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부경 산장의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게 갰다.결혼식은 야외 잔디밭에서 진행될 예정이었다.부경 산장의 잔디밭은 전문 인력이 관리하고 있어 겨울에 접어드는 11월에도 색이 바래지 않아 사진이 잘 찍혔다.한 무리의 사람이 결혼식장에 도착했다.남초윤은 조유진과 선유와 같이 산장 주변을 돌아보며 사진을 여러 장 찍은 후 결혼식장의 디저트 테이블 근처로 돌아와 술잔을 기울였다.야외 결혼식장에 은은한 바이올린 소리가 울려 퍼졌고 장미 꽃잎이 바닥에 깔려 있었다.남초윤은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이상하네? 강이찬의 결혼식인데 왜 소란 피우기 좋아하는 여동생이 안 보이지? 이렇게 큰 행사에 얼굴 드러내는 거 좋아하지 않았어?”“분장실에서 도와주고 있겠지.”그 말에 남초윤이 코웃음을 쳤다.“걔가 돕긴 뭘 도와. 말썽만 안 부리면 다행이지. 결혼식에 오지 않은 것 같은데? 분명 무슨 일이 생긴 게 틀림없어!”조유진은 별생각 없이 샴페인 잔을 들고 마시려던 참이었다.이때 남초윤이 그녀의 잔을 확 낚아채며 말했다.“유진아, 무슨 생각하는 거야? 이건 술이야! 넌 마시면 안 돼.”결혼식이었지만 조유진은 기분이 다운되어 있었다. 멀찍이 서서 술잔을 든 채 육지율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배현수를 본 남초윤은 조유진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내일 정말 성남에 가는 거야? 다시 얘기해 볼 생각 없어? 그동안의 감정이 아깝지도 않아?”조유진은 억지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깨진 거울은 절대 다시 붙일 수 없나 봐. 다시 붙인다고 해도 그 흔적이 남으니까. 서로 너무 오랫동안 시간만 지체한 것 같아. 이제 정말 인연이 끝난 것 같아. 우스운 얘기기는 한데 사실 7년 동안 우리는 한 번도 같이 있은 적이 없어. 그래서 그런지 지금 헤어져야 정상이라는 생각까지 들어.”너무 많은 것들을 오랫동안 잃어버리면 없는 것에 습관이 되고 그런 상태가 일상이 되어버린다. 그러면 저도 모르게 이 감정을 가질 자격이 없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결혼식장
심미경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전화기 너머로 중년여성의 기세등등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당신 누구야? 급한 일이 있으니까 강이찬 좀 바꿔. 직접 나와서 해결하지 않으면 경찰서에 가서 여동생을 폭로해 버릴 수밖에 없어!”심미경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저는 강이찬 씨의 아내입니다. 누구세요? 이찬 씨를 왜 찾는 거죠?”맞은편에는 중년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표준 서울 발음이 아닌 사투리가 억세게 들렸다.“아, 그러니까 당신이 강이진의 시누이야? 누구든 상관없어. 돈만 받으면 되니까! 아직 1억이 남았는데 왜 안 갚는 거야? 전화도 안 되고 문자를 해도 답장이 없어. 어디 도망간 거 아니야?”심미경은 들으면 들을수록 아리송했다.“당신 대체 누구예요? 이진이가 도대체 무슨 일을 저질렀는데요?”설마 이진이가 도박 빚이라도 졌단 말인가?전화기 너머의 장순자는 언성을 높이며 말했다.“강이진! 그 년이 내 남편을 사주해 교통사고를 내게 했어. 감옥에 들어가 2년 동안 감옥살이를 하게 생겨 입막음 비용으로 우리에게 2억을 주겠다고 했어. 그런데 지금 1억밖에 못 받았어. 당신들이 강이진 대신 이 돈을 갚지 않으면 당장 경찰서에 가서 신고할 테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심미경은 잠시 멍해졌다.“혹시 전화 잘못 거신 거 아니에요?”“잘못 건 거 아니야! 강이진의 오빠가 강이찬이잖아? 맞지? 발뺌할 생각하지 마! 2억은 당신 같은 사람들에게 껌값이잖아.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돈을 보내야 할 거야. 안 그러면 절대 가만있지 않을 테니까! 교통사고는 내 남편이 다 뒤집어썼어. 물론 내 남편은 음주운전에 그치긴 했지만 강이진 그 년은 살인 미수야! 누구의 형이 더 무거울지 잘 생각해 봐!”교통사고?음주운전?살인 미수?강렬한 불안감이 온몸을 휘감았다.심미경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겨우 부여잡으며 말했다.“당신 남편 이름이... 뭐예요?”“황인구!”순간 뇌 정지가 된 듯 머릿속이 윙윙 소리가 났다.황인구? 황인구...심미경의 교통사고도 황인구라는 사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나간 후 분장실에는 심미경과 강이찬만 남았다.심미경은 화장대를 짚고 천천히 일어섰다.