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명심하고 그런 쓰레기들을 멀리해야 해. 아니면 아무것도 챙길 수 없어.”인풀루언서들은 토론을 멈추고 엄지연과 거리를 두며 강의실로 들어갔다.자퇴에 관한 생각에 잠겨있던 엄지연은 뒤에서 들려오는 소곤거리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강의실에서 첫 교시를 마친 후.“수업이 끝났지만 일단 가지 마. 다음 주 학교에서 상업 전시회가 열릴 건데 사업가와 명망 있는 분들을 다 초대할 거야. 심지어 정부에서도 이 전시회를 중시하고 있어. 학생들이 지금까지 그렸던 작품 중 제일 좋은 것을 전시회에 내놓으면 좋은 기회가 될 거야.”선생님은 환하게 웃으며 학생들을 격려했다.“네.”학생들이 즐겁게 대답했다.엄지연은 자기 물건을 정리한 후 사무실에 가려고 했다. 이때 선생님이 그녀를 불렀다.“지연아. 넌 내가 가르친 학생 중에서 최고였어. 이번 전시회를 잘 준비해야 해. 이건 너의 진로에 매우 중요한 기회야.”“선생님, 고마워요.”엄지연은 감격하는 눈빛으로 선생님을 바라보았다.“전시회에는 참가하겠지만 저는 오늘 퇴학 절차를 밟으려고 학교에 왔어요.”“퇴학?”선생님은 놀라서 급히 물었다.“학교를 바꿀 생각이야?”“아니에요!”엄지연은 고개를 저었다.“저는 임해시에 있고 싶지 않아 다른 도시로 가든지 아니면 출국할 생각이에요.”“그래. 이런 생각이 있다면 억지로 말리지 않을게.”선생님은 그녀의 어깨를 다독였다.“하지만 이번 전시회에는 참가해야 해.”“당연하죠.”엄지연이 사무실에 돌아왔을 때는 퇴학 절차를 한 후였다.5층 화실.학교는 모든 학생에게 화실을 하나씩 마련해 주었는데 크지 않고 마침 평소에 그림을 그리고 작품을 저장할 수 있었다.마침 퇴학하던 그녀는 예전에 여기에 뒀던 개인 소지품을 정리해서 가지고 가려고 했다.문을 열고 둘러보니 그녀가 마지막으로 떠났을 때와 변함이 없었다.엄지연은 먼저 전시회에 참가할 작품을 고르기 시작했다. 학생마다 3개를 준비해야 했다.그녀는 선택한 그림을 옆에 놓은 후 개인 소지품과 나머지 그림을 정
옆 화실에 있던 친구가 소리를 듣고 급히 달려왔다.“엄지연, 너 괜찮아?”마침 아침에 교문 앞에서 엄지연을 토론하던 인풀루언서였다.“다쳤어? 아파? 선생님에게 전화할게. 겁먹지 마.”인풀루언서는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엄지연은 오른쪽에 마비가 오는 것처럼 아팠고 움직일 수 없어서 눈물을 흘렸다.선생님도 곧 왔고 급해서 말했다.“빨리 구급차 불러!”엄지연은 괜찮다고 말하고 싶었으니 입을 열자마자 너무 아파 눈물이 줄줄 흐르다 보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구급차가 도착했다.“너희들은 돌아가서 전시회에 참가할 그림을 완성해. 내가 함께 병원에 갈게.”인화병원 응급실.의사는 X-ray 사진을 보며 말했다.“괜찮아요. 골절은 없고 피부에 상처가 있는데 멍이들고 부은 건 괜찮아요. 며칠 안정을 취하면 곧 회복될 수 있어요. 링거를 맞고 염증을 치료하면 돼요.”“선생님, 고마워요.”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학생들이 학교에서 사고가 발생하면 담당 교사가 제일 걱정했다.학생이 크게 다칠까 봐 걱정하는 것도 있지만 교장 선생님께 혼나거나 학생에게 연루되면 최악이다.엄지연은 이미 병상에 누워 링거를 맞고 있었다.“선생님, 고맙습니다.”“고맙긴, 내가 해야 할 일이야.”선생님은 약이랑 엄지연이 넘어진 쪽 몸을 보며 말했다.“선생님께서 며칠 동안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했어. 