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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조명 리모컨을 찾아 불을 켜고 손에 든 물건으로 촛불을 하나씩 끄고 난 엄지연은 옷장 안에 있는 그 잠옷을 들고 샤워하러 갔다.

욕실에 들어갔을 때 무심코 왼손에 반지가 끼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악세사리장 구석에 던져버렸다.

욕실에서 나와 침대의 꽃잎을 모두 털어내고 난 그녀는 이불을 덮고 잠을 잤다.

그녀는 침대 왼쪽에서 자는 게 익숙했고 엄경준은 항상 그녀에게 꼭 달라붙어 그녀를 안은 채 잠들었다. 그렇게 조금씩 그녀가 있는 왼쪽으로 밀어붙이니 커다란 침대에는 결국 빈 곳이 덩그러니 남았다.

그녀는 오른쪽 공간이 눈에 거슬려서 몸을 가운데로 옮긴 뒤 여분의 베개를 침대 밑에 던져 놓은 뒤에야 비로소 맘 편히 불을 끄고 잤다.

이틀째 엄경준으로부터 아무런 소식을 듣지 못했다. 병원에서 연가희를 돌보고 있거나 출근했겠지.

엄지연도 관심도 없어서 그에게 문자 한 통 보내지 않고 바로 연락을 끊었다.

오전은 햇볕이 좋고 봄바람이 화창해 엄지연은 느긋하게 빌라 마당 안 흔들의자에 누워 마스크팩을 쓰며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했다.

이틀 동안 그녀는 3년 전에 서명한 계약 연인 서류를 뒤져 찾아냈는데 그때 쓴 내용으로 보면 3년이 만기 되면 계약이 자동으로 만료된다고 했다.

3년 만기까지 아직 4개월도 안 남았는데 만기가 되면 그녀는 200억이라는 금액을 받을 수 있다.

게다가 최근 몇 년 동안 엄경준이 그녀에게 준 용돈과 명절마다 선물로 주던 현금까지 합치면 60억 정도인데 그녀는 쓸 기회가 없어서 모두 모아뒀다.

보아하니 그녀도 이젠 부자가 되었고 떠나서 일자리를 찾으면 그리 어렵지 않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집은 평수가 작은 걸 하나 사면 된다. 그때 리나를 불러서 함께 살면 좋을 것 같았다.

장옥매를 데려갈 수 있다면 완벽할 텐데 그 부분이 조금 아쉬웠다.

탁자 위에 놓인 휴대폰이 울리며 그녀의 생각을 방해했고 휴대폰을 집어 든 그녀가 잠금을 해제하는데 화면 위에 새로운 문자가 도착한 걸 발견했다.

클릭해 보니 절친 리나가 보낸 문자였다.

두 사람은 1년 전 쇼핑몰에서 우연히 알게 됐는데 리나는 그녀를 한 번 본 후 굳이 그녀와 친구가 되겠다고 고집부렸다.

그녀는 기억도 없고 친구도 없었는데 마침 리나와 말이 잘 통해 점점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미르국에서 남자랑 노는 거 어때? 언제쯤 돌아와?]

음흉하게 웃는 이모티콘도 함께 보내왔다.

[돌아왔어.]

[돌아왔어? 벌써?]

[엄경준 보기엔 튼튼하던데... 왜 이렇게 빨리 돌아왔어? 안 되겠네!]

[안 될 뿐이겠어? 서지도 못해.]

그녀는 이 기회를 틈타 엄경준을 저주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리나는 전화기 너머로 눈살을 찌푸린 채 엄경준이 엄지연의 심기를 건드린 게 틀림없다고 생각하고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두 사람은 전에도 말다툼한 적이 있었고 커플이니 말다툼쯤은 칼로 물 베기인 셈이다.

[마침 너도 왔는데 이따가 한성 백화점에 가서 쇼핑하자. 옷도 좀 사고 겸사겸사 바비큐도 먹고 좋잖아. 어서 옷 입고 나와.]

[그래, 쇼핑몰에서 만나.]

엄지연은 흔쾌히 동의했다. 그녀는 그동안 좋아하지도 않는 상큼한 스타일의 옷들을 모두 정리해서 버렸기에 마침 옷장이 비어서 이번에 백화점에 가서 옷을 좀 사야겠다고 생각했다.

핸드폰을 내려놓고 마스크팩을 떼어낸 그녀는 옷장에 몇 벌 남지 않은 옷들을 보며 캐주얼한 옷을 골라 입고 간단하게 화장을 한 후 깔끔하게 외출 준비를 했다.

