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하영은 확실히 좀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에 약간 난감해지기 시작했다. 세준이는 남자아이이고 아이큐도 보통 아이들보다 높으니 세준에게 이런 이야기는 재미없을 게 분명했다.강하영은 세희의 작은 얼굴을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세희야, 오늘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니까 다음에 다른 이야기 들려줄게. 시간도 늦었고, 내일 또 유치원에 가야 하니까 일찍 자.”“알았어요, 엄마. 엄마도 밤새우지 말고 일찍 자요.”“그래, 잘 자.”강하영은 헤드램프를 끄고 애들 방에서 나와 자신의 침실로 향했다.백지영은 이제 충분히 혼자 잘 수 있을 정도가 되어 요즘은 하영과 같이 자지 않았기에, 하영은 침대에 누워 뉴스나 확인하려고 침대맡에 있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휴대폰을 켜자마자 정유준이 보낸 문자가 있어 깜짝 놀랐다.‘갑자기 왜 문자를 보냈지?’문자를 클릭하자 캐리가 여자를 껴안고 있는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이게 어쨌다는 거야? 대체 무슨 뜻으로 이 사진을 보낸 거지? 이젠 캐리의 사생활마저 간섭하려는 거야?’강하영이 답장을 보냈다.“정 대표님, 많이 심심하신가 봐요.”정유준은 강하영의 문자에 더욱 인상을 구겼다. 캐리의 인성을 알려주려고 보낸 사진이었는데 지금 자기한테 심심하냐고 답장하다니.정유준은 분노에 찬 손짓으로 답장을 써내려 갔다.“네가 어떤 남자를 찾았는지 두 눈 똑바로 뜨고 봐. 그렇지 않다간 모든 걸 잃게 될 테니까!”“내가 어떤 남자를 찾든 유준 씨와 무슨 상관이죠? 그리고 유준 씨는 두 눈 똑바로 뜨고 여자를 찾았어요? 예전에 양다인 같은 여자랑 뜨거운 관계였던 걸로 기억하는데.”정유준은 그 문자를 보는 순간 얼굴에 먹구름이 드리워졌다.“그래도 나는 상황을 알고 난 뒤 현명한 선택을 했잖아! 내가 이 사진을 보낸 건 캐리의 어머니가 결혼한다는 사실은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야! 진짜 결혼하는 사람은 본인일 지도 모르니까!”‘캐리가 이 아가씨랑 결혼한다고? 캐리는 비혼주의인데 그럴 리가 없잖아. 캐리 어머니의 결혼 사실까지
“내가 언제 집에 들어와 살라고 강요했어? 게다가 회사는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잖아.”강하영이 웃으며 농담을 건네자 캐리가 씩씩거리기 시작했다.“너 정말 인정머리라곤 하나도 없어! 참, 요즘 회사는 잘 돌아가?”“그럼, 네가 없이도 잘 굴러가고 있어.”강하영은 계속 농담조로 얘기했다.“됐어. 그런 식으로 네 마음속에 자리 잡은 내 위치를 굳이 확인 사살 시켜주지 않아도 돼. 그 못된 놈은 요즘 안 찾아와?”“찾아왔지! 8시쯤에 네가 어떤 미인을 껴안고 있는 사진도 보내 주던데?”“헐! 마수의 손길을 영국까지 뻗은 거야? 그럼 내가 예전에 우리가 사귀는 사이라고 속이려 한 것도 다 헛수고네!”“???”얘기를 들으니, 얼마 전부터 캐리가 약을 잘못 먹었는지 정유준한테 미친 소리를 해대던 것이 떠올랐다.“다음부터 무슨 일 하기 전에 미리 나랑 상의하고 해. 어설프게 들켜버리면 서로 어색해지잖아.”“사장님의 분부인데 당연히 따라야지.”헤헤 웃으며 대답하는 캐리의 모습에 강하영도 웃음을 터뜨렸다.“알았으니까 나 이만 자야겠어. 볼일 봐.”다음날.강하영은 아침부터 부진석의 전화를 받았다.“깼어?”웃으며 묻는 부진석의 목소리에 강하영은 눈을 비비며 시간을 확인해 보니 이제 겨우 6시였다. ‘이른 아침부터 무슨 일이지?’“진석 씨 전화 덕분에 깼어. 무슨 일이야?”“괜찮으면 내려와서 문 좀 열어줄 수 있어?”그 말에 깜짝 놀라 침대에서 내려온 강하영이 창가로 다가가 커튼을 열어젖히니, 예쁜 샴페인 색의 장미 한 다발을 들고 서 있는 부진석의 모습이 보였는데, 그가 지금 입고 있는 옅은 색의 트렌치코드와 아주 잘 어울렸다.“지금 바로 갈게.”강하영이 경탄하며 아래층에 가서 문을 열고, 꽃다발을 들고 있는 부진석을 보며 물었다.“오늘 무슨 특별한 날이야? 웬 꽃 선물이야?”부진석은 장난기가 섞인 눈빛으로 하영을 훑어보며 입을 열었다.“생일 주인공이 자기 생일마저 잊어버리다니, 대체 얼마나 바빴던 거야?”말을 마치고 부진석은 꽃다발
