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이어 빨간색 차와 파란색 차는 두 개의 화살처럼 정상으로 돌진했다.때로는 빨간색이 앞섰고 때로는 파란색이 앞섰다. 또 가끔은 나란히 어깨를 겨누기도 했다.88번 코너는 정상으로 올라가는 마지막 코너였다. 힘껏 액셀을 밟은 엄창민은 먼저 정상에 도착했다.산꼭대기에는 거대한 레이싱 플랫폼이 있었다.결승점의 노란색 선을 먼저 넘는 사람이 이기는 것이다.엄창민이 이겼다고 생각한 순간, 바로 뒤따라오던 파란색 차가 앞으로 돌진하더니 옆으로 홱 돌았다. 파란색 차는 빨간색 차 앞에 가로로 세워졌다.“시X!”속도가 너무 빨라 엄창민은 브레이크를 밟을 겨를도 없었다. 아무리 브레이크를 밟는다고 해도 배현수의 차를 먼저 결승선으로 밀 것이다.가로로 있는 파란색 차와 세로로 있는 빨간색 차의 바퀴는 빠른 속도로 회전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어두운 밤, 두 차는 눈부신 불꽃을 내뿜었다.빨간색 차는 어쩔 수 없이 파란색 차를 결승점으로 밀었다.파란색 차의 바퀴가 먼저 노란 선을 넘었다.이번 경기로 엄창민은 뭔가 큰 깨달음을 얻었다.간사하지 않은 사람은 절대 장사꾼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그런데 배현수... 이렇게 험한 길에서 이 정도로 거칠게 달린다고? 파란색 페라리의 옆구리 중간 부위는 이미 움푹 패어 있었다.엄창민은 빨간색 차를 일정 거리 후진한 후, 화가 잔뜩 난 얼굴로 차에서 내렸다.“배현수! 당신 미쳤어요? 이러다가 내 차에 치여 죽으면 어떡하려고요! 환희가 일부러 나를 원망하게 하려고 작정한 거예요?”침착하게 차에서 내린 배현수는 덤덤한 얼굴로 말했다.“엄창민 씨 때문에 죽는 일은 없을 거예요. 죽어도 내 탓이고요.”“만약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배현수 씨 차의 운전석을 들이받았을 거예요.”“그래서 빠른 속도로 달렸잖아요. 엄창민 씨도 차 운전석을 들이받지 않았고요.”배현수는 여전히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다. 마치 조금 전의 모든 것이 자기와 무관한 것처럼 평온한 모습이었다.그러자 엄창민이 큰소리로 외쳤다.“우리는 목숨을 건
딸깍.작고 밝은 불꽃이 반짝 피었다.고개를 숙여 담배에 불을 붙인 배현수는 담뱃갑에서 담배 한 대를 꺼내 엄창민에게 던졌다.엄창민은 일단 받긴 했으나 피울 생각이 없었다.“평소에 담배를 안 피워서요.”배현수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엄창민 씨의 인생에 유진이를 얻지 못하는 것 말고는 다른 걱정거리는 없었을 것 같은데.”농담인 듯 아닌듯한 말투였지만 결코 경멸스럽지는 않았다.“지금 잘난 척하는 거예요?”“부러워요.”차 옆에 기댄 배현수는 입에서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그윽한 이목구비가 희미한 연기에 가려져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아주 담백하게 한마디만 내뱉었을 뿐이었다.잠시 멍해 있던 엄창민은 이내 피식 웃었다.“내가 부럽다고요? 나에게 있는 것은 배현수 씨도 다 갖고 있잖아요. 나에게 없는 것까지도 다 갖고 있고요. 뭐가 부러운데요? 내가 자유로운 게? 그래서 혼자인 게?”엄창민을 힐끗 본 배현수는 웃을 듯 말 듯 한 얼굴로 말했다.“시간이 많은 게 부러워요. 유진이를 얻지 못했지만 마음만 먹으면 옆에서 평생 지켜줄 수 있잖아요.”조롱인 듯하면서도 진심인 것 같았다.엄창민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무슨 뜻이에요? 