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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박연준은 거듭 확인하고 나서야 손화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바로 미간을 찌푸렸다. 자신은 못 알아봐도 손화영이 자기 옆을 그냥 지나칠 줄은 몰랐다. 한눈에 알아봤을 텐데 손화영은 못 본 척 무시해 버렸다.

“손화영!”

그는 소리치듯 불렀다.

“날 못 본 척하는 거야?”

손화영은 이미 그를 지나쳤고 박연준의 외침에 비로소 발걸음을 멈췄다.

고개를 돌린 그녀의 시선이 휠체어에 앉은 임청아의 얼굴로 향했다. 그녀와 제법 닮아 있었다. 특히 눈썹 위쪽에 있는 작은 점이 눈에 들어왔다.

이번에는 임청아가 입고 있는 드레스로 시선을 옮겼다.

눈가엔 조롱 섞인 기색이 스쳐 지나갔고 가슴에는 짙은 아픔이 밀려왔다.

박연준은 그녀에게 똑같은 치마를 선물했었다...

그가 왜 자신의 옷차림을 그토록 싫어했는지 비로소 이해했다. 그렇게 입으면 임청아 같지 않으니까.

“날 만나기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요.”

손화영은 시선을 들어 박연준을 바라보았다.

“원래 남자들은 아내와 내연녀가 만나는 걸 좋아하지 않잖아요?”

“손화영 씨, 오해에요...”

휠체어에 앉은 임청아는 여린 순백의 꽃처럼 가녀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 쪽한테 한 말 아니에요.”

손화영은 임청아의 말을 단호하게 끊고 덤덤한 눈빛으로 박연준을 바라보았다.

“집에 안 갔나 보네요.”

박연준은 손화영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았다.

그녀가 변했는데 어디가 변했는지 알 수 없었다.

더 이상 예전처럼 조심스러운 모습은 보이지 않고 오히려 가시가 돋쳐 있었다.

그 가시가 소나기처럼 박연준의 가슴에 박히며 불쾌하게 만들었다.

박연준은 어제부터 줄곧 손화영의 기분이 풀리지 않았고, 어쩌면 어젯밤 임청아의 전화를 받고 말도 없이 급하게 떠난 것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항상 그랬던 것처럼 그녀에게 아무것도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아내로서 자기를 너무 과대평가하는 게 아닌가.

“손화영, 난 지금 너 떼쓰는 거 받아줄 시간 없으니까 마음 좀 추슬러.”

박연준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혼자 진정해.”

손화영은 다소 조롱 섞인 눈빛으로 박연준을 보며 붉은 입술을 비스듬히 올렸다.

“박연준 씨가 그렇게 바쁘다면 더 방해하지 않을게요.”

그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 나갔다.

자리에 남은 박연준은 속으로 짜증이 밀려왔다. 무언가 손에 잡히지 않고 휙 사라진 기분이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박연준은 휴대폰을 들여다보면서 몇 분간 망설이다가 손화영에게 돈을 송금하고 메시지를 보냈다.

[가서 쇼핑하면서 기분 풀어. 손화영, 내 인내심의 한계는 여기까지야.]

그는 여자들이 쇼핑을 좋아하기에 이 정도 일은 돈을 받고 쇼핑하면 마음이 풀릴 것 같았다.

임청아는 고개를 들어 박연준의 손을 살며시 잡으려 했다.

“연준 씨, 혹시 나 때문에 아내가 오해한 거야? 내가 설명할게...”

박연준은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손을 뺐다.

“임청아, 난 아내가 있고 너도 남편이 있어. 자중해.”

임청아는 얼굴을 붉히며 손을 거두었다.

“그런 뜻이 아니었어.”

“분명히 네 오빠 때문에 널 챙겨주는 거라고 했어. 모르겠으면 다시 한번 말해줄게.”

택시 안에서 손화영은 갑자기 들어온 돈과 박연준이 보낸 문자를 보았다.

그녀는 몇 번을 봤지만 돈을 받지도 않았고 메시지에 답장도 하지 않았다.

...

어둠이 깃들고 고급스러운 검은색 차 한 대가 클라우드 칸타빌 저택으로 들어왔다.