목걸이를 어떻게 거절해야 할지 고민에 빠진 강하영은 부진석이 들어오는 소리도 전혀 듣지 못했다.그러다가 부진석의 행동에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아침밥 준비해 달라며?”두 사람의 거리가 너무 가까웠는지 강하영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농담이야, 오늘 내 생일도 아니잖아.”부진석이 가볍게 웃자, 강하영은 못 말린다는 표정을 지었다.“굳이 생일을 쇠고 싶지 않아. 이따가 우인나를 집으로 불러서 밥이나 먹을까? 떠들썩하고 좋을 것 같아.”“그래. 오늘은 네가 주인공이니까 하고 싶은 대로 해. 내가 도와줄게.”“좋아.”강하영의 말이 끝나자마자 부진석은 하영의 어깨를 잡아 몸을 돌렸다.“그럼 우리 주인공 씨는 밖에 나가서 기다리고 있어.”강하영은 쓴웃음을 지으며 주방에서 쫓겨났고, 아래층에서 딱히 할 일도 없었기에 아예 위층으로 올라가 애들을 깨웠다.애들을 데리고 세수를 마친 뒤 아래층으로 내려오니, 부진석은 이미 아침상을 차리고 기다리고 있었다.세희는 부진석을 보고 흥분하며 얼른 앞으로 뛰어갔다.“진석 아빠! 보고 싶었어요. 요즘 왜 놀러 오지 않았어요?”부진석은 세희를 안아 들고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세희의 콧등을 쓸었다.“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그렇게 내가 보고 싶었어?”세희는 작은 손을 내밀어 부진석의 목을 껴안았다.“네, 완전 보고 싶었어요.”강세준은 주방 계단에 기댄 채 그 모습을 지켜보며 입을 열었다.“그런데 네가 진석 아빠 얘기하는 건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는데?”강세희는 갑자기 몸을 곧게 펴고 세준을 노려봤다.“오빠는 가만히 있어! 왜 자꾸 듣기 싫은 말만 하는 거야!”강세준은 입가에 우아한 미소를 띠고 눈썹을 치켜올렸다.“그래? 그럼 한 가지만 물을게. 너 엄마 사랑해?”“그건 너무 유치한 질문이잖아!”강하영은 세준을 향해 입을 삐죽 내밀고 고개를 홱 돌렸다.“유치하다고? 그럼, 오늘 엄마 생일인데 선물은 준비했어?”“어……?”세준의 말에 세희의 몸이 굳어져 버렸다.“오늘 엄마 생일이야?”“몰랐어
부진석의 설명에 강하영은 그제야 안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렇다면 다행이고, 아니었으면 진석 씨 생일에 뭘 선물해야 할지 엄청 고민했을 거야.”“우리 사이에 괜히 남처럼 대할 필요 없잖아.”부진석이 실망스러운 표정을 하자 강하영은 급히 설명하기 시작했다.“그게 아니라, 진석 씨가 너무 귀한 선물을 줬잖아.”“됐어, 농담이야. 일단 병원에 갔다가 저녁에 다시 축하해 줄게.”“그래.”점심.강하영이 하던 일을 마무리했을 때, 마침 우인나가 전화를 걸어왔다.“하영아! 생일 축하해!”우인나의 밝은 목소리에 강하영도 웃으며 대답했다.“고마워.”“고맙긴! 너는 저녁에 아무것도 준비할 필요 없어. 내가 호텔 예약해 뒀으니까, 거기서 축하 파티 열자.”“그냥 생일일 뿐인데 그 정도로 거창할 필요 없어.”“그건 안 되지! 귀국하고 처음 맞이하는 생일이니까 반드시 성대하게 축하해야지!”“…….”‘누가 들으면 팔순 잔치인 줄 알겠네.’“알았어. 그럼 생일을 핑계로 아주 바가지를 씌워줄게.”강하영은 더는 거절하지 않았다.“그럼, 저녁에 봐! 이따가 주소 보내줄게.”우인나는 전화를 끊은 뒤 한참 고민하다가 결국 배현욱에게 문자를 보냈다.“배현욱 씨, 지금 어디예요?”정유준과 함께 밥먹으려고 MK에서 기다리고 있던 배현욱은 우인나의 문자에 바로 답장을 보냈다.“MK에 있어요, 무슨 일인데요?”“잘됐네요! 이따 백화점까지 태워다 줘요.”“대체 왜요?”“오늘 하영이 생일이라 선물이랑 케이크 좀 주문하려는데 차가 없어서요! 언제든 부르면 달려와 준다면서요!”우인나는 슬슬 짜증이 밀려오기 시작했다.‘남자가 돼서 왜 여자보다 질문이 더 많아?’문자를 확인한 배현욱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오늘 강하영 씨 생일이라고? 유준이는 아마 알고 있겠지?’배현욱은 슬쩍 떠보기로 하고 휴대폰을 내려놓은 뒤 유유히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입을 뗐다.“유준아, 오늘 계획이 어떻게 돼?”정유준은 그런 배현욱을 힐끔 쳐다봤다.“할 얘기 있으면 바로 해
그 한마디 말 때문에 정유준은 배현욱의 손에 이끌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우인나와 함께 백화점으로 향했다.배현욱의 말은 쉽고 직접적이었다.“여자는 여자가 제일 잘 알지!”그 말에 정유준도 도저히 거절할 수 없었다.우인나는 뒤에서 수많은 경호원의 시선 속에서 힘겹게 걸음을 옮기며 가는 내내 배현욱을 노려보다가, 앞장서고 있는 자기 상사를 보고 낮은 목소리로 이를 갈며 물었다.“대표님은 대체 왜 부른 겁니까!”뒤에서 속삭이는 소리에 정유준이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리자, 우인나는 바로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정 대표님, 저한테 혹시 묻고 싶은 거라도 있나요?”