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전 검사 결과를 손에 쥔 심미경은 병원 건물에서 터벅터벅 걸어 나왔다. 의사의 말이 계속 귓가에서 맴돌았다.“심미경 씨, 교통사고로 유산을 하면서 자궁이 많이 다쳤어요. 아마 앞으로 임신할 수 없을 가능성도 있어요. 임신해도 태아로 성장하기 어려울 거고요. 혼전 검사 결과하신 것을 보면 앞으로 아이를 가질 계획이 있는 거죠?”창백한 얼굴로 차에 탄 심미경은 ‘쾅’하고 차 문을 세게 닫았다.보고서를 꽉 움켜쥔 심미경은 어느새 눈시울이 시뻘게졌고 눈가에는 그동안 참았던 눈물이 차올랐다.이때 핸드폰이 울렸다. 강이찬에게서 전화가 걸려온 것이었다.‘통화’버튼을 누른 심미경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상대방이 먼저 입을 열기를 기다릴 뿐이었다.몇 초간 침묵하던 강이찬도 말 못 할 사정이 있는 듯 몇 번이나 머뭇거리더니 겨우 입을 열었다.“미경 씨, 어디예요?”“병원이요.”그녀의 쉰 목소리를 들은 강이찬은 바로 긴장한 말투로 물었다.“어디 아파요? 어느 병원인데요? 내가 바로 갈게요.”“아픈 데 없어요. 혼전 검사 결과를 확인하기 위해 병원에 온 거예요.”애써 울음을 참았지만 목소리는 이미 많이 떨리고 있었다.전화기 너머의 강이찬은 그녀의 이상한 목소리를 바로 알아챘다. 그녀가 왜 이러는지도 아는 듯했다.강이찬이 무엇인가 말하려고 할 때, 심미경이 물었다.“내가 혼전 검사를 받으러 오지 않았다면 언제까지 나에게 숨길 생각이었어요?”전화기 너머로 잠시 침묵이 흘렀다.강이찬이 목을 가다듬더니 천천히 말하기 시작했다.“교통사고 때문에 원기가 많이 상하고 몸도 아직 회복이 안 돼서 말할 수가 없었어요. 몸이 좀 나아지고 결혼식이 끝나면 적절한 타이밍을 봐서 말하려고 했어요.”“내가 힘들어할까 봐 말을 하지 않은 거예요? 아니면 강이진을 원망할까 봐예요?”“그때는 저도 교통사고가 이진이와 연관이 있다는 것을 몰랐어요.”심미경은 조롱하듯 피식 웃었다. “이제 알았잖아요. 강이진 때문에 내가 유산을 했고 앞으로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것도
지불한 대가는 매우 컸지만 심미경이 살아있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미경 씨, 만약 내가 이혼하고 싶지 않다면요?”남자는 피곤한 목소리로 말했다. 밤새 잠을 못 잔 것 같았다. 말투는 한없이 비굴하고 애달팠다.예전 같았으면 심미경은 분명 마음이 약해졌을 것이다.하지만 더 이상 예전의 그녀가 아니다. 이제 가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아이도 없고 건강한 신체마저도 없다. 게다가 합법적인 남편은 범인의 도주를 도왔다. 신이 아닌 이상 이 모든 것을 알고도 모른 척 용서할 수 없었다.이를 악문 심미경은 단호한 말투로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처음부터 이혼하고 싶지 않았다면 애초에 강이진을 도와 진실을 숨기지 않았겠죠. 결국 내가 죽든 살든 이찬 씨는 별 관심이 없었던 거예요. 그게 아니면 내가 이찬 씨를 사랑하는 것을 너무 잘 아니까 나에게 어떤 짓을 하든 무조건 용서할 거라고 생각했겠죠. 강이찬 씨, 당신이 너무 밉지만 그런 당신을 사랑한 나 자신이 더 미워요. 당신을 알게 된 것 자체를 후회하고 있고요, 원주에서 같이 대제주시로 돌아온 것이 너무 후회돼요.”만약 그때 마음이 약해지지 않았더라면 두 사람은 벌써 끝났을 것이다. 엄마의 말을 들어야 했었다. 아이를 지우고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든 동시통역 자격증을 따든 무엇이든 해야 했다. 굳이 사서 고생하며 강이찬의 아내가 될 필요가 없었다. 강이찬에게 시집가는 것이 인생에서 가장 큰 행운이고 제일 행복한 일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인제 보니 그와 결혼하는 것은 나락으로 가는 시작이었다.“미경 씨, 어느 병원이에요? 내가 당장 갈게요. 우리 얘기 좀 해요.”심미경은 울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혼하기 전에 다시는 볼 일 없을 거예요. 강이찬 씨, 시간 나면 같이 가정 법원에 이혼수속하러 가요. 4억 원의 예단비는 돌려주지 않을 거예요. 당신 여동생 때문에 내가 유산하고 더 이상 아이를 가질 수도 없게 되었으니 이 돈은 의료비와 위자료로 생각할게요.”“꼭 이혼해야겠어요?”“강이진의 도