두 다리가 후들거려 지탱할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강이찬이 부축해 주지 않았더라면 분명 넘어졌을 것이다.“미경 씨.”강이찬의 손을 덥석 잡은 그녀는 시뻘게진 눈시울로 심문하듯 물었다.“강이진 짓이에요?”긴 침묵이 흐른 후, 강이찬이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말했다.“네, 이진이가 한 거예요. 어떻게 하면 직성이 풀릴까요? 말만 해요. 내가 바로 할 테니.”동공이 미세하게 떨린 심미경은 주위의 공기마저 희박하게 느껴져 숨조차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그러니까 강이진이 한 짓이라는 걸 진작 알았던 거예요?”또다시 긴 침묵이 흘렀다.심미경은 우는 얼굴로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당신네 남매의 눈에 내가 바보로 보여요? 매일 나를 죽이려 했던 살인범과 한 지붕 아래 살며 당신들에게 원숭이처럼 놀아나는 것을 보고 어땠어요? 기분이 좋았어요? 강이진 짓이라는 것을 진작 알았으면서 왜 나에게 말하지 않았어요? 친동생을 감싸기 위해 평생 저를 속일 생각이었어요?!”강이찬은 강이진의 어깨를 잡으며 다급히 해명했다.“자수하라고 했어요. 그런데 자살하겠다느니 뭐라느니 하면서 나를 협박해서 저도 모르게 마음이 약해졌어요. 그래서...”심미경은 강이찬의 말을 끊었다.“강이진, 지금 어디 있어요? 방금 장순자 말로는 도망갔다고 하던데 오늘 결혼식에 안 온 것을 보면 벌써 도망갔나 보네요?”“이미 대선국에 갔을 거예요.”“하하... 강이진이 도망간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냥 내버려 뒀다고요? 강이찬 씨! 교통사고 때문에 우리 아이가 죽었어요! 나는 그것도 모르고 바보같이 운전을 제대로 못 한 내 탓이라고 생각해 얼마나 자책했는지 알아요? 매일같이 악몽을 꿨다고요. 꿈에서 강이진이 칼을 들고 내 배를 찔렀어요. 이것도 내가 생각이 많아서 이런 꿈을 꾼 줄 알고 감히 이찬 씨에게 말도 못 했어요! 그런데 이제야 알 것 같네요. 왜 이런 꿈을 꾸었는지.”강이
심미경은 웨딩드레스를 갈아입을 겨를도 없이 치맛자락을 들고 비틀거리며 뛰어나갔다.강이찬은 넋이 나간 듯 멍하니 자리에 서 있었고 눈시울은 시뻘게졌다.다이아몬드 반지가 ‘딸가닥’ 소리를 내며 손바닥에서 미끄러져 바닥에 떨어졌다.심미경과 완전히 끝났다.마당에서 한창 음식을 먹던 남초윤이 무심코 고개를 들었을 때 하얀 그림자가 산장 뒤뜰로 사라지는 것을 발견했다.“저기 저 사람 신부 아니야? 왜 도망가는 거지?”조유진도 얼떨떨한 얼굴로 남초윤이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봤다. 아니나 다를까 진짜로 심미경이 뛰어가고 있었다.“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남초윤은 잔뜩 호기심이 생겼다.“강이찬이 또 무슨 짓을 했기에 심미경이 결혼식 날 도망가게 만들어?”결혼식 참석 하객들이 모여 분위기가 한껏 달아올랐을 때 신랑 측 비서가 앞으로 걸어 나오며 말했다.“죄송합니다. 여러분, 오늘 결혼식에 문제가 생겨 예정대로 진행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음식은 예정대로 마련될 것이니 마음껏 드시고 즐기다가 가세요. 다시 한번 죄송합니다.”...흰색 벤츠 한 대가 미친 듯이 부경 산장을 빠져나오고 있었다.차 안에 있는 심미경은 운전대를 꽉 잡고 가속페달을 힘껏 밟았다.눈물이 시야를 가려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혼자 있는 차 안에서 그녀는 큰 소리로 통곡했다. 오랫동안 운전을 하지 않았고 지난번 교통사고 이후로 함부로 운전대를 잡지도 않았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흰색 벤츠는 마치 거침없는 맹수처럼 앞으로 달려나가고 있었다.뒤에 검은색 벤틀리가 미친 듯이 경적을 울리며 쫓아왔다.강이찬의 차였다.휴대전화는 계속 울렸지만 그녀는 받을 생각이 없었다.부경 산장은 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어 가끔 길에 화물을 운반하여 산으로 올라가는 대형 화물차가 오가고 있었다.흰색 벤츠가 코너를 도는 순간 큰 트럭과 마주쳤고 날카로운 경적이 조용한 산길에 울려 퍼졌다.끼익!곧이어 급정거하는 소리와 함께 바퀴가 바닥에 마찰되며 검은색 타이어 자국을 몇 줄 그
