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부경 산장의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게 갰다.결혼식은 야외 잔디밭에서 진행될 예정이었다.부경 산장의 잔디밭은 전문 인력이 관리하고 있어 겨울에 접어드는 11월에도 색이 바래지 않아 사진이 잘 찍혔다.한 무리의 사람이 결혼식장에 도착했다.남초윤은 조유진과 선유와 같이 산장 주변을 돌아보며 사진을 여러 장 찍은 후 결혼식장의 디저트 테이블 근처로 돌아와 술잔을 기울였다.야외 결혼식장에 은은한 바이올린 소리가 울려 퍼졌고 장미 꽃잎이 바닥에 깔려 있었다.남초윤은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이상하네? 강이찬의 결혼식인데 왜 소란 피우기 좋아하는 여동생이 안 보이지? 이렇게 큰 행사에 얼굴 드러내는 거 좋아하지 않았어?”“분장실에서 도와주고 있겠지.”그 말에 남초윤이 코웃음을 쳤다.“걔가 돕긴 뭘 도와. 말썽만 안 부리면 다행이지. 결혼식에 오지 않은 것 같은데? 분명 무슨 일이 생긴 게 틀림없어!”조유진은 별생각 없이 샴페인 잔을 들고 마시려던 참이었다.이때 남초윤이 그녀의 잔을 확 낚아채며 말했다.“유진아, 무슨 생각하는 거야? 이건 술이야! 넌 마시면 안 돼.”결혼식이었지만 조유진은 기분이 다운되어 있었다. 멀찍이 서서 술잔을 든 채 육지율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배현수를 본 남초윤은 조유진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내일 정말 성남에 가는 거야? 다시 얘기해 볼 생각 없어? 그동안의 감정이 아깝지도 않아?”조유진은 억지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깨진 거울은 절대 다시 붙일 수 없나 봐. 다시 붙인다고 해도 그 흔적이 남으니까. 서로 너무 오랫동안 시간만 지체한 것 같아. 이제 정말 인연이 끝난 것 같아. 우스운 얘기기는 한데 사실 7년 동안 우리는 한 번도 같이 있은 적이 없어. 그래서 그런지 지금 헤어져야 정상이라는 생각까지 들어.”너무 많은 것들을 오랫동안 잃어버리면 없는 것에 습관이 되고 그런 상태가 일상이 되어버린다. 그러면 저도 모르게 이 감정을 가질 자격이 없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결혼식장
심미경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전화기 너머로 중년여성의 기세등등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당신 누구야? 급한 일이 있으니까 강이찬 좀 바꿔. 직접 나와서 해결하지 않으면 경찰서에 가서 여동생을 폭로해 버릴 수밖에 없어!”심미경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저는 강이찬 씨의 아내입니다. 누구세요? 이찬 씨를 왜 찾는 거죠?”맞은편에는 중년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표준 서울 발음이 아닌 사투리가 억세게 들렸다.“아, 그러니까 당신이 강이진의 시누이야? 누구든 상관없어. 돈만 받으면 되니까! 아직 1억이 남았는데 왜 안 갚는 거야? 전화도 안 되고 문자를 해도 답장이 없어. 어디 도망간 거 아니야?”심미경은 들으면 들을수록 아리송했다.“당신 대체 누구예요? 이진이가 도대체 무슨 일을 저질렀는데요?”설마 이진이가 도박 빚이라도 졌단 말인가?전화기 너머의 장순자는 언성을 높이며 말했다.“강이진! 그 년이 내 남편을 사주해 교통사고를 내게 했어. 감옥에 들어가 2년 동안 감옥살이를 하게 생겨 입막음 비용으로 우리에게 2억을 주겠다고 했어. 그런데 지금 1억밖에 못 받았어. 