“…….”우인나의 이중적인 모습에 배현욱은 어이가 없었다.‘어떻게 표정이 바로 바뀔 수 있지?’정유준은 꾹 다문 입술로 시선을 거둔 뒤 계속해서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고, 우인나는 그 틈을 타 배현욱의 엉덩이를 세게 꼬집었다.갑자기 엉덩이에 밀려오는 고통에 배현욱의 얼굴이 일그러졌다.“이게 뭐 하는 짓이에요?”“그러니까 대체 왜 대표님을 불렀냐고요! 하영이가 대표님을 상대하지 않는다는 거 몰라요?”“유준이가 먼저 나한테 얘기를 꺼냈는데, 친구로서 어떻게 거절할 수 있겠어요?”우인나의 입꼬리가 마구 씰룩거렸다.“설마 대표님께서 저녁에 하영이 생일 파티에 참석하는 건 아니겠죠?”“우인나 씨가 유준이를 안 데려갈 수 있겠어요?”배현욱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내가 졌어요!”한참 투덜거리고 있는데 정유준이 쥬얼리 샵 입구에서 걸음을 멈추었다.“하영이가 이런 걸 좋아할까?”“안 좋아해요.”정유준이 우인나에게 묻자, 우인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정유준은 또 명품 가방 매장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그럼 이건?”“아니요.”이번엔 명품 시계 매장에 도착했다.“이런 건??”“그것도 안 좋아해요.”우인나가 계속해서 고개를 저으니 정유준은 어두운 표정으로 물었다.“그럼 대체 뭘 좋아하는데?”배현욱은 그런 정유준을 보더니 얼른 입을 열었다.“
진석과 하영은 우인나를 따라 자리에 앉았고, 세 사람이 얘기를 나누던 중에 귓가에 사람들이 깜짝 놀라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세상에, 정유준 대표님과 배현욱 대표님이셔!”“우와! 정유준 대표님 품에 안긴 아이가 아드님이야? 너무 귀엽잖아!”사람들의 환호 소리에 등골이 오싹해진 하영은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그러자 검은색 하이웨이스트 슈트를 차려입은 남자가 귀여운 남자아이를 품에 안은 채, 긴 다리를 자랑하며 연회장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고, 뒤를 따르던 경호원들은 정유준이 연회장에 들어서자 양쪽으로 줄을 지어 서더니 엄숙한 표정으로 입구를 지켰다.연회장의 화려한 조명을 한 몸에 받은 남자의 매력적인 모습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지만, 그 잘생긴 외모에 싸늘한 한기를 풍기고 있어서 사람들은 감히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다.눈을 크게 뜬 채 말문이 막힌 하영은 뻣뻣한 자세로 인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네가 초대한 거야?”하영의 물음에 우인나는 멀리 서 있는 배현욱을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배현욱 저 나쁜 자식이 얘기한 거야! 오늘 당한 배신, 언젠가 꼭 갚아 줄 거야!”“됐어, 왔으니까 할 수 없지.”하영은 조금 난처했지만, 그래도 희민을 데리고 왔으니 상관없었다. 희민을 위해서라면 아무것도 문제될 게 없었으니까.한참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정유준과 배현욱이 하영의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정유준의 품에서 내려온 정희민은 하영의 앞으로 다가와 자신이 준비한 선물을 내밀며 쑥스러운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엄마, 생일 축하해요.”희민의 축하에 하영의 표정이 부드럽게 펴지기 시각했다.“고마워, 우리 아들.”“강하영 씨, 생일 축하해.”“신경 써줘서 고마워요, 배 대표님.”배현욱도 준비한 선물을 내밀자, 하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선물을 받았다.“별말씀을.”배현욱이 곁에 있는 정유준을 툭툭 치며 얼른 선물을 주라고 눈치를 보내자 그는 싸늘한 눈빛으로 부진석을 한번 쓱 훑어본 뒤 하