강이찬은 심미경의 입에서 ‘이혼’이라는 단어가 나올 줄 몰랐다.깜짝 놀란 강이찬은 다급히 그녀를 잡고 말했다.“미경 씨, 강이진의 일이라면 나는...”심미경은 눈시울을 붉히며 웃었다. “강이진이 우리 아이를 죽였어요. 강이찬 씨, 어떻게 범인을 그냥 내버려 둘 수가 있어요?”“옥상에서 뛰어내리겠다고 협박하는 바람에 잠시 마음이 약해졌어요...”잠시 마음이 약해졌다고?하...강이진이 교통사고를 사주해 임산부를 차에 치이어 죽이려 했을 때는? 약해진 마음 따위 없었을 것이다. 차 안에 앉아 있는 심미경의 얼굴에는 눈물이 계속 흘러내렸다. 하지만 가슴 가득 찬 분노에 사지가 굳고 마비되어 몸을 쉽게 움직일 수도 없었다. 그녀는 온 힘을 다해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최대한 차분함을 유지하려 했지만 떨리는 목소리는 감출 수 없었다.“강이찬 씨, 나와 결혼하려 한 이유가 나를 사랑해서예요? 아니면... 미안해서예요?”강이찬은 멍하니 서 있었다.그녀를 보며 입을 벌렸지만 목구멍에 가시가 돋친 듯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사랑 때문인지 죄책감 때문인지 그도 헷갈렸다.그저 망설일 뿐이었다.‘나를 사랑하냐'는 질문에 3초 동안 답을 하지 못한 것이 어쩌면 최선의 답이었다.눈을 꼭 감은 심미경의 얼굴에 또다시 뜨거운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혼전임신으로 아이를 위해 멀리 원주까지 쫓아온 강이찬이었다. 큰비 속에 서서 자기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달라고 했다.그래서 마음이 약해졌다. 그때, 분명 천천히 좋아지리라 생각했다.강이찬의 마음에 조금씩 자리 잡아 뿌리를 내리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이는 강이진 때문에 죽었고 그녀는 죽을 고비를 겨우 넘기고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하지만 강이찬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 강이진이 살인자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대로 내버려 뒀다. 아무리 바보라고 해도 이제 이 꿈에서 깨야 했다.“강이진이 왜 나를 죽이려 했는지 알아요?”강이찬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다 생각났어요?”“아마 하늘도 강이진의 행동을 더
남의 결혼식 소란에 별 관심이 없던 조유진은 선유를 데리고 자리를 뜨려 했다. 이때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다.전화를 건 사람은 엄창민이었다.조유진은 배현수 앞에서 직접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 창민 오빠?”“환희야, 아버지가 갑자기 쓰러져서 응급실에 실려 왔어. 의사 말로는 심근경색이라 상황이 별로 안 좋대. 얼른 성남에 와야 할 것 같아.”조유진은 인상을 찌푸렸다.“알겠어요. 바로 비행기 표 예매할게요.”전화를 끊은 조유진의 얼굴에 걱정과 불안함이 역력했다.그러자 옆에 있던 배현수가 물었다.“무슨 일이야?”“엄 어르신이 갑자기 쓰러져 상황이 안 좋대요. 바로 성남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아요.”처음부터 심미경의 결혼식만 끝나면 성남으로 돌아가기로 했었다.심미경의 결혼식에 이런 소란이 생겼으니 결혼식도 끝난 셈이었다.오늘 밤, 늦은 시간 성남에 간다고 해도 그저 계획보다 하루 앞당겨졌을 뿐이었다.애틋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던 배현수는 이내 감정을 추스렸다.“그래, 산성 별장으로 돌아가 짐을 싸. 내가 데려다줄게.”“아니에요. 요즘 안 그래도 여론에 시달리고 있는데 직접 배웅 안 해줘도 돼요. 내가 선유와 같이...”“너는 괜찮다고 해도 선유가 걱정돼서 그래.”말뜻인즉슨 선유가 걱정되어 데려다주겠다는 뜻이었다.말투가 강압적이어서 차마 뭐라고 할 수도 없었다.조유진도 더 이상 반박하지 않았다.서정호는 저녁 8시 비행기 표로 예약했다.공항으로 가는 길, 오롯이 선유만 신났을 뿐이었다. 아이에게는 그저 즐거운 여행이었다.“엄마, 성남은 대제주시와 똑같이 생겼어?”대제주시의 사람들은 대부분 호탕하고 시원시원한 편이라면 성남의 사람들은 외유내강의 스타일로 화려하고 낭만적이었다.“아니, 많이 달라.”기후나 도시 분위기 모두 완전히 달랐다.“그럼 엄마는 대제주시가 좋아, 아니면 성남이 좋아?”갑자기 묻는 선유의 말에 조유진은 머뭇거렸다. 그러다가 옆에 있는 남자의 옆모습을 흘끗 쳐다보고는 일부러 약 올리려는 듯 한마디 했다
혼전 검사 결과를 손에 쥔 심미경은 병원 건물에서 터벅터벅 걸어 나왔다. 의사의 말이 계속 귓가에서 맴돌았다.“심미경 씨, 교통사고로 유산을 하면서 자궁이 많이 다쳤어요. 아마 앞으로 임신할 수 없을 가능성도 있어요. 임신해도 태아로 성장하기 어려울 거고요. 혼전 검사 결과하신 것을 보면 앞으로 아이를 가질 계획이 있는 거죠?”창백한 얼굴로 차에 탄 심미경은 ‘쾅’하고 차 문을 세게 닫았다.보고서를 꽉 움켜쥔 심미경은 어느새 눈시울이 시뻘게졌고 눈가에는 그동안 참았던 눈물이 차올랐다.이때 핸드폰이 울렸다. 강이찬에게서 전화가 걸려온 것이었다.‘통화’버튼을 누른 심미경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상대방이 먼저 입을 열기를 기다릴 뿐이었다.몇 초간 침묵하던 강이찬도 말 못 할 사정이 있는 듯 몇 번이나 머뭇거리더니 겨우 입을 열었다.“미경 씨, 어디예요?”“병원이요.”그녀의 쉰 목소리를 들은 강이찬은 바로 긴장한 말투로 물었다.“어디 아파요? 어느 병원인데요? 내가 바로 갈게요.”“아픈 데 없어요. 혼전 검사 결과를 확인하기 위해 병원에 온 거예요.”