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유진은 종이봉투를 들고 재빨리 달려가 손에 든 것을 신준우에게 건넸다.“신 선생님, 제가 늦은 건 아니죠? 길 가실 때 드시라고 제가 만든 작은 비스킷을 준비했어요. 제가 값비싼 선물을 드릴 수 없으니 이건 작은 감사의 표시로 받아주세요.”신준우는 비스킷이 들어있는 봉지를 받아 들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유진 씨가 배웅하러 와줘서 너무 기뻐요. 유진 씨가 만든 비스킷은 정말 맛있을 것 같아요. 제가 언제 다시 대제주시로 돌아올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앞으로는 유진 씨가 만든 비스킷을 먹지 못할 것 같아 아쉬워요.”조유진은 별다른 생각하지 않고 말했다.“나중에 제가 만든 비스킷이 먹고 싶으면 전화하세요. 제가 만들어서 진공포장하고 택배로 보내드릴게요.”신준우는 감동한 나머지 손을 뻗어 조유진을 안았다.“유진 씨는 정말 착한 사람이에요.”조유진은 깜짝 놀라 서둘러 그를 밀어냈다.“신 선생님, 3년 동안 선유가 아플 때마다 도와주셨잖아요. 정말 감사해요. 앞으로 다시 만날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안전하게 가시길 바라고 거기서도 즐겁게 지내셨으면 좋겠어요.”“유진 씨, 만약에, 만약에 말이에요. 제가 S시에 정착해서 유진 씨와 선유에게 집을 줄 수 있다면... 선유를 데리고 S시로 올 의향이 있어요?”대제주시를 떠나라고?조유진은 진심으로 어머니와 선유를 데리고 이곳을 떠나고 싶었지만, 이미 배현수에게 티켓을 압수당한 데다가 대제주시를 떠나는 배마저 잡혀 있는 상태였다.“신 선생님, 전 선생님한테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에요. 저에게는 혼자 생활하기 힘드신 어머니가 계시고 제가 보살펴야 하는 6살짜리 딸도 있어요. 저는 신경 써야 할 가족이 많아요. 그래서 저는 선생님한테 안 어울려요.”“좋아하는데 어울리고 안 어울리는 게 어디 있어요. 제가 좋아하면 되는 거죠. 그렇지 않으면 유진 씨는 제가 마음에 들지 않는가요?”조유진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제가 이런 상황인데, 제가 감히 어떻게 마음에 들지 않을 자격이 있겠어요.”조유진의 휴대전화
서정호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조유진 씨는... 아직 안 온 것 같습니다!”그렇게 말한 서정호는 조심스럽게 배현수의 표정을 살폈다.배현수의 얼굴은 차갑게 가라앉았다.“출근 첫날에 지각하다니, 누가 조유진에게 그런 특권을 준 거야?”“오늘 길이 막혀서 그런가 봐요!” 서정호는 조유진 대신 변명을 찾으려고 애를 썼다.배현수는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대제주시의 지하철이 막힌다고?”“...”서정호는 배현수의 불만을 잠재우려 했다.“지금은 왔을지도 몰라요. 대표님, 제가 다시 영업부에 가볼까요?”갑자기 배현수의 휴대전화에 카카오톡 메시지가 몇 개 떴다.송인아가 보낸 것이었다.“대표님, 제가 방금 해성시에 공연하러 가려고 공항에 왔는데 우연히 조유진을 마주쳤어요. 그런데 왜 어떤 남자랑 껴안고 있는 거죠?”송인아는 여러 장의 사진을 보냈다.사진 속 조유진과 한 남성이 공항에서 작별 인사를 하는 듯 포옹하고 있었다.그리고 그 남자는 다름 아닌 신준우였다.배현수는 신준우가 오늘 S시 병원으로 부임하기 위해 떠난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서정호는 배현수의 표정을 살폈다. 배현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표정은 점점 차가워졌다.“대표님?”배현수는 휴대전화를 옆으로 던졌고 그의 눈빛은 아주 차가웠다.“됐어. 영업팀에게 말해. 조유진이 앞으로 30분 안에 출근을 하지 않으면 입사 절차를 거치지 않아도 된다고.”30분, 배현수가 가진 전부의 인내심이다.“알겠습니다. 지금 가서 말하겠습니다.”...조유진은 서둘러 SY 부동산 영업팀으로 향했고 너무 급하게 와서 숨을 헐떡였다.시간을 확인해 보니 10시 반이 채 지나지 않았다.오는 길에 차가 막히지 않아서 다행이었지, 아니면 11시까지 회사에 도착할 수 없었을 것이다.서정호는 영업팀 입구에 서서 이리저리 살피다가 드디어 조유진이 걸어오는 것을 발견했다.“조유진 씨, 드디어 오셨군요! 배 대표님이 화내실 뻔했어요!”“벌써 알고 계세요?”서정호는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진 팀장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조유진에게 몇 가지 조언을 해주었다.조유진은 겸허히 받아들였다.“다시는 안 그럴 거예요. 앞으로는 일찍 도착할게요.”진 팀장은 조유진을 살피더니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조유진 씨, 혹시 서 비서님의 친척인가요? 