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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병원 뒤뜰 정원.

봄이지만 밤기운은 여전히 쌀쌀하고 찬 바람이 불어 추위가 느껴졌다.

라이터 소리가 나고 불빛 두 개와 함께 담배 연기가 바람에 흩날리며 사람의 눈을 흐리게 했다.

“연가희가 돌아왔는데 이제 어떻게 할 작정이야?”

백세훈이 입을 열었다.

엄지연을 언급하지 않았지만 두 사람 모두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한 명은 가장 풋풋하고 설레는 캠퍼스 시절에 엄경준을 구해주기까지 한 여신이고, 다른 한 명은 3년 동안 곁에 있으며 세상에서 가장 친밀한 행동을 했던 여자 친구이자 이젠 청혼까지 한 약혼녀였다.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

“대역일 뿐이야. 지연이는 애초에 가희 대신이었고 가희랑 비교하지 못해.”

엄경준의 목소리는 차갑고 매정했는데 검은 눈동자는 미르국에서 청혼한 사람과는 딴판이었다.

“내 아내 자리는 걔가 아니라 가희 것이야.”

마침 그녀가 방금 병원 복도에서 먼저 말을 꺼냈기 때문에 그가 굳이 말할 필요가 없어졌다.

백세훈은 엄경준과 어린 시절부터 함께 놀던 친구라 부잣집 자제들의 이기주의적인 성격을 알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엄지연이 안쓰러웠다.

기억도 잃고 집도 없는 고아지만 항상 떳떳하고 당당했다. 지난 3년 동안 엄경준 곁에서 서로 다른 성격을 지닌 두 사람은 그의 눈에 행복하고 달콤한 커플이었다.

연가희는 해외에서 몇 년 동안 있었으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굳이 순결에 집착하는 것도, 여성에 대해 편견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는 대학 시절 연가희라는 사람이 참 가식적이라고 느껴졌다. 외국에 있을 때도 그녀는 엄경준의 말을 듣지 않고 엄경준 몰래 자주 혼자 놀러 다녔다.

대학을 졸업하고 이 바닥에서 잘 어울리던 동창들이 해외에서 댄스파티를 열자고 제안했고, 연가희는 댄스파티에서 기이하게 실종됐다.

그들은 모든 인맥을 동원하여 찾았지만 결국 찾지 못했고, 경찰에서도 포기하라고 했다. 이국땅에서 사라진 젊은 여자는 살해당해 죽을 확률이 매우 높다고 하면서 말이다.

당시 그들은 아직 회사를 완전히 물려받지 못했고 일을 처리하는 능력도 노련하지 못했으며, 동시에 엄경준의 아버지 엄호영도 교통사고로 응급처치 끝에 사망했다.

뒷일을 정리한 엄경준은 회사를 물려받느라 바쁘면서도 호시탐탐 회사를 노리는 둘째 삼촌 엄호진까지 경계해야 했다.

결국 할아버지가 나서서 엄경준을 도와주어서야 회사를 안정시킬 수 있었는데 그 후 정신을 차리고 연가희를 찾았지만 이미 적기를 놓쳐 찾기가 더욱 어려워졌다.

백세훈은 그동안 엄경준의 번뇌와 자책을 눈앞에서 보며 덩달아 마음속으로 조바심을 냈다.

그러던 어느 날 나타난 엄지연이 엄경준을 구원했고 백세훈은 마음속으로 그녀에게 매우 고마워했다.

“지연 씨는 너와 3년 동안 함께 했어. 고아에 가족도 없는데 지연 씨에게 이러는 건 너무 잔인하지 않아?”

백세훈이 엄지연의 편을 들었다.

“그러면 계속 옆에 두면 되지. 결혼은 불가능해.”

엄경준은 시큰둥한 어투로 이 일을 가볍게 넘겨 버렸다. 여자 한 명쯤 곁에 두는 게 그에게는 큰일이 아닌 것 같았다.

두 여자를 만나는 것도 안 될 건 없다고 생각했다.

‘계속 옆에 둔다고? 허, 애인 대역을 계속하라고? 남들 눈을 피해 가며 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내지도 못하는 그런 내연녀나 애인 따위를?’

엄지연은 병원을 떠나지 않고 정원 뒤편 의자에 앉아 찬 바람을 쐬고 있었는데 이런 식으로 진실을 듣게 될 줄은 몰랐다.

모든 게 그녀의 얼굴이 엄경준의 사라진 여신과 많이 닮았기 때문이라니.

그녀는 기억을 잃었으니 마침 그의 마음속에 있는 여신의 모습대로 그녀를 만들면 진실을 숨기고 그녀를 대역으로 삼을 수 있었다.

그렇게 여신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주는 엄경준의 도구로 전락한 것이었다.

예전에 아껴주던 것도 얼굴 때문에 사라진 여신에 대한 보상이었다.

