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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 후, 천억 재벌이 미쳐버렸다!
이별 후, 천억 재벌이 미쳐버렸다!
작가: 돈복이

제1화

미르국.

호텔 침대에서 두 사람은 서로 몸을 기대고 있었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다소 잠긴 엄경준의 목소리가 관능적으로 들렸다.

“지연아, 내 아이를 낳아 줄래?”

엄지연도 분위기에 휩쓸려 생각지도 않고 대답했다.

일을 마친 두 사람이 부둥켜안고 있을 때 그제야 그녀는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했다.

“아이?”

그녀는 여운이 가시지 않은 듯한 눈빛으로 물었고 엄경준은 또다시 욕망이 꿈틀거렸다.

그녀의 몸은 왠지 모르게 시도 때도 없이 그에게 유혹적으로 다가왔다.

애써 욕구를 자제하며 엄경준은 어디선가 다이아몬드 반지를 꺼내 엄지연의 왼손 약지에 끼워주었다.

“나한테 프러포즈하는 거야?”

“그래.”

“이러면 아이를 낳아 줄 수 있지?”

웃으면서 묻는 엄경준의 눈에는 자상함이 넘쳤지만 사랑하는 감정은 보이지 않았다.

눈빛은 마치 그녀를 통해 다른 누군가를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그 사람의 승낙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

“많이 낳아 줄게.”

엄지연은 매우 기뻤다. 침대에서 하는 프러포즈라 전혀 낭만적이지도 정식적이지도 않았지만 괜찮았다.

3년 동안 지금 이 순간만 기다렸고 그만큼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3년 전, 그녀는 무슨 영문인지 해변에서 사고가 생겨 머리를 암초에 부딪혔는데 깨어나자마자 기억을 잃었다.

엄경준이 그녀를 구했다.

그녀가 깨어난 후 가장 먼저 본 사람이 바로 그였는데 한눈에 그의 잘생긴 얼굴에 반했다.

상처가 다 나은 후에야 엄경준이 병원비를 대신 내줬다는 것을 알았고, 동시에 그가 윤성그룹 대표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엄경준은 그녀에게 계약 애인이 될 것을 제안했고 그녀는 망설임 없이 받아들였다.

그렇게 계약서에 사인하고 둘의 관계가 정의되며 엄경준은 그녀에게 엄지연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녀의 얼굴 때문이었다.

계약 애인이라고는 하지만 두 사람은 3년 동안 여느 연인이나 다름없이 지냈다.

첫해에는 그의 비밀 애인이었다가 다음 해에는 그녀를 데리고 주위 친구들을 만나면서 여자 친구라는 신분을 줬고 그러다 3년이 다 되어갈 때 그는 그녀에게 청혼했다.

그를 따라 이 바닥에 발을 들인 후 엄지연이 들은 바로는 그가 대학 시절에 사랑했던 여신이 무슨 영문인지 갑자기 자취를 감추었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소식 한 통 없다고 했다.

그렇게 오랜 세월이 지나자 엄경준은 더는 그녀가 살아 있다는 희망을 품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에 프러포즈를 한 거다.

과거가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고 생각하며 엄지연은 개의치 않았다.

왼손 약지의 다이아몬드 반지를 보면 모든 것이 가치가 있다고 느껴졌다.

욕실에서 엄경준이 샤워하는 물소리가 들려왔다.

잠잠해진 후 엄지연은 가운을 끌어당겨 간단히 몸에 감고는 침대에서 내려와 바닥에 흩어진 두 사람의 옷을 집어 들었다.

‘툭’하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 땅에 떨어졌는데 엄경준의 카드 지갑이었다.

그녀가 허리를 굽혀 집어 들자 사진 한 장이 떨어졌다. 사진이 조금 낡고 모서리가 닳은 걸로 보아 사진을 소유한 사람이 자주 꺼내보는 듯했다.

사진 속 여인은 그녀와 생김새는 비슷하지만 조금 어렸는데 그녀의 3년 전 모습 같았다.

엄지연은 3년 전에 이런 사진을 찍은 기억이 없었지만 기억을 잃었으니 잊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막 지갑을 닫으려 할 때 뼈마디가 분명한 커다란 손이 나타나 카드 지갑을 가져갔다.

욕실에서 나온 엄경준의 아직 말리지 않은 머리카락이 이마에 달라붙어 눈을 조금 가렸는데 두 눈엔 불쾌함으로 가득 찼다.

“내 물건 함부로 손대지 마.”

방금 침대에서의 다정한 모습과는 사뭇 다른 경고가 섞인 말투였다.

등을 돌린 채 카드 지갑을 서류 가방에 넣는 그에게서 서늘함과 경계심이 가득 느껴졌다.

엄지연은 멍해졌다. 그가 사진 한 장 때문에 그녀에게 이런 태도를 보일 줄이야.