영업팀 일반 직원들 중에 서 비서님이 직접 추천해서 온 직원은 본 적이 없어요.”이건 무슨 뜻일까, 그녀와 서 비서의 사이가 얼마나 좋은지 캐묻는 건가?조유진은 당황한 척했다.“서 비서님과 저는 아는 사이인 건 맞지만 친척은 아니고 같은 학교 출신이에요!”조유진은 거짓말했다.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같은 학교 출신이라고.직장에서 발생하는 일은 모두 눈치 싸움이다. 배경이 없으면 동료와 상사들이 괴롭힐 것이고, 그렇다고 배경이 너무 강하면 뒤에서 험담할 것이다. 약간의 배경이 가장 일반적이지만 가장 합리적이기도 하다. 다른 사람들은 감히 괴롭히지 못할 뿐만 아니라 소외시키지도 않을 것이다.“그렇군요. 나는 유진 씨가 1호 빌딩 대표님의 친척인 줄 알았어요. 조금 전까지 유진 씨에게 어떤 태도로 말해야 할지 몰랐어요.”“그룹의 임원들은 모두 1호 빌딩에 계신가요?”진 팀장은 고개를 끄덕였다.“거의 그렇죠. 우리 같은 말단 직원들은 1호 빌딩과 접촉할 일이 많지 않아요. 저희 영업팀에서는 서 비서님 같은 분들을 6개월에도 한 번 만나지 못합니다. 배 대표님은 더 말할 것도 없고요.”조유진은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배현수를 자주 볼 필요가 없다는 것은 꽤나 좋은 일이다.배현수를 볼 때마다 그녀는 손바닥에 식은땀이 흘렀고 극도의 압박감에 시달렸기 때문이다.“우리 영업팀은 분양사무실에 가서 고객을 접대해야 하고 관심 있는 고객이 있으면 일주일 연속 회사를 떠나 고객을 데리고 집을 보러 다녀야 해서 엄청 피곤해요. 유진 씨 보기에는 너무 말랐는데 이런 고생 할 수 있겠어요?”“네!”“에너지가 좋네요. 유지하세요.” ...조유진이 출근한 첫날, 선임은 그녀를 데리고 전체 업무 내
조유진은 진심 어린 태도로 말했다.“어르신, 55평짜리를 보셔도 됩니다. 55평짜리는 대저택이라 전용면적이 아주 넓습니다. 조금 전에 보신 90평짜리는 사실 대형 복층이라 층과 층 사이가 6미터나 됩니다. 2층으로 가시려면 계단을 오르셔야 하는데 어르신이 지팡이를 짚고 계시고 거동이 불편하시기 때문에 90평짜리는 어르신께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합니다...”어르신은 조유진을 아주 마음에 들어 하는 눈빛으로 보았다.“젊은이가 이런 것까지 생각하고 아주 섬세하군.”조유진은 의젓하면서도 부드러운 미소로 말했다.“당연히 해야 할 도리를 다했을 뿐입니다. 어르신, 집을 마련하는 것은 큰일이잖습니까? 많이 둘러보셔야 잘 선택할 수 있습니다.”그렇게 어르신은 몇 분을 더 둘러보았다.조유진은 어르신께 물 한 컵을 따라주었다.“어르신, 실례가 안 된다면 혹시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요?”“엄 씨일세. 젊은이는?”조유진은 자신의 명찰을 보여주면서 말했다.“저는 조유진이라고 합니다.”어르신은 그녀의 명찰을 보더니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조유진이라, 그러면 유진 씨, 계약서를 쓰도록 합시다.”조유진은 놀라면서 물었다.“어르신, 더 보지 않으셔도 되겠어요?”“안 봐도 돼. 55평짜리로 하지.”조유진은 몇초간 멈칫하더니 그에게 소개했다.“어르신, 5동, 6동 모두 55평인데 몇 동 몇 층을 선호하시나요?”“젊은이는 어떤 것이 좋을 것 같아?”어르신은 이미 조유진을 믿고 있는 듯 그녀의 의견을 물었다.“6동 13층이 좋을 것 같습니다. 6, 13이 모두 좋은 숫자이지 않습니까.”어르신은 의아한 듯 물었다.“왜 6동 6층은 아니고? 육이 좋은 숫자잖아?”“어르신께서 도덕경을 읽어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도는 하나를 낳고, 하나는 둘을 낳고, 둘은 셋을 낳고, 셋은 만물을 낳으며 만물은 음을 등지고 양을 껴안아, 기를 격동시켜 화기를 이룬다고 하였습니다.”‘이 젊은이가 아주 흥미롭군.’어르신은 웃었다.“그러면 왜 3층은 추천 안 했지? 셋은
조유진이 배현수의 사무실에 와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의 산성 아파트와는 다른 느낌이었다.심플하지만 고급스러운 모습이었다.뚫린 한쪽 벽면은 환하게 통유리로 만들어져 깔끔하고 채광도 좋았다.하지만... 이 남자의 안색은 별로 좋아 보이지 않았다.조유진은 에어컨 차가운 바람을 정통으로 맞으며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대표님, 저를 찾으셨습니까?”“오늘 왜 지각했어?”배현수는 가죽 소파에 앉아 있었고 조유진은 서 있었다.하지만 그의 눈빛은 그녀를 아래로 내려다보는 듯한 위압감이 있었다.배현수는 신준우가 그녀의 남자친구인 줄 알고 이 관계를 끝내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만약 오늘 아침 신준우를 공항에 데려다주느라고 지각한 줄 알면 발끈할 것이 뻔했다.조유진은 애써 당황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힘겹게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흥분한 나머지 실면을 해서요. 