학교 전시회는 안 가도 돼. 학교에서 해결해 줄 거야.”“네, 알았어요.”약에 수면제 성분이 들어있었는지 엄지연은 곧 깊은 잠에 빠졌다.비몽사몽일 때 그녀는 선생님께서 일이 있어서 먼저 가봐야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은 것 같아 엄지연도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미닫이로 된 병실 문이 다시 열리며 삐걱 소리를 냈고 곧 들락날락하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 엄지연은 잠결에도 미간을 찌푸리며 편히 쉬지 못했다.병실 안이 너무 시끄럽다고 생각했지만 며칠 동안 놀면서 제대로 쉬지 못했던 그녀는 또 잠이 들었다. 엄경준은 선생님과 인사를 한 다음 엄지연의 맞은
미르국.호텔 침대에서 두 사람은 서로 몸을 기대고 있었다.분위기가 무르익자 다소 잠긴 엄경준의 목소리가 관능적으로 들렸다.“지연아, 내 아이를 낳아 줄래?”엄지연도 분위기에 휩쓸려 생각지도 않고 대답했다.일을 마친 두 사람이 부둥켜안고 있을 때 그제야 그녀는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했다.“아이?”그녀는 여운이 가시지 않은 듯한 눈빛으로 물었고 엄경준은 또다시 욕망이 꿈틀거렸다.그녀의 몸은 왠지 모르게 시도 때도 없이 그에게 유혹적으로 다가왔다.애써 욕구를 자제하며 엄경준은 어디선가 다이아몬드 반지를 꺼내 엄지연의 왼손 약지에 끼워주었다.“나한테 프러포즈하는 거야?”“그래.”“이러면 아이를 낳아 줄 수 있지?”웃으면서 묻는 엄경준의 눈에는 자상함이 넘쳤지만 사랑하는 감정은 보이지 않았다.눈빛은 마치 그녀를 통해 다른 누군가를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그 사람의 승낙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많이 낳아 줄게.”엄지연은 매우 기뻤다. 침대에서 하는 프러포즈라 전혀 낭만적이지도 정식적이지도 않았지만 괜찮았다. 3년 동안 지금 이 순간만 기다렸고 그만큼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3년 전, 그녀는 무슨 영문인지 해변에서 사고가 생겨 머리를 암초에 부딪혔는데 깨어나자마자 기억을 잃었다.엄경준이 그녀를 구했다.그녀가 깨어난 후 가장 먼저 본 사람이 바로 그였는데 한눈에 그의 잘생긴 얼굴에 반했다.상처가 다 나은 후에야 엄경준이 병원비를 대신 내줬다는 것을 알았고, 동시에 그가 윤성그룹 대표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엄경준은 그녀에게 계약 애인이 될 것을 제안했고 그녀는 망설임 없이 받아들였다.그렇게 계약서에 사인하고 둘의 관계가 정의되며 엄경준은 그녀에게 엄지연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그녀의 얼굴 때문이었다.계약 애인이라고는 하지만 두 사람은 3년 동안 여느 연인이나 다름없이 지냈다.첫해에는 그의 비밀 애인이었다가 다음 해에는 그녀를 데리고 주위 친구들을 만나면서 여자 친구라는 신분을 줬고 그러다 3년이 다 되어갈 때 그는 그녀에게 청
