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 다 제 아이가 아닙니다!”정유준의 딱딱한 말에 세희는 세준의 손을 꼭 잡았다.“나쁜 아빠는 나쁘기만 할 줄 알았는데, 바보였어.”세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정유준의 입꼬리를 주시하며 생각에 잠겼고, 정 노인은 그의 말에 얼굴이 굳어졌다.“그렇다는 건 이미 검사를 해봤다는 얘기냐?”정유준이 막 대답하려는 순간 정 노인이 코웃음을 쳤다.“그렇게 잘난 척하던 네놈한테도 이런 날이 올 줄은 몰랐구나. 세준이 저 아이가 너랑 이렇게도 똑 닮았는데 그래도 네 자식이 아니라고?”정유준은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DNA 검사 결과가 틀리기라도 했단 말씀입니까?”정 노인은 차를 한 모금 마셨다.“글쎄, 누군가 양육권을 얻기 위해 손을 썼을 수도 있겠지. 그래서 내가 우리 정씨 집안의 핏줄인지 확인하기 위해 DNA 검사 기계를 사 오라고 했다.”‘양육권?’정유준은 눈을 가늘게 떴다.‘설마 강하영이 몰래 친자확인 검사 결과를 조작했단 말인가? 지금의 인간관계를 본다면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검사 결과는 언제 나옵니까?”“이틀 뒤면 나올 거다.”“그럼 저도 이틀 동안 희민이와 이곳에서 지낼 겁니다.”“네 마음대로 하거라.”저녁 8시 30분.정희민은 샤워를 마치고 세준이와 세희의 사진을 찍어 강하영에게 전송했다.문자를 확인한 강하영은 애들이 무사한 것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돌렸다.“희민아, 네가 왜 거기 있어?”희민은 세준이 정 노인한테 했던 얘기와 세 사람이 상의한 계획을 강하영에게 얘기해 주자, 하영은 간담이 서늘해지는 동시에 애들의 배짱과 순발력에 마음이 뿌듯해졌다.어쩌면 괜한 걱정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엄마, 제가 또 문자 보낼게요.”“그래, 꼭 조심해야 돼.”새벽 열두 시를 조금 넘긴 시간에 희민과 세준은 조심스럽게 방안을 나섰다.두 아이는 아래층에 도착해 DNA 검사 기기가 있는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정희민이 갖고 온 노트북을 기기에 연결해 수치를 조작하기 시작했다.한 시간
“방법이 없는 건 아니야. 네가 정유준 곁으로 돌아가면 돼.”‘정유준 곁에 있으면 정말 애들을 볼 수 있는 걸까?’하영은 쓴웃음을 지었다. 도무지 과거를 용서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다음 날 점심, MK.정유준을 찾으러 간 배현욱은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정유준의 얼굴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유준아. 언제부터 네가 직접 싸움까지 했어? 대체 누구야?”배현욱의 놀림에 정유준은 싸늘한 눈빛으로 현욱을 째려보았다.“그 입 닥쳐.”배현욱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소파에 앉았다.“대체 누가 너를 이렇게 만든 걸까? 혹시 소예준?”순간 정유준의 표정이 어두워졌다.“그렇게 할 일이 없으면, 내가 배 회장님을 찾아가 얘기를 좀 나눠볼까?”“…….”“나도 너를 도와 방법을 생각해 주려고 이러는 거지. 너무 매몰차게 굴지 마.”배현욱이 얼른 말을 돌리자 정유준이 무덤덤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내가 네 도움이 필요할 거라고 생각해?”“당연히 필요 없겠지. 그런데 이렇게 보면 강하영 씨 주변에 능력 있는 남자들이 참 많은 것 같단 말이야.”“그 입 닥치지 못하겠으면 당장 여기서 나가!”정유준의 인내심이 바닥을 보이자, 배현욱은 얼른 두 손을 위로 들고 투항했다.“그래, 알았어. 오늘은 너한테 할 얘기가 있어서 온 거야.”“얘기해.”배현욱은 웃음을 거두고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정주원이 돌아온 거 알아?”정주원의 이름 석 자에 정유준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어떻게 알았어?”“어젯밤 위스키 바에서 정주원과 비슷한 사람을 본 것 같았거든. 너무 오래전이라 나도 확신할 수 없어서 사진을 찍어뒀어.”곧 정유준은 배현욱이 보낸 문자를 확인했다.사진을 확인하는 순간 책상 위에 올려 놓은 손에 불끈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영감이 정주원을 위해 애를 참 많이 쓰셨네. 내가 이 짐승만도 못한 자식을 찾아낼까 봐, 정주원이 다시 출국했다는 거짓 소식을 퍼뜨리다니. 두 사람이 대체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지 두고 볼 거야.’YN.양다인
