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탁에 앉자 임씨 아주머니는 하영에게 방금 끓인 닭고기 수프 한 그릇을 가져다주었다.닭고기 기름이 둥둥 떠 있는 것을 보니 속이 울렁거렸다.갑자기 구토감이 확 몰려왔다. 하영은 급히 화장실로 달려갔다.이 장면을 본 임씨 아주머니는 제자리에 멍하니 있다가, 곧 놀라움과 기쁨의 기색이 얼굴에 나타났다.하영이 창백한 얼굴로 돌아오자, 임 씨는 웃으며 물었다.“아가씨, 혹시 요즘 생리가 늦어지는 건 아닌가요?”하영은 나른한 듯 탁자 위의 찻잔을 집어 들었다.“생리가 불규칙적이어서…… 잘 모르겠어요.”“저기…… 내가 봤을 때는 임신인 거 같은데?”하영은 갑자기 손동작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놀란 표정으로 아주머니를 쳐다보았다.“임…… 임신요?!”임 씨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이따가 나가서 테스트기를 사다 줄 테니까, 테스트해보면 알 수 있어요.”하영은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이모님, 저와 사장님은 줄곧 피임을 해왔어요. 최근 위가 좋지 않아 그런 걸 거예요. 임신은 불가능해요.”아주머니는 다소 아쉬워하는 눈빛이었다.“그럼 소화가 잘되고 위에 부담 안 되는 요리를 만들어 줄게요.”하영은 복잡한 마음을 가다듬고 고개를 끄덕였다.“아, 맞다, 이모님, 제 속이 불편하단 건 유준 씨에게 말씀하지 마세요.”“사장님…… 사실 아가씨 걱정 정말 많이 하는데…….”하영은 웃으며 말했다.“저도 알고 있어요. 유준 씨 매일 바쁘잖아요. 괜히 저 때문에 신경 쓰이게 하고 싶지 않아요…….”저녁을 먹은 후, 하영은 급히 위층으로 올라갔다.그녀는 사실 정말 임신인지 아닌지 확실하지 않다.그날 밤 차에서는 확실히 아무런 피임 조치를 하지 않았다.하영은 불안한 듯 손으로 아랫배를 어루만졌다.만약 정말 임신했다면, 이 아이는 낳아야 할까?오피스 와이프가 임신한 아이, 정유준은 틀림없이 원하지 않을 것이다.갑자기 몰려온 불안으로 하영은 침실에서 왔다 갔다 하며, 외출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었다. 꼭 임신 여부를 확인해야했다.……밤 10
“당장 지워! 내가 왜 네 아이의 아빠야? ……구역질이 난다!”산부인과 앞에서 남자의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하영은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여자가 남자의 옷자락을 잡고 울며 애원하고 있었다.“낙태가 여자 몸에 얼마나 나쁜지 알아? 사람이 왜 이렇게 모질어?”“네 몸뚱어리가 내 꺼야? 나랑 뭔 상관인데?”커플의 다툼소리를 듣는 순간, 하영의 머릿속에 유준의 냉정한 얼굴이 떠올랐다.그녀는 단지 유준의 이부자리를 데워주는 ‘도구’일 뿐이다.유준은 배속의 아이를 쉽게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갑자기 그 남자의 얼굴에 유준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덜컥 겁이 난 하영은 핸드폰 전원을 꺼버렸다. 먼저 기회를 봐서 정유준의 의중을 파악해 봐야 한다.하영은 임신확인서를 가방에 넣은 뒤 불안한 마음을 안고 엄마의 입원 병동으로 향했다.