어느새 눈물이 흘러 방금 한 눈화장이 지워졌다.왼손 약지에 끼워진 다이아몬드 반지에 시선을 돌린 엄지연의 마음속에는 갑자기 나타난 여자가 오래도록 기대했던 행복을 깨뜨릴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이 피어올랐다.그녀는 여기서 기다리고만 있을 수 없었다. 그 여자가 누구인지 알아내야 한다고 생각한 그녀는 잠시 서 있다가 발걸음을 옮겨 호텔로 돌아갔다.비행기는 미르국에서 화인국으로 날아갔다....인화 병원.엄지연은 병실 문 앞에 서서 두 손으로 몸을 감싼 채 문에 달린 창문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려 했다.엄경준의 절친한 친구이자 인화 병원 원장인 백세훈과 병원 의사들이 병상에서 난동을 부리는 여자를 진찰하고 있었다.두 명의 여자 간호사가 그녀를 잡고 있었는데 그녀는 비행기에서 얼굴을 깨끗이 씻은 듯했고 옷도 깨끗한 것으로 갈아입었다.“연가희? 설마...”사라진 지 4년이나 된 연가희?백세훈은 깜짝 놀라며 엄경준이 어디서 연가희를 찾았는지 의아했다.엄씨 가문과 백씨 가문의 모든 인맥을 동원해서 4년 동안 찾았지만 찾지 못하고 포기했는데 이렇게 나타났다니?의사와 간호사가 진찰을 마치고 떠나자 병실 안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잠시 후 엄경준은 안정제를 맞고 잠든 여자의 모습을 바라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상태가 어때?”“영양실조인데 충격으로 정신 이상 증세도 보여. 다른 건 괜찮으니까 며칠 지내다 보면 나을 거야.”엄경준은 병상 옆에 서 있었는데 그녀를 계속 돌봐주려는 듯했다.백세훈은 무슨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고 병실을 나오는데 문을 열자마자 엄지연이 문밖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엄경준보다 본인이 더 어색해하던 그는 은테 안경을 올리더니 부드럽게 웃으며 인사했다.“엄지연 씨.”엄지연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세훈 씨, 저 여자 이름이 뭐예요? 경준 씨와는 어떤 사이에요?”그 여자가 누구인지 간절히 알고 싶었던 엄지연은 대놓고 물었다.백세훈이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연가희가 엄경준의 마음속 여신이라고?어쨌든 엄경
병원 뒤뜰 정원.봄이지만 밤기운은 여전히 쌀쌀하고 찬 바람이 불어 추위가 느껴졌다.라이터 소리가 나고 불빛 두 개와 함께 담배 연기가 바람에 흩날리며 사람의 눈을 흐리게 했다.“연가희가 돌아왔는데 이제 어떻게 할 작정이야?”백세훈이 입을 열었다.엄지연을 언급하지 않았지만 두 사람 모두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한 명은 가장 풋풋하고 설레는 캠퍼스 시절에 엄경준을 구해주기까지 한 여신이고, 다른 한 명은 3년 동안 곁에 있으며 세상에서 가장 친밀한 행동을 했던 여자 친구이자 이젠 청혼까지 한 약혼녀였다.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대역일 뿐이야. 지연이는 애초에 가희 대신이었고 가희랑 비교하지 못해.”엄경준의 목소리는 차갑고 매정했는데 검은 눈동자는 미르국에서 청혼한 사람과는 딴판이었다.“내 아내 자리는 걔가 아니라 가희 것이야.”마침 그녀가 방금 병원 복도에서 먼저 말을 꺼냈기 때문에 그가 굳이 말할 필요가 없어졌다.백세훈은 엄경준과 어린 시절부터 함께 놀던 친구라 부잣집 자제들의 이기주의적인 성격을 알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엄지연이 안쓰러웠다.기억도 잃고 집도 없는 고아지만 항상 떳떳하고 당당했다. 지난 3년 동안 엄경준 곁에서 서로 다른 성격을 지닌 두 사람은 그의 눈에 행복하고 달콤한 커플이었다.