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자전거가 아니라 스쿠터이고 페달을 밟고 있는 남자는 임재욱이며 뒷좌석에 앉아 있는 유시아다.거의 비슷해 보이지만 떠올렸던 그때 그 시절과는 완전히 다른 화면이다.두 사람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산이 있기 때문이다.제법 신이 난 모습인 임재욱은 틈새 유시아에게 뭐라고 말하기까지 했다.다만 바람 소리가 너무 강하고 양쪽에 차가 수없이 지나가서 유시아는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소리 높여 다시 물어보았는데.“뭐라고 그랬어요?”임재욱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실은 조금 전에 유시아에게 기쁘냐고 물었었는데, 정작 물음을 던지고 나서 자신이 하찮아 보였다.그래서 더 이상 질문하지 않고 어느 한 식당 앞에 멈춰 섰다.저녁을 먹고 나서 근처 백화점으로 향해 임태훈의 선물을 고르려고.미대생이라 보는 안목이 자기보다 낫다고 판단하면서 일부러 유시아를 데리고 가려는 것이었다.집사한테서 들은 바에 따르면 임태훈은 요즘 어메랄드에 빠져 있다고 한다.임재욱은 유시아를 데리고 쥬얼리 가게로 들어가 어메랄드 장식품과 공예품을 보기 시작했다.진열대 앞에 선 유시아는 어메랄드 배추와 어메랄드 말을 한 손에 하나씩 들고서 비교하려고 했는데 점차 넋이 나가버렸다. 5년 전 그날이 떠오르면서.그때 그녀는 임재욱의 여자 친구로 댁으로 방문을 했었다.임태훈에게 선물로 드렸던 금실 녹나무 지팡이가 있었는데 해외에 있는 친구를 통해 특별히 공수해 온 것이었다.극히 보기 드문 귀중한 물건으로 임태훈 역시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 했었다.임태훈은 자상하고 다정다감한 어른으로서 유시아와 자주 연락도 했었다.아랫사람한테 지시까지 내려 유시아에게 임씨 가문 고택을 소개해 주었고 임청아와 사이좋게 지내라고 거듭 당부도 했었다.5년이 흐르고 다시 임재욱의 여자 친구로서 임태훈 앞에 서게 될 것인데, 그 역시 내심 감탄하리라 생각이 들었다.칠순 잔치에 유시아가 모습을 드러내게 되면 임태훈이 얼마나 언짢아하고 노여워하며 어찌할 바를 몰라 할 것인지 감히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손
어메랄드 조룡을 임태훈의 선물을 고르고 나서 직원에게 맡겼다.직원은 곧바로 예쁜 포장 상자를 가지고 와서 정성스레 포장하고 끝으로 리본까지 예쁘게 묶었다.임재욱은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들면 입을 여는데.“조금 전에 그 팔찌도 같이 포장해 주세요.”그 말에 유시아는 고개를 들어 그를 한 번 보았으나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모든 걸 다 준비하고 나서 두 사람은 함께 그린레이크로 돌아왔다.거실에 들어서자마자 일 층에서 자유로이 움직이고 있던 뭉치가 달려와 주인을 마주했다.유시아는 질척거리는 뭉치를 아주 손쉽게 피해 갔고 바로 위층으로 올라가 샤워하려고 했다.마지막 계단을 딛는 순간 허씨 아주머니와 당부하고 있는 임재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앞으로 함부로 돌아다니지 못하게 신경 써 주세요. 특히 시아가 집에 있을 땐 절대 나오지 못하게 하시고요.”유시아는 멈칫거렸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마지막 계단을 디뎠다.욕실로 들어가 바로 샤워를 하고 타일을 둘러싸고 거울 앞에 앉아 머리를 말리려고 했다.바로 그때 임재욱이 문을 열고 들어와 헤드 드라이기를 빼앗아 가더니 대신 머리를 말려줄 생각이었다.의아하기는 했지만, 유시아는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두었다.눈을 가늘게 뜨고 열심히 머리를 말리는 임재욱의 모습이 서서히 시야로 들어왔다.물기 하나 없이 완전히 말리고 나서야 임재욱은 드라이기 전원을 꺼버렸다.“그 어메랄드 팔찌 마음에 안 들어?”“네.”“완전 마음에 안 들어요.”“하지만...”임재욱은 머뭇거리다가 길쭉한 손가락으로 유시아의 머리카락을 천천히 빗겨주면서 말했다.“근데 전에는 액세서리에 환장했었잖아. 왜 갑자기 싫어진 거야?”유시아가 액세서리를 마다한 적이 없다고 기억하고 있다.남운대에 다닐 때도 유시아는 늘 팔에 팔찌 목에 목걸이 여러 악세서리를 매칭하여 착용하기도 했었다.타지로 여행을 갈 때도 언제나 여러 디자인의 액세서리를 꼭 챙겨오곤 했는데.그때 발에 실버로 된 발찌도 했었고 그 발찌에는 작은 방울이 달려 있어
