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아름다운 기억 속에 빠져서 일시적인 미련 때문에 손을 놓지 못할 뿐 사실 오래전부터 사랑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사람들도 말하지 않는가? 연애는 3년을 넘지 않는 것이 좋다고... 3년이나 5년을 넘기면 그 어떤 결과도 없을 거라고...감정의 마지막에 서로를 잡고 놓지 못하고 있는 것은 무감각하게 변한 습관뿐이다.하지만 조유진은 잘 알고 있었다. 적어도 자기 자신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배현수에게 습관의 감정만 있는 것이 아니다.이렇게 오랫동안 알고 지냈지만 매번 볼 때마다 여전히 두근거렸다.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아무런 표현을 하지 않는 그에게 화를 내야 하는 게 맞지만 무책임하다고 충분히 화를 낼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이렇게 가만히 껴안고 있는 것만으로도 사치라는 생각이 들었다.화를 내는 순간 진짜로 모든 게 끝일까봐 무서웠다.사람의 마음은 정말 복잡한 것 같다. 당신을 위해 죽을 수 있지만 사랑하지 않는다고 한 순간 그 감정이 바로 변하기 때문이다.조유진은 고개를 들어 배현수를 바라보며 말했다.“현수 씨, 내가 이렇게 잡고 있는 이유는 현수 씨가 나와 결혼하지 않을 거지만 다른 사람과도 결혼하지 않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이 약속조차 지키지 않으면 미워할지도 몰라요.”이것은 그와 상의하는 것이 아니라 귀띔이고 통보였다.배현수는 그녀의 뒷덜미를 살며시 잡고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유진아, 난 영원히 네 거야.”영원히...모든 사랑과 설렘은 오직 그녀에게만 줬다. 그녀를 미워했던 시절에도 다른 사람에게 준 적이 없다....대제주시.심미경은 강이찬에게 이혼을 통보한 천우 별장에서 짐을 싸고 나왔다.그곳은 강이찬의 집이지 그녀의 집이 아니다.이 사실을 알게 된 조윤미는 혼수 예물 비용 4억원을 심미경의 계좌에 넣어주며 몸을 잘 챙기라고 신신당부했다. 심미경은 일단 작은 아파트에 세들었다.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른다. 하지만 강이찬과 이혼하는 것은 확실한 일이다.다만 강이찬이 무슨 마음
문밖에 서 있는 강이찬은 가슴이 아팠다. “미경 씨, 아이가 없어진 것은 내 탓이에요. 그동안 이진이에게 뭐든 오냐오냐하다 보니 미경 씨에게 허튼짓까지 하게 만들었어요. 다시 한번만 기회를 주면 안 될까요? 이혼만 아니면 뭐든지 다 할게요.”현관문에 등을 기댄 심미경은 어둠 속에서 살짝 웃으며 말했다.“원주에 있을 때도 한 번만 기회를 달라고 했었잖아요. 그 말만 믿고 다시 돌아갔던 건데... 지금 또 이러면 내가 이찬 씨를 어떻게 믿어요? 예전에 당신 마음속에 조유진이 있었던 거? 상관없었어요. 누구나 마음속에 다른 사람이 있기 마련이니까. 깨끗하게 비우기만 하면 끝이니까. 하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당신은 강이진이 사주한 교통사고라는 것을 알고 그 우리 아이를 죽였다는 것을 알면서도 여전히 나를 속이고 강이진이 도망가게 놓아줬어요. 더 이상 이찬 씨를 믿을 수 없어요.”심미경에게 강이찬은 신용불량자와 마찬가지였다. 더 이상 돌이킬 수 없었다.심미경은 그더러 놓아달라고 한다.맞는 말이다. 만약 그와 함께 있지 않았더라면 이런 고생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마음속의 죄책감은 마치 성난 파도처럼 끊임없이 덮쳐와 그를 삼켜버릴 것 같았다.술을 많이 마신 강이찬의 허스키한 목소리는 알코올에 마비가 되었는지 쓸쓸하게 들렸다.“전에 나에게 물었었죠? 결혼하는 이유가 죄책감 때문인지 아니면 당신을 진짜 사랑하기 때문인지... 미경 씨, 내 말을 믿을지 안 믿을지 모르지만 처음에 미경 씨와 함께 있게 된 것은 확실히 미경 씨에게서 조유진의 그림자를 보았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나중에는 아니에요. 지금 생각해보면 머릿속에 그렸던 모든 미래는 늘 미경 씨와 함께했어요.”잠시 멈칫한 강이찬은 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사실 미경 씨는 조유진과 닮지 않았어요. 외모, 이목구비, 성격... 전부 똑같지 않은데 내가 그렇게 생각하려 했었던 것 같아요. 잘못했어요. 하지만 지금은 잘 알고 있어요. 조유진은 조유진이고 미경 씨는 미경 씨예요. 내가 미경 씨와 결혼하기로 한
