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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이틀 후, 손화영은 두 달 가까이 만나지 못했던 박연준을 드디어 만났다.

그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고고하고 멋있었다. 잘생긴 외모는 연예계에 내놔도 손꼽히는 미남일 것이다.

잘 재단된 수트가 그의 완벽한 몸매를 감싸고 있었다.

그가 문에 들어섰을 때 손화영은 소파 앞에 조용히 앉아 있었고 텔레비전에서는 박연준에 대한 온갖 가십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박연준에 관한 소식은 언제나 연예인 스캔들보다 더 많았다.

TV 속 뉴스를 훑어보던 박연준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이걸 왜 보는 거야? 나 배고픈데, 오늘 저녁은 뭐 먹어?”

손화영은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난 이미 밥 먹었어요. 먹고 싶으면 아주머니한테 해달라고 해요.”

“면이나 한 그릇 삶아줘.”

박연준은 잘생긴 눈썹을 다시 한번 찡그리며 참을성 있게 말했다.

“아주머니, 이 사람 면 먹고 싶다는데 한 그릇 만들어 주세요.”

손화영은 무심하게 외치더니 박연준을 힐끗 쳐다보았다.

“다 먹고 얘기 좀 해요.”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돌아서서 위층으로 올라갔다.

박연준은 눈에 띄게 당황한 모습이었다. 그는 손화영의 불쾌함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지만 그녀가 이런 모습을 보이는 건 처음이었다.

예전에는 아무리 속상하거나 화가 나 있어도 그가 돌아오자마자 먹고 싶은 음식이 있다고 한마디만 하면 서둘러 달려가 음식을 만들어주곤 했다.

가끔 쉬지 않고 쫑알거리다가 그가 짜증을 내면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이렇게 차분한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 평온함이 왠지 모르게 그의 마음을 불쾌하게 했다.

굳이 그의 아내가 되겠다고 고집을 부린 것도 아직 따지지 않았는데 자기가 먼저 등을 돌린다고?

손화영을 사랑한 적은 없었지만 5년 동안 아내로 곁에 두면서 그녀의 몸은 만족스러웠다. 잠자리도 잘 맞았기에 그녀를 계속 옆에 두면서 자신도 그녀에게 섭섭지 않게 해준다고 생각했다.

윤미숙은 재빨리 국수를 만들었다.

늘 솜씨가 좋은 윤미숙인데 오늘은 어쩐 일인지 분명히 배가 고팠던 박연준은 몇 입 먹고 나서 입맛이 사라졌다.

예전처럼 기대에 찬 눈으로 자신이 먹는 걸 바라보는 사람이 없어서인지 음식도 맛이 없었다.

“대표님, 왜 그러세요, 입맛에 안 맞아요?”

윤미숙이 중얼거렸다.

“사모님이 하시던 대로 만들었는데...”

분명 손화영이 만든 건 그릇까지 다 비우더니 오늘은 왜 몇 입 먹고 나서 수저를 내려놓는 걸까.

“배부르니까 치워요.”

박연준은 넥타이를 잡아당기며 위층으로 올라갔다.

방 안에선 손화영이 창가에 앉아 휴대폰으로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다.

나른하고 따뜻한 조명이 그녀의 몸에 닿아 부드럽고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박연준은 방문에 기대어 한참을 바라보다가 목울대가 꿈틀거렸다. 시선이 하얗고 가는 그녀의 다리에서 한 손에 잡힐 정도로 가늘고 핑크빛을 띠는 발목으로 향했다.

그녀는 아름다웠다.

두 달 가까이 그녀를 안지 않았기에 보는 것만으로도 충동이 일어났다. 그는 그녀를 사랑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몸은 필사적으로 그녀를 원하고 있었다.

다른 여자는 건드린 적도 없지만 그녀 외에 그 어떤 여자에게도 흥미가 생기지 않는다는 걸 잘 알았다.

박연준은 손화영에게 다가갔다.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지자 고개를 들어 그의 짙은 시선을 마주한 손화영은 심장이 툭툭 뛰었다.

5년을 함께한 사이였기에 그가 지금 자신에게 뭘 하려는지 자연스럽게 알 수 있었다.

그가 몸을 살짝 숙여 그녀를 안아서 침대에 눕히려 했지만 손화영은 살며시 이를 피했다.

그녀는 태연하게 박연준을 흘깃 쳐다보며 그의 눈에 번쩍이는 불만과 당황스러움을 모른척했다.