말하다가 점점 격동한 나머지 유시아는 숨도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겨우 마음을 추스르고 한참 지나서 다시 입을 여는데.“지금 또다시 나를 5년 전으로 데리고 가고 있잖아요.”임재욱이 오늘 내내 보였던 부드럽고 자상한 모습과 임태훈의 선물을 고르러 가던 장면에 칠순 잔치를 준비하는 장면까지...모든 것이 5년 전 그 상황과 겹치면서 아프게 했다.그렇게 모든 걸 ‘우연의 일치’로 만들어 놓고 뻔뻔하게 어떻게 하면 잊을 수 있겠냐고 윽박지르고 있다.만약 숨을 수만 있다면 다시는 임재욱을 보지 않아도 된다면 그 기억이 점점 옅어질 수도 있다.하지만 그건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유시아는 임재욱을 바라보면서 갑자기 차갑게 씩 웃다가 일어서서 침실로 향했다.바로 침대에 누워 이불 속으로 자신의 모습을 꼭꼭 숨겨 버렸다.홀로 욕실에 남겨진 임재욱은 한참 지나고 나서야 벽을 붙잡고 정신을 차릴 수가 있었다.무척이나 피곤한 듯 머리를 어루만지면서.한동안 그 자세를 취하고 다시금 깊은 생각에 빠졌다.기나긴 생각 끝에 그는 마침내 몸을 돌려 두 사람만의 침대로 돌아갈 수 있었다.침실 안에는 커튼이 반쯤 가려져 있다.몽롱한 달빛 아래서 임재욱은 유시아의 뒤통수와 부드러운 머릿결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망설인 끝에 그는 그녀의 짤록한 허리를 살포시 감싸 안아 품으로 슬며시 끌어당겼다.이윽고 귓가에 천천히 뽀뽀를 하면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일 다 끝나고 시간 나면 우리 여행갈까? 바쁘면 캠핑 가도 되고. 가서 마음껏 그림도 그리고 네가 가장 좋아하는 토실이도 데리고 가자.”감빵 생활을 했었던 유시아가 팔목에 액세서리를 하는 것은 싫어할 수 있어도 자유를 마다할 리가 없다고 여겼다.하여 그러한 생각을 하면서 계획을 세우게 된 것이다.유시아는 가볍게 대답만 했는데, 그의 의견에 따르겠다는 건지 아닌지 아리송했다.임재욱은 그녀가 승낙했다고 받아들이고서 어깨에 가볍게 뽀뽀를 하면서 또다시 입을 열었다.“그 토실이 말이야, 그렇게 좋으면 집으로 데리고 와
눈치가 빠른 임재욱은 한서준의 일거수일투족을 한눈에 알아보았다.자기도 모르게 눈살이 찌푸려지면서 고개를 돌려 유시아를 바라보았다.유시아는 손에 가방을 들고서 고개를 푹 숙이고 걷고 있었다.하이힐까지 신은 바람에 그 어느 때보다도 조심해서 걸음을 옮겼다.임재욱은 입술을 살짝 사리물고 한서준에 대한 불만을 당장 털어놓을 수 없어 일단은 참기로 했다.방약무인으로 유시아를 임태훈 앞으로 데려오기까지 했는데.“할아버지께 인사드리려고 시아 데리고 왔어요.”유시아!익숙한 이름 석 자에 주변 사람들은 신경이 바로 곤두서게 되었다.순간 모두의 시선이 이쪽으로 쏠리기 시작했다.임재욱이 이혼을 하고서 전처랑 다시 만난다는 소문은 들었는데, 감히 어르신 칠순잔치에 데려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는 얼굴로 바라보았다.그 험한 길을 임재욱은 뒤돌아보지 않고 걸으려는 모습이다.주위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지자, 유시아는 고개를 살짝 떨구고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할아버지, 생신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부디 만수무강하시기 바랍니다.”임재욱은 몰래 유시아의 손을 꼭 잡았는데 응원하고 있는 듯했다.이윽고 뒤에 있던 강석호가 손에 들어 있던 정교한 박스를 건네주었다.임재욱은 그 박스를 받고서 공손하게 양손으로 임태훈에게 앞에 보였다.“이건 저와 시아가 함께 준비한 할아버지 생신 선물이에요.”임태훈은 허허 웃으며 양손으로 박스 위에 있는 리본을 풀고 뚜껑을 열었다.안에 들어 있는 어메랄드 조룡을 보고서 활짝 웃는데.“내가 요즘 어메랄드에 꽂혀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 이렇게 콕 집어서 선물해 주고 말이야.”임재욱은 겸허한 모습으로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다.“마음에 들어 하신다니 다행이에요.”기분이 좋아진 임태훈은 임재욱에게 유시아를 데리고 여기저기 구경하라고 했다.유시아에게 편하게 자기 집처럼 지내라고 하면서 말이다.무척이나 자상하고 다정다감한 어른으로 보였다.그러나 얼마 전 그의 지시로 정신을 잃어 당장 폭파될 위험 주택으로 버려진 그때
