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다인은 정유준의 핸드폰을 건네주려고 했다.그러나 전화가 온 사람이 하영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동작을 멈칫했다.순간 머릿속은 고민이 되는 듯했지만,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러고는 아무렇지 않은 척 핸드폰을 코트 주머니 속에 다시 집어넣었다.그때.전화가 끊긴 것을 본 하영은 우두커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지금 바쁜가?’하영은 이를 악물고 정유준이 다시 전화할 것이라는 믿고 택시를 타고 카지노로 향했다.……한 시간 뒤.하영은 럭셔리하고 웅장한 카지노 입구에서 내렸다.그리고 홀을 지나 길을 물어 2번 룸 입구까지 찾아갔다.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문을 밀어 열었다.순간 피비린내가 뒤섞인 담배 냄새가 코를 찔렀다.룸 안쪽에는 흉악한 얼굴의 남자가 몇 명이 앉아 있었다. 아버지 강성문은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놈들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잘린 손은 거즈로 대충 감아 지혈 중이었다.입구의 인기척에 강성문은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하영을 보자 강성문의 눈에는 살 수 있다는 희망의 빛이 보였다.“하영아! 하영아! 살려줘!”카지노에 들어서기 전까지 화가 머리끝까지 났던 하영은, 강성문을 본 순간 모든 것을 잊어버렸다.빠른 걸음으로 강성문을 향해 걸어갔으나, 이내 험악한 남자들에게 가로막혔다.“저기…… 미스 강, 이보세요! 뭐가 그리 급해? 돈부터 줘야지?”시가를 피우고 있는 얼굴에 흉악한 칼자국이 있는 남자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그의 더러운 눈빛은 끊임없이 하영의 몸을 위아래로 훑었다. 눈빛속에 적나라하게 드러난 더러운 욕망은 생각만 해도 몸서리쳤다.하영은 마음속 공포와 분노를 누르고 고개를 돌려 칼 흉터 남자를 바라보았다.“우리 아빠 먼저 풀어줘요. 그러면 돈을 줄게요!”칼 흉터 남자가 손짓하자 강성문을 잡고 있던 무리가 뒤로 물러섰다.강성문은 비틀거리며 바닥에서 엉거주춤 일어났다.그러고는 바로 하영에게 달려갔다. 그의 눈에는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 돌아온 감격으로 가득 차 있었다.“하영아! 나 먼저 갈게
옆 룸입구까지 간 유준은 문을 걷어찼다.하영의 볼이 빨갛게 부어오르고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채 눌려 있는 모습을 본 유준은 순식간에 분노로 휩싸였다.검은 눈동자에서 피에 굶주린 듯한 음험한 기운이 뿜어져 나와 방안을 가득 채웠다.유준은 대머리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서 정강이를 걷어찼다.곧이어 그는 테이블 위의 술병을 집어 들어 대머리의 대가리를 내리쳤다.유준은 온몸에 차가운 피를 두른 염라대왕같이 무자비했다.장내에 감히 앞으로 나서서 저지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유준이 손에 닥치는 대로 모든 것을 부수는 것을 본 허시원은 바로 다가가 자기 겉옷을 벗어 유준에게 건네주었다.유준은 몸을 돌려 하영 앞으로 가 옷으로 그녀를 감싸주었다.하영을 안는 순간, 그녀의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똑똑히 보았다.그녀의 눈물이 소리 없이 그의 손등에 떨어졌다.품속의 하영을 꼭 껴안고 차가운 소리로 허시원에게 명령했다.“저 새끼 병신으로 만들어!”허시원은 고개를 끄덕였다.“예, 사장님!”놀라 입구에서 서성이고 있던 양다인은 유준이 하영을 안고 자신의 앞을 무심하게 지나쳐 가는 것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그녀는 마음은 점차 짙은 불안과 질투로 변해갔다.……난원.가정부 임씨는 피와 상처로 얼룩진 하영을 보고 놀라 다리가 후덜거렸다.“사장님, 아가씨……”“여의사로 한 명 불러와!”유준은 말을 끝내고 하영을 안고 위층으로 올라갔다.방에 도착한 그는 기절한 하영을 침대 위에 조심스럽게 눕혔다.그녀의 얼굴에 선명하게 찍힌 빨간 손자국을 본 유준의 눈엔 분노가 가득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임 씨는 여의사를 모시고 왔다.의사는 하영의 상태를 꼼꼼히 체크한 후 유준에게 말했다.“하영 씨는 보여지는 외상 외에 다른 큰 문제가 없습니다.”그제야 유준은 안심한 듯 낮은 소리로 말했다.“아주머니, 선생님 모셔다 드리세요!”임 씨는 곧 여의사를 데리고 떠났다.문이 닫히자, 유준은 휴대폰을 꺼내 허시원에게 전화를 걸었다.그의 목소리는 극도로 차가웠다.
