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꼬리를 양옆으로 올린 조유진은 마치 스스로를 비웃는 듯했다.“나 너무 못났죠?”자존심은 이러면 안 된다고 얘기하고 있었다.이성은 더더욱 그녀를 설득하고 있었다. ‘조유진, 더 이상 매달리지 마. 이 남자는 너와 결혼할 생각이 없어. 그렇게 못 난 사람처럼 굴지 마!’하지만 마음속에서 무시할 수 없는 목소리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조유진, 이 사람은 배현수야. 꼬박 7년을 그리워한 사람이라고. 그 사람이 지금 눈앞에 있어. 조금만, 조금만 더 적극적으로 행동하면 이 사람을 잡을 수 있지 않을까?’확실하지 않았지만 머리보다 몸이 그를 붙잡고 있었다.배현수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시뻘게진 눈실울은 어느새 약해진 그의 마음을 조금씩 드러내고 있었다. 그는 온 힘을 다해 그의 부드러움을 짓누르고 있었다.조유진은 당장이라도 깨지고 부서질 것 같이 연약해 보였다.배현수는 담담하고 차분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마음속은 이루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였다.그녀 때문에 마음이 약해진 적은 수도 없이 많았다. 이번이 몇 번째인지 셀 수조차 없었다.그녀에게 ‘안 된다’고 말하고 거절하려 했다.그러나 조유진은 아예 모든 것을 다 내려놓은 듯 하얀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감싸고는 입을 막아버렸다.입술과 혀가 얽히고설켜 서로를 한없이 원하고 있었다.이런 수단은 이제 너무 식상했다. 별로 신선한 느낌도 없었다.늘 모든 일에 이성을 유지하고 있는 배현수였지만 지금 이 순간, 그의 품속에 있는 사람이 조유진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모든 것이 달라졌다.조유진이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배현수는 스스로 한 번 또 한 번 이성과 감성의 싸움을 펼쳤다.다급한 그녀는 키스와 함께 온몸을 거의 배현수 품 안에 파고들다시피 했다.배현수는 엉겁결에 손을 들어 그녀의 가녀린 허리를 잡아줬다. 혹시라도 등 뒤의 책장에 부딪힐까 봐였다.그녀의 키스는 배현수의 얇은 입술부터 시작해 턱과 목젖까지 계속 이어졌다.배현수는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지만 차마 그녀를 밀
자기를 바라보는 조유진의 뜨거운 눈빛에 배현수는 장난기 섞인 얼굴로 웃더니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뺨을 주무르며 말했다.“자고 가라고 하면 단순히 잠만 자지 않을 거야.”그는 일부러 겁을 주었다.얼굴이 살짝 달아오른 조유진은 심장박동이 조금 빨라졌지만 겉으로는 태연한 척하며 말했다.“괜찮아요. 단순히 잠만 잔 적이 몇 번이나 된다고요?”배현수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조유진은 그의 손을 더 꽉 움켜쥐었다. 혹시라도 도망갈까 봐 두려운 듯 말이다.배현수는 입꼬리를 올리며 너스레를 떨었다.“여기는 남의 집이야. 우리가 게스트 룸에서 너무 큰 소리를 내면... 물론 나야 상관없는데 유진아, 너는...”귀까지 빨개진 조유진은 배현수를 째려보며 말했다.“크게 움직이지 않으면 되잖아요.”일부러 작정하지 않은 이상, 큰 소리는 어느 정도 자제할 수 있다. 배현수는 그녀의 손가락을 주물럭거리며 말했다.“일단 시작하면 못 참을 수도 있어.”물론 이 말도 사실이었다.입술을 깨문 조유진은 갑자기 그더러 자고 가라고 한 말을 취소하고 싶었는지 꽉 잡고 있던 손도 어느 정도 느슨해졌다.배현수는 이렇게 그녀의 손만 잡고 있어도 불타오르는 감정에 미칠 지경이었다.조유진이 앞에서 조금만 움직여도 그는 금세 머릿속이 새하얘졌다.이런 느낌은 사람을 너무 괴롭게 했다.