“할아버지께서도 두 사람 갈라놓으려고 애를 쓰셨지만 임청아가 끝까지 버텼어. 끔찍이 여기는 손녀가 별의별 방법을 다 내놓자, 할아버지도 더 이상 밀어붙이기 안쓰러웠던 거지. 그래서 지금은 서로 버티고 있어. 연애를 해도 뭘 해도 좋은 데 결혼은 절대 못 할 거야. 절대!”임재욱은 말하다가 고개를 흔들며 한숨까지 쉬었다.“임청아 저...”갑자기 말을 뚝 끊었는데 더 이상 말하면 안 될 것 같았다.한 여자가 누군가를 미친 듯이 사랑하고 있을 때 이는 그 남자에 대한 여자의 진심과 집착만을 증명할 수 있을 뿐 절대 그 누구든 그 여자를 비웃을 있는 이유가 되지 못한다.그때의 유시아처럼.사랑에 깊이 빠져 있는 그녀였지 미련한 것은 아니므로.유시아를 향해 웃으며 임재욱이 말했다.“저기로 가 보자.”그와 함께 여기저기 인사를 다니다가 지쳐버린 유시아는 잠시 쉴 곳을 둘러보고 있었다.그때 마침 짙은 블루로 된 슈트를 입은 남자가 그들을 향해 다가오면서 인사하기 시작했다.“ 임 대표님, 유시아 씨, 오랜만이에요.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임재욱은 남자의 정체를 확인하고 입가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오랜만이에요. 도승우 씨도 그동안 꽤 잘 지내셨나 보네요? 이렇게 멀쩡하게 걸어다니는 걸 보니.”도승우를 보자마자 낯이 익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유시아는 갑자기 생각이 나지 않았었다.임재욱이 비아냥거리며 입을 여는 순간 떠오른 것이다.정월 대보름 그날에 신서현의 스트립쇼에 대해 평가했다가 임재욱이 던진 술병에 맞아 하마터면 죽을 뻔한 그 남자라는 것을.그 뒤로 어떻게 됐는지 유시아는 신경 쓰지도 않았었다.며칠 동안 임재욱이 밤을 새워가며 일한 것 말고는 별다른 이상이 없었으니.‘그때 그렇게 원수처럼 대하더니 금세 또 가까워진 거야?’“유시아 씨, 오랜만이에요.”도승우는 임재욱과 말을 하다가 유시아에게로 말머리를 돌렸다.“듣기로는 유시아 씨께서 화실을 운영하고 계신다던데, 일반인이 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마침 우리 집에 그동안 수장해
정월 대보름 그날 클럽에서 도승우가 했던 말이 거짓말 같지는 않았다.신서현이 세상을 떠난 지도 여러 해가 지났는데 굳이 망자에게 구정물을 쏟을 필요가 없단 말이다.신서현에 대한 임재욱의 마음이 어느 정도로 깊은지 도승우도 모르고 있었기에 그가 뱉었던 말들에 대해 대가를 치르게 된 것이다.하지만 도승우 뿐만 아니라 심하윤도 신서현에 대한 평가가 좋지는 않았다. 극히 혐오하는 정도라고 표현할 정도로.두 사람 모두 연예계에서 인맥이 좀 있는 편인데, 그런 그들마저도 신서현에 대해 그러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는 건 신서현이 정말로 그렇게 살았다는 게 아닐지 하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전에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고 지금은 알고 싶어졌다.신서현에 대해서 임재욱이 대체 얼마나 알고 있는지.눈살을 찌푸리고 사색이 잠겨 있는 유시아의 모습을 보고서 임재욱은 그만 참지 못하고 물었다.“시아야, 왜 그래?”유시아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며 가볍게 웃었다.“별거 아니에요.”‘됐어! 이미 죽은 사람 두 번 죽이는 일이니 그만두자.’신서현이 어떤 사람이든 이미 죽은 건 사실이고 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졌다.그것도 유시아 아버지의 차에 깔려서.그냥 지금 이대로 임재욱이 생각하고 있는 신서현의 완벽한 이미지를 유지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유시아는 이 화제에 대해 더 이상 생각하고 말하고 싶지도 않아 잠시 임재욱과 함께 여기저기 인사를 하고서는 몰래 뒷문을 통해 클럽 뒤에 있는 정원으로 향했다.정운시의 봄은 다른 곳보다 좀 늦게 오는 편이다.지금 이 시기의 정원은 그 어떠한 아름다움도 보이지 않는다.유시아는 돌의자에 앉아서 들고 있던 가방을 열었다.하이힐에 시달린 발과 다리도 좀 쉴 겸 화장도 좀 고칠 겸.임태훈의 칠순 잔치에 하객들뿐만 아니라 기자들까지 우르르 몰려 들었다. 카메라 셔틀이 끊이지 않을 정도로.하도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던 바람에 유시아는 얼굴 근육이 뭉친 것만 같았다.쿠션 뚜껑을 닫는 순간 뒤에서 귀에 익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시아는 살짝 웃으며 입을 열었다.“그래요? 그럼, 미리 축하해요.”잠시 멈칫거리다가 다시 운을 떼기 시작했는데.“청아 씨는 좋은 사람이에요. 아주 단순하고 착한 사람이에요. 마약 청아 씨를 아내로 맞이할 수 있다면 그건 한 대표의 복일 거예요. 후회하는 일 없이 청아 씨를 진심으로 대하고 사랑해 줬으면 해요. 이건 진심이에요.”온갖 정성으로 한 여자에게만 올인하는 그런 사랑도 인제 드문 법이니.“말하지 않아도 그렇게 할 거였어. 죽을 때까지 사랑하고 지켜 줄 거야.”한서준을 말을 마치고 유시아의 두 눈을 지그시 바라보며 웃는 듯 마는 듯 물었다.“솔직히 말해서 사모님 자리가 너한테 아직 끌리기나 해?”유시아는 그런 그의 두 눈을 마주하며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웃었다.