“너 아직도 변명할게 남았어?” 유준의 냉소적인 목소리가 머리 위로 울려 퍼졌다.하영의 입술에 쓴웃음이 지어졌다. 뭘 어떻게 해명하라는 말인가?CCTV가 조작된 것이 분명하지만 증거가 없다.“말해!”유준의 고함소리에 하영은 몸을 떨었다.억울함이 치밀어 오르자 무기력하게 눈을 감았다.“무슨 말을 어떻게 할까요?”하영의 담담한 대답에 유준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그녀는 늘 이런 식이다. 변명의 여지가 없을 때는 될 대로 되라는…….영상에서도 그랬고, 지금 자신의 앞에서는 그랬다!유준은 나지막한 소리로 경고했다.“오늘 이후로, 출근할 때 외에, 별장에서 한 발짝도 나갈 생각 하지 마!”하영은 갑자기 고개를 들어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당신이 뭔데, 제 자유를 박탈하는 거예요?!”“내가 네 상사니까!”이 말을 남기고 유준은 문을 박차고 떠났다.하영은 아무 말 못도 하고 제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가슴 속에서 밀려오는 알 수 없는 아픔은 그녀의 신분이 얼마나 비천한지 일깨워 주는 것 같았다.온몸에 극심한 피로가 몰려온 하영은 책상에 기대어 몸을 지탱했다. 그런데 이때 책상 한가운데 잠긴 서랍이 눈에 들어왔다.잠긴 서랍 안에는 정유준의 비밀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정유준이 술에 취했을 때 잠꼬대를 한 적이 있었다.“하영아, 다들 나를 대단한 존재로 생각하는데…… 내 약점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 바로 저 서재 서랍 안에 있어. 매번 서랍을 열 때마다 내 심장은 쪼개지는 것만 같아…….”처음으로 유준이 실의에 빠진 모습을 본 순간이었다.당시에 서랍 속에 대체 무엇이 있길래 이 완벽한 존재의 남자를 무너뜨릴 수 있는지 궁금했었다.하지만 이제 하영은 알 것 같았다.서랍 속의 물건은 틀림없이 양다인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지금껏 줄곧 그녀를 미친 듯이 찾아다녔으니…….여기까지 생각하니 하영은 마음이 더욱 괴로웠다.……아침 식사 후, 하영은 병원에 양운희를 보러 갔다.별장을 나서자 허시원의 그림자가 나타
승자의 여유로운 표정을 짓고 있는 유준을 바라보고 있으니, 하영은 더 힘이 빠지는 것 같았다금전적인 부분에서 자기 능력으론 도저히 돌파구를 찾지 못하자 화제를 바꿀 수밖에 없었다. “양다인 씨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서운하고 화날 텐데…… 괜찮으세요?”하영은 조심스레 유준의 표정을 살폈다.유감스럽게도 그는 무표정하게 몇 마디만 했다.“너와 상관없는 일인 거 같은데…….”……8시, 회사.정유준이 회의하는 동안 하영은 화장실에 갔다가 마침 손을 씻고 있는 양다인을 만났다.하영은 그녀를 한 번 보고 시선을 거두었다. 하지만 양다인은 웃으며 입을 열었다.“강 비서는 정말 책임감이 강하시네요. 그렇게 얻어맞고도 나온걸 보면…….”하영이 씻던 손을 멈췄다. ‘그날 밤 혹시 양다인도 그 자리에 있었나?’‘그럼 유준이 자신의 전화를 끊은 것도 양다인이 옆에 있었기 때문이겠지?’하영은 무표정으로 답했다.“양 부팀장님!!부팀장님 본인 하시는 일만 관심 갖는 게 어떻겠어요?”양다인은 함박꽃처럼 활짝 웃으며 말했다.“유준 씨…… 강 비서님한테 화 안 내던가요?”하영은 곧장 일어나 차갑게 그녀를 바라보았다.“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죠?”양다인은 느릿느릿 페이퍼 타올로 손을 닦았다.“내가 봤을 때…… 유준 씨는 지금 강 비서를 엄청 혐오할 꺼 같은데요. 남자라면 누구라도 몸뚱어리 굴려서 도박 빚을 갚는 여자를 좋아하지는 않을 꺼 같은데요.”조작된 CCTV 파일이 생각나면서 양다인의 말에 담긴 뜻을 알아차렸다.이 모든 게 양다인의 짓이란 생각이 들었다.하영은 화난 목소리로 따져 물었다.“양다인씨, 저한테 왜 그러세요? 혹시 저한테 감정 있어요?”양다인이 입술을 심술궂게 올리고,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내 남자를 빼앗으려 드는데 왜 감정이 없겠어? 강하영, 열 받지? 누가 널 더러 주제넘게 내 남자를 넘보라고 했어? 니 가족, 너네 집 식구들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야. 그런데 이 세상 어느 남자가 널 위해 진심을 다하겠어?”양다인의
