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이어 빨간색 차와 파란색 차는 두 개의 화살처럼 정상으로 돌진했다.때로는 빨간색이 앞섰고 때로는 파란색이 앞섰다. 또 가끔은 나란히 어깨를 겨누기도 했다.88번 코너는 정상으로 올라가는 마지막 코너였다. 힘껏 액셀을 밟은 엄창민은 먼저 정상에 도착했다.산꼭대기에는 거대한 레이싱 플랫폼이 있었다.결승점의 노란색 선을 먼저 넘는 사람이 이기는 것이다.엄창민이 이겼다고 생각한 순간, 바로 뒤따라오던 파란색 차가 앞으로 돌진하더니 옆으로 홱 돌았다. 파란색 차는 빨간색 차 앞에 가로로 세워졌다.“시X!”속도가 너무 빨라 엄창민은 브레이크를 밟을 겨를도 없었다. 아무리 브레이크를 밟는다고 해도 배현수의 차를 먼저 결승선으로 밀 것이다.가로로 있는 파란색 차와 세로로 있는 빨간색 차의 바퀴는 빠른 속도로 회전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어두운 밤, 두 차는 눈부신 불꽃을 내뿜었다.빨간색 차는 어쩔 수 없이 파란색 차를 결승점으로 밀었다.파란색 차의 바퀴가 먼저 노란 선을 넘었다.이번 경기로 엄창민은 뭔가 큰 깨달음을 얻었다.간사하지 않은 사람은 절대 장사꾼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그런데 배현수... 이렇게 험한 길에서 이 정도로 거칠게 달린다고? 파란색 페라리의 옆구리 중간 부위는 이미 움푹 패어 있었다.엄창민은 빨간색 차를 일정 거리 후진한 후, 화가 잔뜩 난 얼굴로 차에서 내렸다.“배현수! 당신 미쳤어요? 이러다가 내 차에 치여 죽으면 어떡하려고요! 환희가 일부러 나를 원망하게 하려고 작정한 거예요?”침착하게 차에서 내린 배현수는 덤덤한 얼굴로 말했다.“엄창민 씨 때문에 죽는 일은 없을 거예요. 죽어도 내 탓이고요.”“만약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배현수 씨 차의 운전석을 들이받았을 거예요.”“그래서 빠른 속도로 달렸잖아요. 엄창민 씨도 차 운전석을 들이받지 않았고요.”배현수는 여전히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다. 마치 조금 전의 모든 것이 자기와 무관한 것처럼 평온한 모습이었다.그러자 엄창민이 큰소리로 외쳤다.“우리는 목숨을 건
딸깍.작고 밝은 불꽃이 반짝 피었다.고개를 숙여 담배에 불을 붙인 배현수는 담뱃갑에서 담배 한 대를 꺼내 엄창민에게 던졌다.엄창민은 일단 받긴 했으나 피울 생각이 없었다.“평소에 담배를 안 피워서요.”배현수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엄창민 씨의 인생에 유진이를 얻지 못하는 것 말고는 다른 걱정거리는 없었을 것 같은데.”농담인 듯 아닌듯한 말투였지만 결코 경멸스럽지는 않았다.“지금 잘난 척하는 거예요?”“부러워요.”차 옆에 기댄 배현수는 입에서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그윽한 이목구비가 희미한 연기에 가려져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아주 담백하게 한마디만 내뱉었을 뿐이었다.잠시 멍해 있던 엄창민은 이내 피식 웃었다.“내가 부럽다고요? 나에게 있는 것은 배현수 씨도 다 갖고 있잖아요. 나에게 없는 것까지도 다 갖고 있고요. 뭐가 부러운데요? 내가 자유로운 게? 그래서 혼자인 게?”엄창민을 힐끗 본 배현수는 웃을 듯 말 듯 한 얼굴로 말했다.“시간이 많은 게 부러워요. 유진이를 얻지 못했지만 마음만 먹으면 옆에서 평생 지켜줄 수 있잖아요.”조롱인 듯하면서도 진심인 것 같았다.엄창민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무슨 뜻이에요? 내가 아무리 스위스에 유진이와 선유를 데려가려 한다고 해도 유진이와 선유가 저를 따라오지 않을 거예요.”배현수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 말했다.“같이 갈 거예요. 그건 내가 설득할 수 있어요.”정말 싫다고 하면 납치해서 보낼 수도 있다.엄창민은 배현수의 말이 믿기지 않는 듯했다.“어떻게 설득할 건데요? 유진이를 속이기라도 하려는 거예요?”“속여서 떠날 수만 있다면, 그래서 남은 인생을 안전하게 보낼 수만 있다면 거짓말쯤은 얼마든지 할 수 있어요.”엄창민은 점점 더 이해가 되지 않았다.“성남에 엄씨 가문이 있는 한, 유진이를 건드릴 사람은 없어요.”“드래곤 파가 접근할 거예요.”고개를 든 배현수의 눈빛에 음흉한 빛이 스쳐 지나갔다.이 한마디를 듣는 순간, 엄창민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드
