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눈앞의 광경에 경악을 금치 못한 채 멍해지고 온몸이 굳어졌다. 현실인지 꿈인지조차 분간할 수 없이 머리가 순간 하얘지고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멀지 않은 곳에 있는 천우 그룹 빌딩에서 줄지어 선 차량이 차례로 문 앞 작은 광장에 멈춰 섰고 뒤이어 정장 차림의 경호원들이 줄지어 차에서 내렸다. 정예 군대가 전장을 나가듯이 열을 맞춰 우르르 달려드는 기자들을 격리했다.처음에는 무슨 대단한 인물이 왔나 싶었다. 뒤이어 드러난 모습에 나는 정신을 똑바로 차릴 수 없었다.중앙에 세워둔 마이바흐에서 곧게 뻗은 실체가 차에서 내리자, 주변의 여성들은 여느 팬클럽을 겨눌 정도의 비명을 질러댔다. 모두 그의 몸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그에게 빨려 들어갔다.그 순간 나는 내 두 눈으로 그 형체를 똑똑히 보고야 말았고, 기자들도 미친 듯 웅성거렸다.‘저... 저건 배현우?’밤이고 낮이고 손꼽아 그려보던 배현우였다.차갑지만 선이 뚜렷한 얼굴에 하늘에서 재림한 왕처럼 당당한 기세를 보여주고 있었고 제왕 같은 고귀함과 위엄을 온몸으로 풍겼다. 깔끔하게 떨어지는 검은 색 슈트도 그의 위엄을 한층 업그레이드시켜 주며 아무도 비길 수 없는 분위기를 내뿜고 있었다.차에서 내린 그는 태연하게 정장 단추를 정리하며 어깨를 펴고 당당한 모습으로 그의 빌딩 안으로 걸어 들어갔고 내딛는 발걸음마다 모두의 경악을 불러왔다.아마 이 순간 전 세계가 놀라움에 탄성을 내지르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이런 연극은 정말 상상치도 못한 것이었다.그의 옆에는 김우연이 함께 있었다.나는 차 안에서 이 광경을 바라보며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고 차에서 내려 뛰어갈 힘마저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깨어났다고? 현우 씨가 정말 깨어난 거야? 아니면 애초에 쓰러진 적이 없었던 걸까?’그 당당한 기세와 여전히 아름다운 미모에 모두를 놀라게 할 위엄까지...어딜 봐도 근 한 달간 사경을 헤맨 환자 같지는 않았다.‘그래, 현우 씨는 애초에 병상에 누워있지 않았을 거야.’나는 너무 놀
나는 그를 바라보았고, 마음속에서 의심이 들었다. 혹시 그가 나도 속인 것은 아닐까? 마치 배현우가 설계한 이 판에 속은 상대는 나 하나밖에 없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예전부터 이 판에서 나는 아마도 늘 교묘하게 이용당하는 장기 말일 뿐이었고, 그저 아무것도 모른 채 홀린 듯 누군가의 손짓에 따라 움직여지고도 아무것도 알아낼 수가 없는 존재 같았다.동철은 내 눈빛에 놀랐는지 입꼬리에 경련을 일으키더니 말했다."대표님!"나는 그제야 번뜩 정신이 들어 눈빛을 거두고는 웃으며 말했다."또 내가 알아야 할 뉴스가 있나요? 날 보기 좋게 속인 게 좋은 소식이겠지만요!""대표님, 설마 제가 대표님을 속이고 있다고 의심하는 겁니까?"동철이 민감하게 반응하며 질문했다.나는 어이가 없었다. 배현우도, 조민성도, 김우연도 줄줄이 나를 배신했는데 이제 와서 내가 누굴 믿을 수 있겠는가?나에게는 얼마나 잔인한 일인지 설마 배현우가 모르고 있단 말인가?생사의 갈림길이라고? 하, 걱정으로 잠을 설쳤던 날들도, 모두 나 혼자만 놀라고 걱정했던 게 고작 그들의 ‘쇼’에 놀아난 것이었다니.나는 감정을 추스르고 동철을 보며 물었다."말해봐요, 또 무슨 뉴스가 있나요?"동철은 나를 한 눈 쳐다보더니 물었다. "호주를 제외하고 기타 나라에 있는 천우 그룹의 재무 정보가 모두 봉쇄되었다고 합니다."나는 순식간에 깨달았다.설마 우연...?"인제 보니 아주 큰 금액이 되겠네요!" 나는 중얼거렸다.아무리 바보여도 마음속으로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이 잘 짜인 판에서 내가 모르는 세세한 디테일이 있을 것이고, 내가 아무리 그 과정을 좇아간다 한들 결과는 이미 정해졌을 것이다.나는 검정 가죽 의자에 기댄 채 허탈하게 웃었다. 스스로에 대한 비웃음이었다.‘그래, 어찌 됐든, 장기 말이라고 해도 쓸모 있는 장기 말이겠지!’나는 잠시 침묵하다가 사람들을 향해 손짓했다."그들은 그들이고, 우린 우리대로 살아야죠. 해야 할 일들도 많고, 논할 비즈니스도 아직 많으니까요. 오