아침에 일어나보니 이미 늦은 시간이었습니다.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그녀의 거짓말은 빈틈없이 완벽했다.심지어 얼굴도 붉어지지 않고 심장도 두근거리지 않았다.배현수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그녀에게 질문했다.“그래? 분신술도 할 줄 아나 봐? 한 명은 집에서 자고 한 명은 공항에 가서 남자를 바래다주고.”“…”조유진이 반응하기도 전에 배현수는 그녀의 앞에 핸드폰을 던졌다.신준우와 공항에서 포옹하는 사진이었다.조유진은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어, 어떻게 이 사진을 가지고 계세요? 혹시 미행하라고 사람이라도 붙이셨어요?”“오해하지 마! 내가 그렇게 관심이 가는 정도는 아니니까.”그녀를 속일 필요는 없었지만, 그가 내뱉은 말은 상당히 공격적이었다.조유진은 침을 꼴깍 삼키더니 솔직하게 말했다.“신 선생님을 배웅하러 간 거 맞아요. 전에 저를 도와주셨기 때문에 출장을 간다고 하시길래 친구로서 배웅하러 간 것뿐이예요. 이 정도면 괜찮은 거 아니에요?”배현수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녀의 앞으로 다가가 의미심장하게 쳐다보았다.“무슨 도움을 주었는데? 남녀 사이 침대에서 일어나는
조유진은 떨리는 손으로 셔츠 단추를 풀었다. 하나, 둘, 셋... 은은하게 아름다운 가슴골이 보이기 시작했다.그러다 입고 있던 셔츠가 바닥에 떨어졌다.속옷만 입고 있는 그녀는 두 팔로 가슴을 감쌌다.마치 벌거벗은 채로 배현수의 앞에 서 있는 것만 같았다.자존심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조유진은 울먹이면서 말했다.“계속... 벗을까요?”촉촉한 두 눈으로 눈앞에 있는 이 도도한 남자한테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것 같았다.갑자기 팔이 아파 났다.배현수는 그녀를 가슴에 와락 안더니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입맞춤하면서 휴게실로 밀고 들어갔다.이 두 사람의 발걸음은 어딘가 어수선해 보였다.휴게실로 들어간 배현수는 문을 닫더니 그녀가 유일하게 입고 있던 속옷을 집어 던졌다.그리고선 그녀의 부드러운 입술을 꽉 깨물었다.“조유진, 다음에 또 거짓말하면 오늘처럼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야.”피비린내가 진동하고... 조유진은 아파서 미간을 찌푸렸다.……배현수는 넥타이로 그녀의 손을 묶어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그렇게 한 시간 동안 마음껏... 그녀에게 견디기 힘들었던 상황이 드디어 끝나고 말았다.배현수가 샤워하러 간 사이 이곳에 더는 머무르고 싶지 않았던 조유진은 카펫 위에 벗겨진 옷을 챙겨입고 사무실을 벗어났다.문을 열고 나갔을 때 마침 강이찬과 강이진을 마주치고 말았다.강이진은 이곳에서 조유진을 만날 줄 몰랐기 때문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조유진은 당황한 나머지 강이찬을 향해 고개를 끄덕하며 간단히 인사하고 신속히 빠져나갔다.한마디도 건네지 않았다.강이진은 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어리둥절했다.“왜 이곳에 있대?”“유진 씨 SY그룹에서 일하기로 했어.”“뭐? 현수 오빠가 저 여자를 채용했다고?”강이진은 조유진의 걷는 모습이 이상하다고 느껴져 미간을 찌푸렸다.“뭐 보고 있어? 얼른 들어가자.”“오빠, 유진 씨 걷는 모습이 이상하지 않아? 설마 현수 오빠 침대에서 방금 일어난 건 아니겠지?”이에 대해 거부감을 느낀 강이찬은 차갑게 말했
강이진은 어이가 없었다.“오빠, 내 일에 신경 좀 써! 현수 오빠, 사실 묻고 싶은 것이 있어서 오빠한테 SY그룹에 데려와달라고 했어요. 혹시 SY그룹에 저한테 어울릴 만한 자리가 있을까요?”“어제저녁에 방금 귀국해서 이제 한국에 정착시키려고. 일은 급할 것도 없는데 집에서 컨디션이나 조절하면서 시차 적응하라고 했더니 바로 일 찾겠다고 고집부리는 거 있지. 배 대표, 이진이가 내 동생이긴 하지만 마땅한 자리가 없으면 굳이 우리 사이를 봐서 알아볼 필요는 없어.”강이찬은 여동생을 SY그룹에 보내고 싶지 않았지만, 그녀의 고집을 이길 수가 없었다.배현수가 강이진에게 물었다.“무엇을 전공했다고 했지?”“와튼 스쿨에서 비즈니스를 전공했어요. SY그룹에 저한테 어울릴 만한 자리가 많겠죠?”“그래, 기획팀과 영업팀에 다 갈 수 있긴 하지만 일반 직원부터 시작해야 해. 상관없다면 언제든지 입사해도 좋아.”배현수는 공사가 분명한 사람이라 강이진이 강이찬의 여동생이라서 회사에 들여보내려는 것은 아니었다.강이진의 학력으로 SY 기획 부서와 판매 부서에 입사하기 자격이 충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강이진은 피식 웃더니 말했다.