연가희는 해외에서 몇 년 동안 있었으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굳이 순결에 집착하는 것도, 여성에 대해 편견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는 대학 시절 연가희라는 사람이 참 가식적이라고 느껴졌다. 외국에 있을 때도 그녀는 엄경준의 말을 듣지 않고 엄경준 몰래 자주 혼자 놀러 다녔다.대학을 졸업하고 이 바닥에서 잘 어울리던 동창들이 해외에서 댄스파티를 열자고 제안했고, 연가희는 댄스파티에서 기이하게 실종됐다.그들은 모든 인맥을 동원하여 찾았지만 결국 찾지 못했고, 경찰에서도 포기하라고 했다. 이국땅에서 사라진 젊은 여자는 살해당해 죽을 확률이 매우 높다고 하면서 말이다.당시 그들은 아직 회사를 완전히 물려받지 못했고
조명 리모컨을 찾아 불을 켜고 손에 든 물건으로 촛불을 하나씩 끄고 난 엄지연은 옷장 안에 있는 그 잠옷을 들고 샤워하러 갔다.욕실에 들어갔을 때 무심코 왼손에 반지가 끼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악세사리장 구석에 던져버렸다.욕실에서 나와 침대의 꽃잎을 모두 털어내고 난 그녀는 이불을 덮고 잠을 잤다.그녀는 침대 왼쪽에서 자는 게 익숙했고 엄경준은 항상 그녀에게 꼭 달라붙어 그녀를 안은 채 잠들었다. 그렇게 조금씩 그녀가 있는 왼쪽으로 밀어붙이니 커다란 침대에는 결국 빈 곳이 덩그러니 남았다.그녀는 오른쪽 공간이 눈에 거슬려서 몸을 가운데로 옮긴 뒤 여분의 베개를 침대 밑에 던져 놓은 뒤에야 비로소 맘 편히 불을 끄고 잤다.이틀째 엄경준으로부터 아무런 소식을 듣지 못했다. 병원에서 연가희를 돌보고 있거나 출근했겠지.엄지연도 관심도 없어서 그에게 문자 한 통 보내지 않고 바로 연락을 끊었다.오전은 햇볕이 좋고 봄바람이 화창해 엄지연은 느긋하게 빌라 마당 안 흔들의자에 누워 마스크팩을 쓰며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했다. 이틀 동안 그녀는 3년 전에 서명한 계약 연인 서류를 뒤져 찾아냈는데 그때 쓴 내용으로 보면 3년이 만기 되면 계약이 자동으로 만료된다고 했다.3년 만기까지 아직 4개월도 안 남았는데 만기가 되면 그녀는 200억이라는 금액을 받을 수 있다.게다가 최근 몇 년 동안 엄경준이 그녀에게 준 용돈과 명절마다 선물로 주던 현금까지 합치면 60억 정도인데 그녀는 쓸 기회가 없어서 모두 모아뒀다.보아하니 그녀도 이젠 부자가 되었고 떠나서 일자리를 찾으면 그리 어렵지 않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집은 평수가 작은 걸 하나 사면 된다. 그때 리나를 불러서 함께 살면 좋을 것 같았다.장옥매를 데려갈 수 있다면 완벽할 텐데 그 부분이 조금 아쉬웠다.탁자 위에 놓인 휴대폰이 울리며 그녀의 생각을 방해했고 휴대폰을 집어 든 그녀가 잠금을 해제하는데 화면 위에 새로운 문자가 도착한 걸 발견했다.클릭해 보니 절친 리나가 보낸 문자였다.두 사람은 1년
재벌은 사적인 감정에서 냉담하고 무자비하다고, 여자를 바꾸는 건 옷 갈아입는 것과 같다고 했다. 엄경준은 3년 동안 엄지연 한 여자만 곁에 두어서 일편단심인 줄 알았는데 지금 이렇게 말 한마디로 버리는 걸 보면 허가연은 그의 곁에 얼마나 오래 머무를지 궁금해졌다.신석훈은 3년 전 엄경준이 윤성 그룹을 인수하면서 입사해 연가희와 엄경준 사이를 잘 몰랐다.한성 백화점에서 엄지연은 청순하고 귀여운 스타일과는 전혀 무관한 옷을 고르고 있었다.“지연아, 스타일이 바뀌었어?”리나는 밑단이 트여있는 검은색 롱드레스를 들고 있는 엄지연을 보며 물었다. 나올 데와 들어갈 데가 확실한 엄지연이 이 옷을 입으면 섹시할 것 같았다.