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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52화

작가: 남희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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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유진의 눈에 걱정이 가득했다.

그녀를 내려다본 배현수는 담백한 웃음을 지었다.

“내가 중독됐다면 지금쯤 엄 어르신처럼 쓰러져 있지 않았을까?”

배현수는 얼굴의 감정을 빈틈없이 숨기고 있었다.

별다른 기색이 보이지 않자 조유진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엄준이 혼수상태인 것을 떠올리니 기분이 너무 우울했다.

“어르신이 중독된 거라면 해독제는요?”

“글쎄...”

배현수가 잘 모른다는 것은 엄준이 진짜로 위독하다는 뜻이 아닐까?

순간 조유진은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가슴이 먹먹했다.

엄준은 그녀 생명의 은인이자 처음으로 아버지의 사랑을 느끼게 해 준 사람이다. 혈연관계는 없었지만 엄준과 함께 있는 것이 왠지 모르게 친근하게 느껴졌다.

배현수는 차가운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물었다.

“어르신이 걱정돼서 그래?”

“네, 어르신이 나를 구해주기도 했고 병도 치료할 수 있게 미국에 보내줬어요. 치료하는 동안 너무 힘들어서 버티지 못할 뻔한 적도 많아요. 그때 만약 어르신의 응원이 없었더라면 나는 진작...”

엄준은 마치 친아버지처럼 그녀에게 힘이 되어 주었다.

그녀는 예전에 충남 시장의 딸이었다. 하지만 한 번도 가족애를 느껴본 적이 없었다. 조범의 딸로 살면서 더 많은 것들이 그녀를 억압하고 있었고 그것은 마치 끝이 보이지 않는 암흑 같았다.

공해 바다에서의 큰 폭발로 조범은 죽었다. 슬픈 마음도 있었지만 감개무량한 감정이 더 컸다. 이렇게 악랄한 사람은 언젠가 분명 지옥에 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엄준처럼 자상한 사람은 절대 죽으면 안 된다.

물론 삶과 죽음을 넘나들었던 두 사람에게 짧은 이별은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작았다.

하지만 스위스라는 이 나라는 너무 멀어 왠지 모르게 무서운 마음이 들었다.

조유진은 투정을 부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배현수를 보고 있자니 며칠 동안 쌓인 감정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코끝이 찡하더니 눈시울이 붉어졌다.

“가고 싶지 않아요. 대제주시도 싫고 성남도 싫어요. 스위스는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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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꼬리를 양옆으로 올린 조유진은 마치 스스로를 비웃는 듯했다.“나 너무 못났죠?”자존심은 이러면 안 된다고 얘기하고 있었다.이성은 더더욱 그녀를 설득하고 있었다. ‘조유진, 더 이상 매달리지 마. 이 남자는 너와 결혼할 생각이 없어. 그렇게 못 난 사람처럼 굴지 마!’하지만 마음속에서 무시할 수 없는 목소리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조유진, 이 사람은 배현수야. 꼬박 7년을 그리워한 사람이라고. 그 사람이 지금 눈앞에 있어. 조금만, 조금만 더 적극적으로 행동하면 이 사람을 잡을 수 있지 않을까?’확실하지 않았지만 머리보다 몸이 그를 붙잡고 있었다.배현수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시뻘게진 눈실울은 어느새 약해진 그의 마음을 조금씩 드러내고 있었다. 그는 온 힘을 다해 그의 부드러움을 짓누르고 있었다.조유진은 당장이라도 깨지고 부서질 것 같이 연약해 보였다.배현수는 담담하고 차분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마음속은 이루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였다.그녀 때문에 마음이 약해진 적은 수도 없이 많았다. 이번이 몇 번째인지 셀 수조차 없었다.그녀에게 ‘안 된다’고 말하고 거절하려 했다.그러나 조유진은 아예 모든 것을 다 내려놓은 듯 하얀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감싸고는 입을 막아버렸다.입술과 혀가 얽히고설켜 서로를 한없이 원하고 있었다.이런 수단은 이제 너무 식상했다. 별로 신선한 느낌도 없었다.늘 모든 일에 이성을 유지하고 있는 배현수였지만 지금 이 순간, 그의 품속에 있는 사람이 조유진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모든 것이 달라졌다.조유진이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배현수는 스스로 한 번 또 한 번 이성과 감성의 싸움을 펼쳤다.다급한 그녀는 키스와 함께 온몸을 거의 배현수 품 안에 파고들다시피 했다.배현수는 엉겁결에 손을 들어 그녀의 가녀린 허리를 잡아줬다. 혹시라도 등 뒤의 책장에 부딪힐까 봐였다.그녀의 키스는 배현수의 얇은 입술부터 시작해 턱과 목젖까지 계속 이어졌다.배현수는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지만 차마 그녀를 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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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언젠가 다시 만나요   제554화

