 처량한 미소를 비췄다. 누가 봐도 가슴 아픈 미소였다.“이전의 저는 확실히 허례허식에 차 있는 사람이었지만 저도 성장했어요. 정신 차렸어요. 당신 앞에 있는 저의 진정한 가치가 어떤 것인지 깨달았어요. 저는 하나의 도구, 들러리뿐이었지만 원망하지 않았어요.”그녀는 여기까지 말하고 한숨 돌렸다. 얼굴빛은 아까보다 더 창백해져 있었다.“하지만 이제 저는 자존감을 챙기며 살고 싶어요. 누군가에게 의탁하지 않고 쓰레기같은 취급을 받더라도 최소한의 존엄을 지키며 살고 싶어졌어요.”점점 더 차가워지는 도혜선을 바라보며 서강민은 답했다.“혜선아, 나는 널 한 번도 무시한 적 없어. 나는 그냥 내가 뭘 하든지 네가 다 이해해 줄 줄 알았어.”도혜선의 서강민의 말을 듣고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안색은 더 창백해져 있었다.“이해? 당신이 어떤 말을
방금 허투루 한 말이 어머니의 진실인가 싶다. 보아하니 어머니가 나를 속이는 일이 있는 것 같았다. 마음속의 의문점이 점점 많아졌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식사를 마치고 차씨 가문의 할머니께 말씀을 드린 후, 위층으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고 도혜선을 보러 가려고 준비했다.그리고 팔도 겸사겸사 검사하려고 했다. 차에 앉고 나서 배현우한테 전화를 걸었는데 받지 않았다. 이 이른 아침에 뭐 하러 갔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김우연 쪽에 무슨 소식이 있는 건 아닌지 걱정했다.'생각해 보니 이렇게 빠르진 않겠지? 몇 시간밖에 안 됐는데.'병실에 도착하자마자 도혜선이 노발대발하는 장면을 포착했다. 병실에는 도혜선과 서강민 두 사람만 보이고 이미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내가 들어서자 분위기가 좀 이상하고 심상치 않는 것을 느꼈다.침대 옆 머릿장에는 보온병이 놓여있다. 서강민은 오늘도 도혜선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주러 온 것 같다.서강민은 침대 앞에 떡 하니 서있었고 침대에 있던 도혜선은 차가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도혜선은 내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 같았다.상황을 정리하려고 다가가서 서강민에게 인사를 하고 도혜선에게 다가갔다. "오늘은 좀 어때?""별로야."도혜선은 차갑게 대답하더니 또 말을 건넸다. "지아야, 손님 좀 배웅해 줄래?"난감했다, 도혜선은 서강민을 내쫓으라고 하는 거였다. 난 당연히 그 뜻을 알고 있다. 조심스럽게 서강민을 쳐다보았다. "혜선아, 꼭 이래야 하니?"서강민은 씁쓸한 표정으로 도혜선을 바라보며 물었다."네! 서강민씨, 저는 이미 분명히 말했고 두 번 다시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도혜선은 내가 그 자리에 있다고 해서 서강민의 체면을 세워주지 않았다.참지 못하고 웃어 버렸다. "언니, 화 그만 내고 진정 좀 해. 초조해하는 거 알아, 점차 좋아질 거야. 강민씨랑 얘기 좀 하고 있어. 나는 팔 검사해야 돼서, 금방 돌아올 거야!"나는 핑계를 대고 떠나서 그들에게 자리를 비워주었다.