“오빠, 내가 말했지? 현수 오빠가 동의할 거라고. 오빠처럼 생각이 꽉 막힌 사람은 아니야. 주위 사람도 생각하는 대표님이야말로 대단한 거지!”상의를 마친 강이찬과 강이진은 배현수의 사무실에서 나왔다.강이찬은 그래도 마음이 안 놓이는지 또 당부했다.“이진아, SY그룹에서 출근해도 되지만 꼭 겸손해야 해. 될수록 너와 나의 관계도 숨기고. 그래야 너나 나나 현수한테도 좋아.”“오빠, 내가 SY그룹에 출근하게 된 것을 기뻐해야 하는 거 아니야? 난 오빠랑 현수 오빠 도와주러 온 거잖아. 근데 왜 이렇게 안 즐거워 보이지? 내가 능력이 부족해서 낙하산으로 들어간 것도 아니고, 내 학력으론 어떤 회사든 다 갈 수 있어.” “아무 회사나 다 갈 수 있는데 굳이 SY회사에 오지 않아도 되잖아. SY그룹은 경쟁도 심하고, 그리고 너는 외국에
조유진은 비록 평소에 사람들의 비위를 잘 맞췄지만 그렇다고 해서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조 대리님, 제가 신입이긴 맞지만 엄 어르신은 저와 계약하려던 고객입니다. 그리고 이후에도 제가 맡아야 할 것 같습니다. 중간에 담당자를 바꾸면 어르신께서 이상하게 여기실 수도...”조유진은 상냥하게 조혁과 말했다.하지만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조혁이 발끈하면서 말했다.“유진 씨, 신입이라고 해도 고객님께서 맘에 들어하는 것은 환우 부동산이지 유진 씨를 마음에 든 건 아니라는 것을 알잖아요? 아무나 고객님께 서비스를 제공해 드릴 수 있는 건 아니에요. 그리고 저는 유진 씨보다 경험도 많아 더 좋은 서비스를 드릴 수 있어요.”“조 대리님, 그래도 이건 제가 계약성사시킨 건데...”“계약서에 누구 이름이 적혀있으면 누구의 업적인 거예요. 계약서 절차는 다 밟았으니, 불만이 있으면 진우민 과장님께 말씀드리세요.”조유진은 직장생활에 암묵적인 규칙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방송국에서 일했을 때도 경험해 보긴 했지만 이렇게 대놓고 업적을 빼앗긴 적은 처음이었다.이 대저택은 40억 원이라 조혁의 말대로 2%의 보너스라면 족히 8,000만 원은 되었다.‘8,000만 원이면 선유 수술 4번이나 할 수 있는데...’조유진은 SY그룹에 입사한 지 첫날이라 일을 크게 벌이고 싶지 않았지만 이 8,000만 원으로 정말 급한 불을 끌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진우민 과장의 사무실로 향했다.조혁은 피식 웃더니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첫날부터 이렇게 막 나갈 거예요? 유진 씨, 제가 경고하는데, 사람은 겸손해야 해요.”진우민 사무실.“유진 씨, 무슨 일이에요?”“과장님, 제가 아까 환우 인터내셔널 분양 사무실에 갔는데요, 어떤 고객분께서 180평짜리 대저택을 매수하시겠다고 하셨고 고객님도 저와 계약을 맺겠다고 하셨습니다. 중도에 서 비서님께서 저를 찾는 바람에 조 대리님께서 제가 자리를 비운 사이 잠깐 봐주셨습니다. 그런데 그사이에 바
육성일의 압도적인 기운은 전화 너머에서도 남초윤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말을 하지 않아도 그 묵직한 압박감은 느껴졌다. 그때 어떻게 그런 용기를 냈는지, 어떻게 육씨 집안에 시집갔는지 스스로도 의아했다. 만약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차라리 구걸을 하더라도 절대 육씨 집안에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남초윤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할아버지, 부탁드려요. 저희가 약속했던 건 두 달 전이었잖아요. 아직 두 달이 채 안 지났고, 제가 지금 아기를 가졌다고 해도 확인이 안 될 수도 있어요.” 그 말에 어느 정도 일리가 있었기에 육성일도 더는 말하지 않았다. 그렇게 할아버지의 전화를 겨우 넘겼지만 전화를 끊자마자 다시 핸드폰이 시끄럽게 울렸다. 이번엔 ‘개자식’ 육지율이었다. “...” 할아버지와 손자는 통화 시간까지 맞춘 것처럼 기가 막히게 연달아 전화를 걸어온다. 그녀는 냉랭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왜요?” 육지율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무슨 폭탄이라도 먹었어요?” 육지율이 자신의 책을 내리게 만들고, 지난달과 이번 달 원고료도 다 날려버린 상황에서 그녀가 전화를 받아준 것만으로도 기적이었다. 하지만 결혼 생활은 아직 유지 중이었고 필요한 것도 있으니 남초윤은 결국 목소리를 가다듬고 좀 더 부드럽게 말했다. “지율 오빠, 무슨 일이에요?” “... 뭐라고 불렀어요?” “지~율~오~빠~” 그녀는 유설영의 말투를 흉내 내며, 아니, 오히려 더 능숙하게 말했다. 육지율은 순간 닭살이 돋았다. “제발 평소처럼 말해요. 저녁에 내 친구가 귀국하는데 같이 식사해요. 6시에 잡지사로 데리러 갈게요.” 남초윤은 단번에 거절했다. “난 안 갈래요.” “저녁에 뭐 다른 약속 있어요?” 남초윤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결혼한 지 3년 됐지만 당신은 나한테 친구 한 명도 소개해 준 적 없잖아요.” 그리고 이제 곧 이혼할 텐데 친구를 만날 필요는 더 없었다.이혼하고 나서 친구들이