    자기를 바라보는 조유진의 뜨거운 눈빛에 배현수는 장난기 섞인 얼굴로 웃더니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뺨을 주무르며 말했다.“자고 가라고 하면 단순히 잠만 자지 않을 거야.”그는 일부러 겁을 주었다.얼굴이 살짝 달아오른 조유진은 심장박동이 조금 빨라졌지만 겉으로는 태연한 척하며 말했다.“괜찮아요. 단순히 잠만 잔 적이 몇 번이나 된다고요?”배현수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조유진은 그의 손을 더 꽉 움켜쥐었다. 혹시라도 도망갈까 봐 두려운 듯 말이다.배현수는 입꼬리를 올리며 너스레를 떨었다.“여기는 남의 집이야. 우리가 게스트 룸에서 너무 큰 소리를 내면... 물론 나야 상관없는데 유진아, 너는...”귀까지 빨개진 조유진은 배현수를 째려보며 말했다.“크게 움직이지 않으면 되잖아요.”일부러 작정하지 않은 이상, 큰 소리는 어느 정도 자제할 수 있다. 배현수는 그녀의 손가락을 주물럭거리며 말했다.“일단 시작하면 못 참을 수도 있어.”물론 이 말도 사실이었다.입술을 깨문 조유진은 갑자기 그더러 자고 가라고 한 말을 취소하고 싶었는지 꽉 잡고 있던 손도 어느 정도 느슨해졌다.배현수는 이렇게 그녀의 손만 잡고 있어도 불타오르는 감정에 미칠 지경이었다.조유진이 앞에서 조금만 움직여도 그는 금세 머릿속이 새하얘졌다.이런 느낌은 사람을 너무 괴롭게 했다.그녀의 손을 놓은 배현수는 갑자기 입을 열었다.“엄창민 씨와 사업 얘기 좀 하고 올게. 나 오늘 운전하지 않았는데 이따가 호텔까지 데려다줄래?”조유진은 눈빛을 반짝이더니 더 이상 투정 부리지 않고 흔쾌히 승낙했다.“그래요.”며칠 동안 감정이 삐걱거렸던 두 사람이었다. 냉전이 끝난 후가 제일 뜨거운 시기였다. 도저히 숨길 수 없었다.방문을 나서기 전, 배현수는 갑자기 큰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잡더니 얼굴을 숙이고 말했다.“한 번만 더 할까?”분명 질문이었지만 그녀가 대답하기도 전에 이미 그녀의 입술과 혀를 공격하고 있었다. 은은한 담배 냄새와 과일 차 향이 섞인 사탕의 달콤한 맛이 입속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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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언젠가 다시 만나요   제555화

    배현수는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했다.“나와 사업 얘기하면 돈을 벌 수 있어서?”조유진은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랐다.“안 보내줄 거야?”조유진이 손을 놓자 배현수는 그녀의 허리를 잡고 몸을 숙여 다시 키스했다.“조금 이따가 호텔에 데려다줘. 깨끗한 속옷 챙기는 거 잊지 말고.”얼굴이 빨개진 조유진은 방문을 나서는 배현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백소미는 배현수를 데리고 엄준의 서재로 들어갔다.서재 안은 용연 향초를 피우고 있어 따뜻하고 묵직한 나무 향이 났다.슬림한 베이지색의 모직 원피스를 입은 백소미는 온화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얼핏 보면 조유진과 비슷해 보였다.배현수를 꼬시려고 작정한 듯했다.하지만 그녀의 수법에 넘어갈 배현수가 아니었다. 이런 수법은 그저 하찮아 보일 뿐이었다.배현수는 차가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백소미 씨, 저에게 무슨 볼일이라도 있나요?”배현수 가까이에 다가간 백소미는 그의 어깨에 손을 살포시 놓았다. 동작 하나하나 모두 그를 꼬시기 위해 작정한 듯했다.“배 대표님, 저와 결혼하실래요?”인상을 찌푸린 배현수는 경멸과 조롱이 역력한 눈빛으로 말했다.“뭐라고요?”“방금 들은 그대로예요. 우리 모두 비즈니스 하는 사람들이에요. 장사꾼들은 감정보다 이익을 먼저 따지죠. 엄씨 가문의 유일한 후계자가 배 대표님과 손을 잡으면 그야말로 환상의 조합이 아닐까요? 남쪽과 북쪽의 사업 모두 우리 것이 되니까요. 성행 그룹과 SY그룹은 원래부터 협력하는 관계였어요. 배 대표님만 승낙하면 이 결혼은 성행 그룹에도 SY에도 큰 호재가 될 수 있을 거예요.”배현수는 얼음장같이 차가운 눈으로 백소미를 바라보며 말했다.“여자와 결혼해서 내 이익을 넓힐 생각 따위 없어요. 계산을 잘 못 한 것 같네요.”“유진 언니를 좋아하는 거 알아요. 그럼 이렇게 하죠. 대외적으로는 저와 결혼하고 사적으로 유진 언니를 계속 만나도 뭐라고 하지 않을게요. 제가 원하는 것은 돈이지 사람이 아니니까요. 성행 그룹의 딸과 결혼하면 배 대표님에게도 나쁠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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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언젠가 다시 만나요   제556화