연가희, 이름이 연가희였구나.

엄경준이 평생을 바쳐 사랑한 사람은 연가희였다.

그래서 그녀의 이름을 엄지연이라고 짓고 침대에서 감정이 한껏 달아오를 때도 ‘연이’라고 불러댔다.

그가 ‘연이’라고 외칠 때마다 그 나지막하고 매혹적인 목소리에 그녀는 점점 빠져들었는데 사실은 그녀의 얼굴을 보며 다른 여자를 불렀을 뿐이었다.

그의 카드 지갑 속 사진이 연가희라는 걸 알게 되자 그녀는 사진 속 여자가 자신이라고 생각한 것이 참 미련하게 느껴졌다.

참 우스꽝스러웠다.

처음부터 끝까지 엄경준은 그녀를 그의 마음속 여신으로 만들었고 그녀는 순진하게 그가 자신을 사랑하도록 공략하는 데 성공했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존재 자체가 그들 사랑의 작대기 역할이나 했을 뿐인데.

엄지연의 오늘 기분은 산꼭대기에서 깊은 심연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속아서 엄경준의 마음속에 있는 여신의 대역이 된 것도, 떳떳한 약혼녀 위치에서 어디 나서지 못할 내연녀가 된 것도.

그를 좋아하고 사랑하기까지 하지만 줄곧 다른 사람의 대역으로 내연녀 노릇이나 하는 건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마음속으로 떠나기로 결심했다.

다행히 엄경준은 프러포즈만 했을 뿐 아직 혼인신고를 하지 않아 이혼보다 훨씬 간단했다.

그녀는 오늘 연가희가 나타난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엄지연 씨, 어디 있어요?”

소리쳐 부르는 기사는 한참 동안 기다렸지만 그녀가 오지 않자 차에서 내려 찾으러 왔다.

“저 여기 있어요.”

엄지연은 다운된 기분에서 벗어나 예전의 덤덤한 모습으로 돌아갔다.

“혼자세요? 대표님은요?”

운전기사가 물었다.

“안 돌아간대요.”

엄지연은 정원 뒤편 의자에서 일어나 운전사와 함께 차가 있는 곳으로 갔다.

무릎 위까지 오는 옅은 색상의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청순하고 사랑스러운 스타일 일이었다. 그녀는 어떤 스타일이든 다 어울렸지만 엄경준이 좋아하니까 3년 동안 계속 이런 스타일 옷만 입었다.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자 종아리가 살짝 시렸다.

정원 반대편에서 담뱃불이 깜박거리더니 엄경준은 마지막 한 모금을 빨아들인 후 담배를 비벼끄고 꽁초를 쓰레기통에 버렸다.

대화를 들킨 백세훈은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지연 씨 안 간 것 같은데?”

그렇다면 방금 한 말도 다 들었겠지.

엄경준은 아무렇지 않은 듯 시큰둥하게 담배꽁초를 버리고는 무뚝뚝하고 차가운 어조로 대답했다.

“차라리 잘 됐어. 자신의 신분을 확실히 알고 다시는 오늘처럼 시끄러운 일 만들지 말아야지.”

말을 마친 그는 돌아서서 정원을 떠났는데 엄지연에게 들켰다는 민망함이나 부끄러움 따위는 없는 것 같았다.

차를 타고 성월 별장으로 돌아가자 문을 열어주는 아주머니의 눈에는 며칠 동안 못 본 그리움이 담겼다.

“왔어요? 대표님 모시고 출장 가느라 고생 많았죠?”

엄지연은 지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대표님은요?”

장옥매는 뒤를 두리번거리며 엄경준을 찾았다.

“오늘 밤 돌아오지 않아요.”

엄지연의 목소리는 냉랭했는데 마치 그가 돌아오지 않는 것이 그녀와 아무 상관이 없는 것 같았다.

장옥매는 조금 실망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뭔가 알겠다는 듯한 기색으로 미소를 지었다.

아줌마는 엄지연이 들고 있던 캐리어를 건네받으며 빨리 침실로 돌아가 쉬라고 재촉했다.

침실에 들어간 그녀는 그제야 방금 장옥매의 웃음에 담긴 의미를 알 수 있었다.

침실에는 조명이 꺼져 있었는데 바닥과 테이블에는 양초가 여기저기 놓여 있었고 양초 옆에는 꽃과 디퓨저가 있었으며 테이블에는 샴페인 한 병이 놓여 있었다.

익숙한 짙은 회색 커튼도 레이스가 달린 블라인드 커튼으로 바뀌어 분위기가 야릇했다.

2인용 침대에는 꽃잎이 살짝 뿌려져 있어 방 전체가 화사하게 느껴졌는데 엄경준이 출국하기 전에 준비하라고 한 것으로 보였다.

피곤이 밀려온 엄지연은 정리할 힘이 없었지만 한밤중에 아줌마를 번거롭게 하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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