그녀는 어머니의 병실 앞에서 한참이나 마음을 가라앉히고서야 문을 밀고 들어갔다.양운희는 사과를 먹고 있었다. 하영이 오는 것을 보고 환하게 웃었다.“하영이 왔어?”하영은 양운희의 침대 옆에 앉아 다정하게 물었다.“엄마, 저 방금 출장 다녀왔어요. 오늘은 안색이 좀 괜찮은 것 같아 보여요.”양운희의 기분은 말처럼 좋아 보였다.“네가 출장 가 있는 동안 부진석 선생님께서 잘 챙겨 주셨어.”하영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엄마, 의사 선생님도 일이 바쁘시니까, 너무 폐 끼치지 말아요.”“나, 안 바쁜데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부진석의 온화한 목소리가 병실 입구에서 들려왔다.하영은 얼굴의 미소를 가라앉히고 고개를 들었다.그리고 일어서서 감사를 표했다.“선생님, 우리 엄마 잘 돌봐 주셔서 감사합니다.”“우리 사이에 무슨 그런 말을 해요. 그럴 필요 없어요.”부진석의 지나친 친절은 오히려 양운희로 하여금 헛된 생각을 하게 했다.안 그래도 하영이 결혼해야 할 나이가 다 된 것에 양운희는 걱정하고 있었다.“하영아, 너 점심에 시간 되면 선생님께 식사라도 한 끼 대접해 드려.”하영은 간곡히 거절하려
허시원은 차 옆으로 가서 하영이 차 문 여는 것을 도왔다.차문이 열리는 순간, 하영은 차 안에서 차가운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는 것을 분명히 느꼈다.명치가 가라앉는 듯 가슴이 철렁했다. 귓가에는 정유준의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들어와!”하영은 침을 삼키며, 긴장한 표정으로 차 안으로 들어갔다.제대로 앉기도 전에 정유준은 손을 들어 하영의 턱을 쥐었다. 고개를 들며 분노에 찬 눈동자로 하영을 쳐다봤다.그는 금방이라도 하영을 잡아먹을 듯, 이를 악물며 소리쳤다.“강하영, 너 내 말을 전부 귓등으로 들었어?!”하영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서 해명하기 바빴다.“사장님, 방금 본 게 다가 아니라…….”“그럼 뭔데?” 정유준은 그녀의 말을 끊었다.“나는 내가 본 것만 믿어!”한마디 할 때마다 정유준의 손에 힘이 더 들어갔다.하영은 너무 아픈 나머지 눈가에 눈물이 맴돌았다.어떻게 설명해야 정유준이 믿을까?아니면 아무리 설명해도 다 헛수고일까?그가 본건, 결코 사실이 아니다.정유준은 한참 하영을 쳐다보았다.그녀가 고분고분한 요령을 터득한 줄 알았다.그래서 어젯밤 그녀의 외출을 허락하였다. 또 혼자만의 외출도.그런데…… 그의 믿음을 이렇게 짓밟아 버리다니…….“말해봐!!”정유준은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 그의 표정은 하영으로 하여금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두렵게 만들었다.하영은 눈가에 맴도는 눈물을 꾹 참았다. 감정을 억누르고 그에게 물었다.“그럼, 당신은?”정유준은 ‘이 여자가 왜 이래?’ 라는 표정으로 눈썹을 찡그렸다.“정유준, 당신이 이렇게 화를 내는 이유가 뭔데? 니 체면이 서지 않아서? 아니면 너의 강한 집착 때문에?당신은 첫사랑만 찾아다녔으면서, 한 편으론 나를 붙잡고 놔주질 않고 있자나…… 이런 양다리가 어딨어? 한 번이라도 내 마음이 어떨지 생각해 본 적 있어?”“무슨 네 생각?” 유준은 계속해서 하영에게 비수와 같은 말들을 내뱉었다.“강하영, 넌 오피스 와이프야. 나한테 네 생각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아. 넌 그럴