엄지연은 거울에 비춰보며 덤덤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응, 스타일이 바뀌었어. 겉옷에 숄이 어울릴까, 코트가 어울릴까?”돌아서서 리나에게 보여주며 물었다.“당연히 숄이 더 예쁘지. 네 몸매도 더 잘 드러낼 수 있고.”리나는 취향대로 조언했다.“나도 그렇게 생각해.”“이렇게 여성스러운 치마를 그 남자가 입고 나가게 해?”리나는 그녀가 입고 있는 심플한 트레이닝복을 훑어보며 말했다.“엄경준이 청순한 대학생 스타일로 입으라고 했다며.”말하고 난 리나는 자기도 모르게 속으로 임경준의 취향을 비난했다. 글로벌 대기업의 대표로서 화인국 경제의 명맥을 장악하고 사회에 발을 들여놓은 지 몇 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대학생 스타일을 좋아하다니.“그 사람 취향은 이제 중요하지 않아. 상관없어.”엄지연은 아무렇지 않다는 말투로 대꾸하고는 자신과 몸매가 비슷한 직원에게 치마를 건네며 입어보라고 했다.이런 매장에는 고객이 직접 옷을 입어볼 필요 없이 전문적으로 옷을 입어주는 사람이 있었다.다른 스타일의 옷도 몇 벌 더 가져와 직원에게 탈의실에서 입어보라고 하고 마음에 드는 것은 남겨두면 됐다.엄지연이 자신의 카드로 돈을 지불하고 성월 별장의 상세 주소를 기재하면 누군가가 옷을 가져다준다.두 사람은 옷을 다 고른 후에야 점심을 먹으러 갔다.곁에
엄지연은 휴대전화를 꺼내 엄경준에게 문자를 보냈다.[시간 나면 성월 별장으로 와. 우리 일부터 해결하고 당신 여신 곁을 지켜.]문자를 보내고 난 그녀는 병원을 나가려 했다.“엄지연 씨,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어찌 된 영문인지 연가희가 휠체어를 밀고 그녀의 앞에 나타났는데 주변엔 엄경준이 없었다.“우린 모르는 사이인 것 같은데요.”“엄지연 씨, 저는 그냥 3년 동안 경준이 곁에 있지 않아서 그동안 경준이가 어떻게 지냈는지 묻고 싶었을 뿐이에요. 저를 찾지 못한 경준이가 3년 동안 괴로워하고 밥도 먹지 못하고 잠도 잘 못 잤을 것 같아서요.”앙상하게 마른 연가희는 엄경준을 걱정하는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자랑스러운 기색이었다.“알고 싶으면 엄경준에게 직접 물어보세요.”“내가 걱정할까 봐 말을 안 해요.”그녀와 무슨 할 말이 있겠나. 애매한 신분이었던 엄지연은 그대로 돌아섰다.그런데 뒤에서 갑자기 연가희의 흥분에 찬 소리가 들려왔다. 눈물을 비 오듯 흘리며 처참한 목소리로 그녀가 울부짖었다.“아니에요, 경준이는 3년 동안 혼자였고 옆에 여자가 없었다고 했어요. 날 경준이한테서 떼어내려고 속이는 거죠?”엄지연은 그녀의 말에 놀라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가 언제 연가희에게 엄경준을 떠나라고 했던가?“경준아, 내가 갑자기 나타나서 너랑 엄지연 씨 사이를 방해한 거야? 그렇다면 미안해. 내가 사과할게. 미안해요, 엄지연 씨. 절 욕하지 말아 주세요. 제가 떠날게요. 멀리 떠나서 다시는 두 사람의 삶에 나타나지 않을게요.”흐느끼는 소리가 비참하고 가엾게 들리자 산책하던 다른 환자들이 몰려들었다.엄경준은 연가희의 뒤에 갑자기 나타나 화를 내며 그녀를 탓했다.“엄지연, 언제부터 질투가 이렇게 많았어? 연가희가 정신적으로 불안한 상황인지 뻔히 알면서 병원에 와서 자극해?”질투? 그가 그녀에게 질투를 언급하고 있다.“엄경준, 연가희 씨가 먼저 나한테 와서 이런 말을 하는 거야. 아무 증거도 없이 운다고 날 억울하게 몰아가지 마.”엄지연은 처음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