애써 울음을 참았지만 목소리는 이미 많이 떨리고 있었다.전화기 너머의 강이찬은 그녀의 이상한 목소리를 바로 알아챘다. 그녀가 왜 이러는지도 아는 듯했다.강이찬이 무엇인가 말하려고 할 때, 심미경이 물었다.“내가 혼전 검사를 받으러 오지 않았다면 언제까지 나에게 숨길 생각이었어요?”전화기 너머로 잠시 침묵이 흘렀다.강이찬이 목을 가다듬더니 천천히 말하기 시작했다.“교통사고 때문에 원기가 많이 상하고 몸도 아직 회복이 안 돼서 말할 수가 없었어요. 몸이 좀 나아지고 결혼식이 끝나면 적절한 타이밍을 봐서 말하려고 했어요.”“내가 힘들어할까 봐 말을 하지 않은 거예요? 아니면 강이진을 원망할까 봐예요?”“그때는 저도 교통사고가 이진이와 연관이 있다는 것을 몰랐어요.”심미경은 조롱하듯 피식 웃었다. “이제 알았잖아요. 강이진 때문에 내가 유산을 했고 앞으로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것도
지불한 대가는 매우 컸지만 심미경이 살아있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미경 씨, 만약 내가 이혼하고 싶지 않다면요?”남자는 피곤한 목소리로 말했다. 밤새 잠을 못 잔 것 같았다. 말투는 한없이 비굴하고 애달팠다.예전 같았으면 심미경은 분명 마음이 약해졌을 것이다.하지만 더 이상 예전의 그녀가 아니다. 이제 가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아이도 없고 건강한 신체마저도 없다. 게다가 합법적인 남편은 범인의 도주를 도왔다. 신이 아닌 이상 이 모든 것을 알고도 모른 척 용서할 수 없었다.이를 악문 심미경은 단호한 말투로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처음부터 이혼하고 싶지 않았다면 애초에 강이진을 도와 진실을 숨기지 않았겠죠. 결국 내가 죽든 살든 이찬 씨는 별 관심이 없었던 거예요. 그게 아니면 내가 이찬 씨를 사랑하는 것을 너무 잘 아니까 나에게 어떤 짓을 하든 무조건 용서할 거라고 생각했겠죠. 강이찬 씨, 당신이 너무 밉지만 그런 당신을 사랑한 나 자신이 더 미워요. 당신을 알게 된 것 자체를 후회하고 있고요, 원주에서 같이 대제주시로 돌아온 것이 너무 후회돼요.”만약 그때 마음이 약해지지 않았더라면 두 사람은 벌써 끝났을 것이다. 엄마의 말을 들어야 했었다. 아이를 지우고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든 동시통역 자격증을 따든 무엇이든 해야 했다. 굳이 사서 고생하며 강이찬의 아내가 될 필요가 없었다. 강이찬에게 시집가는 것이 인생에서 가장 큰 행운이고 제일 행복한 일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인제 보니 그와 결혼하는 것은 나락으로 가는 시작이었다.“미경 씨, 어느 병원이에요? 내가 당장 갈게요. 우리 얘기 좀 해요.”심미경은 울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혼하기 전에 다시는 볼 일 없을 거예요. 강이찬 씨, 시간 나면 같이 가정 법원에 이혼수속하러 가요. 4억 원의 예단비는 돌려주지 않을 거예요. 당신 여동생 때문에 내가 유산하고 더 이상 아이를 가질 수도 없게 되었으니 이 돈은 의료비와 위자료로 생각할게요.”“꼭 이혼해야겠어요?”“강이진의 도
육성일의 압도적인 기운은 전화 너머에서도 남초윤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말을 하지 않아도 그 묵직한 압박감은 느껴졌다. 그때 어떻게 그런 용기를 냈는지, 어떻게 육씨 집안에 시집갔는지 스스로도 의아했다. 만약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차라리 구걸을 하더라도 절대 육씨 집안에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남초윤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할아버지, 부탁드려요. 저희가 약속했던 건 두 달 전이었잖아요. 아직 두 달이 채 안 지났고, 제가 지금 아기를 가졌다고 해도 확인이 안 될 수도 있어요.” 그 말에 어느 정도 일리가 있었기에 육성일도 더는 말하지 않았다. 그렇게 할아버지의 전화를 겨우 넘겼지만 전화를 끊자마자 다시 핸드폰이 시끄럽게 울렸다. 이번엔 ‘개자식’ 육지율이었다. “...” 할아버지와 손자는 통화 시간까지 맞춘 것처럼 기가 막히게 연달아 전화를 걸어온다. 그녀는 냉랭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왜요?” 육지율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무슨 폭탄이라도 먹었어요?” 육지율이 자신의 책을 내리게 만들고, 지난달과 이번 달 원고료도 다 날려버린 상황에서 그녀가 전화를 받아준 것만으로도 기적이었다. 하지만 결혼 생활은 아직 유지 중이었고 필요한 것도 있으니 남초윤은 결국 목소리를 가다듬고 좀 더 부드럽게 말했다. “지율 오빠, 무슨 일이에요?” “... 뭐라고 불렀어요?” “지~율~오~빠~” 그녀는 유설영의 말투를 흉내 내며, 아니, 오히려 더 능숙하게 말했다. 육지율은 순간 닭살이 돋았다. “제발 평소처럼 말해요. 저녁에 내 친구가 귀국하는데 같이 식사해요. 6시에 잡지사로 데리러 갈게요.” 남초윤은 단번에 거절했다. “난 안 갈래요.” “저녁에 뭐 다른 약속 있어요?” 남초윤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결혼한 지 3년 됐지만 당신은 나한테 친구 한 명도 소개해 준 적 없잖아요.” 그리고 이제 곧 이혼할 텐데 친구를 만날 필요는 더 없었다.이혼하고 나서 친구들이