당신들이 강이진 대신 이 돈을 갚지 않으면 당장 경찰서에 가서 신고할 테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심미경은 잠시 멍해졌다.“혹시 전화 잘못 거신 거 아니에요?”“잘못 건 거 아니야! 강이진의 오빠가 강이찬이잖아? 맞지? 발뺌할 생각하지 마! 2억은 당신 같은 사람들에게 껌값이잖아.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돈을 보내야 할 거야. 안 그러면 절대 가만있지 않을 테니까! 교통사고는 내 남편이 다 뒤집어썼어. 물론 내 남편은 음주운전에 그치긴 했지만 강이진 그 년은 살인 미수야! 누구의 형이 더 무거울지 잘 생각해 봐!”교통사고?음주운전?살인 미수?강렬한 불안감이 온몸을 휘감았다.심미경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겨우 부여잡으며 말했다.“당신 남편 이름이... 뭐예요?”“황인구!”순간 뇌 정지가 된 듯 머릿속이 윙윙 소리가 났다.황인구? 황인구...심미경의 교통사고도 황인구라는 사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나간 후 분장실에는 심미경과 강이찬만 남았다.심미경은 화장대를 짚고 천천히 일어섰다.두 다리가 후들거려 지탱할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강이찬이 부축해 주지 않았더라면 분명 넘어졌을 것이다.“미경 씨.”강이찬의 손을 덥석 잡은 그녀는 시뻘게진 눈시울로 심문하듯 물었다.“강이진 짓이에요?”긴 침묵이 흐른 후, 강이찬이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말했다.“네, 이진이가 한 거예요. 어떻게 하면 직성이 풀릴까요? 말만 해요. 내가 바로 할 테니.”동공이 미세하게 떨린 심미경은 주위의 공기마저 희박하게 느껴져 숨조차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그러니까 강이진이 한 짓이라는 걸 진작 알았던 거예요?”또다시 긴 침묵이 흘렀다.심미경은 우는 얼굴로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당신네 남매의 눈에 내가 바보로 보여요? 매일 나를 죽이려 했던 살인범과 한 지붕 아래 살며 당신들에게 원숭이처럼 놀아나는 것을 보고 어땠어요? 기분이 좋았어요? 강이진 짓이라는 것을 진작 알았으면서 왜 나에게 말하지 않았어요? 친동생을 감싸기 위해 평생 저를 속일 생각이었어요?!”강이찬은 강이진의 어깨를 잡으며 다급히 해명했다.“자수하라고 했어요. 그런데 자살하겠다느니 뭐라느니 하면서 나를 협박해서 저도 모르게 마음이 약해졌어요. 그래서...”심미경은 강이찬의 말을 끊었다.“강이진, 지금 어디 있어요? 방금 장순자 말로는 도망갔다고 하던데 오늘 결혼식에 안 온 것을 보면 벌써 도망갔나 보네요?”“이미 대선국에 갔을 거예요.”“하하... 강이진이 도망간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냥 내버려 뒀다고요? 강이찬 씨! 교통사고 때문에 우리 아이가 죽었어요! 나는 그것도 모르고 바보같이 운전을 제대로 못 한 내 탓이라고 생각해 얼마나 자책했는지 알아요? 매일같이 악몽을 꿨다고요. 꿈에서 강이진이 칼을 들고 내 배를 찔렀어요. 이것도 내가 생각이 많아서 이런 꿈을 꾼 줄 알고 감히 이찬 씨에게 말도 못 했어요! 그런데 이제야 알 것 같네요. 왜 이런 꿈을 꾸었는지.”강이