그녀의 손을 놓은 배현수는 갑자기 입을 열었다.“엄창민 씨와 사업 얘기 좀 하고 올게. 나 오늘 운전하지 않았는데 이따가 호텔까지 데려다줄래?”조유진은 눈빛을 반짝이더니 더 이상 투정 부리지 않고 흔쾌히 승낙했다.“그래요.”며칠 동안 감정이 삐걱거렸던 두 사람이었다. 냉전이 끝난 후가 제일 뜨거운 시기였다. 도저히 숨길 수 없었다.방문을 나서기 전, 배현수는 갑자기 큰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잡더니 얼굴을 숙이고 말했다.“한 번만 더 할까?”분명 질문이었지만 그녀가 대답하기도 전에 이미 그녀의 입술과 혀를 공격하고 있었다. 은은한 담배 냄새와 과일 차 향이 섞인 사탕의 달콤한 맛이 입속에
배현수는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했다.“나와 사업 얘기하면 돈을 벌 수 있어서?”조유진은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랐다.“안 보내줄 거야?”조유진이 손을 놓자 배현수는 그녀의 허리를 잡고 몸을 숙여 다시 키스했다.“조금 이따가 호텔에 데려다줘. 깨끗한 속옷 챙기는 거 잊지 말고.”얼굴이 빨개진 조유진은 방문을 나서는 배현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백소미는 배현수를 데리고 엄준의 서재로 들어갔다.서재 안은 용연 향초를 피우고 있어 따뜻하고 묵직한 나무 향이 났다.슬림한 베이지색의 모직 원피스를 입은 백소미는 온화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얼핏 보면 조유진과 비슷해 보였다.배현수를 꼬시려고 작정한 듯했다.하지만 그녀의 수법에 넘어갈 배현수가 아니었다. 이런 수법은 그저 하찮아 보일 뿐이었다.배현수는 차가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백소미 씨, 저에게 무슨 볼일이라도 있나요?”배현수 가까이에 다가간 백소미는 그의 어깨에 손을 살포시 놓았다. 동작 하나하나 모두 그를 꼬시기 위해 작정한 듯했다.“배 대표님, 저와 결혼하실래요?”인상을 찌푸린 배현수는 경멸과 조롱이 역력한 눈빛으로 말했다.“뭐라고요?”“방금 들은 그대로예요. 우리 모두 비즈니스 하는 사람들이에요. 장사꾼들은 감정보다 이익을 먼저 따지죠. 엄씨 가문의 유일한 후계자가 배 대표님과 손을 잡으면 그야말로 환상의 조합이 아닐까요? 남쪽과 북쪽의 사업 모두 우리 것이 되니까요. 성행 그룹과 SY그룹은 원래부터 협력하는 관계였어요. 배 대표님만 승낙하면 이 결혼은 성행 그룹에도 SY에도 큰 호재가 될 수 있을 거예요.”배현수는 얼음장같이 차가운 눈으로 백소미를 바라보며 말했다.“여자와 결혼해서 내 이익을 넓힐 생각 따위 없어요. 계산을 잘 못 한 것 같네요.”“유진 언니를 좋아하는 거 알아요. 그럼 이렇게 하죠. 대외적으로는 저와 결혼하고 사적으로 유진 언니를 계속 만나도 뭐라고 하지 않을게요. 제가 원하는 것은 돈이지 사람이 아니니까요. 성행 그룹의 딸과 결혼하면 배 대표님에게도 나쁠 것은
입구에 서서 남녀의 자세를 바라보면 애매하기 그지없었다. 꼭 마치 배현수가 백소미를 당장이라도 덮치려는 것 같았다. 여기에 백소미의 겁에 질린 애꿎은 표정까지 더해져 배현수는 빼도 박도 못할 상황이었다. 조유진을 본 순간 백소미는 더 높은 소리로 울부짖었다.“배 대표님, 이거 놓으세요... 유진 언니, 오해하지 마세요! 배 대표님과는 아무 일도 없었어요. 언니가 잘못 본 거예요...”설명하면 할수록 더 이상한 생각을 하게 만들었고 숨기려 할수록 더 엉뚱한 상황이 되었다.백소미의 팔을 힘껏 뿌리친 배현수는 미간을 찌푸리고 악랄한 독기를 뿜어내며 말했다.“적반하장도 유분수지! 그만 소리 질러.”왼팔이 탈골된 백소미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왼손이 아래로 축 늘어져 있었다. 너무 아팠지만 혹시라도 조금 전의 연기가 드러날까 봐 쉽게 티를 낼 수도 없었다. 