강이진이 아이를 죽이는 장면을 꿈에서 몇 번이나 봤는지 모른다. 하지만 강이찬은 옆에 서서 모든 것을 외면했고 슬퍼하거나 마음이 약해지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심미경은 아이를 구해달라고 강이찬을 목청껏 불렀지만 그는 어디에도 없었다.강이진은 팔짱을 낀 채 의기양양한 얼굴로 그녀를 향해 웃으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어쩌면 그날 교통사고의 트라우마가 너무 큰 탓일지도 모른다.짐을 싸고 나온 지 며칠 동안, 그녀는 한숨도 못 잤다.강이찬에 대한 감정이 더욱 복잡해졌다.그는 아이의 친아버지였지만 지금은 아이를 죽인 공범이 되었다.그를 마주하면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원망의 감정이 넝쿨처럼 가슴속에서 천 갈래 만 갈래 퍼져나갔다.강이찬은 떠나려 하지 않았고 심미경은 문을 열지 않았다.한 명은 문밖에서 다른 한 명은 집 안에서 밤새도록 이렇게 대치해 있었다.다음 날 아침, 문이 삐걱거리며 열렸다.어두웠던 강이찬의 눈빛이 순식간에 맑아졌다. 그는 심미경을 덥석 끌어안으며 말했다. “미경 씨, 우리 집에 가요. 네?”심미경은 두 팔을 아래로 늘어뜨린 채 가만히 서 있었다. 초췌한 얼굴에는 그 어떤 감정 기복도 없었다.그녀는 아무런 감정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여기에 계속 있어봤자 내 결정은 변하지 않아요. 이미 엎질러진 물, 다시 주워 담을 수 없어요. 아니면...”“아니면요?”강이찬은 자기가 할 수만 있는 일이라면 반드시 할 것이다.심미경은 덤덤한 얼굴로 그를 보며 피식 웃었다. 그 웃음은 너무 가벼워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아니면 죽은 아이를 다시 살리던가...”죽은 아이를 다시 살려오면 그를 용서할 수 있을지 모른다.강이찬은 많이 충격을 받은 듯했다. 그는 심미경의 두 어깨를 잡고 말했다.“아이를 갖고 싶으면 나중에 한 명 더 가지면 되잖아요. 지금 의료 기술이 얼마나 발달했는데요. 국내에서 치료가 안 되면 해외로 가요. 그래도 안 되면 시험관 아이도 해볼 수 있고요.”이때, 심미경이 그의 말을 끊었다.“아이가
조유진은 밤늦게 엄씨 사택에 돌아왔다.1시 반이 되면 돌아오려 했지만 떠나기 전, 배현수가 뒤에서 껴안고 그녀의 목덜미에 키스했다.키스를 하다 보니 조유진도 저도 모르게 그의 행동에 응하게 되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한참이나 더 서로의 숨결을 느꼈다. 배현수 때문에 몸이 많이 피곤했지만 엄씨 사택으로 돌아오자 쉽게 잠이 들지 않았다. 다음날 오전, 아침 식사가 식탁에 차려졌다.삶은 달걀의 흰자만 좋아하고 노른자는 싫어하는 선유는 흰자만 발라서 먹은 뒤 노른자만 조유진의 접시에 담아 놓았다.조유진은 노른자를 한 입 베어 물자 갑자기 속이 메스꺼운 느낌이 들었다.옆에 있던 엄창민은 그녀가 원래부터 노른자를 좋아하지 않는 줄 알고 한마디 했다.“먹기 싫으면 먹지 마.”조유진은 알겠다고 대답한 뒤 입맛이 없어 죽만 몇 숟가락 먹었다.선유는 작은 손을 뻗어 조유진의 이마를 만졌다.“엄마, 어디 아파?”조유진은 녀석의 작은 손을 잡으며 말했다.“어젯밤에 좀 추웠나 봐. 빨리 밥이나 먹어.”“응. 알았어. 이게 다 아빠 탓이야. 한밤중에 호텔까지 데려다 달라고 해서.”조유진을 바라보던 엄창민은 어젯밤 배현수의 부탁이 떠올랐다. 그는 몇 초간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너와 선유를 스위스에 보내겠다던데, 너와는 얘기가 된 거야?”조유진은 순간 넋이 나간 얼굴로 물었다.“현수 씨가 오빠에게 그 말을 했다고요?”엄창민은 숨기지 않고 사실대로 말했다.“나더러 너와 선유를 스위스에 피신시켜 달라고 했어. 너의 생각은 어떤데?”조유진은 당연히 가고 싶지 않았다.엄창민에게 선유와 자기를 스위스로 데려다주라고 하는 것은 꼭 마치 두 모녀를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는 것 같았다.순간 화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아직 별생각이 없어요.”엄창민은 하나하나 객관적으로 분석했다.“스위스로 가는 것은 꽤 괜찮은 제안이라고 생각해. 그곳이 상대적으로 안전하니까. 최근 드래곤 파에서 SY그룹과 성행 그룹 모두 눈독을 들이고 있어서 배현수도 충분히 생각하고 판단한
배현수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그럴 가능성이 있을 수는 있지만 백소미가 그렇게 멍청하지는 않을 거야. 엄씨 집안에서 선유를 납치해봤자 어디도 도망가지 못할 테니까.”말이 끝나기 무섭게 배현수의 핸드폰이 울렸다.엄창민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사람은 찾았어요. 남교의 폐가 건물에서 납치범이 직접 배현수 씨더러 와서 데려가라고 하네요.”...배현수와 조유진은 재빨리 남교로 달려갔다.한쪽 폐가 건물에서 인사불성이 된 선유가 쓰러진 채 의자에 묶여 있는 모습이 보였다. 마스크를 쓰고 있는 납치범은 손에 총을 들고 선유의 머리에 겨누었다.조유진은 깜짝 놀라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총은 일단 내려놓으세요. 원하는 건 뭐든지 말해봐요.”납치범은 조유진을 가리키다가 배현수에게 물었다.