하영도 술잔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모두를 향해 고개를 살짝 숙이며 고마움을 표시했다.“다들 이렇게 축하해 줘서 고마워요.”인사를 마친 하영은 술잔을 들고 원샷을 했고, 정식으로 생일 파티가 시작되자 모두 즐겁게 먹고 마시며 떠들기 시작했다.세희와 세준도 달려와 희민을 발견하고 기쁜 마음으로 희민의 손을 끌고 밥 먹으러 갔다.부진석은 하영의 술을 대신 마셔주려 했지만, 한 남자 직원이 물어볼 것이 있다면서 그를 끌고 다른 곳으로 갔다.한 모금씩 술을 마시던 하영의 붉고 도톰한 입술은 술에 촉촉이 젖어 더욱 매혹적으로 빛나기 시작했다.촉촉하게 빛나는 그녀의 눈망울은 곁에 앉아있던 남자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강 대표님, 생일 축하드립니다!”하영이 자리에 앉으려 할 때, 또 여직원 2명이 다가와 술을 권했고, 직원들의 성의를 거절하기 힘들어 어쩔 수 없이 다시 잔을 들어 올리려는 순간, 그녀의 앞으로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웠다.하영이 미처 반응하기 전에 정유준은 그녀의 잔을 뺏앗아 들어 원샷을 했고, 두 여직원은 흠칫 놀라더니 이내 자리를 벗어났다.“이제 그만 마셔.”“신경 쓰지 마세요.”정유준이 술잔을 툭 내려놓으며 불쾌한 눈빛으로 하영을 바라보자, 술을 좀 많이 마셨던 그녀는 약간 취기가 오른 말투로 답하고 비틀거리며 화장실로 향했다.화장실에서 나와 손을 씻고 문을 열고 나오려던 순간 남자가 이미 문 앞에서 하영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하영은 비틀거리면서도 경계를 늦추지 않으려고 애쓰며 매혹적인 입술로 정유준을 향해 쏘아붙였다.“정 대표님, 여기는 여자 화장실이잖아요. 변태로 오해받고 싶어요?”“너 많이 마셨어. 집에 데려다줄게.”정유준은 손을 뻗어 비틀거리는 하영의 몸을 잡고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지만, 하영은 그런 정유준의 손을 바로 뿌리쳤다.“이것 놔요! 절대 당신이랑 같이 가는 일은 없을 테니까.”“그만 좀 해. 너 지금 술을 얼마나 많이 마셨는지 알아?”화를 억누르며 낮은 소리로 얘기하는 정유준을 향해 하영이 웃으며
하영이 자리로 돌아가자 우인나가 흥분하며 그녀의 팔을 잡았다.“하영아, 뭐라고 얘기 좀 해봐. 배현욱 이 인간이 계속 술을 빼잖아, 저 인간 술잔 좀 봐…….”반쯤 말하던 우인나는 갑자기 하던 말을 멈추고 놀란 눈으로 하영을 쳐다봤다.“하영아, 입술이 왜 그렇게 부었어?”배현욱은 우인나의 말에 금방 자리로 돌아온 정유준을 쳐다보니, 그의 입술에 빨간 립스틱 흔적이 남아있는 것을 보고 뭔가를 깨달았다.‘두 사람, 분명 나쁜 짓을 하다 온 게 틀림없군!’하영은 불쾌한 기색으로 기분이 좋은지 자리에 앉아 웃고 있는 남자를 보며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괜찮아. 알레르기 반응인가 봐.”“그래? 그럼 너는 술 마시지 마.”우인나는 별다른 생각 없이 계속해서 하영에게 투덜거리며 배현욱을 비난했다.파티가 끝난 뒤, 하영은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된 우인나와 잠이 든 두 아이를 데리고 집에 돌아갈 준비를 했다.“집에 데려다줄게.”그때 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뒤돌아보니, 정유준과 부진석이 거의 이구동성으로 하영을 집으로 데려다주겠다고 하는데, 상황은 다시 한번 불편한 분위기에 빠졌다.“부진석 씨, 내가 방금 본 게 맞다면 그쪽도 술을 마시지 않았습니까?”정유준의 가시 돋친 발언에 부진석은 부드럽지만 강한 말투로 답해줬다.“술을 마셨으니, 대리기사를 불러 데려다주면 되잖아요. 안 그렇습니까?”부진석의 말에 정유준은 코웃음을 쳤다.“11월의 쌀쌀한 밤에 밖에서 대리기사를 기다리게 할 겁니까?”“꼭 밖에서 기다려야 한다는 법은 없잖아요.”“우인나 씨가 저렇게 힘들어하는데, 괜히 시간 낭비하지 말고 인나 씨부터 먼저 데려다주는 게 좋지 않을까요?”“숙취해소제 사주면 되니까 괜히 걱정하실 필요는 없을 것 같군요.”하영은 두 남자의 다툼에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끼며 막 뭐라 얘기하려 할 때, 그들 곁으로 갑자기 차 한 대가 멈춰 섰다.모두의 시선이 그 차로 향했을 때, 황급히 차에서 내리는 소예준의 모습에 하영은 깜짝 놀랐다.“출장간 거 아니
시현은 아파서 이를 악물었다.“알았어, 알았어. 공주님 제발 살려주세요!!”세희는 그제야 흐뭇하게 손을 거두었다.“참, 지난번에 말한 그 사건 말이에요, 언제 해결하러 갈 거예요?”“시간이 좀 더 지나면.” 시현이 말했다. “네 몸은 아직 완전히 나아지지 않았으니까, 지금 계속 바쁘게 움직이면 안 돼. 만약에 저쪽에도 이런 악독한 귀신이 있다면, 너 또 상처를 입을지 몰라. 난 이미 죄책감 때문에 너와 결혼을 해서 평생 챙겨주고 싶으니까, 또 그런 일이 생긴다면, 나 정말 방법이 없어.”세희는 웃으며 말했다.“내가 언제 시현 오빠와 결혼한다고 했어요?”“쳇.” 시현은 입을 삐죽 내밀었다.“내가 뭐가 어때서? 나도 어깨가 넓고 근육이 있는 미남이라고! 인기가 얼마나 많은데.”세희는 말문이 막혔다.‘정말 뻔뻔하네. 아무렇지 않게 자신을 칭찬하다니.’