엄창민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뭐라고?”전화기 너머의 엄명월은 다급히 말했다.“당장 홍보팀을 통해서 정식으로 입장발표를 해야 될 것 같아. 안 그러면 내일 주주총회에서 임직원들이 난리를 칠 거야. 일단 나는 엄씨 사택으로 먼저 돌아갈게. 근데 오빠는 어디야?”“금방 갈게.”...엄씨 사택으로 돌아가니 집안 분위기는 한껏 더 긴장된 상태였다.엄준이 혼수상태에 빠진 소식은 이미 각종 플랫폼의 실시간 인기 검색어에 올랐다.성행 그룹의 주인이 바뀔 것이라는 추측도 분분했다.정식으로 입장발표를 하지 않으면 내일 주가가 반드시 내려갈 것이다.엄명월은 검색어 화면이 켜진 휴대전화를 ‘쾅’하고 탁자 위에 내려놓으며 말했다.“오빠, 누가 한 짓일까? 아버지는 어제 쓰러지셨어. 병원에는 우리 몇 명밖에 없었고. 외부인이 이렇게 빨리 소식을 퍼뜨릴 리가 없잖아?”엄명월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앉아 있는 사람들을 훑어봤다.엄창민? 조유진? 백소미? 아니면 배현수?그녀의 매서운 눈빛은 이내 구석에 앉아 초콜릿을 먹고 있는 선유에게로 향했다.선유는 초콜릿으로 물든 시커먼 앞니를 드러내며 초롱초롱한 눈으로 그녀를 보면서 말했다.“이모, 저 아니에요.”그러자 엄명월은 코웃음을 쳤다.“너에게 그럴 능력이 어디 있겠어?”선유는 다시 대꾸했다.“우리 엄마도 아니에요. 오후 내내 엄마와 같이 있었는데 핸드폰도 별로 보지 않았어요.”아이가 이런 상황에 끼면 안 된다고 판단한 조유진은 선유를 달래 위층으로 보내서 먼저 자게 했다.아래층에서 몇몇 어른들은 아직도 눈치싸움을 하고 있었다.이때 백소미가 목적이 있는 듯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아빠가 혼수상태에 빠졌다는 소식이 외부에 알려지는 게 엄씨 가족에게는 좋을 게 없지만 외부인에게는 좋을지 안 좋을지 모르겠어요.”그것은 옆에 있는 배현수를 가리키는 말이었다.어쨌든 지금 여기에 외부인은 배현수 말고 아무도 없었다.배현수가 입을 열려 할 때, 조유진이 나섰다.“현수 씨는 내가 데려온 거예요. 어르신이 혼
모두가 이상한 눈빛으로 보고 있었다. ‘외부인’ 배현수는 아무 말 없이 조유진의 뒤를 따라 계단을 올라갔다.거실 소파에 앉아 있는 백소미는 그들을 바라보며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창민 오빠, 엄연히 말하면 조유진도 남이죠. 아빠도 혼수상태이시고 한동안 회사 내부도 분명 매우 어수선할 거예요. 그런데 집에 외부인이 이렇게 많아서 되겠어요?”만약 조유진이 엄준의 친딸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그동안 계획했던 일이 모두 물거품이 된다.엄창민은 차가운 얼굴로 백소미를 보며 말했다.“유진이가 남이면 나도 남이야. 나도 유진이처럼 아버지가 데려온 수양딸, 수양아들에 불과하니까.”입술을 깨문 백소미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이때 옆에 앉아 있던 엄명월의 휴대전화에서 ‘딩동' 소리가 울렸다. 한 통의 메시지가 온 것이다.메시지를 본 엄명월은 눈을 가늘게 뜨더니 바로 읊기 시작했다.“성행 그룹 엄준의 하나뿐인 친딸이 지분 35%를 물려받아 그룹의 최대주주이자 실소유주가 될 거라고?”백소미를 본 엄명월은 얼음장같이 차가운 얼굴로 날카로운 웃음을 지었다. “설명해봐, 어떻게 된 일이야.”백소미는 전혀 주눅 든 기색이 없었다.“아마 언론과 네티즌 수사대에서 추측한 내용인 것 같아요.”“이렇게 짧은 시간에 바로 실검에 오른다고? 백소미, 내가 바보로 보여? 아버지의 주식을 이렇게 급하게 상속받겠다고? 그러니까 아버지가 혼수상태에 빠졌다는 내용도 네가 외부에 퍼뜨린 거네?”백소미는 당당하게 대꾸했다.“그랬으면 뭐요? 나는 아빠의 유일한 친딸이에요. 아빠가 혼수상태에 빠진 지금 이 상황에 가장 좋은 방법은 내가 나서서 주주와 회사를 안정시키는 것밖에 없어요. 언니와 창민 오빠 두 분 모두 회사에 대한 공로가 크다는 것은 알아요. 하지만 결국에는 아빠가 입양한 자식일 뿐이에요. 회사를 물려받을 권리가 없...”엄명월이 코웃음을 치며 백소미의 말을 끊었다.“네가 아버지의 친딸인지 아닌지 아직 확실하지 않아.”“그럼 유전자 검사 결과를 조작이라도 했다는 말이에
백소미는 악랄한 눈빛으로 엄명월을 노려봤다.이것은 백소미를 자기편으로 만들려는 협박이었다. 엄명월의 말을 거역하는 순간 바로 뒤에서 칼을 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엄명월은 이내 환하게 웃더니 잡고 있던 백소미의 손목을 놓으며 엄창민에게 말했다.“시간이 늦었으니 먼저 집에 갈게. 내일 아침 주주총회에서 봐.”엄명월의 뒷모습을 빤히 쳐다보는 백소미의 눈빛에 순간 살기가 번쩍였다.엄명월도 더 이상 남겨둬서는 안 될 것 같다....위층, 게스트 룸.방문을 닫은 조유진은 차가운 눈빛으로 배현수를 바라보며 말했다.“지금 엄씨 집안 상황을 보니 선유를 데리고 여기 있기가 어려울 것 같아요. 창민 오빠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도 않고요. 물론 대제주시에 가서 현수 씨 걱정하게 하고 싶지도 않아요. 당분간 선유와 함께 성남에 잠시 머물 집은 마련해줘야 할 것 같아요.”몇 초간 생각에 잠겨 있던 배현수가 갑자기 물었다.“스위스에 갈 생각은 없어?”