“혼자 오라고 했잖아. 왜 여자까지 데리고 온 거야?”배현수는 옆에 있는 조유진을 보고 말했다.“유진아, 일단 먼저 나가 있어.”“하지만...”조유진이 가려고 하지 않자 납치범은 흉악한 표정으로 선유의 작은 머리를 총구로 가리켰다.“안 가면 이 총으로 당신 딸 머리를 쏴버릴 거야.”조유진은 심장이 미친듯이 뛰었지만 납치범의 말을 듣지 않을 수 없었다.걱정된 그녀는 배현수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조심해야 해요. 밖에서 기다릴게요.”배현수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응, 선유 데리고 나갈게.”저 멀리 걸어가는 동안에도 조유진은 세 번이나 뒤를 돌아봤다.폐가 건물에는 납치범과 배현수, 그리고 일찌감치 정신을 잃은 선유만 남게 되었다.배현수는 평소와 다름없이 태연한 얼굴로 ‘납치범’에게 걸어가며 말했다.“나 좀 몇 대 때려줘.”‘납치범’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배 대표님. 이건 좀 아닌 것 같은데요?”배현수는 옆에 있는 선유를 힐끗 보고는 다시 말했다.“얼굴만 좀 세게 때려줘, 안 그러면 들켜.”“그럼 실례하겠습니다. 배 대표님, 저를 탓하지 마십시오.”...20분 후, ‘펑’하는 굉음과 함께 폐가 건물에서 귀를 찌르는 듯한 총소리가 들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선유는 정밀 검사를 받았다. 결과를 보니 큰 문제는 없었다.잠에서 깬 녀석은 눈을 비비며 의아한 얼굴로 조유진에게 물었다. “엄마, 우리가 왜 병원에 있어?”조유진은 녀석을 덥석 껴안으며 다급하게 물었다.“선유야, 어디 아픈 데는 없어?”선유는 고개를 가로젓더니 가슴을 치며 말했다.“그냥 좀 졸려, 엄마 내가 오래 잤어? 머리가 왜 이리 띵해?”조유진은 선유의 작은 어깨를 잡고 뚫어지게 봤다. 하지만 녀석의 얼굴은 너무 평온했다. 어린 얼굴에는 납치된 흔적이 전혀 없었다.처음에 조유진은 녀석이 너무 놀라 넋이 나간 거라고 생각해 다독이며 말했다.“선유야, 엄마 아빠가 다 있으니까 겁내지 마.”“엄마, 겁날 게 뭐가 있어? 아빠, 아빠도 왜 그렇게 날 쳐다봐요? 설마 내가 무슨 큰 병에 걸렸어요?”눈이 휘둥그레진 선유는 작은 입을 벌리고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물었다.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은 배현수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네가 실수로 넘어져 쓰러지는 바람에 엄마가 많이 놀란 것 같아. 지금은 괜찮아.”선유가 ‘납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것을 보고 조유진도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괜히 어린 아이의 마음에 트라우마라도 남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엄씨 사택에 돌아간 후, 선유는 아무렇지 않은 듯 태블릿을 껴안고 애니메이션을 보았다. 녀석의 곁을 한참 지키고 있던 조유진은 녀석의 팔팔 뛰는 모습에 그나마 안도감을 느꼈다.하지만 속으로는 의심이 들었다.아무리 생각해도 의구심을 풀 수 없었던 조유진은 선유를 보고 물었다.“선유야, 정말 아무것도 기억 안 나?”사과를 먹고 있던 선유는 무심한 얼굴로 대답했다.“무슨 기억? 엄마, 오늘 왜 이렇게 이상한 말만 하는 거야? 혹시 어디 아픈 거야?”녀석은 작은 손을 내밀어 조유진의 이마를 짚어 보고는 다시 자기 이마를 만졌다. 뜨겁지도 않고 열도 없었다.배현수가 들어와 조유진을 데리고 나갔다.“괜찮다니까 됐어. 혼자 놀게 내버려 둬.”조유진은 찜찜한 얼굴로
높은 권력과 능력을 갖춘 사람들은 대부분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정도로 음침하고 통제욕이 강하다.게다가 술에 취하면 도도하고 악질적인 취미를 드러낼 수밖에 없다.한 부하가 아랫사람에게 지시해 시뻘건 가마를 들고 연회장에 들어왔다. 매우 경사스러워 보였다.그때 조범은 아직 충남시장이 아니었다. 그저 어느 한 구만 담당하고 있었다.그럼에도 한 무리의 사람들은 굽신거리며 아부했다.“다음 선거는 꼭 조 시장이 될 거라는 믿음과 확신으로 가마를 갖고 왔습니다. 조 시장님, 타십시오. 이거 타면 분명 승승장구할 겁니다.”조범은 손사래를 치며 겸손한 척했다.“아직 이름도 안 나왔는데요. 정 대표님, 너무 일찍 부르시는 거 아닙니까?”정 대표는 술을 한 잔 따라서 조범에게 다가가며 극구 칭찬했다. “조 시장님, 올라간 후에 가마를 멨던 저희를 잊으시면 안 됩니다.”술자리에서 그 무리는 소란을 피우며 조범을 끌고 가마를 태웠다.“자, 자, 자, 가마를 들어!”“우리 몇 명이 가마를 멘다고요? 그런데 가마를 오를 때 인간 계단을 만들어 줄 일꾼이 따로 있어야죠? 너, 이리 와봐!”그 사람은 구석에 서서 생일 케이크를 들고 종업원과 함께 서 있는 소년을 가리켰다.다름 아닌 열일곱 살의 배현수였다. 나이는 어렸지만 온몸에서 도도한 기운이 풍겼고 기세가 등등했다.움직이지 않자 그 사람은 언성을 높였다.“귀머거리야? 너 부르잖아!”옆에서 기다리던 배희봉은 얼른 다가가 억지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정 대표님, 가마를 메는 것은 저 같은 운전기사들이 더 잘해요. 저 아이는 내 아들인데 어린애라 아직 철이 없어요. 어린 애와 따지지 말고 저를 시키세요.”말을 마친 배희봉은 가마 앞에 무릎을 꿇고 허리를 굽히더니 얼굴을 푹 파묻고는 전전긍긍하며 무릎을 꿇었다.조범은 여러 사람의 부축을 받으며 구두를 신은 채 배희봉의 굽은 등을 한 발로 밟았다.조범이 가마에 오르자 연회장은 환호성으로 달아올랐다.무릎을 꿇고 인간 계단을 만든 운전기사 배희봉에