배유정은 이대로 끝낼 수가 없어 천우 그룹의 모든 경영권을 내놓는 대신 배현우더러 이른 시일 내에 이세림과 결혼식을 올리라고 요구했다. 결혼 후 기존 배 씨 세력과 천우 그룹을 합병시키고 은퇴하겠다는 뜻이었다.하지만 뜻밖에도 이렇게 큰 유혹을 배현우는 모든 주주 앞에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거절해버렸다. 그는 배유정이 내놓은 협상안을 선택하지 않을 것이고 이세림과 정략결혼을 하지도 않을 것이며 배씨 가문과 합병할 생각도 없다고 했다. 배 씨의 낡은 잔재는 배유정에게 영원히 남겨둔 채 천우 그룹과의 모든 연결을 끊어낸다는 뜻이었고, 앞으로의 비즈니스도 자연스럽게 끊기게 된 것이었다.배유정은 말문이 턱 막혔다. 배현우가 이토록 단호하게 거절할 줄은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다.다시 말해 이번에 천우 그룹은 철저히 배 씨라는 짐 덩어리를 벗어던지고 새로 태어나 독립된 천우 그룹으로 다시 세상에 나온 것이었다.이제야 나는 왜 배현우가 천우 그룹의 본부를 호주에 세우지 않고 J국에 세웠는지를 깨달았다.배유정은 천우 그룹과 앞으로 어떠한 관계도 이어지지 못하고 심지어 파트너 관계도 유지할 수 없음을 알게 되고는 화를 못 이겨 병원에 입원했다고 한다.또 어떤 뉴스에서는 이것마저 회의장을 빠져나갈 방법을 찾아 고의로 쓰러졌다는 소문도 있었다.시간은 빠르게 흘러 어느덧 반 달이 지났고 뜨거운 감자였던 천우 그룹 사건도 조금씩 매듭이 지어졌다.나는 천우 그룹의 프로젝트 부서에 불려가 계약 문제를 논의했다.배유정의 임명으로 기 대표가 아시아 본부 CEO 자리에 앉아있었는데 20여 일 만에 배유정의 실패와 함께 사라짐에 따라 그가 처리했던 모든 사항이 백지화가 된 것이었다.이전의 계약은 회복됐고 천우 그룹과 체결한 계약서도 효력을 회복했지만 다시 서명이 필요한 상황이었다.그 순간 나는 긴장감에 몸을 떨었다. 반 달이나 기다린 끝에 드디어 처음으로 만나는 자리인데 어떻게 그를 마주하고 뭐라 말하면 좋을지 몰랐다.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해월이와 법무팀과 함께
천우 그룹을 나서자 나는 크게 숨을 내쉬었다.해월이도 내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다가와서 말했다."제가 운전할게요."차 키를 해월에게 건네주고 차에 오르고는 창밖으로 빌딩을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웃음을 내뱉었다. 어쩌면 이 빌딩의 존재 자체가 나한테는 순식간에 사라져 없어지는 신기루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아니면 처음부터 나라는 존재는 웃음거리일 뿐이었을 수도 있다. 임윤아가 있든 없든 나는 그저 방패막이에 불과했으니까.회사로 돌아온 나는 내내 기분이 다운되어 있었다. 해월은 나를 찾아온 직원을 모두 돌려보내고 나에게 혼자만의 공간을 만들어줬다. 나만의 공간에서 의자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며 배현우와의 모든 만남을 회억해 보았다. 사소한것 하나하나 다 기억하고 있었지만 정작 그와 나의 관계를 정의할 수가 없었다.얼마나 지났을가, 해월이 노크하고 들어왔다. 그녀는 손에 카드 한 장을 들고는 조심스럽게 나한테 물어봤다.“대표님, 천우 그룹에서 오늘 저녁 스타라이트에서 오래된 고객님들을 위한 감사연회를 연다고 하시는데…. 가실건가요?”나는 가만히 앉아 잠깐 고민했다. 우리도 그 사람 고객인데 안 갈 이유가 없지!“당연히 가야죠! 장 부장님한테 얘기해줘요, 같이 참석하자고.”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몇 시라고 했죠?”“7시요!” 해월은 한시름 놨다는 듯이 재빨리 답했다.“알겠어요. 그럼 장 부장님한테 저녁 6시에 저희 집으로 데리러 와달라고 해 줘요. 전 먼저 가볼게요.”나는 가방을 들고 나가려고 하는데 동철이 급급히 들어왔다.조급한 기색을 보아하니 무슨 일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무슨 일이에요?”해월이 눈치껏 자리를 피하자 동철이 앞으로 다가왔다.“대표님, 유보욱 손에 있던 USB를 확보했습니다!”나는 두 눈이 휘둥그레지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동철을 바라보며 물었다.“그... 그러니까 그 사람이 죽으면서 손에 쥐고 있던 USB 말이에요?”“네, 천신만고 끝에 결국 얻어냈어요.” 동철이 엄숙한 얼굴로 말했다.“뭐가 들어 있
우리는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눴고 그때 해월이 다가와 알려줬다.“한 대표님,이미 퇴근 시간 이예요, 연회도 가져야 하잖아요?”나는 고민하다 동철과 해월를 보며 말했다.“두 분도 얼른 준비하세요. 같이 가요!”해월은 동철을 힐끔 훔쳐보더니 얼굴을 붉혔다. 그러나 나는 그들 간의 미묘한 분위기를 분석할 여유 따윈 없었다.“먼저 들어가 볼게요!”동철에게 말을 남기고는 황급히 내려와 집으로 향했다. 다행히 퇴근길 러시아워 전에 회사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가는 길에 나는 교통사고의 모든 가능성에 대해 분석해봤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제대로 알아낼 수가 없었고 그저 이 모든 게 일어날 수 없는 경우의 수 같았다.나는 세 가지 가능성을 생각했다.하나는 배유정이 손을 써서 그가 외국으로 가는 것을 막기 위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배현우가 판을 설계하여 배유정을 끌어들이기 위했다는 것이며 세 번째는 전날 주주총회 전 인터넷에 떠돌던 세 가지 세력처럼 또 다른 세력이 존재한다는 것이었다.