“미안합니다만 우리 사이에 그런 얘기를 나누기에는 아직 너무 이르다가 보는데요. 서로 고충을 털어놓는 사이는 아니잖아요.”돌의자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유시아는 자리를 떠나려고 했다.“먼저 실례할게요.”가방을 들고 다시 뒷문을 통해 클럽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그때 뒤에서 또다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는데.“강제로 끌려온 거지? 그렇지?”대답하지 않아도 답은 이미 나와 있었다.처음부터 끝까지 유시아가 보였던 웃음이 너무 어색했으니 말이다.한서준은 야생가의 사장으로서 그동안 수없는 사람을 만나왔었다.특히 여자와 가장 많이 접촉했는데 한 여자가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마지못해 기쁜 척을 하고 있는 것인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이치대로라면 명석한 임재욱도 당연히 알고 있으리라 믿었다.하지만 그는 자신을 잘 속일 수 있었던 것이다. 유시아는 진심으로 기뻐해 하고 있다고.유시아는 마침내 고개를 돌려 한서준을 바라보았다.“오지랖이 넓은 사람인 줄은 몰랐네요.”“오지랖이 넓은 게 아니라 비즈니스 하는 사람으로서 유시아 너랑 거래 하나 좀 할까 해서 그래.”한서준의 유시아의 안색을 천천히 살피다가 다시 운을 떼기 시작했다.“임 대표가 지금 널 강박하는 것도
그 말을 듣고서 한서준의 입가에 웃음이 새어 나왔다.“난 단 한 번도 내가 걔보다 얼마나 대단한지 생각해 본 적이 없어. 하지만 적어도 이번 거래로 넌 네가 원하던 자유를 얻을 수 있어.”도청기를 꼭 움켜쥐고 있는 유시아의 손을 살짝 두드리면서 덧붙였다.“급히 대답할 필요 없어. 천천히 기다릴게.”말을 마치고 바로 클럽 안으로 들어갔다.유시아는 꼭 쥐고 있던 손을 천천히 펼치면서 그 속에 가만히 누워있는 도청기를 보았다.망설인 끝에 버리지는 못하고 가방 안에 깊숙이 챙겨두었다.홀로 정원에 남아 머리를 좀 식히고 나서야 유시아도 클럽 안으로 다시 들어왔다.들어가자마자 로열블루 드레스를 입은 정유라가 정면으로 오고 있음을 보게 되었다.두 사람은 딱 마침 서로를 마주치게 되었다.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나는 법 피해 갈 수 없었다.실은 정유라도 올 것이라고 어느 정도 예측은 하고 있었다. 임씨 가문과 정씨 가문은 세세 대대로 교제를 이어왔고 그 두 사람이 이혼했을지라도 그 교제는 끊이지 않을 거라고.딱 마침 그 예측이 현실로 바뀌는 순간이었다.유시아는 아랫입술을 사리물고 그녀와 그냥 스쳐 지나가려고 했으나 정유라의 덤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유시아 씨, 축하드려요...”차갑고 악독한 눈빛으로 유시아를 바라보면서 비아냥거렸다.“이제 곧 다시 사모님 소리 듣게 될 텐데 기분이 어떠세요?”“미안합니다만 그쪽과 상관없는 일이고 사적인 일이니, 대답할 의무가 없다고 봅니다.”아무런 표정도 없이 유시아가 말했다.이윽고 계속 고개를 숙이고 클럽 안으로 들어갔다.이때 정유라는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확 잡아당기며 죽일 듯이 노려보는데, 한참 지나고 나서야 독이 가득 들어간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미리 경고하는데, 사모님 소리는 나만 들을 수 있어! 넌 절대 그 자리에 오르지 못할 거야!”유시아는 그런 정유라의 두 눈을 바라보다가 문득 임재욱 때문에 야생가 앞에서 자기를 납치하려고 했던 그때 그 모습이 떠올랐다.어쩌면 임재욱을 너무 사랑해서
늦은 밤, 유시아의 카카오톡을 받았을 때 임재욱은 병원에 있었다.신시연은 도우미의 도움을 받으며 진료실에서 여러 검사를 받았고 그동안에 임재욱은 밖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늦은 밤의 사립 병원이라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당직을 서는 의사 선생님과 간호사 외에 거의 사람이 없이 무척이나 쓸쓸해 보였다.임재욱은 복도를 한참이나 누비다가 의자에 걸터앉았다.유시아를 병원으로 바래다주고 돌아서는 길에 신시연의 전화를 받고서 오게 된 것이다.배가 아프다고. 당장이라도 죽을 듯이 아프다고.신시연은 며칠 전에 병원에서 여러 번 신체검사를 받았으나 해외에서 그러한 몹쓸 짓을 당하며 우울증과 부인병이 있는 외에 다른 수치들은 정상 범위 안에 있었다.그 말인즉슨,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재욱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신시연에게 남은 ‘가족’이라고는 임재욱 하나뿐이니 어찌 됐든 그녀를 잘 지켜야 하는 마음뿐이었다.