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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재벌은 사적인 감정에서 냉담하고 무자비하다고, 여자를 바꾸는 건 옷 갈아입는 것과 같다고 했다.

엄경준은 3년 동안 엄지연 한 여자만 곁에 두어서 일편단심인 줄 알았는데 지금 이렇게 말 한마디로 버리는 걸 보면 허가연은 그의 곁에 얼마나 오래 머무를지 궁금해졌다.

신석훈은 3년 전 엄경준이 윤성 그룹을 인수하면서 입사해 연가희와 엄경준 사이를 잘 몰랐다.

한성 백화점에서 엄지연은 청순하고 귀여운 스타일과는 전혀 무관한 옷을 고르고 있었다.

“지연아, 스타일이 바뀌었어?”

리나는 밑단이 트여있는 검은색 롱드레스를 들고 있는 엄지연을 보며 물었다. 나올 데와 들어갈 데가 확실한 엄지연이 이 옷을 입으면 섹시할 것 같았다.

엄지연은 거울에 비춰보며 덤덤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응, 스타일이 바뀌었어. 겉옷에 숄이 어울릴까, 코트가 어울릴까?”

돌아서서 리나에게 보여주며 물었다.

“당연히 숄이 더 예쁘지. 네 몸매도 더 잘 드러낼 수 있고.”

리나는 취향대로 조언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이렇게 여성스러운 치마를 그 남자가 입고 나가게 해?”

리나는 그녀가 입고 있는 심플한 트레이닝복을 훑어보며 말했다.

“엄경준이 청순한 대학생 스타일로 입으라고 했다며.”

말하고 난 리나는 자기도 모르게 속으로 임경준의 취향을 비난했다. 글로벌 대기업의 대표로서 화인국 경제의 명맥을 장악하고 사회에 발을 들여놓은 지 몇 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대학생 스타일을 좋아하다니.

“그 사람 취향은 이제 중요하지 않아. 상관없어.”

엄지연은 아무렇지 않다는 말투로 대꾸하고는 자신과 몸매가 비슷한 직원에게 치마를 건네며 입어보라고 했다.

이런 매장에는 고객이 직접 옷을 입어볼 필요 없이 전문적으로 옷을 입어주는 사람이 있었다.

다른 스타일의 옷도 몇 벌 더 가져와 직원에게 탈의실에서 입어보라고 하고 마음에 드는 것은 남겨두면 됐다.

엄지연이 자신의 카드로 돈을 지불하고 성월 별장의 상세 주소를 기재하면 누군가가 옷을 가져다준다.

두 사람은 옷을 다 고른 후에야 점심을 먹으러 갔다.

곁에 다른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엄지연은 비로소 자신이 엄경준의 대역 연인이라는 말했고, 여신이 그의 곁으로 돌아와 자신은 엄경준을 떠나려 한다는 것을 말했다.

“이 개 같은 자식!”

리나가 동요했다.

“목소리 낮춰.”

엄지연은 손을 뻗어 리나의 입을 틀어막고 주변에서 식사하는 사람들의 관심이 두 사람에게 쏠려 있는지 살폈다.

리나는 최대한 목소리를 낮추며 화를 냈다.

“겉은 멀쩡하게 생겨서 하는 짓은 남자답지 못하네. 첫사랑이 사라졌다고 대역을 찾아? 차라리 본인이 가서 성형하지 그랬대? 그러면 매일 거울로 볼 수 있잖아. 잘 생각했어. 당장 헤어져. 퉤, 헤어진다는 단어도 아깝네. 그 개자식을 그냥 차버려.”

개자식이라는 단어를 어디서 배웠는지 리나는 계속 이 단어를 언급하며 욕했다.

그때 종업원이 음식을 가지고 왔고 직접 고기를 구워 먹는 재미가 있다며 그들은 종업원의 도움을 거절했다.

“계약 기간이 4개월 남았는데 집을 살 생각이야.”

“뭘 사. 나한테 와서 살면 되지. 방 한 칸이 없겠어?”

“내 호적이 엄경준 쪽에 있어. 떠나기로 한 이상 철저히 끊고 싶어. 내 이름으로 된 집이 있어야만 의미가 있을 것 같아서 그래.”

엄지연은 자기 생각을 말했다. 가슴이 저리긴 했지만 그날 밤 병원 정원에서 진실을 들었을 때의 고통은 없었다.

“집을 사고 나면 같이 살자.”