임씨 아주머니는 얼른 입구 쪽으로 나가 유준을 맞이했다.“사장님, 오셨어요!!.”정유준은 입었던 외투를 건네주며 물었다.“그 사람은?”“아가씨…… 막 올라갔어요. 입맛이 없는지 두세 입도 안 먹었어요. 그리고 기분이 안 좋아 보였어요.”정유준은 눈살을 찌푸렸다. ‘방귀 낀 놈이 성낸다고…… 아직 왜 양다인을 밀었는지 따져 묻지도 않았는데, 오히려 지가 먼저 화를 내다니…….’식탁 위의 거의 먹지 않는 음식들을 힐끗 보고는, 화난 얼굴로 위층으로 올라가 탕, 탕, 탕, 방문을 두드렸다.곧 하영이 문을 열었다.문 앞에서 차가운 냉기를 풍기는 남자를 보면서도 하영은 무심하게 말을 했다.“무슨 볼일 있으신가요? 할 말 있으면 하세요.”자신과 거리를 두는 듯한 하영의 모습에 정유준은 되려 짜증이 밀려왔다.“나한테 뭐라고 변명이라도 해야 하지 않아?” 남자가 물었다.하영은 눈도 깜짝 않고 고개를 들어 대답했다.“무슨 말씀인지 모르겠는데요.”정유준은 실눈을 뜨고 일갈했다.“강하영, 너 자꾸 내 인내심의 한계를 테스트하지 마!”하영은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들어 정유준을 똑바로 쳐다봤다.“제가 어떻게 감히 도발할 수 있겠어요? 내가 말한다고 믿을 수 있겠어요?”정유준의 짜증 섞인 목소리.“그래서 해명조차도 하지 않겠다? 그쪽은 너 때문에 발목 삐었어!”하영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봐봐, 이미 유죄 판결을 내렸는데 뭘 더 물어봐?’하영의 얼굴에 웃음기가 사라졌다.“그러니까 지금 나한테, 내가 양다인 씨를 밀었다는 걸 인정하라는 말, 아닌가요? 네 맞아요. 이제 됐어요? 그래요, 난 이렇게 악랄한 여자예요.”하영에 대해선 의심하고…… 첫사랑에 대해선 안쓰러워하고…….그렇게 눈에 거슬리면, 내쫓으면 그만이다.잘못을 하고도 당당한 하영의 모습을 본 유준의 분노가 순간 폭발했다.그는 하영을 자신의 품으로 힘껏 당겨 안았다.고개를 숙여 하영에게 강제로 키스를 하며 입술을 힘껏 물었다.살이 찢어지는 고통과 함께 피비린내가 두 사람
[잠깐!]배현욱은 전화를 끊으려는 하영을 재빨리 붙잡았다.그는 능청스럽게 거짓말을 했다.[허 비서님, 지금 좀 멀리 있어서 올 수 없다네!]“……알았어요. 주소 보내주세요.”20분 뒤.하영은 몬스터 나이트클럽 입구에 도착했다.클럽 입구에 배현욱과 육기범이 고개를 떨구고 있는 정유준을 가까스로 잡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하영은 눈살을 찌푸리고 앞으로 다가갔다. 정유준의 얼굴에 붉은 기운이 배어 있는 것을 보고, 그제야 그가 정말 취했다는 것을 확신했다.다만, 170센티미터의 자신이 어떻게 190의 유준을 감당할 수 있겠냐고?배현욱은 정유준을 강하영의 품에 밀어 넣으며 물었다.“강 비서님, 유준이 오랫동안 찾고 있던 그 여자…… 본 적 있어?”하영은 힘없이 시선을 내려 대답했다.“네. 있어요.”배현욱은 웃었다. “유준이 술을 많이 마신 것도 그 여자 때문일 거야. 구체적인 이유는 잘 모르겠고…… 암튼 잘 좀 챙겨줘. 부탁해.” 강하영의 심장이 비수가 꼽힌 듯 아려왔다.하지만 이전보다 고통의 강도가 세진 않은 것 같다.하영은 배현욱을 향해 멋쩍게 웃은 뒤, 힘겹게 유준을 데리고 떠났다.그들이 멀어지자 육기범은 얼른 입을 열었다.“야! 배현욱, 너 미쳤어?”배현욱은 눈썹을 치켜세웠다.“내가 뭐?”육기범은 화가 나서 하영의 뒷모습을 가리켰다.“너, 유준이, 강 비서때문에 술 마신 거 알면서…… 왜 그 첫사랑인지 뭔지 하는 여자 때문이라고 했어?배현욱은 가볍게 웃었다.“유준도 쓴맛을 좀 봐야 해. 마음고생을 좀 해봐야 한다고. 다 그 녀석을 위한 거야.”육기범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의심스러운 눈빛을 보냈다.“무슨 마음고생?”“참 눈치 없구먼……. 때가 되면 알게 될 거야.”육기범은 어이가 없었다. 그냥 시원하게 말해주지 뭔 뜸을 들이고 그러냐?……난원으로 돌아온 하영은 힘겹게 유준을 안방으로 데려갔다.한밤중에 술에 취한 남자를 데려오다 보니 너무 피곤했다. 침대 끝자락에 엎드린 하영은 손가락 움직일 힘조차도 없었다.