내가 아무리 스위스에 유진이와 선유를 데려가려 한다고 해도 유진이와 선유가 저를 따라오지 않을 거예요.”배현수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 말했다.“같이 갈 거예요. 그건 내가 설득할 수 있어요.”정말 싫다고 하면 납치해서 보낼 수도 있다.엄창민은 배현수의 말이 믿기지 않는 듯했다.“어떻게 설득할 건데요? 유진이를 속이기라도 하려는 거예요?”“속여서 떠날 수만 있다면, 그래서 남은 인생을 안전하게 보낼 수만 있다면 거짓말쯤은 얼마든지 할 수 있어요.”엄창민은 점점 더 이해가 되지 않았다.“성남에 엄씨 가문이 있는 한, 유진이를 건드릴 사람은 없어요.”“드래곤 파가 접근할 거예요.”고개를 든 배현수의 눈빛에 음흉한 빛이 스쳐 지나갔다.이 한마디를 듣는 순간, 엄창민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드
엄창민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뭐라고?”전화기 너머의 엄명월은 다급히 말했다.“당장 홍보팀을 통해서 정식으로 입장발표를 해야 될 것 같아. 안 그러면 내일 주주총회에서 임직원들이 난리를 칠 거야. 일단 나는 엄씨 사택으로 먼저 돌아갈게. 근데 오빠는 어디야?”“금방 갈게.”...엄씨 사택으로 돌아가니 집안 분위기는 한껏 더 긴장된 상태였다.엄준이 혼수상태에 빠진 소식은 이미 각종 플랫폼의 실시간 인기 검색어에 올랐다.성행 그룹의 주인이 바뀔 것이라는 추측도 분분했다.정식으로 입장발표를 하지 않으면 내일 주가가 반드시 내려갈 것이다.엄명월은 검색어 화면이 켜진 휴대전화를 ‘쾅’하고 탁자 위에 내려놓으며 말했다.“오빠, 누가 한 짓일까? 아버지는 어제 쓰러지셨어. 병원에는 우리 몇 명밖에 없었고. 외부인이 이렇게 빨리 소식을 퍼뜨릴 리가 없잖아?”엄명월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앉아 있는 사람들을 훑어봤다.엄창민? 조유진? 백소미? 아니면 배현수?그녀의 매서운 눈빛은 이내 구석에 앉아 초콜릿을 먹고 있는 선유에게로 향했다.선유는 초콜릿으로 물든 시커먼 앞니를 드러내며 초롱초롱한 눈으로 그녀를 보면서 말했다.“이모, 저 아니에요.”그러자 엄명월은 코웃음을 쳤다.“너에게 그럴 능력이 어디 있겠어?”선유는 다시 대꾸했다.“우리 엄마도 아니에요. 오후 내내 엄마와 같이 있었는데 핸드폰도 별로 보지 않았어요.”아이가 이런 상황에 끼면 안 된다고 판단한 조유진은 선유를 달래 위층으로 보내서 먼저 자게 했다.아래층에서 몇몇 어른들은 아직도 눈치싸움을 하고 있었다.이때 백소미가 목적이 있는 듯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아빠가 혼수상태에 빠졌다는 소식이 외부에 알려지는 게 엄씨 가족에게는 좋을 게 없지만 외부인에게는 좋을지 안 좋을지 모르겠어요.”그것은 옆에 있는 배현수를 가리키는 말이었다.어쨌든 지금 여기에 외부인은 배현수 말고 아무도 없었다.배현수가 입을 열려 할 때, 조유진이 나섰다.“현수 씨는 내가 데려온 거예요. 어르신이 혼
모두가 이상한 눈빛으로 보고 있었다. ‘외부인’ 배현수는 아무 말 없이 조유진의 뒤를 따라 계단을 올라갔다.거실 소파에 앉아 있는 백소미는 그들을 바라보며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창민 오빠, 엄연히 말하면 조유진도 남이죠. 아빠도 혼수상태이시고 한동안 회사 내부도 분명 매우 어수선할 거예요. 그런데 집에 외부인이 이렇게 많아서 되겠어요?”만약 조유진이 엄준의 친딸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그동안 계획했던 일이 모두 물거품이 된다.