방문 앞에서 차분한 얼굴로 몇 초 동안 멍하니 있던 조유진은 의아한 듯 배현수에게 물었다.“사업 얘기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왜 갑자기 싸워요?”백소미가 입을 열려고 하자 배현수는 매서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눈빛은 꼭 마치 함부로 입을 놀리면 다른 한쪽 팔도 부러뜨리겠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백소미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더니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지금은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그녀는 당황하고 억울한 눈빛으로 엄창민을 바라보며 애원했다.“창민 오빠, 저...”백소미의 신원은 아직 더 조사해야 하겠지만 적어도 현재로서는 엄씨 집안의 사람이다.엄씨 사택 안에서 배현수가 이렇게 버젓이 엄씨 집안 사람을 함부로 건드린다는 것은 도발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개를 때리려 해도 그 주인을 봐야 한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그런데 엄씨 집안 사람을 안중에도 두지 않고 이렇게 막무가내로 행동하다니! 엄창민이 눈살을 찌푸렸다. 당연히 불쾌하기 때문이다. “배 대표님, 이건 좀 아니지 않나요?”배현수는 백소미가 방금 건드린 자기의 오른쪽 어깨를 툭툭 쳤다. 얼굴은 얼음장
배현수는 차 문을 열며 조유진에게 말했다.“먼저 차에 타.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네.”엄창민과 배현수는 지붕이 없는 복도에 서서 한참이나 이야기를 나눴다.배현수가 말했다.“백소미의 신분이 의심스럽네요. 어르신의 중독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어요.”엄창민도 백소미의 정체를 의심한 적이 있었다.하지만...“만약 유전자 검사 결과가 병원에서 조작한 것이라면 등에 있는 모반은요? 설마 그것도 가짜일까요?”배현수의 눈빛이 멈칫했다.“등에 모반이요?”엄창민이 설명했다.“어르신의 친딸은 등 가운데 왼쪽에 파란색 타원형 모반이 있어요. 백소미의 등에 그 모반이 있었고요.”조유진의 등에도 파란색 모반이 있었다. 배현수는 여러 번 보았다.멍하니 서 있던 배현수의 눈빛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이때 엄창민이 말했다.“백소미는 내가 계속 지켜볼 거예요. 진짜로 드래곤 파 사람이면 어르신이 사 수 있을지도 몰라요.”배현수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갑자기 한마디 툭 내뱉었다.“레이싱에서 한 얘기는 승낙한 거로 알게요.”아무런 예고 없이 내뱉은 그의 말에 엄창민은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이봐요. 아직 대답하지 않았어요.” 그러나 배현수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큰 기럭지는 이미 마당에 있는 차를 향해 걷고 있었다. 엄창민의 말이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이 인간은 정말!’횡포하고 강압적이다.이게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의 태도란 말인가?이런 인간의 성질머리를 조유진은 평소에 어떻게 참고 견딘단 말인가?...배현수가 차에 오르자 조유진은 시동을 걸고 호텔로 향했다.조수석에 앉아 있는 남자를 힐끗 보고 물었다.“백소미가 정말 현수 씨를 꼬셨어요?”배현수의 얼굴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유진아, 설마 나를 못 믿는 거야?”생각보다 꽤 무게가 있는 말이었다. 