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지연은 휴대전화를 꺼내 엄경준에게 문자를 보냈다.[시간 나면 성월 별장으로 와. 우리 일부터 해결하고 당신 여신 곁을 지켜.]문자를 보내고 난 그녀는 병원을 나가려 했다.“엄지연 씨,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어찌 된 영문인지 연가희가 휠체어를 밀고 그녀의 앞에 나타났는데 주변엔 엄경준이 없었다.“우린 모르는 사이인 것 같은데요.”“엄지연 씨, 저는 그냥 3년 동안 경준이 곁에 있지 않아서 그동안 경준이가 어떻게 지냈는지 묻고 싶었을 뿐이에요. 저를 찾지 못한 경준이가 3년 동안 괴로워하고 밥도 먹지 못하고 잠도 잘 못 잤을 것 같아서요.”앙상하게 마른 연가희는 엄경준을 걱정하는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자랑스러운 기색이었다.“알고 싶으면 엄경준에게 직접 물어보세요.”“내가 걱정할까 봐 말을 안 해요.”그녀와 무슨 할 말이 있겠나. 애매한 신분이었던 엄지연은 그대로 돌아섰다.그런데 뒤에서 갑자기 연가희의 흥분에 찬 소리가 들려왔다. 눈물을 비 오듯 흘리며 처참한 목소리로 그녀가 울부짖었다.“아니에요, 경준이는 3년 동안 혼자였고 옆에 여자가 없었다고 했어요. 날 경준이한테서 떼어내려고 속이는 거죠?”엄지연은 그녀의 말에 놀라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가 언제 연가희에게 엄경준을 떠나라고 했던가?“경준아, 내가 갑자기 나타나서 너랑 엄지연 씨 사이를 방해한 거야? 그렇다면 미안해. 내가 사과할게. 미안해요, 엄지연 씨. 절 욕하지 말아 주세요. 제가 떠날게요. 멀리 떠나서 다시는 두 사람의 삶에 나타나지 않을게요.”흐느끼는 소리가 비참하고 가엾게 들리자 산책하던 다른 환자들이 몰려들었다.엄경준은 연가희의 뒤에 갑자기 나타나 화를 내며 그녀를 탓했다.“엄지연, 언제부터 질투가 이렇게 많았어? 연가희가 정신적으로 불안한 상황인지 뻔히 알면서 병원에 와서 자극해?”질투? 그가 그녀에게 질투를 언급하고 있다.“엄경준, 연가희 씨가 먼저 나한테 와서 이런 말을 하는 거야. 아무 증거도 없이 운다고 날 억울하게 몰아가지 마.”엄지연은 처음으
엄지연은 서류를 손에 힘껏 쥐며 속으로 화가 치밀어 올랐다.엄경준은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차가운 목소리로 은혜라도 베풀듯 말했다.“3년 동안 고생했어. 넌 고아라 가족도, 갈 곳도 없잖아. 네가 먹고살 돈은 일 년에 600억으로 올려줄게.”“3년에 한 번씩 계약하고 네가 얌전히 나와 연가희 사이를 방해하지 않는다면 네가 늙어 죽을 때까지 돈을 줄 수 있어.”“이 별장에서 계속 지내도 앞으로 연가희 앞에 나타나서는 안 돼. 나는 이제 이 별장에 오지도, 너를 건드리지도 않을 거야.”“오늘 병원에서 일어난 일은 맞고 틀리고를 떠나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어.”냉담하고 매몰차며 엄숙하게 엄지연의 생각과 존엄은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그의 말을 듣고 화가 난 임지연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어디서 난 자신감으로 그녀가 기꺼이 그의 그늘에서 사는 것을 선택한다고 생각하는 걸까?다행히 그녀는 일찍이 그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안 그러면 이런 상황에서 얼마나 볼품없는 모습을 보였을까.