침대에서든 일상에서든 언제나 잘 보이기 급급했던 그녀는 거절한 적이 없었는데 이번만큼은 명확하게 거절 의사를 드러냈다.

“손화영.”

그녀의 이름을 읊조리는 박연준은 누가 봐도 언짢아 보였다.

“할 말 있어요.”

손화영은 시선을 내리며 작은 탁자 위에 놓인 서류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린 박연준의 두 눈에 작은 불꽃이 피어올랐다.

테이블 위에 놓인 서류에는 [이혼합의서]라는 글이 뚜렷하게 적혀 있었다.

눈에 띄게 멈칫한 박연준의 두 눈에 조금 전 열기는 차갑게 식어 있었다.

“손화영, 이게 무슨 짓이야? 그 좋은 사모님 노릇도 이젠 지쳤어? 지금이 어느 때인데 나랑 이혼하겠다는 거야, 손씨 집안 사정이 어떤지 몰라? 내가 그동안 너무 잘해줬나?”

손화영은 박연준을 지극히 담담하게 바라보며 고개를 살짝 들어 가볍게 콧방귀를 뀌었다.

“당신 말이 다 맞아요. 이런 사모님 노릇 지겨워요. 당신도 나랑 이혼하길 바랐잖아요? 이제 내가 이혼하고 임청아랑 함께할 수 있게 해주겠다고요.”

박연준이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손화영, 지금 나한테 심술부리는 거야, 뉴스에 나온 것들 때문에? 이젠 너도 억지 부리는 거야?”

손화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박연준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다소 우스운 기분이 들었다.

그녀의 두 눈에 슬픔이 담기며 인터넷에서 본 글이 떠올랐다.

사랑하지 않으면 그 사람이 죽으려는 것조차 장난으로 보인다고.

그녀는 진심으로 실망했는데 그는 그저 어리광을 피우는 거라고 생각한다.

임청아에 대해 몇 마디 했다고 동생의 병원비를 끊고 몇 번이고 아빠와 오빠를 살려달라고 애원해도 진 비서를 통해 자기 일은 자기가 알아서 하라는 말을 전했다.

5년 동안 기꺼이 그의 곁을 지키면서 그의 돈을 한 푼도 사용한 적이 없었다.

그녀는 항상 그를 향한 자신의 감정이 순수하기에 속물 같은 모습을 보여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손씨 집안에 일이 생겼는데도 부부로 지낸 정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 그를 보니 정신을 차릴 때가 된 듯하다.

그가 도와주지 않는다면 스스로 방법을 생각할 수밖에.

동생과 아버지 모두 그녀가 직접 구할 거다.

박연준은 무언가를 감지한 듯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손화영, 나 요즘 일 때문에 바쁘니까 이혼합의서는 치워. 너랑 놀아줄 시간 없어. 네 아버지 문제는 말했다시피 시간이 걸려. 그렇게 빨리 사람을 빼내 올 방법이 없어.”

손화영은 박연준을 바라보았다.

“박연준 씨, 그렇게 위선적으로 굴 필요 없어요. 돕기 싫으면 도와주지 마요.”

시간이 필요하긴, 이런 일은 빨리 해결하고 미룰수록 가능성이 줄어든다.

진작 진태원이 그가 일부러 미루는 거라며 말을 흘린 적이 있었다.

“손화영! 난 싫다고 한 적 없어!”

박연준은 짜증 섞인 표정을 지었다.

“당신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죠.”

손화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오늘 밤 나갈 거니까 이혼서류 확인해 보고 문제없으면 사인해요.”

“손화영, 언제까지 억지 부릴 거야?”

박연준은 눈을 가늘게 뜨고 최대한 참으려 애썼다.

“난 서재로 가서 일 좀 할 테니까 그동안 진정하고 있어.”

문으로 걸어가던 박연준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원하는 게 있으면 똑바로 말해도 돼, 사랑 말고 다. 결혼할 때 이미 난 널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어. 그건 네가 누구보다 잘 알잖아. 그것 때문에 내 앞에서 어리광 부리지 마.”

“아뇨, 난 당신 사랑 원하지 않아요. 나도 당신 안 사랑하고.”

박연준은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다가 서서히 얼굴에 살짝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그녀는 여전히 변함없었다. 그녀는 항상 자신이 떼를 쓰고 어리광을 부리면 자신이 그녀를 사랑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떼를 써도 금방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고 그가 참아줄 수 있는 선에서만 심술을 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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