식탁에 앉자 임씨 아주머니는 하영에게 방금 끓인 닭고기 수프 한 그릇을 가져다주었다.닭고기 기름이 둥둥 떠 있는 것을 보니 속이 울렁거렸다.갑자기 구토감이 확 몰려왔다. 하영은 급히 화장실로 달려갔다.이 장면을 본 임씨 아주머니는 제자리에 멍하니 있다가, 곧 놀라움과 기쁨의 기색이 얼굴에 나타났다.하영이 창백한 얼굴로 돌아오자, 임 씨는 웃으며 물었다.“아가씨, 혹시 요즘 생리가 늦어지는 건 아닌가요?”하영은 나른한 듯 탁자 위의 찻잔을 집어 들었다.“생리가 불규칙적이어서…… 잘 모르겠어요.”“저기…… 내가 봤을 때는 임신인 거 같은데?”하영은 갑자기 손동작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놀란 표정으로 아주머니를 쳐다보았다.“임…… 임신요?!”임 씨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이따가 나가서 테스트기를 사다 줄 테니까, 테스트해보면 알 수 있어요.”하영은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이모님, 저와 사장님은 줄곧 피임을 해왔어요. 최근 위가 좋지 않아 그런 걸 거예요. 임신은 불가능해요.”아주머니는 다소 아쉬워하는 눈빛이었다.“그럼 소화가 잘되고 위에 부담 안 되는 요리를 만들어 줄게요.”하영은 복잡한 마음을 가다듬고 고개를 끄덕였다.“아, 맞다, 이모님, 제 속이 불편하단 건 유준 씨에게 말씀하지 마세요.”“사장님…… 사실 아가씨 걱정 정말 많이 하는데…….”하영은 웃으며 말했다.“저도 알고 있어요. 유준 씨 매일 바쁘잖아요. 괜히 저 때문에 신경 쓰이게 하고 싶지 않아요…….”저녁을 먹은 후, 하영은 급히 위층으로 올라갔다.그녀는 사실 정말 임신인지 아닌지 확실하지 않다.그날 밤 차에서는 확실히 아무런 피임 조치를 하지 않았다.하영은 불안한 듯 손으로 아랫배를 어루만졌다.만약 정말 임신했다면, 이 아이는 낳아야 할까?오피스 와이프가 임신한 아이, 정유준은 틀림없이 원하지 않을 것이다.갑자기 몰려온 불안으로 하영은 침실에서 왔다 갔다 하며, 외출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었다. 꼭 임신 여부를 확인해야했다.……밤 10
“당장 지워! 내가 왜 네 아이의 아빠야? ……구역질이 난다!”산부인과 앞에서 남자의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하영은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여자가 남자의 옷자락을 잡고 울며 애원하고 있었다.“낙태가 여자 몸에 얼마나 나쁜지 알아? 사람이 왜 이렇게 모질어?”“네 몸뚱어리가 내 꺼야? 나랑 뭔 상관인데?”커플의 다툼소리를 듣는 순간, 하영의 머릿속에 유준의 냉정한 얼굴이 떠올랐다.그녀는 단지 유준의 이부자리를 데워주는 ‘도구’일 뿐이다.유준은 배속의 아이를 쉽게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갑자기 그 남자의 얼굴에 유준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덜컥 겁이 난 하영은 핸드폰 전원을 꺼버렸다. 먼저 기회를 봐서 정유준의 의중을 파악해 봐야 한다.하영은 임신확인서를 가방에 넣은 뒤 불안한 마음을 안고 엄마의 입원 병동으로 향했다.그녀는 어머니의 병실 앞에서 한참이나 마음을 가라앉히고서야 문을 밀고 들어갔다.양운희는 사과를 먹고 있었다. 하영이 오는 것을 보고 환하게 웃었다.“하영이 왔어?”하영은 양운희의 침대 옆에 앉아 다정하게 물었다.“엄마, 저 방금 출장 다녀왔어요. 오늘은 안색이 좀 괜찮은 것 같아 보여요.”양운희의 기분은 말처럼 좋아 보였다.“네가 출장 가 있는 동안 부진석 선생님께서 잘 챙겨 주셨어.”하영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엄마, 의사 선생님도 일이 바쁘시니까, 너무 폐 끼치지 말아요.”“나, 안 바쁜데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부진석의 온화한 목소리가 병실 입구에서 들려왔다.하영은 얼굴의 미소를 가라앉히고 고개를 들었다.그리고 일어서서 감사를 표했다.“선생님, 우리 엄마 잘 돌봐 주셔서 감사합니다.”“우리 사이에 무슨 그런 말을 해요. 그럴 필요 없어요.”부진석의 지나친 친절은 오히려 양운희로 하여금 헛된 생각을 하게 했다.안 그래도 하영이 결혼해야 할 나이가 다 된 것에 양운희는 걱정하고 있었다.“하영아, 너 점심에 시간 되면 선생님께 식사라도 한 끼 대접해 드려.”하영은 간곡히 거절하려