조유진은 자신의 안위를 아랑곳하지 않고 배현수 곁에 머물 수 있었다.하지만 선유는?선유와 함께 모험을 같이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게다가 이제 막 납치범의 손에서 구해낸 선유였다.선유의 작은 얼굴을 보면 속으로 죄책감과 불안이 홍수처럼 밀려왔다.선유를 빌미로 그녀에게 이런 강요를 하는 것은 배현수도 어쩔 수 없었다.배현수는 손을 들어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약간 굳은살이 박인 그의 손끝이었지만 손길은 너무 부드러웠다. 그는 미안한 마음을 가득 담아 말했다.“미안해, 너와 선유를 이 악랄한 싸움에 휘말리게 해서. 나만 아니었다면 너희들은 이런 것들을 감수할 필요도 없었을 텐데...”그를 올려다보는 조유진의 붉어진 눈시울은 아쉬움으로 가득 찼다.조유진은 입술을 깨물며 다시 한번 물었다.“피하러 스위스에만 가면 되는 거예요? 현수 씨, 나에게 숨기는 거 없어요?”그녀는 자신이 온실 속의 화초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배현수와 헤어진 6년 동안 충분히 고생했고 모든 것을 견뎌냈다.남자는 모든 감정을 숨겼다. 그의 눈빛에서 이상한 점을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배현수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문지르더니 온화한 목소리로 그녀를 지긋이 바라보며 말했다.“없어. 이 위기만 해결하면 스위스로 데리러 갈게. 그때...”잠깐 멈칫한 배현수는 다시 말을 이었다.“우리 혼인 신고를 하러 가자. 결혼도 하고.”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은 한없이 부드러웠고 입가에는 옅은 웃음이 감돌았다.그냥 하는 말 같지 않았다.분명 약속하는 말이었다.하지만 왜 그런지 조유진은 믿기지 않았다.그녀는 갑자기 새끼손가락을 내밀며 고집을 부리기 시작했다. “그럼 깍지 걸어요.”배현수는 잠깐 어리둥절해 하더니 이내 웃었다.“왜 갑자기 선유처럼 행동하는 거야? 깍지 걸면? 그다음에는 백 년 동안 변하지 말아야겠네?”조유진은 아주 진지한 얼굴로 ‘네’라고 대답하더니 한마디 덧붙였다.“왜요, 못 하겠어요?”남자는 침울한 눈빛으로 그녀를 보더니 실소를 터뜨렸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긴
육성일의 압도적인 기운은 전화 너머에서도 남초윤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말을 하지 않아도 그 묵직한 압박감은 느껴졌다. 그때 어떻게 그런 용기를 냈는지, 어떻게 육씨 집안에 시집갔는지 스스로도 의아했다. 만약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차라리 구걸을 하더라도 절대 육씨 집안에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남초윤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할아버지, 부탁드려요. 저희가 약속했던 건 두 달 전이었잖아요. 아직 두 달이 채 안 지났고, 제가 지금 아기를 가졌다고 해도 확인이 안 될 수도 있어요.” 그 말에 어느 정도 일리가 있었기에 육성일도 더는 말하지 않았다. 그렇게 할아버지의 전화를 겨우 넘겼지만 전화를 끊자마자 다시 핸드폰이 시끄럽게 울렸다. 이번엔 ‘개자식’ 육지율이었다. “...” 할아버지와 손자는 통화 시간까지 맞춘 것처럼 기가 막히게 연달아 전화를 걸어온다. 그녀는 냉랭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왜요?” 육지율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무슨 폭탄이라도 먹었어요?” 육지율이 자신의 책을 내리게 만들고, 지난달과 이번 달 원고료도 다 날려버린 상황에서 그녀가 전화를 받아준 것만으로도 기적이었다. 하지만 결혼 생활은 아직 유지 중이었고 필요한 것도 있으니 남초윤은 결국 목소리를 가다듬고 좀 더 부드럽게 말했다. “지율 오빠, 무슨 일이에요?” “... 뭐라고 불렀어요?” “지~율~오~빠~” 그녀는 유설영의 말투를 흉내 내며, 아니, 오히려 더 능숙하게 말했다. 육지율은 순간 닭살이 돋았다. “제발 평소처럼 말해요. 저녁에 내 친구가 귀국하는데 같이 식사해요. 6시에 잡지사로 데리러 갈게요.” 남초윤은 단번에 거절했다. “난 안 갈래요.” “저녁에 뭐 다른 약속 있어요?” 남초윤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결혼한 지 3년 됐지만 당신은 나한테 친구 한 명도 소개해 준 적 없잖아요.” 그리고 이제 곧 이혼할 텐데 친구를 만날 필요는 더 없었다.이혼하고 나서 친구들이
