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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박연준은 서재에 들어간 지 20분 만에 저택을 떠났다.

손화영은 자동차 엔진 소리를 듣고도 놀라지 않았다. 예전 같았으면 창밖으로 슬프게 바라봤을 텐데 이번에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시선을 내린 채 계속해서 짐을 챙겼다.

그녀의 캐리어는 크지 않았지만 모든 물건을 담기에 충분했다.

손화영은 옷장에 있는 옷들을 바라보았다. 전부 그의 아내가 입어야 할 옷이었다. 박연준과 결혼한 이후 그녀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박연준의 취향대로 차려입었고 대부분 옷도 박연준이 직접 고른 것이었다.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가끔 그녀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옷을 입으면 박연준은 항상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녀는 더 이상 자신이 선호하는 스타일 대신 그의 아내로서 입어야 할 옷만 입었다.

손화영은 그 옷들은 하나도 챙기지 않고 보석 캐비닛을 열어 결혼반지만 남겨둔 채 남은 보석은 전부 가져갔다.

멀쩡한 보석을 왜 안 가져가겠나.

어차피 이혼해도 박연준이 그녀에게 재산을 분할해줄 일은 없겠지만 보석은 여자 측 개인 재산이었다.

전에는 멍청하게 철저히 구분하며 그에게 돈을 요구한 적이 없었다.

마치 그의 돈을 쓰는 것이 그녀에 대한 사랑을 더럽히기라도 하듯.

그래서 그녀는 가진 돈이 없었다. 그의 아내로 있는 동안 먹고 살 걱정이 없었다.

그녀의 머릿속엔 온통 결혼생활을 잘 이어 나갈 생각뿐이었고 그를 위해 가정부가 해야 할 모든 일을 자처하면서도 그걸 행복으로 여겼다.

시선은 언제나 그에게 향하며 그를 위해 그날 입을 옷을 준비하는 걸로도 하루 종일 행복하게 보낼 수 있었다.

줄곧 돈이 필요 없다고 생각했는데 아버지한테 일이 생기고 동생이 아프면서 그가 주치의를 돌려보내고 병원비 납부 고지서가 한 장씩 날아오면서 그제야 벼락을 맞은 듯 돈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다!

돈만 있으면 아버지가 누명 쓴 증거를 찾을 수 있었고 아버지를 위해 최고의 변호사를 고용할 수 있으며 동생의 병도 치료할 수 있었다.

손화영은 짐 정리를 마친 뒤 이혼서류와 쪽지 한 장을 남기고 미련 없이 떠났다.

그녀가 떠날 때 윤미숙은 안타깝고 걱정하는 기색이 가득했다.

“사모님, 이 늦은 시간에 어디 가세요? 그냥 대표님 올 때까지 기다리시는 게 어때요? 손씨 집안 재산도 압류됐다는데, 사모님...”

“알아요, 전 돌아갈 집이 없죠.”

손화영의 표정은 덤덤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아주머니. 밖에 호텔도 있고 친구 집에 가도 되니까.”

“친구가 어디 있어요...”

윤미숙은 얼굴에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손화영은 그저 피식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친구가 없었다. 5년 동안 저택에 감금이라도 된 듯 갇혀 지냈고 가깝게 지냈던 친구들도 하나둘 멀어져갔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녀에게는 언제나 곁에 있어 줄 친구가 있었다.

심나정을 생각하니 손화영의 마음도 조금은 따뜻해졌다.

결국 윤미숙은 손화영을 붙잡지 못했고 손화영은 짐을 들고 떠났다. 심나정은 밖에서 촬영 중이라 찾아갈 수가 없었기에 곧장 병원으로 향했다.

그녀는 캐리어를 숨긴 후 손우영의 곁을 지켰다.

“누나, 나한테 뭐 숨기는 거 있어?”

손우영은 보석처럼 검고도 반짝이는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았고 그 눈빛에는 약간의 걱정이 담겨 있었다.

“우영아, 너한테는 숨길 수 없다는 거 아니까 네가 침착하게 들어주면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얘기할게.”

손화영은 손우영에게 아무것도 숨길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하얀 얼굴에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손우영이 충격받을까 걱정스러웠지만 그래도 숨길 수 없다는 걸 알았다.