시현은 아파서 이를 악물었다.“알았어, 알았어. 공주님 제발 살려주세요!!”세희는 그제야 흐뭇하게 손을 거두었다.“참, 지난번에 말한 그 사건 말이에요, 언제 해결하러 갈 거예요?”“시간이 좀 더 지나면.” 시현이 말했다. “네 몸은 아직 완전히 나아지지 않았으니까, 지금 계속 바쁘게 움직이면 안 돼. 만약에 저쪽에도 이런 악독한 귀신이 있다면, 너 또 상처를 입을지 몰라. 난 이미 죄책감 때문에 너와 결혼을 해서 평생 챙겨주고 싶으니까, 또 그런 일이 생긴다면, 나 정말 방법이 없어.”세희는 웃으며 말했다.“내가 언제 시현 오빠와 결혼한다고 했어요?”“쳇.” 시현은 입을 삐죽 내밀었다.“내가 뭐가 어때서? 나도 어깨가 넓고 근육이 있는 미남이라고! 인기가 얼마나 많은데.”세희는 말문이 막혔다.‘정말 뻔뻔하네. 아무렇지 않게 자신을 칭찬하다니.’세희는 숨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시현 오빠.”“응?”“내가 지금 귀신을 잡는 일을 종사하고 있잖아요. 그러니 난 사실 아주 좋은 신붓감은 아니에요. 눈치 없는 귀신들이 가끔 날 찾아와서 귀찮게 할 수도 있으니까요. 난 인우와 반대로, 팔자에 음기가 가득 찼거든요.”“그러면 어떻게 되는데?”“7월 중순이 되면 많은 귀신들이 날 찾아올 거예요. 그럼 난 일이 잘 안 풀리거나 심지어 다칠 수도 있거든요.”“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만약 우리가 함께 한다면, 그 귀신들은 심지어 시현 오빠를 귀찮게 할 거예요.”“그래서, 이것 때문에 네가 최고의 신붓감이 아니란 거야?” 시현은 말을 마치고 웃으며 말했다. “이까짓 일로 내가 물러설 수 있을 것 같아? 세희야, 너도 날 너무 얕본 것 같아.”“그때 가면 나 때문에 모든 일이 잘 안 풀릴 텐데, 그게 두렵지도 않아요?” 세희는 시현에게 물었다.시현은 입술을 구부리고 웃었다.“넌 우빈이를 그렇게 좋아하는데, 우빈에게 영향을 미치는 건 하나도 두렵지 않은 거야? 세희야, 넌 날 뭘로 보고. 설령 그게 사실이라 하더라도, 난 두렵지
시현과 인우는 비록 귀신을 보지 못했지만, 지금 검은 연기가 자신의 앞에서 천천히 흩어지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인우는 세희를 바라보며 물었다.“누나, 지금 어떻게 된 일이에요?”세희는 몸을 돌려 말했다.“그 귀신은 환생하고 싶지 않아서 이미 죽었어.”“귀신이 죽었다고?” 시현이 물었다.“이 세상에서 사라졌다는 뜻이야?”세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사방을 바라보았다.“캐리 아저씨, 이제 그 여섯 명의 귀신을 좀 잡아주세요.”캐리는 고개를 끄덕였고, 불과 몇 분 만에 겁에 질린 그 귀신들을 세희의 앞으로 데려왔다.세희는 그들을 바라보며 물었다.“당신들은 그 처녀귀신과 같은 선택을 할 건가요? 아니면 나와 같이 서낭당에 갈 건가요?”“서낭당에 갈래요!”“우리는 그 여자의 협박을 받아서 여기에 갇힌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벌써 떠났을 텐데!”“죽어도 우리를 괴롭히려 하다니! 우리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이 귀신들은 그 처녀귀신이 사라진 후, 불평하기 시작했다.세희는 그들의 원망을 듣고, 마음속에 분노가 치솟았다.“지금 그 처녀귀신을 비난할 면목이 있는 거예요?!”세희는 노발대발하며 말했다.“당신들을 죽인 것은 그 여자의 잘못일지라도. 당신들은 자신에게 그 어떤 책임도 없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만약 당신들이 그 여자를 괴롭히지 않았다면, 오늘처럼 귀신으로 되어 이곳에 갇히지 않았겠죠!”“풉.” 한 여자 귀신이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리에게 책임이 있다고요? 그 여자는 늘 자신의 성적을 가지고 남을 비웃었어요. 그러지만 않았어도 우리에게 괴롭힘을 당하지 않았을 텐데.”세희는 이 말을 듣고 어이가 없었다.“남의 성적이 우수해서, 당신들은 또 그 사람을 따라잡을 수 없어서, 그걸 자랑이라고 생각했던 거예요? 정말 불쌍하네요! 이 세상에 당신들 같은 질투심이 강한 쓰레기가 없어서 정말 다행이에요! 안심해요, 당신들은 다음 생에도 이번 생에 지은 죗값을 치러야 하니까!”귀신들은 세희가 한 말에 화가 났지만, 캐리와 인우 때문에 화가
“말이 쉽지!” 처녀귀신은 화가 나서 말했다.“날 죽인 그 사람들은 비록 귀신이 되었지만, 나도 그들이 환생하지 못하게 붙잡아둬야 한단 말이에요!”세희는 눈살을 찌푸렸다.“그 여섯 명의 학생들이 당신을 죽인 사람이었어요?”“그렇지 않으면 내가 왜 그들을 죽였을 것 같아요??”“그 사람들 찾아 복수를 한 이상, 이제 그만 그들을 놓아줘요. 이렇게 자신을 괴롭혀가며 그들을 붙잡고 있을 필요가 더 있을까요?”“그럴 순 없어요! 이렇게 쉽게 환생을 하라고 하는 건 너무 말이 안 되니까!!”처녀귀신이 노발대발했다.세희는 웃었다.“당신은 집념이 너무 커서 줄곧 이곳에 갇혀 있는 거예요. 영원히 자신의 고통으로 자신을 괴롭히고 있잖아요. 만약 내려가서 벌을 받고 환생하여 다시 이 세상에 태어난다면, 이것 또한 자신의 과거를 내려놓을 수 있는 방법이 아니겠어요?”“이렇게까지 날 가르칠 필요 없어요!”처녀귀신이 말했다.