조유진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학교에서 누가 너 괴롭히진 않았어?” 배선유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응, 나 괴롭히는 사람 없어. 할아버지가 우리 학교에 엄청난 돈을 기부하셔서 선생님들도 항상 나한테 잘해주시고 많이 관심 해주셨어. 그래서 나도 함부로 장난칠 수가 없어. 혹시 선생님이 할아버지한테 이르실까 봐.” 배현수는 이 말에 전혀 놀라지 않았다. 배선유는 작은 악동처럼 말이 많았고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는 아이였다. 배현수의 말에도 자주 대꾸를 하니, 만약 동급생에게 괴롭힘을 당했다면 벌써부터 떠벌렸을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남을 괴롭히는 쪽에 더 가까웠다. 성남에서 엄준은 배선유를 엄청나게 아끼며 키웠고, 그래서인지 아이는 주눅이 들지 않고 활발하게 자랐다.조유진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다행이네. 우리 선유가 공부를 게을리할 걱정은 없겠어.” 배현수는 딸을 겁주듯 말했다. “너 공부 안 하고 일찍 연애라도 시작하면, 널 대제주에 데려와서 24시간 동안 지켜볼 거야.” 배선유는 입술을 내밀며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 이건 너무 심해요! 나 혹시 쓰레기통에서 주워 온 거 아니에요?” 배현수는 코웃음을 치며 엄격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말했다. “공부 안 하면 좋은 날은 없을 거야.” 잠시 후, 학교 종이 울릴 시간이 가까워졌다. 배선유는 전화를 끊으려다가 친구가 그린 결혼사진 두 장을 영상 속으로 건네받았다. “선유야! 너랑 지우의 결혼사진 내가 그려놨어! 한 번 봐봐!” 배선유가 물었다. “한 장에 얼마야?” “너니까 공짜로 해줄게! 대신 다음번엔 나랑 결혼해 줄 수 있어?” “생각해볼게!” “...” 이 속도로라면 그들 부부는 도대체 몇 명의 사위를 맞이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한편, 스타라이트 매거진에서.남초윤이 사이트 편집자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 그녀의 책은 예상대로 플랫폼에서 삭제되었고 이달 원고료는 한 푼도 들어오지 않
[합법적 부부] 함께 올라온 사진엔 결혼반지를 낀 두 손이 하트 모양을 그리고 있었다. 이 게시글이 올라가자마자 마치 깊은 바다에 떨어진 폭탄처럼 큰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수많은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몰려들어 반응했다. 육지율: [8년의 여정 끝에 드디어 자랑할 수 있네!] 송하진: [어! 전 두 사람 목숨 구해준 은인이에요. 제가 아니었으면 두 사람이 어떻게 혼인신고까지 했겠어요? 당장 절 주빈으로 식사 대접해요!] 남초윤: [아아아아! 유진이를 결혼이라는 무덤 속으로 끌어들이다니! 대표님 너무하세요!] 엄창민: [내 여동생한테 잘해요. 혹시라도 괴롭히면 내 주먹이 용서 못 해요!] 엄명월: [형부! 이렇게 좋은 일에 저희한테 뭐라도 사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강이찬: [축하해, 결국 원하는 대로 됐네.] 심미경: [백년해로하세요. 행복하길 기원합니다!] 서정호: [대표님, 일 다 끝냈으면 빨리 돌아오세요. 의사 선생님이 여기서 엄청 화내고 있어요. 저 더는 못 버틸 것 같아요!] 학교 가기 싫어: [와! 아빠랑 엄마가 드디어 결혼했네요! 헤헷, 아빠, 나도 오늘 결혼했어요!] 배현수는 배선유의 댓글을 보고 순간 검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조유진이 운전하며 그의 미세한 변화를 눈치채고 물었다. “왜 그래요?” “선유가 결혼했다는데.” “뭐라고요?” 조유진은 깜짝 놀라 차를 도로 옆에 세우고 급히 배선유에게 영상 통화를 걸었다. 저쪽에서 배선유는 학교에 있었는데 마침 쉬는 시간이었다. 외국어 학교라 분위기가 자유로워 아이들은 평소에도 부모님과 연락을 하기 위해 휴대폰을 가지고 다녔다. 배선유는 전화를 받자마자 얼굴을 카메라 앞으로 들이밀었다. “엄마, 아빠! 나 사진 보고 싶어!” 조유진은 그녀에게 사진을 보여주고 나서 물었다. “선유야, 아까 결혼했다고 했잖아. 누구랑 결혼한 거야?” “우리 반 한지우랑! 엄마, 나 오늘 엄청 많은 축의금을 받았어! 내가 다 적어 놨어!”