성남으로 보낸 이유는 드래곤 파가 엄씨 집안을 주시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엄준이 혼수상태에 빠진 것이 어쩌면 드래곤 파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엄씨 가문도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 이 집에 드래곤 파의 스파이가 있을 가능성도 있다.조유진과 선유를 스위스에 보내는 것이 현재로서는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조유진은 천천히 배현수를 올려다보며 물었다.“나와 선유만 스위스에 가라고요? 우리 같이 가는 게 아니라요?”지난번, 영화관에서 [속죄]라는 영화를 볼 때, 배현수는 약속했었다. 회사 일을 어느 정도 정리하면 선유까지 데리고 스위스에 가서 정착해 살자고...오랫동안 침묵하던 배현수는 침을 꿀꺽 삼키고 말했다.“그곳에 가면 마중 나온 사람이 있을 거야. 일상생활은 걱정할 필요 없어. 네가 영어를 잘하니까 의사소통에 문제도 없을 거고.”이 뜻은 더 묻지 않아도 무슨 말인지 너무 확실했다.조유진은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현수 씨가 안 가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인데요? 나와 선유를 스위스로 내
조유진의 눈에 걱정이 가득했다.그녀를 내려다본 배현수는 담백한 웃음을 지었다.“내가 중독됐다면 지금쯤 엄 어르신처럼 쓰러져 있지 않았을까?”배현수는 얼굴의 감정을 빈틈없이 숨기고 있었다.별다른 기색이 보이지 않자 조유진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엄준이 혼수상태인 것을 떠올리니 기분이 너무 우울했다.“어르신이 중독된 거라면 해독제는요?”“글쎄...”배현수가 잘 모른다는 것은 엄준이 진짜로 위독하다는 뜻이 아닐까?순간 조유진은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가슴이 먹먹했다. 엄준은 그녀 생명의 은인이자 처음으로 아버지의 사랑을 느끼게 해 준 사람이다. 혈연관계는 없었지만 엄준과 함께 있는 것이 왠지 모르게 친근하게 느껴졌다.배현수는 차가운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물었다.“어르신이 걱정돼서 그래?”“네, 어르신이 나를 구해주기도 했고 병도 치료할 수 있게 미국에 보내줬어요. 치료하는 동안 너무 힘들어서 버티지 못할 뻔한 적도 많아요. 그때 만약 어르신의 응원이 없었더라면 나는 진작...”엄준은 마치 친아버지처럼 그녀에게 힘이 되어 주었다.그녀는 예전에 충남 시장의 딸이었다. 하지만 한 번도 가족애를 느껴본 적이 없었다. 조범의 딸로 살면서 더 많은 것들이 그녀를 억압하고 있었고 그것은 마치 끝이 보이지 않는 암흑 같았다.공해 바다에서의 큰 폭발로 조범은 죽었다. 슬픈 마음도 있었지만 감개무량한 감정이 더 컸다. 이렇게 악랄한 사람은 언젠가 분명 지옥에 갈 것이기 때문이다.그러나 엄준처럼 자상한 사람은 절대 죽으면 안 된다.물론 삶과 죽음을 넘나들었던 두 사람에게 짧은 이별은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작았다.하지만 스위스라는 이 나라는 너무 멀어 왠지 모르게 무서운 마음이 들었다.조유진은 투정을 부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배현수를 보고 있자니 며칠 동안 쌓인 감정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코끝이 찡하더니 눈시울이 붉어졌다. “가고 싶지 않아요. 대제주시도 싫고 성남도 싫어요. 스위스는 더더욱
입꼬리를 양옆으로 올린 조유진은 마치 스스로를 비웃는 듯했다.“나 너무 못났죠?”자존심은 이러면 안 된다고 얘기하고 있었다.이성은 더더욱 그녀를 설득하고 있었다. ‘조유진, 더 이상 매달리지 마. 이 남자는 너와 결혼할 생각이 없어. 그렇게 못 난 사람처럼 굴지 마!’하지만 마음속에서 무시할 수 없는 목소리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조유진, 이 사람은 배현수야. 꼬박 7년을 그리워한 사람이라고. 그 사람이 지금 눈앞에 있어. 조금만, 조금만 더 적극적으로 행동하면 이 사람을 잡을 수 있지 않을까?’확실하지 않았지만 머리보다 몸이 그를 붙잡고 있었다.배현수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시뻘게진 눈실울은 어느새 약해진 그의 마음을 조금씩 드러내고 있었다. 그는 온 힘을 다해 그의 부드러움을 짓누르고 있었다.조유진은 당장이라도 깨지고 부서질 것 같이 연약해 보였다.배현수는 담담하고 차분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마음속은 이루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였다.그녀 때문에 마음이 약해진 적은 수도 없이 많았다. 이번이 몇 번째인지 셀 수조차 없었다.그녀에게 ‘안 된다’고 말하고 거절하려 했다.그러나 조유진은 아예 모든 것을 다 내려놓은 듯 하얀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감싸고는 입을 막아버렸다.