성남, 고급 사립병원.혼수상태에 빠진 엄준은 고급 장비에 의지하여 숨을 쉬고 있었다.엄창민, 엄명월, 조유진과 친딸 백소미까지 한데 모였다.병실 밖에서 엄명월은 팔짱을 낀 채 말했다.“아버지가 너무 갑작스럽게 쓰러지셨어. 구체적인 이유를 아직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성행 그룹의 일은 한시도 늦출 수 없어. 회사 일은 나와 창민 오빠가 맡을게. 아버지가 깨어나면...”엄명월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백소미가 피식 웃었다.“명월 언니, 요 몇 년 동안 언니와 창민 오빠가 아버지의 오른팔이 되어 주었다는 것을 잘 알아요. 언니와 오빠가 저 대신 회사 일을 봐줘서 너무 고마웠고요. 하지만 아버지가 지금 이렇게 위독한데 빨리 새로운 후계자를 정해야 하지 않겠어요? 그러다가 회사 임원들이 마음을 못 잡고 소란을 피우면 어떡해요.”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던 엄명월은 시큰둥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새로운 후계자? 설마 너를 말하는 것은 아니지?”“나는 아빠의 유일한 친딸이에요. 법적으로 상속권이 있는 건 저뿐이고요. 물론 언니와 오빠가 갖고 있던 성행 그룹 주식은 건드리지 않을...”말이 끝나기도 전에 엄명월이 코웃음을 쳤다.“네가 아버지의 유일한 친딸이라고? 설령 그렇다고 해도 아버지의 숨이 붙어있는 한, 네가 성행 그룹의 권력을 잡는 일은 없을 거야. 백소미, 아버지가 갑자기 쓰러지신 거, 혹시 네가 한 짓이야?”“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내가 어떻게 친아빠를 해치겠어요? 수양딸인 언니야말로 혼란스러운 틈을 타 권력을 잡기 위해 아버지를 해친 거 아니에요?”엄명월은 손가락으로 백소미를 가리키며 말했다. “경고하는데 아빠라는 단어는 함부로 내뱉을 수 있을지 몰라도 말은 함부로 하는 거 아니야!!”엄창민이 나서서 그녀들의 싸움을 말렸다.“싸우려면 밖에 나가 싸워! 여기서 아버지의 휴식을 방해하지 말고!”백소미를 노려본 엄명월은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회사 일에 아마추어를 끌어들이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리고 아버지가 혼수상태에 빠진 원인도 아직
갑자기 심장마비라... 설마 드래곤 파에서 엄 어르신에게 손을 썼단 말인가?한편 엄창민은 한쪽에 서 있는 남자를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환희야, 저 사람... 좀 피해야 하는 거 아니야?”SY그룹과 성행 그룹은 협력 파트너 관계이기는 해도 사업이란 전쟁과도 같아서 오늘의 동지가 내일의 적이 될 수도 있었다. 게다가 SY그룹의 핵심 인물인 배현수가 엄준이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는 소식을 알고 있다. 만약 뒤에서 수작이라도 부리면 성행 그룹은 아주 불리한 상황에 처하게 될 것이다.이때 조유진이 말했다.“걱정할 필요 없어요.”하지만 배현수는 이미 그들의 이야기를 들은 듯했다. 그는 몸을 숙여 선유를 안더니 담담한 얼굴로 발걸음을 돌려 2층 테라스로 향했다.엄창민이 배현수를 꺼리는 것은 당연했다.배현수의 신분이 정말 특별하기 때문이다.엄준은 중환자실의 병상에 누운 채 가늘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중환자실의 유리창을 통해 엄준을 바라보고 있던 조유진은 가슴이 꽉 막혔고 왠지 모르게 마음이 무거웠다. 엄준은 그녀에게 부족했던 부성애를 아낌없이 주었다. 조유진에게 엄준은 비바람을 막아주는 산과 같은 존재였다. 그런데 이 산이 갑자기 무너져 버린 것이다.미처 감사하다는 말도 못 하고 그에게 보답도 못 했는데...옆에 서 있던 엄창민은 테라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배현수가 느닷없이 조유진을 성남으로 데려왔다.정말 희한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최근 SY의 행적에 대해 엄창민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어느 한 집단에서 SY를 노리고 있다는 말도 들었다. 하지만 배현수가 직접 조유진을 성남까지 데려다준 것은 정말 이례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테라스에 서 있는 배현수의 핸드폰이 울렸다.휴대폰 화면에는 대제주시에서 온 낯선 번호가 표시되었다.“여보세요?”“혹시 배 대표님이신가요?”전화기 너머로 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처음 듣는 듯한 목소리에 배현수가 물었다. “누구시죠?”“심미경입니다. 조유진 씨에게 전화했는데 안 받아서요.”그
