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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공식 석상에 나설 수 없다

저녁 8시.

하영은 정리한 스케줄을 정유준에게 보냈다.

머리가 깨질 듯한 두통이 오기 시작했다. 하영은 관자놀이를 누르며 회사를 나섰다. 허시원이 차 옆에 서서 자신을 대기 중이었다.

하영을 본 허시원은 앞으로 다가와 말했다.

“사장님께서 하영 씨가 편히 쉴 수 있도록 난원으로 모셔다드리라고 했습니다.”

하영은 거절했다.

“아니요, 제집으로 갈게요.”

“강 비서님, 제가 이런 말을 해도 될지 모르겠는데…….”

하영은 힘없이 대답했다.

“사장님께서는 강 비서님이 몸이 안 좋다는 것을 알고 비서님 돌볼 이모님을 구했어요. 지금 난원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영이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 대체 나랑 뭐 하자는 것일까?’

‘첫사랑과 함께하면서 나랑도? 둘 다 갖겠다는 거야 뭐야?’

하영의 마음이 복잡해졌다. 아무리 그래도 다른 여자와 한 남자를 나눠 가질 만큼 비천하지는 않다.

하영이 입을 열어 다시 거절하려 하자 허시원은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었다.

“강 비서님, 양다인 씨의 위치는 정해지지도 않았습니다. 싸워 보지도 않고 먼저 포기할 생각인가요?”

하영은 속마음과 다르게 겉으론 냉소적으로 웃었다.

“허 비서님, 지금은 감정보다 돈이 중요한 세상이에요.”

이렇게 한마디 내뱉고, 하영은 허시원을 돌아서 떠났다.

허시원은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차에 올라, 뒷좌석에 앉아 있는 유준을 바라보며 말했다.

“사장님, 강 비서는 돌아가고 싶지 않답니다.”

정유준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는 냉정하게 말했다.

“그럼 이제 다시는 별장으로 돌아올 필요 없어! 내일 강 비서 물건 모두 갖다 줘버려.”

“……네.”

……

다음날.

노크 소리가 하영을 깨웠다.

하영이 무거운 몸을 이끌고 문 앞으로 나갔더니, 허시원이 큰 종이박스 두 개를 들고 서 있는 것을 보았다.

박스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예상하는 하영은 잠시 침묵한 뒤 허리를 굽혀 상자를 집안으로 들여놨다.

박스를 집안으로 다 옮긴 뒤 하영은 덤덤한 말투로 말했다.

“허 비서님, 감사합니다. 집에 대접할 게 없네요. 조심히 가세요.”

허시원이 입을 뻥긋하기도 전에 하영은 문을 꽝 닫았다.

허시원은 난원으로 돌아와 소파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유준에게 보고했다.

“사장님, 물건은 이미 돌려보냈습니다.”

유준은 아무 말없이 커피를 마시며 계약서를 보고 있었다.

참다못한 허시원은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사장님, 강 비서가 사는 곳은…….”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정유준의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스피커폰을 통화 버튼을 누르자 핸드폰 저편에서 양다인의 경쾌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유준 씨, 오늘 점심에 우리 나가지 말고 집에서 먹어요. 내가 맛있는 거 만들었어요.”

유준의 표정이 다소 부드러워졌다.

“뭐 맛있는 걸 만들었을까?”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허시원은 갑자기 강 비서가 별장으로 돌아오지 않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전화를 끊은 유준은 허시원을 바라보며 물었다.

“양다은 자료는 어떻게 되었어?”

“이미 양다은의 부모와 연락이 닿았습니다. 곧 소식이 있을 것입니다.”

정유준은 미심쩍게 생각했다. 양다인이 비록 그때의 일은 얼추 비슷하게 얘기하지만, 지금 그녀의 성격은 기억 속의 그녀와 확연히 달랐다.

요 몇 년 동안 그녀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싶었다.

……

하영은 평소처럼 시간 맞춰 회사로 출근했다. 비서실에 들어가는 순간 유리창문을 통해 유준 사무실에 양다인이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마침 양다인도 고개를 들었다. 둘의 눈이 마주쳤다.

양다인의 눈가엔 웃음이 가득했다. 하영이 출근하는 걸 보곤 보온도시락을 갖고 사무실로 왔다.

“강 비서님, 이거 드세요.”

하영의 시선이 도시락통에 머물렀다. 그러고는 담담하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부팀장님. 저는 이미 먹었어요.”

양다인은 못 들은 척하며 도시락을 내려놓았다.

이어 하영 앞에 앉아 그녀의 귓불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정말 공교롭네요. 우리 둘 다 붉은 반점이 하나씩 있네요.”

하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양다인의 뜻을 이해했다.

양다인은 두 손으로 뺨을 괴고 달콤하게 웃으며 말했다.

“강 비서님, 내가 유준 씨랑 사귄 지 얼마 안 되어서 유준 씨 취향을 잘 모르는데…… 혹시 팁이라도 좀 알려줄 수 있나요?

하영은 자료를 정리하던 손을 멈추었다.

“직접 물어보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양다인은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말 아쉽네요. 유준 씨에 대해 좀 더 알고…… 나중에 유준 씨한테 서프라이즈 이벤트도 해주려고 했는데…….”

하영은 몸을 곧게 펴고 양다인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저는 두 분 사이의 일에 관심이 없습니다.”

말이 끝나자, 하영은 손목시계를 보고 말했다.

“부팀장님, 사장님께서 부팀장을 직접 스카우트하셨으니 낙하산소리 안 듣게 일을 좀 더 열심히 하셔야겠어요. 직원들이 사장님 뒷담화하지 않도록 말이에요.”

양다인의 얼굴에 웃음기는 사라지고 눈가엔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감히 정유준 믿고 나한테 대들어?

양다인은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는 천천히 일어섰다.

“강 비서님 하나만 기억하세요. 짝퉁은 짝퉁일 뿐, 절대로 공식 석상에 나설 수 없다는 걸요!”

말을 마친 양다인이 문을 박차고 나갔다.

……

저녁 무렵.

퇴근한 하영은 병원으로 달려갔다.

공교롭게도 부진석이 병실 입구에 서서 간호사와 뭔가를 얘기하는 것을 봤다.

하영이 담담하게 부진석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병실로 들어가려고 할 때 부진석이 그녀 앞을 막아섰다.

“하영 씨, 어머니 어젯밤에 항암치료 마치고 이제 막 잠들었어. 안 들어가는 게 좋겠어요.”

그러자 하영이 물었다.

“이미 5차 항암치료 끝났는데…… 우리 엄마 어디 안 좋은 거예요?”

부진석은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수술도 잘 됐고, 회복도 예상보다 빠르니까요.”

하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치료비 얼마나 남았죠?”

부진석은 의아하다는 듯 말했다.

“하영 씨 어제 예치금 1억 넣지 않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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