조유진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학교에서 누가 너 괴롭히진 않았어?” 배선유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응, 나 괴롭히는 사람 없어. 할아버지가 우리 학교에 엄청난 돈을 기부하셔서 선생님들도 항상 나한테 잘해주시고 많이 관심 해주셨어. 그래서 나도 함부로 장난칠 수가 없어. 혹시 선생님이 할아버지한테 이르실까 봐.” 배현수는 이 말에 전혀 놀라지 않았다. 배선유는 작은 악동처럼 말이 많았고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는 아이였다. 배현수의 말에도 자주 대꾸를 하니, 만약 동급생에게 괴롭힘을 당했다면 벌써부터 떠벌렸을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남을 괴롭히는 쪽에 더 가까웠다. 성남에서 엄준은 배선유를 엄청나게 아끼며 키웠고, 그래서인지 아이는 주눅이 들지 않고 활발하게 자랐다.조유진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다행이네. 우리 선유가 공부를 게을리할 걱정은 없겠어.” 배현수는 딸을 겁주듯 말했다. “너 공부 안 하고 일찍 연애라도 시작하면, 널 대제주에 데려와서 24시간 동안 지켜볼 거야.” 배선유는 입술을 내밀며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 이건 너무 심해요! 나 혹시 쓰레기통에서 주워 온 거 아니에요?” 배현수는 코웃음을 치며 엄격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말했다. “공부 안 하면 좋은 날은 없을 거야.” 잠시 후, 학교 종이 울릴 시간이 가까워졌다. 배선유는 전화를 끊으려다가 친구가 그린 결혼사진 두 장을 영상 속으로 건네받았다. “선유야! 너랑 지우의 결혼사진 내가 그려놨어! 한 번 봐봐!” 배선유가 물었다. “한 장에 얼마야?” “너니까 공짜로 해줄게! 대신 다음번엔 나랑 결혼해 줄 수 있어?” “생각해볼게!” “...” 이 속도로라면 그들 부부는 도대체 몇 명의 사위를 맞이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한편, 스타라이트 매거진에서.남초윤이 사이트 편집자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 그녀의 책은 예상대로 플랫폼에서 삭제되었고 이달 원고료는 한 푼도 들어오지 않
[합법적 부부] 함께 올라온 사진엔 결혼반지를 낀 두 손이 하트 모양을 그리고 있었다. 이 게시글이 올라가자마자 마치 깊은 바다에 떨어진 폭탄처럼 큰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수많은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몰려들어 반응했다. 육지율: [8년의 여정 끝에 드디어 자랑할 수 있네!] 송하진: [어! 전 두 사람 목숨 구해준 은인이에요. 제가 아니었으면 두 사람이 어떻게 혼인신고까지 했겠어요? 당장 절 주빈으로 식사 대접해요!] 남초윤: [아아아아! 유진이를 결혼이라는 무덤 속으로 끌어들이다니! 대표님 너무하세요!] 엄창민: [내 여동생한테 잘해요. 혹시라도 괴롭히면 내 주먹이 용서 못 해요!] 엄명월: [형부! 이렇게 좋은 일에 저희한테 뭐라도 사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강이찬: [축하해, 결국 원하는 대로 됐네.] 심미경: [백년해로하세요. 행복하길 기원합니다!] 서정호: [대표님, 일 다 끝냈으면 빨리 돌아오세요. 의사 선생님이 여기서 엄청 화내고 있어요. 저 더는 못 버틸 것 같아요!] 학교 가기 싫어: [와! 아빠랑 엄마가 드디어 결혼했네요! 헤헷, 아빠, 나도 오늘 결혼했어요!] 배현수는 배선유의 댓글을 보고 순간 검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조유진이 운전하며 그의 미세한 변화를 눈치채고 물었다. “왜 그래요?” “선유가 결혼했다는데.” “뭐라고요?” 조유진은 깜짝 놀라 차를 도로 옆에 세우고 급히 배선유에게 영상 통화를 걸었다. 저쪽에서 배선유는 학교에 있었는데 마침 쉬는 시간이었다. 외국어 학교라 분위기가 자유로워 아이들은 평소에도 부모님과 연락을 하기 위해 휴대폰을 가지고 다녔다. 배선유는 전화를 받자마자 얼굴을 카메라 앞으로 들이밀었다. “엄마, 아빠! 나 사진 보고 싶어!” 조유진은 그녀에게 사진을 보여주고 나서 물었다. “선유야, 아까 결혼했다고 했잖아. 누구랑 결혼한 거야?” “우리 반 한지우랑! 엄마, 나 오늘 엄청 많은 축의금을 받았어! 내가 다 적어 놨어!”