심미경과의 통화가 끝나자마자 배현수는 바로 서정호에게 전화를 걸었다.“일주일 줄 테니 강이진을 찾아.”음흉한 그의 말투로 보아 강이진이 아마 큰일을 저질렀을 것이다.서정호가 물었다.“강 사장님에게 알릴까요?”“아니. 직접 내 앞에 데려오면 돼.”강이진이 정말로 살인자라면 강이찬은 그녀를 지킬 수 없을 것이다.사립병원에서 엄준의 상태를 확인한 사람들은 차를 몰고 엄씨 사택으로 돌아갔다.운전은 엄창민이 했고 배현수가 조수석에 조유진과 선유, 그리고 백소미는 뒷좌석에 앉았다.이 조합은 정말 이상하기 짝이 없었다. 물론 차 안 분위기는 이루 설명할 수 없을 만큼 기괴했다.이때 백소미가 먼저 입을 열었다.“유진 언니, 이번에 성남으로 돌아오신 김에 엄씨 사택에 오래 묵으실 건가요?”“아직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어르신이 혼수상태에 빠져 있어 당분간은 성남을 떠나지 못할 것 같아요.”운전석에서 차를 몰던 엄창민은 배현수를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환희는 원래부터 우리 엄씨 집안의 식구야. 그룹 내부에도 맡고 있는 일이 있고. 성남으로 온 것은 자기 집으로 돌아온 거야. 환희야, 집에 돌아왔으니 네가 편한 대로 있어. 너무 많은 생각하지 말고.”엄창민은 백미러로 조유진을 힐끗 바라봤다. 이 말은 조유진에게 한 말이었지만 배현수와 백소미에게 한 말이기도 했다.조유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 창민 오빠. 부탁드릴게요.”부탁드릴게요. 창민 오빠?귀를 찌르는 두 마디에 배현수는 왠지 너무 따끔했다.심지어 귀에 거슬릴 정도였다.배현수의 눈동자에 차가운 빛이 스쳐 지났고 안색은 한없이 어두웠다.배현수의 아킬레스건을 제대로 건드린 엄창민은 계속 웃으며 조유진에게 말했다.“네가 돌아온다는 말을 듣고 일부러 아주머니더러 방을 깨끗이 청소하라고 했어. 너와 선유가 자는 건 문제없을 거야. 그런데 배 대표님까지 따라오실 줄 모르고 게스트 룸을 준비하지 않았는데... 배 대표님, 어떻게...”배현수는 차가운 목소리로 그의 말을 끊었다.“나는 됐
”음... 아빠 하나 더 생긴다는 것은 저에게 사탕 사줄 사람이 한 명 더 있다는 거잖아요. 당연히 좋죠! 그런데 우리 아빠가 안 좋아할 거예요. 창민 아저씨는 정말 좋은 사람이지만 나는 우리 아빠가 더 좋거든요!”이 말에 엄창민은 웃으며 손을 들어 아이의 머리를 문질렀다.“선유가 생각보다 효녀네?”선유는 자신만만한 얼굴로 말했다.“당연하죠! 내가 얼마나 효녀인데요. 창민 아저씨, 우리 아빠에게서 엄마를 뺏지 마요. 속상해서 오열할지도 몰라요.”엄창민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아빠가 오열하는 거 봤어?”“네!”선유는 아주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전혀 거짓말 같지 않았다.엄창민은 막대사탕을 건네주며 말했다.“그래? 아저씨에게 아빠 뒷담화 좀 해봐.”“너무 많은걸요? 사흘 밤낮 얘기해도 부족할 거예요! 창민 아저씨, 남의 뒷담화에 왜 이렇게 관심이 많아요?”“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는 말도 있잖아.”친딸이 경쟁상대라고 생각하는 엄창민에게 자기 뒷담화를 하는 것을 배현수가 알기라도 하면 선유 엉덩이가 아마 남아나지 않을 것이다.이때 엄창민의 휴대전화가 울렸다.발신자 표시에 배현수의 이름이 떠 있었다.방금 떠난 사람이 바로 전화를 한다고? “여보세요?”배현수는 인사도 없이 주소를 읊었다.“18굽이 레이싱 트랙, 한 시간 후에 봐요.”18굽이 레이싱 트랙, 이곳은 레이싱용 산길이 아닌가?엄창민은 휴대전화를 귀에 댄 채 베란다로 나갔다. 소파에 앉아 있는 모녀를 잠시 바라보던 그는 전화기에 대고 웃으며 말했다.“왜 내가 꼭 갈 거라고 생각하죠?”“공정하게 경쟁할 기회를 주는 거예요. 싫으면 됐고요.”엄창민은 이런 배현수를 점점 더 이해할 수 없었다. “배현수 씨, 갑자기 왜 이러는 거예요?”“잔말 말고 올 거예요, 안 올 거예요?”전화기 너머의 남자는 잔뜩 귀찮은 말투였다.“갈게요...”배현수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엄창민은 알 수 없었지만 조유진과 관련된 일이라면 엄창민은 무조건 갈 것이다....성남의 18굽
차 문을 열고 긴 다리를 뻗어 레이싱 카에 올라탄 배현수는 나지막하면서도 당당한 목소리로 말했다.“질 일은 없을 거예요.”엄창민은 입꼬리만 올리며 겉으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이 자식, 정말 안하무인이네?’배현수의 차 옆으로 성큼성큼 걸어간 엄창민은 손가락을 힘껏 움츠려 차 지붕을 툭툭 쳤다.“이겨도 그게 무슨 약속인지는 알아야 하지 않을까요?”남자는 차가운 얼굴로 그를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 “죽으라고 하지는 않을게요.”그 말에 엄창민은 말문이 막혔다.“걱정 마세요, 합법적인 일이니까. 엄창민 씨에게 좋은 일이에요.”계속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엄창민에 배현수는 미간을 찌푸렸다.“벌써 겁먹은 거예요?”승부욕이 불타오른 엄창민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내가 겁먹은 거로 보여요? 18굽이 레이싱 트랙이 누구의 땅인지는 알아요?”“성남에서 길에 떨어져 있는 동전 하나까지 전부 엄씨 집안 거, 아니에요? 18굽이 레이싱 트랙? 엄 대표님의 땅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도 있나요.”엄씨 집안과 같이 거대한 사업에 몸담고 있는 가문이 회색지대의 어두운 사업에 가담하고 있는 것은 매우 정상적인 일이었다.