그동안 벌어진 사건들 모두 의심 가는 점이 너무 많아 어느 것 하나 아니라고 쉽게 단정 지을 수 없었다.나는 속으로 욕을 내뱉었다. 이렇게 복잡하게 살 필요가 있을까, 혼자 추리물을 찍는 것처럼 내 편도 네 편도 알지 못한 채 싸울 필요가 있겠냐고 생각했다.'간단하게 살면 얼마나 좋아, 꼭 이렇게 치고받고 싸우지 못해 안달 나야 할까?'이런 생각이 들다가도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신호연이 바람을 피우고 재산을 빼돌린 것처럼 내 턱밑까지 쫓아와 나를 괴롭히는데 내가 손 놓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나는 집 앞에 차를 세워놓고 멍하니 앉아 이혼 전 신호연이 날 모욕했던 순간들을 떠올렸다.또 배유정의 행적을 생각하면 배현우가 말한 비행기 사고 또한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닐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이 뇌리에 스치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만약 배현우가 말한 것처럼 비행기 사고도 ‘예고’된 불의의 사고였다면, 교통 사고 따윈 너무 쉬운 일이
우리가 스타라이트에 도착했을 때 이미 주차장에는 차를 댈 자리가 없었다. 한참이나 헤맨 끝에 차를 세우고 안으로 들어왔다.연회장은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 모두 천우 그룹의 고객들이었다. 천우 그룹의 사업 범위가 하도 넓어 여러 업계에서 온 손님들이 가득했던 것이다.그제야 나는 내가 너무 격식 없게 입고 온 것을 깨달았다. 자리에 참석한 여성분들 대부분이 예쁜 드레스를 입고 온 것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장영식은 나의 곤란함을 알아차린 듯 팔짱 낀 나의 손을 가볍게 토닥이며 말했다.“네가 제일 괜찮네. 다른 사람들 모두 너무 눈에 튀어.”그의 장난기 어린 말에 나는 피식 웃으며 답했다. “그래, 달래줘서 고마워.”영식은 눈을 살짝 내리깐 채 부드럽게 웃으며 나를 쳐다보았고 나는 그 웃음이 나의 모든 걱정을 안아주는 웃음임을 알 수 있었다.“달래는 게 아니라 한 바퀴만 돌아보고 싫으면 바로 돌아가자. 오늘 별사람들이 다 참석한 자리 같은데 오래 있을 필요가 없을 것 같아.”술잔이 오고 가는 홀을 보니 마치 크리스마스 이브닝 파티처럼 북적거렸고 역시 우리한텐 어울리지 않는 장소 같았다.고객들은 서울에서 온 사람들뿐만 아니라 다양한 인종과 국적을 가진 사람들도 함께 있었는데, 아무래도 오래된 고객들을 위해 마련한 연회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천우 그룹의 진정한 주인이 돌아왔는데 어떤 고객사도 허투루 지나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그때 누군가 소리쳤다.“저기 봐, 배 대표님이 오셨어!”모든 시선이 삽시에 입구 쪽에 쏠렸다. 거기엔 깔끔하게 떨어지는 맞춤 제작 검은 양복을 입고 버건디 스카프를 두른 배현우가 서 있었다. 그의 몸에 알맞게 제작된 슈트는 그의 잘생기고 쭉 뻗은 몸을 더욱 돋보여줬고 조각 같은 얼굴은 하늘의 은하수를 담은 듯 반짝였고, 온몸에서 범접할 수 없는 고상한 아우라를 풍겼다.그런 그의 옆에는 연청색 물결무늬의 A라인 롱드레스를 입은 한소연이 껌딱지처럼 팔짱을 끼고 붙어 있었다.보는 사람마다
그들 쪽으로 자리를 옮기자 나는 이미 기진맥진 지쳐있음을 느꼈다.도혜선은 정신 차리라고 몰래 나를 꼬집으며 얼굴에는 미소를 띤 채 같이 있던 남성분을 소개해 주었다. 나는 그 우아한 남성이 무엇이라 말하는지 이미 귀에 들어오지 않는 상태로 그저 형식적인 미소만 유지하고 있을 뿐이었다.나는 그저 로봇처럼 따라서 악수하고 안부를 나누고... 아무런 생각 없이 형식적으로 행동하는 반면 영식은 열정적으로 그 남성과 악수하며 얘기를 나누었다.눈치가 빠른 도혜선은 나를 한쪽으로 데려가 힘껏 나를 꼬집었다. 갑작스러운 통증에 나는 정신을 번쩍 차리고 그녀를 바라보았다.“지아야 정신 차려! 사실을 알기 전엔 냉정하게 행동해야 해. 그렇게 넋 놓고 있으면 어떡해? 여기 보는 눈도 많은데 놀림거리가 되면 안 되지.너 아직 할 일 많이 남았어, 나랑 연맹 맺자며, 그러려면 먼저 나한테 기회와 희망 정도는 보여줘야지!”속사포처럼 쏟아내며 나를 위로해주는 말에 나는 정신을 차렸다.나는 한번 심호흡을 하고 눈가가 촉촉이 젖을 만큼 요동치는 감정을 가다듬으며 머리를 끄덕였다.도혜선은 우아하게 웃으면서 나한테 계속 소곤소곤 말했다.“목적이 무엇이든 난 언제나 너의 든든한 뒷배야, 그게 내가 그 사람이랑 같이 지내는 유일한 가치니까. 왜 날 제대로 이용하지 않는 거야? 같이 해보자며? 오늘 확실히 알려줄게, 지금부터 시작이야.”말을 마치고는 그 평범하지 않은 아우라를 풍기는 남성을 향해 말했다.“당 선생님, 여기 둘 다 실력 있는 제 친구들이거든요, 그러니 앞으로도 많은 지도 편달 부탁드립니다!”그러자 그 남성은 호탕하게 웃으며 도혜선의 남자친구에게 말했다.”서 행장님, 보셨죠, 역시 혜선 씨도 목적이 있었다니까요.”서강민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도혜선을 바라보았다.”그녀가 좋아하면 그걸로 된 거죠.”서 행장이란 사람은 도혜선의 남자친구 서강민이었는데 서울에 있는 은행장 중에서도 처음으로 손꼽히는 사람이었다. 내 인상 속에서 이 사람은 선한 역인지 악역인지 분간 가지
