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유진은 호흡이 점점 가빠지는 것을 느꼈다.배현수의 가슴과 벽 사이에 갇혀 있던 조유진은 멍하니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시선은 그의 눈에서 입술로 이어졌고 튀어나온 그의 하얀 목젖에서 멈췄다. 눈빛도 점점 흐릿하게 변했다.조유진은 심호흡한 후 말했다.“나더러 오라고 한 것도 이러기 위해 그런 거 아니에요?”이제 손안에 넣었으니 잘난 체하는 건가?찰칵.방문을 닫은 배현수의 얼굴에 짓궂은 웃음이 번졌다.“응, 맞아. 그러니까 좀 더 적극적으로 해볼래?”무겁게 잠긴 그의 쉰 목소리는 너무 매혹적으로 들렸다. 조유진이 말을 하려 하자 그는 바로 머리를 숙여 그녀에게 키스했다.갑작스럽고 거친 키스였다.조유진은 순간 머릿속이 백지장이 되는 듯했다. 정신을 차렸을 때 심장은 쿵쾅쿵쾅 사정없이 뛰고 있었다.‘툭’하는 소리가 가볍게 났다. 종이봉투가 바닥에 떨어졌다.조유진이 손을 들어 배현수의 목을 감쌌다. 그러자 그는 곧바로 그녀의 허리와 엉덩이를 큰 손으로 감싸 안으며 위로 끌어안았다.두 발이 허공에 뜬 그녀는 현관문에 등을 기댄 채, 새끼 원숭이처럼 그의 품에 안겼다.집착스러운 키스가 더 깊어졌다.스위치가 조유진의 등에 눌려 ‘딸깍’ 소리를 냈다. 환하게 켜져 있던 헤드라이트가 꺼졌다.스위트룸 안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창밖으로 보이는 성남의 밤은 화려하고 아름다웠다.바깥 불빛이 희미하게 방안으로 비쳐 들어왔다. 조유진은 한 손으로 그의 목을 껴안고 다른 한 손으로 그의 얼굴을 만졌다. 서로의 숨결이 한데 뒤엉켰지만 조유진은 이성의 끈을 잡고 한마디 했다.“커튼 닫아요...” 배현수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이 호텔의 유리창은 밖에서 안이 안 보여.”프라이버시가 꽤 잘된 곳이었다.조유진은 반신반의한 얼굴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정말요?” ‘응’이라고 대답한 배현수는 한마디 덧붙였다.“테스트해 볼래?”“뭘 테스트해요?”어리둥절한 조유진은 어느새 옷이 전부 벗겨진 상태였다.심장은 사정없이 쿵쾅쿵쾅 뛰었다.“현수
조유진은 배현수의 목을 껴안으며 떠보듯 말했다.“배현수?”그러자 배현수는 조유진의 허리를 꼬집었다. 그러고는 실망스러운 듯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고작 그거야?”무슨 말이 듣고 싶은지 대충 짐작이 갔다.그러나 명분이 서지 않아 함부로 입에 올릴 수 없었다.어떤 일들은 언급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냥 넘어간 것이 아니다.너무 잘 알지만 서로 암묵적으로 쉽게 그 얘기를 하지 않을 뿐이다.조유진은 그렇게 눈치 없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그 단어를 쉽게 말할 수 없었다. 장난기 섞인 목소리로 그의 귓가에 대고 한마디 했다.“선유 아빠?”듣기 싫은 단어는 아니었지만 배현수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선유 아빠...이 호칭은 ‘선유'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 아버지가 딸에게 기대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그녀를 그윽하게 바라보던 배현수는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얼굴을 문지르며 말했다.“일부러 나 화나게 하려고 그러는 거야?”그를 뚫어지게 쳐다보던 조유진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갑자기 한마디 했다.“결혼도 안 했는데 무슨 호칭이 듣고 싶은 거예요?”덤덤한 한마디였지만 침대 위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변했다.사실 조유진도 이런 순간에 일부러 이런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분위기를 망치기 때문이다.배현수의 얼굴도 눈에 띄게 굳어졌다. 눈빛에는 그동안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미안한 감정이 스쳐 지났다. 그 어떤 답도 들을 수 없을 거라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는 조유진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선유가 엄씨 사택에 혼자 있어서 마음이 안 놓여요. 아무래도 가 봐야 할 것 같아요.”손을 뻗어 침대 좁은 탁자 위에 놓인 휴대전화를 집어 들고는 홈 화면을 클릭해 시간을 보았다.새벽 1시였다.“30분만 더 있다가 1시 반에 갈게요. 참, 현수 씨는 언제 대제주시로 갈 거예요?”조유진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덤덤했다.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배현수에게 소란을 피우지도 않았다.하지만 고개를 돌리는 순간, 배현수는 그녀 눈빛 속에 있는 허무함을 바로 캐치했다.