카지노, 레이싱 경기장, 경마장.성행 그룹에 입사하기 전, 18굽이 레이싱 트랙은 엄창민이 직접 관리했다.그러다 보니 이곳에서 레이싱을 한 횟수만 한두 번이 아니었고 18굽이 레이싱 트랙에도 매우 익숙했다.하지만 처음 온 배현수는 여기에 몇 개의 레이싱 코너가 있는지도 잘 모른다. 그런 사람이 엄창민과 겨뤄서 이길 수 있을까?그것은 헛된 망상이나 다름없었다.뼛속까지 의리를 지키는 엄창민은 쉽게 남의 덕을 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는 배현수를 보고 한마디 충고했다.“반 시간 줄게요. 우선 레이스라도 익히는 것은 어때요?”배현수는 바로 거절했다.“아니요, 일찍 도착해서 이미 한 바퀴 달렸어요.”엄창민은 그의 말이 우스울 뿐이었다.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한 바퀴요? 한 바퀴 달리고 이미 익혔다고요? 이따가 사람이 차와
곧이어 빨간색 차와 파란색 차는 두 개의 화살처럼 정상으로 돌진했다.때로는 빨간색이 앞섰고 때로는 파란색이 앞섰다. 또 가끔은 나란히 어깨를 겨누기도 했다.88번 코너는 정상으로 올라가는 마지막 코너였다. 힘껏 액셀을 밟은 엄창민은 먼저 정상에 도착했다.산꼭대기에는 거대한 레이싱 플랫폼이 있었다.결승점의 노란색 선을 먼저 넘는 사람이 이기는 것이다.엄창민이 이겼다고 생각한 순간, 바로 뒤따라오던 파란색 차가 앞으로 돌진하더니 옆으로 홱 돌았다. 파란색 차는 빨간색 차 앞에 가로로 세워졌다.“시X!”속도가 너무 빨라 엄창민은 브레이크를 밟을 겨를도 없었다. 아무리 브레이크를 밟는다고 해도 배현수의 차를 먼저 결승선으로 밀 것이다.가로로 있는 파란색 차와 세로로 있는 빨간색 차의 바퀴는 빠른 속도로 회전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어두운 밤, 두 차는 눈부신 불꽃을 내뿜었다.빨간색 차는 어쩔 수 없이 파란색 차를 결승점으로 밀었다.파란색 차의 바퀴가 먼저 노란 선을 넘었다.이번 경기로 엄창민은 뭔가 큰 깨달음을 얻었다.간사하지 않은 사람은 절대 장사꾼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그런데 배현수... 이렇게 험한 길에서 이 정도로 거칠게 달린다고? 파란색 페라리의 옆구리 중간 부위는 이미 움푹 패어 있었다.엄창민은 빨간색 차를 일정 거리 후진한 후, 화가 잔뜩 난 얼굴로 차에서 내렸다.“배현수! 당신 미쳤어요? 이러다가 내 차에 치여 죽으면 어떡하려고요! 환희가 일부러 나를 원망하게 하려고 작정한 거예요?”침착하게 차에서 내린 배현수는 덤덤한 얼굴로 말했다.“엄창민 씨 때문에 죽는 일은 없을 거예요. 죽어도 내 탓이고요.”“만약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배현수 씨 차의 운전석을 들이받았을 거예요.”“그래서 빠른 속도로 달렸잖아요. 엄창민 씨도 차 운전석을 들이받지 않았고요.”배현수는 여전히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다. 마치 조금 전의 모든 것이 자기와 무관한 것처럼 평온한 모습이었다.그러자 엄창민이 큰소리로 외쳤다.“우리는 목숨을 건
육성일의 압도적인 기운은 전화 너머에서도 남초윤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말을 하지 않아도 그 묵직한 압박감은 느껴졌다. 그때 어떻게 그런 용기를 냈는지, 어떻게 육씨 집안에 시집갔는지 스스로도 의아했다. 만약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차라리 구걸을 하더라도 절대 육씨 집안에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남초윤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할아버지, 부탁드려요. 저희가 약속했던 건 두 달 전이었잖아요. 아직 두 달이 채 안 지났고, 제가 지금 아기를 가졌다고 해도 확인이 안 될 수도 있어요.” 그 말에 어느 정도 일리가 있었기에 육성일도 더는 말하지 않았다. 그렇게 할아버지의 전화를 겨우 넘겼지만 전화를 끊자마자 다시 핸드폰이 시끄럽게 울렸다. 이번엔 ‘개자식’ 육지율이었다. “...” 할아버지와 손자는 통화 시간까지 맞춘 것처럼 기가 막히게 연달아 전화를 걸어온다. 그녀는 냉랭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왜요?” 육지율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무슨 폭탄이라도 먹었어요?” 육지율이 자신의 책을 내리게 만들고, 지난달과 이번 달 원고료도 다 날려버린 상황에서 그녀가 전화를 받아준 것만으로도 기적이었다. 하지만 결혼 생활은 아직 유지 중이었고 필요한 것도 있으니 남초윤은 결국 목소리를 가다듬고 좀 더 부드럽게 말했다. “지율 오빠, 무슨 일이에요?” “... 뭐라고 불렀어요?” “지~율~오~빠~” 그녀는 유설영의 말투를 흉내 내며, 아니, 오히려 더 능숙하게 말했다. 육지율은 순간 닭살이 돋았다. “제발 평소처럼 말해요. 저녁에 내 친구가 귀국하는데 같이 식사해요. 6시에 잡지사로 데리러 갈게요.” 남초윤은 단번에 거절했다. “난 안 갈래요.” “저녁에 뭐 다른 약속 있어요?” 남초윤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결혼한 지 3년 됐지만 당신은 나한테 친구 한 명도 소개해 준 적 없잖아요.” 그리고 이제 곧 이혼할 텐데 친구를 만날 필요는 더 없었다.이혼하고 나서 친구들이