조유진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학교에서 누가 너 괴롭히진 않았어?” 배선유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응, 나 괴롭히는 사람 없어. 할아버지가 우리 학교에 엄청난 돈을 기부하셔서 선생님들도 항상 나한테 잘해주시고 많이 관심 해주셨어. 그래서 나도 함부로 장난칠 수가 없어. 혹시 선생님이 할아버지한테 이르실까 봐.” 배현수는 이 말에 전혀 놀라지 않았다. 배선유는 작은 악동처럼 말이 많았고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는 아이였다. 배현수의 말에도 자주 대꾸를 하니, 만약 동급생에게 괴롭힘을 당했다면 벌써부터 떠벌렸을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남을 괴롭히는 쪽에 더 가까웠다. 성남에서 엄준은 배선유를 엄청나게 아끼며 키웠고, 그래서인지 아이는 주눅이 들지 않고 활발하게 자랐다.조유진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다행이네. 우리 선유가 공부를 게을리할 걱정은 없겠어.” 배현수는 딸을 겁주듯 말했다. “너 공부 안 하고 일찍 연애라도 시작하면, 널 대제주에 데려와서 24시간 동안 지켜볼 거야.” 배선유는 입술을 내밀며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 이건 너무 심해요! 나 혹시 쓰레기통에서 주워 온 거 아니에요?” 배현수는 코웃음을 치며 엄격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말했다. “공부 안 하면 좋은 날은 없을 거야.” 잠시 후, 학교 종이 울릴 시간이 가까워졌다. 배선유는 전화를 끊으려다가 친구가 그린 결혼사진 두 장을 영상 속으로 건네받았다. “선유야! 너랑 지우의 결혼사진 내가 그려놨어! 한 번 봐봐!” 배선유가 물었다. “한 장에 얼마야?” “너니까 공짜로 해줄게! 대신 다음번엔 나랑 결혼해 줄 수 있어?” “생각해볼게!” “...” 이 속도로라면 그들 부부는 도대체 몇 명의 사위를 맞이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한편, 스타라이트 매거진에서.남초윤이 사이트 편집자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 그녀의 책은 예상대로 플랫폼에서 삭제되었고 이달 원고료는 한 푼도 들어오지 않
[합법적 부부] 함께 올라온 사진엔 결혼반지를 낀 두 손이 하트 모양을 그리고 있었다. 이 게시글이 올라가자마자 마치 깊은 바다에 떨어진 폭탄처럼 큰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수많은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몰려들어 반응했다. 육지율: [8년의 여정 끝에 드디어 자랑할 수 있네!] 송하진: [어! 전 두 사람 목숨 구해준 은인이에요. 제가 아니었으면 두 사람이 어떻게 혼인신고까지 했겠어요? 당장 절 주빈으로 식사 대접해요!] 남초윤: [아아아아! 유진이를 결혼이라는 무덤 속으로 끌어들이다니! 대표님 너무하세요!] 엄창민: [내 여동생한테 잘해요. 혹시라도 괴롭히면 내 주먹이 용서 못 해요!] 엄명월: [형부! 이렇게 좋은 일에 저희한테 뭐라도 사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강이찬: [축하해, 결국 원하는 대로 됐네.] 심미경: [백년해로하세요. 행복하길 기원합니다!] 서정호: [대표님, 일 다 끝냈으면 빨리 돌아오세요. 의사 선생님이 여기서 엄청 화내고 있어요. 저 더는 못 버틸 것 같아요!] 학교 가기 싫어: [와! 아빠랑 엄마가 드디어 결혼했네요! 헤헷, 아빠, 나도 오늘 결혼했어요!] 배현수는 배선유의 댓글을 보고 순간 검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조유진이 운전하며 그의 미세한 변화를 눈치채고 물었다. “왜 그래요?” “선유가 결혼했다는데.” “뭐라고요?” 조유진은 깜짝 놀라 차를 도로 옆에 세우고 급히 배선유에게 영상 통화를 걸었다. 저쪽에서 배선유는 학교에 있었는데 마침 쉬는 시간이었다. 외국어 학교라 분위기가 자유로워 아이들은 평소에도 부모님과 연락을 하기 위해 휴대폰을 가지고 다녔다. 배선유는 전화를 받자마자 얼굴을 카메라 앞으로 들이밀었다. “엄마, 아빠! 나 사진 보고 싶어!” 조유진은 그녀에게 사진을 보여주고 나서 물었다. “선유야, 아까 결혼했다고 했잖아. 누구랑 결혼한 거야?” “우리 반 한지우랑! 엄마, 나 오늘 엄청 많은 축의금을 받았어! 내가 다 적어 놨어!”