엄창민은 차가운 얼굴로 백소미를 보며 말했다.“유진이가 남이면 나도 남이야. 나도 유진이처럼 아버지가 데려온 수양딸, 수양아들에 불과하니까.”입술을 깨문 백소미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이때 옆에 앉아 있던 엄명월의 휴대전화에서 ‘딩동' 소리가 울렸다. 한 통의 메시지가 온 것이다.메시지를 본 엄명월은 눈을 가늘게 뜨더니 바로 읊기 시작했다.“성행 그룹 엄준의 하나뿐인 친딸이 지분 35%를 물려받아 그룹의 최대주주이자 실소유주가 될 거라고?”백소미를 본 엄명월은 얼음장같이 차가운 얼굴로 날카로운 웃음을 지었다. “설명해봐, 어떻게 된 일이야.”백소미는 전혀 주눅 든 기색이 없었다.“아마 언론과 네티즌 수사대에서 추측한 내용인 것 같아요.”“이렇게 짧은 시간에 바로 실검에 오른다고? 백소미, 내가 바보로 보여? 아버지의 주식을 이렇게 급하게 상속받겠다고? 그러니까 아버지가 혼수상태에 빠졌다는 내용도 네가 외부에 퍼뜨린 거네?”백소미는 당당하게 대꾸했다.“그랬으면 뭐요? 나는 아빠의 유일한 친딸이에요. 아빠가 혼수상태에 빠진 지금 이 상황에 가장 좋은 방법은 내가 나서서 주주와 회사를 안정시키는 것밖에 없어요. 언니와 창민 오빠 두 분 모두 회사에 대한 공로가 크다는 것은 알아요. 하지만 결국에는 아빠가 입양한 자식일 뿐이에요. 회사를 물려받을 권리가 없...”엄명월이 코웃음을 치며 백소미의 말을 끊었다.“네가 아버지의 친딸인지 아닌지 아직 확실하지 않아.”“그럼 유전자 검사 결과를 조작이라도 했다는 말이에
백소미는 악랄한 눈빛으로 엄명월을 노려봤다.이것은 백소미를 자기편으로 만들려는 협박이었다. 엄명월의 말을 거역하는 순간 바로 뒤에서 칼을 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엄명월은 이내 환하게 웃더니 잡고 있던 백소미의 손목을 놓으며 엄창민에게 말했다.“시간이 늦었으니 먼저 집에 갈게. 내일 아침 주주총회에서 봐.”엄명월의 뒷모습을 빤히 쳐다보는 백소미의 눈빛에 순간 살기가 번쩍였다.엄명월도 더 이상 남겨둬서는 안 될 것 같다....위층, 게스트 룸.방문을 닫은 조유진은 차가운 눈빛으로 배현수를 바라보며 말했다.“지금 엄씨 집안 상황을 보니 선유를 데리고 여기 있기가 어려울 것 같아요. 창민 오빠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도 않고요. 물론 대제주시에 가서 현수 씨 걱정하게 하고 싶지도 않아요. 당분간 선유와 함께 성남에 잠시 머물 집은 마련해줘야 할 것 같아요.”몇 초간 생각에 잠겨 있던 배현수가 갑자기 물었다.“스위스에 갈 생각은 없어?”성남으로 보낸 이유는 드래곤 파가 엄씨 집안을 주시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엄준이 혼수상태에 빠진 것이 어쩌면 드래곤 파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엄씨 가문도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 이 집에 드래곤 파의 스파이가 있을 가능성도 있다.조유진과 선유를 스위스에 보내는 것이 현재로서는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조유진은 천천히 배현수를 올려다보며 물었다.“나와 선유만 스위스에 가라고요? 우리 같이 가는 게 아니라요?”지난번, 영화관에서 [속죄]라는 영화를 볼 때, 배현수는 약속했었다. 회사 일을 어느 정도 정리하면 선유까지 데리고 스위스에 가서 정착해 살자고...오랫동안 침묵하던 배현수는 침을 꿀꺽 삼키고 말했다.“그곳에 가면 마중 나온 사람이 있을 거야. 일상생활은 걱정할 필요 없어. 네가 영어를 잘하니까 의사소통에 문제도 없을 거고.”이 뜻은 더 묻지 않아도 무슨 말인지 너무 확실했다.조유진은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현수 씨가 안 가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인데요? 나와 선유를 스위스로 내