    입구에 서서 남녀의 자세를 바라보면 애매하기 그지없었다. 꼭 마치 배현수가 백소미를 당장이라도 덮치려는 것 같았다. 여기에 백소미의 겁에 질린 애꿎은 표정까지 더해져 배현수는 빼도 박도 못할 상황이었다. 조유진을 본 순간 백소미는 더 높은 소리로 울부짖었다.“배 대표님, 이거 놓으세요... 유진 언니, 오해하지 마세요! 배 대표님과는 아무 일도 없었어요. 언니가 잘못 본 거예요...”설명하면 할수록 더 이상한 생각을 하게 만들었고 숨기려 할수록 더 엉뚱한 상황이 되었다.백소미의 팔을 힘껏 뿌리친 배현수는 미간을 찌푸리고 악랄한 독기를 뿜어내며 말했다.“적반하장도 유분수지! 그만 소리 질러.”왼팔이 탈골된 백소미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왼손이 아래로 축 늘어져 있었다. 너무 아팠지만 혹시라도 조금 전의 연기가 드러날까 봐 쉽게 티를 낼 수도 없었다. 방문 앞에서 차분한 얼굴로 몇 초 동안 멍하니 있던 조유진은 의아한 듯 배현수에게 물었다.“사업 얘기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왜 갑자기 싸워요?”백소미가 입을 열려고 하자 배현수는 매서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눈빛은 꼭 마치 함부로 입을 놀리면 다른 한쪽 팔도 부러뜨리겠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백소미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더니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지금은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그녀는 당황하고 억울한 눈빛으로 엄창민을 바라보며 애원했다.“창민 오빠, 저...”백소미의 신원은 아직 더 조사해야 하겠지만 적어도 현재로서는 엄씨 집안의 사람이다.엄씨 사택 안에서 배현수가 이렇게 버젓이 엄씨 집안 사람을 함부로 건드린다는 것은 도발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개를 때리려 해도 그 주인을 봐야 한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그런데 엄씨 집안 사람을 안중에도 두지 않고 이렇게 막무가내로 행동하다니! 엄창민이 눈살을 찌푸렸다. 당연히 불쾌하기 때문이다. “배 대표님, 이건 좀 아니지 않나요?”배현수는 백소미가 방금 건드린 자기의 오른쪽 어깨를 툭툭 쳤다. 얼굴은 얼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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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언젠가 다시 만나요   제557화