조유진은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갈게요.” 그가 환자라는 사실을 떠올리며 이번 한 번은 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 다음 날 이른 아침. 서정호가 산성 별장에서 두 벌의 정장과 결혼 서류를 준비해왔다. 조유진은 오랜만에 풀 메이크업을 하고 머리도 고데기로 말았다. 그녀는 하얀 오프숄더 드레스를 입고 사진에 잘 나올 수 있도록 최대한 신경 썼다. 그녀는 한동안 이렇게까지 꾸미지 않았는데 하이힐을 신고 배현수 앞에 서니 그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조금 어색해졌다. 그래서 물었다. “나 어때요?” “아름다워. 넌 언제나 아름다워.” 배현수는 전혀 망설임 없이 그녀를 칭찬했다. 조유진은 웃음을 참으며 옆에 있던 넥타이를 집어 들고 배현수에게 매어주었다. 배현수는 그녀의 손길에 고개를 숙이며 협조했다. 조유진은 평소와 다르게 더 복잡하고 정중한 ‘엘드리지 매듭’으로 넥타이를 맸는데 배현수는 평소에 간단한 윈저 매듭만 했었다. “이 매듭은 좀 생소하네.” 조유진은 넥타이를 다 매고 나서 그의 셔츠와 정장 재킷의 깃을 정리해 주었다. “이게 엘드리지 매듭이라고 해요. 중요한 자리에서 어울리는 방식이죠. 어때요, 괜찮아요?” “멋져. 하지만 여보, 우리 서둘러야 해. 조금 있으면 의사가 올 거야.” 웃으며 농담하듯 이야기하던 배현수는 조유진의 외투를 챙겨 그녀의 어깨에 걸쳐 주고, 그녀를 한 손으로 감싸 병실을 몰래 빠져나갔다. 두 사람은 마치 도망치듯 병원을 빠져나와 차에 올랐다. ... 그들이 빠져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의사가 병실에 회진을 왔다. 하지만 환자와 보호자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고 그곳에는 ‘무관한 사람’만 남아 있었다. 의사는 엄숙한 표정으로 서정호를 보며 물었다. “환자는 어디 갔죠? 튜브까지 다 뽑다니, 누가 뽑았습니까?” 서정호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환자 본인이 뽑았습니다.” “도대체 어디 간 겁니까? 팔을 정말 망가지게 할 작정인가요
배현수의 가슴이 떨렸다. 그는 조유진과 이마를 맞대며 낮게 속삭였다. “그때 난 네 옆에 있진 않았지만 네 뒤에서 계속 지켜보고 있었어. 그런데 왜 울었어?” “현수 씨 생각이 났어요.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게 너무 슬펐거든요. 내가 이렇게 좋은 남자를 잃어버린 것 같아서, 그게 너무 아쉽고 후회스러웠죠. 그래서 울었어요.” 지금 이렇게 그를 바라보고 있으니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은 느낌이었다. 조유진의 눈에는 여전히 눈물이 맺혀 있었다. 하지만 이번 눈물은 슬픔이나 후회 때문이 아니었다. 감동과 감사함 때문이었다. 운명이 그들을 온갖 고난 속에서도 끝끝내 묶어 놓았고, 그들 사이에선 이제 더 이상 헤어질 수 없는 깊은 연대가 생겼기 때문이다. 배현수는 긴 손가락을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천천히 끼워 넣으며 손을 꼭 맞잡았다. 순간 그들의 손바닥에서 따뜻함이 퍼져나갔다. 그는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진아, 넌 한 번도 날 잃은 적 없어. 우리가 몇 번을 떨어져도, 얼마나 오랫동안 떨어져 있더라도 난 결국 널 찾아내서 꼭 안고 말해줄 거야. 사랑한다고. 오직 너만 사랑한다고.” 처음부터 끝까지, 조유진은 배현수의 유일한 선택이었고 그 선택은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었다. 조유진은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웃었다. “현수 씨, 우리 영원히 함께할 수 있을까요?” “그럼.” 그의 대답은 8년 전과 똑같았다. 짧지만 확고했으며 1초의 망설임도 없었다. 조유진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손목에 걸린 달콤한 연녹색 비취 팔찌를 내려다보았다. “상처가 나으면 우리 같이 아주머니를 위한 좋은 묘지를 고르러 가요. 그분을 위한 의관묘라도 만들어 드리는 게 어때요?” “아직도 ‘아주머니’라고 불러?” 조유진은 순간 얼굴이 뜨거워지며 말투를 바꿨다. 배현수는 그녀의 팔찌를 손가락으로 살며시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풍수 좋은 곳을 따로 고를 필요는 없어. 어머니께