심미경은 웨딩드레스를 갈아입을 겨를도 없이 치맛자락을 들고 비틀거리며 뛰어나갔다.강이찬은 넋이 나간 듯 멍하니 자리에 서 있었고 눈시울은 시뻘게졌다.다이아몬드 반지가 ‘딸가닥’ 소리를 내며 손바닥에서 미끄러져 바닥에 떨어졌다.심미경과 완전히 끝났다.마당에서 한창 음식을 먹던 남초윤이 무심코 고개를 들었을 때 하얀 그림자가 산장 뒤뜰로 사라지는 것을 발견했다.“저기 저 사람 신부 아니야? 왜 도망가는 거지?”조유진도 얼떨떨한 얼굴로 남초윤이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봤다. 아니나 다를까 진짜로 심미경이 뛰어가고 있었다.“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남초윤은 잔뜩 호기심이 생겼다.“강이찬이 또 무슨 짓을 했기에 심미경이 결혼식 날 도망가게 만들어?”결혼식 참석 하객들이 모여 분위기가 한껏 달아올랐을 때 신랑 측 비서가 앞으로 걸어 나오며 말했다.“죄송합니다. 여러분, 오늘 결혼식에 문제가 생겨 예정대로 진행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음식은 예정대로 마련될 것이니 마음껏 드시고 즐기다가 가세요. 다시 한번 죄송합니다.”...흰색 벤츠 한 대가 미친 듯이 부경 산장을 빠져나오고 있었다.차 안에 있는 심미경은 운전대를 꽉 잡고 가속페달을 힘껏 밟았다.눈물이 시야를 가려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혼자 있는 차 안에서 그녀는 큰 소리로 통곡했다. 오랫동안 운전을 하지 않았고 지난번 교통사고 이후로 함부로 운전대를 잡지도 않았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흰색 벤츠는 마치 거침없는 맹수처럼 앞으로 달려나가고 있었다.뒤에 검은색 벤틀리가 미친 듯이 경적을 울리며 쫓아왔다.강이찬의 차였다.휴대전화는 계속 울렸지만 그녀는 받을 생각이 없었다.부경 산장은 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어 가끔 길에 화물을 운반하여 산으로 올라가는 대형 화물차가 오가고 있었다.흰색 벤츠가 코너를 도는 순간 큰 트럭과 마주쳤고 날카로운 경적이 조용한 산길에 울려 퍼졌다.끼익!곧이어 급정거하는 소리와 함께 바퀴가 바닥에 마찰되며 검은색 타이어 자국을 몇 줄 그
강이찬은 심미경의 입에서 ‘이혼’이라는 단어가 나올 줄 몰랐다.깜짝 놀란 강이찬은 다급히 그녀를 잡고 말했다.“미경 씨, 강이진의 일이라면 나는...”심미경은 눈시울을 붉히며 웃었다. “강이진이 우리 아이를 죽였어요. 강이찬 씨, 어떻게 범인을 그냥 내버려 둘 수가 있어요?”“옥상에서 뛰어내리겠다고 협박하는 바람에 잠시 마음이 약해졌어요...”잠시 마음이 약해졌다고?하...강이진이 교통사고를 사주해 임산부를 차에 치이어 죽이려 했을 때는? 약해진 마음 따위 없었을 것이다. 차 안에 앉아 있는 심미경의 얼굴에는 눈물이 계속 흘러내렸다. 하지만 가슴 가득 찬 분노에 사지가 굳고 마비되어 몸을 쉽게 움직일 수도 없었다. 그녀는 온 힘을 다해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최대한 차분함을 유지하려 했지만 떨리는 목소리는 감출 수 없었다.“강이찬 씨, 나와 결혼하려 한 이유가 나를 사랑해서예요? 아니면... 미안해서예요?”강이찬은 멍하니 서 있었다.그녀를 보며 입을 벌렸지만 목구멍에 가시가 돋친 듯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사랑 때문인지 죄책감 때문인지 그도 헷갈렸다.그저 망설일 뿐이었다.‘나를 사랑하냐'는 질문에 3초 동안 답을 하지 못한 것이 어쩌면 최선의 답이었다.눈을 꼭 감은 심미경의 얼굴에 또다시 뜨거운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혼전임신으로 아이를 위해 멀리 원주까지 쫓아온 강이찬이었다. 큰비 속에 서서 자기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달라고 했다.그래서 마음이 약해졌다. 그때, 분명 천천히 좋아지리라 생각했다.