뭔가 압력을 느낀 조유진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현수 씨의 됨됨이를 믿어요.”백소미와는... 그녀도 배현수도 별로 얘기를 나눠본 적이 없다. 그런데 언제 만났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배현수의 이글거리는 눈빛과 마주쳤다.그윽한 눈동자에는 욕망이 가득 불타오르고 있었다.뜨거운 그의 눈빛에 데일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조유진은 다시 운전대를 잡고 운전에 열중했다.이것은 동물적 감성이 아니라 성적 욕구겠지...남자의 눈빛은 그녀의 심장마저 쿵쾅쿵쾅 뛰게 했다. 하지만 이 ‘사고유발자'는 태연하게 앉아 있었다.함부로 표현하는 이 욕구와 동물적 감성은 완전히 극과 극이다.조유진은 헛기침한 후 말을 돌렸다.“백소미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아직 말 안 했어요.”배현수는 대충 에둘러댔다.“별로 한 것은 없어. 내 어깨에 손을 얹었어.”“고작 그것 때문에 그런 거예요?“응.”그래서 백소미의 한쪽 팔을 부러뜨린 거라고? 조금 전, 백소미의 왼팔은 아래로 축 늘어져 있었다. 힘을 전혀 못 썼고 완전히 탈골된 듯했다.조유진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콕 집어 어느 부분이 이상한지 설명할 수 없었다.차가 호텔 입구에 도착하자 조유진은 일부러 한마디 했다.“배 대표님, 도착했습니다.”조수석에 앉아 있던 배현수는 움직이지 않고 그녀를 쳐다보더니 웃을 듯 말 듯 한 얼굴로 말했다.“그럼 나 들어갈게?”당장이라도 차에서 내릴 기세로 차 문을 당기는 시늉을 했다.그러자 조유진은 그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진짜로 가려고요?”그러자 배현수는 다시 자리에 앉더니 곁눈질로 그녀를 보며 조롱하듯 말했다.“네가 가라고 했잖아. 유진아?”그러자 조유진이 손을 놓으며 말했다.“그래요. 가요.”이번에 배현수는 진짜로 차에서 내렸다.심지어 별로 미련이 없는 것 같아 보였다.순간 남초윤의 억지스러웠던 말들이 잘 못 된 것은 아니라고 느껴졌다. 남초윤이 늘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틀리지 않았다.“남자에게 버림받느니 차라리 남자를 먼저 버려. 어차피 남자라는 인간들은 원래부터 매정하고 감정이 없어. 감정 앞에서 여자들은 절대 남자들처럼 그렇게 쉽게 컨트롤이 안 돼.”감정을 나눈다는 것은 밀당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기
조유진은 호흡이 점점 가빠지는 것을 느꼈다.배현수의 가슴과 벽 사이에 갇혀 있던 조유진은 멍하니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시선은 그의 눈에서 입술로 이어졌고 튀어나온 그의 하얀 목젖에서 멈췄다. 눈빛도 점점 흐릿하게 변했다.조유진은 심호흡한 후 말했다.“나더러 오라고 한 것도 이러기 위해 그런 거 아니에요?”이제 손안에 넣었으니 잘난 체하는 건가?찰칵.방문을 닫은 배현수의 얼굴에 짓궂은 웃음이 번졌다.“응, 맞아. 그러니까 좀 더 적극적으로 해볼래?”무겁게 잠긴 그의 쉰 목소리는 너무 매혹적으로 들렸다. 조유진이 말을 하려 하자 그는 바로 머리를 숙여 그녀에게 키스했다.갑작스럽고 거친 키스였다.조유진은 순간 머릿속이 백지장이 되는 듯했다. 정신을 차렸을 때 심장은 쿵쾅쿵쾅 사정없이 뛰고 있었다.‘툭’하는 소리가 가볍게 났다. 종이봉투가 바닥에 떨어졌다.조유진이 손을 들어 배현수의 목을 감쌌다. 그러자 그는 곧바로 그녀의 허리와 엉덩이를 큰 손으로 감싸 안으며 위로 끌어안았다.두 발이 허공에 뜬 그녀는 현관문에 등을 기댄 채, 새끼 원숭이처럼 그의 품에 안겼다.집착스러운 키스가 더 깊어졌다.스위치가 조유진의 등에 눌려 ‘딸깍’ 소리를 냈다. 환하게 켜져 있던 헤드라이트가 꺼졌다.