세희는 숨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시현 오빠.”“응?”“내가 지금 귀신을 잡는 일을 종사하고 있잖아요. 그러니 난 사실 아주 좋은 신붓감은 아니에요. 눈치 없는 귀신들이 가끔 날 찾아와서 귀찮게 할 수도 있으니까요. 난 인우와 반대로, 팔자에 음기가 가득 찼거든요.”“그러면 어떻게 되는데?”“7월 중순이 되면 많은 귀신들이 날 찾아올 거예요. 그럼 난 일이 잘 안 풀리거나 심지어 다칠 수도 있거든요.”“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만약 우리가 함께 한다면, 그 귀신들은 심지어 시현 오빠를 귀찮게 할 거예요.”“그래서, 이것 때문에 네가 최고의 신붓감이 아니란 거야?” 시현은 말을 마치고 웃으며 말했다. “이까짓 일로 내가 물러설 수 있을 것 같아? 세희야, 너도 날 너무 얕본 것 같아.”“그때 가면 나 때문에 모든 일이 잘 안 풀릴 텐데, 그게 두렵지도 않아요?” 세희는 시현에게 물었다.시현은 입술을 구부리고 웃었다.“넌 우빈이를 그렇게 좋아하는데, 우빈에게 영향을 미치는 건 하나도 두렵지 않은 거야? 세희야, 넌 날 뭘로 보고. 설령 그게 사실이라 하더라도, 난 두렵지
시현과 인우는 비록 귀신을 보지 못했지만, 지금 검은 연기가 자신의 앞에서 천천히 흩어지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인우는 세희를 바라보며 물었다.“누나, 지금 어떻게 된 일이에요?”세희는 몸을 돌려 말했다.“그 귀신은 환생하고 싶지 않아서 이미 죽었어.”“귀신이 죽었다고?” 시현이 물었다.“이 세상에서 사라졌다는 뜻이야?”세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사방을 바라보았다.“캐리 아저씨, 이제 그 여섯 명의 귀신을 좀 잡아주세요.”캐리는 고개를 끄덕였고, 불과 몇 분 만에 겁에 질린 그 귀신들을 세희의 앞으로 데려왔다.세희는 그들을 바라보며 물었다.“당신들은 그 처녀귀신과 같은 선택을 할 건가요? 아니면 나와 같이 서낭당에 갈 건가요?”“서낭당에 갈래요!”“우리는 그 여자의 협박을 받아서 여기에 갇힌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벌써 떠났을 텐데!”“죽어도 우리를 괴롭히려 하다니! 우리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이 귀신들은 그 처녀귀신이 사라진 후, 불평하기 시작했다.세희는 그들의 원망을 듣고, 마음속에 분노가 치솟았다.“지금 그 처녀귀신을 비난할 면목이 있는 거예요?!”세희는 노발대발하며 말했다.“당신들을 죽인 것은 그 여자의 잘못일지라도. 당신들은 자신에게 그 어떤 책임도 없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만약 당신들이 그 여자를 괴롭히지 않았다면, 오늘처럼 귀신으로 되어 이곳에 갇히지 않았겠죠!”“풉.” 한 여자 귀신이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리에게 책임이 있다고요? 그 여자는 늘 자신의 성적을 가지고 남을 비웃었어요. 그러지만 않았어도 우리에게 괴롭힘을 당하지 않았을 텐데.”세희는 이 말을 듣고 어이가 없었다.“남의 성적이 우수해서, 당신들은 또 그 사람을 따라잡을 수 없어서, 그걸 자랑이라고 생각했던 거예요? 정말 불쌍하네요! 이 세상에 당신들 같은 질투심이 강한 쓰레기가 없어서 정말 다행이에요! 안심해요, 당신들은 다음 생에도 이번 생에 지은 죗값을 치러야 하니까!”귀신들은 세희가 한 말에 화가 났지만, 캐리와 인우 때문에 화가
“말이 쉽지!” 처녀귀신은 화가 나서 말했다.“날 죽인 그 사람들은 비록 귀신이 되었지만, 나도 그들이 환생하지 못하게 붙잡아둬야 한단 말이에요!”세희는 눈살을 찌푸렸다.“그 여섯 명의 학생들이 당신을 죽인 사람이었어요?”“그렇지 않으면 내가 왜 그들을 죽였을 것 같아요??”“그 사람들 찾아 복수를 한 이상, 이제 그만 그들을 놓아줘요. 이렇게 자신을 괴롭혀가며 그들을 붙잡고 있을 필요가 더 있을까요?”“그럴 순 없어요! 이렇게 쉽게 환생을 하라고 하는 건 너무 말이 안 되니까!!”처녀귀신이 노발대발했다.세희는 웃었다.“당신은 집념이 너무 커서 줄곧 이곳에 갇혀 있는 거예요. 영원히 자신의 고통으로 자신을 괴롭히고 있잖아요. 만약 내려가서 벌을 받고 환생하여 다시 이 세상에 태어난다면, 이것 또한 자신의 과거를 내려놓을 수 있는 방법이 아니겠어요?”“이렇게까지 날 가르칠 필요 없어요!”처녀귀신이 말했다.“오늘 당신들이 죽든지, 아니면 내가 죽든지, 둘 중 하나 선택하자고요!”말을 마치자, 처녀귀신은 세희를 향해 공격하려 했다.세희는 바로 인우를 부르려고 했고, 이때 갑자기 어두운 그림자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빠른 속도로 달려온 캐리는 즉시 그 처녀귀신을 먼 곳으로 밀어냈다.