그 누구에게도 다시는 상처를 받지 않게끔.바로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하여 임재욱은 그녀를 직접 병원까지 데리고 오고 의사 선생님 입에서 아무런 문제도 없다는 확답을 듣고 나야만 마음이 놓일 수 있다.애타게 검사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가운데 핸드폰 알림 소리가 울렸다.유시아가 보낸 카카오톡인데, 내용은 아주 간단했다.[보고 싶어요.]임재욱은 고개를 숙인 채 카톡 내용을 거듭 곱씹으며 유시아 사진으로 되어 있는 그녀의 프로필 사진을 바라보며 입꼬리가 주체하지 못하고 자꾸 올라갔다.‘내가 보고 싶어? 별거한 지 하루 만에 벌써 내가 보고 싶은 거야?’‘우리 시아 이제 제법 솔직하네.’핸드폰을 손에 꼭 쥐고 어떻게 답장할지 생각하고 있을 때 응급실 문이 열렸다.도우미 김향화가 얼굴에 핏기 하나 없는 신시연을 부축하고 걸어 나왔다.신시연은 디자인이 아주 심플한 데님 스커트를 입었고 윤기가 별로 없어 보이는 머리를 돌돌 말아 묶어 올렸다.무척이나 초췌해 보이는 것이 가여운 느낌도 물씬 풍기고 있어 기고만장했던 그
유리 구두를 품속에 꼭 안고 있는 유시아를 보고서 임재욱은 순간 이러한 생각이 들었다.참으로 달래기 쉬운 여자라는 것을.특히 결혼하고 나서 아주 살짝만 잘해주어도 유시아는 아주 오랫동안 기뻐하는 것만 같았다.유시아는 늘 임재욱 앞에만 서면 스스로 자세를 낮추고 자기를 낮은 위치에 놓는 데 습관 되어 있다.임재욱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정수리에 뽀뽀했다.“앞으로 매년 생일마다 예쁜 유리 구두 선물해 줄게. 어때?”“좋아요.”유시아는 말하면서 아주 유치하게 그를 향해 손가락을 내밀었다.“손가락 걸고 약속해요. 절대 어기지 않겠다고.”백화점에서 나온 두 사람은 일단 화실로 향했다.새로 구매한 공예품을 적당한 자리에 올려놓고 유시아의 제안으로 이채련의 병원까지 바래다주었다.유시아는 자기가 뱉은 말은 어떻게든 지키는 타입이라 이채련과 이미 약속했으니 꼭 지켜야 했다.하물며 자식도 없는 이체련에게 마지막 이 시간들이 더더욱 외로울 것이다.외부인들이 보기에도 불쌍할 정도로 외롭다.임재욱이 아무리 말해도 소용이 없었고 이채련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없다고 하니 마음은 내키지 않았지만 보내주었다.차는 곧 사립 병원 앞에 멈춰 섰고 임재욱은 차에서 내리지 않았다.유시아는 차창에 대고 거듭 강조했다.“유리 구두랑 드레스들 옷방에 고이 모셔두도록 해요. 마구 놓지 말고요.”“알았어.”임재욱은 말하고서 손을 내밀어 그녀의 목을 확 잡고서 찐한 키스를 남기고 나서야 순순히 놓아 주었다.“얼른 가 봐.”“조심해서 가요.”임재욱은 조수석에 앉아 한결 가벼워진 그녀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보고서야 시선을 거두고 집으로 향하려고 했다.가는 길에 갑자기 신시연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오빠, 배가 너무 아파요.”...병실로 돌아와 보니 이채련은 아직 자고 있지 않았다.침대에 멍하니 누워 재미가 일도 없는 예능 프로를 보고 있었다.유시아가 문을 밀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이채련은 놀라고도 기뻤다.“시아야, 늦은 시간에 웬일이야?”유시아
쇼핑은 늘 설레는 일이다.유시아는 자기 취향대로 화실 장식품으로 쓰일 공예품을 골랐다.이윽고 임재욱은 또 유시아를 데리고 근처에 있는 매점으로 향했다.지난번에 두 사람은 함께 쇼핑하면서 많은 옷을 샀었지만, 신서현 부모님께 갑작스러운 상황이 일어나면서 유시아는 그 모든 옷을 모조리 청소 아주머니에게 줘 버렸다.그때의 아쉬움을 채워주기 위해 임재욱은 또다시 쇼핑하려고 한 것이다.게다가 다음 주면 대우 그룹 상장 20주년이다.정식적인 석상에 모습을 드러낼 때 유시아를 자기 아내 신분으로 남에게 소개해 주고 싶어 이브닝 파티에 어울릴만한 드레스와 신발을 살 예정이다.드레스는 그럭저럭 큰마음이 가지 않았는데, 유시아는 그 신발이 마음에 들었다.은백색의 하이힐로 예쁜 보석들로 가득 박혀 있어 매점 불빛 아래서 유난히 반짝이는 것이 신데렐라 동화에 나올 법한 유리 구두 같았다.매점 직원은 유시아가 마음에 들어 하는 것을 보고 바로 다가왔다.“손님 안목이 참 좋으시네요. 이 제품은 저희 디자이너 선생님의 최신 디자인으로 지금 딱 한 켤레만 있습니다. 만약 이 신발을 신고 나가신다면...”임재욱은 갑자기 직원의 말을 끊어버렸다.“이미 결혼했고요. 이 사람은 제 아내예요.”유시아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는데, 자기를 바라보며 웃고 있는 그를 보고서 따라서 웃었다.“맞아요. 이 사람이 제 남편이에요.”매점 직원은 멍하니 있다가 바로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베스트 쇼핑 가이드다운 실력을 드러냈다.“어머, 어쩐지 너무 어울리신다 했어요...”직원의 칭찬에 두 사람은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났다.이윽고 매점 직원은 분위기를 파악하며 유리 구두에 대해 더욱 디테일한 설명을 첨부하기 시작했다.“이 제품의 새끼 양가죽으로 만들어졌으므로 착용감이 엄청 좋으실 거예요. 하루 종일 신고 걸으셔도 전혀 문제가 없다는 말이죠. 게다가 우리 디자이너 선생님이 즉흥으로 만들어내신 작품이라 절대 똑같은 제품을 시중에서 보실 수 없을 거예요.”한 켤레일 뿐만 아니라 사이