무대 위 모든 조명이 당당한 모습으로 연설하고 있는 배현우를 비췄고 그에게 모든 관심과 이목이 쏠렸다. 그는 기세 좋게 발언을 이어나가며 자신을 믿고 따라주신 모든 손님에게 감사의 말을 표했다.그의 조각 같은 얼굴이 내 눈 속에서 점점 확대되며 깊이 박혔고 나는 애써 요동치는 감정을 제어하며 그를 잃게 되었을 때 어떻게 다시 그와 마주할지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그때 웨이터 한 명이 다가와 조심스럽게 말했다.“한 대표님, 옥상에서 누가 부르십니다. 가보셔야 할 것 같아요.”갑작스러운 요청에 당황해하는 사이 웨이터는 이미 없어졌다.의심스러운 마음에 옆을 둘러봤지만 다들 무대 위의 배현우에게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그럼 누가 날 찾는 거지?나는 인파를 파헤치고 홀을 빠져나왔다. 원래 있던 층이 제일 꼭대기 층이었기에 계단을 통해 옥상으로 갈 수 있었다. 탁 트인 정원 형태의 옥상은 보기만 해도 마음이 열릴 듯 우아하고 아름다웠다.오늘의 연회로 인해 옥상도 개방상태였고 사람도 적고 홀보다 조용하여 중요한 이야기를 하기엔 적합한 장소였다.내가 옥상에 왔을때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홀에서 오늘의 주인공이 발언하고 있어 자리를 뜰 사람들이 없었다.나는 주위를 돌아보았으나 나를 기다리는 사람 따윈 없었다.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쯤에 뒤쪽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황급히 뒤돌아보자 한소연이 도도하게 걸어오고 있었다.오늘의 그녀 또한 이곳의 주인공이었다. 남자 주인공의 파트너로 등장해 배현우와 함께 모든 주목을 받고 있었으니 말이다 “말해봐요, 나한테 무슨 볼일이 있는 거죠?” 그녀가 오만한 자태로 먼저 말을 걸어왔다. 그때 나의 사무실에 찾아와 소식을 물어볼 때와는 사뭇 다른 태도였다.“제... 제가 소연 씨를 찾았다고요?” 나는 의아한 얼굴로 그녀에게 물었다. 내가 한소연을 불러낼 이유가 없었다.“네? 웨이터한테 옥상으로 올라오라고 부르셨잖아요.” 그녀는 불쾌하다는 듯이 날 바라보며 오만한 어조로 말을 이어나갔다.“한 대표
나는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 마지못해 고개를 들어 서강민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서강민 씨, 먼저 들어가시죠. 언니가 깨서 서강민 씨를 보면 또 흥분할 것 같은데... 지금 같은 상황에 언니가 회복하는 게 제일 중요하잖아요.”그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는 않았지만, 나는 한마디 더 보탰다.“어떤 일들은 천천히 해야 해요. 언니한테 시간을 좀 주세요. 서로 생각을 정리해 봐요.”서강민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않고 깊은 잠에 빠진 도혜선을 한참이나 지켜보았다. 발길을 돌리기 전에도 아쉬움에 한 번 더 뒤돌아보며 나한테 말했다.“고생해 줘요.”나도 담담히 답했다.“제가 해야 할 일인걸요. 언니에게 시간을 좀 줘요. 언니도 회복할 시간이 필요할 수 있잖아요.”내가 말하는 회복이 뭔지는 서강민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건 도혜선이 마음에 입은 상처였다. 오늘 도혜선의 행동에서도 알 수 있다시피 그녀의 상처는 아물 수 없을 것이다. 언급만 해도 피가 흘러내릴 만한 상처였다.잠시 후, 서강민은 한발 물러섰지만, 눈길은 여전히 도혜선에게 머물러 있었다. 평온해 보이는 모습 아래에서 어떠한 파도가 휘몰아치는지 나는 몰랐다.한참 전 도혜선이 했던 말들은 마디마디가 주옥이었다. 모두 그녀가 마음속으로만 담아두었던 것들이었고 또한 서강민의 약점이었다. 얼마나 아플지는 서강민 본인만 알고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쓰디쓴 독주도 그는 혼자 삼켜내야만 했다.도혜선의 눈가가 파르르 떨려와 깨어나려는 낌새가 보이고 나서야 서강민은 조용히 병실을 나갔다.나는 마음이 아파와 한숨을 내쉬며 손을 뻗어 도혜선의 손을 맞잡았다.인제야 하루 종일 배현우에게서 연락이 없었다는 것이 생각났다. 그쪽에는 어떤 상황인지, 김우연에게서는 소식이 없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도혜선을 보니 아직 깨어나지 않은 것 같아 살며시 그녀의 손을 놓고 일어서려 했을때, 그녀는 다시 나를 잡으며 미약한 목소리로 말했다.“가지 마...”나는 너무 놀라 얼른 그녀를 향해 몸을 돌렸다.