“좋은 말로 타일러도 듣지 않고, 심지어 세희에게 손을 대려고 하다니. 오늘 사라질 준비를 하는 게 좋겠어!”캐리는 차가운 목소리로 붉은 옷을 입은 처녀귀신에게 말했다.“그게 뭐가 무섭다고.” 처녀귀신이 소리를 질렀다. “나도 이젠 지긋지긋해요! 이 더없이 더러운 세상! 내 부모님은 내가 학교폭력을 당했다는 것을 알게 된 후, 그들의 돈을 받고 바로 이 일이 없던 걸로 하자고 했어요. 내 오빠는 심지어 그들이 부자라는 것을 알고, 그들을 친구로 여겼고요! 환생할 게 뭐가 더 있겠어요? 환생해도 이렇게 더럽고 추악한 세상을 마주해야 하니까, 차라리 날 죽여요. 더 이상 이 징그러운 세상을 보고 싶지 않으니까!”처녀귀신의 말을 듣고, 캐리는 바로 손을 써서
세희가 이렇게 말하자, 세준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저녁 무렵, 인우는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자마자 세희가 이미 집에 있는 것을 보았고, 무척 흥분해하며 달려갔다.“누나, 돌아왔어요?” 인우는 싱글벙글 웃으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어때요, 다 나은 거예요?”세희는 의미심장하게 인우를 보더니 웃으며 말했다.“인우야, 오늘 저녁에 나 좀 도와줘.”“그래요.” 인우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학교에 가는 거 맞죠?”세희는 의아하게 인우를 바라보았다.“뭐야? 너 이제 무섭지도 않는 거야?”인우는 미소를 천천히 거두었다.“누나, 귀신은 무섭지만, 난 누나가 더 이상 그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아요. 그때 누나가 그렇게 고생하는 것을 보면서, 난 그날 정말 학교로 달려가서 그 귀신들을 죽이고 싶었어요. 그러나 시현 형이 누나의 생각을 존중해야 한다고 말했기 때문에, 억지로 참고 가지 않았던 거예요.”세희는 뿌듯해하며 인우의 머리를 어루만졌다.“우리 인우 다 컸네. 누나를 걱정할 줄 다 알고.”인우는 세희의 손을 잡고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누나, 난 줄곧 누나를 걱정하고 있었어요. 다음에 이런 위험한 일을 하러 간다면, 꼭 나 데리고 가면 안 돼요? 난 누나를 지켜주고 싶어요.”“그래! 저녁에 우리 가족들 함께 밥을 먹은 후에 바로 출발하자!”“좋아요!”저녁에 하영과 유준 그리고 희민이 돌아왔다. 세희가 이미 퇴원한 것을 보고, 세 사람은 기뻐해하며 그녀를 에워싸고 수다를 떨었다.저녁을 먹은 다음, 하영은 세희를 데리고 위층에 가서 간단하게 몸을 씻어주고서야 세희를 보냈다.문을 나서자마자, 세희는 시현이 그의 포르쉐와 함께 집 앞 정원에 있는 것을 보았다.세희와 인우는 의아함을 느끼며 시현을 쳐다보았다.세희가 먼저 물었다.“여긴 어쩐 일이에요?”시현은 별장을 바라보았다.“세준이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나한테 연락했지 뭐. 네 기사 되어 달라고.”“우리 집에 기사가 없는 것도 아닌데. 그러면 시현 오빠가 너
“그래, 우빈아, 넌 15년 동안 세희를 좋아했고, 또 세희를 위해 많은 것을 바쳤지. 하지만 그거 알아? 세희는 아주 이성적인 사람이야. 세희가 만약 무슨 일을 알고 싶다면, 바로 감정 속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호흡이 흐트러진 우빈은 시현을 바라보며 다시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알아요.” 우빈이 대답했다.“세희는 그 누구보다도 감성적이고 또 이성적이죠.”“그럼 만약 세희가 정말 날 선택한다면, 넌 어쩔 계획이야?”“그런 건 없어요.”우빈은 솔직하게 말했다.“내가 말했잖아요, 난 세희의 모든 선택을 존중할 거라고. 마찬가지로 다른 걱정 할 필요 없어요. 세희에게 거절을 당했다고 복수를 할 정도는 아니니까요.”시현은 계속 물었다.“그러니까 내가 세희와 함께 하더라도 넌 세희와 계속 친구를 하겠다는 말이야?”우빈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나와 세희는 줄곧 친구였어요. 우리 두 사람이 사귀지 않아도, 앞으로 여전히 사이가 좋은 친구예요. 고 과장님, 세희를 좋아해도 되지만, 내가 세희와 계속 친구로 되는 것을 막을 순 없어요.”시현은 갑자기 웃었다.“그럼 됐어!”우빈은 시현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다.시현은 엘리베이터 앞으로 가서 버튼을 눌렀다.“난 내가 세희와 사귀면, 넌 불편해서 세희와 연락 끊을 줄 알았거든.”우빈은 말문이 막혔다.“사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이 있어. 