“아줌마, 친구랑 쇼핑하러 나가는데 점심은 그냥 밖에서 먹을게요.”

엄지연은 가방을 메고 나서며 말했다.

“알았어요. 지연 씨, 저녁은 돌아와서 드실래요?”

아줌마는 다른 가정부에게 청소시키고 있다가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다가와서 물었다.

엄지연은 허리를 굽혀 신발을 갈아신으며 리나의 성격이 변덕스러운 데다 한동안 못 봤으니 저녁에 돌아와서 먹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모르겠어요. 제가 오후에 미리 연락할게요.”

“그래요.”

문을 열자 엄경준의 개인비서 신석훈이 문밖에서 때마침 문을 두드리려 하고 있었다.

“신 비서님.”

엄지연은 담담하게 인사를 건네고 그를 지나쳐 나가려 했다.

“엄지연 씨, 대표님께서 점심 비행기로 타지에 출장을 가시는데 대표님 옷 정리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신석훈의 태도는 한결같이 공손했고 엄지연은 그 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아줌마, 경준 씨 출장 간다니까 짐 정리 좀 해주세요.”

“지연 씨?”

신석훈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왜요, 전에 제가 없을 땐 경준 씨 짐 정리해 줄 사람이 없었나요?”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담담하게 답했다.

“아닙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신석훈은 조심스럽게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감히 대꾸하지 못했다.

과거 엄경준의 출장 짐은 모두 그녀가 정리해 주었는데 정리 횟수가 많아져서 그가 여러 장소에서 필요로 하는 복장을 코디하는 데 능숙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제 챙기고 싶지 않았다. 대역인 줄도 모르고 엄경준의 짐을 정리해 주며 행복해하던 자신을 생각하니 참 멍청하고 우스웠다.

3년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예전에 함께 지낼 때 엄경준의 행동이나 눈빛에 이상한 점이 많았는데 그녀는 한 번도 발견하지 못했으니 정말 어리석기 짝이 없다.

다시는 바보 같은 짓을 하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다.

엄지연은 바로 떠나고 싶었지만 신석훈이 일부러 문을 막고 그녀를 못 가게 해서 아줌마를 재촉할 수밖에 없었다.

아줌마는 재빨리 아무 옷이나 집어 캐리어에 담아 거실에서 기다리던 신석훈에게 건넸다.

“신 비서님, 다 됐어요.”

캐리어가 눈앞에 나타나자 신석훈은 시계를 들여다보며 겨우 10분밖에 안 지난 걸 확인했다. 너무 빠른데?

“아줌마, 다 정리한 거 맞아요? 두고 온 건 없는지 한 번 더 확인 안 해도 될까요?”

신석훈이 조심스럽게 묻자 엄지연은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점심 비행기라면서요? 꾸물거리다가 늦을 텐데요. 필요한 게 있으면 거기서 바로 사도 되잖아요.”

그녀도 초조하게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조금만 더 늦으면 리나가 조바심을 낼 것 같았고 백화점에서 쇼핑도 못한 채 바로 점심을 먹어야 했다. 밥을 먹고 옷을 고르면 배가 나와 고르기 어려워진다.

“지연 씨 말이 맞네요. 바로 대표님 모시러 회사에 가야겠어요.”

신석훈은 웃으며 작별 인사를 했다.

엄지연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와 반대 방향인 지하 차고로 가서 조용히 흰색 BMW 한 대를 골라 차를 몰고 떠났다.

신석훈은 캐리어를 들고 길가에 조용히 대기하고 있던 검은색 마이바흐 차량 옆으로 가 트렁크에 넣은 뒤 조수석으로 가서 앉았다.

차를 운전하는 사람은 경호원 장수철이었다.

차량은 공항이 아닌 인화 병원으로 향했다.

“엄지연의 계약이 얼마나 남았는지 알고 있어?”

엄경준의 목소리는 회사의 일상적인 계약을 처리하는 듯 차분했다.

신석훈은 대표님이 자신에게 물어본다는 것을 깨닫고 황급히 대답했다.

“4개월도 안 남았어요.”

“계약서를 하나 더 작성해서 만기 되면 보내.”

엄지연은 그와 3년 동안 함께 했으니 돈을 조금 들여 애인으로 있는 것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다만 앞으로 그는 그녀를 건드리지 않을 것이고 성월 별장에 오지도 않을 것이다.

이틀 전 밤에 병원 복도에서 벌어진 장면을 떠올리며 그는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연가희 앞에 영원히 나타나지 말라는 조항도 계약서에 추가해.”

신석훈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빠르게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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