강이찬의 마음에 조금씩 자리 잡아 뿌리를 내리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이는 강이진 때문에 죽었고 그녀는 죽을 고비를 겨우 넘기고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하지만 강이찬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 강이진이 살인자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대로 내버려 뒀다. 아무리 바보라고 해도 이제 이 꿈에서 깨야 했다.“강이진이 왜 나를 죽이려 했는지 알아요?”강이찬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다 생각났어요?”“아마 하늘도 강이진의 행동을 더
남의 결혼식 소란에 별 관심이 없던 조유진은 선유를 데리고 자리를 뜨려 했다. 이때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다.전화를 건 사람은 엄창민이었다.조유진은 배현수 앞에서 직접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 창민 오빠?”“환희야, 아버지가 갑자기 쓰러져서 응급실에 실려 왔어. 의사 말로는 심근경색이라 상황이 별로 안 좋대. 얼른 성남에 와야 할 것 같아.”조유진은 인상을 찌푸렸다.“알겠어요. 바로 비행기 표 예매할게요.”전화를 끊은 조유진의 얼굴에 걱정과 불안함이 역력했다.그러자 옆에 있던 배현수가 물었다.“무슨 일이야?”“엄 어르신이 갑자기 쓰러져 상황이 안 좋대요. 바로 성남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아요.”처음부터 심미경의 결혼식만 끝나면 성남으로 돌아가기로 했었다.심미경의 결혼식에 이런 소란이 생겼으니 결혼식도 끝난 셈이었다.오늘 밤, 늦은 시간 성남에 간다고 해도 그저 계획보다 하루 앞당겨졌을 뿐이었다.애틋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던 배현수는 이내 감정을 추스렸다.“그래, 산성 별장으로 돌아가 짐을 싸. 내가 데려다줄게.”“아니에요. 요즘 안 그래도 여론에 시달리고 있는데 직접 배웅 안 해줘도 돼요. 내가 선유와 같이...”“너는 괜찮다고 해도 선유가 걱정돼서 그래.”말뜻인즉슨 선유가 걱정되어 데려다주겠다는 뜻이었다.말투가 강압적이어서 차마 뭐라고 할 수도 없었다.조유진도 더 이상 반박하지 않았다.서정호는 저녁 8시 비행기 표로 예약했다.공항으로 가는 길, 오롯이 선유만 신났을 뿐이었다. 아이에게는 그저 즐거운 여행이었다.“엄마, 성남은 대제주시와 똑같이 생겼어?”대제주시의 사람들은 대부분 호탕하고 시원시원한 편이라면 성남의 사람들은 외유내강의 스타일로 화려하고 낭만적이었다.“아니, 많이 달라.”기후나 도시 분위기 모두 완전히 달랐다.“그럼 엄마는 대제주시가 좋아, 아니면 성남이 좋아?”갑자기 묻는 선유의 말에 조유진은 머뭇거렸다. 그러다가 옆에 있는 남자의 옆모습을 흘끗 쳐다보고는 일부러 약 올리려는 듯 한마디 했다
혼전 검사 결과를 손에 쥔 심미경은 병원 건물에서 터벅터벅 걸어 나왔다. 의사의 말이 계속 귓가에서 맴돌았다.“심미경 씨, 교통사고로 유산을 하면서 자궁이 많이 다쳤어요. 아마 앞으로 임신할 수 없을 가능성도 있어요. 임신해도 태아로 성장하기 어려울 거고요. 혼전 검사 결과하신 것을 보면 앞으로 아이를 가질 계획이 있는 거죠?”창백한 얼굴로 차에 탄 심미경은 ‘쾅’하고 차 문을 세게 닫았다.보고서를 꽉 움켜쥔 심미경은 어느새 눈시울이 시뻘게졌고 눈가에는 그동안 참았던 눈물이 차올랐다.이때 핸드폰이 울렸다. 강이찬에게서 전화가 걸려온 것이었다.‘통화’버튼을 누른 심미경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상대방이 먼저 입을 열기를 기다릴 뿐이었다.