이제 세희를 포기하자고. 넌 정말 세희가 필요한 것 같으니까...”말을 하다 시현은 우빈을 힐끗 바라보았다.“네 마음을 상하게 하는 말들은 하지 않겠어. 아무튼 후에 생각해 봤는데, 만약 널 향한 내 개인적인 생각 때문에 세희를 포기한다면, 그건 널 무시하는 것과 같잖아.”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시현은 안으로 들어갔고 우빈도 뒤를 따랐다.두 사람이 나란히 엘리베이터에 서자, 우빈은 잠시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그 결정은 틀리지 않았어요. 난 확실히 가족을 모두 잃었지만, 그래도 피와 살이 있는 사람이에요. 이 세상에 나 혼자만이 이런 상황이 아니잖아
시현은 말을 이어받으며 오른손을 들었다.“그때 내 오른손에 피가 가득 묻은 거 있지? 심지어 의사가 네 등의 썩은 살을 모두 베어낸 것을 직접 봤는데, 며칠째 잠을 못 잤어.”“에이, 그건 간단하죠!” 세희는 히죽거리며 말했다.“수면제 처방받으면 편안하게 잘 수 있지 않겠어요?”시현은 웃으며 침대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세희야, 날 원망하고 싶지 않아?”“원망이요?” 세희는 시현의 뜻을 잘 몰랐다.“내가 왜요?”시현은 콧등을 긁적였다.“내가 널 데리고 그곳에 가지 않았다면, 너도 이렇게 다치지 않았을 거야.”세희는 눈을 부라리며 시현을 바라보았다.“그건 시현 오빠 탓이 아니에요. 그 귀신들이 겁도 없이 나한테 덤빈 것뿐이니까요. 다 회복되면 그 귀신들 전부 잡아버릴 거예요!”“또 그곳에 가려고?” 시현은 경악하며 물었다.“그럼요!” 세희는 손을 내밀었다.“일곱 명의 귀신을 전부 다 데려갈 수 있다면, 염라대왕님은 좋다고 박수를 치실지도 몰라요.”시현은 세희의 얼굴에 나타난 즐거운 미소를 애틋하게 바라보았다.“난 오히려 네가 날 욕하면서 분풀이를 했으면 좋겠는데. 이렇게 홀가분한 말투로 말하는 거 보니까 마음이 너무 아파.”“그럼 너무 재미없죠! 난 시현 오빠 돈 뜯어먹는 게 더 좋은 거 같은데? 내가 침대에서 내려올 수 있으면, 날 데리고 맛있는 거 먹으러 가요!”“오케이!” 시현은 시원스럽게 대답했다.“먹고 싶은 거 다 사줄게.”세희는 고개를 끄덕였다.“참, 세준 오빠가 그러던데, 미정 할머니를 찾아갔다면서요?”시현은 숨김없이 대답했다.“응, 가서 어떻게 해야 널 보호할 수 있을지에 대해 여쭤봤어.”“하하하.” 세희는 갑자기 웃으며 말했다. “날 보호한다고요? 왜 그런 생각을 하는 거죠? 그리고 시현 오빠는 귀신도 안 보이는데, 어떻게 귀신과 싸우려는 거예요? 정의감과 용기로 귀신을 제압하려고요?”“내가 만약 내 정의감을 이용할 수 있다면, 이 세상엔 귀신이 없을 거야?”세희는 웃으며 말했다.“그냥
시현은 세준 그들에게 돌아가서 쉬라고 한 다음, 혼자 의자에 앉아 멀리서 세희를 바라보았다.그녀는 아주 평온하게 잠을 자고 있었고, 숨을 고르게 쉬고 있었다.이때 간호사가 걸어왔다. 시현은 그녀를 보며 얼른 일어나 물었다.“선생님.”간호사는 그를 쳐다보았다.“무슨 일이시죠?”“세희는 언제 중환자실에서 나올 수 있는 거죠?”“이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아마도 요 며칠 더 관찰을 해야 할 것 같아요. 아가씨는 제가 본 여자아이들 중에서 가장 엄중한 상처를 입으신 환자라서요. 잘못하면 흉터가 남을 텐데... 어휴...”말이 끝나자, 간호사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시현은 그녀의 말을 듣고, 마음속으로 또 엄청난 죄책감을 느꼈다.‘이번 생은 철저히 세희에게 빚진 셈이네.’사흘 후, 세희는 중환자실에서 나왔고, 이 일을 알게 된 하영과 유준도 얼른 병원에 찾아왔다.세희가 침대에 엎드려 멍을 때리는 것을 보며, 두 사람은 가슴이 아팠다.하영은 허리를 굽혀 세희의 머리를 어루만졌다.“세희야, 미안해. 네 오빠들이 아침에 금방 이 일을 알려줘서, 엄마와 아빠도 이제야 달려온 거야.”세희는 고개를 저으며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괜찮아요, 엄마. 이거 봐요, 나 아직 멀쩡하잖아요?”하영은 눈시울이 붉어졌다.“걱정 마. 무슨 방법을 써서더라도 네 등의 흉터를 치료할 테니까.”“사실 난 이런 거 신경 안 써요. 등일 뿐이니, 평소에 남에게 보여주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나 자신도 볼 수 없으니까, 심리적인 스트레스도 없어요.”“네가 꾸미길 좋아한다는 거, 여기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걸?” 세준은 벽에 기대며 말했다.세희는 고개를 돌려 세준을 보려 했지만, 상처가 땅기는 바람에 아파서 이를 악물었다.세준은 마음이 아파서 눈살을 찌푸렸다.“좀 움직이지 마. 나도 안 비웃을게.”유준은 세준을 바라보았다.“세준아, 너희들은 외국에 아는 사람이 많으니까, 무슨 방법을 쓰더라도 좋은 성형과 의사를 찾아. 세희의 등에 절대로 흉터 남지 않게.”세준은