조유진의 눈에 걱정이 가득했다.그녀를 내려다본 배현수는 담백한 웃음을 지었다.“내가 중독됐다면 지금쯤 엄 어르신처럼 쓰러져 있지 않았을까?”배현수는 얼굴의 감정을 빈틈없이 숨기고 있었다.별다른 기색이 보이지 않자 조유진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엄준이 혼수상태인 것을 떠올리니 기분이 너무 우울했다.“어르신이 중독된 거라면 해독제는요?”“글쎄...”배현수가 잘 모른다는 것은 엄준이 진짜로 위독하다는 뜻이 아닐까?순간 조유진은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가슴이 먹먹했다. 엄준은 그녀 생명의 은인이자 처음으로 아버지의 사랑을 느끼게 해 준 사람이다. 혈연관계는 없었지만 엄준과 함께 있는 것이 왠지 모르게 친근하게 느껴졌다.배현수는 차가운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물었다.“어르신이 걱정돼서 그래?”“네, 어르신이 나를 구해주기도 했고 병도 치료할 수 있게 미국에 보내줬어요. 치료하는 동안 너무 힘들어서 버티지 못할 뻔한 적도 많아요. 그때 만약 어르신의 응원이 없었더라면 나는 진작...”엄준은 마치 친아버지처럼 그녀에게 힘이 되어 주었다.그녀는 예전에 충남 시장의 딸이었다. 하지만 한 번도 가족애를 느껴본 적이 없었다. 조범의 딸로 살면서 더 많은 것들이 그녀를 억압하고 있었고 그것은 마치 끝이 보이지 않는 암흑 같았다.공해 바다에서의 큰 폭발로 조범은 죽었다. 슬픈 마음도 있었지만 감개무량한 감정이 더 컸다. 이렇게 악랄한 사람은 언젠가 분명 지옥에 갈 것이기 때문이다.그러나 엄준처럼 자상한 사람은 절대 죽으면 안 된다.물론 삶과 죽음을 넘나들었던 두 사람에게 짧은 이별은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작았다.하지만 스위스라는 이 나라는 너무 멀어 왠지 모르게 무서운 마음이 들었다.조유진은 투정을 부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배현수를 보고 있자니 며칠 동안 쌓인 감정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코끝이 찡하더니 눈시울이 붉어졌다. “가고 싶지 않아요. 대제주시도 싫고 성남도 싫어요. 스위스는 더더욱
입꼬리를 양옆으로 올린 조유진은 마치 스스로를 비웃는 듯했다.“나 너무 못났죠?”자존심은 이러면 안 된다고 얘기하고 있었다.이성은 더더욱 그녀를 설득하고 있었다. ‘조유진, 더 이상 매달리지 마. 이 남자는 너와 결혼할 생각이 없어. 그렇게 못 난 사람처럼 굴지 마!’하지만 마음속에서 무시할 수 없는 목소리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조유진, 이 사람은 배현수야. 꼬박 7년을 그리워한 사람이라고. 그 사람이 지금 눈앞에 있어. 조금만, 조금만 더 적극적으로 행동하면 이 사람을 잡을 수 있지 않을까?’확실하지 않았지만 머리보다 몸이 그를 붙잡고 있었다.배현수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시뻘게진 눈실울은 어느새 약해진 그의 마음을 조금씩 드러내고 있었다. 그는 온 힘을 다해 그의 부드러움을 짓누르고 있었다.조유진은 당장이라도 깨지고 부서질 것 같이 연약해 보였다.