입술과 혀가 얽히고설켜 서로를 한없이 원하고 있었다.이런 수단은 이제 너무 식상했다. 별로 신선한 느낌도 없었다.늘 모든 일에 이성을 유지하고 있는 배현수였지만 지금 이 순간, 그의 품속에 있는 사람이 조유진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모든 것이 달라졌다.조유진이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배현수는 스스로 한 번 또 한 번 이성과 감성의 싸움을 펼쳤다.다급한 그녀는 키스와 함께 온몸을 거의 배현수 품 안에 파고들다시피 했다.배현수는 엉겁결에 손을 들어 그녀의 가녀린 허리를 잡아줬다. 혹시라도 등 뒤의 책장에 부딪힐까 봐였다.그녀의 키스는 배현수의 얇은 입술부터 시작해 턱과 목젖까지 계속 이어졌다.배현수는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지만 차마 그녀를 밀
자기를 바라보는 조유진의 뜨거운 눈빛에 배현수는 장난기 섞인 얼굴로 웃더니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뺨을 주무르며 말했다.“자고 가라고 하면 단순히 잠만 자지 않을 거야.”그는 일부러 겁을 주었다.얼굴이 살짝 달아오른 조유진은 심장박동이 조금 빨라졌지만 겉으로는 태연한 척하며 말했다.“괜찮아요. 단순히 잠만 잔 적이 몇 번이나 된다고요?”배현수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조유진은 그의 손을 더 꽉 움켜쥐었다. 혹시라도 도망갈까 봐 두려운 듯 말이다.배현수는 입꼬리를 올리며 너스레를 떨었다.“여기는 남의 집이야. 우리가 게스트 룸에서 너무 큰 소리를 내면... 물론 나야 상관없는데 유진아, 너는...”귀까지 빨개진 조유진은 배현수를 째려보며 말했다.“크게 움직이지 않으면 되잖아요.”일부러 작정하지 않은 이상, 큰 소리는 어느 정도 자제할 수 있다. 배현수는 그녀의 손가락을 주물럭거리며 말했다.“일단 시작하면 못 참을 수도 있어.”물론 이 말도 사실이었다.입술을 깨문 조유진은 갑자기 그더러 자고 가라고 한 말을 취소하고 싶었는지 꽉 잡고 있던 손도 어느 정도 느슨해졌다.배현수는 이렇게 그녀의 손만 잡고 있어도 불타오르는 감정에 미칠 지경이었다.조유진이 앞에서 조금만 움직여도 그는 금세 머릿속이 새하얘졌다.이런 느낌은 사람을 너무 괴롭게 했다.그녀의 손을 놓은 배현수는 갑자기 입을 열었다.“엄창민 씨와 사업 얘기 좀 하고 올게. 나 오늘 운전하지 않았는데 이따가 호텔까지 데려다줄래?”조유진은 눈빛을 반짝이더니 더 이상 투정 부리지 않고 흔쾌히 승낙했다.“그래요.”며칠 동안 감정이 삐걱거렸던 두 사람이었다. 냉전이 끝난 후가 제일 뜨거운 시기였다. 도저히 숨길 수 없었다.방문을 나서기 전, 배현수는 갑자기 큰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잡더니 얼굴을 숙이고 말했다.“한 번만 더 할까?”분명 질문이었지만 그녀가 대답하기도 전에 이미 그녀의 입술과 혀를 공격하고 있었다. 은은한 담배 냄새와 과일 차 향이 섞인 사탕의 달콤한 맛이 입속에
육성일의 압도적인 기운은 전화 너머에서도 남초윤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말을 하지 않아도 그 묵직한 압박감은 느껴졌다. 그때 어떻게 그런 용기를 냈는지, 어떻게 육씨 집안에 시집갔는지 스스로도 의아했다. 만약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차라리 구걸을 하더라도 절대 육씨 집안에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남초윤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할아버지, 부탁드려요. 저희가 약속했던 건 두 달 전이었잖아요. 아직 두 달이 채 안 지났고, 제가 지금 아기를 가졌다고 해도 확인이 안 될 수도 있어요.” 그 말에 어느 정도 일리가 있었기에 육성일도 더는 말하지 않았다. 그렇게 할아버지의 전화를 겨우 넘겼지만 전화를 끊자마자 다시 핸드폰이 시끄럽게 울렸다. 이번엔 ‘개자식’ 육지율이었다. “...” 할아버지와 손자는 통화 시간까지 맞춘 것처럼 기가 막히게 연달아 전화를 걸어온다. 그녀는 냉랭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왜요?” 육지율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무슨 폭탄이라도 먹었어요?” 육지율이 자신의 책을 내리게 만들고, 지난달과 이번 달 원고료도 다 날려버린 상황에서 그녀가 전화를 받아준 것만으로도 기적이었다. 하지만 결혼 생활은 아직 유지 중이었고 필요한 것도 있으니 남초윤은 결국 목소리를 가다듬고 좀 더 부드럽게 말했다. “지율 오빠, 무슨 일이에요?” “... 뭐라고 불렀어요?” “지~율~오~빠~” 그녀는 유설영의 말투를 흉내 내며, 아니, 오히려 더 능숙하게 말했다. 육지율은 순간 닭살이 돋았다. “제발 평소처럼 말해요. 저녁에 내 친구가 귀국하는데 같이 식사해요. 6시에 잡지사로 데리러 갈게요.” 남초윤은 단번에 거절했다. “난 안 갈래요.” “저녁에 뭐 다른 약속 있어요?” 남초윤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결혼한 지 3년 됐지만 당신은 나한테 친구 한 명도 소개해 준 적 없잖아요.” 그리고 이제 곧 이혼할 텐데 친구를 만날 필요는 더 없었다.이혼하고 나서 친구들이