한서준은 눈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내가 뭐?”“한서준 씨는 당당해요?”유시아는 바로 질문을 질문으로 돌려주었다.“임씨 가문에 접근한 그 의도를 다른 사람들이 모를 것 같아요? 할아버지, 재욱 씨 그리고 나까지 똑똑히 알고 있어요. 청아 씨만이 한서준 씨를 사랑해서 자신을 속이고 있는 거라고요. 그렇게 쭉 모르는 척을 하며 모든 걸 감당하고 있었던 거라고요. 한서준 씨 역시 청아 씨를 이용한 게 아닌가요?”마지막 한 마디에 한서준은 침묵하고 말았다.그렇다. 임청아에게 접근한 이유는 유시아가 ‘스파이’로 움직여 주지 않겠다고 거절했기에 어리석어 보이는 임씨 가문 천금을 노리게 된 것이다.하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것은 결국 변하게 되어 있다.임청아 대한 마음은 모략에서 시작했으나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 마음이 점점 사랑으로 끝을 맺게 된 것이다.늘 밝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띠고 다가왔던 임청아가 어두운 자신의 삶을 밝게 비춰주는 것만 같았다.따라서 한서준은 임청아와 평생을 함께하고 싶다는 마음이 차츰 생기게 된 것이다.임태훈이 반대한다고 하더라도 꼭 자기 곁으로 데리고 오고 싶었다.“청아 씨 지금 몸도 마음도 상처투성이에요.”“만약 청아 씨 행복하게 해 줄 수 없다면 신중하게 생각하고 결정하는 게 좋을 거예요.” 말을 마치고 유시아는 차 문을 밀고 차에서 내려 병원 밖으로 걸어갔다.택시에 오른 유시아는 긴 망설임 끝에 끝내는 더 스케치 화실 주소를 운전 기사에게 알렸다.차는 화실 맞은 편에 세워졌고 유시아는 화실 바로 맞은편에 있는 커피숍으로 들어가 창가 자리에 앉았다.화실 안의 상황을 바로 체크할 수 있고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아도 되는 최적의 위치라고 할 수 있다.한참 지나고 나서야 수많은 경호원들이 임태훈을 사이에 두고 화실에서 걸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임태훈은 벤틀리에 올라 강한 기운을 남기고 자리를 떠나버렸다.유시아는 그제야 한시름을 놓고 들고 있던 커피잔을 내려놓고는 바로 화실로 향해 달려갔다.화실 안과 밖은 겉은
전화를 마치고 유시아는 혼자 밖에 없는 휴게실을 보고서 깊은 번뇌에 잠겼다.남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임태훈처럼 막무가내로 어처구니가 없는 노인이 있다는 게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임태훈이 끔찍이 여기는 임청아를 유시아가 계단에서 밀어버린 것도 아닌데, 왜 애꿎은 자기 화실을 닫으려고 하는지 알 수 없었다.집안 내부에 문제가 생기면 일단 스스로 반성하는 법부터 배워야 하는데, 그게 무엇이든 일단 남한테서 문제를 찾고 있으니, 권력을 믿고 사람을 업신여기는 것이 분명했다.유시아는 생각하면 할수록 머리가 복잡해졌고 불안함도 점점 커졌다.지금 운영하고 있는 더 스케치 화실도 용재휘가 먼저 시작한 것인데, 그와 더불어 학생들까지 모두 함께 넘겨주었는데, 만약 이대로 화실을 망쳐버린다면 용재휘에게 너무 미안할 것 같았다.임재욱과 임태훈이 어느 정도로 얘기했는지 알 수 없었지만 화실이 그들 싸움의 희생물이 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임재욱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묻고 싶었으나 감히 그럴 용기가 없어 일단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떨리는 심장을 부여잡은 채로.그렇게 한참이나 심장을 조이고 있었지만, 걸려 오는 전화는 없었다.유시아는 일이 어느 정도 망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학생 채팅방에 오늘 갑자기 일이 있다며 수업을 뒤로 미룬다고 알렸다.언제 다시 수업을 시작할지는 소식을 기다리라며 덧붙이기까지 했다.톡을 보내고서 유시아는 더 이상 핸드폰을 보지 않고 바로 병원 밖으로 나갔다.그러나 병원 대문을 나오자마자 한서준이 정면에서 오고 있었다.“유시아.”유시아는 고개를 들었고 그를 보게 되는 순간 정신이 아찔해 났다.직감이 알려주건대, 절대 좋은 일이 없다는 것이다.화실의 생존 여부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그의 심기까지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한서준은 쉽사리 유시아를 놓아 주지 않았고 손을 내밀어 유시아의 손목을 꼭 잡았다.“물어볼 일이 있어.”말하면서 근처에 있는 지프차를 가리켰다.“차에 타서 얘기 하자.”“그쪽이랑 할 말