차가 주차장에 멈추자 긴 다리 한 쌍이 차에서 내렸고 박연준은 손화영의 작은 기분이 다 풀렸을 거라고 생각하며 기분이 꽤 좋아 보였다.

아마 쇼핑하고 물건 좀 사면 또다시 온 세상에서 온통 그밖에 모르는 아내로 돌아와 그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가 좋아하는 요리로 한 상 가득 차렸을지도 모른다.

두 달 넘도록 그녀가 한 음식을 먹지 못해 조금은 그리웠다.

그녀의 몸이 그의 몸을 정복한 것처럼 그녀의 요리가 그의 입맛을 길들였다.

박연준은 기분 좋은 마음으로 문을 열고 들어섰지만 손화영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차가운 거실만 보였고 기대했던 음식 냄새도 집안에서 풍기지 않았다.

“그 사람 쇼핑갔다가 안 왔습니까?”

박연준은 옆에서 초조한 표정을 짓고 있는 윤미숙을 바라보았다.

윤미숙의 그런 얼굴이 반듯하고 그의 눈썹을 일그러지게 했다.

“무슨 일이죠?”

“사모님 어젯밤에 짐 싸서 나가시면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했어요.”

윤미숙이 조심스럽게 말했고 그녀의 말이 입 밖으로 나오자마자 박연준의 잘생긴 얼굴이 싸늘하게 얼어붙는 것 같았다.

“뭐라고요?”

“어젯밤 대표님께서 나가신 지 얼마 안 돼서 사모님께서 캐리어를 끌고 나오셨어요. 방에 뭔가 두고 가신 것 같더라고요.”

박연준은 굳어진 얼굴로 긴 다리를 움직여 위층으로 향했다.

원래의 기분 좋은 분위기는 사라지고 짙은 눈동자가 다소 분노로 물들었다.

방 안에서 박연준은 이혼서류와 보석이 여자 측 개인 재산이라 가져간다는 쪽지를 보고는 얼굴이 차갑게 굳어버렸다.

박연준은 기가 막혀 웃으면서 테이블 위로 이혼 서류를 던져버렸다.

이젠 떼를 쓰는 것도 모자라 이혼 놀이를 하겠다고?

언제 어디서 이런 수작을 배워온 거지?

박연준은 심호흡하고 감정을 눅잦힌 뒤 손화영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몇 분 후, 박연준은 세 번이나 끊긴 전화를 바라보며 얼굴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

인내심이 바닥난 그는 굳은 얼굴로 전화기를 옆으로 던져버렸다.

그는 담배를 거의 피우지 않았지만 지금 이 순간 발코니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별빛이 환하게 빛나는 어두운 밤에 얼마나 지났을까, 박연준은 안방으로 들어가 샤워하고 아래층으로 내려가 입맛에 맞지 않는 음식을 조금 먹은 후 다시 서재로 들어가 업무에 매진했다.

밤새 손화영은 돌아오지 않았다.

박연준은 사흘 내내 기다리면서 손화영에게 연락하지 않았고 손화영의 연락을 받지도 못했다.

그의 인생에서 그녀란 존재가 홀연히 사라진 것 같았다.

사흘 안에 그녀가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지만 돌아오지 않는 것도 모자라 소식 한 통 없었다.

셋째 날, 박연준은 도우미가 30분 동안 찾아도 원하는 넥타이를 찾지 못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젠장, 넥타이 하나 못 찾다니!”

“이, 이건 사모님이 항상 챙기던 거라 지금 말씀하시는 건 정말 못 찾겠어요.”

도우미는 벌벌 떨었다.

“꺼져!”

박연준은 전례 없이 난폭하게 굴며 아래층으로 내려가 아침밥을 두 입 먹었지만 입맛에 맞지 않아 도저히 삼킬 수가 없었다.

그가 회사에 들어서자 회사 사람들은 그에게서 풍기는 위압적인 기운에 감히 쳐다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진태원과 육진영 비서실장도 겁을 먹었다.

“손화영한테 아직 연락 안 왔어?”

박연준은 문득 진태원을 돌아보았다.

“아니요.”

“꽤 버티네!”

진태원은 박연준을 바라보며 눈을 번뜩였다.

“박 대표님, 사모님께 손 좀 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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