몇 초간 침묵하던 강이찬도 말 못 할 사정이 있는 듯 몇 번이나 머뭇거리더니 겨우 입을 열었다.“미경 씨, 어디예요?”“병원이요.”그녀의 쉰 목소리를 들은 강이찬은 바로 긴장한 말투로 물었다.“어디 아파요? 어느 병원인데요? 내가 바로 갈게요.”“아픈 데 없어요. 혼전 검사 결과를 확인하기 위해 병원에 온 거예요.”애써 울음을 참았지만 목소리는 이미 많이 떨리고 있었다.전화기 너머의 강이찬은 그녀의 이상한 목소리를 바로 알아챘다. 그녀가 왜 이러는지도 아는 듯했다.강이찬이 무엇인가 말하려고 할 때, 심미경이 물었다.“내가 혼전 검사를 받으러 오지 않았다면 언제까지 나에게 숨길 생각이었어요?”전화기 너머로 잠시 침묵이 흘렀다.강이찬이 목을 가다듬더니 천천히 말하기 시작했다.“교통사고 때문에 원기가 많이 상하고 몸도 아직 회복이 안 돼서 말할 수가 없었어요. 몸이 좀 나아지고 결혼식이 끝나면 적절한 타이밍을 봐서 말하려고 했어요.”“내가 힘들어할까 봐 말을 하지 않은 거예요? 아니면 강이진을 원망할까 봐예요?”“그때는 저도 교통사고가 이진이와 연관이 있다는 것을 몰랐어요.”심미경은 조롱하듯 피식 웃었다. “이제 알았잖아요. 강이진 때문에 내가 유산을 했고 앞으로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것도
지불한 대가는 매우 컸지만 심미경이 살아있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미경 씨, 만약 내가 이혼하고 싶지 않다면요?”남자는 피곤한 목소리로 말했다. 밤새 잠을 못 잔 것 같았다. 말투는 한없이 비굴하고 애달팠다.예전 같았으면 심미경은 분명 마음이 약해졌을 것이다.하지만 더 이상 예전의 그녀가 아니다. 이제 가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아이도 없고 건강한 신체마저도 없다. 게다가 합법적인 남편은 범인의 도주를 도왔다. 신이 아닌 이상 이 모든 것을 알고도 모른 척 용서할 수 없었다.이를 악문 심미경은 단호한 말투로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처음부터 이혼하고 싶지 않았다면 애초에 강이진을 도와 진실을 숨기지 않았겠죠. 결국 내가 죽든 살든 이찬 씨는 별 관심이 없었던 거예요. 그게 아니면 내가 이찬 씨를 사랑하는 것을 너무 잘 아니까 나에게 어떤 짓을 하든 무조건 용서할 거라고 생각했겠죠. 강이찬 씨, 당신이 너무 밉지만 그런 당신을 사랑한 나 자신이 더 미워요. 당신을 알게 된 것 자체를 후회하고 있고요, 원주에서 같이 대제주시로 돌아온 것이 너무 후회돼요.”만약 그때 마음이 약해지지 않았더라면 두 사람은 벌써 끝났을 것이다. 엄마의 말을 들어야 했었다. 아이를 지우고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든 동시통역 자격증을 따든 무엇이든 해야 했다. 굳이 사서 고생하며 강이찬의 아내가 될 필요가 없었다. 강이찬에게 시집가는 것이 인생에서 가장 큰 행운이고 제일 행복한 일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인제 보니 그와 결혼하는 것은 나락으로 가는 시작이었다.“미경 씨, 어느 병원이에요? 내가 당장 갈게요. 우리 얘기 좀 해요.”심미경은 울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혼하기 전에 다시는 볼 일 없을 거예요. 강이찬 씨, 시간 나면 같이 가정 법원에 이혼수속하러 가요. 4억 원의 예단비는 돌려주지 않을 거예요. 당신 여동생 때문에 내가 유산하고 더 이상 아이를 가질 수도 없게 되었으니 이 돈은 의료비와 위자료로 생각할게요.”“꼭 이혼해야겠어요?”“강이진의 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