두려움과 걱정이 밀려오자, 시현은 도무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눈을 뜨고 창밖의 하늘을 바라보았다.‘난 세희가 하는 일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는데. 그럼 세희를 보호하려면 난 대체 무엇을 할 수 있지?’생각하다 시현은 핸드폰을 꺼내 세준에게 톡을 보냈다.[그 할머니 지금 어느 호텔에 계시는 거지?]얼마 지나지 않아, 세준은 시현에게 나미정이 지내고 있는 호텔 주소와 방번호를 보냈다.[고마워, 세준아.]세준은 이 문자를 보며 차갑게 웃었다.[세희의 일, 난 이대로 넘어가지 않을 거야.][날 때리고 싶든, 죽이고 싶든 네 마음대로 해. 다 내 잘못이니 나도 변명할 말이 없어.]이 문자를 보낸 후, 더 이상 답장이 들어오지 않았다.시현도 더 이상 아무것도 보내지 않고, 차에 시동을 걸어 호텔로 갔다.30분 후, 시현은 나미정이 있는 룸 앞에 도착했는데, 잠시 심사숙고한 다음, 손을 들어 문을 두드렸다.곧 안에서 나미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금만 기다려.”문을 열자, 시현이 문밖에 서있는 것을 보고 그녀는 약간 의아해했다.“네가 바로 병원에 있었던 그 총각인가?”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할머니. 저와 잠깐 얘기를 좀 나누시면 안 될까요?”“그래.” 나미정은 몸을 비키며 말했다. “들어와서 말하자꾸나.”시현은 들어가서 소파에 앉았고, 나미정은 그의 옆에 있는 소파에 앉았다.“무슨 일로 날 찾는 거지?”시현은 긴장이 돼서 두 손을 비볐다.“할머니, 저도 솔직히 말씀드릴게요. 저처럼 평범한 사람은 대체 어떻게 해야 세희의 안전을 보호할 수 있을까요?”“평범한 사람이라...”나미정은 웃기 시작했다.“왜, 네가 보기에 우리와 같은 무당은 평범하지 않은 건가?”시현은 멈칫하더니 얼른 설명했다.“그런 뜻이 아니에요. 아무튼 저희보다 강하고 특수한 능력이 있으시잖아요.”“그것도 다 하늘이 내려준 신기일 뿐이지.”나미정이 말했다.“그러나 우리도 평범한 사람들이야. 밥을 먹어야 하고, 또 때가 되면 죽는 법이니
세희는 자신의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부적은 비록 뚜렷하지는 않지만, 그녀는 여전히 강렬한 양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세희는 숨을 들이마신 다음 천천히 일어섰다. 그 순간, 옆에서 놀던 그 귀신들은 고개를 홱 돌리더니 모두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그들의 시선을 알아챈 세희도 눈을 돌려 귀신들을 보았다.‘또 이런 느낌이야! 이곳을 못 나가게 하는 그런 느낌!’세희는 밀려오는 공포를 참으며 용기를 내어 문 앞으로 걸어갔다.문과 가까워질수록 주위의 음기는 더욱 강렬해졌다. 심지어 세희는 자신의 영혼이 억압된 느낌을 받았다.“누나, 무서워하지 마요!!”“세희야! 용기를 내서 그곳에서 나와! 그 귀신들은 널 건드리지도, 널 다치게 하지도 못할 거야!”“누나! 나랑 형들이랑 그리고 고 과장님이 여기서 누나를 기다리고 있어요!”인우와 나미정의 목소리를 듣고, 세희는 눈물을 뚝뚝 흘렸다.그녀는 이를 악물며 가깝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다가갈 수 없는 문을 향해 계속 나아갔다.세희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고, 부적이 그려진 손을 들어 다시 시도했다.이번에 그 귀신들은 섬뜩하게 웃기 시작했다. 세희가 문손잡이에 손을 얹으려 하자, 그들은 재빨리 앞으로 돌진했다.이때, 매몰찬 음기가 덮쳐왔고, 세희는 부적이 있는 그 손을 들고 돌아섰다.그 귀신들은 하마터면 세희의 영혼과 닿을 뻔했다. 그러나 세희의 손에서 나는 강렬한 양기가 서려 있는 부적을 감지한 그들은 표정이 돌변했다.세희는 뒤로 물러섰고, 등이 문에 닿는 순간, 재빨리 몸을 돌려 문손잡이를 잡았다. 그리고 문을 연 후, 그녀는 즉시 뛰쳐나갔다.이때, 줄곧 병상에 누워있던 세희는 눈을 번쩍 뜨더니 숨을 들이마셨다.세희가 깨어나는 것을 보고, 인우는 감격에 겨워 소리쳤다.“누나! 왜 이제야 깨어난 거예요!!”그러나 세희는 그의 말을 듣지 못한 듯, 눈을 천천히 감았다.인우는 완전히 멍해지더니 당황해진 표정으로 나미정을 바라보았다.나미정은 아주 침착하게 대답했다.“별일 아니야, 피곤해서 그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