배현수는 담담하고 차분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마음속은 이루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였다.그녀 때문에 마음이 약해진 적은 수도 없이 많았다. 이번이 몇 번째인지 셀 수조차 없었다.그녀에게 ‘안 된다’고 말하고 거절하려 했다.그러나 조유진은 아예 모든 것을 다 내려놓은 듯 하얀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감싸고는 입을 막아버렸다.입술과 혀가 얽히고설켜 서로를 한없이 원하고 있었다.이런 수단은 이제 너무 식상했다. 별로 신선한 느낌도 없었다.늘 모든 일에 이성을 유지하고 있는 배현수였지만 지금 이 순간, 그의 품속에 있는 사람이 조유진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모든 것이 달라졌다.조유진이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배현수는 스스로 한 번 또 한 번 이성과 감성의 싸움을 펼쳤다.다급한 그녀는 키스와 함께 온몸을 거의 배현수 품 안에 파고들다시피 했다.배현수는 엉겁결에 손을 들어 그녀의 가녀린 허리를 잡아줬다. 혹시라도 등 뒤의 책장에 부딪힐까 봐였다.그녀의 키스는 배현수의 얇은 입술부터 시작해 턱과 목젖까지 계속 이어졌다.배현수는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지만 차마 그녀를 밀
자기를 바라보는 조유진의 뜨거운 눈빛에 배현수는 장난기 섞인 얼굴로 웃더니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뺨을 주무르며 말했다.“자고 가라고 하면 단순히 잠만 자지 않을 거야.”그는 일부러 겁을 주었다.얼굴이 살짝 달아오른 조유진은 심장박동이 조금 빨라졌지만 겉으로는 태연한 척하며 말했다.“괜찮아요. 단순히 잠만 잔 적이 몇 번이나 된다고요?”배현수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조유진은 그의 손을 더 꽉 움켜쥐었다. 혹시라도 도망갈까 봐 두려운 듯 말이다.배현수는 입꼬리를 올리며 너스레를 떨었다.“여기는 남의 집이야. 우리가 게스트 룸에서 너무 큰 소리를 내면... 물론 나야 상관없는데 유진아, 너는...”귀까지 빨개진 조유진은 배현수를 째려보며 말했다.“크게 움직이지 않으면 되잖아요.”일부러 작정하지 않은 이상, 큰 소리는 어느 정도 자제할 수 있다. 배현수는 그녀의 손가락을 주물럭거리며 말했다.“일단 시작하면 못 참을 수도 있어.”물론 이 말도 사실이었다.입술을 깨문 조유진은 갑자기 그더러 자고 가라고 한 말을 취소하고 싶었는지 꽉 잡고 있던 손도 어느 정도 느슨해졌다.배현수는 이렇게 그녀의 손만 잡고 있어도 불타오르는 감정에 미칠 지경이었다.조유진이 앞에서 조금만 움직여도 그는 금세 머릿속이 새하얘졌다.이런 느낌은 사람을 너무 괴롭게 했다.그녀의 손을 놓은 배현수는 갑자기 입을 열었다.“엄창민 씨와 사업 얘기 좀 하고 올게. 나 오늘 운전하지 않았는데 이따가 호텔까지 데려다줄래?”조유진은 눈빛을 반짝이더니 더 이상 투정 부리지 않고 흔쾌히 승낙했다.“그래요.”며칠 동안 감정이 삐걱거렸던 두 사람이었다. 냉전이 끝난 후가 제일 뜨거운 시기였다. 도저히 숨길 수 없었다.방문을 나서기 전, 배현수는 갑자기 큰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잡더니 얼굴을 숙이고 말했다.“한 번만 더 할까?”분명 질문이었지만 그녀가 대답하기도 전에 이미 그녀의 입술과 혀를 공격하고 있었다. 은은한 담배 냄새와 과일 차 향이 섞인 사탕의 달콤한 맛이 입속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