육지율은 그 필명이 어딘가 익숙하다고 느꼈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문득 기억해 냈다. “이 자식! 기억났어! 이 녀석이 책에서 날 모욕하지 않았나? 내 명성을 망가뜨렸잖아?” 남초윤은 급하게 말했다. “잘못 본 거 아니에요? 비엘 작가가 주인공을 모욕할 리가 없어요! 그러면 밥숟가락 들고 욕하는 것과 뭐가 다르겠어요?” “나를 ‘수’로 묘사한 게 모욕이 아니고 뭐예요? 왜 항상 배현수가 공이냐고?” 남초윤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는 그 부분을 신경 쓰고 있었던 거였다.남초윤은 그가 진짜 작가를 고소할까 봐 걱정되었다. 그래서 변명하듯 말했다. “다음번엔 지율 씨가 공이고, 배 대표님이 수가 될 수도 있잖아요. 원래 BL 소설에서는 공수 구분이 모호해요. 겉보기에 수 같아도 사실은 공일 수도 있다고요!” 조유진은 살짝 의문을 제기했다. “난 현수 씨가 수 같지는 않았는데. 만약 현수 씨가 진짜 수라면 캐릭터 붕괴지. 차라리 육 변호사님이 수인 게 더 어울려. 자유롭고, 매력적이고, 다정하잖아.”“?”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육지율은 얼굴이 시커멓게 변하며 조유진에게 따졌다. “아니, 조유진. 내가 약해 보이는 수 같은 느낌을 준다고?” “...” 배현수는 차갑게 말했다. “유진이가 쓴 것도 아닌데 왜 화내? 그럴 시간 있으면 작가나 고소해.” 남초윤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 그냥 재미로 쓴 거지 무슨 큰 잘못을 한 것도 아니잖아요? 작가를 고소하면 너무 쪼잔해 보일 거예요!” 하지만 육지율은 이성을 잃고 이를 악물었다. “쪼잔해 보이든 말든, 그 책을 하차할 거예요!” 자신이 소설 속에서 수 역할로 묘사되었고, 그것도 많은 사람에게 읽히고 있다는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돋았다. 조유진은 객관적으로 말했다. “사실 책 내용은 나쁘지 않아요. 꽤 재미있고 독자도 많아요.” “독자가 몇 명인데?”“몇만 명 정도?” “뭐?”‘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날 수로 상상했
병실에서 조유진은 그가 누워있는 침대 옆에 앉아 있다가 잠들었다. 잠에 들어서도 손가락이 배현수의 손에 살짝 얽혀 있었는데 다정하고 달콤하기 그지없었다. 이 사진은 완전히 남자 친구 시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입원 생활이 지루하다고 하다니.육지율이 댓글을 남겼다. “뭐야, 입원했어? 혹시 가정 폭력이라도 당한 거야?” 댓글을 남기고 나서 육지율은 차에 시동을 걸며 남초윤에게 말했다. “과일 바구니 좀 사서 병문안이나 가요. 친구가 입원했어요.” “친구? 설마 배 대표님이세요? 어디 아파요?” 육지율은 웃으며 말했다. “글쎄요. 진짜 아플 수도 있고 그냥 꾀병일 수도 있고.” 혹시 모른다. 꾀병일지도....병원에서는 조금 전 장은숙이 산성 별장에서 저녁 식사를 가져왔다. 수술 후 얼마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 밤은 죽 같은 유동식만 먹어야 했다. 배현수는 오른손을 쓸 수 없었기에 조유진이 죽 그릇을 들고 숟가락으로 그에게 먹여주고 있었다. 첫 숟가락을 그의 입 앞에 가져가자 배현수는 뜨겁다고 투덜댔다. 조유진이 후후 불어 온도를 맞춘 후 말했다. “이제 적당히 식었어요.” 배현수는 그제야 죽을 한 입 삼켰다. 그 순간 병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장난스러운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며칠 못 본 사이에 아기로 됐네? 밥도 혼자 못 먹고, 조유진이 널 너무 오냐오냐한 거 아냐?” 조유진이 놀라서 뒤돌아보니, 육지율과 남초윤이 병실에 들어와 있었다. 그녀는 웃으며 설명했다. “오른쪽 어깨에 부상을 입었어요. 의사 선생님이 며칠 동안 오른손은 쓰지 말라고 하셨어요. 상처가 더 심해질 수 있거든요.” 그러자 육지율은 다짜고짜 그의 오른쪽 어깨를 툭 쳤다. “진짜야?” 배현수는 고통에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욕설을 퍼부었다. “이 미친놈아!” 조유진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변호사님, 진짜로 다쳤다니까요! 어깨에 구멍이 났다고요, 함부로 건드리지 마세요!