괜한 생각하지 않게 차라리 간단히 설명해 주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나름대로 애송이 한의사라 손화영은 손우영이 이제 안정된 상황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말해.”

손우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 다 이해할 수 있어.”

“나 이혼할 거야.”

손화영은 손우영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네가 계속 이혼하라고 했잖아. 나 이혼하기로 결심했어. 우영아, 누나 응원해 줄 거지?”

“누나, 누나가 원하는 건 뭐든지 응원할게. 박연준은 애초에 누나한테 부족한 놈이야.”

손우영의 눈빛이 어두웠다.

누나가 좋아하는 사람만 아니었어도 그는 매형이란 사람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한 번도 좋은 매형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누나가 박연준과 결혼한 이후 그는 내내 가슴이 아팠다.

5년 동안 누나는 너무 많은 고생을 했다. 자기 꿈을 포기하고 그 남자를 위해 온갖 일을 도맡아 하며 뒷바라지했는데 그놈은 누나를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그래... 한 가지 좋은 소식이 있어. 민 교수님께서 연락이 오셔서 조만간 귀국하는데 자기 제자가 되지 않겠냐고 물으시더라.”

손화영은 살짝 웃으며 말했다.

“그러려고. 우영아, 나도 이제 꿈을 이루고 싶어.”

“누나가 그렇게 생각한다니 난 너무 기뻐. 난 영원히 누나를 응원해!”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고 손화영이 꿈을 계속 이어가겠다는 말과 함께 이혼을 결심한 것에 손우영은 무척 기뻐했다.

두 남매가 한참 이야기를 나누던 중 손우영이 갑자기 다시 말을 꺼냈다.

“누나, 의사 선생님께 심장이식은 잠시 미루자고 했어. 집안 형편으론 그 정도 돈이 안 되고 나도 좀 더 버틸 수 있을 것 같아. 그리고 아빠 쪽도 뭔가 방법을 생각해 봐야겠어. 아빠는 누명을 쓴 거야.”

“알아, 우영아. 그런 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내가 알아서 할게. 돈 걱정도 안 해도 돼. 나 돈 있어. 누나 능력 있는 거 너도 알잖아. 이제 정신 차렸으니까 돈 버는 건 나한테 어려운 일도 아니야.”

손화영은 손우영이 그저 편히 쉬길 바랐고 나머지는 누나인 자신이 짊어질 생각이었다.

정신을 차린 그녀의 결연한 눈빛이 손우영을 설득했고 그녀는 옆에 있는 작은 간이 소파에 누워 밤새 잠을 청했다.

침대도 아니고 아주 작은 공간이었지만 동생이 곁에 있어서인지 아니면 꿈을 이루겠다는 결심 때문인지 간만에 푹 잘 수 있었다.

여전히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녀는 이겨낼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다음 날, 손화영은 일어나 손우영을 위해 아침 식사를 준비했다.

그리고 병원에서 나와 근처 전당포를 찾아 귀중한 보석을 모두 전당포에 맡기고 돈을 돌려받았다.

다시 병원으로 돌아가 병원비를 낸 후 그녀는 음식을 챙겨 단승철을 찾아갔다.

자기는 일 때문에 바쁠 테니 동생을 돌봐달라고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단승철은 그녀가 병원비를 냈다는 사실에 놀라워했다.

“취직했어요?”

“네, 이제부터 좀 바빠질 것 같네요.”

손화영은 단승철을 향해 웃었다.

“우영이는 선생님께서 신경 써 주세요.”

“네, 제가 잘 챙길게요.”

고개를 끄덕이며 손화영을 바라본 단승철은 뭔가 달라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눈빛만 아니라 옷차림까지 달라졌다. 예전에는 인형처럼 예쁘게 꾸며도 영혼이 없었는데 지금은 맑은 눈빛에 범상치 않은 아우라를 뿜어내며 수수한 차림이지만 빛이 나는 듯한 아름다움이 더 돋보였다.

마치 자아를 찾은 것 같았다.

달라진 손화영의 모습에 박연준도 자기 아내를 못 알아볼 뻔했다.

병원 앞에서 손화영이 함께 있는 박연준과 임청아와 마주친 순간 박연준은 손화영이 자기 아내라는 걸 알아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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