“오늘 당신들이 죽든지, 아니면 내가 죽든지, 둘 중 하나 선택하자고요!”말을 마치자, 처녀귀신은 세희를 향해 공격하려 했다.세희는 바로 인우를 부르려고 했고, 이때 갑자기 어두운 그림자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빠른 속도로 달려온 캐리는 즉시 그 처녀귀신을 먼 곳으로 밀어냈다.“좋은 말로 타일러도 듣지 않고, 심지어 세희에게 손을 대려고 하다니. 오늘 사라질 준비를 하는 게 좋겠어!”캐리는 차가운 목소리로 붉은 옷을 입은 처녀귀신에게 말했다.“그게 뭐가 무섭다고.” 처녀귀신이 소리를 질렀다. “나도 이젠 지긋지긋해요! 이 더없이 더러운 세상! 내 부모님은 내가 학교폭력을 당했다는 것을 알게 된 후, 그들의 돈을 받고 바로 이 일이 없던 걸로 하자고 했어요. 내 오빠는 심지어 그들이 부자라는 것을 알고, 그들을 친구로 여겼고요! 환생할 게 뭐가 더 있겠어요? 환생해도 이렇게 더럽고 추악한 세상을 마주해야 하니까, 차라리 날 죽여요. 더 이상 이 징그러운 세상을 보고 싶지 않으니까!”처녀귀신의 말을 듣고, 캐리는 바로 손을 써서
세희가 이렇게 말하자, 세준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저녁 무렵, 인우는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자마자 세희가 이미 집에 있는 것을 보았고, 무척 흥분해하며 달려갔다.“누나, 돌아왔어요?” 인우는 싱글벙글 웃으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어때요, 다 나은 거예요?”세희는 의미심장하게 인우를 보더니 웃으며 말했다.“인우야, 오늘 저녁에 나 좀 도와줘.”“그래요.” 인우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학교에 가는 거 맞죠?”세희는 의아하게 인우를 바라보았다.“뭐야? 너 이제 무섭지도 않는 거야?”인우는 미소를 천천히 거두었다.“누나, 귀신은 무섭지만, 난 누나가 더 이상 그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아요. 그때 누나가 그렇게 고생하는 것을 보면서, 난 그날 정말 학교로 달려가서 그 귀신들을 죽이고 싶었어요. 그러나 시현 형이 누나의 생각을 존중해야 한다고 말했기 때문에, 억지로 참고 가지 않았던 거예요.”세희는 뿌듯해하며 인우의 머리를 어루만졌다.“우리 인우 다 컸네. 누나를 걱정할 줄 다 알고.”인우는 세희의 손을 잡고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누나, 난 줄곧 누나를 걱정하고 있었어요. 다음에 이런 위험한 일을 하러 간다면, 꼭 나 데리고 가면 안 돼요? 난 누나를 지켜주고 싶어요.”“그래! 저녁에 우리 가족들 함께 밥을 먹은 후에 바로 출발하자!”“좋아요!”저녁에 하영과 유준 그리고 희민이 돌아왔다. 세희가 이미 퇴원한 것을 보고, 세 사람은 기뻐해하며 그녀를 에워싸고 수다를 떨었다.저녁을 먹은 다음, 하영은 세희를 데리고 위층에 가서 간단하게 몸을 씻어주고서야 세희를 보냈다.문을 나서자마자, 세희는 시현이 그의 포르쉐와 함께 집 앞 정원에 있는 것을 보았다.세희와 인우는 의아함을 느끼며 시현을 쳐다보았다.세희가 먼저 물었다.“여긴 어쩐 일이에요?”시현은 별장을 바라보았다.“세준이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나한테 연락했지 뭐. 네 기사 되어 달라고.”“우리 집에 기사가 없는 것도 아닌데. 그러면 시현 오빠가 너
“그래, 우빈아, 넌 15년 동안 세희를 좋아했고, 또 세희를 위해 많은 것을 바쳤지. 하지만 그거 알아? 세희는 아주 이성적인 사람이야. 세희가 만약 무슨 일을 알고 싶다면, 바로 감정 속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호흡이 흐트러진 우빈은 시현을 바라보며 다시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알아요.” 우빈이 대답했다.“세희는 그 누구보다도 감성적이고 또 이성적이죠.”“그럼 만약 세희가 정말 날 선택한다면, 넌 어쩔 계획이야?”“그런 건 없어요.”우빈은 솔직하게 말했다.“내가 말했잖아요, 난 세희의 모든 선택을 존중할 거라고. 마찬가지로 다른 걱정 할 필요 없어요. 세희에게 거절을 당했다고 복수를 할 정도는 아니니까요.”시현은 계속 물었다.“그러니까 내가 세희와 함께 하더라도 넌 세희와 계속 친구를 하겠다는 말이야?”우빈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나와 세희는 줄곧 친구였어요. 우리 두 사람이 사귀지 않아도, 앞으로 여전히 사이가 좋은 친구예요. 고 과장님, 세희를 좋아해도 되지만, 내가 세희와 계속 친구로 되는 것을 막을 순 없어요.”시현은 갑자기 웃었다.“그럼 됐어!”우빈은 시현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다.