배현우는 나의 우울한 모습을 보고 말했다. "그리고 내가 없는 동안에 회사 일도, 한심로얄의 마지막 한방도 둘 다 포기할 수 없잖아요. 신예 쪽 일도 있고, 전희가 다시 살아날 기회를 얻지 않도록 조심해야 돼요. 지금 모든 게 중요한 시기이니까요.""지금 그 누구도 아버지보다 중요하지 않아요! 수십년간 도망치면서만 살았는데 죄책감도 가지고 있었을 거예요, 분명 아주 괴로워하고 있을 거예요. 그리고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무도 모르고 있는데, 내가... 내가 딸로서, 난..."배현우는 내 말을 듣고 나서 침대에 누워 나를 꼭 껴안고 말했다. "일단 내일 소식을 기다려 봅시다. 김우연 쪽에서 어떤 정보를 얻었는지 보고 결정합시다."배현우는 나의 어깨를 툭툭 쳤다. "제 말 듣고 일단 자세요, 내일 일어나서 먼저 할 일들을 처리하고 준비하고 있으세요, 만약에 상황이 좋으면 내일 같이 데리고 갈게요, 당신 마음 충분히 이해해요."배현우가 지금 나를 위로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다. 내가 기분 나빠하는 모습을 보지를 못한다. 그 말을 들으니 마음이 좀 편해지는 것 같았다. 배현우의 따뜻한 품에 안기며 눈을 감고 내일 먼저 무엇을 처리해야 할지 생각했다.근데... 눈을 떠서 배현우를 쳐다보는데 배현우도 잠에 들지 않았다. "현우씨... 할머니가 보존하고 있는 CCTV를 보여주시겠어요?"'그 영상을 꼭 보고 싶었다, 알고 싶었다. 어머니가 어떻게...'"알았어요, 하지만 지금은 자세요, 나중에 보여 드릴게요. " 팔짱을 끼더니 분명히 나를 얼버무리고 있는 것이다. 배현우가 그 장면을 내게 보여주고 싶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밤이 깊었고, 비까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꼼짝도 하지 않은 채 배현우의품에 안겨 점점 잠이 들었다. 아침이 밝았다. 날씨는 여전히 흐렸다. 배현우는 이미 곁에 없었고, 손을 뻗어 그가 누워 있던 곳을 만졌다. 이미 차가운 걸 보니 배현우는 일찍 침대에서 일어났나 보다.'무슨 소식이라도 왔나?'이
"할머니가 이번 사건을 피할 수 있었던 건 당시 큰 병을 앓은 것에 대해 감사해야 했어요. 제 생각에는 반은 꽤병인것 같아요. 직접 사표를 쓰고 나서도 서둘러 호주를 떠나지 않았다는 게 참 슬기로운 선택이었어요.""네?"너무 놀라서 몸 둘바를 몰랐다.배현우는 인정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할머니는 호주를 떠나지 않으셨어요. 그곳에 머물면서 배씨 저택의 인기척을 살피다가 배씨 저택의 요상한 소문들이 완전히 자취를 감춘 뒤에야 조용히 호주를 떠나셨어요."나도 모르게 할머니의 메커니즘에 감탄했다."저도 그때 상황을 잘 몰라서, 할머니도 몸이 허약했고 내 행방을 알아 볼 길이 없어 그 비밀을 계속 지켜왔었나봐요. 부하들이 할머니를 찾고 나서도 여전히 어리석은 척을 하고 있었지 뭐에요."배현우는 그제야 미소를 지었다."할머니께서 저를 두눈으로 직접 보고서야 그걸 꺼냈어요."배현우의 말을 듣고 나니 할머니를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러던 중 배현우가 나를 쳐다보더니 나의 지친 모습을 보고서야 손을 들어 대문을 열어 장벽들이 천천히 열리는 걸 볼 수 있었다.차는 왔던 길을 따라 경원으로 다시 돌아갔다. 벌써 자정이 되어 우리 둘은 차를 세우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층으로 올라가 방에 돌아왔다.'우리를 배신한 소인이 두 집안을 풍비박산 시켰다니. 오늘 밤 일어난 모든 일들은 듣고도 믿기지 않았다.'