처음 그의 애인이 되기로 선택한 것도 그의 얼굴 때문이지 돈 때문은 아니었다.주저하지 않고 서류를 다시 밀어낸 그녀의 눈빛은 확고하기 그지없었고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에 거부감을 담은 듯 그와 분명하게 선을 그으며 말했다.“이 계약은 필요 없어. 내가 불쌍하다고 생각하면 일찌감치 놔주고 미리 계약 해지해서 나한테 자유를 돌려줘. 그러면 두 사람도 안심할 수 있잖아.”서재의 분위기가 순간 굳어버렸다.엄경준은 엄지연이 그를 떠나고 싶어 한다는 게 실감이 났다.그는 어느새 지난날의 신사적인 이미지를 벗어던지고 엄한 목소리로 협박했다.“엄지연, 너는 가족도 없는 고아에 학벌도 없는데 이 도시에서 어떻게 살아가려고 그래? 네가 취미로 다니고 있는 그림 반에서 배운 보잘것없는 그림 실력으로 살아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해?”엄지연은 그의 호통에 멍해졌다. 그의 말은 날카로운 칼처럼 그녀의 자존심을 조각조각 베어서 바닥에 던져버렸다.그녀는 그가 협상할 때 뱉는 말이 더 날카롭다
동시에 하늘 리조트 여행 일정에 대한 안내도 있었다.이 문자가 아니었으면 엄지연은 2박 3일 여행을 예약했던 것도 잊을 뻔했다.그녀는 그때 줄곧 엄경준과 해변에 놀러 가고 싶었지만 엄경준이 회사 일로 바빠서 시간이 없었다. 그래도 그녀가 애교를 부리며 오랫동안 부탁을 하고 특별히 이곳 여행지를 선택하니 그도 결국 동의했다.그녀는 그 여행을 위해 많은 것을 준비했는데... 그 물건들은 얼마 전에 옷을 정리하다가 버린 것 같았다.엄지연은 생각을 떨쳐버렸다. 엄경준이 없어도 리나와 갈 수 있다.헤어져도 여전히 내일의 해는 뜬다.“리나, 나 하늘 리조트에 2박 3일 여행을 예약했는데 함께 갈래?”엄지연은 파자마를 입고 졸린 눈을 비비고 있었다.“놀러 간다고? 좋아, 가자. 수업 땡땡이칠게.”리나는 기뻐서 펄쩍 뛰며 대답했다.“아니, 선생님에게 휴가 신청하면 돼.”엄지연이 눈을 부릅뜨자 리나는 황급히 말을 바꿨다.리나는 대학교 2학년으로 수업은 열심히 듣지 않지만 시험마다 1등 하는 천재 학생이었다. 그녀의 말로는 수업이 너무 쉬워서 배울 것이 없다며 차라리 노는 것이 낫다고 했다.이튿날 오후, 햇살이 알맞고 바람이 화창했다.임해의 낮 온도는 알맞게 따뜻하고 편안해서 밤보다 좋았다.엄지연과 리나는 독특한 디자인의 캐주얼한 차림에 양손에 크고 작은 가방을 들고 차에 올라 하늘 리조트로 향했다.휴대폰 내비게이션에 따라 주차장에 도착하자 리나는 두 손으로 핸들을 잡은 채 두리번거리며 주차할 곳을 찾았다.“이쪽에 하나 있어.”엄지연은 오른쪽을 가리키며 말했다.“놀러 온 사람들이 꽤 많네.”리나는 차를 세우면서 말했다.뒤로 차를 후진해 위치를 조정하자 때마침 뒤에서 차 한 대가 갑자기 들어오더니, ‘펑'하고 차 두 대가 앞뒤로 서로 부딪쳤다.“아니, 운전을 어떻게 하는 거야? 죽고 싶어서 주차장에 들어와서도 속도를 내?”좋은 기분을 망친 리나는 급히 차에서 내려 상대방과 싸우려 했다.엄지연은 그녀가 역으로 당할까 봐 황급히 따라 내렸다
“아름다운 아가씨, 오늘 밤 당신과 춤 한 번 같이 출 수 있을까요?”남자는 손을 내밀어 살짝 몸을 숙이며 양복 차림을 하고 예의 바르게 말했다.아래층에 있던 엄지연에게 누군가 다가와 춤을 추자고 했다.그녀의 꼬투리를 잡지 못해 안달이 난 여자들의 눈에 이 장면은 남자를 낚는 엄지연의 모습으로 비쳤다.“엄지연 씨 아니야? 지연 씨가 어떻게...”연가희는 뭔가 말할 수 없는 비밀을 발견한 듯 일부러 멈칫했고 이 모습은 연가희뿐만 아니라 발코니 옆에 있는 엄경준과 백세훈도 똑똑히 보았다.