그녀를 겨우 한 번 데리러 온 김에 출퇴근길의 불편함을 느끼고는 아예 차를 사서 해결하려고 하다니, 정말 육지율 다운 방식이었다.이 4S 매장에서 파는 차들은 모두 포르쉐였고 가격도 만만치 않았다. 가장 저렴한 모델도 수천억 원대였다. 남초윤은 이미 남씨 집안이 육지율에게 너무 많은 빚을 지고 있었기에, 그가 차를 선물해 주겠다고 해도 받을 수 없었다.남초윤은 차분히 말했다. “앞으로는 출퇴근 길에 당신을 귀찮게 하지 않을 테니, 굳이 차를 선물할 필요는 없어요.”육지율은 순간 멈칫했다가 살짝 비웃으며 말했다. “차 한 대 선물한다고 귀찮다는 딱지가 붙어요? 이런 확산적 사고방식은 참 대단하네.”“....”정말 그런 게 아니란 말인가?평소에도 성격이 불 같았던 육지율은 차를 주겠다고 하면서도 그녀를 달래는 상황이 우스웠는지 어이없어 웃었다. 둘 중 누가 더 성격이 나쁜지 모를 일이었다.영업 직원은 남초윤을 육지율이 외부 애인으로 오해했고, 이 큰 거래가 깨질까 봐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가씨, 변호사님께서 차를 사주시는 건 출퇴근 시간을 줄여서 그 시간 동안 조금이라도 더 쉴 수 있게 해주려는 마음이 아닐까요?”남초윤은 더 이상 그의 돈을 쓰고 싶지 않았다. 이미 갚을 수 없는 빚이 너무 많았고 계속해서 더 쓴다면 두 아이를 낳아야 겨우 그 빚을 다 갚을 수 있을 것 같았다.그러나 육지율은 그 여느 때처럼 행동했다. 그는 VIP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빨리 골라요. 차 안 사면 집에 못 돌아가요.”남초윤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여자 영업 직원이 다가와 다양한 모델을 소개할 때, 그저 듣기만 했다. 그 직원은 미소를 띠며 말도 아주 달콤하게 했다. “변호사님은 저희 매장의 단골이세요. 그런데 여자를 데리고 온 건 이번이 처음이네요. 변호사님이 정말로 많이 아끼시는 것 같아요. 비싼 차를 고르시면 아마 더 기뻐하실 거예요.”역시, 판매왕이었다.감정적 가치를 제공하는 법을 너무나 잘 아는 직원이었다. 하지만 남초윤은 그저 외부의
남초윤은 결혼 상태를 한 번도 업데이트한 적이 없었다. 동료들 눈에는 여전히 미혼으로 보였다.처음 그녀와 육지율의 스캔들이 터졌을 때 온 세상이 떠들썩했지만 사실 모두 육지율의 매력적인 외모 때문이었다. 아무도 남초윤처럼 작고 평범한 존재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육지율이 그녀와 결혼하기로 결정했을 때 그들의 침대 사진이 언론이나 남재원에게 유출되지 않은 것도 기적이었다. 사람들은 그저 육지율이라는 유명한 바람둥이가 ‘함정'에 빠져 순진한 여자와 관계를 맺은 후, 마지못해 결혼했다는 소문만 믿고 있었다.육지율이 연예계 인물이 아닌 만큼 동료들 중에서도 아무도 그 사건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육지율이 ‘좋은 집안의 아들’ 이라는 사실만 기억하고 그의 결혼 상대가 누군지에는 무관심했다. 그녀는 어디에도 크게 드러나지 않았고 언론에서도 그의 곁에 서는 일이 거의 없었다. 남초윤은 그렇게 세상 사람들의 눈에 숨겨져 있었다.동료들은 그저 그녀가 조금 집안 배경이 있는 부유한 여자인 줄로만 알았고 육지율의 아내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어쨌든 육지율의 아내라면 아무리 상황이 나빠도 그들과 같이 일하며 고생할 일은 없을 테니까. 설령 과거에 파파라치 일을 했더라도 그렇게 높은 곳에 시집갔다면 육씨 집안이 그녀를 계속 그 일을 하도록 놔두지 않았을 거라고 여겼다.비록 세상은 모두 직업의 평등을 외치고 있지만 상류 사회에는 여전히 그들만의 규칙이 있었다. 체면과 명예가 그들의 신분과 존엄을 상징했다. 파파라치라는 직업은 육씨 집안에게 있어 절대 자랑스러울 수 없는 일이었으니, 육지율과 강란희가 그녀에게 좀 더 체면 있고 유망한 직업들을 제안했지만 남초윤은 그들의 호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그렇게 시간을 보낸 끝에 동료들은 하나둘씩 퇴근하고 남초윤만 남았다. 한 시간이 흐른 뒤 남초윤은 휴대폰 화면을 확인했다. 저녁 7시가 되었다. 그녀는 통화 기록을 훑어보고 다시 한 번 메시지를 확인했지만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아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