간단히 씻고 걱정 가득채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태어나서 얼굴도 한번 못 본 아버지가 어디 있는지, 밥은 먹고 다니는지를 걱정해 발 뻗고 자지 못했다. '한강인이랑 한걸은 이미 잡혔는데, 우리 아버지는? 그의 처지는 어떤지.''한씨 부자가 그저 아버지를 인질로 삼아 그들의 안전을 확보하려 했다면 왜 배현우는 그곳의 환경이 복잡하다고 했을가.''이유는 간단하다. 누군가 아버지를 미끼로 삼으려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누구를 보고 싶으려는 걸가?''배현우? 아니면 배유정?'생각할수록 더욱 걱정이 됬다.아버지의 이번생은 이미 충분히 힘들다.어머니랑 서로
나는 걱정스레 배현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배현우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계속 말했다.“후에 목격자 어르신을 찾고서 한강인을 자세히 조사하니 한강인은 이 모든 것이 일어난 뒤에야 천우 그룹을 떠난 거였어요. 지아 씨도 알잖아요. 그때 당시 천우 그룹은 아직 배유정 손에 있었어요.”“현우 씨의 말은 한강인은 배유정 과도 사이가 틀어졌단 말인가요?”나는 추측하며 물었다.“우리가 조사할 때 이상한 단서 하나가 나왔어요. 한동안 배유정도 한강인을 찾았고 심지어 한강인에 대한 추살령도 내렸어요! 참 이상해요. 배유정은 왜 한강인을 죽이라고 지령을 내린 걸까요?”“이유는 하나뿐이죠. 즉 한강인이 분명 무엇을 알아냈거나? 아니면 어떤 일에 참여하였거나?”나는 대답했다.배현우는 고개를 끄덕이었다.“진백이 죽임을 당했듯이 이 안에는 분명 남들한테 들키면 안 되는 비밀이 있는 거겠죠. 우리는 이 단서를 따라 계속 추적해 보니 한강인의 혐의가 점점 더 드러나더군요. 그리고 그의 아들 한결도 같이 도망쳤어요.”“그러고 보니 이 안에는 분명히 또 다른 요소가 있겠네요!”나는 사색에 잠겼다.“그래서 우리는 추측했죠. 한강인은 확실히 이 사건이랑 연관이 있고 둘이 도주하는 과정에 서로 연락하는 빈도를 보아서 부자 둘은 서로 다른 곳에 있는 것으로 판단했어요.”“그리고 한강인이 도망 다니는 그 시기에 그의 모친이랑 누나 모두 영문도 모른 채 실종되었어요. 지금 보니 그분들은 아마 이미 이 세상을 떠난 것 같네요. 이 때문에 한강인은 고두리에 놀란 새가 돼서 끊임없이 도망치며, 이 또한 한강인이 지금의 상태로 되게 한 원인인 것 같아요. 사실 한강인은 원래 지금의 모양이 아니거든요.”배현우의 말을 듣자 나는 저도 모르게 아까 보았던 한강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한강인은 극도의 공포 속에서 엄청 정신적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니면 다른 기타 방식으로 정신을 잃지 않게 버티고 있거나. 그렇지 않으면 사람이 저렇게 말라죽을 정도일 리가 없다.“그리고 한 가
배현우는 나를 한눈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었다.“맞아요. 제 씨 어머니가 얼마나 총명한지 그 누구도 생각지 못했어요. 제 씨 어머니는 책 속에 카메라를 숨겨두고 만약 사고가 난다면 여기에 있는 이 물건을 숨겨두었다가 훗날 믿음직스러운 사람에게 주라고 할머니한테만 똑똑히 당부해 두셨어요!”나는 코가 찡긋거리더니 눈에는 눈물이 핑 돌았다.“보아하니 제 씨 어머니는 분명 위험이 닥칠 거라는 것을 미리 예감했던 거네요!”배현우는 안색이 조금 어두워지더니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갑자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제 씨 어머니는 만약 자신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할머니더러 애들을 데리고 허씨 가문으로 가라고 할머니한테 당부하셨어요.”