조유진은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갈게요.” 그가 환자라는 사실을 떠올리며 이번 한 번은 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 다음 날 이른 아침. 서정호가 산성 별장에서 두 벌의 정장과 결혼 서류를 준비해왔다. 조유진은 오랜만에 풀 메이크업을 하고 머리도 고데기로 말았다. 그녀는 하얀 오프숄더 드레스를 입고 사진에 잘 나올 수 있도록 최대한 신경 썼다. 그녀는 한동안 이렇게까지 꾸미지 않았는데 하이힐을 신고 배현수 앞에 서니 그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조금 어색해졌다. 그래서 물었다. “나 어때요?” “아름다워. 넌 언제나 아름다워.” 배현수는 전혀 망설임 없이 그녀를 칭찬했다. 조유진은 웃음을 참으며 옆에 있던 넥타이를 집어 들고 배현수에게 매어주었다. 배현수는 그녀의 손길에 고개를 숙이며 협조했다. 조유진은 평소와 다르게 더 복잡하고 정중한 ‘엘드리지 매듭’으로 넥타이를 맸는데 배현수는 평소에 간단한 윈저 매듭만 했었다. “이 매듭은 좀 생소하네.” 조유진은 넥타이를 다 매고 나서 그의 셔츠와 정장 재킷의 깃을 정리해 주었다. “이게 엘드리지 매듭이라고 해요. 중요한 자리에서 어울리는 방식이죠. 어때요, 괜찮아요?” “멋져. 하지만 여보, 우리 서둘러야 해. 조금 있으면 의사가 올 거야.” 웃으며 농담하듯 이야기하던 배현수는 조유진의 외투를 챙겨 그녀의 어깨에 걸쳐 주고, 그녀를 한 손으로 감싸 병실을 몰래 빠져나갔다. 두 사람은 마치 도망치듯 병원을 빠져나와 차에 올랐다. ... 그들이 빠져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의사가 병실에 회진을 왔다. 하지만 환자와 보호자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고 그곳에는 ‘무관한 사람’만 남아 있었다. 의사는 엄숙한 표정으로 서정호를 보며 물었다. “환자는 어디 갔죠? 튜브까지 다 뽑다니, 누가 뽑았습니까?” 서정호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환자 본인이 뽑았습니다.” “도대체 어디 간 겁니까? 팔을 정말 망가지게 할 작정인가요
배현수의 가슴이 떨렸다. 그는 조유진과 이마를 맞대며 낮게 속삭였다. “그때 난 네 옆에 있진 않았지만 네 뒤에서 계속 지켜보고 있었어. 그런데 왜 울었어?” “현수 씨 생각이 났어요.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게 너무 슬펐거든요. 내가 이렇게 좋은 남자를 잃어버린 것 같아서, 그게 너무 아쉽고 후회스러웠죠. 그래서 울었어요.” 지금 이렇게 그를 바라보고 있으니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은 느낌이었다. 조유진의 눈에는 여전히 눈물이 맺혀 있었다. 하지만 이번 눈물은 슬픔이나 후회 때문이 아니었다. 감동과 감사함 때문이었다. 운명이 그들을 온갖 고난 속에서도 끝끝내 묶어 놓았고, 그들 사이에선 이제 더 이상 헤어질 수 없는 깊은 연대가 생겼기 때문이다. 배현수는 긴 손가락을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천천히 끼워 넣으며 손을 꼭 맞잡았다. 순간 그들의 손바닥에서 따뜻함이 퍼져나갔다. 그는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진아, 넌 한 번도 날 잃은 적 없어. 우리가 몇 번을 떨어져도, 얼마나 오랫동안 떨어져 있더라도 난 결국 널 찾아내서 꼭 안고 말해줄 거야. 사랑한다고. 오직 너만 사랑한다고.” 처음부터 끝까지, 조유진은 배현수의 유일한 선택이었고 그 선택은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었다. 조유진은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웃었다. “현수 씨, 우리 영원히 함께할 수 있을까요?” “그럼.” 그의 대답은 8년 전과 똑같았다. 짧지만 확고했으며 1초의 망설임도 없었다. 조유진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손목에 걸린 달콤한 연녹색 비취 팔찌를 내려다보았다. “상처가 나으면 우리 같이 아주머니를 위한 좋은 묘지를 고르러 가요. 그분을 위한 의관묘라도 만들어 드리는 게 어때요?” “아직도 ‘아주머니’라고 불러?” 조유진은 순간 얼굴이 뜨거워지며 말투를 바꿨다. 배현수는 그녀의 팔찌를 손가락으로 살며시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풍수 좋은 곳을 따로 고를 필요는 없어. 어머니께