하영은 양다인의 계략에 아랑곳하지 않고, 두 사람 맞은편에 앉아 침착하게 밥을 먹었다.양다인은 난처한 듯 정유준을 바라보았다.“유준 씨, 내가 여기 와서 강 비서님 기분이 언짢은 거 아니야?”“뭔 상관이야?” 정유준은 앉으라며 손을 잡았다.양다인은 영리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하영에게 한마디 던졌다.“강 비서님, 지난번 일은 괜찮아. 너무 자책하지 말아요. 내가 다리에 힘이 풀려서 그랬어.”말하면서 눈시울을 붉혔다.“나한테 화 그만 내면 안 될까?”양다인의 말을 듣고 있자니 하영은 구역질 나는 쓰레기를 보는 것 같았다.겨우 메스꺼움을 참고 있는데, 이번에는 정말 토할 것 같았다.하영은 눈을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나는 누구처럼 좀생이가 아니에요.”하영의 말을 듣고 양다인은 젓가락을 힘껏 쥐었다.그러나 연기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그녀는 분노를 처량한 비련의 여주인공으로 바꾸는 연기를 선보였다.“아니, 아니야, 강 비서님, 그런 뜻 아니야.난 단지 앞으로 우리가 유준 씨 곁에 있으려면 서로 오해를 풀고 사이좋게 지내는 게 좋을 거 같아서…….”양다인은 말을 마치자마자 눈물을 흘렸다.두 입술을 파르르 떨며 고개를 숙이고 목멘 소리로 계속 말을 이었다.“유준 씨, 내가 괜히 와서 두 사람의 식사 분위기를 망친 거 같아. 미안, 미안해…….”정유준은 불현듯 짜증이 올라왔다. 하지만, 담담한 어조로 위로했다.“대화가 안 되는 사람과 얘기하면 속이 답답하고 원래 그래. 그러니까 그냥 신경 쓰지 말고. 밥 먹이나 먹어.”정유준이 나서서 편을 들자, 양다인은 득의양양했다. 반면 하영은 속이 쓰렸다.유준의 눈에 자신은 악독한 여자다.양다인의 착한 척하는 연기는 완벽했다.하영은 입안의 음식이 마치 모래알 같아서 목구멍으로 넘기기도 어려웠다.식사 후.정유준은 회사 업무로 인해 별장을 나왔다.하영은 주방으로 가서 임 씨 아주머니께 과일을 좀 부탁하려고 했다.자리에서 일어나자 양다인의 조롱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가정형편이 안
정적을 깨는 요란한 휴대전화 소리.아버지한테서 걸려 온 전화 란 걸 확인한 하영은 자기도 모르게 미간에 힘이 들어갔다.그녀는 휴대전화를 쥐고 발목의 아픔을 참으며 빠른 걸음으로 주방으로 가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 하영의 목소리가 무거웠다.[하영아, 아빠다. 넌 어찌 아빠한테도 전화 한 통도 없니?]“아빠가 저를 차단했잖아요. 빚쟁이들이 저를 이용해 아빠 찾아 낼까 봐…… 잊으셨어요?”강성문은 어색하게 두 번 웃었다.[허허, 아빠가 깜빡했네. 미안하구나. 그나저나 지금 어디에 있니?]“야근 중이에요.”[오오, 야근하면 야근수당도 나오니…… 잘됐네. 돈도 많이 벌고…… 좋은 일이야! 그런데 하영아, 너 지금 혹시 수중에 돈 좀 있니?]하영이 컵을 꽉 움켜잡았다. 강성문은 돈 문제 말고, 다른 일로 연락한 적이 거의 없다.