의아하게 그를 쳐다보다가 자신의 예전 사진이 아닐지 생각하는데 그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엄경준은 자신이 방금 한 행동이 조금 지나쳤다고 생각했는지 뒤돌아 그녀의 턱을 움켜쥐었다.

알 수 없는 눈빛에는 장난기가 담겨 있었고 붓기가 채 가시지 않은 그녀의 빨간 입술을 야릇하게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목소리는 차갑고 아무런 정욕이 느껴지지 않았지만 극도로 도발적인 말투는 화제를 돌리려는 게 분명했다.

“이러다 전시회 늦겠어. 가기 싫으면 한 번 더 하고.”

엄지연은 그의 말에 뺨이 빨갛게 달아올라 두 손으로 그를 살짝 밀쳐냈다.

머릿속이 흐트러지며 그녀는 사진에 관한 일을 잠시 잊었다.

엄경준은 이번에 미르국으로 출장을 왔다가 화가 해린이 미르국에서 개최하는 전시회의 초대장을 받고 특별히 엄지연을 데리고 왔다.

화가 해린은 3년 전 은퇴해 전시회를 연 횟수가 손에 꼽을 정도였는데 미르국에서 전시회를 여는 것은 이례적이었다.

엄지연이 빠르게 화장을 하는 동안 엄경준은 이미 새 양복으로 갈아입었다.

전시회는 호텔에서 가까우니 걸어가면 됐기에 두 사람은 서로 팔짱을 끼고 거리를 걸었다. 분위기가 좋아 엄지연이 행복한 감정에 빠져있을 때 엄경준이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었다.

“경준 씨, 왜 그래?”

엄지연은 그의 시선을 따라 바라보았다.

거리 반대편에서는 온몸이 지저분하고 무슨 색인지 구분할 수도 없는 옷을 입은 여자가 차에 치일 위험을 무릅쓰고 돌진해 오더니 팔짱을 낀 엄지연의 팔을 밀쳐내고 엄경준의 허리를 꼭 껴안았다.

서글프게 울던 그녀는 숨을 겨우 고르며 말했다.

“경준아, 드디어 만났네. 날 보러 온 거지? 그렇지?”

옆으로 밀려난 엄지연은 순간 햇빛에 눈이 따끔거렸다.

무척이나 낯익은 이 여자는 카드 지갑 사진 속의 여자와 비슷했고 동시에 자신과도 닮았다고 느꼈다.

“가희? 너야?”

엄경준의 목소리가 떨리더니 믿을 수 없다는 듯 자신의 품에 안긴 여자를 바라보며 그 여자가 다시 사라질까 두려운 듯 눈 한 번 깜박이지 못했다.

불과 몇 분 전에 엄지연에게 청혼한 남자가 지금 거리에서, 그것도 그녀 앞에서 다른 여자를 껴안고 있다.

게다가 품에 안긴 여자의 눈물을 다정하게 손으로 닦아주는 행동도 어찌나 조심스러운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보물을 다루는 것 같았다.

“그래, 나야.”

품에 안긴 여자는 흐느껴 울며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몸이 허약해 보이는 여자는 엄경준을 꼭 껴안고 있었다.

결벽증까지 있을 정도로 깨끗한 남자가 품에 안긴 여자를 끊임없이 달래는 모습은 마치 잃어버린 보물을 되찾고 행여나 그것을 다치게 할까 두려워하는 듯했다.

두 사람만 다른 세계에 머무는 듯 주위 모든 것을 지워버렸다.

엄지연도 함께 차단당한 느낌이었다.

엄경준은 곁에 엄지연이 있다는 사실을 잊은 듯 값비싼 양복을 벗어 품에 안긴 여인에게 둘러주고는 울다가 쓰러진 여자를 두 팔로 안아 들더니 성큼성큼 호텔로 돌아갔다.

엄지연은 구경꾼처럼 제자리에 멍하니 선 채 방금 부딪친 팔에 전해오는 통증을 느꼈다.

허리에는 아직도 엄경준의 몸이 남긴 온기가 남아 있었다.

방금 그녀와 침대에서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그녀에게 청혼한 남자가 지금 거리에 그녀만 혼자 남겨두고 가버렸다.

어디선가 뛰쳐나온 한 여자를 안고서. 우아하고 고귀한 모습은 뒤로한 채 이미지도 생각하지 않고 거지 같은 옷차림을 한 여자를 안고 그렇게 호텔로 달려갔다.

행인들은 흥미로운 구경거리에 손가락질하며 수군거렸고 엄지연은 뒤쫓아 가려다가 발을 내딛자마자 휘청거렸다.

길가의 건축물에 기대서야 겨우 몸을 바로 세운 그녀는 고개를 들어 창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세련된 화장이 참 비참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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