조유진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학교에서 누가 너 괴롭히진 않았어?” 배선유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응, 나 괴롭히는 사람 없어. 할아버지가 우리 학교에 엄청난 돈을 기부하셔서 선생님들도 항상 나한테 잘해주시고 많이 관심 해주셨어. 그래서 나도 함부로 장난칠 수가 없어. 혹시 선생님이 할아버지한테 이르실까 봐.” 배현수는 이 말에 전혀 놀라지 않았다. 배선유는 작은 악동처럼 말이 많았고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는 아이였다. 배현수의 말에도 자주 대꾸를 하니, 만약 동급생에게 괴롭힘을 당했다면 벌써부터 떠벌렸을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남을 괴롭히는 쪽에 더 가까웠다. 성남에서 엄준은 배선유를 엄청나게 아끼며 키웠고, 그래서인지 아이는 주눅이 들지 않고 활발하게 자랐다.조유진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다행이네. 우리 선유가 공부를 게을리할 걱정은 없겠어.” 배현수는 딸을 겁주듯 말했다. “너 공부 안 하고 일찍 연애라도 시작하면, 널 대제주에 데려와서 24시간 동안 지켜볼 거야.” 배선유는 입술을 내밀며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 이건 너무 심해요! 나 혹시 쓰레기통에서 주워 온 거 아니에요?” 배현수는 코웃음을 치며 엄격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말했다. “공부 안 하면 좋은 날은 없을 거야.” 잠시 후, 학교 종이 울릴 시간이 가까워졌다. 배선유는 전화를 끊으려다가 친구가 그린 결혼사진 두 장을 영상 속으로 건네받았다. “선유야! 너랑 지우의 결혼사진 내가 그려놨어! 한 번 봐봐!” 배선유가 물었다. “한 장에 얼마야?” “너니까 공짜로 해줄게! 대신 다음번엔 나랑 결혼해 줄 수 있어?” “생각해볼게!” “...” 이 속도로라면 그들 부부는 도대체 몇 명의 사위를 맞이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한편, 스타라이트 매거진에서.남초윤이 사이트 편집자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 그녀의 책은 예상대로 플랫폼에서 삭제되었고 이달 원고료는 한 푼도 들어오지 않
[합법적 부부] 함께 올라온 사진엔 결혼반지를 낀 두 손이 하트 모양을 그리고 있었다. 이 게시글이 올라가자마자 마치 깊은 바다에 떨어진 폭탄처럼 큰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수많은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몰려들어 반응했다. 육지율: [8년의 여정 끝에 드디어 자랑할 수 있네!] 송하진: [어! 전 두 사람 목숨 구해준 은인이에요. 제가 아니었으면 두 사람이 어떻게 혼인신고까지 했겠어요? 당장 절 주빈으로 식사 대접해요!] 남초윤: [아아아아! 유진이를 결혼이라는 무덤 속으로 끌어들이다니! 대표님 너무하세요!] 엄창민: [내 여동생한테 잘해요. 혹시라도 괴롭히면 내 주먹이 용서 못 해요!] 엄명월: [형부! 이렇게 좋은 일에 저희한테 뭐라도 사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강이찬: [축하해, 결국 원하는 대로 됐네.] 심미경: [백년해로하세요. 행복하길 기원합니다!] 서정호: [대표님, 일 다 끝냈으면 빨리 돌아오세요. 의사 선생님이 여기서 엄청 화내고 있어요. 저 더는 못 버틸 것 같아요!] 학교 가기 싫어: [와! 아빠랑 엄마가 드디어 결혼했네요! 헤헷, 아빠, 나도 오늘 결혼했어요!] 배현수는 배선유의 댓글을 보고 순간 검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조유진이 운전하며 그의 미세한 변화를 눈치채고 물었다. “왜 그래요?” “선유가 결혼했다는데.” “뭐라고요?” 조유진은 깜짝 놀라 차를 도로 옆에 세우고 급히 배선유에게 영상 통화를 걸었다. 저쪽에서 배선유는 학교에 있었는데 마침 쉬는 시간이었다. 외국어 학교라 분위기가 자유로워 아이들은 평소에도 부모님과 연락을 하기 위해 휴대폰을 가지고 다녔다. 배선유는 전화를 받자마자 얼굴을 카메라 앞으로 들이밀었다. “엄마, 아빠! 나 사진 보고 싶어!” 조유진은 그녀에게 사진을 보여주고 나서 물었다. “선유야, 아까 결혼했다고 했잖아. 누구랑 결혼한 거야?” “우리 반 한지우랑! 엄마, 나 오늘 엄청 많은 축의금을 받았어! 내가 다 적어 놨어!”