조유진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학교에서 누가 너 괴롭히진 않았어?” 배선유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응, 나 괴롭히는 사람 없어. 할아버지가 우리 학교에 엄청난 돈을 기부하셔서 선생님들도 항상 나한테 잘해주시고 많이 관심 해주셨어. 그래서 나도 함부로 장난칠 수가 없어. 혹시 선생님이 할아버지한테 이르실까 봐.” 배현수는 이 말에 전혀 놀라지 않았다. 배선유는 작은 악동처럼 말이 많았고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는 아이였다. 배현수의 말에도 자주 대꾸를 하니, 만약 동급생에게 괴롭힘을 당했다면 벌써부터 떠벌렸을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남을 괴롭히는 쪽에 더 가까웠다. 성남에서 엄준은 배선유를 엄청나게 아끼며 키웠고, 그래서인지 아이는 주눅이 들지 않고 활발하게 자랐다.조유진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다행이네. 우리 선유가 공부를 게을리할 걱정은 없겠어.” 배현수는 딸을 겁주듯 말했다. “너 공부 안 하고 일찍 연애라도 시작하면, 널 대제주에 데려와서 24시간 동안 지켜볼 거야.” 배선유는 입술을 내밀며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 이건 너무 심해요! 나 혹시 쓰레기통에서 주워 온 거 아니에요?” 배현수는 코웃음을 치며 엄격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말했다. “공부 안 하면 좋은 날은 없을 거야.” 잠시 후, 학교 종이 울릴 시간이 가까워졌다. 배선유는 전화를 끊으려다가 친구가 그린 결혼사진 두 장을 영상 속으로 건네받았다. “선유야! 너랑 지우의 결혼사진 내가 그려놨어! 한 번 봐봐!” 배선유가 물었다. “한 장에 얼마야?” “너니까 공짜로 해줄게! 대신 다음번엔 나랑 결혼해 줄 수 있어?” “생각해볼게!” “...” 이 속도로라면 그들 부부는 도대체 몇 명의 사위를 맞이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한편, 스타라이트 매거진에서.남초윤이 사이트 편집자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 그녀의 책은 예상대로 플랫폼에서 삭제되었고 이달 원고료는 한 푼도 들어오지 않
[합법적 부부] 함께 올라온 사진엔 결혼반지를 낀 두 손이 하트 모양을 그리고 있었다. 이 게시글이 올라가자마자 마치 깊은 바다에 떨어진 폭탄처럼 큰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수많은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몰려들어 반응했다. 육지율: [8년의 여정 끝에 드디어 자랑할 수 있네!] 송하진: [어! 전 두 사람 목숨 구해준 은인이에요. 제가 아니었으면 두 사람이 어떻게 혼인신고까지 했겠어요? 당장 절 주빈으로 식사 대접해요!] 남초윤: [아아아아! 유진이를 결혼이라는 무덤 속으로 끌어들이다니! 대표님 너무하세요!] 엄창민: [내 여동생한테 잘해요. 혹시라도 괴롭히면 내 주먹이 용서 못 해요!] 엄명월: [형부! 이렇게 좋은 일에 저희한테 뭐라도 사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강이찬: [축하해, 결국 원하는 대로 됐네.] 심미경: [백년해로하세요. 행복하길 기원합니다!] 서정호: [대표님, 일 다 끝냈으면 빨리 돌아오세요. 의사 선생님이 여기서 엄청 화내고 있어요. 저 더는 못 버틸 것 같아요!] 학교 가기 싫어: [와! 아빠랑 엄마가 드디어 결혼했네요! 헤헷, 아빠, 나도 오늘 결혼했어요!] 배현수는 배선유의 댓글을 보고 순간 검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조유진이 운전하며 그의 미세한 변화를 눈치채고 물었다. “왜 그래요?” “선유가 결혼했다는데.” “뭐라고요?” 조유진은 깜짝 놀라 차를 도로 옆에 세우고 급히 배선유에게 영상 통화를 걸었다. 저쪽에서 배선유는 학교에 있었는데 마침 쉬는 시간이었다. 외국어 학교라 분위기가 자유로워 아이들은 평소에도 부모님과 연락을 하기 위해 휴대폰을 가지고 다녔다. 배선유는 전화를 받자마자 얼굴을 카메라 앞으로 들이밀었다. “엄마, 아빠! 나 사진 보고 싶어!” 조유진은 그녀에게 사진을 보여주고 나서 물었다. “선유야, 아까 결혼했다고 했잖아. 누구랑 결혼한 거야?” “우리 반 한지우랑! 엄마, 나 오늘 엄청 많은 축의금을 받았어! 내가 다 적어 놨어!”