지난번에 자신을 카지노에 버리고 도망간 일을 설마 이렇게 빨리 잊었단 말인가?하영은 말투가 딱딱하다.“없어요! 있던 돈 모두 빚 갚았는 걸요!”[몇 만원도 안 되겠어? 하영아, 설마 몇 만원도 없는 건 아니겠지?] 전화기 너머로 강성문의 다급한 목소리가 전해졌다.하영은 가슴이 씁쓸했다.“아빠, 이렇게 저를 막다른 길로 몰아넣어야겠어요? 엄마 병원비를 한 번이라도 댄 적 있어요? 아빠 도박 빚도 제가 다 갚았잖아요. 대체 뭘 어쩌라는 거예요?”[어떻게 말을 그렇게 서운하게 하니? 너를 지금껏 어떻게 키웠는데……너 돈 좀 번다고 아빠한테 유세 떠냐?]하영은 코를 훌쩍이며 애써 서운한 감정을 억누르느라 힘들었다.“이젠 정말 돈이 없어요. 다음 달에 다시 이야기해요.”[잠깐, 잠깐!]다급한 강성문은 하영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하영아, 나 지금 당장 돈이 필요해. 너 돈 안 주는 면 진짜 양심이 없는 거다!]하영은 화가 나서 몸을 부르르 떨었다.“또 도박하고 싶어 손이 근질근질한가 봐요. 지난번의 교훈으로는 부족했나요?”[너 그런 식으로 말 할 거야?] 강성문이 버럭 소리쳤
흰 가슴살은 누구에게 보여주려고?“…….”전에도 이렇게 입었는데, 오늘은 왜 또 갑자기 안 되는 거야?정유준에게 따지는 것도 귀찮아, V형의 등이 드러나는 흰색 롱 드레스로 갈아입었다.그러나 드레스를 갈아입은 모습을 본 정유준의 표정은 ‘더욱 별로’라고 말하고 있다.하영의 몸에서 가장 매력적인 부위가 바로 등이다. 가늘고 곧게 벌어진 나비 모양의 어깨뼈가 아름다움을 더했다.매번 침대에서도 그의 가장 원초적인 성적 충동을 일깨우던 부위이기도 하다.그 아름다움은 자신만 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렇게 입고 나가서 누구를 꼬시려는 거야!?유준은 일어나 드레스를 진열해 놓은 곳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몇 벌 중에서 가장 보수적이면서 하영의 분위기를 완벽하게 연출할 수 있는 인디안 핑크색 롱 드레스를 골랐다.하영이 드레스를 갈아입고 나왔다. 파인 곳이 없다. 노출도 없다. 그제야 만족스럽다는 듯 그녀를 데리고 차에 올랐다.차에 앉자 정유준은 신발 박스를 건네주었다.하영은 의아한 듯 그를 쳐다보았다.“저에게 주시는 건가요?”정유준은 그녀를 힐끗 보았다.“설마 허시원에게 주겠어?”운전하는 허시원은 백미러를 통해 둘을 살폈다.“…….”신발 박스를 받아 열어보니 둥근 코의 은색 작은 하이힐 한 켤레가 눈에 들어왔다.그녀는 의식적으로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자기 발목을 슬쩍 보았다. 그래도 유준이 나름 자신에게 신경 쓰고 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유준이 다친 것을 아직 기억하고 있다는 뜻이다.……선샤인 호텔.정유준이 하영을 데리고 로비에 들어서자, 누군가가 마중을 나왔다.“정 사장님, 오랜만입니다. 별고 없으시죠!”“정 사장님도 오늘 경매에 오셨군요…….”다가오는 사람이 갈수록 많아지자, 하영은 두 걸음 뒤로 물러섰다.비록 이런 장면에 익숙하지만, 지금은 예전과 달리 다른 사람과 배가 부딪칠까 봐 두려웠다.그래서 정유준의 팔짱을 풀고 말했다.“화장실 좀 다녀올게요.”정유준이 고개를 끄덕이자, 하영은 자리를 떴다.