조유진은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갈게요.” 그가 환자라는 사실을 떠올리며 이번 한 번은 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 다음 날 이른 아침. 서정호가 산성 별장에서 두 벌의 정장과 결혼 서류를 준비해왔다. 조유진은 오랜만에 풀 메이크업을 하고 머리도 고데기로 말았다. 그녀는 하얀 오프숄더 드레스를 입고 사진에 잘 나올 수 있도록 최대한 신경 썼다. 그녀는 한동안 이렇게까지 꾸미지 않았는데 하이힐을 신고 배현수 앞에 서니 그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조금 어색해졌다. 그래서 물었다. “나 어때요?” “아름다워. 넌 언제나 아름다워.” 배현수는 전혀 망설임 없이 그녀를 칭찬했다. 조유진은 웃음을 참으며 옆에 있던 넥타이를 집어 들고 배현수에게 매어주었다. 배현수는 그녀의 손길에 고개를 숙이며 협조했다. 조유진은 평소와 다르게 더 복잡하고 정중한 ‘엘드리지 매듭’으로 넥타이를 맸는데 배현수는 평소에 간단한 윈저 매듭만 했었다. “이 매듭은 좀 생소하네.” 조유진은 넥타이를 다 매고 나서 그의 셔츠와 정장 재킷의 깃을 정리해 주었다. “이게 엘드리지 매듭이라고 해요. 중요한 자리에서 어울리는 방식이죠. 어때요, 괜찮아요?” “멋져. 하지만 여보, 우리 서둘러야 해. 조금 있으면 의사가 올 거야.” 웃으며 농담하듯 이야기하던 배현수는 조유진의 외투를 챙겨 그녀의 어깨에 걸쳐 주고, 그녀를 한 손으로 감싸 병실을 몰래 빠져나갔다. 두 사람은 마치 도망치듯 병원을 빠져나와 차에 올랐다. ... 그들이 빠져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의사가 병실에 회진을 왔다. 하지만 환자와 보호자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고 그곳에는 ‘무관한 사람’만 남아 있었다. 의사는 엄숙한 표정으로 서정호를 보며 물었다. “환자는 어디 갔죠? 튜브까지 다 뽑다니, 누가 뽑았습니까?” 서정호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환자 본인이 뽑았습니다.” “도대체 어디 간 겁니까? 팔을 정말 망가지게 할 작정인가요
배현수의 가슴이 떨렸다. 그는 조유진과 이마를 맞대며 낮게 속삭였다. “그때 난 네 옆에 있진 않았지만 네 뒤에서 계속 지켜보고 있었어. 그런데 왜 울었어?” “현수 씨 생각이 났어요.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게 너무 슬펐거든요. 내가 이렇게 좋은 남자를 잃어버린 것 같아서, 그게 너무 아쉽고 후회스러웠죠. 그래서 울었어요.” 지금 이렇게 그를 바라보고 있으니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은 느낌이었다. 조유진의 눈에는 여전히 눈물이 맺혀 있었다. 하지만 이번 눈물은 슬픔이나 후회 때문이 아니었다. 감동과 감사함 때문이었다. 운명이 그들을 온갖 고난 속에서도 끝끝내 묶어 놓았고, 그들 사이에선 이제 더 이상 헤어질 수 없는 깊은 연대가 생겼기 때문이다. 배현수는 긴 손가락을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천천히 끼워 넣으며 손을 꼭 맞잡았다. 순간 그들의 손바닥에서 따뜻함이 퍼져나갔다. 그는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진아, 넌 한 번도 날 잃은 적 없어. 우리가 몇 번을 떨어져도, 얼마나 오랫동안 떨어져 있더라도 난 결국 널 찾아내서 꼭 안고 말해줄 거야. 사랑한다고. 오직 너만 사랑한다고.” 처음부터 끝까지, 조유진은 배현수의 유일한 선택이었고 그 선택은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었다. 조유진은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웃었다. “현수 씨, 우리 영원히 함께할 수 있을까요?” “그럼.” 그의 대답은 8년 전과 똑같았다. 짧지만 확고했으며 1초의 망설임도 없었다. 조유진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손목에 걸린 달콤한 연녹색 비취 팔찌를 내려다보았다. “상처가 나으면 우리 같이 아주머니를 위한 좋은 묘지를 고르러 가요. 그분을 위한 의관묘라도 만들어 드리는 게 어때요?” “아직도 ‘아주머니’라고 불러?” 조유진은 순간 얼굴이 뜨거워지며 말투를 바꿨다. 배현수는 그녀의 팔찌를 손가락으로 살며시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풍수 좋은 곳을 따로 고를 필요는 없어. 어머니께