    배현수는 차 문을 열며 조유진에게 말했다.“먼저 차에 타.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네.”엄창민과 배현수는 지붕이 없는 복도에 서서 한참이나 이야기를 나눴다.배현수가 말했다.“백소미의 신분이 의심스럽네요. 어르신의 중독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어요.”엄창민도 백소미의 정체를 의심한 적이 있었다.하지만...“만약 유전자 검사 결과가 병원에서 조작한 것이라면 등에 있는 모반은요? 설마 그것도 가짜일까요?”배현수의 눈빛이 멈칫했다.“등에 모반이요?”엄창민이 설명했다.“어르신의 친딸은 등 가운데 왼쪽에 파란색 타원형 모반이 있어요. 백소미의 등에 그 모반이 있었고요.”조유진의 등에도 파란색 모반이 있었다. 배현수는 여러 번 보았다.멍하니 서 있던 배현수의 눈빛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이때 엄창민이 말했다.“백소미는 내가 계속 지켜볼 거예요. 진짜로 드래곤 파 사람이면 어르신이 사 수 있을지도 몰라요.”배현수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갑자기 한마디 툭 내뱉었다.“레이싱에서 한 얘기는 승낙한 거로 알게요.”아무런 예고 없이 내뱉은 그의 말에 엄창민은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이봐요. 아직 대답하지 않았어요.” 그러나 배현수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큰 기럭지는 이미 마당에 있는 차를 향해 걷고 있었다. 엄창민의 말이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이 인간은 정말!’횡포하고 강압적이다.이게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의 태도란 말인가?이런 인간의 성질머리를 조유진은 평소에 어떻게 참고 견딘단 말인가?...배현수가 차에 오르자 조유진은 시동을 걸고 호텔로 향했다.조수석에 앉아 있는 남자를 힐끗 보고 물었다.“백소미가 정말 현수 씨를 꼬셨어요?”배현수의 얼굴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유진아, 설마 나를 못 믿는 거야?”생각보다 꽤 무게가 있는 말이었다. 뭔가 압력을 느낀 조유진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현수 씨의 됨됨이를 믿어요.”백소미와는... 그녀도 배현수도 별로 얘기를 나눠본 적이 없다. 그런데 언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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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언젠가 다시 만나요   제558화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배현수의 이글거리는 눈빛과 마주쳤다.그윽한 눈동자에는 욕망이 가득 불타오르고 있었다.뜨거운 그의 눈빛에 데일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조유진은 다시 운전대를 잡고 운전에 열중했다.이것은 동물적 감성이 아니라 성적 욕구겠지...남자의 눈빛은 그녀의 심장마저 쿵쾅쿵쾅 뛰게 했다. 하지만 이 ‘사고유발자'는 태연하게 앉아 있었다.함부로 표현하는 이 욕구와 동물적 감성은 완전히 극과 극이다.조유진은 헛기침한 후 말을 돌렸다.“백소미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아직 말 안 했어요.”배현수는 대충 에둘러댔다.“별로 한 것은 없어. 내 어깨에 손을 얹었어.”“고작 그것 때문에 그런 거예요?“응.”그래서 백소미의 한쪽 팔을 부러뜨린 거라고? 조금 전, 백소미의 왼팔은 아래로 축 늘어져 있었다. 힘을 전혀 못 썼고 완전히 탈골된 듯했다.조유진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콕 집어 어느 부분이 이상한지 설명할 수 없었다.차가 호텔 입구에 도착하자 조유진은 일부러 한마디 했다.“배 대표님, 도착했습니다.”조수석에 앉아 있던 배현수는 움직이지 않고 그녀를 쳐다보더니 웃을 듯 말 듯 한 얼굴로 말했다.“그럼 나 들어갈게?”당장이라도 차에서 내릴 기세로 차 문을 당기는 시늉을 했다.그러자 조유진은 그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진짜로 가려고요?”그러자 배현수는 다시 자리에 앉더니 곁눈질로 그녀를 보며 조롱하듯 말했다.“네가 가라고 했잖아. 유진아?”그러자 조유진이 손을 놓으며 말했다.“그래요. 가요.”이번에 배현수는 진짜로 차에서 내렸다.심지어 별로 미련이 없는 것 같아 보였다.순간 남초윤의 억지스러웠던 말들이 잘 못 된 것은 아니라고 느껴졌다. 남초윤이 늘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틀리지 않았다.“남자에게 버림받느니 차라리 남자를 먼저 버려. 어차피 남자라는 인간들은 원래부터 매정하고 감정이 없어. 감정 앞에서 여자들은 절대 남자들처럼 그렇게 쉽게 컨트롤이 안 돼.”감정을 나눈다는 것은 밀당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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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성일의 압도적인 기운은 전화 너머에서도 남초윤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말을 하지 않아도 그 묵직한 압박감은 느껴졌다. 그때 어떻게 그런 용기를 냈는지, 어떻게 육씨 집안에 시집갔는지 스스로도 의아했다. 만약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차라리 구걸을 하더라도 절대 육씨 집안에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남초윤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할아버지, 부탁드려요. 저희가 약속했던 건 두 달 전이었잖아요. 아직 두 달이 채 안 지났고, 제가 지금 아기를 가졌다고 해도 확인이 안 될 수도 있어요.” 그 말에 어느 정도 일리가 있었기에 육성일도 더는 말하지 않았다. 그렇게 할아버지의 전화를 겨우 넘겼지만 전화를 끊자마자 다시 핸드폰이 시끄럽게 울렸다. 이번엔 ‘개자식’ 육지율이었다. “...” 할아버지와 손자는 통화 시간까지 맞춘 것처럼 기가 막히게 연달아 전화를 걸어온다. 그녀는 냉랭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왜요?” 육지율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무슨 폭탄이라도 먹었어요?” 육지율이 자신의 책을 내리게 만들고, 지난달과 이번 달 원고료도 다 날려버린 상황에서 그녀가 전화를 받아준 것만으로도 기적이었다. 하지만 결혼 생활은 아직 유지 중이었고 필요한 것도 있으니 남초윤은 결국 목소리를 가다듬고 좀 더 부드럽게 말했다. “지율 오빠, 무슨 일이에요?” “... 뭐라고 불렀어요?” “지~율~오~빠~” 그녀는 유설영의 말투를 흉내 내며, 아니, 오히려 더 능숙하게 말했다. 육지율은 순간 닭살이 돋았다. “제발 평소처럼 말해요. 저녁에 내 친구가 귀국하는데 같이 식사해요. 6시에 잡지사로 데리러 갈게요.” 남초윤은 단번에 거절했다. “난 안 갈래요.” “저녁에 뭐 다른 약속 있어요?” 남초윤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결혼한 지 3년 됐지만 당신은 나한테 친구 한 명도 소개해 준 적 없잖아요.” 그리고 이제 곧 이혼할 텐데 친구를 만날 필요는 더 없었다.이혼하고 나서 친구들이