조유진은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갈게요.” 그가 환자라는 사실을 떠올리며 이번 한 번은 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 다음 날 이른 아침. 서정호가 산성 별장에서 두 벌의 정장과 결혼 서류를 준비해왔다. 조유진은 오랜만에 풀 메이크업을 하고 머리도 고데기로 말았다. 그녀는 하얀 오프숄더 드레스를 입고 사진에 잘 나올 수 있도록 최대한 신경 썼다. 그녀는 한동안 이렇게까지 꾸미지 않았는데 하이힐을 신고 배현수 앞에 서니 그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조금 어색해졌다. 그래서 물었다. “나 어때요?” “아름다워. 넌 언제나 아름다워.” 배현수는 전혀 망설임 없이 그녀를 칭찬했다. 조유진은 웃음을 참으며 옆에 있던 넥타이를 집어 들고 배현수에게 매어주었다. 배현수는 그녀의 손길에 고개를 숙이며 협조했다. 조유진은 평소와 다르게 더 복잡하고 정중한 ‘엘드리지 매듭’으로 넥타이를 맸는데 배현수는 평소에 간단한 윈저 매듭만 했었다. “이 매듭은 좀 생소하네.” 조유진은 넥타이를 다 매고 나서 그의 셔츠와 정장 재킷의 깃을 정리해 주었다. “이게 엘드리지 매듭이라고 해요. 중요한 자리에서 어울리는 방식이죠. 어때요, 괜찮아요?” “멋져. 하지만 여보, 우리 서둘러야 해. 조금 있으면 의사가 올 거야.” 웃으며 농담하듯 이야기하던 배현수는 조유진의 외투를 챙겨 그녀의 어깨에 걸쳐 주고, 그녀를 한 손으로 감싸 병실을 몰래 빠져나갔다. 두 사람은 마치 도망치듯 병원을 빠져나와 차에 올랐다. ... 그들이 빠져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의사가 병실에 회진을 왔다. 하지만 환자와 보호자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고 그곳에는 ‘무관한 사람’만 남아 있었다. 의사는 엄숙한 표정으로 서정호를 보며 물었다. “환자는 어디 갔죠? 튜브까지 다 뽑다니, 누가 뽑았습니까?” 서정호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환자 본인이 뽑았습니다.” “도대체 어디 간 겁니까? 팔을 정말 망가지게 할 작정인가요
배현수의 가슴이 떨렸다. 그는 조유진과 이마를 맞대며 낮게 속삭였다. “그때 난 네 옆에 있진 않았지만 네 뒤에서 계속 지켜보고 있었어. 그런데 왜 울었어?” “현수 씨 생각이 났어요.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게 너무 슬펐거든요. 내가 이렇게 좋은 남자를 잃어버린 것 같아서, 그게 너무 아쉽고 후회스러웠죠. 그래서 울었어요.” 지금 이렇게 그를 바라보고 있으니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은 느낌이었다. 조유진의 눈에는 여전히 눈물이 맺혀 있었다. 하지만 이번 눈물은 슬픔이나 후회 때문이 아니었다. 감동과 감사함 때문이었다. 운명이 그들을 온갖 고난 속에서도 끝끝내 묶어 놓았고, 그들 사이에선 이제 더 이상 헤어질 수 없는 깊은 연대가 생겼기 때문이다. 배현수는 긴 손가락을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천천히 끼워 넣으며 손을 꼭 맞잡았다. 순간 그들의 손바닥에서 따뜻함이 퍼져나갔다. 그는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진아, 넌 한 번도 날 잃은 적 없어. 우리가 몇 번을 떨어져도, 얼마나 오랫동안 떨어져 있더라도 난 결국 널 찾아내서 꼭 안고 말해줄 거야. 사랑한다고. 오직 너만 사랑한다고.” 처음부터 끝까지, 조유진은 배현수의 유일한 선택이었고 그 선택은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었다. 조유진은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웃었다. “현수 씨, 우리 영원히 함께할 수 있을까요?” “그럼.” 그의 대답은 8년 전과 똑같았다. 짧지만 확고했으며 1초의 망설임도 없었다. 조유진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손목에 걸린 달콤한 연녹색 비취 팔찌를 내려다보았다. “상처가 나으면 우리 같이 아주머니를 위한 좋은 묘지를 고르러 가요. 그분을 위한 의관묘라도 만들어 드리는 게 어때요?” “아직도 ‘아주머니’라고 불러?” 조유진은 순간 얼굴이 뜨거워지며 말투를 바꿨다. 배현수는 그녀의 팔찌를 손가락으로 살며시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풍수 좋은 곳을 따로 고를 필요는 없어. 어머니께