조유진은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갈게요.” 그가 환자라는 사실을 떠올리며 이번 한 번은 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 다음 날 이른 아침. 서정호가 산성 별장에서 두 벌의 정장과 결혼 서류를 준비해왔다. 조유진은 오랜만에 풀 메이크업을 하고 머리도 고데기로 말았다. 그녀는 하얀 오프숄더 드레스를 입고 사진에 잘 나올 수 있도록 최대한 신경 썼다. 그녀는 한동안 이렇게까지 꾸미지 않았는데 하이힐을 신고 배현수 앞에 서니 그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조금 어색해졌다. 그래서 물었다. “나 어때요?” “아름다워. 넌 언제나 아름다워.” 배현수는 전혀 망설임 없이 그녀를 칭찬했다. 조유진은 웃음을 참으며 옆에 있던 넥타이를 집어 들고 배현수에게 매어주었다. 배현수는 그녀의 손길에 고개를 숙이며 협조했다. 조유진은 평소와 다르게 더 복잡하고 정중한 ‘엘드리지 매듭’으로 넥타이를 맸는데 배현수는 평소에 간단한 윈저 매듭만 했었다. “이 매듭은 좀 생소하네.” 조유진은 넥타이를 다 매고 나서 그의 셔츠와 정장 재킷의 깃을 정리해 주었다. “이게 엘드리지 매듭이라고 해요. 중요한 자리에서 어울리는 방식이죠. 어때요, 괜찮아요?” “멋져. 하지만 여보, 우리 서둘러야 해. 조금 있으면 의사가 올 거야.” 웃으며 농담하듯 이야기하던 배현수는 조유진의 외투를 챙겨 그녀의 어깨에 걸쳐 주고, 그녀를 한 손으로 감싸 병실을 몰래 빠져나갔다. 두 사람은 마치 도망치듯 병원을 빠져나와 차에 올랐다. ... 그들이 빠져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의사가 병실에 회진을 왔다. 하지만 환자와 보호자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고 그곳에는 ‘무관한 사람’만 남아 있었다. 의사는 엄숙한 표정으로 서정호를 보며 물었다. “환자는 어디 갔죠? 튜브까지 다 뽑다니, 누가 뽑았습니까?” 서정호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환자 본인이 뽑았습니다.” “도대체 어디 간 겁니까? 팔을 정말 망가지게 할 작정인가요
배현수의 가슴이 떨렸다. 그는 조유진과 이마를 맞대며 낮게 속삭였다. “그때 난 네 옆에 있진 않았지만 네 뒤에서 계속 지켜보고 있었어. 그런데 왜 울었어?” “현수 씨 생각이 났어요.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게 너무 슬펐거든요. 내가 이렇게 좋은 남자를 잃어버린 것 같아서, 그게 너무 아쉽고 후회스러웠죠. 그래서 울었어요.” 지금 이렇게 그를 바라보고 있으니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은 느낌이었다. 조유진의 눈에는 여전히 눈물이 맺혀 있었다. 하지만 이번 눈물은 슬픔이나 후회 때문이 아니었다. 감동과 감사함 때문이었다. 운명이 그들을 온갖 고난 속에서도 끝끝내 묶어 놓았고, 그들 사이에선 이제 더 이상 헤어질 수 없는 깊은 연대가 생겼기 때문이다. 배현수는 긴 손가락을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천천히 끼워 넣으며 손을 꼭 맞잡았다. 순간 그들의 손바닥에서 따뜻함이 퍼져나갔다. 그는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진아, 넌 한 번도 날 잃은 적 없어. 우리가 몇 번을 떨어져도, 얼마나 오랫동안 떨어져 있더라도 난 결국 널 찾아내서 꼭 안고 말해줄 거야. 사랑한다고. 오직 너만 사랑한다고.” 처음부터 끝까지, 조유진은 배현수의 유일한 선택이었고 그 선택은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었다. 조유진은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웃었다. “현수 씨, 우리 영원히 함께할 수 있을까요?” “그럼.” 그의 대답은 8년 전과 똑같았다. 짧지만 확고했으며 1초의 망설임도 없었다. 조유진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손목에 걸린 달콤한 연녹색 비취 팔찌를 내려다보았다. “상처가 나으면 우리 같이 아주머니를 위한 좋은 묘지를 고르러 가요. 그분을 위한 의관묘라도 만들어 드리는 게 어때요?” “아직도 ‘아주머니’라고 불러?” 조유진은 순간 얼굴이 뜨거워지며 말투를 바꿨다. 배현수는 그녀의 팔찌를 손가락으로 살며시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풍수 좋은 곳을 따로 고를 필요는 없어. 어머니께