‘서강민은 본인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기나 하는 걸까?’“당시의 사고는 내가 저지른 거야. 그녀도 나 때문에 다쳐서 지금처럼 된 거고… 나는 좋은 남편이 아니야. 아내가 식물인간이 되었는데 나는 다른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으니 말이야...”서강민은 여기까지 말하며 후회하는 기색을 내비쳤다.“그녀를 마주할 때마다 너무 죄책감이 들고 고민스러워. 나 또한 발버둥 쳐봤지.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나의 일탈을 받아들일 수 있어 해. 그녀한테 정말 미안한 일이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내가 널 사랑하고 있다는 거야...”“강민 씨!”도혜선은 꾸짖는 듯한 말투로 그의 말을 잘랐다.“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고 당신 아내가 듣고 있을 거예요. 저를 끌어들여서 같이 속죄할 생각하지 마세요. 저는 당신의 구세주가 아니에요. 저는 그냥 사람답게 살고 싶은 평범한 여자라고요. 저 좀 그냥 내버려둘 순 없어요?”도혜선은 말하면 할수록 화가 치밀어 올라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하얗게 질린 얼굴이 일그러지며 그녀는 한 손으로 본능적으로 가슴을 움켜쥐었다. 나는 깜짝 놀라 그녀 앞으로 갔다.“혜선 언니, 움직이지 마! 위험해...”늑골 골절과 뇌진탕이 있는 환자다 보니 이러한 행동은 그녀에게 너무나도 위험했다.도혜선은 손을 들어 그녀를 안으려고 하는 한지아를 제지했다.“제가 오늘 한 말이 아직도 이해가 안 되나요? 서강민 씨, 저의 인생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당신한테 묶여 당신의 부속품이 되었었는데 저도 자존심이 있어요. 더 이상 당신처럼 지난날의 죄책감을 짊어지며 답답하게 살아가지 않을 거예요.”도혜선은 여전히 분노에 차 외치고 있었다.“매일 제 앞으로 와 지난날의 행동에 대해 속죄하라고 일깨워 주실 필요 없어요! 당신을 보면 저는 지난날 모든 서울 사람의 웃음거리가 되었던 치욕적인 과거가 떠올라요. 당신은 마음 가는 대로 해요. 당신은 아내와 했던 약속을 지켜야 해요.”말을 마친 도혜선은 숨이 차올랐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보였다.