두 사람은 근처에 있는 고급 레스토랑을 선택했고, 자리에 앉은 양다인은 남자에게 명함을 건넸다.“제 명함이예요. 양다인이라고 합니다.”남자가 양다인의 명함을 받아 확인하더니 미소를 지었다.“YN회사를 설립한 대표님이셨군요.”“딱히 언급할 만한 일은 아니에요. 그쪽은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양다인이 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묻자 남자가 웃으며, “정주원입니다.”라고 대답했다.‘정…… 정주원?’정유준의 큰형인 정주원이란 이름에 양다인은 깜짝 놀랐다.할아버지한테서 정주원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충격을 받은 듯한 양다인의 표정에, 우호적이던 정주원의 눈가에 경멸의 빛이 스치더니 이내 표정을 숨겼다.“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양다인 씨.”정주원의 부드러운 어조에 양다인은 황급히 정신을 차렸다.“아, 아니에요. 이런…… 우연이 다 있네요.”TYC.하영은 한창 영업팀과 기획팀이랑 회의를 열고 있었다.영업팀 팀장.“강 대표님, 신제품을 출시하고 지금까지 매출액이 100억을 돌파했습니다. 이렇게 되면 곧 두 번째 신제품을 출시해도 될 것 같습니다.”“알겠어요. 고객센터도 반드시 제때 고객들과 소통해야 해요. 그리고 매장 위치는 알아봤어요?”“네, 찾았습니다. 이따가 메일로 보내드릴 테니 확인해 보세요.”“좋아요. 모델 쪽도 많이 신경 좀 써주세요. 다음 주까지 확정될 수 있게…….”말이 끝날 무렵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하영의 전화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화면에 임수진의 이름이 뜬 것을 확인하고 얼른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하영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전화기 너머로 공포에 질린 비명소리와,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하영은 굳은 몸으로 고개를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이 시간이면 수진 씨가 공장에 있을 텐데, 공장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한참 생각에 잠겨있을 때 임수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강 대표님! 공장에 화재가 발생했어요! 대부분 노동자는 이미 철수했고, 119도 오는 길이라고 합니다!”임수진의 말
하영은 공장의 화재 때문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주저앉아 있는 직원들을 보자 가슴이 아팠다.“저 사람들도 먹고살아야지. 직장을 잃게 됐으니 당분간은 일자리 찾기 힘들 거야.”“알겠습니다.”하영도 쉬지 않고 경호원들한테 다친 직원들을 근처 병원에 데려다 주라고 분부하고, 취재하러 들어오는 기자들을 막았다.그리고 부상을 입지 않은 직원들과 함께 보상금 문제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MK.허시원이 다급하게 정유준의 사무실로 들어갔다.“대표님, 강하영 씨 회사에 일이 생겼어요!”허시원은 태블릿 PC를 정유준 앞에 보여주면서 하영의 공장에 화재가 발생한 영상을 보여줬다.“지금 상황은 어때?”“아직은 화재 원인을 찾지 못했다고 합니다. 다친 사람들은 이미 병원에 보냈고, 강하영 씨도 침착하게 대응하고 있는 중입니다.”그 말에 정유준의 찌푸려진 미간도 드디어 풀렸다.잠시 강하영이 자기 곁에서 몇 년간 단련한 사람이라는 것을 잊고 있었다. 어떠한 돌발 상황에서도 강하영은 언제나 완벽한 해결 방법을 찾던 여자였다.“시청에 전화해서 화재 원인을 다시 조사하라고 해.”“대표님은 누군가 일부러 화재를 일으켰다고 생각하십니까?”“어떨 것 같아? 이제 막 설립한 신생 회사가 다른 사람들의 이익을 건드렸는데, 그들이 급해 나지 않았을 것 같아?”허시원은 TYC와 나란히 서 있는 YN회사로 시선을 돌렸다.“혹시 누군가가 빼앗으려 했을지도 모르겠군요.”허시원이 지금 누구를 얘기하는지 잘 알고 있는 정유준은 두 눈을 가늘게 떴다.“그게 누구든 절대 가만 놔둬선 안 되지.”그 말을 들은 허시원은 몰래 웃었다.“대표님께서는 여전히 강하영 씨를 신경 쓰시는군요.”정유준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허시원을 째려보았다.“쓸데없는 말이 참 많은 것 같네.”허시원은 깜짝 놀라 얼른 태블릿 PC를 챙겼다.“대표님, 그럼 저는 다른 일 때문에 제 사무실로 돌아가겠습니다!”허시원이 도망치듯 사무실을 나가자, 정유준은 몸을 돌려 시선을 창밖으로 보이는 TYC회사로 돌렸다.