  • 언젠가 다시 만나요   제966화

    조유진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학교에서 누가 너 괴롭히진 않았어?” 배선유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응, 나 괴롭히는 사람 없어. 할아버지가 우리 학교에 엄청난 돈을 기부하셔서 선생님들도 항상 나한테 잘해주시고 많이 관심 해주셨어. 그래서 나도 함부로 장난칠 수가 없어. 혹시 선생님이 할아버지한테 이르실까 봐.” 배현수는 이 말에 전혀 놀라지 않았다. 배선유는 작은 악동처럼 말이 많았고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는 아이였다. 배현수의 말에도 자주 대꾸를 하니, 만약 동급생에게 괴롭힘을 당했다면 벌써부터 떠벌렸을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남을 괴롭히는 쪽에 더 가까웠다. 성남에서 엄준은 배선유를 엄청나게 아끼며 키웠고, 그래서인지 아이는 주눅이 들지 않고 활발하게 자랐다.조유진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다행이네. 우리 선유가 공부를 게을리할 걱정은 없겠어.” 배현수는 딸을 겁주듯 말했다. “너 공부 안 하고 일찍 연애라도 시작하면, 널 대제주에 데려와서 24시간 동안 지켜볼 거야.” 배선유는 입술을 내밀며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 이건 너무 심해요! 나 혹시 쓰레기통에서 주워 온 거 아니에요?” 배현수는 코웃음을 치며 엄격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말했다. “공부 안 하면 좋은 날은 없을 거야.” 잠시 후, 학교 종이 울릴 시간이 가까워졌다. 배선유는 전화를 끊으려다가 친구가 그린 결혼사진 두 장을 영상 속으로 건네받았다. “선유야! 너랑 지우의 결혼사진 내가 그려놨어! 한 번 봐봐!” 배선유가 물었다. “한 장에 얼마야?” “너니까 공짜로 해줄게! 대신 다음번엔 나랑 결혼해 줄 수 있어?” “생각해볼게!” “...” 이 속도로라면 그들 부부는 도대체 몇 명의 사위를 맞이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한편, 스타라이트 매거진에서.남초윤이 사이트 편집자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 그녀의 책은 예상대로 플랫폼에서 삭제되었고 이달 원고료는 한 푼도 들어오지 않

  • 언젠가 다시 만나요   제965화

    [합법적 부부] 함께 올라온 사진엔 결혼반지를 낀 두 손이 하트 모양을 그리고 있었다. 이 게시글이 올라가자마자 마치 깊은 바다에 떨어진 폭탄처럼 큰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수많은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몰려들어 반응했다. 육지율: [8년의 여정 끝에 드디어 자랑할 수 있네!] 송하진: [어! 전 두 사람 목숨 구해준 은인이에요. 제가 아니었으면 두 사람이 어떻게 혼인신고까지 했겠어요? 당장 절 주빈으로 식사 대접해요!] 남초윤: [아아아아! 유진이를 결혼이라는 무덤 속으로 끌어들이다니! 대표님 너무하세요!] 엄창민: [내 여동생한테 잘해요. 혹시라도 괴롭히면 내 주먹이 용서 못 해요!] 엄명월: [형부! 이렇게 좋은 일에 저희한테 뭐라도 사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강이찬: [축하해, 결국 원하는 대로 됐네.] 심미경: [백년해로하세요. 행복하길 기원합니다!] 서정호: [대표님, 일 다 끝냈으면 빨리 돌아오세요. 의사 선생님이 여기서 엄청 화내고 있어요. 저 더는 못 버틸 것 같아요!] 학교 가기 싫어: [와! 아빠랑 엄마가 드디어 결혼했네요! 헤헷, 아빠, 나도 오늘 결혼했어요!] 배현수는 배선유의 댓글을 보고 순간 검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조유진이 운전하며 그의 미세한 변화를 눈치채고 물었다. “왜 그래요?” “선유가 결혼했다는데.” “뭐라고요?” 조유진은 깜짝 놀라 차를 도로 옆에 세우고 급히 배선유에게 영상 통화를 걸었다. 저쪽에서 배선유는 학교에 있었는데 마침 쉬는 시간이었다. 외국어 학교라 분위기가 자유로워 아이들은 평소에도 부모님과 연락을 하기 위해 휴대폰을 가지고 다녔다. 배선유는 전화를 받자마자 얼굴을 카메라 앞으로 들이밀었다. “엄마, 아빠! 나 사진 보고 싶어!” 조유진은 그녀에게 사진을 보여주고 나서 물었다. “선유야, 아까 결혼했다고 했잖아. 누구랑 결혼한 거야?” “우리 반 한지우랑! 엄마, 나 오늘 엄청 많은 축의금을 받았어! 내가 다 적어 놨어!”