도혜선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계속하여 들려왔다.“당신은 아무런 부담 가질 필요 없어요. 저 같은 여자 마음속에 담아두지 않아도 돼요.”그녀는 자기비하적인 말을 내뱉었다.”선아...”“설사 강민 씨가 와이프와의 약속을 안 지킨다 해도 당신의 신분과 지위로 당신에게 더 어울릴만한 사람 충분히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저는 당신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에요. 하물며 당신네 부부 눈에는 저는 그냥 염치없고 미천한 사람일 뿐이죠. 저 같은 사람은 본처가 되기에 적합하지 않아요. 사모님이라는 호칭도 어울리지 않죠.”“나는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 오해하지 마.”서강민은 조급함에 한 발 앞으로 나서며 해명하려 했다.하지만 도혜선은 손을 들어 그를 막아섰다.“강민 씨... 해명하지 않아도 돼요. 당신의 행동이 모든 걸 설명해 주고 있어요! 장담하건대 아직 당신들이 어떤 의도로 얘기하고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바보가 된 건 아니에요. 그녀는 정말 대단하네요. 죽을 때까지도 제가 이길 수 없는 사람이었어요. 그녀는 아무리 병상에 누워있어도 고상한 사람이고 저는 그냥 미천한 사람일 뿐이니 말이에요.”도혜선은 말을 내뱉으며 입가에 처량한 미소를 비췄다. 누가 봐도 가슴 아픈 미소였다.“이전의 저는 확실히 허례허식에 차 있는 사람이었지만 저도 성장했어요. 정신 차렸어요. 당신 앞에 있는 저의 진정한 가치가 어떤 것인지 깨달았어요. 저는 하나의 도구, 들러리뿐이었지만 원망하지 않았어요.”그녀는 여기까지 말하고 한숨 돌렸다. 얼굴빛은 아까보다 더 창백해져 있었다.“하지만 이제 저는 자존감을 챙기며 살고 싶어요. 누군가에게 의탁하지 않고 쓰레기같은 취급을 받더라도 최소한의 존엄을 지키며 살고 싶어졌어요.”점점 더 차가워지는 도혜선을 바라보며 서강민은 답했다.“혜선아, 나는 널 한 번도 무시한 적 없어. 나는 그냥 내가 뭘 하든지 네가 다 이해해 줄 줄 알았어.”도혜선의 서강민의 말을 듣고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안색은 더 창백해져 있었다.“이해? 당신이 어떤 말을
방금 허투루 한 말이 어머니의 진실인가 싶다. 보아하니 어머니가 나를 속이는 일이 있는 것 같았다. 마음속의 의문점이 점점 많아졌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식사를 마치고 차씨 가문의 할머니께 말씀을 드린 후, 위층으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고 도혜선을 보러 가려고 준비했다.그리고 팔도 겸사겸사 검사하려고 했다. 차에 앉고 나서 배현우한테 전화를 걸었는데 받지 않았다. 이 이른 아침에 뭐 하러 갔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김우연 쪽에 무슨 소식이 있는 건 아닌지 걱정했다.'생각해 보니 이렇게 빠르진 않겠지? 몇 시간밖에 안 됐는데.'병실에 도착하자마자 도혜선이 노발대발하는 장면을 포착했다. 병실에는 도혜선과 서강민 두 사람만 보이고 이미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내가 들어서자 분위기가 좀 이상하고 심상치 않는 것을 느꼈다.침대 옆 머릿장에는 보온병이 놓여있다. 서강민은 오늘도 도혜선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주러 온 것 같다.서강민은 침대 앞에 떡 하니 서있었고 침대에 있던 도혜선은 차가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도혜선은 내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 같았다.상황을 정리하려고 다가가서 서강민에게 인사를 하고 도혜선에게 다가갔다. "오늘은 좀 어때?""별로야."도혜선은 차갑게 대답하더니 또 말을 건넸다. "지아야, 손님 좀 배웅해 줄래?"난감했다, 도혜선은 서강민을 내쫓으라고 하는 거였다. 난 당연히 그 뜻을 알고 있다. 조심스럽게 서강민을 쳐다보았다. "혜선아, 꼭 이래야 하니?"서강민은 씁쓸한 표정으로 도혜선을 바라보며 물었다."네! 서강민씨, 저는 이미 분명히 말했고 두 번 다시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도혜선은 내가 그 자리에 있다고 해서 서강민의 체면을 세워주지 않았다.참지 못하고 웃어 버렸다. "언니, 화 그만 내고 진정 좀 해. 초조해하는 거 알아, 점차 좋아질 거야. 강민씨랑 얘기 좀 하고 있어. 나는 팔 검사해야 돼서, 금방 돌아올 거야!"나는 핑계를 대고 떠나서 그들에게 자리를 비워주었다.