육지율은 그 필명이 어딘가 익숙하다고 느꼈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문득 기억해 냈다. “이 자식! 기억났어! 이 녀석이 책에서 날 모욕하지 않았나? 내 명성을 망가뜨렸잖아?” 남초윤은 급하게 말했다. “잘못 본 거 아니에요? 비엘 작가가 주인공을 모욕할 리가 없어요! 그러면 밥숟가락 들고 욕하는 것과 뭐가 다르겠어요?” “나를 ‘수’로 묘사한 게 모욕이 아니고 뭐예요? 왜 항상 배현수가 공이냐고?” 남초윤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는 그 부분을 신경 쓰고 있었던 거였다.남초윤은 그가 진짜 작가를 고소할까 봐 걱정되었다. 그래서 변명하듯 말했다. “다음번엔 지율 씨가 공이고, 배 대표님이 수가 될 수도 있잖아요. 원래 BL 소설에서는 공수 구분이 모호해요. 겉보기에 수 같아도 사실은 공일 수도 있다고요!” 조유진은 살짝 의문을 제기했다. “난 현수 씨가 수 같지는 않았는데. 만약 현수 씨가 진짜 수라면 캐릭터 붕괴지. 차라리 육 변호사님이 수인 게 더 어울려. 자유롭고, 매력적이고, 다정하잖아.”“?”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육지율은 얼굴이 시커멓게 변하며 조유진에게 따졌다. “아니, 조유진. 내가 약해 보이는 수 같은 느낌을 준다고?” “...” 배현수는 차갑게 말했다. “유진이가 쓴 것도 아닌데 왜 화내? 그럴 시간 있으면 작가나 고소해.” 남초윤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 그냥 재미로 쓴 거지 무슨 큰 잘못을 한 것도 아니잖아요? 작가를 고소하면 너무 쪼잔해 보일 거예요!” 하지만 육지율은 이성을 잃고 이를 악물었다. “쪼잔해 보이든 말든, 그 책을 하차할 거예요!” 자신이 소설 속에서 수 역할로 묘사되었고, 그것도 많은 사람에게 읽히고 있다는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돋았다. 조유진은 객관적으로 말했다. “사실 책 내용은 나쁘지 않아요. 꽤 재미있고 독자도 많아요.” “독자가 몇 명인데?”“몇만 명 정도?” “뭐?”‘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날 수로 상상했
병실에서 조유진은 그가 누워있는 침대 옆에 앉아 있다가 잠들었다. 잠에 들어서도 손가락이 배현수의 손에 살짝 얽혀 있었는데 다정하고 달콤하기 그지없었다. 이 사진은 완전히 남자 친구 시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입원 생활이 지루하다고 하다니.육지율이 댓글을 남겼다. “뭐야, 입원했어? 혹시 가정 폭력이라도 당한 거야?” 댓글을 남기고 나서 육지율은 차에 시동을 걸며 남초윤에게 말했다. “과일 바구니 좀 사서 병문안이나 가요. 친구가 입원했어요.” “친구? 설마 배 대표님이세요? 어디 아파요?” 육지율은 웃으며 말했다. “글쎄요. 진짜 아플 수도 있고 그냥 꾀병일 수도 있고.” 혹시 모른다. 꾀병일지도....병원에서는 조금 전 장은숙이 산성 별장에서 저녁 식사를 가져왔다. 수술 후 얼마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 밤은 죽 같은 유동식만 먹어야 했다. 배현수는 오른손을 쓸 수 없었기에 조유진이 죽 그릇을 들고 숟가락으로 그에게 먹여주고 있었다. 첫 숟가락을 그의 입 앞에 가져가자 배현수는 뜨겁다고 투덜댔다. 조유진이 후후 불어 온도를 맞춘 후 말했다. “이제 적당히 식었어요.” 배현수는 그제야 죽을 한 입 삼켰다. 그 순간 병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장난스러운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며칠 못 본 사이에 아기로 됐네? 밥도 혼자 못 먹고, 조유진이 널 너무 오냐오냐한 거 아냐?” 조유진이 놀라서 뒤돌아보니, 육지율과 남초윤이 병실에 들어와 있었다. 그녀는 웃으며 설명했다. “오른쪽 어깨에 부상을 입었어요. 의사 선생님이 며칠 동안 오른손은 쓰지 말라고 하셨어요. 상처가 더 심해질 수 있거든요.” 그러자 육지율은 다짜고짜 그의 오른쪽 어깨를 툭 쳤다. “진짜야?” 배현수는 고통에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욕설을 퍼부었다. “이 미친놈아!” 조유진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변호사님, 진짜로 다쳤다니까요! 어깨에 구멍이 났다고요, 함부로 건드리지 마세요!