  • 언젠가 다시 만나요   제964화

    조유진은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갈게요.” 그가 환자라는 사실을 떠올리며 이번 한 번은 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 다음 날 이른 아침. 서정호가 산성 별장에서 두 벌의 정장과 결혼 서류를 준비해왔다. 조유진은 오랜만에 풀 메이크업을 하고 머리도 고데기로 말았다. 그녀는 하얀 오프숄더 드레스를 입고 사진에 잘 나올 수 있도록 최대한 신경 썼다. 그녀는 한동안 이렇게까지 꾸미지 않았는데 하이힐을 신고 배현수 앞에 서니 그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조금 어색해졌다. 그래서 물었다. “나 어때요?” “아름다워. 넌 언제나 아름다워.” 배현수는 전혀 망설임 없이 그녀를 칭찬했다. 조유진은 웃음을 참으며 옆에 있던 넥타이를 집어 들고 배현수에게 매어주었다. 배현수는 그녀의 손길에 고개를 숙이며 협조했다. 조유진은 평소와 다르게 더 복잡하고 정중한 ‘엘드리지 매듭’으로 넥타이를 맸는데 배현수는 평소에 간단한 윈저 매듭만 했었다. “이 매듭은 좀 생소하네.” 조유진은 넥타이를 다 매고 나서 그의 셔츠와 정장 재킷의 깃을 정리해 주었다. “이게 엘드리지 매듭이라고 해요. 중요한 자리에서 어울리는 방식이죠. 어때요, 괜찮아요?” “멋져. 하지만 여보, 우리 서둘러야 해. 조금 있으면 의사가 올 거야.” 웃으며 농담하듯 이야기하던 배현수는 조유진의 외투를 챙겨 그녀의 어깨에 걸쳐 주고, 그녀를 한 손으로 감싸 병실을 몰래 빠져나갔다. 두 사람은 마치 도망치듯 병원을 빠져나와 차에 올랐다. ... 그들이 빠져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의사가 병실에 회진을 왔다. 하지만 환자와 보호자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고 그곳에는 ‘무관한 사람’만 남아 있었다. 의사는 엄숙한 표정으로 서정호를 보며 물었다. “환자는 어디 갔죠? 튜브까지 다 뽑다니, 누가 뽑았습니까?” 서정호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환자 본인이 뽑았습니다.” “도대체 어디 간 겁니까? 팔을 정말 망가지게 할 작정인가요

  • 언젠가 다시 만나요   제963화

    배현수의 가슴이 떨렸다. 그는 조유진과 이마를 맞대며 낮게 속삭였다. “그때 난 네 옆에 있진 않았지만 네 뒤에서 계속 지켜보고 있었어. 그런데 왜 울었어?” “현수 씨 생각이 났어요.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게 너무 슬펐거든요. 내가 이렇게 좋은 남자를 잃어버린 것 같아서, 그게 너무 아쉽고 후회스러웠죠. 그래서 울었어요.” 지금 이렇게 그를 바라보고 있으니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은 느낌이었다. 조유진의 눈에는 여전히 눈물이 맺혀 있었다. 하지만 이번 눈물은 슬픔이나 후회 때문이 아니었다. 감동과 감사함 때문이었다. 운명이 그들을 온갖 고난 속에서도 끝끝내 묶어 놓았고, 그들 사이에선 이제 더 이상 헤어질 수 없는 깊은 연대가 생겼기 때문이다. 배현수는 긴 손가락을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천천히 끼워 넣으며 손을 꼭 맞잡았다. 순간 그들의 손바닥에서 따뜻함이 퍼져나갔다. 그는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진아, 넌 한 번도 날 잃은 적 없어. 우리가 몇 번을 떨어져도, 얼마나 오랫동안 떨어져 있더라도 난 결국 널 찾아내서 꼭 안고 말해줄 거야. 사랑한다고. 오직 너만 사랑한다고.” 처음부터 끝까지, 조유진은 배현수의 유일한 선택이었고 그 선택은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었다. 조유진은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웃었다. “현수 씨, 우리 영원히 함께할 수 있을까요?” “그럼.” 그의 대답은 8년 전과 똑같았다. 짧지만 확고했으며 1초의 망설임도 없었다. 조유진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손목에 걸린 달콤한 연녹색 비취 팔찌를 내려다보았다. “상처가 나으면 우리 같이 아주머니를 위한 좋은 묘지를 고르러 가요. 그분을 위한 의관묘라도 만들어 드리는 게 어때요?” “아직도 ‘아주머니’라고 불러?” 조유진은 순간 얼굴이 뜨거워지며 말투를 바꿨다. 배현수는 그녀의 팔찌를 손가락으로 살며시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풍수 좋은 곳을 따로 고를 필요는 없어. 어머니께