과거의 아름다운 기억 속에 빠져서 일시적인 미련 때문에 손을 놓지 못할 뿐 사실 오래전부터 사랑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사람들도 말하지 않는가? 연애는 3년을 넘지 않는 것이 좋다고... 3년이나 5년을 넘기면 그 어떤 결과도 없을 거라고...감정의 마지막에 서로를 잡고 놓지 못하고 있는 것은 무감각하게 변한 습관뿐이다.하지만 조유진은 잘 알고 있었다. 적어도 자기 자신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배현수에게 습관의 감정만 있는 것이 아니다.이렇게 오랫동안 알고 지냈지만 매번 볼 때마다 여전히 두근거렸다.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아무런 표현을 하지 않는 그에게 화를 내야 하는 게 맞지만 무책임하다고 충분히 화를 낼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이렇게 가만히 껴안고 있는 것만으로도 사치라는 생각이 들었다.화를 내는 순간 진짜로 모든 게 끝일까봐 무서웠다.사람의 마음은 정말 복잡한 것 같다. 당신을 위해 죽을 수 있지만 사랑하지 않는다고 한 순간 그 감정이 바로 변하기 때문이다.조유진은 고개를 들어 배현수를 바라보며 말했다.“현수 씨, 내가 이렇게 잡고 있는 이유는 현수 씨가 나와 결혼하지 않을 거지만 다른 사람과도 결혼하지 않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이 약속조차 지키지 않으면 미워할지도 몰라요.”이것은 그와 상의하는 것이 아니라 귀띔이고 통보였다.배현수는 그녀의 뒷덜미를 살며시 잡고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유진아, 난 영원히 네 거야.”영원히...모든 사랑과 설렘은 오직 그녀에게만 줬다. 그녀를 미워했던 시절에도 다른 사람에게 준 적이 없다....대제주시.심미경은 강이찬에게 이혼을 통보한 천우 별장에서 짐을 싸고 나왔다.그곳은 강이찬의 집이지 그녀의 집이 아니다.이 사실을 알게 된 조윤미는 혼수 예물 비용 4억원을 심미경의 계좌에 넣어주며 몸을 잘 챙기라고 신신당부했다. 심미경은 일단 작은 아파트에 세들었다.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른다. 하지만 강이찬과 이혼하는 것은 확실한 일이다.다만 강이찬이 무슨 마음
문밖에 서 있는 강이찬은 가슴이 아팠다. “미경 씨, 아이가 없어진 것은 내 탓이에요. 그동안 이진이에게 뭐든 오냐오냐하다 보니 미경 씨에게 허튼짓까지 하게 만들었어요. 다시 한번만 기회를 주면 안 될까요? 이혼만 아니면 뭐든지 다 할게요.”현관문에 등을 기댄 심미경은 어둠 속에서 살짝 웃으며 말했다.“원주에 있을 때도 한 번만 기회를 달라고 했었잖아요. 그 말만 믿고 다시 돌아갔던 건데... 지금 또 이러면 내가 이찬 씨를 어떻게 믿어요? 예전에 당신 마음속에 조유진이 있었던 거? 상관없었어요. 누구나 마음속에 다른 사람이 있기 마련이니까. 깨끗하게 비우기만 하면 끝이니까. 하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당신은 강이진이 사주한 교통사고라는 것을 알고 그 우리 아이를 죽였다는 것을 알면서도 여전히 나를 속이고 강이진이 도망가게 놓아줬어요. 더 이상 이찬 씨를 믿을 수 없어요.”심미경에게 강이찬은 신용불량자와 마찬가지였다. 더 이상 돌이킬 수 없었다.심미경은 그더러 놓아달라고 한다.맞는 말이다. 