그녀를 겨우 한 번 데리러 온 김에 출퇴근길의 불편함을 느끼고는 아예 차를 사서 해결하려고 하다니, 정말 육지율 다운 방식이었다.이 4S 매장에서 파는 차들은 모두 포르쉐였고 가격도 만만치 않았다. 가장 저렴한 모델도 수천억 원대였다. 남초윤은 이미 남씨 집안이 육지율에게 너무 많은 빚을 지고 있었기에, 그가 차를 선물해 주겠다고 해도 받을 수 없었다.남초윤은 차분히 말했다. “앞으로는 출퇴근 길에 당신을 귀찮게 하지 않을 테니, 굳이 차를 선물할 필요는 없어요.”육지율은 순간 멈칫했다가 살짝 비웃으며 말했다. “차 한 대 선물한다고 귀찮다는 딱지가 붙어요? 이런 확산적 사고방식은 참 대단하네.”“....”정말 그런 게 아니란 말인가?평소에도 성격이 불 같았던 육지율은 차를 주겠다고 하면서도 그녀를 달래는 상황이 우스웠는지 어이없어 웃었다. 둘 중 누가 더 성격이 나쁜지 모를 일이었다.영업 직원은 남초윤을 육지율이 외부 애인으로 오해했고, 이 큰 거래가 깨질까 봐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가씨, 변호사님께서 차를 사주시는 건 출퇴근 시간을 줄여서 그 시간 동안 조금이라도 더 쉴 수 있게 해주려는 마음이 아닐까요?”남초윤은 더 이상 그의 돈을 쓰고 싶지 않았다. 이미 갚을 수 없는 빚이 너무 많았고 계속해서 더 쓴다면 두 아이를 낳아야 겨우 그 빚을 다 갚을 수 있을 것 같았다.그러나 육지율은 그 여느 때처럼 행동했다. 그는 VIP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빨리 골라요. 차 안 사면 집에 못 돌아가요.”남초윤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여자 영업 직원이 다가와 다양한 모델을 소개할 때, 그저 듣기만 했다. 그 직원은 미소를 띠며 말도 아주 달콤하게 했다. “변호사님은 저희 매장의 단골이세요. 그런데 여자를 데리고 온 건 이번이 처음이네요. 변호사님이 정말로 많이 아끼시는 것 같아요. 비싼 차를 고르시면 아마 더 기뻐하실 거예요.”역시, 판매왕이었다.감정적 가치를 제공하는 법을 너무나 잘 아는 직원이었다. 하지만 남초윤은 그저 외부의
남초윤은 결혼 상태를 한 번도 업데이트한 적이 없었다. 동료들 눈에는 여전히 미혼으로 보였다.처음 그녀와 육지율의 스캔들이 터졌을 때 온 세상이 떠들썩했지만 사실 모두 육지율의 매력적인 외모 때문이었다. 아무도 남초윤처럼 작고 평범한 존재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육지율이 그녀와 결혼하기로 결정했을 때 그들의 침대 사진이 언론이나 남재원에게 유출되지 않은 것도 기적이었다. 사람들은 그저 육지율이라는 유명한 바람둥이가 ‘함정'에 빠져 순진한 여자와 관계를 맺은 후, 마지못해 결혼했다는 소문만 믿고 있었다.육지율이 연예계 인물이 아닌 만큼 동료들 중에서도 아무도 그 사건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육지율이 ‘좋은 집안의 아들’ 이라는 사실만 기억하고 그의 결혼 상대가 누군지에는 무관심했다. 그녀는 어디에도 크게 드러나지 않았고 언론에서도 그의 곁에 서는 일이 거의 없었다. 남초윤은 그렇게 세상 사람들의 눈에 숨겨져 있었다.동료들은 그저 그녀가 조금 집안 배경이 있는 부유한 여자인 줄로만 알았고 육지율의 아내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어쨌든 육지율의 아내라면 아무리 상황이 나빠도 그들과 같이 일하며 고생할 일은 없을 테니까. 설령 과거에 파파라치 일을 했더라도 그렇게 높은 곳에 시집갔다면 육씨 집안이 그녀를 계속 그 일을 하도록 놔두지 않았을 거라고 여겼다.비록 세상은 모두 직업의 평등을 외치고 있지만 상류 사회에는 여전히 그들만의 규칙이 있었다. 체면과 명예가 그들의 신분과 존엄을 상징했다. 파파라치라는 직업은 육씨 집안에게 있어 절대 자랑스러울 수 없는 일이었으니, 육지율과 강란희가 그녀에게 좀 더 체면 있고 유망한 직업들을 제안했지만 남초윤은 그들의 호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그렇게 시간을 보낸 끝에 동료들은 하나둘씩 퇴근하고 남초윤만 남았다. 한 시간이 흐른 뒤 남초윤은 휴대폰 화면을 확인했다. 저녁 7시가 되었다. 그녀는 통화 기록을 훑어보고 다시 한 번 메시지를 확인했지만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아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