  • 언젠가 다시 만나요   제962화

    육지율은 그 필명이 어딘가 익숙하다고 느꼈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문득 기억해 냈다. “이 자식! 기억났어! 이 녀석이 책에서 날 모욕하지 않았나? 내 명성을 망가뜨렸잖아?” 남초윤은 급하게 말했다. “잘못 본 거 아니에요? 비엘 작가가 주인공을 모욕할 리가 없어요! 그러면 밥숟가락 들고 욕하는 것과 뭐가 다르겠어요?” “나를 ‘수’로 묘사한 게 모욕이 아니고 뭐예요? 왜 항상 배현수가 공이냐고?” 남초윤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는 그 부분을 신경 쓰고 있었던 거였다.남초윤은 그가 진짜 작가를 고소할까 봐 걱정되었다. 그래서 변명하듯 말했다. “다음번엔 지율 씨가 공이고, 배 대표님이 수가 될 수도 있잖아요. 원래 BL 소설에서는 공수 구분이 모호해요. 겉보기에 수 같아도 사실은 공일 수도 있다고요!” 조유진은 살짝 의문을 제기했다. “난 현수 씨가 수 같지는 않았는데. 만약 현수 씨가 진짜 수라면 캐릭터 붕괴지. 차라리 육 변호사님이 수인 게 더 어울려. 자유롭고, 매력적이고, 다정하잖아.”“?”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육지율은 얼굴이 시커멓게 변하며 조유진에게 따졌다. “아니, 조유진. 내가 약해 보이는 수 같은 느낌을 준다고?” “...” 배현수는 차갑게 말했다. “유진이가 쓴 것도 아닌데 왜 화내? 그럴 시간 있으면 작가나 고소해.” 남초윤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 그냥 재미로 쓴 거지 무슨 큰 잘못을 한 것도 아니잖아요? 작가를 고소하면 너무 쪼잔해 보일 거예요!” 하지만 육지율은 이성을 잃고 이를 악물었다. “쪼잔해 보이든 말든, 그 책을 하차할 거예요!” 자신이 소설 속에서 수 역할로 묘사되었고, 그것도 많은 사람에게 읽히고 있다는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돋았다. 조유진은 객관적으로 말했다. “사실 책 내용은 나쁘지 않아요. 꽤 재미있고 독자도 많아요.” “독자가 몇 명인데?”“몇만 명 정도?” “뭐?”‘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날 수로 상상했

  • 언젠가 다시 만나요   제961화

    병실에서 조유진은 그가 누워있는 침대 옆에 앉아 있다가 잠들었다. 잠에 들어서도 손가락이 배현수의 손에 살짝 얽혀 있었는데 다정하고 달콤하기 그지없었다. 이 사진은 완전히 남자 친구 시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입원 생활이 지루하다고 하다니.육지율이 댓글을 남겼다. “뭐야, 입원했어? 혹시 가정 폭력이라도 당한 거야?” 댓글을 남기고 나서 육지율은 차에 시동을 걸며 남초윤에게 말했다. “과일 바구니 좀 사서 병문안이나 가요. 친구가 입원했어요.” “친구? 설마 배 대표님이세요? 어디 아파요?” 육지율은 웃으며 말했다. “글쎄요. 진짜 아플 수도 있고 그냥 꾀병일 수도 있고.” 혹시 모른다. 꾀병일지도....병원에서는 조금 전 장은숙이 산성 별장에서 저녁 식사를 가져왔다. 수술 후 얼마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 밤은 죽 같은 유동식만 먹어야 했다. 배현수는 오른손을 쓸 수 없었기에 조유진이 죽 그릇을 들고 숟가락으로 그에게 먹여주고 있었다. 첫 숟가락을 그의 입 앞에 가져가자 배현수는 뜨겁다고 투덜댔다. 조유진이 후후 불어 온도를 맞춘 후 말했다. “이제 적당히 식었어요.” 배현수는 그제야 죽을 한 입 삼켰다. 그 순간 병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장난스러운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며칠 못 본 사이에 아기로 됐네? 밥도 혼자 못 먹고, 조유진이 널 너무 오냐오냐한 거 아냐?” 조유진이 놀라서 뒤돌아보니, 육지율과 남초윤이 병실에 들어와 있었다. 그녀는 웃으며 설명했다. “오른쪽 어깨에 부상을 입었어요. 의사 선생님이 며칠 동안 오른손은 쓰지 말라고 하셨어요. 상처가 더 심해질 수 있거든요.” 그러자 육지율은 다짜고짜 그의 오른쪽 어깨를 툭 쳤다. “진짜야?” 배현수는 고통에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욕설을 퍼부었다. “이 미친놈아!” 조유진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변호사님, 진짜로 다쳤다니까요! 어깨에 구멍이 났다고요, 함부로 건드리지 마세요!