시현은 엘리베이터 앞으로 가서 버튼을 눌렀다.“난 내가 세희와 사귀면, 넌 불편해서 세희와 연락 끊을 줄 알았거든.”우빈은 말문이 막혔다.“사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이 있어. 이제 세희를 포기하자고. 넌 정말 세희가 필요한 것 같으니까...”말을 하다 시현은 우빈을 힐끗 바라보았다.“네 마음을 상하게 하는 말들은 하지 않겠어. 아무튼 후에 생각해 봤는데, 만약 널 향한 내 개인적인 생각 때문에 세희를 포기한다면, 그건 널 무시하는 것과 같잖아.”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시현은 안으로 들어갔고 우빈도 뒤를 따랐다.두 사람이 나란히 엘리베이터에 서자, 우빈은 잠시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그 결정은 틀리지 않았어요. 난 확실히 가족을 모두 잃었지만, 그래도 피와 살이 있는 사람이에요. 이 세상에 나 혼자만이 이런 상황이 아니잖아
시현은 말을 이어받으며 오른손을 들었다.“그때 내 오른손에 피가 가득 묻은 거 있지? 심지어 의사가 네 등의 썩은 살을 모두 베어낸 것을 직접 봤는데, 며칠째 잠을 못 잤어.”“에이, 그건 간단하죠!” 세희는 히죽거리며 말했다.“수면제 처방받으면 편안하게 잘 수 있지 않겠어요?”시현은 웃으며 침대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세희야, 날 원망하고 싶지 않아?”“원망이요?” 세희는 시현의 뜻을 잘 몰랐다.“내가 왜요?”시현은 콧등을 긁적였다.“내가 널 데리고 그곳에 가지 않았다면, 너도 이렇게 다치지 않았을 거야.”세희는 눈을 부라리며 시현을 바라보았다.“그건 시현 오빠 탓이 아니에요. 그 귀신들이 겁도 없이 나한테 덤빈 것뿐이니까요. 다 회복되면 그 귀신들 전부 잡아버릴 거예요!”“또 그곳에 가려고?” 시현은 경악하며 물었다.“그럼요!” 세희는 손을 내밀었다.“일곱 명의 귀신을 전부 다 데려갈 수 있다면, 염라대왕님은 좋다고 박수를 치실지도 몰라요.”시현은 세희의 얼굴에 나타난 즐거운 미소를 애틋하게 바라보았다.“난 오히려 네가 날 욕하면서 분풀이를 했으면 좋겠는데. 이렇게 홀가분한 말투로 말하는 거 보니까 마음이 너무 아파.”“그럼 너무 재미없죠! 난 시현 오빠 돈 뜯어먹는 게 더 좋은 거 같은데? 내가 침대에서 내려올 수 있으면, 날 데리고 맛있는 거 먹으러 가요!”“오케이!” 시현은 시원스럽게 대답했다.“먹고 싶은 거 다 사줄게.”세희는 고개를 끄덕였다.“참, 세준 오빠가 그러던데, 미정 할머니를 찾아갔다면서요?”시현은 숨김없이 대답했다.“응, 가서 어떻게 해야 널 보호할 수 있을지에 대해 여쭤봤어.”“하하하.” 세희는 갑자기 웃으며 말했다. “날 보호한다고요? 왜 그런 생각을 하는 거죠? 그리고 시현 오빠는 귀신도 안 보이는데, 어떻게 귀신과 싸우려는 거예요? 정의감과 용기로 귀신을 제압하려고요?”“내가 만약 내 정의감을 이용할 수 있다면, 이 세상엔 귀신이 없을 거야?”세희는 웃으며 말했다.“그냥
시현은 세준 그들에게 돌아가서 쉬라고 한 다음, 혼자 의자에 앉아 멀리서 세희를 바라보았다.그녀는 아주 평온하게 잠을 자고 있었고, 숨을 고르게 쉬고 있었다.이때 간호사가 걸어왔다. 시현은 그녀를 보며 얼른 일어나 물었다.“선생님.”간호사는 그를 쳐다보았다.“무슨 일이시죠?”“세희는 언제 중환자실에서 나올 수 있는 거죠?”“이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아마도 요 며칠 더 관찰을 해야 할 것 같아요. 아가씨는 제가 본 여자아이들 중에서 가장 엄중한 상처를 입으신 환자라서요. 잘못하면 흉터가 남을 텐데... 어휴...”말이 끝나자, 간호사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시현은 그녀의 말을 듣고, 마음속으로 또 엄청난 죄책감을 느꼈다.‘이번 생은 철저히 세희에게 빚진 셈이네.’사흘 후, 세희는 중환자실에서 나왔고, 이 일을 알게 된 하영과 유준도 얼른 병원에 찾아왔다.세희가 침대에 엎드려 멍을 때리는 것을 보며, 두 사람은 가슴이 아팠다.하영은 허리를 굽혀 세희의 머리를 어루만졌다.“세희야, 미안해. 네 오빠들이 아침에 금방 이 일을 알려줘서, 엄마와 아빠도 이제야 달려온 거야.”세희는 고개를 저으며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괜찮아요, 엄마. 이거 봐요, 나 아직 멀쩡하잖아요?”하영은 눈시울이 붉어졌다.“걱정 마. 무슨 방법을 써서더라도 네 등의 흉터를 치료할 테니까.”“사실 난 이런 거 신경 안 써요. 등일 뿐이니, 평소에 남에게 보여주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나 자신도 볼 수 없으니까, 심리적인 스트레스도 없어요.”“네가 꾸미길 좋아한다는 거, 여기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걸?” 세준은 벽에 기대며 말했다.세희는 고개를 돌려 세준을 보려 했지만, 상처가 땅기는 바람에 아파서 이를 악물었다.세준은 마음이 아파서 눈살을 찌푸렸다.“좀 움직이지 마. 나도 안 비웃을게.”유준은 세준을 바라보았다.“세준아, 너희들은 외국에 아는 사람이 많으니까, 무슨 방법을 쓰더라도 좋은 성형과 의사를 찾아. 세희의 등에 절대로 흉터 남지 않게.”세준은