만약 그와 함께 있지 않았더라면 이런 고생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마음속의 죄책감은 마치 성난 파도처럼 끊임없이 덮쳐와 그를 삼켜버릴 것 같았다.술을 많이 마신 강이찬의 허스키한 목소리는 알코올에 마비가 되었는지 쓸쓸하게 들렸다.“전에 나에게 물었었죠? 결혼하는 이유가 죄책감 때문인지 아니면 당신을 진짜 사랑하기 때문인지... 미경 씨, 내 말을 믿을지 안 믿을지 모르지만 처음에 미경 씨와 함께 있게 된 것은 확실히 미경 씨에게서 조유진의 그림자를 보았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나중에는 아니에요. 지금 생각해보면 머릿속에 그렸던 모든 미래는 늘 미경 씨와 함께했어요.”잠시 멈칫한 강이찬은 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사실 미경 씨는 조유진과 닮지 않았어요. 외모, 이목구비, 성격... 전부 똑같지 않은데 내가 그렇게 생각하려 했었던 것 같아요. 잘못했어요. 하지만 지금은 잘 알고 있어요. 조유진은 조유진이고 미경 씨는 미경 씨예요. 내가 미경 씨와 결혼하기로 한
강이진이 아이를 죽이는 장면을 꿈에서 몇 번이나 봤는지 모른다. 하지만 강이찬은 옆에 서서 모든 것을 외면했고 슬퍼하거나 마음이 약해지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심미경은 아이를 구해달라고 강이찬을 목청껏 불렀지만 그는 어디에도 없었다.강이진은 팔짱을 낀 채 의기양양한 얼굴로 그녀를 향해 웃으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어쩌면 그날 교통사고의 트라우마가 너무 큰 탓일지도 모른다.짐을 싸고 나온 지 며칠 동안, 그녀는 한숨도 못 잤다.강이찬에 대한 감정이 더욱 복잡해졌다.그는 아이의 친아버지였지만 지금은 아이를 죽인 공범이 되었다.그를 마주하면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원망의 감정이 넝쿨처럼 가슴속에서 천 갈래 만 갈래 퍼져나갔다.강이찬은 떠나려 하지 않았고 심미경은 문을 열지 않았다.한 명은 문밖에서 다른 한 명은 집 안에서 밤새도록 이렇게 대치해 있었다.다음 날 아침, 문이 삐걱거리며 열렸다.어두웠던 강이찬의 눈빛이 순식간에 맑아졌다. 그는 심미경을 덥석 끌어안으며 말했다. “미경 씨, 우리 집에 가요. 네?”심미경은 두 팔을 아래로 늘어뜨린 채 가만히 서 있었다. 초췌한 얼굴에는 그 어떤 감정 기복도 없었다.그녀는 아무런 감정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여기에 계속 있어봤자 내 결정은 변하지 않아요. 이미 엎질러진 물, 다시 주워 담을 수 없어요. 아니면...”“아니면요?”강이찬은 자기가 할 수만 있는 일이라면 반드시 할 것이다.심미경은 덤덤한 얼굴로 그를 보며 피식 웃었다. 그 웃음은 너무 가벼워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아니면 죽은 아이를 다시 살리던가...”죽은 아이를 다시 살려오면 그를 용서할 수 있을지 모른다.강이찬은 많이 충격을 받은 듯했다. 그는 심미경의 두 어깨를 잡고 말했다.“아이를 갖고 싶으면 나중에 한 명 더 가지면 되잖아요. 지금 의료 기술이 얼마나 발달했는데요. 국내에서 치료가 안 되면 해외로 가요. 그래도 안 되면 시험관 아이도 해볼 수 있고요.”이때, 심미경이 그의 말을 끊었다.“아이가