배현우는 나의 우울한 모습을 보고 말했다. "그리고 내가 없는 동안에 회사 일도, 한심로얄의 마지막 한방도 둘 다 포기할 수 없잖아요. 신예 쪽 일도 있고, 전희가 다시 살아날 기회를 얻지 않도록 조심해야 돼요. 지금 모든 게 중요한 시기이니까요.""지금 그 누구도 아버지보다 중요하지 않아요! 수십년간 도망치면서만 살았는데 죄책감도 가지고 있었을 거예요, 분명 아주 괴로워하고 있을 거예요. 그리고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무도 모르고 있는데, 내가... 내가 딸로서, 난..."배현우는 내 말을 듣고 나서 침대에 누워 나를 꼭 껴안고 말했다. "일단 내일 소식을 기다려 봅시다. 김우연 쪽에서 어떤 정보를 얻었는지 보고 결정합시다."배현우는 나의 어깨를 툭툭 쳤다. "제 말 듣고 일단 자세요, 내일 일어나서 먼저 할 일들을 처리하고 준비하고 있으세요, 만약에 상황이 좋으면 내일 같이 데리고 갈게요, 당신 마음 충분히 이해해요."배현우가 지금 나를 위로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다. 내가 기분 나빠하는 모습을 보지를 못한다. 그 말을 들으니 마음이 좀 편해지는 것 같았다. 배현우의 따뜻한 품에 안기며 눈을 감고 내일 먼저 무엇을 처리해야 할지 생각했다.근데... 눈을 떠서 배현우를 쳐다보는데 배현우도 잠에 들지 않았다. "현우씨... 할머니가 보존하고 있는 CCTV를 보여주시겠어요?"'그 영상을 꼭 보고 싶었다, 알고 싶었다. 어머니가 어떻게...'"알았어요, 하지만 지금은 자세요, 나중에 보여 드릴게요. " 팔짱을 끼더니 분명히 나를 얼버무리고 있는 것이다. 배현우가 그 장면을 내게 보여주고 싶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밤이 깊었고, 비까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꼼짝도 하지 않은 채 배현우의품에 안겨 점점 잠이 들었다. 아침이 밝았다. 날씨는 여전히 흐렸다. 배현우는 이미 곁에 없었고, 손을 뻗어 그가 누워 있던 곳을 만졌다. 이미 차가운 걸 보니 배현우는 일찍 침대에서 일어났나 보다.'무슨 소식이라도 왔나?'이
"할머니가 이번 사건을 피할 수 있었던 건 당시 큰 병을 앓은 것에 대해 감사해야 했어요. 제 생각에는 반은 꽤병인것 같아요. 직접 사표를 쓰고 나서도 서둘러 호주를 떠나지 않았다는 게 참 슬기로운 선택이었어요.""네?"너무 놀라서 몸 둘바를 몰랐다.배현우는 인정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할머니는 호주를 떠나지 않으셨어요. 그곳에 머물면서 배씨 저택의 인기척을 살피다가 배씨 저택의 요상한 소문들이 완전히 자취를 감춘 뒤에야 조용히 호주를 떠나셨어요."나도 모르게 할머니의 메커니즘에 감탄했다."저도 그때 상황을 잘 몰라서, 할머니도 몸이 허약했고 내 행방을 알아 볼 길이 없어 그 비밀을 계속 지켜왔었나봐요. 부하들이 할머니를 찾고 나서도 여전히 어리석은 척을 하고 있었지 뭐에요."배현우는 그제야 미소를 지었다."할머니께서 저를 두눈으로 직접 보고서야 그걸 꺼냈어요."배현우의 말을 듣고 나니 할머니를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러던 중 배현우가 나를 쳐다보더니 나의 지친 모습을 보고서야 손을 들어 대문을 열어 장벽들이 천천히 열리는 걸 볼 수 있었다.차는 왔던 길을 따라 경원으로 다시 돌아갔다. 벌써 자정이 되어 우리 둘은 차를 세우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층으로 올라가 방에 돌아왔다.'우리를 배신한 소인이 두 집안을 풍비박산 시켰다니. 오늘 밤 일어난 모든 일들은 듣고도 믿기지 않았다.'간단히 씻고 걱정 가득채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태어나서 얼굴도 한번 못 본 아버지가 어디 있는지, 밥은 먹고 다니는지를 걱정해 발 뻗고 자지 못했다. '한강인이랑 한걸은 이미 잡혔는데, 우리 아버지는? 그의 처지는 어떤지.''한씨 부자가 그저 아버지를 인질로 삼아 그들의 안전을 확보하려 했다면 왜 배현우는 그곳의 환경이 복잡하다고 했을가.''이유는 간단하다. 누군가 아버지를 미끼로 삼으려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누구를 보고 싶으려는 걸가?''배현우? 아니면 배유정?'생각할수록 더욱 걱정이 됬다.아버지의 이번생은 이미 충분히 힘들다.어머니랑 서로
나는 걱정스레 배현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배현우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계속 말했다.“후에 목격자 어르신을 찾고서 한강인을 자세히 조사하니 한강인은 이 모든 것이 일어난 뒤에야 천우 그룹을 떠난 거였어요. 지아 씨도 알잖아요. 그때 당시 천우 그룹은 아직 배유정 손에 있었어요.”“현우 씨의 말은 한강인은 배유정 과도 사이가 틀어졌단 말인가요?”나는 추측하며 물었다.“우리가 조사할 때 이상한 단서 하나가 나왔어요. 한동안 배유정도 한강인을 찾았고 심지어 한강인에 대한 추살령도 내렸어요! 참 이상해요. 배유정은 왜 한강인을 죽이라고 지령을 내린 걸까요?”“이유는 하나뿐이죠. 즉 한강인이 분명 무엇을 알아냈거나? 아니면 어떤 일에 참여하였거나?”나는 대답했다.배현우는 고개를 끄덕이었다.“진백이 죽임을 당했듯이 이 안에는 분명 남들한테 들키면 안 되는 비밀이 있는 거겠죠. 우리는 이 단서를 따라 계속 추적해 보니 한강인의 혐의가 점점 더 드러나더군요. 그리고 그의 아들 한결도 같이 도망쳤어요.”“그러고 보니 이 안에는 분명히 또 다른 요소가 있겠네요!”나는 사색에 잠겼다.“그래서 우리는 추측했죠. 한강인은 확실히 이 사건이랑 연관이 있고 둘이 도주하는 과정에 서로 연락하는 빈도를 보아서 부자 둘은 서로 다른 곳에 있는 것으로 판단했어요.”“그리고 한강인이 도망 다니는 그 시기에 그의 모친이랑 누나 모두 영문도 모른 채 실종되었어요. 지금 보니 그분들은 아마 이미 이 세상을 떠난 것 같네요. 이 때문에 한강인은 고두리에 놀란 새가 돼서 끊임없이 도망치며, 이 또한 한강인이 지금의 상태로 되게 한 원인인 것 같아요. 사실 한강인은 원래 지금의 모양이 아니거든요.”배현우의 말을 듣자 나는 저도 모르게 아까 보았던 한강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한강인은 극도의 공포 속에서 엄청 정신적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니면 다른 기타 방식으로 정신을 잃지 않게 버티고 있거나. 그렇지 않으면 사람이 저렇게 말라죽을 정도일 리가 없다.“그리고 한 가