“알았어요.”“몸조심해, 괜히 덜미 잡히지 말고.”양다인은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여자에게 주의를 줬다.“알아서 할게요.”말을 마친 상대방이 전화를 끊자, 양다인은 불쾌한 표정으로 휴대폰을 책상 위에 던졌다.‘그냥 주의를 좀 줬을 뿐이지, 네가 어떻게 되든 나랑 무슨 상관이야? 강하영한테만 빌미를 잡히지 않으면 돼.’이제부터 양다인은 따로 할 일이 있었다.‘정주원…….’양다인은 정주원을 떠올리며 수줍은 듯 얼굴을 붉혔다.정주원이 정유준보다 훨씬 낫다고 양다인은 생각했다. 비록 나이가 마흔이 넘었지만 요즘 연예계 남자 배우 못지않았다!‘그 남자만 손에 넣을 수 있으면 정유준 따위 필요 없어! 어차피 정 어르신도 장남을 제일 아끼니까! 내가 정주원 씨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강하영 따위 쉽게 밟아버릴 수 있을 거야!’양다인은 사악하게 웃으며 TYC에 관한 여론을 훑어보고 있었는데, 문득 한 댓글이 눈에 띄었다.“대박, TYC 여사장이 우리 고모부 딸이었네! 언제 이렇게 부자가 된 거야?”‘고모부?’양다인은 의아한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렸다.‘강하영 아버지 친척인가?’양다인은 피식 웃었다.‘재밌어, 일이 점점 재밌게 돌아가네!’TYC하영은 조사와 인터뷰를 마치고 피곤한 기색으로 사무실에 앉아 있었다.짧은 시간 내에, 고객센터는 대량의 환불 신청과 고객들의 욕설이 접수되었고, 인터넷에서도 TYC의류 공장의 소방시스템에 대한 비난을 멈추지 않았다.이와 동시에 네티즌들은 TYC의류의 품질을 의심하기 시작하면서 이미 해당 의류를 구매한 고객들에게 잘 살펴보라고 호소하기 시작했다.일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기 시작하자, 그 스트레스에 하영은 숨돌릴 기회조차 없었다.“똑똑-”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하영은 피곤한 기색으로 고개를 들고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들어오세요.”임수진이 사무실로 들어와 계약서를 하영의 앞으로 내밀었다.“강 대표님, 직원들 모두 보상금 합의서에 사인을 했고, 배상 금액에도 아주 만족하면서 소동을 벌이지
임수진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강 대표님, 저는 그저 객관적으로 이 일을 분석해 드렸을 뿐이에요.”‘그래도 사람을 가려야지! 캐리가 어떤 사람인지 내가 모를 것 같아?’하영의 화난 모습에 임수진도 입을 다문채 하영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분위기가 조금 가라앉게 되자 하영은 방금 자기가 너무 욱했다는 느낌에 임수진에게 사과했다.“미안해, 임수진 씨. 오늘 너무 많은 일이 있어서 그랬던 것 같아. 수진 씨도 좋은 뜻으로 분석해 줬겠지만, 캐리는 절대 그럴 사람 아니야. 그러니까 수진 씨도 나처럼 캐리를 절대적으로 믿어줬으면 좋겠어.”“네, 알겠습니다, 대표님. 저도 부사장님한테 계속 연락을 해볼게요.”“이만 퇴근하고 돌아가.”“네.”임수진이 사무실을 나서자 하영은 손으로 이마를 문질렀다.‘임수진 씨 성격이 늘 한결같은 것을 내가 몰랐던 것도 아니고, 내가 왜 참지 못하고 화를 냈지?’시간은 어느덧 새벽이 되었다.하영이 책상에 엎드린 채 그대로 잠들었는데, 그때 사무실 입구에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웠다.남자는 문을 열고 들어와 소파 위에 있는 담요를 발견하고, 담요를 집어 들었다.그리고 불안하게 잠들어 있는 하영의 작은 얼굴을 바라보는 남자의 얼굴에는 안쓰러움이 가득했다.눈을 꼭 감고 있던 하영은 따스한 온기를 느꼈는지 미간을 약간 찌푸렸고, 이어 속눈썹에 눈물이 맺히더니 목멘 소리로 잠꼬대를 했다.“엄마……, 나 너무 힘들어…….”정유준의 눈빛이 깊어지더니 무심코 손을 들어 하영의 작은 얼굴을 향하기 시작했다.하지만 하영의 얼굴에 손끝이 막 닿으려는 순간 정유준은 멈칫하더니 떨리는 손을 그대로 거두었다.‘강하영은 내가 보고 싶지 않겠지……. 굳이 제일 힘들 때 나타나서 더 힘들게 하지 말자.’정유준은 입술을 깨물고 억지로 시선을 거둔 뒤 성큼성큼 사무실을 나섰다.정유준이 차로 돌아오자 허시원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대표님, 왜 벌써 내려오십니까?”‘두 사람이 만나기만 하면 서로 싸우기 바쁘더니, 게다가 이