조유진은 밤늦게 엄씨 사택에 돌아왔다.1시 반이 되면 돌아오려 했지만 떠나기 전, 배현수가 뒤에서 껴안고 그녀의 목덜미에 키스했다.키스를 하다 보니 조유진도 저도 모르게 그의 행동에 응하게 되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한참이나 더 서로의 숨결을 느꼈다. 배현수 때문에 몸이 많이 피곤했지만 엄씨 사택으로 돌아오자 쉽게 잠이 들지 않았다. 다음날 오전, 아침 식사가 식탁에 차려졌다.삶은 달걀의 흰자만 좋아하고 노른자는 싫어하는 선유는 흰자만 발라서 먹은 뒤 노른자만 조유진의 접시에 담아 놓았다.조유진은 노른자를 한 입 베어 물자 갑자기 속이 메스꺼운 느낌이 들었다.옆에 있던 엄창민은 그녀가 원래부터 노른자를 좋아하지 않는 줄 알고 한마디 했다.“먹기 싫으면 먹지 마.”조유진은 알겠다고 대답한 뒤 입맛이 없어 죽만 몇 숟가락 먹었다.선유는 작은 손을 뻗어 조유진의 이마를 만졌다.“엄마, 어디 아파?”조유진은 녀석의 작은 손을 잡으며 말했다.“어젯밤에 좀 추웠나 봐. 빨리 밥이나 먹어.”“응. 알았어. 이게 다 아빠 탓이야. 한밤중에 호텔까지 데려다 달라고 해서.”조유진을 바라보던 엄창민은 어젯밤 배현수의 부탁이 떠올랐다. 그는 몇 초간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너와 선유를 스위스에 보내겠다던데, 너와는 얘기가 된 거야?”조유진은 순간 넋이 나간 얼굴로 물었다.“현수 씨가 오빠에게 그 말을 했다고요?”엄창민은 숨기지 않고 사실대로 말했다.“나더러 너와 선유를 스위스에 피신시켜 달라고 했어. 너의 생각은 어떤데?”조유진은 당연히 가고 싶지 않았다.엄창민에게 선유와 자기를 스위스로 데려다주라고 하는 것은 꼭 마치 두 모녀를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는 것 같았다.순간 화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아직 별생각이 없어요.”엄창민은 하나하나 객관적으로 분석했다.“스위스로 가는 것은 꽤 괜찮은 제안이라고 생각해. 그곳이 상대적으로 안전하니까. 최근 드래곤 파에서 SY그룹과 성행 그룹 모두 눈독을 들이고 있어서 배현수도 충분히 생각하고 판단한
배현수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그럴 가능성이 있을 수는 있지만 백소미가 그렇게 멍청하지는 않을 거야. 엄씨 집안에서 선유를 납치해봤자 어디도 도망가지 못할 테니까.”말이 끝나기 무섭게 배현수의 핸드폰이 울렸다.엄창민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사람은 찾았어요. 남교의 폐가 건물에서 납치범이 직접 배현수 씨더러 와서 데려가라고 하네요.”...배현수와 조유진은 재빨리 남교로 달려갔다.한쪽 폐가 건물에서 인사불성이 된 선유가 쓰러진 채 의자에 묶여 있는 모습이 보였다. 마스크를 쓰고 있는 납치범은 손에 총을 들고 선유의 머리에 겨누었다.조유진은 깜짝 놀라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총은 일단 내려놓으세요. 원하는 건 뭐든지 말해봐요.”납치범은 조유진을 가리키다가 배현수에게 물었다.“혼자 오라고 했잖아. 왜 여자까지 데리고 온 거야?”배현수는 옆에 있는 조유진을 보고 말했다.“유진아, 일단 먼저 나가 있어.”“하지만...”조유진이 가려고 하지 않자 납치범은 흉악한 표정으로 선유의 작은 머리를 총구로 가리켰다.“안 가면 이 총으로 당신 딸 머리를 쏴버릴 거야.”조유진은 심장이 미친듯이 뛰었지만 납치범의 말을 듣지 않을 수 없었다.