육지율은 그 필명이 어딘가 익숙하다고 느꼈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문득 기억해 냈다. “이 자식! 기억났어! 이 녀석이 책에서 날 모욕하지 않았나? 내 명성을 망가뜨렸잖아?” 남초윤은 급하게 말했다. “잘못 본 거 아니에요? 비엘 작가가 주인공을 모욕할 리가 없어요! 그러면 밥숟가락 들고 욕하는 것과 뭐가 다르겠어요?” “나를 ‘수’로 묘사한 게 모욕이 아니고 뭐예요? 왜 항상 배현수가 공이냐고?” 남초윤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는 그 부분을 신경 쓰고 있었던 거였다.남초윤은 그가 진짜 작가를 고소할까 봐 걱정되었다. 그래서 변명하듯 말했다. “다음번엔 지율 씨가 공이고, 배 대표님이 수가 될 수도 있잖아요. 원래 BL 소설에서는 공수 구분이 모호해요. 겉보기에 수 같아도 사실은 공일 수도 있다고요!” 조유진은 살짝 의문을 제기했다. “난 현수 씨가 수 같지는 않았는데. 만약 현수 씨가 진짜 수라면 캐릭터 붕괴지. 차라리 육 변호사님이 수인 게 더 어울려. 자유롭고, 매력적이고, 다정하잖아.”“?”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육지율은 얼굴이 시커멓게 변하며 조유진에게 따졌다. “아니, 조유진. 내가 약해 보이는 수 같은 느낌을 준다고?” “...” 배현수는 차갑게 말했다. “유진이가 쓴 것도 아닌데 왜 화내? 그럴 시간 있으면 작가나 고소해.” 남초윤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 그냥 재미로 쓴 거지 무슨 큰 잘못을 한 것도 아니잖아요? 작가를 고소하면 너무 쪼잔해 보일 거예요!” 하지만 육지율은 이성을 잃고 이를 악물었다. “쪼잔해 보이든 말든, 그 책을 하차할 거예요!” 자신이 소설 속에서 수 역할로 묘사되었고, 그것도 많은 사람에게 읽히고 있다는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돋았다. 조유진은 객관적으로 말했다. “사실 책 내용은 나쁘지 않아요. 꽤 재미있고 독자도 많아요.” “독자가 몇 명인데?”“몇만 명 정도?” “뭐?”‘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날 수로 상상했
병실에서 조유진은 그가 누워있는 침대 옆에 앉아 있다가 잠들었다. 잠에 들어서도 손가락이 배현수의 손에 살짝 얽혀 있었는데 다정하고 달콤하기 그지없었다. 이 사진은 완전히 남자 친구 시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입원 생활이 지루하다고 하다니.육지율이 댓글을 남겼다. “뭐야, 입원했어? 혹시 가정 폭력이라도 당한 거야?” 댓글을 남기고 나서 육지율은 차에 시동을 걸며 남초윤에게 말했다. “과일 바구니 좀 사서 병문안이나 가요. 친구가 입원했어요.” “친구? 설마 배 대표님이세요? 어디 아파요?” 육지율은 웃으며 말했다. “글쎄요. 진짜 아플 수도 있고 그냥 꾀병일 수도 있고.” 혹시 모른다. 꾀병일지도....병원에서는 조금 전 장은숙이 산성 별장에서 저녁 식사를 가져왔다. 수술 후 얼마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 밤은 죽 같은 유동식만 먹어야 했다. 배현수는 오른손을 쓸 수 없었기에 조유진이 죽 그릇을 들고 숟가락으로 그에게 먹여주고 있었다. 첫 숟가락을 그의 입 앞에 가져가자 배현수는 뜨겁다고 투덜댔다. 조유진이 후후 불어 온도를 맞춘 후 말했다. “이제 적당히 식었어요.” 배현수는 그제야 죽을 한 입 삼켰다. 그 순간 병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장난스러운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며칠 못 본 사이에 아기로 됐네? 밥도 혼자 못 먹고, 조유진이 널 너무 오냐오냐한 거 아냐?” 조유진이 놀라서 뒤돌아보니, 육지율과 남초윤이 병실에 들어와 있었다. 그녀는 웃으며 설명했다. “오른쪽 어깨에 부상을 입었어요. 의사 선생님이 며칠 동안 오른손은 쓰지 말라고 하셨어요. 상처가 더 심해질 수 있거든요.” 그러자 육지율은 다짜고짜 그의 오른쪽 어깨를 툭 쳤다. “진짜야?” 배현수는 고통에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욕설을 퍼부었다. “이 미친놈아!” 조유진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변호사님, 진짜로 다쳤다니까요! 어깨에 구멍이 났다고요, 함부로 건드리지 마세요!