정 노인은 얼른 서류를 받아 마지막 페이지부터 확인했는데, 보고서 위에 적힌 친자 관계가 0으로 시작된 것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의사도 이상하게 느껴졌다.‘이렇게 닮은 두 사람이 어떻게 부자 관계가 아닐 수 있지?’하지만 아무리 확인해도 잘못된 건 없었다. 혈액채취도 본인이 직접 했고, 검사 결과도 제일 먼저 손에 넣었기 때문에, 정황상으로는 정유준과 강세준은 친자 관계가 성립되지 않았다.의사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어쩌면 단순히 닮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긴말할 필요 없어! 여봐라!”정 노인이 화난 얼굴로 의사의 말을 끊었고, 입구에 서 있던 경호원들이 정 노인의 부름에 바로 달려왔다.정 노인은 화가 치밀어 오르면서도 뭔가 아쉬운 듯 이를 갈았다.“당장 저 두 아이를 집으로 보내!”“어르신께서 그렇게도 두 아이를 예뻐하셨는데, 좀 더 머물게 놔두지 않습니까?”곁에 있던 집사의 말에 정노인은 고함을 질렀다.“놔두긴 뭘 놔둬? 내가 할 일 없이 남의 집 자식을 키울 사람으로 보여?”“예, 알겠습니다. 어서 애들을 데리고 가.”“네!”위층에 있던 두 녀석은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고함에 기뻐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세준아, 세희야. 이제 집에 갈 수 있어.”세희는 기뻐서 방방 뛰며 희민을 끌어안았다.“역시 우리 큰오빠는 대단하다니까!”그 모습을 지켜보던 세준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아부하는 건 어디서 배웠어?”“엄마가 총명한 아이는 스승이 없어도 스스로 배움을 얻는다고 하셨어. 내가 바로 전형적인 본보기!”세희는 자랑스러운 듯 작은 고개를 쳐들자, 세준은 세희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희민이 품에서 끌어냈다.“됐어, 흥분하지 마. 그러다가 들통나면 어쩌려고.”세준의 주의에 세희는 콧방귀를 뀌었다.“오빠는 내가 큰오빠랑 친하게 지내니까 질투 나서 그러는 거지?”세준은 세희의 이마에 딱밤을 먹이며 그런 세희가 귀엽다는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다 친남매끼리 무슨 말을 하는 거야?”세희는
‘어젯밤 아버지가 정유준의 아들이 여기서 밤을 보낸다고 하셨으니, 이 핏자국은 분명 그 녀석이 흘린 거겠지.’정주원이 욕실로 다가갈 수록 정희민의 가슴은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정희민은 자신이 코피를 흘리는 사실을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아빠는 매일 바쁘기 때문에 걱정을 끼쳐드리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두려워하는 것일 수록 현실이 된다고 하더니, 이내 욕실 문 앞에 정주원의 모습이 나타났다.정주원은 세면대에 가득 찬 핏물과, 정희민의 창백한 얼굴에 어렴풋이 남아있는 핏자국을 발견했다.정주원이 입을 열기 전에 정희민이 겁에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들더니, 정주원의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손으로 코를 막고 뒷걸음질 쳤다.그리고 최대한 침착하게 보이려 애쓰며, 일부러 의아한 표정으로 정주원을 보며 물었다.“누구세요?”눈 깜짝할 사이에 정주원은 언제 그랬냐는 듯 싸늘한 눈빛을 거두고, 아주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너 유준이 아이지? 어디 아파?”정희민은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정주원을 주시했다.‘방금까지 소름 끼치던 눈빛이 어떻게 한순간에 바뀔 수 있지?’“방금 걷다가 넘어졌는데 코를 부딪쳤나 봐요.”정희민은 거짓말을 했다.“의사 선생님 불러줄까?”“괜찮아요.”정주원의 물음에 거절하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코피를 씻어냈고, 정주원은 몇 초 동안 피로 물든 세면대를 지켜보다가 입을 열었다.“그래, 괜찮다니까 이만 나가볼게.”정희민은 경계하는 듯 곁눈질로 주원을 힐끗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고, 정주원의 발소리가 점점 멀어져서야 긴장이 풀렸다.‘눈치 못 채서 다행이야.’코피가 멎은 뒤, 정희민은 침대맡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방금 할아버지가 왜 저 사람한테 아버지를 피하라고 한 거지? 아빠가 저 사람을 많이 싫어하시나? 아니면 두 사람 사이에 뭔가가 있는 걸까?’그때 아래층에서는 정유준이 집에 오자 정 노인이 검사 결과를 그에게 알려주었다.무덤덤한 표정으로 정 노인의 말을 다 들은 정유준은, 묵묵히 정희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