육지율은 그 필명이 어딘가 익숙하다고 느꼈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문득 기억해 냈다. “이 자식! 기억났어! 이 녀석이 책에서 날 모욕하지 않았나? 내 명성을 망가뜨렸잖아?” 남초윤은 급하게 말했다. “잘못 본 거 아니에요? 비엘 작가가 주인공을 모욕할 리가 없어요! 그러면 밥숟가락 들고 욕하는 것과 뭐가 다르겠어요?” “나를 ‘수’로 묘사한 게 모욕이 아니고 뭐예요? 왜 항상 배현수가 공이냐고?” 남초윤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는 그 부분을 신경 쓰고 있었던 거였다.남초윤은 그가 진짜 작가를 고소할까 봐 걱정되었다. 그래서 변명하듯 말했다. “다음번엔 지율 씨가 공이고, 배 대표님이 수가 될 수도 있잖아요. 원래 BL 소설에서는 공수 구분이 모호해요. 겉보기에 수 같아도 사실은 공일 수도 있다고요!” 조유진은 살짝 의문을 제기했다. “난 현수 씨가 수 같지는 않았는데. 만약 현수 씨가 진짜 수라면 캐릭터 붕괴지. 차라리 육 변호사님이 수인 게 더 어울려. 자유롭고, 매력적이고, 다정하잖아.”“?”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육지율은 얼굴이 시커멓게 변하며 조유진에게 따졌다. “아니, 조유진. 내가 약해 보이는 수 같은 느낌을 준다고?” “...” 배현수는 차갑게 말했다. “유진이가 쓴 것도 아닌데 왜 화내? 그럴 시간 있으면 작가나 고소해.” 남초윤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 그냥 재미로 쓴 거지 무슨 큰 잘못을 한 것도 아니잖아요? 작가를 고소하면 너무 쪼잔해 보일 거예요!” 하지만 육지율은 이성을 잃고 이를 악물었다. “쪼잔해 보이든 말든, 그 책을 하차할 거예요!” 자신이 소설 속에서 수 역할로 묘사되었고, 그것도 많은 사람에게 읽히고 있다는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돋았다. 조유진은 객관적으로 말했다. “사실 책 내용은 나쁘지 않아요. 꽤 재미있고 독자도 많아요.” “독자가 몇 명인데?”“몇만 명 정도?” “뭐?”‘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날 수로 상상했
병실에서 조유진은 그가 누워있는 침대 옆에 앉아 있다가 잠들었다. 잠에 들어서도 손가락이 배현수의 손에 살짝 얽혀 있었는데 다정하고 달콤하기 그지없었다. 이 사진은 완전히 남자 친구 시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입원 생활이 지루하다고 하다니.육지율이 댓글을 남겼다. “뭐야, 입원했어? 혹시 가정 폭력이라도 당한 거야?” 댓글을 남기고 나서 육지율은 차에 시동을 걸며 남초윤에게 말했다. “과일 바구니 좀 사서 병문안이나 가요. 친구가 입원했어요.” “친구? 설마 배 대표님이세요? 어디 아파요?” 육지율은 웃으며 말했다. “글쎄요. 진짜 아플 수도 있고 그냥 꾀병일 수도 있고.” 혹시 모른다. 꾀병일지도....병원에서는 조금 전 장은숙이 산성 별장에서 저녁 식사를 가져왔다. 수술 후 얼마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 밤은 죽 같은 유동식만 먹어야 했다. 배현수는 오른손을 쓸 수 없었기에 조유진이 죽 그릇을 들고 숟가락으로 그에게 먹여주고 있었다. 첫 숟가락을 그의 입 앞에 가져가자 배현수는 뜨겁다고 투덜댔다. 조유진이 후후 불어 온도를 맞춘 후 말했다. “이제 적당히 식었어요.” 배현수는 그제야 죽을 한 입 삼켰다. 그 순간 병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장난스러운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며칠 못 본 사이에 아기로 됐네? 밥도 혼자 못 먹고, 조유진이 널 너무 오냐오냐한 거 아냐?” 조유진이 놀라서 뒤돌아보니, 육지율과 남초윤이 병실에 들어와 있었다. 그녀는 웃으며 설명했다. “오른쪽 어깨에 부상을 입었어요. 의사 선생님이 며칠 동안 오른손은 쓰지 말라고 하셨어요. 상처가 더 심해질 수 있거든요.” 그러자 육지율은 다짜고짜 그의 오른쪽 어깨를 툭 쳤다. “진짜야?” 배현수는 고통에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욕설을 퍼부었다. “이 미친놈아!” 조유진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변호사님, 진짜로 다쳤다니까요! 어깨에 구멍이 났다고요, 함부로 건드리지 마세요!