두려움과 걱정이 밀려오자, 시현은 도무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눈을 뜨고 창밖의 하늘을 바라보았다.‘난 세희가 하는 일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는데. 그럼 세희를 보호하려면 난 대체 무엇을 할 수 있지?’생각하다 시현은 핸드폰을 꺼내 세준에게 톡을 보냈다.[그 할머니 지금 어느 호텔에 계시는 거지?]얼마 지나지 않아, 세준은 시현에게 나미정이 지내고 있는 호텔 주소와 방번호를 보냈다.[고마워, 세준아.]세준은 이 문자를 보며 차갑게 웃었다.[세희의 일, 난 이대로 넘어가지 않을 거야.][날 때리고 싶든, 죽이고 싶든 네 마음대로 해. 다 내 잘못이니 나도 변명할 말이 없어.]이 문자를 보낸 후, 더 이상 답장이 들어오지 않았다.시현도 더 이상 아무것도 보내지 않고, 차에 시동을 걸어 호텔로 갔다.30분 후, 시현은 나미정이 있는 룸 앞에 도착했는데, 잠시 심사숙고한 다음, 손을 들어 문을 두드렸다.곧 안에서 나미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금만 기다려.”문을 열자, 시현이 문밖에 서있는 것을 보고 그녀는 약간 의아해했다.“네가 바로 병원에 있었던 그 총각인가?”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할머니. 저와 잠깐 얘기를 좀 나누시면 안 될까요?”“그래.” 나미정은 몸을 비키며 말했다. “들어와서 말하자꾸나.”시현은 들어가서 소파에 앉았고, 나미정은 그의 옆에 있는 소파에 앉았다.“무슨 일로 날 찾는 거지?”시현은 긴장이 돼서 두 손을 비볐다.“할머니, 저도 솔직히 말씀드릴게요. 저처럼 평범한 사람은 대체 어떻게 해야 세희의 안전을 보호할 수 있을까요?”“평범한 사람이라...”나미정은 웃기 시작했다.“왜, 네가 보기에 우리와 같은 무당은 평범하지 않은 건가?”시현은 멈칫하더니 얼른 설명했다.“그런 뜻이 아니에요. 아무튼 저희보다 강하고 특수한 능력이 있으시잖아요.”“그것도 다 하늘이 내려준 신기일 뿐이지.”나미정이 말했다.“그러나 우리도 평범한 사람들이야. 밥을 먹어야 하고, 또 때가 되면 죽는 법이니
세희는 자신의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부적은 비록 뚜렷하지는 않지만, 그녀는 여전히 강렬한 양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세희는 숨을 들이마신 다음 천천히 일어섰다. 그 순간, 옆에서 놀던 그 귀신들은 고개를 홱 돌리더니 모두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그들의 시선을 알아챈 세희도 눈을 돌려 귀신들을 보았다.‘또 이런 느낌이야! 이곳을 못 나가게 하는 그런 느낌!’세희는 밀려오는 공포를 참으며 용기를 내어 문 앞으로 걸어갔다.문과 가까워질수록 주위의 음기는 더욱 강렬해졌다. 심지어 세희는 자신의 영혼이 억압된 느낌을 받았다.“누나, 무서워하지 마요!!”“세희야! 용기를 내서 그곳에서 나와! 그 귀신들은 널 건드리지도, 널 다치게 하지도 못할 거야!”“누나! 나랑 형들이랑 그리고 고 과장님이 여기서 누나를 기다리고 있어요!”인우와 나미정의 목소리를 듣고, 세희는 눈물을 뚝뚝 흘렸다.그녀는 이를 악물며 가깝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다가갈 수 없는 문을 향해 계속 나아갔다.세희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고, 부적이 그려진 손을 들어 다시 시도했다.이번에 그 귀신들은 섬뜩하게 웃기 시작했다. 세희가 문손잡이에 손을 얹으려 하자, 그들은 재빨리 앞으로 돌진했다.이때, 매몰찬 음기가 덮쳐왔고, 세희는 부적이 있는 그 손을 들고 돌아섰다.그 귀신들은 하마터면 세희의 영혼과 닿을 뻔했다. 그러나 세희의 손에서 나는 강렬한 양기가 서려 있는 부적을 감지한 그들은 표정이 돌변했다.세희는 뒤로 물러섰고, 등이 문에 닿는 순간, 재빨리 몸을 돌려 문손잡이를 잡았다. 그리고 문을 연 후, 그녀는 즉시 뛰쳐나갔다.이때, 줄곧 병상에 누워있던 세희는 눈을 번쩍 뜨더니 숨을 들이마셨다.세희가 깨어나는 것을 보고, 인우는 감격에 겨워 소리쳤다.“누나! 왜 이제야 깨어난 거예요!!”그러나 세희는 그의 말을 듣지 못한 듯, 눈을 천천히 감았다.인우는 완전히 멍해지더니 당황해진 표정으로 나미정을 바라보았다.나미정은 아주 침착하게 대답했다.“별일 아니야, 피곤해서 그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