걱정된 그녀는 배현수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조심해야 해요. 밖에서 기다릴게요.”배현수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응, 선유 데리고 나갈게.”저 멀리 걸어가는 동안에도 조유진은 세 번이나 뒤를 돌아봤다.폐가 건물에는 납치범과 배현수, 그리고 일찌감치 정신을 잃은 선유만 남게 되었다.배현수는 평소와 다름없이 태연한 얼굴로 ‘납치범’에게 걸어가며 말했다.“나 좀 몇 대 때려줘.”‘납치범’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배 대표님. 이건 좀 아닌 것 같은데요?”배현수는 옆에 있는 선유를 힐끗 보고는 다시 말했다.“얼굴만 좀 세게 때려줘, 안 그러면 들켜.”“그럼 실례하겠습니다. 배 대표님, 저를 탓하지 마십시오.”...20분 후, ‘펑’하는 굉음과 함께 폐가 건물에서 귀를 찌르는 듯한 총소리가 들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선유는 정밀 검사를 받았다. 결과를 보니 큰 문제는 없었다.잠에서 깬 녀석은 눈을 비비며 의아한 얼굴로 조유진에게 물었다. “엄마, 우리가 왜 병원에 있어?”조유진은 녀석을 덥석 껴안으며 다급하게 물었다.“선유야, 어디 아픈 데는 없어?”선유는 고개를 가로젓더니 가슴을 치며 말했다.“그냥 좀 졸려, 엄마 내가 오래 잤어? 머리가 왜 이리 띵해?”조유진은 선유의 작은 어깨를 잡고 뚫어지게 봤다. 하지만 녀석의 얼굴은 너무 평온했다. 어린 얼굴에는 납치된 흔적이 전혀 없었다.처음에 조유진은 녀석이 너무 놀라 넋이 나간 거라고 생각해 다독이며 말했다.“선유야, 엄마 아빠가 다 있으니까 겁내지 마.”“엄마, 겁날 게 뭐가 있어? 아빠, 아빠도 왜 그렇게 날 쳐다봐요? 설마 내가 무슨 큰 병에 걸렸어요?”눈이 휘둥그레진 선유는 작은 입을 벌리고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물었다.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은 배현수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네가 실수로 넘어져 쓰러지는 바람에 엄마가 많이 놀란 것 같아. 지금은 괜찮아.”선유가 ‘납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것을 보고 조유진도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괜히 어린 아이의 마음에 트라우마라도 남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엄씨 사택에 돌아간 후, 선유는 아무렇지 않은 듯 태블릿을 껴안고 애니메이션을 보았다. 녀석의 곁을 한참 지키고 있던 조유진은 녀석의 팔팔 뛰는 모습에 그나마 안도감을 느꼈다.하지만 속으로는 의심이 들었다.아무리 생각해도 의구심을 풀 수 없었던 조유진은 선유를 보고 물었다.“선유야, 정말 아무것도 기억 안 나?”사과를 먹고 있던 선유는 무심한 얼굴로 대답했다.“무슨 기억? 엄마, 오늘 왜 이렇게 이상한 말만 하는 거야? 혹시 어디 아픈 거야?”녀석은 작은 손을 내밀어 조유진의 이마를 짚어 보고는 다시 자기 이마를 만졌다. 뜨겁지도 않고 열도 없었다.배현수가 들어와 조유진을 데리고 나갔다.“괜찮다니까 됐어. 혼자 놀게 내버려 둬.”조유진은 찜찜한 얼굴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