방금 아래층 여자들 사이에서 주고받은 대화조차 다 듣고 있었다.싱긋 웃으며 아래층 사람들을 보고 있던 백세훈은 뭔가 생각난 듯했다.‘지연 씨가 전에 경준이한테 놀러 가자고 졸랐던 것 같은데? 그게 하늘 리조트였어? 두 사람은 헤어졌는데 오늘 경준이가 여기로 오자고 한 건 설마...’백세훈은 연가희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생각나는 대로 물었다.“오늘 밤 날 여기로 부른 게 설마 엄지연 씨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야?” 엄경준의 비밀스러운 속내를 발견한 듯 그는 말을 마치고 씩 웃었다.엄경준은 얼굴을 찡그리며 언짢은 어투로 연가희 앞에서 그렇게 물어서는 안 된다는 듯 말했다.“그런 농담은 하지 마. 가희가 놀러 오고 싶다고 해서 왔어.”“그래, 그동안 내가 너랑 경준이 보살핌 많이 받았잖아. 안 그러면 이렇게 빨리 회복하지도 못했을 거야. 그래서 너랑 경준이를 초대해서 놀자고 한 거야.”달콤하게 웃으면서 설명하는 연가희는 백세훈이 아무리 쏘아붙여도 친절하게 대하는 대범함을 보였다.백세훈은 와인잔을 내려놓더니 혀끝을 입천장에 대며 ‘쯧’ 소리를 냈다.‘내숭 참 잘 떤다.’아래층에 있는 엄지연은 남자의 초대에 응한 듯 그의 손에 자기 손을 얹었다.여유롭게 아래층을 보고 있는 백세훈은 친구와 엄지연의 이별을 받아들인 듯했다.“지연 씨는 얼굴도 예쁘고 조건도 나쁘지 않은데 벌써 남자들이 쫓아다니는 걸 보니 곧 새 남자 친구가 생길 것 같네.”백세훈은 엄지연
“경준 형, 세훈 형.”성연우는 반갑게 인사했다.“연우구나.”백세훈이 입을 열었다.엄경준은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인사를 대신했다.엄지연의 눈동자에 의아함이 스쳐 지나가며 소년을 돌아보았다.‘아는 사이인가?’백세훈이 입을 열어 그녀에게 설명했다.“백씨 가문, 엄씨 가문, 성씨 가문은 임해에서 오랫동안 서로 왕래가 있었어요.”엄지연은 그제야 깨달았다. 어쩐지 비싼 차를 타고 주차장에서 무법천지로 운전한다고 했더라니 부잣집 아들이었다.성연우는 그녀의 표정으로 주차장 일을 떠올린다는 것을 눈치채고 다소 억울한 목소리로 불렀다.“누나.”이 누나라는 호칭에 현장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굳어버렸다.줄곧 투명 인간처럼 옆에서 겉돌던 연가희는 자신이 무시당하는 걸 참을 수 없었다. 앞으로 한 발짝 나아가 엄경준에게 몸을 가까이 붙이고 그의 품에 안기다시피 한 채 고개를 젖히고 그윽하게 그를 한 번 쳐다보고는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어제 퇴원했어요. 그동안 내가 병원에서 지내느라 답답했을까 봐 경준이랑 특별히 같이 놀러 왔는데 우연히 엄지연 씨를 만나게 될 줄 몰랐네요.”“그날 병원에서의 일은 경준이가 말해줬어요. 제가 그때 엄지연 씨의 말을 잘못 듣고 오해했어요. 엄지연 씨도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으면 좋겠어요.”언뜻 듣기엔 사과하는 말 같아도 자기는 엄경준의 사람이며 그만이 그녀에게 뭐라 할 수 있다고 으스대는 것 같았다.엄지연은 못 알아들은 척했고 어쩌다 그들과 마주쳤는지에 대해서도 별 관심이 없었다.담담한 시선으로 두 사람을 힐끗 보던 그녀는 차분한 말투로 대답했다.“연가희 씨 본인 잘못인 걸 알았으면 다시는 그런 실수하지 마세요.”연가희의 웃음이 사라지더니 입꼬리를 내리고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왜 저래? 