유시아는 그 말을 이어받지 않고 집사의 바람대로 타이르기 시작했다.“몸이 아직 많이 허약해요. 먹고 싶지 않아도 억지로라도 좀 먹어야 하거든요. 일이 어찌 됐든 일단 건강부터 챙겨야 해요.”임청아 그 말을 듣고서 쓴웃음을 지었다.“건강 회복되면 할아버지한테 잡혀가서 집에 감금되는 것밖에 더 있겠어요?”“그렇게 생각하지 말아요.”유시아는 눈살을 찌푸리며 덧붙였다.“어찌 됐든 할아버지 마음은 한결같을 거예요. 청아 씨를 아끼고 사랑하는 거요. 서로 대화가 필요한 거 같아요. 서로 터놓고 얘기하고 나면 오해가 풀리고 마음도 풀리면서 모든 게 원점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예요.”임청아의 입가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저도 그렇게 생각했었어요. 아이 낳고 나면 할아버지도 서준이도 원한을 내려놓고 행복만 할 수 있다고요.”“근데 이렇게 몸도 아끼지 않고 점점 더 막무가내로 나가면 두 사람 사이의 원한은 점점 더 짙어질 거예요.”유시아는 말하면서 도우미 손에서 보신탕을 가져와 천천히 불며 임청아의 입가로 가져갔다.임청아는 생각 밖으로 무척이나 순순하게 유시아의 말을 따랐고 그녀의 말에 이치가 있는 것 같아 조용히 보신탕을 받아 마셨다.도우미와 집사는 두 사람이 티키타카 서로 말을 주고받는 것을 보고 서서히 마음이 놓였다.임청아가 뭐라도 먹기 시작하여 자기도 모르게 한시름을 놓으며 자리까지 비켜주려고 했다.두 사람이 마음 편히 말할 수 없을까 봐 눈치껏 일어서려는 것이다.“작은 사모님, 아가씨와 천천히 얘기하고 계세요. 밖에 나가 있을 테니 필요한 거 있으시면 언제든지 부르시고요.”“네, 가보세요.”도우미 일행이 나오고 나서야 유시아는 본론으로 들어갔다.“한서준 씨는 알고 있어요?”임청아는 고개를 저으며 쓴웃음을 지었다.“그런다고 숨겨질 일도 아니잖아요.”요즘 임태훈뿐만 아니라 한서준도 눈을 부라리고 임청아를 찾고 있었다.두 사람의 시선을 피하고자 아파트도 호텔도 들어갈 수 없었고 버려진 강아지처럼 유시아 화실에 몸을 숨기고 지낸 것
임청아 이름 석 자가 임재욱의 입에서 나오자, 유시아는 순간 청천벽력을 맞는 것만 같았다.심지어 지금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한참 지나고 나서야 겨우 떨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물었다.“청아 씨가 왜 병원에 있는 거죠?”임청아는 임신한 것을 알고 매사에 조심하며 걸음 하나도 천천히 옮겼었다.게다가 해외에 있는 친구와 연락하여 해외로 떠날 준비까지 마쳤다고 했었다.그런데 관건이 되는 순간에 계단에서 굴러떨어졌다고?“할아버지를 너무 쉽게 생각한 거 아니야?”임재욱은 말하면서 차갑게 웃었다.“네 화실에 청아 숨겨 놓았잖아. 할아버지께서 그걸 과연 모르고 있었을 것 같아? 오늘 화실로 청아 데리러 갔었는데, 가지 않겠다고 청아가 하도 우기는 바람에 억지로 묶어서라도 데리고 가겠다며 서로 실랑이를 벌이다가 계단에서 굴러떨어진 거야.”그렇다면 아이를 유산했을지도 모른다.임태훈의 습관에 따라 생각해 본다면 이 화살은 결국 유시아에게로 돌아오게 되어 있다.임재욱이 그렇게 경고하였건만 유시아는 마음이 약한 사람이었다.약해지는 마음에 언젠가는 구렁이에 빠지게 될 날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날이 바로 오늘 일 줄은 몰랐다. 임재욱은 한숨을 내쉬며 꾸짖고 싶은 마음을 겨우 억눌렀다.“병원 주소 보내줄 테니 얼른 가 봐.”말을 마치고 임재욱은 전화를 끊어버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메시지 한 통이 도착했고 운전 기사에게 새로운 목적지를 알려주었다.같은 시각, 병원 안에서.임청아는 이미 수술을 마쳤고 일반 병실로 옮겨져 있었다.이미 가문의 집사와 간호인이 옆에 있었고 병실 문 앞에는 임태훈이 보낸 경호원도 있었다.다만 경호원이 경계해야 할 상대는 유시아가 아니라 한서준이다.따라서 유시아는 별다른 막힘없이 바로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병상에 누워 있는 임청아는 얼굴에 핏기 하나 없었고 초점을 잃은 두 눈으로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불과 하룻밤 사이에 모든 활력을 잃어버린 모습이었다.집사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아주 공손하게 유시아에
