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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어느새 눈물이 흘러 방금 한 눈화장이 지워졌다.

왼손 약지에 끼워진 다이아몬드 반지에 시선을 돌린 엄지연의 마음속에는 갑자기 나타난 여자가 오래도록 기대했던 행복을 깨뜨릴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이 피어올랐다.

그녀는 여기서 기다리고만 있을 수 없었다. 그 여자가 누구인지 알아내야 한다고 생각한 그녀는 잠시 서 있다가 발걸음을 옮겨 호텔로 돌아갔다.

비행기는 미르국에서 화인국으로 날아갔다.

...

인화 병원.

엄지연은 병실 문 앞에 서서 두 손으로 몸을 감싼 채 문에 달린 창문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려 했다.

엄경준의 절친한 친구이자 인화 병원 원장인 백세훈과 병원 의사들이 병상에서 난동을 부리는 여자를 진찰하고 있었다.

두 명의 여자 간호사가 그녀를 잡고 있었는데 그녀는 비행기에서 얼굴을 깨끗이 씻은 듯했고 옷도 깨끗한 것으로 갈아입었다.

“연가희? 설마...”

사라진 지 4년이나 된 연가희?

백세훈은 깜짝 놀라며 엄경준이 어디서 연가희를 찾았는지 의아했다.

엄씨 가문과 백씨 가문의 모든 인맥을 동원해서 4년 동안 찾았지만 찾지 못하고 포기했는데 이렇게 나타났다니?

의사와 간호사가 진찰을 마치고 떠나자 병실 안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잠시 후 엄경준은 안정제를 맞고 잠든 여자의 모습을 바라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상태가 어때?”

“영양실조인데 충격으로 정신 이상 증세도 보여. 다른 건 괜찮으니까 며칠 지내다 보면 나을 거야.”

엄경준은 병상 옆에 서 있었는데 그녀를 계속 돌봐주려는 듯했다.

백세훈은 무슨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고 병실을 나오는데 문을 열자마자 엄지연이 문밖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

엄경준보다 본인이 더 어색해하던 그는 은테 안경을 올리더니 부드럽게 웃으며 인사했다.

“엄지연 씨.”

엄지연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세훈 씨, 저 여자 이름이 뭐예요? 경준 씨와는 어떤 사이에요?”

그 여자가 누구인지 간절히 알고 싶었던 엄지연은 대놓고 물었다.

백세훈이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연가희가 엄경준의 마음속 여신이라고?

어쨌든 엄경준의 일이니 그는 말을 아낄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난감해하고 있을 때 엄경준이 문을 열고 나오다가 병실 앞에 있는 두 사람을 보고 얼굴을 찡그리며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먼저 집에 가라고 하지 않았어? 왜 아직도 여기 있는 거야?”

그의 말투에는 혐오와 짜증이 뒤섞여 있었다.

진실을 알고 싶었던 엄지연은 물러서지 않고 한 걸음 다가갔다.

“16시간 전까지만 해도 미르국에서 나한테 프러포즈했던 남자가 지금 다른 여자를 안고 나를 무시하는 것도 모자라 이제 집에도 안 가? 외박할 거야?”

“억지 부리지 말고 지금 당장 여기서 나가.”

차갑고 낯선 목소리로 말하는 그의 눈빛은 말 안 듣고 실수한 부하직원을 대하는 것 같았다.

백세훈은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는 엄경준을 바라보며 둘이 싸우면 엄지연이 손해를 볼까 걱정했다.

엄경준이 화를 내면 엄지연에겐 좋을 게 없었다.

“시간도 늦었는데 내가 지연 씨 차로 데려다줄게.”

백세훈은 싸늘한 분위기를 풀려고 입을 열었지만 엄지연은 백세훈의 호의를 거절하며 말했다.

“내가 억지 부린다고? 나는 경준 씨의 약혼녀인데 경준 씨는 해외 길바닥에서 나를 버리고 다른 여자까지 안고 떠났어. 내 입장은 생각 안 해?”

“갈 수 있지. 하지만 경준 씨도 같이 가. 병실에 있는 여자는 의사와 간호사가 돌보고 있으니까 경준 씨는 지금 나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

엄지연은 다급하게 손을 뻗어 엄경준의 팔을 잡아당기려 했지만 반쯤 뻗은 팔을 누군가 막았다.

엄경준의 경호원 장수철이었다.

흠칫하던 엄지연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은 채 심장을 찢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그가 제일 아끼고 사랑하던 사람은 그녀였다. 그녀가 연락하고 싶을 때면 그는 회의 중이든 출장 중이든 늘 빠르게 전화를 받았다.