육지율은 그 필명이 어딘가 익숙하다고 느꼈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문득 기억해 냈다. “이 자식! 기억났어! 이 녀석이 책에서 날 모욕하지 않았나? 내 명성을 망가뜨렸잖아?” 남초윤은 급하게 말했다. “잘못 본 거 아니에요? 비엘 작가가 주인공을 모욕할 리가 없어요! 그러면 밥숟가락 들고 욕하는 것과 뭐가 다르겠어요?” “나를 ‘수’로 묘사한 게 모욕이 아니고 뭐예요? 왜 항상 배현수가 공이냐고?” 남초윤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는 그 부분을 신경 쓰고 있었던 거였다.남초윤은 그가 진짜 작가를 고소할까 봐 걱정되었다. 그래서 변명하듯 말했다. “다음번엔 지율 씨가 공이고, 배 대표님이 수가 될 수도 있잖아요. 원래 BL 소설에서는 공수 구분이 모호해요. 겉보기에 수 같아도 사실은 공일 수도 있다고요!” 조유진은 살짝 의문을 제기했다. “난 현수 씨가 수 같지는 않았는데. 만약 현수 씨가 진짜 수라면 캐릭터 붕괴지. 차라리 육 변호사님이 수인 게 더 어울려. 자유롭고, 매력적이고, 다정하잖아.”“?”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육지율은 얼굴이 시커멓게 변하며 조유진에게 따졌다. “아니, 조유진. 내가 약해 보이는 수 같은 느낌을 준다고?” “...” 배현수는 차갑게 말했다. “유진이가 쓴 것도 아닌데 왜 화내? 그럴 시간 있으면 작가나 고소해.” 남초윤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 그냥 재미로 쓴 거지 무슨 큰 잘못을 한 것도 아니잖아요? 작가를 고소하면 너무 쪼잔해 보일 거예요!” 하지만 육지율은 이성을 잃고 이를 악물었다. “쪼잔해 보이든 말든, 그 책을 하차할 거예요!” 자신이 소설 속에서 수 역할로 묘사되었고, 그것도 많은 사람에게 읽히고 있다는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돋았다. 조유진은 객관적으로 말했다. “사실 책 내용은 나쁘지 않아요. 꽤 재미있고 독자도 많아요.” “독자가 몇 명인데?”“몇만 명 정도?” “뭐?”‘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날 수로 상상했
병실에서 조유진은 그가 누워있는 침대 옆에 앉아 있다가 잠들었다. 잠에 들어서도 손가락이 배현수의 손에 살짝 얽혀 있었는데 다정하고 달콤하기 그지없었다. 이 사진은 완전히 남자 친구 시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입원 생활이 지루하다고 하다니.육지율이 댓글을 남겼다. “뭐야, 입원했어? 혹시 가정 폭력이라도 당한 거야?” 댓글을 남기고 나서 육지율은 차에 시동을 걸며 남초윤에게 말했다. “과일 바구니 좀 사서 병문안이나 가요. 친구가 입원했어요.” “친구? 설마 배 대표님이세요? 어디 아파요?” 육지율은 웃으며 말했다. “글쎄요. 진짜 아플 수도 있고 그냥 꾀병일 수도 있고.” 혹시 모른다. 꾀병일지도....병원에서는 조금 전 장은숙이 산성 별장에서 저녁 식사를 가져왔다. 수술 후 얼마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 밤은 죽 같은 유동식만 먹어야 했다. 배현수는 오른손을 쓸 수 없었기에 조유진이 죽 그릇을 들고 숟가락으로 그에게 먹여주고 있었다. 첫 숟가락을 그의 입 앞에 가져가자 배현수는 뜨겁다고 투덜댔다. 조유진이 후후 불어 온도를 맞춘 후 말했다. “이제 적당히 식었어요.” 배현수는 그제야 죽을 한 입 삼켰다. 그 순간 병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장난스러운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며칠 못 본 사이에 아기로 됐네? 밥도 혼자 못 먹고, 조유진이 널 너무 오냐오냐한 거 아냐?” 조유진이 놀라서 뒤돌아보니, 육지율과 남초윤이 병실에 들어와 있었다. 그녀는 웃으며 설명했다. “오른쪽 어깨에 부상을 입었어요. 의사 선생님이 며칠 동안 오른손은 쓰지 말라고 하셨어요. 상처가 더 심해질 수 있거든요.” 그러자 육지율은 다짜고짜 그의 오른쪽 어깨를 툭 쳤다. “진짜야?” 배현수는 고통에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욕설을 퍼부었다. “이 미친놈아!” 조유진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변호사님, 진짜로 다쳤다니까요! 어깨에 구멍이 났다고요, 함부로 건드리지 마세요!