리나는 그냥 자기 집에서 살면 되지 않나 생각했지만 지금은 기억을 잃은 엄지연이 사실을 알게 되면 놀랄까 봐 말을 아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가 이사 가서 너와 함께 살게. 일단 내가 너 도와서 집 알아볼게. 내가 사는 그 집도 괜찮아. 위치도 좋고 환경도 좋은데 나중에 집주인에게 팔지 안 팔지 물어볼게. 아쉽게도 중고 주택이야.”

“중고라도 상관없어. 깔끔하게 정리만 하면 살 수 있어.”

많은 걸 바라지는 않았다. 온실을 떠나면 모든 걸 스스로 해결한다는 느낌이 꽤 괜찮았다.

식사 후 리나와 함께 옷에 어울리는 액세서리를 조금 산 엄지연은 리나와 작별하고 차를 몰고 성월 별장으로 돌아갔다.

오전에 산 옷은 이미 배달되어 가정부들이 다림질을 다 한 뒤 옷방에 걸어 놓았다.

엄지연은 이사할 때 물건이 너무 많아 혼자 옮기기 번거롭지 않도록 많이 사지 않았다.

텅 빈 여성용 옷방에 옷 몇 벌이 드문드문 걸려 있었지만 모두 엄지연의 마음에 드는 옷이었다.

새로 산 홈웨어로 갈아입고 샤워하려다 옷으로 꽉 찬 남자 드레스룸을 힐끗 보던 엄지연은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성큼성큼 지나쳤다.

소파에 놓은 휴대전화가 울리자 그녀는 옷을 내려놓고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엄지연 씨 맞나요? 인화 병원 간호사입니다. 건강검진 보고서가 나왔는데 시간 되실 때 와서 가져가세요.”

미르국에 가기 전에 엄경준이 그녀를 데리고 건강검진을 하러 갔었는데, 이 전화 한 통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조차 잊을 뻔했다.

“내일 오전에 갈게요.”

“네, 즐거운 하루 되세요.”

이튿날 인화 병원.

“임신 준비요?”

“네, 건강검진 때 엄 대표님이 특별히 당부했어요. 엄지연 씨는 건강도 좋고 배란 기간도 정상이에요. 엽산과 비타민 B1을 보충하고 단백질이 함유된 음식을 많이 드세요. 관계도 횟수와 시기를 맞추면 곧 좋은 소식이 있을 거예요.”

의사는 콧등까지 내려온 안경을 올리면서 부드럽고 친절하게 웃었다.

엄지연은 희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자신도 모르게 신체검사 보고서를 움켜쥐었는데 가슴이 답답하고 괴로워졌다.

요 며칠 최대한 엄경준을 떠올리지 않으려 했는데 검사 결과가 그녀의 심장을 난도질할 줄이야.

“엄지연 씨, 엽산과 비타민 B1 두 통을 처방해 드릴 테니 잊지 말고 드세요.”

엄지연은 의사의 말을 가로채고 아무렇게나 핑계를 찾아 거절했다.

“의사 선생님, 괜찮아요. 밖에서 사면 돼요.”

의사는 별로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재벌가 사모님들은 다양한 경로를 통해 세계 최고의 약을 살 수 있으니 병원에서 처방한 엽산을 무시하는 것도 정상이라 생각했다.

엄지연은 멍하니 병원 건물을 떠나 햇볕이 드는 곳까지 가서야 정신을 차리고 건강검진 보고서를 휴지통에 버렸다.

연가희가 돌아왔으니 엄경준은 그녀와 아이를 낳지 않을 것이다. 물론 그녀도 아이를 낳고 싶지 않으니 이번 건강검진의 의도를 모른 척하면 된다.

병원 정원은 봄볕이 맞춤했는데 햇볕이 너무 뜨겁지도 않았다. 엄경준은 휠체어에 앉은 연가희를 밀어주며 햇볕을 쬐었다.

“경준아, 너 일도 바쁜데 계속 병원에 나 보러 올 필요 없어. 나 혼자 할 수 있어.”

연가희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상냥했다.

“몸조리나 잘하고 다른 생각하지 마.”

엄경준은 연가희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그녀의 실종에 대한 책임을 자신에게 돌렸는데 자신이 그녀를 지켜주지 못하는 바람에 그녀가 납치되어 실종된 거로 생각했다.

지난 며칠 그는 은근슬쩍 연가희가 어떻게 실종됐는지 물었지만 이 얘기만 나오면 그녀가 흐느껴 울어 아무 단서도 찾지 못했다.

엄지연은 병원에서 엄경준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신석훈 말로는 그가 외지로 출장을 간다고 했다.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핑계를 대고 그녀를 속이다니 참 유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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