배현우는 나를 한눈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었다.“맞아요. 제 씨 어머니가 얼마나 총명한지 그 누구도 생각지 못했어요. 제 씨 어머니는 책 속에 카메라를 숨겨두고 만약 사고가 난다면 여기에 있는 이 물건을 숨겨두었다가 훗날 믿음직스러운 사람에게 주라고 할머니한테만 똑똑히 당부해 두셨어요!”나는 코가 찡긋거리더니 눈에는 눈물이 핑 돌았다.“보아하니 제 씨 어머니는 분명 위험이 닥칠 거라는 것을 미리 예감했던 거네요!”배현우는 안색이 조금 어두워지더니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갑자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제 씨 어머니는 만약 자신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할머니더러 애들을 데리고 허씨 가문으로 가라고 할머니한테 당부하셨어요.”나는 끝내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고 코를 훌쩍이었다.배현우는 자기 손을 꽉 움켜쥐며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참 생각지도 못한 게 모든 것이 제 씨 어머니의 예상대로 일어났고 감춰둔 카메라에 모든 것이 담겼어요! 근데 할머니는 제 씨 어머니의 뜻대로 우리 둘을 순리롭게 허씨 가문으로 데려가지 못했어요.”“급한 나머지 할머니는 고씨 가문에만 소식을 전했고 그마저도 나쁜 놈들보다 동작이 빠르지 못해 그들이 지아 씨를 데려간 후였어요. 그래서 저만 고씨 가문에서 데려갔어요.”나는 눈물을 닦아내면서 그때 당시의 내가 얼마나 힘없고 무력했을지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다. 갑작스럽게 어머니가 돌아가신 데다가 배현우와 억지로 갈라지게 되었다.배현우는 내 손을 꽉 잡으며 손에 힘을 주었다.나도 배현우 지금의 심정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날 배현우는 눈앞에서 억지로 끌려 나가는 나를 보기만 하고 반항할 수도 없는 그런 무능력함은 아마 배현우한테 평생 잊지 못할 아픔이 되었을 것이다.차 안은 갑자기 조용해졌고 자동차가 앞으로 가는 소리밖에 안 들렸다.한참 뒤에야, 배현우의 잠긴 목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이런 것들을 찾은 후에야 비행기 추락 사고가 떠올랐고 이로써 모든 것들이 비로소 한강인을 추측하게 했으며 그 이후에 우리는 한강인
이 소식은 그야말로 나를 입이 떡 벌어지게 했다. ‘나를 데려간 게 어떻게 그 사람이지?’“맞아요. 우리는 유일한 목격자를 찾았어요. 그 당시 그쪽 산에서 약재를 캐는 어르신이신데 그때는 중년인이셨어요. 하늘의 뜻인지, 우리가 수년을 찾아 헤맨 끝에야 비로소 이 참극의 전부를 직접 목격한 증인을 찾아냈어요.”“그 어르신 정말로 전체 과정을 모두 목격하셨나요?”나는 믿어지지가 않았다. 배현우 얘네가 얼마나 큰 공을 들여야 바다에서 바늘 건지는 것 같은 일을, 그것도 몇 년이 지났는데도 당시의 목격자를 찾아낸 걸까.“어르신의 말로는, 당시 자기는 산 위에서 내려오는 도중에 잠시 계단에서 쉬고 있었는데 그러다가 아래 도로에서 일어나는 광경을 목격했다고 해요. 알다시피 외국에서는 약재를 캐는 일은 엄청 드물어요.”배현우는 엄청 뿌듯한 말투로 말했다.“우리 형제들이 엄청나게 고생 많았어요. 십수 년을 하루같이 귀찮음을 마다하고 사건 지역을 탐방하러 다니면서 일말의 흔적도 소홀히 하지 않았어요.”나도 믿어지지 않아 입을 열었다.“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어요. 참 노고가 많았어요.”“어르신이 말씀하기를 당시의 장면은 엄청 아슬아슬했대요. 부딪힌 차는 거의 굴러떨어지기에 일보 직전이었는데 후에 폭발했대요. 어르신은 우리의 차가 폭발한 뒤 키 크고 마른 한 남자가 차에서 내리는 걸 똑똑히 봤다고 해요. 그리고 그 남자는 길 왼쪽의 언덕 아래로 달려가 무언가를 찾았대요.”배현우는 그때 당시의 장면을 묘사하였다. 나는 머릿속으로 그때 당시의 상황을 필사적으로 상상해 내려고 하니 머리가 또 아파 났지만, 배현우가 말을 멈출까 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당시에 일어난 이 모든 것, 전부 나한테는 엄청난 매력이었다. 나는 지금 내가 찾아낸 산산조각 난 퍼즐들을 하루빨리 제 위치에 맞춰서 하나의 완전한 그림을 만들어 내고 싶었으며 그때 당시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을 되찾고 싶었다.그 뒤로 난 어떻게 Z 국의 만덕동에서 떠돌게 되었고 또 어떻게 지금의 한지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