나는 아무 말 안 했는데?’“이미 지나간 일 더 꺼내지 말지.”투명 인간과 다를 바 없었던 엄경준이 입을 열어 연가희를 도와 어색한 분위기를 풀어줬다.“응, 경준이 네 말대로 할게.”연가희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큰 체구를 지닌 엄경준이 바닷가에 나른하게 서서 대수롭지 않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고현성의 시야를 벗어난 곳에서 엄경준은 빈정거림과 불신이 배어 있는 시선으로 엄지연을 바라보고 있었다.그는 엄지연의 그림 실력을 폭로하지 않았다. 성월 별장에 있을 때 엄경준은 그녀가 그림을 그리는 것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하지만 그는 고현성의 흥을 깨고 싶지 않았다.그림 그릴 줄 아는 엄지연은 임해시에서 가장 유명한 예술 학교에 재학 중이었다.그렇다고 해서 천부적인 재능과 뛰어난 실력이 있다는 뜻은 아니었다.그 학교는 엄경준이 많은 돈을 내고 엄지연을 들여보낸 것이지 그녀가 자신의 실력으로 들어간 것은 아니었다.엄지연은 그림에 비해 춤을 정말 잘 췄다. 그조차 놀라게 했으니 말이다.‘화가도 아니니까.’엄경준이 마음속으로 중얼거리고 있을 때 엄지연이 고개를 들어 엄경준과 시선을 마주했다.눈살을 살짝 찌푸린 엄경준의 시선에는 장난기가 가득했다.엄지연이 어떻게 화가 이미지를 계속 연기해 나가려는 지 보려는 것 같았다.비아냥거리는 엄경준의 시선이 너무 강렬했던 탓에 엄지연은 눈치챌 수밖에 없었다.엄지연은 돌아서서 엄경준을 등지고 그를 무시한 채 눈을 흘겼다.‘일부러 무시하고 장점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에게 뭔가 증명하려고 애쓸 필요 없어! 결과로 보여줄 거야!’고현성의 격려하에 엄지연은 보드라운 모래사장을 밟으며 화판 앞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갔다.오른손으로 붓을 집어 들고 물감을 묻혀 디테일을 더하니 밋밋하게만 느껴졌던 그림이 금세 선명해지고 다채로워졌다.엄경준은 눈썹을 치켜뜨며 놀라움을 표했다.그의 시선에서는 저도 모르게 감탄의 눈빛이 흘러나왔다.‘의외네.’엄경준은 늘 엄지연의 얼굴에만 집중하며 그녀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연가희처럼 만들었다.어딘가 거슬리는 구석이 있다면 엄지연의 스타일을 바꿔서라도 연가희 흉내를 내게 했다.그래서 엄경준은 습관적으로 엄지연의 재능을 무시했고 그녀의 천부적인 재능마저 무시했다.엄경준은 줄곧 엄지연을 통해
‘그때부터 다른 남자랑 놀아났나?’고현성의 말을 듣고 멈칫하던 엄지연은 이내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어르신께서 지금 뭐 하시는 거지? 엄경준과 맞선을 주선하시는 건가?’생각만 해도 몸서리를 치던 엄지연은 핑계를 대고 고현성과 작별했다.그녀는 리나를 찾아가 따져 물을 것이 있다.“어르신, 저는 볼일이 있어서 먼저 실례하겠습니다.”엄지연이 자리를 뜨는 것을 보고 엄경준도 예의 바르게 작별을 고했다.고현성은 허허 웃으며 손을 내저었는데 마치 그에게 빨리 엄지연을 쫓아가라고 재촉하는 것 같았다.“젊었을 때 노는 게 좋아. 나이가 드니 놀고 싶어도 몸이 따라주지 않는구나.”엄경준은 예의 바르게 고현성에게 인사하고 백사장을 떠났다.복도 모퉁이에서 엄경준은 빠른 걸음으로 엄지연을 뒤쫓아 가 손을 뻗어 그녀의 팔을 잡았다.뻗은 손에 힘을 줘 엄지연을 돌려세운 그는 바로 구석진 곳에 가두었다.