그녀를 겨우 한 번 데리러 온 김에 출퇴근길의 불편함을 느끼고는 아예 차를 사서 해결하려고 하다니, 정말 육지율 다운 방식이었다.이 4S 매장에서 파는 차들은 모두 포르쉐였고 가격도 만만치 않았다. 가장 저렴한 모델도 수천억 원대였다. 남초윤은 이미 남씨 집안이 육지율에게 너무 많은 빚을 지고 있었기에, 그가 차를 선물해 주겠다고 해도 받을 수 없었다.남초윤은 차분히 말했다. “앞으로는 출퇴근 길에 당신을 귀찮게 하지 않을 테니, 굳이 차를 선물할 필요는 없어요.”육지율은 순간 멈칫했다가 살짝 비웃으며 말했다. “차 한 대 선물한다고 귀찮다는 딱지가 붙어요? 이런 확산적 사고방식은 참 대단하네.”“....”정말 그런 게 아니란 말인가?평소에도 성격이 불 같았던 육지율은 차를 주겠다고 하면서도 그녀를 달래는 상황이 우스웠는지 어이없어 웃었다. 둘 중 누가 더 성격이 나쁜지 모를 일이었다.영업 직원은 남초윤을 육지율이 외부 애인으로 오해했고, 이 큰 거래가 깨질까 봐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가씨, 변호사님께서 차를 사주시는 건 출퇴근 시간을 줄여서 그 시간 동안 조금이라도 더 쉴 수 있게 해주려는 마음이 아닐까요?”남초윤은 더 이상 그의 돈을 쓰고 싶지 않았다. 이미 갚을 수 없는 빚이 너무 많았고 계속해서 더 쓴다면 두 아이를 낳아야 겨우 그 빚을 다 갚을 수 있을 것 같았다.그러나 육지율은 그 여느 때처럼 행동했다. 그는 VIP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빨리 골라요. 차 안 사면 집에 못 돌아가요.”남초윤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여자 영업 직원이 다가와 다양한 모델을 소개할 때, 그저 듣기만 했다. 그 직원은 미소를 띠며 말도 아주 달콤하게 했다. “변호사님은 저희 매장의 단골이세요. 그런데 여자를 데리고 온 건 이번이 처음이네요. 변호사님이 정말로 많이 아끼시는 것 같아요. 비싼 차를 고르시면 아마 더 기뻐하실 거예요.”역시, 판매왕이었다.감정적 가치를 제공하는 법을 너무나 잘 아는 직원이었다. 하지만 남초윤은 그저 외부의
남초윤은 결혼 상태를 한 번도 업데이트한 적이 없었다. 동료들 눈에는 여전히 미혼으로 보였다.처음 그녀와 육지율의 스캔들이 터졌을 때 온 세상이 떠들썩했지만 사실 모두 육지율의 매력적인 외모 때문이었다. 아무도 남초윤처럼 작고 평범한 존재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육지율이 그녀와 결혼하기로 결정했을 때 그들의 침대 사진이 언론이나 남재원에게 유출되지 않은 것도 기적이었다. 사람들은 그저 육지율이라는 유명한 바람둥이가 ‘함정'에 빠져 순진한 여자와 관계를 맺은 후, 마지못해 결혼했다는 소문만 믿고 있었다.육지율이 연예계 인물이 아닌 만큼 동료들 중에서도 아무도 그 사건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육지율이 ‘좋은 집안의 아들’ 이라는 사실만 기억하고 그의 결혼 상대가 누군지에는 무관심했다. 그녀는 어디에도 크게 드러나지 않았고 언론에서도 그의 곁에 서는 일이 거의 없었다. 남초윤은 그렇게 세상 사람들의 눈에 숨겨져 있었다.동료들은 그저 그녀가 조금 집안 배경이 있는 부유한 여자인 줄로만 알았고 육지율의 아내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어쨌든 육지율의 아내라면 아무리 상황이 나빠도 그들과 같이 일하며 고생할 일은 없을 테니까. 설령 과거에 파파라치 일을 했더라도 그렇게 높은 곳에 시집갔다면 육씨 집안이 그녀를 계속 그 일을 하도록 놔두지 않았을 거라고 여겼다.비록 세상은 모두 직업의 평등을 외치고 있지만 상류 사회에는 여전히 그들만의 규칙이 있었다. 체면과 명예가 그들의 신분과 존엄을 상징했다. 파파라치라는 직업은 육씨 집안에게 있어 절대 자랑스러울 수 없는 일이었으니, 육지율과 강란희가 그녀에게 좀 더 체면 있고 유망한 직업들을 제안했지만 남초윤은 그들의 호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그렇게 시간을 보낸 끝에 동료들은 하나둘씩 퇴근하고 남초윤만 남았다. 한 시간이 흐른 뒤 남초윤은 휴대폰 화면을 확인했다. 저녁 7시가 되었다. 그녀는 통화 기록을 훑어보고 다시 한 번 메시지를 확인했지만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아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