그녀를 겨우 한 번 데리러 온 김에 출퇴근길의 불편함을 느끼고는 아예 차를 사서 해결하려고 하다니, 정말 육지율 다운 방식이었다.이 4S 매장에서 파는 차들은 모두 포르쉐였고 가격도 만만치 않았다. 가장 저렴한 모델도 수천억 원대였다. 남초윤은 이미 남씨 집안이 육지율에게 너무 많은 빚을 지고 있었기에, 그가 차를 선물해 주겠다고 해도 받을 수 없었다.남초윤은 차분히 말했다. “앞으로는 출퇴근 길에 당신을 귀찮게 하지 않을 테니, 굳이 차를 선물할 필요는 없어요.”육지율은 순간 멈칫했다가 살짝 비웃으며 말했다. “차 한 대 선물한다고 귀찮다는 딱지가 붙어요? 이런 확산적 사고방식은 참 대단하네.”“....”정말 그런 게 아니란 말인가?평소에도 성격이 불 같았던 육지율은 차를 주겠다고 하면서도 그녀를 달래는 상황이 우스웠는지 어이없어 웃었다. 둘 중 누가 더 성격이 나쁜지 모를 일이었다.영업 직원은 남초윤을 육지율이 외부 애인으로 오해했고, 이 큰 거래가 깨질까 봐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가씨, 변호사님께서 차를 사주시는 건 출퇴근 시간을 줄여서 그 시간 동안 조금이라도 더 쉴 수 있게 해주려는 마음이 아닐까요?”남초윤은 더 이상 그의 돈을 쓰고 싶지 않았다. 이미 갚을 수 없는 빚이 너무 많았고 계속해서 더 쓴다면 두 아이를 낳아야 겨우 그 빚을 다 갚을 수 있을 것 같았다.그러나 육지율은 그 여느 때처럼 행동했다. 그는 VIP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빨리 골라요. 차 안 사면 집에 못 돌아가요.”남초윤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여자 영업 직원이 다가와 다양한 모델을 소개할 때, 그저 듣기만 했다. 그 직원은 미소를 띠며 말도 아주 달콤하게 했다. “변호사님은 저희 매장의 단골이세요. 그런데 여자를 데리고 온 건 이번이 처음이네요. 변호사님이 정말로 많이 아끼시는 것 같아요. 비싼 차를 고르시면 아마 더 기뻐하실 거예요.”역시, 판매왕이었다.감정적 가치를 제공하는 법을 너무나 잘 아는 직원이었다. 하지만 남초윤은 그저 외부의
남초윤은 결혼 상태를 한 번도 업데이트한 적이 없었다. 동료들 눈에는 여전히 미혼으로 보였다.처음 그녀와 육지율의 스캔들이 터졌을 때 온 세상이 떠들썩했지만 사실 모두 육지율의 매력적인 외모 때문이었다. 아무도 남초윤처럼 작고 평범한 존재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육지율이 그녀와 결혼하기로 결정했을 때 그들의 침대 사진이 언론이나 남재원에게 유출되지 않은 것도 기적이었다. 사람들은 그저 육지율이라는 유명한 바람둥이가 ‘함정'에 빠져 순진한 여자와 관계를 맺은 후, 마지못해 결혼했다는 소문만 믿고 있었다.육지율이 연예계 인물이 아닌 만큼 동료들 중에서도 아무도 그 사건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육지율이 ‘좋은 집안의 아들’ 이라는 사실만 기억하고 그의 결혼 상대가 누군지에는 무관심했다. 그녀는 어디에도 크게 드러나지 않았고 언론에서도 그의 곁에 서는 일이 거의 없었다. 남초윤은 그렇게 세상 사람들의 눈에 숨겨져 있었다.동료들은 그저 그녀가 조금 집안 배경이 있는 부유한 여자인 줄로만 알았고 육지율의 아내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어쨌든 육지율의 아내라면 아무리 상황이 나빠도 그들과 같이 일하며 고생할 일은 없을 테니까. 설령 과거에 파파라치 일을 했더라도 그렇게 높은 곳에 시집갔다면 육씨 집안이 그녀를 계속 그 일을 하도록 놔두지 않았을 거라고 여겼다.비록 세상은 모두 직업의 평등을 외치고 있지만 상류 사회에는 여전히 그들만의 규칙이 있었다. 체면과 명예가 그들의 신분과 존엄을 상징했다. 파파라치라는 직업은 육씨 집안에게 있어 절대 자랑스러울 수 없는 일이었으니, 육지율과 강란희가 그녀에게 좀 더 체면 있고 유망한 직업들을 제안했지만 남초윤은 그들의 호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그렇게 시간을 보낸 끝에 동료들은 하나둘씩 퇴근하고 남초윤만 남았다. 한 시간이 흐른 뒤 남초윤은 휴대폰 화면을 확인했다. 저녁 7시가 되었다. 그녀는 통화 기록을 훑어보고 다시 한 번 메시지를 확인했지만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아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