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비켜!”등이 아파 난 엄지연은 갑작스러운 엄경준의 행동에 놀라며 순간적으로 목소리를 높였다.그녀는 리나를 찾기 위해 자리를 뜬 것이었다.엄경준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큰 몸으로 엄지연의 퇴로를 막았다.그녀는 좁은 구석에서 진퇴양난이었다.불빛이 비치지 않는 구석에서 엄경준은 불빛을 등지고 복잡한 눈빛을 했다.“왜? 성씨 가문 그 자식 찾으러 가려고?”엄경준이 낮은 목소리로 다그쳤다.눈썹을 잔뜩 찌푸린 엄지연이 짜증 가득한 얼굴로 엄경준의 접근을 거부하고 있었다.엄경준은 이미 엄지연이 정한 안전거리를 넘어서 가까이 있었다.그녀는 불편하다 못해 엄경준을 밀어내고 싶었다.“내가 누굴 찾든 경준 씨랑 무슨 상관이야?”엄지연은 그의 어두운 기색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당당하게 답했다.안 그래도 무표정하던 엄경준의 얼굴이 더욱 싸늘해졌다.그는 엄지연의 대답이 몹시 못마땅했다.“엄지연, 성연우는 너랑 안 어울려.”엄경준은 어두운 얼굴로 엄지연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며 사람 위에 군림하는 기세를 풍겨냈다.그는 부하들을
성연우는 엄경준의 팔을 잡아당겨 엄지연의 손목을 힘껏 잡아 뺐다.엄경준은 넋이 나간 건지 성연우와 실랑이하지 않고 순순히 손을 풀었다.성연우는 그 틈에 엄지연을 뒤로 끌어당겨 두 사람 사이에 서서 엄지연을 보호했다.‘괴롭힌다고? 나를 때린 건 엄지연인데 누가 누굴 괴롭힌다는 거야? 게다가, 이게 괴롭히는 거면 그전에는? 엄지연 위에서 주최하지 못하고 밤새 사랑을 이어간 적도 있는데 그럼 그것도 괴롭히는 건가? 그럼 엄지연이 내 등을 할퀸 것도 나를 괴롭힌 건가?’엄지연은 억울한 표정을 지은 채 성연우의 뒤에 숨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설마 두 사람도 같이 밤을 보낸 건가?’엄경준은 엄지연이 불쌍하고 연약하며 억울한 척하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성연우의 뒤에 숨어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엄지연이 나를 때린 건데!’성연우는 엄지연을 엄경준과 더 멀리 떨어뜨려 놓았다. 마치 역병을 피하는 것처럼 말이다.엄경준이 더 이상 거친 행동을 이어 나가지 않을 것 같자 성연우는 엄지연의 손을 살며시 잡고 세세히 들여다보았다.“누나, 어때요? 아프지는 않으세요? 다치거나 불편한 곳은 없으세요?”성연우가 세심하게 묻자 엄지연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괜찮아요.”손목 부상은 없었지만 조금 빨갛게 달아오르고 뼈가 시큰거릴 뿐이었다. 엄경준이 너무 꽉 잡고 있어서 그런 것 같았다.‘내 탓이 아니야! 엄경준이 너무 심한 말을 하니까 그런 거였어!’“괜찮다더니 봐봐요. 빨개졌잖아요.”성연우가 엄지연의 손바닥을 펴서 그녀에게 보여주며 손목에 난 빨간 자국도 강조했다.“마침 저한테 약이 있는데 같이 가요. 약 발라 줄게요.”성연우는 엄지연을 데리고 자리를 뜨려고 했다.“괜찮아요. 약 안 발라도 돼요. 이틀 후면 괜찮아질 거예요.”엄지연이 성연우가 잡은 손을 빼내며 그를 따라 자리를 떴다.“안 돼요. 하얀 피부에 난 빨간 자국은 사라지는 데 시간이 좀 걸려요. 다른 사람들이 보면 입방아를 찧어댈 거예요.”성연우는 약을 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