스위트룸 안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창밖으로 보이는 성남의 밤은 화려하고 아름다웠다.바깥 불빛이 희미하게 방안으로 비쳐 들어왔다. 조유진은 한 손으로 그의 목을 껴안고 다른 한 손으로 그의 얼굴을 만졌다. 서로의 숨결이 한데 뒤엉켰지만 조유진은 이성의 끈을 잡고 한마디 했다.“커튼 닫아요...” 배현수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이 호텔의 유리창은 밖에서 안이 안 보여.”프라이버시가 꽤 잘된 곳이었다.조유진은 반신반의한 얼굴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정말요?” ‘응’이라고 대답한 배현수는 한마디 덧붙였다.“테스트해 볼래?”“뭘 테스트해요?”어리둥절한 조유진은 어느새 옷이 전부 벗겨진 상태였다.심장은 사정없이 쿵쾅쿵쾅 뛰었다.“현수
조유진은 배현수의 목을 껴안으며 떠보듯 말했다.“배현수?”그러자 배현수는 조유진의 허리를 꼬집었다. 그러고는 실망스러운 듯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고작 그거야?”무슨 말이 듣고 싶은지 대충 짐작이 갔다.그러나 명분이 서지 않아 함부로 입에 올릴 수 없었다.어떤 일들은 언급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냥 넘어간 것이 아니다.너무 잘 알지만 서로 암묵적으로 쉽게 그 얘기를 하지 않을 뿐이다.조유진은 그렇게 눈치 없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그 단어를 쉽게 말할 수 없었다. 장난기 섞인 목소리로 그의 귓가에 대고 한마디 했다.“선유 아빠?”듣기 싫은 단어는 아니었지만 배현수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선유 아빠...이 호칭은 ‘선유'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 아버지가 딸에게 기대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그녀를 그윽하게 바라보던 배현수는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얼굴을 문지르며 말했다.“일부러 나 화나게 하려고 그러는 거야?”그를 뚫어지게 쳐다보던 조유진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갑자기 한마디 했다.“결혼도 안 했는데 무슨 호칭이 듣고 싶은 거예요?”덤덤한 한마디였지만 침대 위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변했다.사실 조유진도 이런 순간에 일부러 이런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분위기를 망치기 때문이다.배현수의 얼굴도 눈에 띄게 굳어졌다. 눈빛에는 그동안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미안한 감정이 스쳐 지났다. 그 어떤 답도 들을 수 없을 거라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는 조유진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선유가 엄씨 사택에 혼자 있어서 마음이 안 놓여요. 아무래도 가 봐야 할 것 같아요.”손을 뻗어 침대 좁은 탁자 위에 놓인 휴대전화를 집어 들고는 홈 화면을 클릭해 시간을 보았다.새벽 1시였다.“30분만 더 있다가 1시 반에 갈게요. 참, 현수 씨는 언제 대제주시로 갈 거예요?”조유진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덤덤했다.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배현수에게 소란을 피우지도 않았다.하지만 고개를 돌리는 순간, 배현수는 그녀 눈빛 속에 있는 허무함을 바로 캐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