그녀를 겨우 한 번 데리러 온 김에 출퇴근길의 불편함을 느끼고는 아예 차를 사서 해결하려고 하다니, 정말 육지율 다운 방식이었다.이 4S 매장에서 파는 차들은 모두 포르쉐였고 가격도 만만치 않았다. 가장 저렴한 모델도 수천억 원대였다. 남초윤은 이미 남씨 집안이 육지율에게 너무 많은 빚을 지고 있었기에, 그가 차를 선물해 주겠다고 해도 받을 수 없었다.남초윤은 차분히 말했다. “앞으로는 출퇴근 길에 당신을 귀찮게 하지 않을 테니, 굳이 차를 선물할 필요는 없어요.”육지율은 순간 멈칫했다가 살짝 비웃으며 말했다. “차 한 대 선물한다고 귀찮다는 딱지가 붙어요? 이런 확산적 사고방식은 참 대단하네.”“....”정말 그런 게 아니란 말인가?평소에도 성격이 불 같았던 육지율은 차를 주겠다고 하면서도 그녀를 달래는 상황이 우스웠는지 어이없어 웃었다. 둘 중 누가 더 성격이 나쁜지 모를 일이었다.영업 직원은 남초윤을 육지율이 외부 애인으로 오해했고, 이 큰 거래가 깨질까 봐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가씨, 변호사님께서 차를 사주시는 건 출퇴근 시간을 줄여서 그 시간 동안 조금이라도 더 쉴 수 있게 해주려는 마음이 아닐까요?”남초윤은 더 이상 그의 돈을 쓰고 싶지 않았다. 이미 갚을 수 없는 빚이 너무 많았고 계속해서 더 쓴다면 두 아이를 낳아야 겨우 그 빚을 다 갚을 수 있을 것 같았다.그러나 육지율은 그 여느 때처럼 행동했다. 그는 VIP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빨리 골라요. 차 안 사면 집에 못 돌아가요.”남초윤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여자 영업 직원이 다가와 다양한 모델을 소개할 때, 그저 듣기만 했다. 그 직원은 미소를 띠며 말도 아주 달콤하게 했다. “변호사님은 저희 매장의 단골이세요. 그런데 여자를 데리고 온 건 이번이 처음이네요. 변호사님이 정말로 많이 아끼시는 것 같아요. 비싼 차를 고르시면 아마 더 기뻐하실 거예요.”역시, 판매왕이었다.감정적 가치를 제공하는 법을 너무나 잘 아는 직원이었다. 하지만 남초윤은 그저 외부의
남초윤은 결혼 상태를 한 번도 업데이트한 적이 없었다. 동료들 눈에는 여전히 미혼으로 보였다.처음 그녀와 육지율의 스캔들이 터졌을 때 온 세상이 떠들썩했지만 사실 모두 육지율의 매력적인 외모 때문이었다. 아무도 남초윤처럼 작고 평범한 존재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육지율이 그녀와 결혼하기로 결정했을 때 그들의 침대 사진이 언론이나 남재원에게 유출되지 않은 것도 기적이었다. 사람들은 그저 육지율이라는 유명한 바람둥이가 ‘함정'에 빠져 순진한 여자와 관계를 맺은 후, 마지못해 결혼했다는 소문만 믿고 있었다.육지율이 연예계 인물이 아닌 만큼 동료들 중에서도 아무도 그 사건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육지율이 ‘좋은 집안의 아들’ 이라는 사실만 기억하고 그의 결혼 상대가 누군지에는 무관심했다. 그녀는 어디에도 크게 드러나지 않았고 언론에서도 그의 곁에 서는 일이 거의 없었다. 남초윤은 그렇게 세상 사람들의 눈에 숨겨져 있었다.동료들은 그저 그녀가 조금 집안 배경이 있는 부유한 여자인 줄로만 알았고 육지율의 아내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어쨌든 육지율의 아내라면 아무리 상황이 나빠도 그들과 같이 일하며 고생할 일은 없을 테니까. 설령 과거에 파파라치 일을 했더라도 그렇게 높은 곳에 시집갔다면 육씨 집안이 그녀를 계속 그 일을 하도록 놔두지 않았을 거라고 여겼다.비록 세상은 모두 직업의 평등을 외치고 있지만 상류 사회에는 여전히 그들만의 규칙이 있었다. 체면과 명예가 그들의 신분과 존엄을 상징했다. 파파라치라는 직업은 육씨 집안에게 있어 절대 자랑스러울 수 없는 일이었으니, 육지율과 강란희가 그녀에게 좀 더 체면 있고 유망한 직업들을 제안했지만 남초윤은 그들의 호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그렇게 시간을 보낸 끝에 동료들은 하나둘씩 퇴근하고 남초윤만 남았다. 한 시간이 흐른 뒤 남초윤은 휴대폰 화면을 확인했다. 저녁 7시가 되었다. 그녀는 통화 기록을 훑어보고 다시 한 번 메시지를 확인했지만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아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