  • 언젠가 다시 만나요   제960화

    그녀를 겨우 한 번 데리러 온 김에 출퇴근길의 불편함을 느끼고는 아예 차를 사서 해결하려고 하다니, 정말 육지율 다운 방식이었다.이 4S 매장에서 파는 차들은 모두 포르쉐였고 가격도 만만치 않았다. 가장 저렴한 모델도 수천억 원대였다. 남초윤은 이미 남씨 집안이 육지율에게 너무 많은 빚을 지고 있었기에, 그가 차를 선물해 주겠다고 해도 받을 수 없었다.남초윤은 차분히 말했다. “앞으로는 출퇴근 길에 당신을 귀찮게 하지 않을 테니, 굳이 차를 선물할 필요는 없어요.”육지율은 순간 멈칫했다가 살짝 비웃으며 말했다. “차 한 대 선물한다고 귀찮다는 딱지가 붙어요? 이런 확산적 사고방식은 참 대단하네.”“....”정말 그런 게 아니란 말인가?평소에도 성격이 불 같았던 육지율은 차를 주겠다고 하면서도 그녀를 달래는 상황이 우스웠는지 어이없어 웃었다. 둘 중 누가 더 성격이 나쁜지 모를 일이었다.영업 직원은 남초윤을 육지율이 외부 애인으로 오해했고, 이 큰 거래가 깨질까 봐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가씨, 변호사님께서 차를 사주시는 건 출퇴근 시간을 줄여서 그 시간 동안 조금이라도 더 쉴 수 있게 해주려는 마음이 아닐까요?”남초윤은 더 이상 그의 돈을 쓰고 싶지 않았다. 이미 갚을 수 없는 빚이 너무 많았고 계속해서 더 쓴다면 두 아이를 낳아야 겨우 그 빚을 다 갚을 수 있을 것 같았다.그러나 육지율은 그 여느 때처럼 행동했다. 그는 VIP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빨리 골라요. 차 안 사면 집에 못 돌아가요.”남초윤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여자 영업 직원이 다가와 다양한 모델을 소개할 때, 그저 듣기만 했다. 그 직원은 미소를 띠며 말도 아주 달콤하게 했다. “변호사님은 저희 매장의 단골이세요. 그런데 여자를 데리고 온 건 이번이 처음이네요. 변호사님이 정말로 많이 아끼시는 것 같아요. 비싼 차를 고르시면 아마 더 기뻐하실 거예요.”역시, 판매왕이었다.감정적 가치를 제공하는 법을 너무나 잘 아는 직원이었다. 하지만 남초윤은 그저 외부의

  • 언젠가 다시 만나요   제959화

    남초윤은 결혼 상태를 한 번도 업데이트한 적이 없었다. 동료들 눈에는 여전히 미혼으로 보였다.처음 그녀와 육지율의 스캔들이 터졌을 때 온 세상이 떠들썩했지만 사실 모두 육지율의 매력적인 외모 때문이었다. 아무도 남초윤처럼 작고 평범한 존재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육지율이 그녀와 결혼하기로 결정했을 때 그들의 침대 사진이 언론이나 남재원에게 유출되지 않은 것도 기적이었다. 사람들은 그저 육지율이라는 유명한 바람둥이가 ‘함정'에 빠져 순진한 여자와 관계를 맺은 후, 마지못해 결혼했다는 소문만 믿고 있었다.육지율이 연예계 인물이 아닌 만큼 동료들 중에서도 아무도 그 사건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육지율이 ‘좋은 집안의 아들’ 이라는 사실만 기억하고 그의 결혼 상대가 누군지에는 무관심했다. 그녀는 어디에도 크게 드러나지 않았고 언론에서도 그의 곁에 서는 일이 거의 없었다. 남초윤은 그렇게 세상 사람들의 눈에 숨겨져 있었다.동료들은 그저 그녀가 조금 집안 배경이 있는 부유한 여자인 줄로만 알았고 육지율의 아내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어쨌든 육지율의 아내라면 아무리 상황이 나빠도 그들과 같이 일하며 고생할 일은 없을 테니까. 설령 과거에 파파라치 일을 했더라도 그렇게 높은 곳에 시집갔다면 육씨 집안이 그녀를 계속 그 일을 하도록 놔두지 않았을 거라고 여겼다.비록 세상은 모두 직업의 평등을 외치고 있지만 상류 사회에는 여전히 그들만의 규칙이 있었다. 체면과 명예가 그들의 신분과 존엄을 상징했다. 파파라치라는 직업은 육씨 집안에게 있어 절대 자랑스러울 수 없는 일이었으니, 육지율과 강란희가 그녀에게 좀 더 체면 있고 유망한 직업들을 제안했지만 남초윤은 그들의 호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그렇게 시간을 보낸 끝에 동료들은 하나둘씩 퇴근하고 남초윤만 남았다. 한 시간이 흐른 뒤 남초윤은 휴대폰 화면을 확인했다. 저녁 7시가 되었다. 그녀는 통화 기록을 훑어보고 다시 한 번 메시지를 확인했지만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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