나는 끝내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고 코를 훌쩍이었다.배현우는 자기 손을 꽉 움켜쥐며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참 생각지도 못한 게 모든 것이 제 씨 어머니의 예상대로 일어났고 감춰둔 카메라에 모든 것이 담겼어요! 근데 할머니는 제 씨 어머니의 뜻대로 우리 둘을 순리롭게 허씨 가문으로 데려가지 못했어요.”“급한 나머지 할머니는 고씨 가문에만 소식을 전했고 그마저도 나쁜 놈들보다 동작이 빠르지 못해 그들이 지아 씨를 데려간 후였어요. 그래서 저만 고씨 가문에서 데려갔어요.”나는 눈물을 닦아내면서 그때 당시의 내가 얼마나 힘없고 무력했을지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다. 갑작스럽게 어머니가 돌아가신 데다가 배현우와 억지로 갈라지게 되었다.배현우는 내 손을 꽉 잡으며 손에 힘을 주었다.나도 배현우 지금의 심정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날 배현우는 눈앞에서 억지로 끌려 나가는 나를 보기만 하고 반항할 수도 없는 그런 무능력함은 아마 배현우한테 평생 잊지 못할 아픔이 되었을 것이다.차 안은 갑자기 조용해졌고 자동차가 앞으로 가는 소리밖에 안 들렸다.한참 뒤에야, 배현우의 잠긴 목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이런 것들을 찾은 후에야 비행기 추락 사고가 떠올랐고 이로써 모든 것들이 비로소 한강인을 추측하게 했으며 그 이후에 우리는 한강인
이 소식은 그야말로 나를 입이 떡 벌어지게 했다. ‘나를 데려간 게 어떻게 그 사람이지?’“맞아요. 우리는 유일한 목격자를 찾았어요. 그 당시 그쪽 산에서 약재를 캐는 어르신이신데 그때는 중년인이셨어요. 하늘의 뜻인지, 우리가 수년을 찾아 헤맨 끝에야 비로소 이 참극의 전부를 직접 목격한 증인을 찾아냈어요.”“그 어르신 정말로 전체 과정을 모두 목격하셨나요?”나는 믿어지지가 않았다. 배현우 얘네가 얼마나 큰 공을 들여야 바다에서 바늘 건지는 것 같은 일을, 그것도 몇 년이 지났는데도 당시의 목격자를 찾아낸 걸까.“어르신의 말로는, 당시 자기는 산 위에서 내려오는 도중에 잠시 계단에서 쉬고 있었는데 그러다가 아래 도로에서 일어나는 광경을 목격했다고 해요. 알다시피 외국에서는 약재를 캐는 일은 엄청 드물어요.”배현우는 엄청 뿌듯한 말투로 말했다.“우리 형제들이 엄청나게 고생 많았어요. 십수 년을 하루같이 귀찮음을 마다하고 사건 지역을 탐방하러 다니면서 일말의 흔적도 소홀히 하지 않았어요.”나도 믿어지지 않아 입을 열었다.“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어요. 참 노고가 많았어요.”“어르신이 말씀하기를 당시의 장면은 엄청 아슬아슬했대요. 부딪힌 차는 거의 굴러떨어지기에 일보 직전이었는데 후에 폭발했대요. 어르신은 우리의 차가 폭발한 뒤 키 크고 마른 한 남자가 차에서 내리는 걸 똑똑히 봤다고 해요. 그리고 그 남자는 길 왼쪽의 언덕 아래로 달려가 무언가를 찾았대요.”배현우는 그때 당시의 장면을 묘사하였다. 나는 머릿속으로 그때 당시의 상황을 필사적으로 상상해 내려고 하니 머리가 또 아파 났지만, 배현우가 말을 멈출까 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당시에 일어난 이 모든 것, 전부 나한테는 엄청난 매력이었다. 나는 지금 내가 찾아낸 산산조각 난 퍼즐들을 하루빨리 제 위치에 맞춰서 하나의 완전한 그림을 만들어 내고 싶었으며 그때 당시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을 되찾고 싶었다.그 뒤로 난 어떻게 Z 국의 만덕동에서 떠돌게 되었고 또 어떻게 지금의 한지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