그녀에게 그가 필요할 때면 가장 먼저 옆에 와줬고, 그녀의 핸드폰 배터리가 없어서 연락이 안 되면 그는 걱정스럽게 세상을 뒤져서라도 그녀를 찾으려 했다.

‘그런데 이제 저기 병실에 있는 여자가 나타나니까 만지지도 못하게 하는 건가?’

“이게 무슨 뜻이야?”

엄지연의 목소리가 떨려왔고 가슴도 덩달아 불안하게 떨렸다.

엄경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은 마치 방금 프러포즈에 성공한 약혼녀가 아닌 낯선 사람을 보는 듯 차갑고 냉정했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기도 하고 1초밖에 안 지난 것 같기도 했다.

“철없이 굴지 마.”

그의 말은 차갑고 매몰찼다.

‘허, 내가 철없이 굴었다고?’

예전에는 그에게 의지하며 소유욕을 드러내는 걸 좋아하더니 이젠 철없이 군단다.

“병원에 남아서 저 여자 옆에 있어도 돼. 그러면 우리 결혼은? 경준 씨 오늘 막 나한테 프러포즈했잖아!”

엄지연은 숨이 막힐 것 같은 아픔이 느껴졌다.

그녀는 지금 이런 말을 할 때가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미래의 남편이 병원에서 다른 여자를 돌본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옆에서 듣고 있던 백세훈은 깜짝 놀랐다.

‘결혼? 엄경준이 엄지연에게 프러포즈했다고? 그러면 병실에 있는 연가희는?’

엄경준은 연가희가 잠에서 깰까 봐 걱정스러운 듯 창문을 통해 병실 안을 들여다보았다.

엄지연은 그 눈빛을 잘 알고 있었다. 예전에 그녀가 다쳤을 때 항상 걱정하던 그 눈빛이 지금은 다른 여자에게 향하고 있었다.

이어 그는 고개를 돌리며 여전히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결혼하기 싫으면 취소해. 여기는 네가 함부로 행패를 부릴 수 있는 곳이 아니야. 장수철, 기사한테 지연이 데려다주라고 해.”

그는 누군가가 자신을 위협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데 특히 결혼은 더 그러했다.

말을 마친 그는 문을 열고 병실로 들어가며 엄지연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장수철은 몸을 살짝 숙인 채 여전히 공손하고 예의 바른 목소리로 말했다.

“엄지연 씨, 저 난처하게 하지 마시고 지금은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백세훈은 엄지연의 처량한 모습을 보고 타일렀다.

“지연 씨, 지금은 시간이 너무 늦었으니까 무슨 일 있으면 나중에 경준이랑 다시 잘 얘기해 봐요.”

이런 상황에서 더 얘기할 게 있을까?

약혼자라는 사람이 다른 여자를 돌보느라 사람들 앞에서 약혼녀의 체면도 봐주지 않았다.

엄지연은 병원 복도의 불빛이 너무 눈부시다고 느꼈다. 눈앞이 온통 하얀색으로 보일 만큼 눈부셔서 다른 건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지금 여기 있어봤자 우스운 꼴만 당한다는 생각에 다른 사람의 웃음거리가 되고 싶지 않았던 그녀는 가방을 움켜쥐고 떠나려고 돌아섰지만 막 걸음을 내딛던 순간 몸이 휘청거리며 쓰러질 뻔했다.

백세훈과 장수철은 앞으로 다가와 그녀의 양쪽에서 팔을 잡아주었다.

“제가 차까지 데려다줄게요.”

백세훈이 입을 열었다.

엄지연은 손으로 벽을 짚은 채 정신을 가다듬더니 그의 호의를 거절하며 말했다.

“괜찮아요. 혼자 갈 수 있어요.”

떠나는 그녀의 뒷모습은 위태로워 보였지만 꿋꿋이 복도를 걸어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병실로 돌아온 엄경준은 병상에 누워있는 연가희의 수척한 모습을 바라보며 가슴이 답답하고 괴로웠다.

공기 속에 알코올 냄새로 가득해 더욱 짜증이 난 그는 셔츠 깃을 잡아당기고 맨 위 단추 두 개를 풀었다. 그런데도 숨이 막힐 정도로 답답해 다시 한번 병실 문을 열었지만 문밖에는 백세훈과 장수철만 있을 뿐 엄지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갔어?”

엄경준이 물었다. 그녀가 눈에 보이지 않으니 조금 홀가분한 것 같았다.

다투는 소리에 연가희가 잠에서 깰가 걱정하지 않아도 되니까.

“그래, 갔어.”

백세훈은 두 손을 가운 양쪽 주머니에 넣고 고개를 끄덕였다.

엄경준은 두 사람이 모두 있는 것을 보고도 엄지연이 어떻게 갔는지 묻지 않았다.

“담배 피우러 갈게.”

그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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