조금 전까지 허겁지겁 밥을 먹고 있던 임재욱은 멈칫거리고 말았다.이윽고 고개를 천천히 들어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유시아를 바라보며 물었다.“별거하자는 뜻이야?”“그렇게 생각해도 좋아요.”유시아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머리가 아픈 듯 이리저리 만지작거렸다.“지금 이러한 상황에서 이러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나한테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그 시간으로 시연이한테 집중해도 되잖아요. 나도 마침 어머님 곁에 좀 있어드리고... 서로에게 지금 이게 최우선인 것 같아요.”임재욱은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서 낙담한 모습으로 말했다.“그래. 네가 좋다고 하면 그게 좋은 거겠지. 그렇게 하자.”말을 마치고 그는 계속 밥을 먹었다.유시아는 그런 그를 바라보고서 아련하게 웃고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위층으로 올라갔다.이튿날 아침, 유시아는 임재욱이 출근하고 나서야 침대에서 일어났다.일상복 몇 벌과 일상용품을 챙겨 작은 트렁크 안에 놓고 바로 이채련한테 가려고 했다.허씨 아주머니는 트렁크를 들고 내려오는 유시아의 모습에 살짝 당황한 모습이었다.“사모님, 어디 가시는 거예요? 설마... 가출하려는 건 아니죠?”유시아는 허씨 아주머니를 향해 웃었다.“아니에요. 친척분이 좀 위독하신데 제가 옆에서 좀 챙겨드리고 싶어서 가는 거예요. 얼마 걸리지 않을 거고 곧 돌아올 수 있을 거예요.”말을 마치고 트렁크를 들고서 집을 나섰다.이채련이 지내고 있는 병실이 VIP 병실로 널찍한 객실까지 갖춰져 있다.유시아는 간호사에게 접이식 침대와 이불을 요구했고 간단히 정리하고 나니 잘 자리가 아늑하게 마련되었다.이채련은 더 이상 침대에서 내려올 수 없어 하루 24시간을 침대 위에서 보내고 있다.얼굴도 하도 여위어 본연의 모습을 점점 잃어가고 있었다.그전에도 유시아는 이채련에게 이곳에서 며칠 동안 함께 지내고 싶다는 의사를 밝힌 적이 있지만 이채련은 행여나 자기로 인해 두 사람 사이에 흠이 생기게 될까 봐 동의하지 않았었다.지금 이 자리까지 오게 된 것만으로도 갖은 풍
임재욱은 핸들을 꼭 움켜쥐고서 앞만 바라보았으나 두 눈에는 고통과 망연함이 가득했다.“시연이 해외에 있을 때, 몹쓸 짓을 당했어. 한번이 아니라 여러 번이나. 그래서 우울증에 걸리게 된 거야.”유시아는 두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볼륨까지 높아졌다.“어머, 어떡해요!”평소에 신시연에 대해 좋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건 아니지만 그 소식을 듣게 되는 순간 심장이 덜컹 내려앉기는 했다.여자에게 있어서 그런 몹쓸 짓을 당한다는 건 치명적인 타격과 치욕이 아닐 수가 없다.게다가 부모님의 일까지 더해지니 조금 전 식당에서 봤던 신시연의 모습이 이해되었다.임재욱은 말하면서 후회와 자책하는 빛을 드러냈다.“그렇게 가고 싶지 않다는 시연이를 내가 억지로 보낸 거야.”그때는 모든 걸 너무 쉽게 생각했었다.낯선 곳으로 가서 마음을 가다듬고 학업에만 집중하면 자연스레 모든 걸 잊고 새로운 삶을 그려나갈 수 있으리라 믿었다.하지만 임재욱이 잊고 있었던 부분이 하나 있는데, 그건 바로 신시연이 이제 갓 20살을 넘은 꽃다운 여자아이라는 것이다.해외에는 불안정 요소도 많고 미처 생각지 못하는 위험도 많다.게다가 젊은 나이라 자칫 잘못하면 그릇된 길로 들어서기도 아주 위험하고 말이다.신시연 곁에 사람을 함께 보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하여 24시간 동안 찰싹 달라붙어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유시아와 결혼하고 나서 신혼에 푹 빠져 있는 동안 신시연에게 더 많은 관심을 주지 않았기에 이러한 일이 일어난 게 아닌지 죄책감이 들기도 했다.지금 임재욱은 신서현에게 미안할 뿐이다. 하나뿐인 동생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으니.하지만 그가 말한 본의와 달리 듣고 있는 유시아는 또 다른 뜻으로 받아들이게 되어 있다.유시아의 기억으로는 신시연이 해외로 보내진 이유는 이러하다.그때 신시연은 정운시 대학교 교내 사이트에 유시아를 먹칠하는 게시글을 올리면서 유시아로 하여금 학업을 이어갈 수도 수업을 들을 수도 없게 악한 상황을 만들었었다.마침 그 일을 소현우가 알게 되면서 유시아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