명함을 받고 하영은 스스럼없이 말했다.“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먼저 가보겠습니다.”하영이 떠날 때까지 소예준의 시선은 하영을 떠날 줄 몰랐다.닮았어…… 너무 닮았어…….“오빠!”소희원의 앙칼진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소예준은 고개를 돌렸다.하영의 뒷모습을 우두커니 바라보는 소예준을 본 희원은 짜증이 몰려왔다.“오빠! 오빠도 저 불여우한테 넘어간 거야? 왜 계속 쳐다보고 난리야?”희원이 또 욕설을 퍼붓는 것을 듣고 소예준은 눈살을 찌푸렸다.“넌 어찌 아직 명문가 규수의 모습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니?”“오빠도 저 여우한테 반한 거 아니야? 왜 계속 저 여자 편만 들고 그래?”……더 이상 불필요한 일에 휘말리지 않도록 하영은 유준 곁에 가 머물기로 했다.그의 곁에 앉자마자 유준은 하영의 창백한 얼굴을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왜? 어디 안 좋아?”하영은 대충 얼버무렸다.“좀 답답해서요.”정유준은 담담하게 시선을 거두었다.“이따가 마음에 드는 물건 있으면 알려줘.”이런저런 거추장스러운 물건에는 별로 흥미가 없는 하영은 그냥 말을 아끼기로 했다.몇 분 뒤, 사회자가 오늘 밤 경매의 시작을 알렸다.첫 번째 경매품이 나왔을 때, 정유준의 휴대전화도 진동하기 시작했다.양다인의 전화인 것을 확인하고, 즉시 통화버튼을 눌렀다.“유준 씨, 어디야? 제발…… 나 좀 도와줘! 살려줘……!”공포에 질린 양다인의 목소리가 휴대폰 너머로 흘러나왔다. 옆에 앉아 있던 하영 귀에까지 들렸다.정유준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왜 그래? 무슨 일이야?”“누군가가 나를 미행하고 있어…… 유준 씨, 나 너무 무서워…….”정유준은 재빨리 일어섰다“위치 확인해서 나한테 보내. 전화 끊지 말고, 바로 갈게!”말을 마친 유준은 하영을 바라보며 명령조로 얘기했다.“가자!”“…….”두 사람의 애정 문제에 왜 굳이 나를 데려가려 할까?……가는 내내 하영의 귓가에 양다인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차 안의 분위기도 착잡했다.고개를 돌려 보니 정유준의 미
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었더니 얼굴이 시뻘건 강성문이 몸을 비틀거리며 병실로 들어오는 게 보였다. 술에 취한 게 분명했다.강성문은 하영도 있는 것을 보고 얼굴에 즉시 웃음기를 띠었다.“아, 우리 하영이도 있었네!”양운희는 강성문을 노려보며 날카로운 말을 했다.“여기 뭐 하러 왔어?! 나가요!!”하영은 얼른 일어나서 양훈희를 다독였다.“엄마, 화내지 마세요. 수술 마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렇게 화내시면 몸에 안 좋아요.”강성문은 입을 삐죽거렸다.“돈 좀 줘라…… 그러면 갈게!”하영은 갑자기 고개를 들어 강성문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아빠, 엄마 아직 병상에 누워 있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엄마한테 돈을 내놓으라고 해요?”강성문은 하영을 노려보았다.“너희 엄마는 네 돈으로 편안하게 병원에 누워 있는데, 나는? 집도 절도 없이, 오갈 데도 없고…… 매일 길거리에서 자는 거 모르지?”순간 강성문은 자신이 한 말실수를 깨닫고는 얼른 입을 다물었다.하영과 양운희 두 사람은 분명히 들었다.양운희는 인간에게 질려 버린 듯 강성문을 가리키며 큰 소리로 말했다.“당신, 방금 뭐라고 했어? 집? 집으로 뭐했는지 당신이 제일 잘 알 텐데!”강성문은 배 째라는 식이었다.“빚 갚았다. 됐냐?”“정말 너무하네…… 어찌 인간의 탈을 쓰고 그럴 수 있지…….”“아…… X발, 내가 네 돈 썼어?!”하영은 두 사람이 싸우는 모습을 물끄러미 보면서 머릿속이 텅 비었다.3년.아버지의 빚을 짊어진 지 꼬박 3년이다.어머니에게 작은 보금자리라도 만들어 드리려고 집을 장만했는데…… 지금은 모두 사라지고 아무것도 없다.하영의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왜?” 그녀는 중얼중얼 입을 열었다.말다툼하던 강성문은 초조하게 하영을 바라보았다.“뭐가? 왜?”“왜 아빠는 이렇게 자기밖에 몰라요? 어찌 나와 엄마는 눈곱만큼도 생각하지 않아요?”하영이 물었다.“너랑 네 엄마 생각해서 집을 판 거야…… 내가 빚을 갚아야…….”“빚이요?”하영은 쓴웃음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